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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22화 (22/147)

#22

비위가 거슬렸나?

세이아드는 시선을 모른 척 물병을 집어 왔다. 미래라면 몰라도 아직은 사람이 죽는 곳에서 주둔하며 생활해 본 적 없을 테니, 레사스에겐 이 정도의 부상도 식사 자리에서 보기 역겨울 수 있었다. 구태여 제 상처를 남에게 보이는 것도 세이아드 역시 불편한 일이라,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팔을 갈무리했다. 단검으로 그은 팔목은 오른쪽이어서, 왼손잡이인 그에겐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왜 상처가 있는 겁니까.”

예기치 못한 질문이었다. 시선을 앞으로 주자 절 주시하는 보라색 눈과 마주쳤다.

“그대의 가이드가 진즉 치료해야 하는 상처일 텐데.”

질책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감정이 실린 것 같기도 했다. 낮게 잠긴 미성을 듣는데 두통이 묘하게 가라앉는 착각이 들었다. 그냥 건넨 말이라기엔 레사스가 자꾸만 팔을 보고 있어서 넘어가기가 그랬다.

“굳이 치료할 필요도 없는 상처입니다.”

세이아드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다른 식으로 답해야 했나, 하는 생각도 스쳤으나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아스테르와의 일은 타인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고.

“그 정도로 피가 나는 상처를, 치료할 필요가 없다고요.”

짙은 검은 눈썹이 모로 휘더니, 레사스의 입술이 가지런히 다물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진 알 수 없으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건 알겠다.

이것도 어릴 적과 똑같군.

성년이 되었음에도 어린 시절의 흔적이 그대로 간직된 모습을 보자니 기분이 묘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꾹 참는 듯하면서도 눈썹이 저렇게 휘곤 했었다. 참는 게 익숙한 아이였으니 저런 습관이 들 법도 했다.

“당신은 옛날부터 그랬죠. 말해야 할 건 절대 말해 주지 않아.”

세이아드는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동조할 수 없다는 듯 쳐다보자 레사스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하얀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서 있었다.

“몸을 돌보는 것도 티테르의 사명입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레사스의 말을 가만히 듣던 그가 물었다.

“듣고 있으면 꼭 저를 염려하시는 것 같군요, 전하.”

헛소리인 걸 알면서도 던져 본 말이었으나 레사스는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솔리아스의 성을 받았으니 티테르를 신경 쓰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아뇨, 비단 티테르가 아니더라도 상처는 치료해야 합니다.”

레사스가 저를 끔찍이 싫어함에도 가이드의 힘을 빌려 주리라 여겼던 건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레사스는 곤란한 사람을 무시하지 못했고, 다친 사람은 반드시 구했다. 그의 이같은 자비심은 큰 강점인 동시에 이용하기 쉬운 약점이기도 했다.

지나치게 물러.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세이아드는 그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레사스를 빤히 보던 그가 툭 내뱉었다.

“정 거슬린다면 전하께서 정화를 베풀어 주시면 되겠군요.”

정화라는 단어를 입에 담자마자 레사스의 얼굴이 굳었다. 살짝 누그러진 것 같기도 했던 그의 표정은, 크게 상처받은 사람처럼 다시금 냉랭해졌다. 입매를 살짝 비튼 레사스가 자조했다.

“이렇게 굴고자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겁니까? 새로운 방식으로 날 비웃으려고?”

레사스는 이 이상 화를 내는 대신, 비통한 표정으로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실망할 것도 남지 않은 이에게 다시금 실망한 것처럼.

그러나 이런 식으로 감정을 조금이나마 내비치는 것 자체가 아직까지는 말할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5년 뒤의 레사스는 세이아드가 무얼 하든 감흥조차 없었다. 그저 무표정을 고수하며 세이아드를 무시했을 뿐.

“굳이 모욕을 드리고자 그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지요.”

오해하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세이아드는 애매한 회유책이나 제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대신 단도직입적으로 나가기로 했다.

“전하께서는 가이드가 되실 겁니다. 그렇기에 드린 제안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사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부드러운 인상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만하죠, 대공. 그대의 모욕을 들어줄 기분이 아닙니다.”

레사스는 지쳐 보였다. 체념한 눈으로 시선을 내리깐 그는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을 잠시 헤아리던 세이아드는 아무에게도 한 적 없던 말을 꺼내기로 결정했다.

“세실리아가 미래를 봤었습니다.”

세실리아의 이름에 레사스가 멈칫했다. 세이아드는 지금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기억 속에 묻어두고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 없는 일처럼 느껴질 뿐, 실제로 먼 과거에 있던 일이었다.

“대공의 여동생은 이곳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말한들…!”

“전대 대공이 처형당했을 시기의 일입니다.”

