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17화 (17/147)

#17

축제가 열리기 바로 직전, 왕후의 보호를 맡은 악시드 대공은 그 임무를 수행하는 대신 외려 왕후의 목숨을 위협했다.

폭주로 인해 그 자리를 지키던 실드라스 가문의 기사단 하나가 궤멸했다. 스무 명의 기사를 죽이고 나서야 실드라스 공작에게 제압당한 악시드 대공은 지하 감옥으로 호송됐다.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수도의 저택에 머물고 있던 프로시어스 남매는 그 길로 구금되었다. 시간은 그때부터 멈췄다.

기억은 온통 물감처럼 뒤섞여 원래의 색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게끔 흐려졌다. 세이아드는 어떤 것들을 드문, 드문, 기억했다. 수도의 저택에 들이닥친 실드라스 공작의 싸늘한 모습이라든가, 프로시어스 가문을 감시하던 브레드히트 공작의 얼굴….

그리고 지하 감옥에 있던 어머니.

어머니의 처형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세이아드는 감시하에 어머니를 만났다. 아들에게만큼은 반역의 속마음을 털어놓을지도 모른다는 왕후의 책략을 따라, 참 감사하게도 세이아드는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을 얻었다.

감옥의 가장 깊은 지하에 갇힌 어머니는 그가 알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힘을 쓸 수 없게끔 다리의 힘줄은 끊겨 그녀는 기어서 세이아드에게 왔다.

전신이 걸레짝이었다. 질질 끌린 무릎은 죄다 살이 보이게 헤져 있었고, 등에는 찔린 상처가 붕대조차 감기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폭주가 멈춘 뒤 자처해서 투항했다는 말을 분명히 들었는데, 티테르들은 어머니를 저렇게 만들었다. 비단같던 은색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푸른 멍으로 가득했다. 그 누구보다 강인하던 여인이라곤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때로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미치게 하는 광경이 있다. 어머니의 모습이 그랬다. 피투성이가 된 손이, 녹슨 철 냄새와 곰팡이 슨 악취로 채워진 감옥이, 세이아드를 두렵고 분노하게 했다.

그러나 세이아드가 제일 견딜 수 없던 것은 사람들의 태도였다.

누구도 폭주의 원인을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한평생 충실히 북부를 지켜 온 대공을 모두 매정하게 잘라 냈다. 반역을 도모하려던 게 아니라는 어머니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기에 세이아드만큼은 어머니를 믿어야 했다.

‘네 힘은 세상을 지키기 위해 있는 거란다.’

무릇 약한 것은 돌봐야 한다고 말하던 프로시어스 대공의 본성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자신조차 제어할 수 없던 힘으로 인해 벌어진 사고였음에도, 그 한 번의 일이 앞서 있던 어머니의 선한 면모를 모두 지웠다.

세이아드는 어머니의 처형식을 보지 못했다. 장례는 당연히 치러질 수 없었다. 프로시어스 소유의 저택과 성을 수색해도 반역을 도모한 증거는 없었기에 세이아드와 그의 어린 여동생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북부를 지키던 프로시어스의 이름을 완전히 지우고 그들 남매를 다른 가문의 소속으로 넣자는 논의가 한창 일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게 바뀌었다. 북부의 자랑이던 프로시어스 가문은 영지민들의 수치가 되었고, 그들을 대우하던 티테르와 왕궁의 인사들은 서늘한 눈으로 손가락질했다. 세이아드는 처분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며 악시드 성에 갇힌 채로 긴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레사스는 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레사스는 본인의 궁을 떠날 수조차 없는 처지였으니, 당연히 절 보러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를 보게 된 건, 프로시어스 가문에 대한 처분이 내려진 석 달 뒤였다. 봄은 이미 끝났다. 작열하는 태양이 세이아드의 숨통을 조이는, 유독 공기가 들끓던 여름이었다.

명을 받은 세이아드는 중앙으로 향하기 전 책 하나를 챙겼다. 전해 줄 시기를 놓친 선물을 들고 갈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결국엔 집어들었다. 그에게 닥칠 미래를 알 수 없으니 마지막으로나마 레사스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궁에서는 티테르의 능력을 절대 쓰지 말라는 금기를 어기고, 세이아드는 알현실로 가기 전 레사스의 거처로 몰래 숨어들었다. 거대한 성 곳곳에 퍼진 그림자에 숨고 숨어 그는 남쪽 궁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변했음에도 레사스의 궁만큼은 그대로였다. 아름드리 드리운 사과나무는 탐스러운 열매를 달고 있었다. 이대로 익으면 빨간 꽃처럼 레사스의 궁 앞을 장식할 것이다. 이곳에 오는 동안 조여들던 숨통이 비로소 트였다. 들끓던 공기는 선선히 가라앉아 온화한 바람으로 변했다.

세이아드는 천천히 레사스의 방을 향해 걸었다. 책을 쥔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레사스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창을 열어 둔 채 세이아드를 기다렸다. 소리 없이 뒤편으로 숨어든 세이아드는 방안을 보았다.

레사스는 그곳에 없었다.

그늘 속에 서서 세이아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정경이 그대로였는데 레사스만이 그곳에 없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리라 여기며 세이아드는 천천히, 궁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저런 장면을 생각했다. 레사스가 절 기다리며 성의 입구에 서있는 모습이라든가, 조각을 할 만한 나무를 찾으러 다닌다든가, 목검을 휘두르며 제게 칭찬받길 염원한다든가, 그런 장면들 말이다.

이 모든 상상 속에선, 실드라스 공작의 아들과 있는 모습만큼은 존재하지 않았다.

