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 왕국의 별들이여, 그대들의 노고에 대해 들었소. 간밤에 생긴 비극에 대해서 유감을 표하지.
왕의 얼굴은 걱정하는 기미라곤 보이지 않는 냉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언짢은 듯 레사스로부터 시선을 돌린 그가 회의를 시작했다.
- 그래서, 중급 니르아가 벌써 모습을 드러냈다고 했나?
“예, 아버지. 약 서른 마리의 소형 니르아와 중형 니르아 한 마리였습니다.”
아스테르는 나긋하게 답했다. 누가 봐도 핏줄임이 확실한 부자의 대화에서 레사스만이 동떨어져 있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레사스가 이마 위에 손을 얹으며 눈을 살짝 가리는 게 세이아드의 눈에 잡혔다.
‘…저 버릇은 여전하군.’
어린 레사스는 자신의 눈과 머리칼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솔리아스의 피를 이으면 반드시 타고 나는 금색이라곤 하나도 없이 어둡기만 한 색이었기에, 어릴 적의 소년은 혼자서 어떻게든 머리를 염색할 방법을 자꾸만 찾았다. 멍청한 짓이었다. 레사스의 흑발은 색이 아주 짙어서, 고작해야 갈색이 되는 게 끝이었다. 그마저도 약이 독해 피부가 상하곤 했었다.
탄생부터 자격이 없음을 증명한 아이를 왕은 사랑하지 못했고, 어머니인 왕비조차 끝내 실망하여 그를 저버렸다. 셋째 왕자인 라일리를 낳은 뒤부터 왕자는 관심조차 받을 수 없었다. 바꿀 수 없는 색을 지닌 아이는 왕과 왕비의 앞에 설 때면 저렇게 스스로를 최대한 감추려 했었다. 그렇게 굴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를 조금이나마 덜 미워할까 싶어서.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그렇게 구는 걸 싫어했다. 자꾸만 위축되려는 소년에게 어린 날의 세이아드는 그의 손목을 잡고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을 때 레사스가 짓던 표정이 어땠던가.
작은 머리통이 살며시 들리고, 까만 머리칼 아래에 숨어 있던 예쁜 보라색 눈이 울먹일 것처럼 세이아드를 담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새끼 짐승처럼 세이아드에게 잡힌 손목을 움찔거리다가, 이내 안심한 것처럼 배시시 웃고는 했다. 그 웃는 모습이 꼭, 얼음 아래에서 피어난 얼음새꽃 같았다. 그래. 북부의 강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보라색 얼음새꽃 말이다.
딱 그걸 닮았었다.
- 악시드 대공?
그를 부르는 왕에 의해 세이아드는 과거의 잔상에서 벗어났다. 흠칫, 고개를 드는 동시에 그는 저를 응시하고 있는 레사스와 눈을 마주쳤다. 닿을 때마다 어디 하나 부러질까 조심스레 대해야 했던 작은 소년이 순식간에 다 큰 청년이 되어 있었다. 조만간 세이아드의 키를 넘어설 장성한 성인임을 아는데, 자꾸만 어린 레사스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아이를 매정하게 끊어 낸 과거도 같이 겹쳐졌다.
죽던 순간부터 느낀 기이한 감정과 죄책감에 세이아드는 얼굴을 굳혔다. 마주친 시선을 냉정하게 끊어 내며 왕에게 대꾸했다.
“예, 폐하.”
- 대공답지 않게 반응이 느리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정신을 차려보니 모두가 저를 보고 있었다. 확실히 그다운 행동이 아니었는지 베트리아 공작마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목덜미에 닿는 아스테르의 시선을 흘려넘기며, 세이아드는 덤덤히 고했다.
“죄송합니다.”
왕은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그를 더 질책하진 못했다.
- 됐네. 대공의 일이니 신경 쓸 것이 많겠지. 그래서, 피해 상황이 어떻게 되나?
“왕실 기사 네 명과 민간인 열 명이 사망했습니다. 민간인 사상자는 갑자기 들이닥친 소형 니르아에 의해 죽은 것이 대다수며, 기사들은 모두 중급 니르아를 막다 전사했습니다. 그 외 부상자는 열다섯 정도입니다.”
- 생각보다는 피해가 적군. 그대들이 있었던 덕일세.
틀린 말은 아니었다. 중급 니르아는 그 하나가 기사단 전체를 죽이고도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할 수 있는 거대한 괴물이었다. 과거 이 현장에선 기원제를 따라온 수십 명에 달하는 성의 식솔들이 죽었다.
하지만 세이아드가 할 수 있던 건 고작해야 숫자를 줄이는 것뿐이었다. 예상한 일이 생겼음에도 그는 모두를 구하진 못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다른 방안이 후회와 함께 스쳤다. 아예 먼저 숲으로 들어가 니르아를 죽였다면, 그랬다면 모두 살았을 것이다. 확신을 너무 늦게 가졌다.
- 그러나 결과가 경미하다 하여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는 일. 유래에 없던 일이 생겼다는 건 숲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하니,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짐은 다시금 숲을 축소시키고자 한다네.
왕의 말에 브레드히트 공작이 반응했다. 눈썹을 치켜뜬 그는 평소의 능글거리는 낯이 아닌 심각한 얼굴로 왕에게 반문했다.
“조사대를 다시 꾸리겠단 말씀이십니까?”
- 자네는 기억하겠군. 그래. 선왕께서 염원하셨던 숙원을 다시 이룰 때가 왔어. 북부의 겨울이 다른 영지로 가기까지 시간이 있으니, 한 달간 북부의 숲을 조사하고 경계의 핵을 찾을 조사대를 꾸리도록.
