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태양과 달이라 불리는 둘은 아름다운 외양으로도 사랑을 받았다. 티테르와 가이드의 사랑이 암묵적으로 금지된 왕실의 규율 때문에 한 번도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으나, 레사스는 전해져 오던 전통을 비롯해 왕실에게 얽매이는 이가 아니었다.
공정하고 선량한 기질과 다르게 그는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해내는 고집이 대단했다. 상식만 따를 듯싶은 반듯한 외양으론 짐작하기 어려운 기행을 하기도 했는데, 그런 면모가 레사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의 행동은 언제나 좋은 결과만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건국 시조인 라만의 힘을 이어받은 왕자와 빛을 다루는 남부의 선인은 호사가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둘 중 누구도 서로의 관계를 인정하진 않았으나, 레사스는 다른 티테르들을 다룰 때와 달리 시온에게는 거리감을 두지 않았다.
세이아드의 모욕에 화를 낸 것 또한 시온이 아닌 레사스였다. 명을 전달하던 다감하고 상냥한 얼굴이 날카롭게 굳었던 게 기억에 생생했다. 어지간하면 세이아드를 무시하고 끝나던 평소와 달리 레사스가 답지 않은 독설을 뱉었던가.
‘그대는 언제나 이기적이군. 스스로에게도 상처가 될 말을 언제까지 달고 살 셈입니까. 독사의 이도 그대의 말보다는 아프지 않을 겁니다.’
세이아드는 그걸 독설이라 치부하진 않았지만, 레사스의 성정치고는 무척 강한 말이었다. 썩 유쾌하진 못한 미래이자 과거를 곱씹으려니 혀가 까끌거렸다. 무언가 마음에 걸렸으나 잡히진 않았다.
“기침하셨습니까, 각하.”
그를 찾는 소리에 세이아드는 창밖을 확인했다. 해가 뜨지 않을 것만 같던 어두운 밤의 장막이 걷히고 저 멀리 붉은 하늘이 보였다. 우중충한 푸른색이 아침을 알리고 있었다.
마른세수를 하며 함께 머리칼을 넘겼다. 버석하게 마른 손이 차가웠다. 장작은 어느새 꺼져 있었다. 까맣게 비틀어 타버린 벽난로의 숯을 멍하니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들어와도 좋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캘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늘 퀼리가 담당하는 세숫물을 그가 들고 온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돌아온 후엔 퀼리를 보지 못했다. 설마 하는 불안함에 세이아드는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퀼리는 어디 있지?”
본래 그가 알던 퀼리는 어제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에서 지워졌다. 분명 그를 억지로 이곳에 붙들어 뒀으니 살아 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혹여나 하는 불안이 일었다. 세이아드의 질문에 캘러안의 낯이 어두워졌다.
설마, 그럴 리가.
“분명 저택에 머무르라 명했을 텐데?”
불안정한 감정에 응하듯 세이아드의 기운이 폭발하듯 일었다. 발치에 길게 늘어졌던 아침의 평온한 그림자가 가시처럼 삐죽이며 돋아났다. 그 광경을 본 캘러안이 놀란 듯 황급히 고했다.
“각하의 명대로 저택에 있었습니다. 다만 그 녀석이, 하인들 몇과 싸움이 나는 바람에… 하루간 근신을 내린 상태입니다. 분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각하.”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세이아드가 눈을 찡그렸다.
“싸움?”
“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비가 붙은 모양입니다. 안 그래도 오늘 오전 내로 다들 불러 모아 정황을 파악하고 보고드릴 예정이었습니다.”
퀼리는 원체 성격이 좋고 능청스러워 싸움과는 거리가 먼 녀석이었다. 캘러안 또한 당혹스럽긴 마찬가진지 그답지 않게 사담을 붙였다.
“감히 말씀드리기 부끄러운 일이라 잠시 주저했습니다. 자식을 잘못 교육한 제 불찰입니다, 각하.”
“아니, 됐다. 많이 다쳤나?”
그 질문엔 캘러안의 얼굴 위로 아주 미미한 자랑스러운 기색이 보였다.
“운이 좋아 크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외려 다른 하인들이 더 다친 상태입니다.”
죽거나 중상을 입지 않았다면 됐다. 세이아드는 잠시 침묵한 뒤 화제를 바꿨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회의를 열 것이다. 동쪽 회의장을 준비해 두고, 부상자들을 돌보기 위한 물자는 아끼지 말고 쓰거라.”
“알겠습니다.”
세숫물을 내려놓은 캘러안은 시중을 들기 위해 그에게 다가왔다. 세이아드는 손을 내저었다.
“됐다. 혼자 하겠다.”
캘러안의 시선이 손바닥에 닿았다.
“부상을 입으셨는데 의사를 부르시지 않고요.”
그의 시선을 따라 손을 보자 꼴이 별로였다. 피가 말라붙어 검게 딱지가 앉은 상처는 범위가 생각보다 넓었다. 스스로 찢어 놓은 손바닥인지라 의원에게 내비칠 생각이 없었다.
“하찮은 상처니 신경 쓸 것 없어. 나가 보거라.”
보통 때의 캘러안이었다면 물러났을 것이다. 그는 주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거나 의사에 반하지 않는 유능한 집사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무슨 변덕이 분 것인지, 그는 잠시간 주저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공께서는 몸을 좀 더 돌보셔야 합니다.”
대야에 손을 넣어 피를 씻던 세이아드가 멈칫했다. 눈썹을 찡그리며 캘러안을 보자, 그는 고개를 숙였다.
“불경한 발언인 건 알지만, 스스로를 소중히 대하셨으면 합니다.”
간만에 듣는 질책이었다.
