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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26화 (26/147)

#26

그와 함께 세이아드는 그녀의 팽창하는 파장을 느꼈다. 내부에서부터 뭉친 힘이 외부로 폭발하고는, 그렇게 터져 나온 파장이 광폭하게 사방으로 쏟아져 나왔다. 보이지 않는 기운이 날카롭게 세이아드를 찔렀다. 익숙한 불안전함이었다. 이건, 폭주하던 당시의 세이아드가 느꼈던 것과 동일했다.

설마…!

괴물의 전신을 칭칭 감고 있던 덩굴들 몇 개가 갑자기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꿈틀거리며 허공에서 흔들리던 덩굴은 이내 창백한 안색의 브레드히트를 보더니, 매서운 속도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브레드히트, 뒤를!”

등을 향해 쏘아지는 살기를 느꼈는지 브레드히트는 다행히 빠르게 반응했다. 기겁한 표정을 지은 그가 상체를 휙 숙였다. 피한 것이 괘씸한지 다시금 되돌아와 그를 옭아매려 드는 덩굴의 모습에, 브레드히트가 당황한 얼굴로 베트리아에게 외쳤다.

“지금 무슨 짓인가, 베트리아? 실수할 때가 아니야!”

공격을 피한 브레드히트를 목표로 삼은 것인지, 베트리아는 괴물을 감싸고 있던 덩굴을 모두 풀어 그에게로 쏘아 보냈다. 브레드히트의 발밑에서도 나무뿌리가 솟구쳐 그의 발목을 잡았다. 빌어먹을! 욕지거리와 함께 다급히 칼로 덩굴을 잘라내는 브레드히트에게 베트리아가 달려들었다.

상급 니르아를 상대하던 두 공작이 죽은 건, 설마 베트리아의 폭주 때문이었나?

두 명의 티테르가 고작 상급 니르아 하나에 죽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겼는데, 만약 브레드히트가 홀로 둘을 상대해야 했다면 말이 되었다. 예상대로 베트리아의 구속에서 풀려난 괴물이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내분을 직감한 것인지 괴물로부터 그르르, 하는 소리가 울렸다. 어디에서 새어 나오는지도 모를 스산한 신음은 공포를 불러오는 것과 달리 기쁨의 표식처럼 들렸다.

“공작!”

세이아드는 결정을 내렸다.

“베트리아의 시선을 조금만 더 끌어 주시오!”

이곳은 세이아드 혼자 맡는다. 그게 최소한의 피해를 만들고 두 공작을 살리는 길이다. 베트리아를 빠르게 제압해 숲 밖으로 데려가면 어떻게든 살려 볼 만했다. 그녀의 힘은 숲에서부터 비롯되니, 어떻게든 기절시켜 숲이 아닌 곳에 가둔다면 폭주를 가라앉히고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위험성이 크다. 폭주한 티테르를 살리는 건 죽이는 것보다 위험 부담이 컸다. 그러니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있다. 죽여서 제압할 수도 있지만….

갑작스러운 폭주가 수상하다. 그 원인을 알기 위해선 베트리아를 살려 두는 것이 옳았다. 그녀의 폭주가 세이아드의 것처럼 감당하기 어렵지 않다면.

죽는 것보다는 몸에 구멍 한두 개 뚫리는 쪽이 낫겠지.

세이아드의 외침을 들은 브레드히트는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그의 말을 따랐다.

“이보게, 셀피니! 성질머리가 더러운 건 알았지만 이제 보니 대공보다 더하구만!”

브레드히트가 달려드는 베트리아를 유인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외침을 알아들은 것인진 몰라도, 그녀가 이성을 잃고 브레드히트를 따라갔다. 그 사이 구속에서부터 완벽히 자유로워진 니르아는 우뚝 일어서서 형태를 거의 회복하고 있었다.

단기간에 무리해서 쓴 힘의 대가가 서서히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세이아드는 숨을 고르며, 붉게 물든 눈으로 베트리아의 궤적을 쫓았다. 덩굴을 밟고 도약하던 그녀가 능력을 다시 쓰기 위해 잠시 멈춘 그 찰나, 세이아드는 그녀의 뒤로 소리 없이 접근했다.