어머니의 존재를 입 밖에 꺼내는 게 소름끼치도록 낯설었다. 그것은 레사스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입이 다물렸다. 당황한 보라색 눈을 보니 가슴 어딘가가 욱신거리고, 성가셨다. 레사스의 앞에서 어머니의 일과 얽힌 걸 티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탓이다. 시온 실드라스와 함께 있던 모습을 본 뒤부터 세이아드는 그와 제가 양립할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애당초 문제가 많았다. 레사스는 아스테르의 말마따나 레아나 왕비의 핏줄이었고, 희미한 실드라스의 피가 흐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끝내 운명의 인도처럼 시온을 가까이 뒀으니, 세이아드가 레사스의 옆에 있는 건 불가능했다.

“전하의 말씀대로 저는 당신을 증오하는 쪽이 맞습니다. 전하께서도 저를 곁에 둘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저는 왕비 폐하를 시해하려 한 반역자의 자식이 아닙니까.”

세이아드의 회색 눈에 서늘한 안광이 서렸다. 스스로 이런 말을 꺼내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많은 증오를 희석했다는 뜻이긴 했으나, 그럼에도 입에 담기 편한 내용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세이아드의 악몽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세이아드가 죽기 직전 깨달은 바였다. 그의 증오와 원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세상에 있었다. 무고한 생명을 지키고 그의 진정한 도리를 다하는 것이, 감정보다 앞서야 했다.

“듣는 것은 전하의 선택입니다.”

날을 세우고 반박하던 레사스의 모습은 천천히 자취를 감췄다. 그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게끔 조용했다. 세이아드를 쳐다보는 눈이 실내의 불빛 때문인지 몰라도 이상하게 불긋했다. 크게 잘못한 아이 같은 표정이 짧게 그의 얼굴을 스쳤다가 사라졌다.

처연한 빛이 그의 눈동자에 어렸다. 긴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였고, 분홍 입술 아래로 작은 숨이 흘렀다.

“…들어 보겠습니다.”

작게 샌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다고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러한 레사스를 보고 있으려니 속이 울렁였다. 잠시 잦아든 헛구역질이 다시 올라왔나, 그리 치부하며 세이아드는 입을 열었다.

“그 해에 세실리아가 본 미래가 있습니다.”

세이아드의 동생인 세실리아는, 대공의 핏줄임에도 다른 티테르와 달리 특수한 능력을 타고났다. 세실리아는 먼 미래를 보았다. 그러나 그 기적적인 예지는 니르아를 죽이는 데에는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았기에, 신비로움과는 별개로 그다지 쓸모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마저도 세실리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정말 동떨어진 시기의 미래를 보았다.

세실리아가 보아 온 장면은 진위를 확인하기엔 까마득한 시간을 흘려야만 했기에 그녀의 능력은 진실 여부 자체도 모호했다. 그러나 지금의 세이아드는, 돌이켜본 그 과거의 세실리아가 정말로 미래를 봤음을 확신했다.

“세실리아는 전하가 여러 명의 티테르를 거느리고 니르아를 죽이는 장면을 꿈으로 보았습니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그 아이가 묘사한 전하의 모습이 지금으로부터 머지 않은 시점으로 보입니다.”

그 시기는 세이아드가 직접 겪어 아는 것이지만, 분명 세실리아는 과거 이런 말을 했었다. 세이아드가 레사스를 멀리하며 아스테르의 옆에 서려고 할 때, 세이아드를 설득하기 위해 꺼낸 말 중 하나였다.

“어떤 원리와 이치로 각성이 늦어졌는진 모르겠지만, 때가 머지 않았습니다.”

세이아드의 말을 듣는 내내 레사스는 침묵했다. 깊은 고민에 잠긴 레사스는 한참을 침묵하다 이내 물었다.

“그 시기가 가까워졌기에 나에게 이렇게 구는 건가요?”

“그렇게 볼 수 있겠군요.”

“하지만 그대에게는 형님이 있습니다. 파장이 맞는 가이드가 있는 티테르가 굳이 다른 가이드를 필요로 할 이유를 잘 모르겠군요.”

물러터진 건 맞는데,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지도 않는다.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짚어 낸 허점을 어떤 식으로 무마할지 고민했다. 하루아침에 어떤 일도 없이 아스테르를 저버리겠다는 말을 믿진 않을 터.

이왕 세실리아의 이야기를 꺼냈으니, 세이아드는 굳이 회상하고 싶지 않았던 세실리아와의 일을 한 번 더 입에 담기로 했다.

“세실리아가 본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레사스를 적으로는 돌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던 세실리아는, 그녀의 청을 거절한 세이아드에게 미래를 하나 더 알려 주었다.

“저는 머잖아 폭주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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