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자세히는 말하지 않았지만 짐작은 갔다. 기원제 이후 떠도는 소문은 과거에도 들었다. 유례없는 참사의 원인이 악시드 영주의 잔혹함 때문에 내린 저주라느니, 악마인 대공이 몰래 꾸민 일이라느니, 별말이 많았다.
“그런 일로 화를 낼 필요가 있었나?”
“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되묻자 퀼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차피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이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 데다가, 설령 말한들 마음을 바꿀 이들도 아니지. 사람은 믿고 싶은 걸 믿으니까. 그런 일에 끼어드는 건 네 손해다.”
“하지만 듣는 제가 속상합니다!”
퀼리는 뭐가 그리 분한지 울분을 토했다.
“물론 소문에 휘둘리는 이들은 답답하지요. 그렇지만 사람이란 게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럴수록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 저처럼 발악하는 놈이 있어야 눈치를 보고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는 겁니다. 안 그러면 죄다 자기가 옳은 줄 알아요.”
퀼리의 말은 까마득한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았다. 소문은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세이아드 자체가 퀼리가 편들 만한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스쳐 간 살릴 수 있던 목숨이 수백이 넘었다. 그뿐인가. 세이아드에겐 살인도 특별한 일에 속하지 못했다. 그는 차후 아스테르의 호위로서 많은 이들을 죽였다.
“그들의 말이 그다지 틀린 건 아닐 텐데.”
냉소적인 어조로 그는 결론지었다.
“그러니 시답잖은 일에 껴들지 마. 네 손해다.”
세이아드는 퀼리가 오늘 이 시간에 존재할 수 있음으로 족했다. 기껏 건진 목숨이 어쭙잖은 일에 휘말려 위험해지는 건 원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절 걱정해서 하시는 말 아닙니까?”
눈살을 찡그려 언짢음을 드러냈으나 퀼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위험할까 봐 모두를 저택에 머물게 하신 거잖아요. 대공께서 어떤 심경의 변화로 그러셨는진 모르겠지만, 덕분에 다들 다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대공은 북부의 수호자이십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대공 덕에 안전한 거잖아요.”
루나가 흰 갈기를 털며 푸르릉, 콧소리를 냈다.
“루나도 동의하잖아요!”
당연한 의무를 칭찬처럼 말하는 퀼리로 인해 말문이 잠시 막혔다. 티테르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존재했다.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같은 당연한 사실을 구태여 특이한 일처럼 말하는 모습이 유별났다. 퀼리를 지적하려다 시간 낭비는 그만하기로 했다.
“됐다. 그만 말해. 오늘따라 간이 부었군, 퀼리. 말이 너무 많아.”
이대로 말하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고갯짓으로 나가라 명하자 퀼리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싱긋 웃었다.
“거야, 각하가 몇 년 만에 제게 말을 걸어 주셨으니까요. 그 바람에 들떴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오래되었나.
그는 어느 순간부터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다. 바꿀 수 없는 시간을 회고하는 게 시간 낭비 같았다. 그래서 많은 걸 잊고 있었다.
세이아드는 가만히 퀼리를 응시했다. 어릴 적부터 원체 밝은 녀석이어서, 세이아드는 퀼리를 옆에 두는 걸 좋아했다. 같이 보낸 시간이 참 길었다. 오랜 세월 동안 퀼리는 조언가이자 장난꾸러기로 세이아드의 곁을 지켰다.
퀼리는 세실리아가 토라질 때면 어떻게 달래 줄지 항상 귀띔해 주었고, 굳이 하인을 시켜 음식을 가져오는 대신 캘러안을 골탕 먹이겠다며 그의 방에서 몰래 사탕을 훔쳐 오곤 했다. 혹여나 걸려 혼나더라도 세이아드가 즐거우면 됐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유쾌하게 웃었다.
멀어진 계기는 어머니의 일이 있던 뒤였다. 퀼리와 캘러안을 비롯한 오래된 가신들은 세이아드가 말하는 어머니의 결백을 믿지 않았다. 당시의 상황이 그러했다. 가문을 건사하기 위해선 죄를 진 가주를 배척하고 숨죽여야 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세이아드는 설득을 포기했다. 대신 홀로 할 일을 하길 택했다. 그러다 삶의 끝을 보았다.
“가 봐.”
