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레사스가 홀로 지내는 거처는 왕궁에서 제일 초라한 남쪽의 작은 성이었다. 남쪽의 성은 예로부터 왕실의 손님 중 신분이 낮은 이에게 배정되었으며, 왕족의 거처로는 쓰인 적이 없었다. 시종 서넛이 겨우 지낼 방과 유모와 왕자의 방, 부엌과 마구간이 끝인, 그나마도 거의 쓰이지 않는 버려진 장소.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작은 성은, 높고 화려한 궁궐의 탑에 가려져 아는 사람만 찾아갈 수 있었다. 왕실 사람들이 레사스를 대하는 태도도 이러했다.
가이드가 아닌 존재가 태어날 수 없는 왕실에서 레사스의 존재는 지워야 할 오점이었다. 정화의 힘은 그들이 왕족일 수 있는 정당성, 그 자체였다. 태양이 존재한 이래 왕족에게 당연히 있어야 하는 힘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레사스의 존재는 특권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왕족이 티테르를 제어하는 힘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건 곧 왕실의 몰락을 뜻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왕후인 레아나에게 아이는 수치스러움 그 자체였다. 레사스는 왕후의 실패작이었다. 아이에게 가이드의 힘이 절대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 후, 왕후는 레사스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왕과 왕후가 지워 버리고자 한 아이를 돌보고자 하는 이는 없었다.
레사스는 그냥 죽일 수 없어 살려 둔 아이였다.
궁에서 돌아온 뒤로도 세이아드는 동떨어져 연회를 구경하던 레사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질적이고 불편한 마음이 들던 그 밤을 도통 떨쳐 내기 어려웠다. 무릇 약한 것은 돌봐야 한다던 어머니의 말씀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레사스 왕자를 만나겠다고?’
어머니는 그의 말에 크게 웃었다. 재미있다는 듯 웃어젖힌 그녀는 예상외로 세이아드의 청을 허락했다.
‘왕의 얼굴이 볼만하겠군. 좋아, 이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그래도 궁에 들를 핑계는 필요하니 아스테르에게 모습은 비추는 걸 잊지 말고.’
자격을 갖춘 티테르는 언제고 왕궁에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어머니의 허락을 받자 그 뒤는 별문제가 없었다.
레사스는 생전 처음 받는 관심을 어떻게 소화할 줄 몰랐다. 세이아드가 두 번째로 그를 방문한 날, 레사스는 화들짝 놀라더니 문 뒤에 숨어 세이아드를 빼꼼 살피다 숨기를 반복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기쁨을 어떻게 조절할 줄 모르는 모습은 세이아드에게도 색달랐다.
‘…정말 절 보러 왔어요?’
‘그럼 왜 여기 왔겠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세이아드가 그의 초라한 궁에 찾아왔는지를 의심하면서도, 못내 이 상황이 견디기 어렵게끔 황홀하다는 것이 작은 얼굴 위로 훤히 드러났다.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 그 모습을 삼십 분간 지켜보아야 했다.
‘해가 진 뒤 성의 지붕을 보면 꼭 밤하늘 같아요. 남색 바탕에 금색으로 반짝이는 칠들이 꼭 별처럼 보이거든요.’
레사스와 어울리는 건 생각보다 즐거웠다. 그는 세실리아와 동갑인 것이 믿기지 않게끔 영리하고 성숙했다. 손이 가지 않았고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아이는 자꾸만 세이아드에게 뭔갈 주고 싶어 했다. 한참을 걸어가야 나오는 왕실의 숲에서 딴 체리, 이름조차 모르는 들풀, 손수 깎아 만든 나무 조각 따위가 세이아드의 침실에 하나씩 쌓여 갔다.
왕자가 주었다고 볼 수 없는 사소한 것들임에도 세이아드는 그걸 창가에 두고 구경하는 걸 즐겼다. 그걸 볼 때면 이드, 하고 부르며 달려오는 말간 얼굴이 자연스레 떠올라서 그랬다.
가엾은 아이를 돌봐 주기 위해 궁궐로 향하던 발길은 어느새 기쁨을 얻기 위한 설렘으로 바뀌었다. 궁으로 향하는 세이아드의 손에도 하나둘씩 레사스에게 줄 것이 들렸다. 레사스는 세이아드가 주는 풀잎 하나에도 의미를 뒀지만, 아이가 제일 좋아하던 건 책이었다.
‘언젠가는 저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될까요? 이드처럼 강하고 용감해질 수 있을까요?’
레사스는 책을 읽으며 여러 가지 모습의 자신을 만들어 보곤 했었다. 책을 읽는 것은 작은 궁에 유폐된 왕자가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었다.
‘사람은 존재하는 걸로 의미 있어.’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아요.’
