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짐작할 수 없던 반박에 왕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세이아드 또한 생각지 못했던 거였다. 과거 속의 레사스는 안카의 죽음과 그 자신의 중상으로 인해 수도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 회의에 참여하지 못했었다. 왕의 지시에 맞설 겨를이 없었다.
“두 공작의 말씀대로 준비된 이도, 인원도 부족하니 싸울 줄 아는 이가 하나라도 있는 게 나을 겁니다. 솔리아스의 성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가요.”
- 티테르를 도울 수도 없는 네가 거기서 뭘 하겠다는 거냐!
왕의 언성이 높아졌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담긴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순간 세이아드의 속에서도 무언가 올라왔다. 불편하고, 언짢았다.
“위급한 순간에 고기 방패라도 될 수 있겠지요.”
레사스의 서슴없는 발언에 브레드히트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날 선 언쟁에 익숙치 않은 란드리 백작 또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치를 살폈다.
- 어디서 망발을…!
다소 적나라한 표현이 왕을 놀라게 했는지, 그의 말끝이 떨렸다. 레사스는 고집스레 입을 다문 채 말문을 닫았다. 다른 이도 아닌 레사스의 저항이 왕을 크게 분노케 했다. 그가 탁자를 내리치는 소리가 쾅! 울렸고, 아스테르는 그저 입꼬리를 올린 채 왕의 진노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듣기 싫은 소리가 더 나올 게 분명했다.
“레사스 전하의 말이 맞습니다.”
세이아드는 이 지긋지긋한 회의를 끝내고자 나섰다. 조용한 듯하면서도 묵직한 그의 음성에 순간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 뭐라고 했나, 대공?
“레사스 전하의 검술이 뛰어나다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 아닙니까. 훌륭한 기사만큼의 몫은 할 테니 이곳에 빌려주시지요. 목숨에는 지장이 없도록 북부의 이름으로 전하를 보호하겠습니다.”
왕의 의견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러나 세이아드는 어느 정도 레사스의 호감을 살 필요가 있었고, 앞서 그의 기사를 구했음에도 외려 빈축을 샀으니, 필요한 순간에 그의 편을 드는 게 맞는다고 여겼다. 그게 아스테르의 심기를 더 건드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게다가, 더는 레사스를 추궁하는 말을 듣고 있기도 지겨웠다. 세이아드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스테르의 웃는 얼굴이 서늘히 굳었다. 세이아드가 다른 이도 아닌 레사스의 편을 들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다른 이들도 제법 놀란 기색이었다. 왕은 아예 눈을 부릅뜬 채 세이아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 짐의 말이 틀렸다는 것인가, 대공?
“저는 북부의 입장에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왕국에서도 제일 길고 힘든 겨울을 나야 하는 상황에 조사대를 꾸리려면, 사람이 하나라도 더 필요합니다.”
일부러 북부의 상황을 짚어 준 세이아드는 왕의 일그러진 눈을 덤덤히 마주 보았다. 왕은 당장이라도 호통을 치고 싶은 듯 눈을 움찔거리며 말했다.
- 그 결정을 후회할 걸세.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언행에 왕의 금빛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그러나 오늘 그가 꺼낸 주제 자체가 티테르들의 반감을 살만한 것이었다는 점을 기억하는지, 왕은 이내 감정을 추스르곤 웃음을 지어냈다.
- …그대와는 수도에 오면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이만 물러들가게.
연결이 끊겼다. 란드리 백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거울을 회수했다. 회의가 끝났음에도 회의장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특히나 아스테르가 그랬는데, 그는 세이아드를 뚫어지게 응시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같이 침묵을 지키자, 아스테르가 곧 입매를 비틀었다.
“재미있군.”
의중을 알기 어려운 한 마디를 뱉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부상자가 많으니 며칠간 정비 후 숲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 그사이 각자의 영지와 연락해 상황을 정리하도록. 그리고 대공은….”
아스테르의 웃음이 짙어졌다. 정말로 유쾌하다는 듯 세이아드를 눈에 담던 그가 몸을 틀었다.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다. 백작은 나를 따라오도록.”
미련 없이 왕태자가 자리를 뜨자 란드리 백작이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예상과 달리 조용히 퇴장한 그의 심중을 알 수 없었다. 속이 복잡해졌다. 기억하던 과거와 달리 행동한 탓인지, 레사스와 아스테르의 행동 모두 그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대공, 광증이라도 생긴 건가?”
그리고 그건 비단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난데없는 말에 고개를 돌리자 브레드히트 공작이 즐겁다는 얼굴로 세이아드에게 말했다.
“뭘 하든 관심조차 주지 않던 이가 무슨 변덕으로 왕에게 그런 건지, 참으로 궁금하단 말이오. 안 그런가, 셀피니?”