레사스는 정원에 있었다. 세이아드가 달아 준 나무 그네를 탄 채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기다란 숲 그림자 아래에 숨어 정원으로 가던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지척에서 멈춰 섰다. 이름을 부르려던 입술이 멈칫, 굳었다.

‘여기 있으면 숨바꼭질이 아니잖아, 레사스.’

그네로 걸어온 소년이 하나 있었다. 그를 기다렸다는 듯 레사스는 고개 들어 웃었다. 세이아드는 자신이 아닌 존재에게 웃는 레사스를, 그날 처음 보았다.

‘잘 찾았네.’

‘레사스가 일부러 잡혀 준 거지? 이제 들어가자. 날이 너무 더워.’

금발에 가까운 갈색 머리칼의 소년은 레사스보다 키가 약간 작았다. 구태여 얼굴을 보지 않아도 세이아드는 그가 누군지 알았다. 실드라스 공작의 맏아들, 시온이었다.

언제나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지나치기만 했던 통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소년은, 생각보다도 더 공작을 닮았다. 흉악한 반역자의 저택을 제대로 수색하라며 들이닥치던 그의 어린 날이 꼭 저리 생겼을 것이었다.

‘조금만 더 있자. 하늘이 예쁘잖아.’

‘또 그러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거지?’

레사스는 시온의 말에 머뭇거렸다. 그네가 매달린 노끈을 쥔 채로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물었다.

‘프로시어스 대공이 저지른 짓과 이드는 별개인데, 왜 이드도 위험한 거야?’

‘레사스.’

시온 실드라스의 목소리가 안타깝다는 듯 누그러졌다.

‘그 사람들에게 관심 갖지 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혹시라도 관심을 가졌다가 왕후님의 귀에 들어가면 어떡해. 얼마나 슬퍼하시겠어.’

레사스는 왕후라는 말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시온은 그 반응에 힘입어 다시금 강하게 말했다.

‘너에겐 내가 있잖아. 더는 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돼.’

세이아드는 그 광경을 어둠 속에서 가만히 응시했다. 소년들의 대화는 평범했다. 시온의 말은 딱히 틀린 것이 없었고, 세이아드 또한 동의했다.

레사스는 제 일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 힘도 없는 왕자 주제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 있다고. 반역에 얽힌 일은 입에 담는 것으로도 처지가 곤란해지니, 시온 실드라스의 말을 따르는 것이 맞았다.

그럼에도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다른 말을 해 주길 바랐다. 그냥, 뭐든,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그저 그의 말을 긍정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기적인 것을 알면서도 그의 마음이 간절히 속삭이고 있었다.

세이아드가 기억하는 레사스가 변하지 않았음을 증명받고 싶었다.

‘고마워.’

짧은 침묵 후에 레사스는 시온의 말을 긍정했다. 레사스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공작의 아들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을 보던 레사스가 천천히 그넷줄을 쥔 손을 놓았다.

변하지 않은 것은 세이아드 혼자였다.

언제고 세이아드가 필요할 것 같았던 레사스는 이제 없었다. 현명하게도 레사스는 그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알아서 찾았다. 원체 영특한 아이었으니 처신도 잘 했다.

그래, 잘 했다.

시온의 곁에 있으면 레사스는 외롭지도 위험하지도 않을 것이다. 세이아드가 그를 알은체하고 다가가는 것은 이제 레사스에겐 독이 될 뿐이었다. 그편이 서로에게 옳았다.

전신의 피가 식었다. 살짝 벌어졌던 입술이 다물렸다. 손끝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워지더니 곧 냉기가 돌았다.

세이아드는 책을 구겨지도록 움켜쥔 채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작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시온의 손을 잡을 듯하던 레사스의 시선이 순간 세이아드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서로의 시선이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날, 왕실은 프로시어스의 성을 유지하는 대신 북부의 대공이 행하던 역할을 모두 남부의 실드라스 공작에게 이양했다. 북부는 왕실의 부름이 있지 않는 한 수도의 출입을 금지당했으며, 전대 대공이 된 세레나 프로시어스는 반역자로 명해져 티테르로서 했던 모든 업적을 역사서에서 지우게끔 선고받았다.

성으로 돌아온 세이아드는 왕실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는 다시는 레사스를 먼저 찾지 않았다. 그는 종종 레사스로부터 편지를 받았지만 한 번도 그걸 읽지 않았다. 캘러안은 주인이 읽지 않는 편지를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전해 주지 않았다.

레사스를 다시 마주친 것은 그다음 해에 있던 셋째 왕자의 생일 축하 연회였다. 세이아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복종의 표시로 갓 돌을 맞이한 왕자의 앞에 홀로 무릎을 꿇으며 왕실에 대한 충성을 증명했다.

레사스는 연회가 끝난 세이아드를 찾아와 그에게 매달렸다.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잘못을 빌며, 비굴하고 처절하게 울었다.

‘이드. 나를 버리지 말아요….’

사라진 왕자를 찾던 시온 실드라스가 그를 세이아드로부터 떼어놓기 전까지, 레사스는 그렇게 울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같이 비참해지는 모습에 세이아드 또한 아주 찰나 흔들릴 뻔했다.

하지만 레사스의 행동은 그저 잃어버린 것에 대한 미련일 뿐이다.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옆에 있는 시온을 떠올렸고, 그의 아버지인 실드라스 공작을 떠올렸으며, 그들의 먼 친척이며 레사스의 어머니인 왕후를 떠올렸다.

레사스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이가 세이아드의 지옥이었다. 레사스는 그 지옥을 빠져나오려 하지 않으면서, 그 안으로 세이아드를 끌어내릴 뿐이다.

성으로 돌아온 세이아드는 일 년 내내 서재의 탁상에 올려져 있던 작은 책을 집었다. 미련한 시간을 비웃은 그는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에 책을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그것을 열어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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