그림자에 숨어 뒤를 따르던 그는 베트리아가 브레드히트를 겨냥하는 순간 검을 들었다.

날카로운 장검이 베트리아의 왼쪽 어깨에 푹, 박혔다. 습격을 받자마자 기민하게 반응한 그녀가 희번득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함께 뾰족한 덩굴이 세이아드의 팔뚝을 꿰뚫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숨에 검을 뽑아 다시금 반대쪽 어깨를 찔렀다.

“아아악!”

이지를 상실한 베트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덩굴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고통스러워하는 주인을 따라 세이아드에게 달려든 덩굴들이 그의 허벅지를 콰직 파고들었다. 화끈거리는 고통이 하체에서 퍼졌지만, 세이아드는 다시금 고통을 무시하며 피 묻은 검으로 베트리아의 뒤통수를 거세게 내리쳤다.

퍽!

머리 깨지는 소리가 울리더니 베트리아의 눈이 뒤집혔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두개골이 박살 날수도 있는 힘이었지만, 티테르에게는 그리 쉽게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서 있으려 비틀거리면서도 팔을 휘두르려 하다가, 양쪽 어깨가 꿰뚫린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움찔거리던 베트리아가 쿨럭이며 이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다급히 합류한 브레드히트가 바람으로 세이아드를 감싼 덩굴을 잘라 냈다.

“대공! 괜찮나?”

그 자신의 몸 곳곳에 뚫린 구멍은 아랑곳 않은 채 세이아드는 형형한 눈으로 브레드히트에게 지시했다.

“공작을 데리고 이 숲을 빠져나가, 정화를 받게 하십시오. 숲만 빠져나가면 베트리아는 힘을 쓸 수 없으니 가능할 겁니다. 니르아는 내가 혼자 처치하겠습니다.”

“하지만 자네 몸 상태가!”

“다 같이 남아 있다간 최소 하나는 죽습니다.”

브레드히트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다치지 않은 내가 저걸 상대하는 게 맞아. 자네가 베트리아를 데리고 나가게.”

“공작.”

세이아드는 의도를 담아, 중년의 공작을 서늘히 응시하며 말했다.

“그대와 나의 힘은 근본부터 다르다는 걸 잊었습니까. 니르아를 처치한 뒤 숲을 혼자 빠져나갈 수 있는 티테르는 오직 나뿐입니다.”

냉정한 말에 브레드히트가 입술을 짓씹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세이아드를 몇 초간 응시하던 그는, 니르아가 육중한 몸을 굴리기 시작하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빠른 상황 판단이야말로 티테르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었고, 경험이 풍부한 공작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베트리아를 수습하자마자 전하와 함께 대공을 찾으러 오겠네.”

세이아드는 답하지 않았다. 이러한 깊이까지 가이드를 대동하고 들어오는 것은, 가이드의 목숨마저 위협하는 행위였다. 레사스가 아닌 가이드는 여태껏 숲속 깊이 들어온 적이 없었다. 그것은 아스테르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브레드히트가 베트리아를 업는 동시에 니르아의 그림자가 그들 위로 다시금 드리웠다. 어지간한 대검만 한 길이를 지닌 날카로운 니르아의 손톱이 허공에 휘둘러졌다. 브레드히트는 몸을 뒤로 물리며 세이아드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뒤, 이를 악물고 등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세이아드는 그들을 향해 가려는 니르아의 발목을 그림자로 붙들었다. 육중한 몸을 뒤흔든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 까만 얼굴로 세이아드를 내려다보았다. 기괴한 꼴이었지만 세이아드에겐 수없이 보아 온 감흥 없는 광경이었다. 놀라는 대신 세이아드는 괴물이 등진 하늘을 살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공작이 숲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해가 지지 말아야 할 텐데.

그리 생각하며 세이아드는 괴물에게로 다가갔다. 베트리아의 피가 묻은 장검을 땅 위에 꽂은 뒤, 그는 붉게 물든 눈으로 니르아를 주시했다.

혼자 싸울 땐 검이 없는 쪽이 차라리 편했다.