브레드히트 공작은 강한 반발심을 드러냈다.
“폐하, 시간이 촉박합니다. 필요한 인원을 충당하려면 족히 일 년은 걸릴 일이 아닙니까. 준비 없이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 무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기현상을 밝히고 대비할 필요 또한 있지 않은가? 이번에는 그 시작이라 생각하게나. 괴물들이 날뛰는 걸 보니 시기가 되었다.
왕은 이미 결정을 내린 듯 확고한 눈으로 명했다.
- 짐은 이번 생을 다하기 전에 우리를 가두고 있는 숲들을 모두 없애길 원한다.
그 말과 함께, 세이아드의 머릿속으로 과거가 떠올랐다. 기원제의 일을 시작으로 왕은 본격적으로 니르아를 없애기 위한 계획을 진행했다. 숲의 축소는 선왕 때에 이어지다 잠시 멈췄던 작업으로, 각 영지에 위치한 숲을 조사해 영역마다 자리한 ‘내핵’을 없애는 일이었다.
니르아를 죽이기 위해선 그것의 핵을 파괴해야 하듯이, 니르아의 숲에는 그것들을 만드는 생명수가 존재했다. 숲이 깊어질 때마다 자리한 생명수는 거대한 붉은 핵을 품고 있는데, 수백 마리의 니르아가 그 곁을 지켰다.
왕국의 흐름이 바뀌는 큰일이었으나 당시의 세이아드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최대한 많은 니르아를 죽이고 그의 가문과 그를 증명하는 것이었으니, 죽일 것들이 늘어났다는 것 외엔 달라질 게 없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운명 자체가 뒤바뀌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세이아드는 브레드히트 공작과 베트리아 공작을 번갈아 훑었다. 애초에 그의 마음에서 지워 버린 저들은, 바로 이번 일로 인해 죽게 되었다. 성년이 되지 않은 브레드히트의 딸이 갑자기 다음 대 티테르가 된 것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했다.
…망자를 눈앞에 두고도 미처 모르고 있었다니.
순간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남의 죽음을 무던히 넘기고 살았다는 게 섬찟하게 세이아드의 마음을 건드렸다. 분명 동료로 여긴 적 없는 이들이긴 했지만, 자신이 이렇게까지 주변의 안위를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는 게 소름 돋게 와닿았다.
- 언제까지나 니르아에 갇혀 다른 대륙과 분리되어 살아갈 셈인가. 짐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네.
그때, 내내 침묵하던 베트리아도 브리데히트의 편을 들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경계를 강화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나, 이번 겨울에 진행하기엔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두 공작의 강한 반기에 왕은 인상을 찡그리다가, 브리데히트를 보며 말했다.
- 아스터, 그대는 짐에게 종종 말했지. 자네의 외동딸에게만큼은 티테르의 짐을 지게 하고 싶지 않다고. 자네의 나이가 이제 적지 않아. 한 해라도 서둘러 숲을 없애는 것이 자식을 위한 일이 아닌가?
브레드히트가 끔찍이도 아끼는 외동딸의 이야기에 그가 멈칫했다. 베트리아가 그를 말리기 위해 입을 열려는 차, 아스테르도 끼어들었다.
“베트리아 소공작에게도 그편이 좋지 않겠나. 왕실에 딱히 그녀에게 맞는 가이드가 없는 실정에, 차후 티테르로서 대가를 치르며 숲을 지킨다고 생각해 보아.”
베트리아의 장녀인 스텔라는 왕세자의 말대로 적합한 파장을 지닌 가이드를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거의 없다시피 지내던 그녀는 차후 레사스가 각성한 이후에나 드디어 정화를 받게 되었다.
- 아스테르의 말이 맞다. 왕실의 누구도 스텔라의 대가를 완벽히 덜어 줄 가이드가 없는 상황에, 그 아이가 힘을 쓰는 날이 온다고 상상해 보게나.
자식들의 언급에 두 공작이 말을 잃었다. 짧은 침묵을 놓치지 않고 왕은 쐐기를 박았다.
- 두 공작이 원하는 지원은 아끼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게. 이번 조사는 첫 시작일 뿐이니, 늦어도 한 달 내로는 마무리하면 어떻겠나. 모든 영지가 겨울을 맞이하는 데 무리가 없게끔 말이야.
적당한 회유책을 제시하자 두 공작도 더는 반발하지 못했다. 긍정의 침묵을 확인한 왕이 싱긋 웃으며 모두에게 명했다.
- 짐의 자랑스러운 자식이 나를 대신해 이번 조사를 주도할 것이다. 늘 그렇듯 잘해 주겠지.
본인에게 유리하게끔 상황을 정리한 왕은 회의장을 한번 훑다가, 레사스에게 닿았다. 입매를 딱딱하게 굳힌 그가 역정을 내듯 레사스에게 고했다.
- 레사스, 너는 오늘부로 수도로 다시 올라오거라. 쓸모라곤 아무짝에도 없는 놈 같으니라고.
남의 눈을 개의치 않고 왕은 역정을 냈다.
- 너의 부재가 왕국에 보탬이 되는 길이다. 당장 행장을 꾸려라.
레사스는 고개를 숙인 채 왕의 말을 가만히 듣는 듯했다. 그러나 왕이 회의를 파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차, 아무도 예상치 못한 답이 나왔다. 그가 거울에 똑바로 응시하며 왕에게 고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