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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23화 (23/147)

#23

세실리아는 수많은 시체의 산 가운데에 서 있던 세이아드를 보았다. 흰 눈을 새빨갛게 물들이고도 남은 피가 강물처럼 사방에 흘러 땅을 적셨다. 그게 폭주라는 것은 둘 다 알지 못했으나, 세실리아는 그 장면을 묘사하며 겁에 질려 떨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그냥 나와 있자, 오빠. 가문은 상관없어. 내게 중요한 건 오빠야. ’

세실리아가 말을 꺼낸 시기는 세이아드가 한창 아스테르의 옆에 있기로 결심한 때였다. 성안에 세이아드가 변했다는 소문이 여기저기 돌고 있던 차이기도 했다.

이맘때의 그는 성을 몇 달씩 비우는 시기가 늘어났다. 세이아드에게 악시드 영지는 어머니를 배척하는 장소였다. 훌륭한 영주였던 어머니의 행실은 오직 그녀가 보인 마지막 행동에 덮여 사라졌고, 가신들 또한 그들을 스스로 죄인 취급하며 움츠러들었다.

그런 풍경을 보는 것 자체가 세이아드를 미치게끔 만들어, 그는 차라리 생각을 비울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했다. 가문의 사람들과 스스로의 영지를 미워하지 않고자 마음을 돌릴 곳을 찾았다. 아스테르를 따라 중앙에 머무는 것이 차라리 그를 평온하게 했다.

세실리아는 겨울을 맞이해 돌아온 세이아드를 붙들고 그날 간청했다. 그러나 세이아드는 세실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설령 그의 미래가 그렇게 끔찍하더라도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 같지가 않았다. 겨우내 그를 설득하던 세실리아는, 한 사건을 기점으로 성을 떠났다.

세실리아가 아끼던 시녀 하나가 말실수를 했다. 전대 대공이 원래부터 미친 기미를 보였다는 소문을 내고 다니는 것이 그의 귀에 들어왔다. 세이아드는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대신 부탁한 세실리아를 무시하고, 나가기만 해도 얼어붙는 밤중에 시녀를 지닌 것 없이 내쫓았다.

‘오빠는 변했어.’

세실리아는 그 말만을 남겼다. 그러고는 쪽지를 하나 남긴 후 그의 성을 떠났다. 숙부에게로 가겠다는 편지의 말마따나 그녀는 북쪽과 서쪽의 경계에 있는 숙부의 성에서 머물게 되었다. 세실리아의 옆에 그가 쫓아낸 것과 비슷하게 생긴 시녀가 한 명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걸 마지막으로, 세이아드는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가 죽던 해까지.

…그렇다면 세실리아는 또 다른 미래를 보았을까? 그가 되살아난 것에 대해 알고 있을까?

불현듯 올라온 의문에 세이아드는 미간을 문질렀다. 저와 얽히는 것이 세실리아에게도 불리하다는 걸 알아 결코 찾지 않았지만, 조만간 그녀를 방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일단은 레사스를 설득해 두는 것이 먼저였다. 세이아드는 무심한 시선으로 레사스의 기색을 살폈다. 그는 좀처럼 믿기 어려운지 딱딱하게 굳은 모습이었다.

“세실리아의 꿈에서 전하는 유례 없이 강한 힘을 지녔다더군요. 전하의 말대로 제게는 왕세자 전하가 있으나, 그분을 곁에 두고도 제가 폭주한다면….”

그의 말은 가정이었으나 실은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비로소 그 순간이 닥치고 나서야 세이아드는 그녀의 말을 체감했다.

“다른 방법도 써 보는 게 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다름 아닌 레아나 왕후의 자식이자 실드라스 가문을 옆에 둔 레사스에게, 세이아드가 폭주하리라는 미래를 알려주는 건 그의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건 도박이었다. 레사스가 그의 말을 무시할 확률도 컸다.

하지만 레사스는 그가 예상하지 못한 다른 걸 물었다.

“그대에게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가이드가 누구든 상관없다는 겁니까?”

그리 묻는 레사스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세이아드는 그가 제게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지 고민했다. 답은 곧 레사스로부터 나왔다.

“내내 당신을 돌봐 준 가이드를,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다고?”

세이아드는 아스테르를 떠올렸다.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그의 옆에서, 그가 원하는 것을 대신하며 지내던 시간도 떠올렸다.

아스테르는 분명 다정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가이드로서 세이아드를 수도 없이 치료하고 정화하며, 많은 감정을 공유했다고 여겼다. 그를 위해서 많은 걸 했다.

하지만 그는 세이아드의 폭주를 막기 위해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을 차라리 아스테르가 선사했더라면, 세이아드는 아스테르가 자신을 그의 티테르로서 끝까지 책임졌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대를 구할 이는 아무도 없다. 왕태자께서는 네 처분을 내게 넘겼다.’

처형 직전 레사스가 전한 그 말이, 세이아드가 마지막으로 들은 아스테르의 흔적이었다. 그 사실이 세이아드를 미련 없게 만들었다. 그리 쉽게 저버릴 존재였으니, 제 가치가 아스테르에게 그다지 의미 있다고는 볼 수 없었다.

