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왕자가 왜 여기에…?
그러한 생각은 레사스 또한 마찬가지인지, 모녀의 안위를 확인하려던 레사스가 세이아드를 발견하고 흠칫 표정을 굳혔다.
“가, 가, 감사합니다….”
여인은 그들을 번갈아 보며 간신히 감사를 표했다. 아이를 꽉 껴안은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여인을 살핀 레사스는 세이아드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천천히 여인에게 다가간 그가 손을 내밀었다.
“다친 데는 없나요?”
환한 달빛 아래로 비친 레사스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한 여인이 순간 놀랐는지 얼굴을 휙 내렸다. 내내 울고 있던 아이 또한 안전하다는 걸 느꼈는진 몰라도, 레사스를 말똥히 올려다보며 조용해졌다.
“네, 저희는, 괜찮아요. 다만 제 남편이 마을 사람들을 돕겠다고 갔는데…,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여인이 상황을 설명했다. 불안해하는 얼굴을 보며 레사스는 자상하게 말했다.
“제 기사들이 다른 이들을 돕고 있으니 곧 진정될 겁니다. 오는 길에 확인했을 때 크게 다친 이는 없었습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희가….”
말없이 대화를 듣고 있던 세이아드는 상황 파악을 끝냈다. 무슨 영문으로 레사스와 그의 기사들이 여기 있는진 모르겠지만, 당장 큰 피해는 없는 것 같았다.
볼일이 끝난 그는 등을 돌렸다. 자리를 피하는 쪽이 저들이 안정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걸 알아서였다. 레사스의 시선이 세이아드에게 짧게 닿았지만 그걸 보진 못했다.
그렇게 말없이 마을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아이가 그를 불렀다.
“고맙습니다, 기사님.”
자신을 향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세이아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지나치려는 그를 향해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털망토 끝자락이 작은 손에 잡혔다.
“기사님은 안 다쳤어요?”
그제야 세이아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아예 내려야만 보이는 조그만 여자아이가 그를 말똥거리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물 자국이 뺨에 짙게 남아 있으면서도, 언제 울었냐는 듯 아이가 헤헤, 웃었다.
“쥬디! 여, 영주님 옷을 그렇게 함부로 잡으면 안 돼…!”
여인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능력을 쓰는 걸 봤으니 세이아드가 누구인질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겁먹은 목소리로 뒤늦게 달려온 여인은 비틀거리며 아이를 당겨 품었다. 그러고는 세이아드에게 대신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미천한 제 아이가 어려서 모르는 게 많아요. 부디 용서해 주세요!”
무릎까지 꿇을 기세인 여인에게 세이아드는 차갑게 말했다.
“번거롭게 하지말고 물러가거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여인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능적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레사스를 향해 뒷걸음질 친 그녀는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아이는 그 와중에도 바둥거리며 투정을 부렸다.
“기사님이 구해 줬잖아요. 우리 집에 초대하면 안 돼?”
“쥬디, 영주님은 바쁘셔. 그럴 시간이 없단다.”
세이아드는 아이가 잡았던 망토를 내려다보았다. 손자국이 남은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던 그는 절 주시하는 레사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름다운 보라색 눈이 의문으로 찡그려졌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다가, 세이아드는 아침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당장 그가 다가가는 것에 몸서리치던 모습을 생각하니 입이 다물렸다.
“전하! 확인은 다 끝났습니다. 늑대는 모두 처리했…!”
예기치 못한 차에 마을 안쪽에서 기사 두 명이 뛰어나왔다. 세이아드의 방향으로 온 그들은 씩씩하게 레사스에게 외치다가, 이윽고 길의 중앙에 있는 세이아드를 발견하고 흠칫 굳었다.
“어…?”
신나게 외치던 기사 하나가 얼떨떨한 눈으로 멍청한 소리를 냈다. 바인이라고 했었나? 레사스와 함께 곰을 상대하던 놈이었을 것이다.
“그, 저, 대공… 이 어째서 여기에….”
“야, 이 멍청한 놈! 인사부터 해야지!”
바인을 뒤따라온 갈색 머리의 기사가 황급히 그의 뒤통수를 누르며 같이 고개 숙였다.
“대공 각하께 인사드립니다. 저희는 레사스 전하의 호위 기사인….”
“호위 기사가 왜 자리를 비운 거지? 너희의 임무는 그게 아니지 않나?”
세이아드의 질책에 바인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갈색 머리의 기사는 그보다 눈치가 빠른지, 얼른 그를 당기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그때 레사스가 나섰다.
“내 명령입니다. 늑대를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고, 나 역시 늑대로부터 스스로를 건사할 정도는 됩니다. 나의 기사들을 질책하지 마십시오.”
날카롭게 대꾸하는 레사스를 본 기사들은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흘끗 그를 살폈다. 긴장된 분위기 속 침묵이 깔렸다. 갑작스레 듣게 된 전하니, 대공이니, 하는 말에 여인 또한 크게 놀랐는지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고개만을 푹 숙이고 있었다. 정적을 깬 건 상황 정리를 끝내고 온 마을의 대표였다.
“기사님들, 여기 계셨습니까? 덕분에 늑대를 모두 무찔렀습니다. 부서진 건물들이 있긴 하지만….”