***

전투가 끝났을 땐 달조차 보이지 않는 깊은 밤이 되어 있었다. 세이아드는 스스로의 피로 얼룩진 몸을 이끌고 숲을 걸었다. 어느 순간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개체수가 적은 만큼 상급 니르아는 없애는 데 시간이 상당히 걸렸다. 보통은 둘씩 짝을 지어 없애야만 후유증이 적었고, 그마저도 자주 겪는 일은 아니었다. 그걸 혼자 처리했으니 몸 상태가 좋진 않았다.

하아….

느릿하게 내쉰 한숨을 따라 허공에 흰 김이 서렸다. 어깨 위에 쌓인 눈이 제법 많았다. 세이아드는 얼어붙은 손으로 검을 꽉 쥔 채, 본능에 의존해 숲의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찾았다. 그러다 곧 한계에 다다랐다.

낮에 있던 어수선한 소란 때문인지 밤이 되자마자 출몰한 니르아의 수가 제법 많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이미 수십 마리를 죽인 터였다. 부상의 정도도 영 별로였지만 힘을 더 쓰다간 겨우 갈무리하고 있는 파장이 날뛸 것 같았다.

폭주할 가능성을 어떻게든 줄여 보고자 세이아드는 힘을 최소한으로 쓰자고 결정했다. 그러기 위해선 그림자를 이용하는 건 잠시 멈춰야 한다. 몸이 조금이라도 진정될 때까지 시간을 두는 쪽이 맞았다.

세이아드는 니르아의 기척이 제일 적은 곳으로 신중히 움직였다. 최대한 기척을 없애고 니르아를 피해 걷다 보니, 생전 처음 보는 오두막을 발견했다. 낡고 오래된 티가 역력한 작은 오두막은 지어진 지 적어도 몇십 년은 되어 보였다.

둥근 돌로 벽을 쌓은 오두막은 문과 뼈대만이 나무였는데, 그 덕에 긴 시간을 버틴 것 같았다. 그래도 제 영지의 숲인데 이런 것이 존재했다는 걸 이제야 처음 알게 된 것이 기이했다. 수상쩍고 의심스러워하면서도, 세이아드는 당장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는 걸 인정했다. 이상하게도 이 근처엔 니르아가 보이지 않았다.

오두막에 들어서자마자 나무로 만든 작은 침상과 먼지가 앉은 헤진 담요 따위가 안에 보였다. 내부에 위협적인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후, 세이아드는 지친 몸을 벽난로 근처에 기댔다. 긴장을 조금 풀자마자 눈이 감겼다. 전신에 오한이 끼치고 잔경련이 일었다.

…추워.

긴 전투를 끝마치고 나면 세이아드는 언제나 영혼까지 얼어붙는 추위를 느꼈다. 북부에서 나고 자란 주제에, 추위라고는 이골이 날 정도로 익숙한 주제에, 힘을 쓴 대가로 느끼는 고통이 한기라니 우스웠다. 절대 있어선 안 될 약함을 보이는 것 같아 세이아드는 한번도 그걸 티낸 적이 없었다.

기껏 아스테르가 없애 놓은 두통은 아까 전부터 찾아와 세이아드를 괴롭히고 있었다. 전신이 찢어질 듯 욱신거리고 채울 수 없는 추위가 속에서부터 밀려왔다. 그러나 그런 부작용보다도 그를 고통스레 하는 건 사방의 고요함이었다. 취약해진 순간을 틈타 죽음을 선고받던 그날이 떠올랐다.

아무도 그의 곁에 없었다. 세이아드는 죽음 끝에서 누구의 애도도 받지 못한 채 홀로, 저주받으며 죽어 갔다. 누구도 그를 찾지 않았다. 사랑하고 아끼던 여동생도, 한때는 그를 존중하던 동료들도, 성의 가신들도… 모두 없었다. 세이아드 스스로가 버렸기 때문에.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이 가슴에 뚫린 것처럼, 텅 비어 버린 감각이 세이아드를 끔찍한 두려움에 빠트렸다. 헤어 나오기 어려운 고독이 추위와 함께 세이아드를 내리눌렀다. 깊은 심연에 잠겨 그는 끊임없이 떨어졌다. 한없이 추락하는 듯한 기분에 세이아드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무엇을 붙들고 싶은지도 모른 채 뻗은 손은 허공을 휘저었다.

아무것도 잡히는 걸 깨달은 손이 그렇게 체념하듯 떨어지려던 차.

“세이아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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