“티테르는 그의 힘으로 괴물을 죽이고, 가이드는 그들을 다시 전장에 나가게끔 하는 존재입니다. 그 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가이드를 바꾸는 건 효율의 문제입니다.”

세이아드는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지극히 합리적인 내용이었는데, 레사스는 이상하리만치 거부감을 드러냈다.

“사람은 도구가 아닙니다.”

고지식한 발언. 레사스만이 할 수 있는 말.

“적어도 티테르와 가이드의 관계는 그렇습니다.”

“상성이 중요한 건 알지만, 서로를 믿고 아끼지 않는 한 상성 또한 무의미합니다. 가이드의 존재는 그저 정화를 위해서만이 아닌, 티테르가 나아갈 힘을 주는 동반자예요.”

“전하.”

세이아드는 이런 종류의 대화가 불편했다. 그의 말은 반박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으나, 동시에 마음을 어색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어릴 적의 세이아드라면 몰라도 지금의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이런 면을 원치 않았다.

“전하에게 있어 저는 끔찍한 죄인임을 알고 있으니, 이 순간 자체가 불쾌하시리라는 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다가올 미래의 재앙을 막고자 할 뿐입니다.”

레사스의 말대로 가이드와의 관계는 강제적으로 만들 순 없었다. 자발적인 의지 없이는 정화가 불가능했으므로, 그가 그럴 의사가 있어야만 했다.

“전하께서도 알다시피, 전대 대공의 폭주에도 훌륭한 기사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누구보다 사람을 아끼는 분 아니십니까?”

어머니의 일을 남의 사건처럼 읊으며 세이아드는 그를 설득하려 했다. 어차피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옆에 있으려는 게 아니었다.

“제가 바라는 건 전하의 티테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과 기름이 섞이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일 터. 저는 약간의 도움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레사스가 움직일 수밖에 없게끔 덫을 두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면 그 또한 견딜 만한 조건이 아닌가 싶었다.

“…그대가 누군가의 죽음을 신경 쓴다니 우습군요. 난… 모르겠습니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믿지도 않고.”

그의 말이 맞다. 사람은 정말 필요한 순간이 오지 않는 한은 바뀌지 않는다. 세이아드의 계기는 죽음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를 믿을 이는 세상에 저 자신 하나라,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설득할 저다운 발언을 덧붙였다.

“착각하신 것 같군요. 제가 신경 쓰는 죽음은 오직 제 목숨 외엔 없습니다.”

세이아드는 입매를 비틀었다. 차라리 이편이 레사스에게 믿음을 주리란 걸 알기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레사스가 지난 몇 년간 보아 온 것처럼, 무정하고 이기적으로 구는 쪽이 그 자신에게도 편했다.

“…역시나.”

내내 혼란스러워 보이던 레사스는 다시 차분함을 찾았다. 외려 안도하듯 중얼거린 그는 그러고도 한참을 고민했다. 세이아드는 사냥감을 앞둔 짐승같이, 긴 인내심을 발휘하여 레사스를 기다렸다. 음식이 차갑게 식고 나서야 레사스는 마음을 정했다. 결심이 선 눈이 세이아드와 마주쳤다.

“만약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솔리아스의 적법한 존재로 거듭난다면… 그대를 돕는 건 나의 의무입니다. 하지만.”

협상을 거는 건가. 세이아드는 의외라는 듯 레사스를 보았다. 그의 짐작대로 레사스는 조건을 하나 내걸었다.

“우리의 관계가 호의를 주고받을 평화를 전제하지 않으니, 제약을 하나 걸겠습니다.”

말해 보라는 듯 그를 보자 레사스는 제법 긴 시간을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의 가이드는 나 하나뿐이어야 합니다.”

…뭐?

절대로 그의 입에서 나오리라 여기지 않은 말에 세이아드의 냉정이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서늘한 회색 눈에 의문이 서렸다.

“내가 그대에게 그만큼 필요한 존재라면, 나 외의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겠죠. 그러니 나의 티테르가 되세요.”

“그건….”

파장이 맞는 가이드와 티테르는 구태여 다른 이가 필요 없다. 하지만 레사스는 어떤 티테르와도 상성이 좋은 이였다. 본인이 아직 그 사실을 몰라 저런 제안을 한다 해도, 그에게는 일단 시온 실드라스가 있는 데다가, 같이 있는 것조차 거북한 자신을 굳이 옆에 둔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전하에게 썩 좋은 방향은 아닐 것 같군요.”

“대공이 날 배려하던 이였습니까?”

반박할 말이 없었다. 당혹스러운 나머지 눈썹을 찡그리자, 레사스가 더는 협상할 여지가 없다는 듯 단호히 말했다.

“조건은 이뿐입니다.”

할 말을 마친 레사스가 입을 다물었다. 은근한 고집이 느껴지는 모습에 세이아드의 혼란이 더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세이아드 또한 시간을 가지고 파악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건넨 제안이 되려 생각할 거리로 돌아온 상황이 우스웠다. 혼란스러운 대화 때문에 잠시간 사라졌던 두통이 강하게 밀려들어, 세이아드는 미간을 꾹 눌렀다. 말이 없어진 세이아드를 따라 레사스도 다시금 침묵했다. 그들은 저녁이 지나는 내내 각자의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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