어려서부터 스스로의 처지를 지나치게 잘 알았던 레사스는 곧잘 슬픔을 참는 편이었다. 하지만 왕후가 그녀의 둘째이자 왕실의 셋째 왕자를 낳았던 날만큼은, 처량한 우울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그때만큼은 다른 선물도 소용이 없었다.
때는 그들이 여섯 번의 봄을 같이 보내게 된 해였다.
열여섯 살의 레사스는 다른 의미로 무척 눈에 띄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음에도 홀로 높이 자란 나무처럼, 작고 볼품없던 아이는 눈길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소년이 됐다.
또래보다도 월등히 큰 키는 분명히 그가 남자임을 말해 줬으나, 하얗고 섬세한 얼굴은 성별을 구태여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뻤다. 남쪽 탑의 둘째 왕자가 그렇게 아름답더라, 하는 소문이 왕궁 내에 은은히 돌았다. 그 소문은 곧 티테르들 사이에도 퍼졌다.
그 해는 여러 가지 일이 겹쳤다. 왕후의 산달을 앞에 두고 있던 당시에 레사스는 시온 실드라스를 만났다. 갓 능력을 얻은 실드라스의 소중한 장남이 동갑내기인 레사스를 보고 싶다고 부모님께 청한 탓이었다. 희미하게 흐르는 실드라스의 피가 나름은 신경 쓰였는지 몰라도, 시온은 그 시기부터 세이아드만큼이나 레사스의 궁을 드나들게 되었다.
온통 세이아드의 흔적만이 있던 레사스의 궁에 시온의 자취가 종종 보였다. 그러나 별생각이 들진 않았다. 세이아드는 레사스에게 또래의 친구가 있기를 원했으며, 어릴 적 종종 보았던 시온은 생각이 깊고 다정한 아이였으니 잘 맞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새 친구가 생긴 것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게 있었다. 레아나 왕비가 등의 문양을 지닌 왕자를 낳았다는 소식이 궁 전체에 퍼진 이후, 레사스는 한동안 웃지 못했다.
‘내가 가이드였다면, 모두가 행복했겠죠.’
혼잣말에 가까운 레사스의 말은 세이아드의 마음에 깊게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왕후가 기적처럼 마음을 바꿀 거란 책임질 수 없는 약속을 하는 대신, 그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았다.
<작은 별 이야기>를 만드는 데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작고 얇은 책은 세실리아가 그려 준 그림과 세이아드의 글이 합쳐져 탄생했다. 레사스를 닮은 아름다운 별을 그려 주던 세실리아는 책의 이름이 유치하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세이아드가 뺨을 부드럽게 간질어 주자 까르르 웃고 넘겼다.
꼬박 한 달이 걸려 만든 작은 책은 이제 주인을 찾을 날만을 점찍고 있었다. 하루하루를 세심히 살피던 세이아드는 마침내 알맞은 시기를 찾았다. 레사스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레사스가 태어난 달은 그를 닮아 초록 잎사귀가 사랑스레 돋아나는 사월이었다. 꽃망울이 탐스럽게 맺힌 날을 기념하며 세이아드는 레사스에게 그가 만든 책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날짜를 잡는 것이 영 힘들었다. 책을 만드느라 잠시 방문하지 못하던 사이, 시온이 잡은 선약이 그들의 만남을 밀리게 했다. 또래끼리 노는 것을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 세이아드는 잠자코 기다렸다.
‘보고 싶었어요, 이드.’
마침내 만나게 된 날은 레사스의 생일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세이아드가 오기 전부터 궁 밖의 사과나무 앞에 서있던 레사스는, 그의 그림자가 보이자마자 뛰어나와 품에 안겼다. 보들거리는 검은 머리칼 위로 향긋한 사과 꽃향기가 났다.
‘나는 이드를 매일 보고 싶은데, 시온은 셋이 보는 게 어색한가 봐요. 미안해요, 이드를 기다리게 했어요.’
시온과의 선약으로 인해 세이아드의 방문에 응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쓰인 모양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지레 겁을 먹은 건지,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품에 안겨 얼굴을 파묻으며 속삭였다. 괜찮다는 말을 하염없이 해 주고 나서야 레사스는 겨우 얼굴을 들었다.
아직도 기억이 났다. 희고 긴 손가락으로 세이아드의 손등을 조심스레 붙들던 모습이, 어떻게든 믿어 달라는 듯 간절히 절 올려다보던 눈동자가.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전해져 와 깜빡 착각했다. 이 맹목적인 마음이 무조건 세이아드의 편이 될 거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이 닥쳐도, 세이아드 자신이 싫어할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세상은 아주 확실한 방식으로 세이아드의 멍청한 믿음을 깨트렸다.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생일을 축하하지 못했다. 그들이 같이 맞이한 여섯 번째 봄, 매년 왕후가 준비하는 건국 감사제에서 사고가 하나 생겼다. 큰 사고였다.
감사제에 참여하기 위해 올라온 악시드 대공이며 프로시어스 공작인 세레나 프로시어스가 폭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