캘러안이 저런 염려의 말을 멈춘 건 아주 오래전이었다. 아스테르를 보필하며 니르아를 사냥하는 것에 집착하던 그에게 질린 여동생이 떠난 뒤부터였나. 캘러안 또한 말수가 적어졌다.
분명 주제넘고 꺼림칙하게 느껴짐에도 이상하게 화는 나지 않았다. 어제부터 자꾸 느끼던 불편한 감각이 가슴 언저리에 맺혔다.
“세숫물을 다시 받아오겠습니다. 목욕물 또한 준비해 두라 일러둔 상태니, 곧 시중들 이가 올 것입니다.”
캘러안은 본분을 다했다는 듯 물러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리며 세이아드는 말없이, 피로 물든 대야에 담긴 손을 한참이나 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
대책 회의에는 기원제의 구성원을 비롯해, 오늘 아침에 합류한 란드리 백작이 참석했다. 란드리 백작은 베트리아 공작의 먼 방계로, 동쪽의 티테르의 힘을 미약하게 이어받은 반쪽짜리 티테르였으나 그의 힘은 무척 유용했다. 란드리 백작은 물건에 의지를 실어, 그걸 지닌 이들에게 백작이 보는 광경을 보게끔 할 수 있었다. 그의 능력은 일종의 전령처럼 이용되어 왕이 자리를 비울 수 없을 때 회의를 대신 참관하는 역할을 했다.
왕실에는 란드리 백작과 같은 이가 많았는데, 대표적으로는 기억에 새겨 둔 장소에 한해 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전령들이 있었다. 먼 거리에 위치한 티테르들의 영지에 가이드가 비상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건 이들 덕분이었다.
회의장에 들어가자 세이아드를 제외한 이들은 이미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들어가는 동시에 아스테르가 눈웃음과 함께 그를 불렀다.
“이리 오거라, 이드.”
제 옆을 가리키는 그의 손짓에는 어젯밤의 일을 신경 쓰는 모습이라곤 없었다. 그리고 저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세이아드 역시 그가 겪은 일은 죄 환상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곤 했다.
천천히 그의 옆에 앉으려는 차, 그는 반대편에 앉아 있는 레사스와 눈이 마주쳤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했다. 안색이 파리했고 흰 피부 곳곳에 생채기가 보였다. 왼쪽 손목에는 붕대가 둘러져 있었다.
“아, 실례하지. 내 아우의 모습에 많이 놀란 모양이야. 그대들이 이해하게나. 레사스는 치유력이 없으니 낫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거든.”
세이아드의 시선이 그에게 닿은 걸 느꼈는지, 아스테르가 온화한 음색으로 말했다. 브리데히트 공작이 안타깝다는 듯 그의 말에 응했다.
“솔리아스의 신성한 힘이 티테르가 아닌 이들에게도 통한다면 좋을 텐데 말이지요.”
진심 어린 걱정이었으나 레사스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그를 염려하는 이 상황 자체가, 그가 솔리아스의 힘이 없다는 걸 자각시키는 것밖에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치유력은 가이드의 강한 권능 중 하나로, 부상당한 티테르를 일정 수준까지 회복시키는 힘이었다. 브리데히트 공작의 말대로 오직 티테르에게만 행사할 수 있는 힘이기에 범용성은 없으나, 티테르에게는 아주 각별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 힘은 가이드 본인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니 레사스의 낫지 않은 상처는 그의 자격 없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탁자 위에 올라와 있던 붕대 감은 손이 조용히 탁자 아래로 내려갔다. 치부를 감춘 그는 빙그레 웃은 뒤 공작과 아스테르에게 차분히 감사를 표했다. 모욕당한 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게 아주 익숙해 보였다.
“염려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가슴 안쪽을 갈고리로 긁는 듯한, 무언가 탁 걸린 느낌이 들었다.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빤히 보던 시선을 억지로 돌렸다. 힘이 생기기 전의 레사스를 이런 식으로 마주할 때마다 자꾸만 마음이 어수선했다. 가이드로서의 몇 년보다 무능력한 왕자로서의 삶이 훨씬 길었던 걸 아는데도, 이 광경을 아예 잊고 있었다.
“운명이 아니니 어쩌겠나.”
아스테르는 진정으로 아쉬운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듣고 있던 베트리아 공작이 짤막히 말했다.
“전하의 깊은 배려에는 언제나 감탄할 수밖에 없군요.”
냉랭한 말투에 아스테르가 베트리아를 지그시 보다가, 한층 짙게 눈웃음을 띄었다.
“공작은 언제나 한결같아서 좋아.”
뜻 모를 말을 마친 뒤 그는 란드리 백작에게 명했다.
“연결하거라, 란드리.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알겠습니다.”
란드리는 품에서 거울을 꺼냈다. 둥근 청동의 테 안에 자리한 유리가 잠시 회의장을 비추더니, 점점 다른 광경으로 변했다. 이윽고 솔리아스의 왕, 사이프리드 라만 솔리아스의 얼굴이 그 안에 비추어졌다.
“왕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일제히 떨어진 인사에 왕은 안을 훑었다. 이마에 고집스럽게 자리한 일자 주름과 굳센 입매는 그의 성정을 나타냈다. 사이프리드 왕은 한번 마음먹은 것은 쉬이 바꾸지 않았고, 곧장 밀어붙이는 사람이었다. 솔리아스는 그를 왕으로 맞이한 이후부터 많은 변화를 겪었다. 역대 가장 강력한 왕실 기사단을 보유한 것부터 시작해, 티테르에게 의존하지 않는 왕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아스테르와 똑같은 금안이 하나하나 얼굴을 살피다, 마지막으로 레사스에게 꽂혔다. 점잖아 보이던 차분한 얼굴은 레사스를 담는 순간 굳으며 일그러졌다. 미간의 주름이 깊어지며 그가 쯧,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