하나씩 스미는 감정이 죄다 낯설고 어색했다. 축객령을 내리자 퀼리는 싱긋 웃더니 세이아드에게 마지막 사과 조각 하나를 건넸다.
“루나와 좋은 시간 보내세요.”
빤질거리게 답하던 것과 달리 퀼리의 물러나는 인사는 공손했다. 루나는 그를 배웅하듯 꼬리를 한번 흔들더니, 퀼리가 나가기 무섭게 세이아드의 손에 든 사과를 먹으려 했다. 몸에 밴 습관대로 세이아드는 손을 뒤로 물렸다. 루나가 큰 눈으로 세이아드를 빤히 응시했다.
세이아드는 항시 엄한 주인이었다. 충치가 생길 걸 염려해 루나가 그리 좋아하는 사과도, 배도, 설탕 조각도 주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는지 루나는 더는 조르지 않았다.
불현듯 그를 위해 전장을 거닐다 죽어가던 몇 년 뒤의 루나가 보였다. 충실한 말은 인간도 겁을 먹는 상황마저 극복하여 세이아드의 옆에 남았다. 다리가 부러지고 몸통이 니르아에 꿰뚫려 죽은 루나를 떠올린 그는, 그 순간 루나가 얼마나 행복했을지를 자문했다.
세이아드의 손이 천천히 사과를 내밀었다. 눈앞에 다가온 사과를 빤히 보던 루나는, 이윽고 그가 허락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느긋하게 사과를 받아먹었다. 쓰다듬는 손길을 얌전히 즐기는 루나의 꼬리가 살랑거리며 길게 흔들렸다.
밤의 숲은 세이아드가 아닌 이는 감히 홀로 들어갈 생각을 할 수 없는 곳으로, 니르아가 잠든 낮에도 무척 위협적인 곳이었다. 숲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방향을 종잡기 어려운 데다 사방이 나무 그림자로 빽빽하게 채워진, 깊고 어두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원체 어둡다 보니 간혹 튀어나오는 니르아가 존재하길 마련이었고, 그곳에 사는 짐승들 역시 보통의 날짐승과는 달랐다. 사람의 영혼만을 앗아 가는 니르아는 짐승은 건들지 않고 내버려 두었는데, 그런 니르아와 공존한 짐승들은 배가 고프지 않음에도 인간을 사냥하는 걸 좋아했다. 북부가 위험한 것은 이들 때문이기도 했다. 겨울이 지나도 숲을 벗어나는 오염된 짐승들로 인해 항시 숲을 경계할 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티테르여도 홀로 겨울이 찾아온 영지의 숲을 시찰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는데, 세이아드가 그걸 할 수 있던 이유는 그의 능력 덕이었다. 어둠에 스며들어 기척과 존재를 지우는 그만이 숲을 문제없이 드나들 수 있었다. 여러모로 불길한 힘이라고, 누군가는 그리 말했다.
어쨌든 그런 저주받은 힘을 이용해, 그는 수월하게 숲의 초입을 훑었다.
기실 세이아드는 브레드히트와 베트리아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 그는 앞장서 숲을 뚫었고, 뒤를 따르던 둘이 일행을 습격한 니르아를 막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만을 들었을 뿐이다. 살아남은 건 왕실 기사 하나였는데, 그 또한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현장을 확인했을 땐 대형 니르아의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많았다. 아무리 대형 니르아라 하더라도, 두 명의 공작이 힘을 합친다면 상대할 만한 존재였다. 수많은 경험이 있는 브레드히트라면 특히나 더 수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변수가 있었다는 건데.
세이아드는 샅샅이 숲의 초입을 뒤졌으나, 당장 대형 니르아의 흔적을 찾진 못했다. 잠이 든 니르아는 핵을 중심에 품은 채로 까만 덩어리째 숲에 자리하는데, 어디에도 중급 이상의 니르아가 보이지 않았다.
그전까지 니르아는 각자의 영역을 지키는 짐승과 다름없이 행동했다. 그것들을 바깥으로 끌어내는 계기가 분명 있었을 터….
과거의 일들을 정리했을 때 세이아드는 니르아의 행동 반경이 넓어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비단 숲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것만이 아니라, 숲 내부에서도 벌어지는 일이었다. 이 시기 이후 숲은 유례없이 위협적으로 변했다. 각 지방의 영주가 알아서 숲을 관리할 수 있던 과거와 달리, 세이아드가 죽던 해에는 남은 티테르가 모두 힘을 합쳐 혹한기를 같이 날 방안을 짜야만 했다.