황급히 달려오던 중년 남성은 이윽고 세이아드를 보자마자 우뚝 멈춰 섰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얼른 상체를 숙이며 그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인사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희미하지만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었다. 매년 영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보고를 올리러 오던 이들 중 하나였다. 의미 없는 수많은 이들 중 하나임에도 어째서 저자를 기억하고 있는지를 자문한 세이아드는, 이내 강렬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영혼에 새겨질 정도로 처절했으나 일부러 지워 낸 순간 중 하나였다.
‘당신 같은 악마가 어떻게 영주일 수 있나! 땅을 지키지 않는 주인이 어떻게 영주지? 네 놈이 영주가 아니었다면 이 마을 사람들은 다 살아있었을 텐데!’
매일같이 성에 찾아와 늑대가 자주 보인다며, 부디 기사들을 한 명이라도 보내주십사 요청하던 중년 남자. 시기가 좋지 않았던가, 그럴 것이다. 혹한기가 한창이었고 세이아드는 연이은 이변이 생긴 숲을 시찰하기 위해 모든 인력을 동원해 겨울을 지새우고 있었다.
마을에서 성까지는 보통 사람의 걸음으론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마을 사람들의 힘으로는 저것들을 잡을 수 없다고 간청하던 그를 캘러안은 늘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그게 어지간히 마음이 쓰였던 것인지 캘러안이 실례를 무릅쓰고 남자의 청을 들어주는 게 어떻겠냐며 몇 번 간청했다.
사건은 끝내 얼마 안 가서 터졌다. 해가 막 져 버린 오후, 어두워진 하늘을 보자마자 늑대 무리가 마을을 덮쳤다. 유달리 덩치가 크고 공격적이던 맹수를 막다 마을의 장정 대다수가 먼저 죽었고, 그들의 시체를 밟은 늑대들은 반항하지 못하는 이들을 죄다 죽였다.
남자는 운이 좋지 못해 살아남았다. 그날도 성에 들러 전해지지 않을 호소를 하다 막 돌아온 탓에, 늑대가 덮치고 간 시간에 마을을 비웠던 것이다.
마을은 괴멸했고 남자는 미쳐서 숲에 향하던 세이아드의 앞을 막았다. 영주인 그에게 돌을 던지며 악을 쓰다가, 끝내는 그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내 가족을 돌려내!’
그게 남자의 유언이 되었다. 진심을 다해 달려든 남자를 세이아드는 그의 검으로 죽였다. 기사들이 나설 틈도 없었다. 가슴이 꿰뚫려 죽은 그는 꼭 세이아드의 능력으로 죽인 것처럼 보였다. 비통한 죽음에 기사들이 술렁거렸다. 죽은 이를 동정하는 사람들을 등지고 세이아드는 니르아를 죽이기 위해 말고삐를 돌렸다.
남자는 기사들이 마을에 묻었다. 얼마 안 가 그 땅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 되었고, 남아있는 무덤들만이 그 자리를 지켰다.
세이아드가 서 있는 지금 이 자리를.
손끝이 가시에 찔린 것처럼 따끔했다. 가슴팍이 답답하고 순간 숨이 막혔다. 세이아드는 초조한 기색으로 그에게 고개를 숙인 남자를 보다가, 그의 옆에 있는 여자와 아이 또한 훑었다.
망자가 온통 그의 곁에 있었다.
그가 살릴 수 있던 목숨이, 세이아드가 외면해 저버린 생명이, 성의 안팎을 통틀어 사방에 있었다. 그 사실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다. 진즉 알고 있었음에도 그 흔적을 직접 마주하자 죽고 싶을 정도의 후회가 밀려들었다.
“…길리엄이라고 했었나. 매년 성에 얼음 포도로 만든 술을 바치던 걸 기억한다.”
세이아드의 말에 남자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휘둥그레진 갈색 눈은 세이아드에게 저주를 퍼붓던 그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이 순박했다.
“화, 황송합니다. 저를 기억해 주실 줄은….”
“사상자가 있나?”
“다행히도 없습니다. 때맞춰 나타나 주신 기사님들 덕에요. 혹시 영주님께서… 보내 주신 겁니까?”
“아니. 너희는 레사스 전하의 덕으로 생을 연명했다.”
일부러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았던 건지 레사스가 나서려 했으나, 세이아드가 빨랐다. 그는 오늘 생긴 이 일의 어떤 것도 자신의 덕으로 불릴 자격이 없음을 알았다. 세이아드가 없었어도 이들은 모두 살았을 것이다.
“저, 전하…?”
“솔리아스의 빛께 인사드리거라.”
세이아드의 말에 길리엄은 황급히 몸을 숙였다. 내내 숨죽여 눈치를 보던 여인도 아이를 데리고 몸을 납작 엎드렸다. 레사스가 곤란한 표정으로 그들을 제지했다.
“불필요한 인사는 그만두게. 그것보다는 마을의 상황을 파악하는 게 좋겠어.”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전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많은 이들이 죽었을 겁니다.”
길리엄은 감격한 목소리로 레사스에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곤란한 기색을 띠면서도 레사스의 얼굴은 다정한 낯빛이었다. 그는 괜찮다는 듯 길리엄의 어깨를 만져 주며 웃었다.
“정말로 당연한 일이니, 고마워할 필요 없어. 누구나 그렇게 했을 테니.”
레사스의 말은 이번에도 틀렸다. 누구나 사람을 당연하게 구하지는 않는다. 그 명백한 증거는 바로 세이아드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