베트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팔짱을 낀 채로 절 관찰하는 푸른 눈을 피하며 세이아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용건이 있으면 집사인 캘러안을 찾으십시오. 나는 성에 없을 예정이니.”
“숲을 시찰하려나 보군. 우리가 도와줄 수 있네.”
“필요 없소.”
브레드히트 공작의 제안을 단칼에 쳐 냈다. 예상했다는 듯이 그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용건이 얼추 끝났으니 세이아드 또한 이곳을 뜨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빠져나가려는 그 차, 레사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편을 든 순간부터 의식적으로 레사스가 있는 쪽을 보지 않고 있던 것이 물거품이 됐다.
레사스는 무언가를 꾹 참고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가 원하던 것을 이뤘음에도, 이상하리만치 화가 난 얼굴이었다. 예상이 맞았다. 레사스의 편을 들었음에도 어쩐지 그가 이걸 반기지 않을 것만 같았다.
껄끄럽다. 견디기 어렵게.
표정을 굳혀 스스로를 감추며 세이아드는 그를 외면하고 나왔다. 회의장을 빠져나와 찬 공기가 가득한 복도를 단숨에 가로질렀다. 스스로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발걸음이 그저 앞으로만 내딛어지던 그때, 팔뚝이 잡혔다.
“멈추세요, 대공.”
빠르게 움직이던 몸이 붙들리며 균형이 잠시 일그러졌다. 누군가 이토록 가까이 접근하도록 알아차리지 못했단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날카로운 기운을 증폭하며 그는 경계 어린 몸짓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팔을 확 빼는 동시에 세이아드의 눈에 하얀 얼굴이 들어왔다.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건가요?”
레사스의 부드러운 머리칼은 달려온 탓에 흐트러져 있었다. 보라색 눈동자 속에서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게 보였다. 대다수는 세이아드가 읽기 어려운 것들이었으나, 그 속에 도사리는 미칠 듯한 답답함과 강한 분노만큼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게 세이아드에게 익숙한 감정이기에 그랬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어째서 이렇게 화를 내고 이토록 격렬히 반응하는지 영문을 몰랐다. 그를 짓밟고 무시하던 때에는 지나치게 차분하던 레사스가, 반대되는 호의에 예민히 구는 이유를 도통 알기 어려웠다.
“왜 나를 도왔나요?”
그게 너무나 이상한 일인 것처럼, 레사스는 고운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계속 질문했다.
“나를 증오하고 무시하는 것이 당신의 즐거움 아닌가요? 형님의 옆에서 나를 비웃고 저주하는 게 당신이 마땅히 할 일이잖아요.”
그 지적만큼은 맞는 것이라, 세이아드 또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스테르의 말처럼 레사스는 원수의 아들이며, 그의 가문을 위험에 빠트린 핏줄이었다. 그를 비롯한 실드라스와 조금이나마 연관된 이들을 증오하고 피하는 것이 세이아드가 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래도 변화가 급작스러웠나.
그다지 살갑게 군 적은 없지만, 그를 무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레사스에겐 큰 변화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수상하게 여겨질 법했다. 적의 행동은 언제나 주시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맞으니까, 레사스는 따지자면 영리하게 반응한 거였다. 멍청하게 그저 받아들이는 것보단 이쪽이 나았다.
하지만 어쨌든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저 날 선 감정을 조금이나마 누그러트려야 했다. 이런 식으로라면 외려 저를 더 싫어하게 만드는 꼴이었다. 문제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거였다.
세이아드가 어떠한 말 없이 그저 내려다보고만 있자, 레사스는 참기 힘들다는 듯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분홍 입술이 가느다랗게 떨리며 열렸다.
“그토록 빌어도 내어 주지 않던 관심을 이제 와서 보여 주면, 전처럼 좋다고 매달릴 것 같았습니까?”
세이아드는 눈을 깜빡였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 레사스에게서 나왔다.
“어떤 속셈으로 갑자기 이리 구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라는 것처럼 되진 않을 겁니다. 난 당신이 가지고 놀 수 있는 개새끼가 아니에요.”
레사스의 말은 다짐처럼 들렸다. 가파르게 흔들리던 호흡을 차차 가라앉힌 그는, 언제나와 같이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잠시간 세이아드에게 보였던 깨진 유리 같던 면모를 감추고 그는 뒤로 물러섰다.
“그러니 그대는 전처럼, 나를 증오하세요.”
경고와 함께 레사스는 그를 등졌다. 돌아보지 않고 복도의 반대편으로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세이아드는 음, 낮은 침음을 삼켰다.
스물아홉의 세이아드가 죽기 전까지 잊고 있던 과거가 레사스로 인해 완전히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래.
일그러지기 위해선 원래의 형태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레사스와의 관계도 부드럽고 둥글던 순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