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세이아드의 각성은 열네 살이 되던 해였다. 북부의 프로시어스는 왕국의 모든 티테르를 통틀어 제일 강한 힘을 물려받는 오랜 법칙에 따라, 그의 각성 또한 온갖 이들의 기다림을 받았다. 어머니는 별이 찾아오는 순간을 세이아드에게 밤마다 설명했고, 왕실에서는 주기적으로 그의 소식을 물었다. 성가시고 긴장되긴 했어도 평화로운 시기였다.
각성의 계기는 어린 여동생이었다. 그보다 네 살이 어린 세실리아는 그때만 해도 세이아드의 뒤를 따라다니는 오리 같았다. 혹여나 놓고 가면 오빠가 돌아오기 전까지 울음을 멈추지 않는, 떼를 잘 쓰는 귀여운 꼬마였다.
해가 높이 뜬 여름, 부모님 몰래 성의 근처에 있는 호수에 물놀이를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들은 길잃은 늑대와 마주쳤다. 밤의 숲에서 내려온 늑대는 이지를 상실해 겁이 없었다. 혼자였다면 차라리 상대하기 쉬웠겠지만, 세실리아를 지키며 검을 휘두르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별이 찾아온 순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세이아드는 그의 간절한 염원에 따라 몸 안으로 어떤 기운이 밀려드는 걸 느꼈다. 그것은 곧 세이아드의 힘을 조종하는 파장이 되어 그에게 능력을 안겨 주었다.
위험한 상황을 겪은 뒤라 세이아드는 축하를 받기 전 먼저 혼이 났다. 어린 여동생이 위험에 처할 뻔했으니 오빠인 그의 책임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기쁜 일이었다. 세이아드에게도 마침내 티테르의 자격이 주어졌고, 말로만 듣던 왕실의 가이드를 만나게 되었으니까.
입궁 일은 빠르게 정해졌다. 힘을 각성한 티테르는 그의 가이드가 되어 줄 왕실의 일원을 만나는 정화 의식을 치른다. 티테르의 파장을 흡수하고 안정시켜 줄 가이드는 만나보기 전까진 결코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무릇 티테르의 피를 이어받은 집에서 자란 아이라면, 어려서부터 가이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라기 마련이었다. 왕실과 티테르간 권력의 균형을 위해 결코 결혼으로는 맺어지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가이드와 티테르 사이의 긴밀한 감정은 늘 동화의 주된 소재가 되었다.
레사스를 만난 건 의식을 치른 밤이었다. 세이아드는 그날 오후 왕실의 모든 이를 만난 길이었다. 왕의 장자이자 계승 서열 1위인 아스테르를 비롯해, 왕의 조카와 사촌까지 모두가 그곳에 있었다. 레아나 왕비와 그의 갓 태어난 라일리 왕자까지도 그 자리에 있었다.
피로연이 이어졌다. 어른들의 연회가 왕성의 거대한 홀에서 벌어지는 동안, 아이들은 그들을 돌봐 줄 시종들과 함께 왕궁을 돌아다녔다. 세이아드보다 나이가 많았던 아스테르는 왕세자로서 파티에 참여한 상태였다.
세이아드는 머잖아 지나치게 시끄러운 꼬마들과 보내는 시간이 지겨워졌다. 아이를 돌봐주는 건 그가 자주 하던 일이긴 했으나, 각성한 이후로는 시끄러운 소리를 견디는 게 어려웠다. 예민해진 감각이 소음을 두통으로 치환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의 가이드를 보러 가겠다는 말과 함께 세이아드는 시종을 따돌리고 연회장으로 혼자 걷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정원 근처에 몸을 숨긴 채, 하염없이 연회장을 보고 있는 꼬마 하나를 발견했다. 다같이 있던 자리를 빠져나온 왕의 조카인가 싶어, 처음에는 그냥 지나치려고 했었다. 하지만 유독 쓸쓸한 뒷모습이 이상하리만치 눈에 걸렸다. 결국 세이아드는 기척을 죽인 채 그의 뒤로 다가갔다.
어찌나 애틋하게 연회장을 구경하고 있었던 건지, 아이는 세이아드가 바로 뒤에 설 때까지도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가느다란 목덜미라든가 나무 기둥을 꼭 부여잡은 손이 인형처럼 새하얬다. 창백하다는 표현이 가까운 세이아드와는 다른, 목화솜같이 하얀 아이였다.
‘뭐해?’
뒷덜미에 툭 던져진 세이아드의 질문에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휙 몸을 튼 아이의 눈은 토끼처럼 크게 뜨여져 있었다. 새까맣고 긴 속눈썹이 말려 올라가며 신기한 보라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죄, 죄송해요.’
아이는 세이아드의 정체를 묻는 대신 사과부터 했다. 마치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있어선 안 될 자리에 온 것처럼.
‘왜?’
흉터 없는 손이나 흰 피부를 보아하니 귀족임은 분명했다. 왕실에 있는 어린애라 하면 당연히 그러는 게 맞았다. 다만 이상한 점이 있다면 아이의 옷이 무척 낡고 헤졌다는 것인데, 소재는 고급스러웠으나 오래되어 보였다. 길이도 맞지 않아 손목과 발목이 죄다 드러나는 우스운 모양새였다.
