#27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세이아드는 무작정 손을 뻗었다. 손끝에 무언가 걸렸다. 자신의 체온과는 확연히 다른 온기가 느껴졌다. 뭘 붙든지도 모른 채 세이아드는 온기를 그의 쪽으로 당겼다. 사람의 것을 뛰어넘는 우악스러운 힘에 끌려온 누군가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상처를 좀 볼 테니, 그대로 있어요.”
상대방의 말투는 썩 부드럽지 않았으나 목소리 자체가 따스했다. 아스테르는 아니었다. 그의 것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내리쬐는 해처럼 밝고 또렷한 아스테르의 음성과 달리, 조금 더 잔잔하면서도 평온했다.
누군들 어떤가.
주인이 누가 됐든 당장 세이아드에게는 이 온기가 필요했다. 크게 들리다 작아지길 반복하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그는 체온을 어떻게든 붙들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을 잔뜩 세워 제가 가둔 누군가를 옥죄었다. 큭, 하는 소리가 상대방으로부터 샜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짧은 신음을 삼키며 상대는 세이아드가 그를 품고 있게끔 했다.
온기가 한참 품을 맴돌자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그의 등을 만지던 손이 아래로 내려와, 베트리아의 덩굴에 꿰뚫린 허벅지 부근을 배회하고 있었다. 차마 제대로 만지지 못하는 조심스러운 동작과 달리 상대가 잇새로 짧은 욕지거리 비슷한 걸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온화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세이아드는 뻑뻑한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말라붙은 눈새가 따끔하게 뜨이며 흐릿한 시야가 보였다. 머리맡으로 은은한 주홍빛이 퍼지고 있었다. 희미한 열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누군가 불을 피운 것 같았다.
느릿하게 눈동자를 내려 이번에는 제가 품은 무언갈 보았다. 환상인 것 같았던 온기는 실재하는 객체였다. 둥근 정수리로부터 시선을 쭉 내리자 부드러운 머리칼이 보였다. 곱슬기가 살짝 도는 검은 머리는 흰 이마를 흐트러지게 덮었고, 그 아래로 도드라진 눈썹 뼈가 있었다. 곱게 올라간 속눈썹이 어디서 보기 힘들게끔 기다랬다.
레사스랑 닮았군.
단연코 이곳에 있을 확률이 가장 희박한 대상임을 알면서도, 저자가 레사스를 빼닮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레사스의 닮은꼴은 무척이나 긴장한 채 세이아드의 상처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손가락이 딱딱한 허벅지 근육에 닿았다가 흠칫해서 떨어지는 걸 몇 분 정도 두고 보던 세이아드가 입술을 열었다.
“내버려 두십시오.”
갈라진 음성은 스스로 듣기에도 형편없었다. 괴물처럼 느껴지는 낮고 굵은 음색에 놀란 건지, 상대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동그랗게 뜬 보라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주홍 불빛에 물든 눈가가 꼭 운 것처럼 불긋했다.
“…레사스 전하.”
악마의 농간이 아니라면 눈앞에 있는 건 레사스가 맞았다. 정답을 맞혔는지 세이아드의 부름에 레사스가 흠칫하며 허벅지로부터 손을 뗐다. 그와 동시에 세이아드 또한 레사스를 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황급히 시선을 피한 레사스가 뒤로 물러섰다.
“…어째서 여기 계신 겁니까.”
세이아드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어 물었다. 브레드히트 공작이나, 혹은 기사를 대동한 아스테르라면 몰라도 레사스가 여기 있을 이유가 하등 없었다.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물음에 입술을 짓씹었다. 피가 빠져나가게끔 하얗게 물든 입술이 저러다 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가 말했다.
“대공이 며칠간 사라졌는지 아나요.”
다시금 감기려는 눈을 느릿하게 뜨며 세이아드는 날짜를 셈했다. 기억나는 건 그날 밤이 전부였다.
“어림잡아 하루 정도 같군요.”
“아뇨, 사흘쨉니다.”
레사스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복잡하게 들렸다. 분노로 떨리는 것 같기도 했고 놀란 사람 같기도 했다.
“대공을 찾기 위해 브레드히트 공작이 수색대를 꾸렸습니다. 기사 여럿이 조를 이루어 낮 시간 동안 대공을 찾고 있어요.”
낯선 이야기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구태여 찾는 이가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죽었어야 할 공작이 살아 나간 값을 치르려는 건가, 싶으면서도….
그러나 깊게 생각하기엔 머리가 너무 아팠다. 정신이 들자마자 다시금 들이닥치는 두통이 세이아드를 방해했다. 미간을 찡그리며 이를 악물자 레사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진 못한 세이아드는 거친 숨을 크게 골랐다. 감각이 돌아오니 전신의 통증이 지나치게 잘 느껴지는 데다가, 의식을 따라 침잠했던 파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조를 이루어 왔다더니, 왜 전하 혼자 계시는지 모르겠군요.”
레사스가 절 찾은 건 희소식이나, 지금 제 처지에 그와 함께 있는 건 위험했다. 애꿎은 사람을 다치게 할 가능성이 컸다. 내부를 진탕 치던 파장은 이내 무엇이든 부수고 싶다는 욕구로 차차 변질했다.
“의견 충돌이 좀 있었을 뿐입니다.”
세이아드의 지적에 레사스가 일부러 가라앉은 말투로 대꾸했다. 무슨 충돌인진 모르겠으나 왕자가 또 고집을 피운 모양이었다.
“찾아 주신 건… 감사하나, 이만 가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혼자 나갈 테니 물러가 주십시오.”