무언가 니르아를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죽기 전에도 종종 떠올리던 의심이 확신이 되었다.
의문을 품은 채 세이아드는 초입에 자리한 잠든 니르아를 최대한 처리하고 숲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늦은 점심때를 지나기 무섭게 사방이 어두워지는 건 북부의 일상이어서, 영지민들은 이쯤이면 다들 문을 걸어 잠그고 저녁을 날 준비를 했다.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는 루나를 매어 둔 마을로 향했다. 이따금 숲의 경계 밖으로 짐승이 드나들기 때문에, 보통은 가장 가까운 마구간에 루나를 맡겨 두었다. 그런데 낌새가 이상했다.
마을로 향하는 길목을 따라 짐승 발자국이 한 방향으로 찍혀있었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은 한 마리의 것이 아니었다.
이건 인간 사냥이다. 배고픈 짐승의 습격이 아닌, 니르아에게 오염된 짐승들의 습격일 것이다.
겨울이 오면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세이아드가 직접 이런 일에 개입해 본 적이 오래전이었다. 그는 니르아를 사냥할 시기가 되면 다른 무엇보다 그걸 우선시했고, 이처럼 짐승에게 습격받는 마을이 있으면 기사를 보냈다. 그마저도 충분한 숫자는 아니었다. 어떤 때는 기사들이 승리했으나 짐승의 종류와 수에 따라 기사까지 목숨을 잃을 때도 있었다.
그러니 겨울은 언젠가부터 악시드 영지의 사람들에겐 더더욱 두려운 시기가 되었다. 이탈하는 영지민도 더러 있었다. 제법 자산을 모아 둔 이들은 어지간해선 악시드를 떠났다.
‘네 힘은 세상을 지키기 위해 있는 거란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세이아드는 니르아를 죽이는 것만이 세상을 지키는 일이라 믿었다. 그러나 지금, 약한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이 그 뒤를 따랐다. 레사스로 인해 과거의 일을 떠올린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세이아드는 빠르게 마을 쪽을 향해 달렸다. 종아리까지 오는 눈을 헤치고 다급히 향한 마을은 습격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가 섞였다.
“엄마아!”
그러던 차에 가장 먼저 목격한 건, 달리다 넘어진 아이였다. 빈집을 헤집고 있던 늑대 하나가 우는 소리에 머리를 내밀었다. 문에서 걸어 나오는 커다란 덩치의 짐승을 반대편에서 발견한 아이의 엄마가 비명을 질렀다.
“쥬디! 어서, 어서 이리로 와!”
아이를 향해서 엄마가 달려왔지만 늑대보다 빠를 순 없었다. 노란 눈이 살기로 인해 빛나는 듯싶더니, 날렵한 동작으로 아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안돼―!”
여인의 비명과 함께 세이아드는 능력을 불러 왔다. 늑대의 발치에 붙어 있던 그림자가 삽시간에 형태를 바꾸더니, 바닥으로부터 솟구쳤다. 그러고는 그림자의 주인이었던 늑대에게로 달려들었다.
콰직!
땅에서 솟아난 검은 가시는 달려들던 늑대를 허공에서 그대로 꿰뚫었다. 사람 팔뚝만 한 굵기의 긴 가시가 짐승의 단단한 흉통을 단숨에 찔렀다. 낑, 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늑대는 즉사했다.
“어, 어, 엄마….”
아이는 덜덜 떨며 울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크게 놀라면서도, 여인은 아이를 향해 곧장 달려갔다. 팔을 뻗고 있는 아이를 엄마가 안기 무섭게, 세이아드는 저 뒤에서 달려오는 늑대 하나를 더 발견했다. 앞서 잡은 것보다 훨씬 큰 덩치의 그것은 단숨에 모녀를 덮치려는 듯 크게 뛰었다.
위험에 반응한 세이아드는 즉각 손을 휘둘렀다. 땅에서 솟아난 가시가 다시금 늑대를 꿰뚫으려는 차, 그것보다 빠르게 날아온 검이 늑대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케겡!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여인을 덮치려던 늑대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세이아드는 검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의 일격은 검을 배운 사람이나 가능한 기술이었다. 대체 누가 미리 이곳에 와있나 싶어 그 방향을 살피자, 거기엔 다급히 뛰어온 듯한 레사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