‘오지 말라고 한 곳에 와서요….’
소년은 누군가와 말을 하는 게 어색한지 눈을 자꾸 마주치지 못했다. 시선이 바닥으로 향하다 올라오길 반복했고,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러게.’
세이아드는 이 정체 모를 소년의 말에 긍정했다. 확실히 지금 이 장소는 귀족의 자식이 올 곳이 아니었다. 오늘의 연회는 초대받은 티테르들과 왕실의 일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었기행사였기 때문이었다.
세이아드의 긍정에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위축된 몸으로 손을 꼼지락거리는 아이를 보다가, 세이아드는 아이를 부모님에게 데려다주기로 했다.
‘그럼 이제 돌아갈래? 부모님은 어디 계셔?’
그 말에 아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긴 속눈썹이 불안하게 흔들리더니 연회장 쪽으로 시선이 옮겨 갔다.
‘저기에 계세요.’
‘연회장에?’
‘네.’
아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건, 오늘 그가 연회장에서 마주친 이들 누구도 이 아이를 데리고 있지 않았던 점이다.
‘이름이 뭐야?’
성을 들으면 어련히 정체를 알겠거니 싶어 물은 말에,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커다란 보라색 눈에 온갖 서러운 감정이 맺혔다. 꼭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아이는 용케 울음을 참고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사스요.’
레사스. 세이아드는 작게 이름을 중얼거렸다. 일 년 중 가장 밝게 빛나는 달을 뜻하는 이름이 듣기 좋았다.
‘예쁜 이름이네. 하지만 가문의 이름을 알아야 네 부모님을 찾아 줄 수 있어.’
레사스는 그 말에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세이아드의 발치만을 보는 아이를 세이아드는 말없이 기다려 줬다. 쓰르라미 우는 소리가 요란하게 정원을 채웠다. 잔잔한 밤바람이 풀 냄새를 싣고 뺨을 간질였다.
긴 시간을 기다리고서야 세이아드는 아이의 성을 들을 수 있었다. 겨우 고개를 든 아이는 무엇인가가 두려운 듯한 표정으로, 세이아드의 눈치를 살피며 속삭였다.
‘레사스… 라만, 솔리아스요.’
라만, 솔리아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세이아드는 아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왕의 둘째 아들. 강력한 티테르 중 하나인 실드라스의 먼 방계인 새 왕비의 첫째이기도 한 그 아이는, 태어나기 전에는 무척이나 큰 기대를 받았더란다. 티테르의 힘이 미약하게라도 실린 핏줄과 왕의 피가 섞이면 얼마나 대단한 가이드가 나올지 모르겠다며, 왕과 왕비가 거는 기대가 대단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왕실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존재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아름답다고 칭해지는 외양만이 그의 유일한 장점일 뿐.
세이아드 또한 둘째 왕자의 이야기를 부모님으로부터 들었다. 왕국의 역사상 가이드의 힘이 약했던 왕자는 있더라도, 이처럼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왕자는 처음인 것 같았다.
세이아드가 말이 없어지자, 레사스는 예상했다는 듯이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세이아드로부터 눈을 떼진 못했다. 간절히 무언갈 바라는 보라색 눈이 그들 위에 자리한 밤하늘과 똑같았다.
레사스는 이상한 아이였다.
세이아드가 보아온 꼬마들은 죄 세실리아처럼 떼를 쓰거나 울었고, 감정에 솔직했으며, 무엇보다 이렇게 불쌍하지 않았다. 그래. 불쌍했다. 왕의 자식임에도 아무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이렇듯 떨어져, 별세계를 보듯 구경하는 것이. 볼품없는 체격과 관심받지 못한 옷 따위가.
처음은 동정심이었다.
길가의 다친 개를 치료해 주는 행위와 같이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그런 존재로 인식했다. 레사스는 분명 왕자임에도,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이처럼 외롭고 처량해 보였다.
‘그럼 네가 지내는 곳으로 가자.’
세이아드는 손을 내밀었다. 다친 짐승을 거두고 곤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듯이, 딱 그만큼의 마음으로 레사스를 대했다.
레사느는 눈을 깜빡이며 세이아드의 손을 뚫어지게 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꾸만 세이아드와 손을 번갈아 보던 아이는, 잠시 후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한 번에 세이아드의 손을 잡진 못하고, 몇 번이나 그의 손가락에 닿을 듯 말 듯 움찔거렸다.
세이아드는 앞서 그랬듯 기다렸다. 레사스가 자신의 의지로 세이아드의 손을 잡기까지, 지루할 수 있는 시간을 가만히 인내했다.
이윽고 레사스는 세이아드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의 손가락을 붙들었다. 크고 단단한 소년의 손을 잡은 아이의 흰 뺨에 홍조가 어렸다. 선물을 받은 것처럼 환해진 얼굴로 레사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름, 물어봐도 돼요…?’
보랏빛 눈동자에 빛이 들어찼다. 그날 밤하늘 위에는 별 무리가 하얗게 반짝반짝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레사스의 눈에 은하수가 담긴 것만 같았다.
‘이드.’
이토록 사소한 것에 온 힘을 다해 기뻐할 수 있다는 걸,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통해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