반쯤 의지를 벗어나 부들거리는 손가락을 힘주어 참았다. 세이아드의 축객령에 레사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잔뜩 일그러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레사스가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까지 정신을 잃고 있던 사람이 할 말입니까, 그게? 불조차 피우지 않고 이곳에 박혀 있었던 주제에 어떻게 혼자 숲을 나선다는 건가요?”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세이아드에게는 실랑이할 여유가 없었다. 의식이 아직 있으니 다행히 폭주는 아니었으나, 힘을 제어하기 힘든 티테르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전하.”
작은 난로불을 따라 일렁이던 바닥의 그림자가 삐죽, 삐죽 솟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세이아드의 앞에 있는 어린 청년을 어떻게든 찢어 놓고 싶다는 듯이.
“당장 나가셔야겠습니다.”
“이대로 혼자 있다간 얼어 죽습니다.”
“나가라고, 분명….”
세이아드의 의지를 벗어난 그림자가 주인의 말을 끊고 바닥으로부터 휙 솟구쳤다. 레사스를 덮칠 듯 달려드는 그림자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세이아드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레사스를 밀쳤다.
“말했습니다!”
레사스가 뒤로 밀려나는 동시에 발작하듯 튀어오른 그림자의 뾰족한 끝이 벽을 콱 찌르고 사라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세이아드는 짐승 같은 얼굴로 그에게 소리쳤다.
“가이드가 아닌 당신은 이곳에 있어 봤자 쓸모없다는 걸, 그걸 모르겠습니까?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다면 나가십시오. 당장!”
무례한 말을 지껄이며 세이아드는 역정을 냈다. 레사스는 방금 전의 위협에 놀란 것보다, 세이아드의 말을 들으며 하얀 얼굴을 굳혔다. 보라색 눈동자가 엉망진창으로 흔들렸다. 꼭 그를 쳐 냈던 과거와 같았다.
버림받은 개처럼 우두커니 서서 절 보는 얼굴이 하염없이 처량했다. 불긋한 눈가는 울 듯했으며, 화조차 내지 않고 가만있는 그 꼴이 잊고 있던 죄책감을 불러왔다.
직설적이다 못해 상처가 될 말임은 알았다만, 진즉 제게 질린 레사스가 저런 눈을 할 줄은 몰랐다. 그런 세이아드의 동요를 따라 그림자가 사납게 일렁였다.
“…내가 가이드가 될 거라고 했죠.”
레사스는 세이아드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말했다. 이를 악문 모습으로 그가 요구했다.
“그게 지금일지도 몰라요.”
“아닙니다.”
지금은 아니다. 시온 실드라스를 만나기 전까지 레사스는 가이드가 될 계기를 부여받지 못한다.
“왜죠?”
차마 그 이유까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이었다면 진즉에 됐을 겁니다.”
“조만간일 거라면서요. 내게 거짓말을 한 건가요? 또 나를 농락하려고?”
“레사스.”
억누른 파장이 당장 튀어나올 듯 난리치는 걸 세이아드는 의지로 참았다. 어릴 적처럼 이름을 부르자, 레사스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흰 뺨이 당혹감에 불긋해지는 걸 세이아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가.”
예를 차릴 정신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둘만 있던 과거처럼, 어린 날의 그에게 말하듯 고했다.
“아니면 죽게 될….”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쿨럭이는 기침을 토하는 동시에 정신이 뚝, 끊기는 기분이 들었다. 파장의 통제권을 놓친 그 짧은 틈을 타, 그림자가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사람의 형체에서 솟아난 그것은 이내 니르아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레사스를 덮었다.
말 그대로 찰나였다. 세이아드의 정신이 곧장 돌아오고, 그림자가 레사스를 덮치며, 그럼에도 피하지 않고 서 있던 레사스가 그에게 속삭인 것도.
모두 찰나에 생긴 일이었다.
“내가 평생 두려워했던 건 죽음이 아니에요.”
아이 같은 목소리가 허공에 울리며 그림자가 레사스의 등을 할퀴었다. 새빨간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우두커니 서있던 레사스가 휘청이며 몸을 숙였고, 세이아드는 욕설과 함께 그에게 달려갔다.
“레사스!”
간신히 주도권을 거머쥔 세이아드에 의해, 그림자는 다시금 얌전히 바닥으로 돌아갔다. 앞서 있던 일이 거짓인 양 그것은 난롯불을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기겁한 세이아드는 거친 손길로 레사스를 붙들었다. 그는 신음조차 내지 않고 세이아드를 빤히 보고 있었다. 고통에 의해 창백해진 흰 얼굴로, 레사스는 이해할 수 없는 물음을 던졌다.
“나의 티테르가 될 건가요, 세이아드?”
이 상황에서 나올 법한 말이 아니었다.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세이아드는 일그러진 눈으로 레사스의 등에 난 상처를 보았다. 깊이 파인 세 줄기의 상흔은 살이 드러날 정도로 처참한 형태였다. 이 상태로는….
“충분히 기다렸으니, 지금 답해요.”
그러나 레사스는 상처도 목숨도 안중에 없는 사람처럼 물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태였다. 역정을 내며 그를 한심하다 욕하고 싶었으나, 세이아드는 들끓는 온갖 격정을 억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래.”
그러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티테르는 어차피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다. 그저 파장이 잘 맞는 가이드와 협력을 할 뿐, 그들은 왕국에 소속된 존재였다. 그러니 이 의미 없는 약속이 저 고집을 꺾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거짓을 말할 수 있었다.
다만 세이아드를 미치게끔 한 것은, 그 말을 들은 동시에 일순 밝아진 레사스의 얼굴이었다. 오랜 세월 본 적 없던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주변인들에게 보여 주는 것처럼 환한 미소는 당연히 없었으나, 아주 안도한 것 같이 창백했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그리고 이상한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이아드의 날뛰던 파장이, 마치 가이드를 발견한 것처럼 일순 어딘가로 이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