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7화 (7/147)

#07

밤이 깊었다. 깊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가루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환히 뜬 보름달이 자취를 감춘 태양을 대신해 지상을 밝혔다. 혹한기를 앞둔 북쪽의 달은 다른 계절에 비해 땅과 가깝게 닿아 있었다. 가장 밝은 빛을 보여 준 보름달은 오늘을 기점으로 점점 흐릿해져, 마치 땅속에 숨은 듯이 겨울 혹한기 내내 모습을 감춘다.

대륙의 끝에 위치한 북부는 일 년의 반이 겨울이고, 밤이 길었다. 그로 인해 악시드 영지는 다른 영지보다도 유독 긴 시간을 니르아와 싸워 와야만 했다. 니르아가 제일 많이 나타나는 지역답게 북부의 안위는 왕국의 운명과 직결되었다. 북부의 티테르가 언제나 강인해야 하는 이유였다.

짊어진 책임에 대한 대가로 중앙은 북부를 우대해 왔다. 유일하게 대공의 칭호를 허락받은 것은 솔리아스 내에서 북부가 유일했으며, 티테르가 전부 나서야 하는 일은 북부의 최종 승인이 필요했다. 전장에서도 이는 동일하게 적용되어 가이드의 도움이 필요할 시 북부의 티테르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것도 과거의 일이다.

세이아드의 어머니가 처형됨과 동시에 북부는 실질적인 힘을 빼앗겼다. 대대로 이어진 대공의 호칭만은 유지되었을 뿐, 프로시어스 가문의 입지는 바닥을 쳤다. 기존의 북부가 지닌 권위를 차지한 것은 중앙과 제일 가까운 남부의 실드라스 가문이었다.

왕실은 가이드의 힘을 최대한 빌려주지 않는 식으로 티테르와의 균형을 이루었다. 보통의 인간을 초월하는 티테르를 왕실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이 같은 방식 때문이었는데, 정화를 받지 못해 정신을 놓고 처형당하는 것은 모든 티테르의 악몽이었다.

그러나 티테르의 안위는 결국 왕국의 멸망과도 연결된 일이기에, 왕실은 언제나 적당한 균형을 맞춰 왔다. 의무를 진 자들은 모두 니르아의 척살을 최우선으로 여겨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나 이번 국왕은 달랐다. 집권하던 시기부터 티테르를 억누르는 정책을 펼쳐 온 그는 왕실 기사단의 힘을 길러 최대한 티테르의 도움을 받지 않게끔 일을 처리했다. 반드시 티테르가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는 세이아드의 참전을 제한하는 식으로 북부가 명과 공을 가져가는 걸 막았다. 왕은 왕국 내에서 더는 티테르의 명예가 높아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현재, 세이아드가 유일하게 결정권을 쥐고 있는 일은 북부에서만 주관하는 기원제가 전부였다. 왕이 이를 내버려 둔 것은 이 의식이 득보다 실이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생긴 일은 모두 북부의 책임이나, 의식을 잘 마무리하여도 달라지는 건 없었으니까.

“올해 기원제는 여태 보아왔던 것 중 가장 단출하구려, 대공.”

의식을 거행할 밤의 숲으로 향하는 행렬의 전방에 선 세이아드에게 브레드히트 공작이 말을 건넸다. 점심의 만찬 이후 충분한 휴식을 취했는지, 공작은 도착했던 당시보다 기운이 돌아온 듯했다. 쉰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서른의 청년처럼 훤칠한 외양을 가진 브레드히트 공작은, 세이아드가 생전에도 상대하기 껄끄러워했던 인물이었다.

“실드라스의 부고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이 부쩍 적어진 것 같단 말이지. 늘 달고 다니던 그대의 시종은 어디 두고 온 거요? 떼를 지어 구경하던 영지민들도 보이지 않고.”

세이아드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음에도 브레드히트 공작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네 명의 티테르 중 제일 종잡기 어려운 인물로 흥미를 따라 움직이는 독특한 종자였다. 낯이 뻔뻔한 것도 뛰어나기로는 제일가서, 세이아드의 냉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설마 아까 말했던 이유 때문인 것이오?”

침묵 속에서 혼자 질답을 주고받던 브레드히트 공작이 정답을 맞혔다. 그러자 내내 침묵하던 베트리아 공작이 날카롭게 그를 타박했다.

“정말로 대공의 헛소리를 믿는 건가요, 브리데히트 공작? 중급 니르아가 나타날 것 같다는 그 허무맹랑한 말을?”

세이아드는 몇 시간 전 브리데히트와 베트리아를 불러 협조를 요청했었다. 단 한 번도 먼저 말을 건 적 없던 세이아드의 요청이 의아했는지 두 공작은 모두 그의 만남에 응했었다.

‘아침부터 꿈자리가 사나워 숲을 미리 살폈소. 그렇게 경계를 돌던 와중에 중형 니르아와 비슷한 것을 발견했네.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시종과 하급 기사들은 성에 두고 가는 편이 좋을 것 같군. 또한 기원 의식에는 최대한 경험 있는 이들을 모두 배치해 주시오.’

세이아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경고였다. 되살아났다거나, 미래를 겪고 왔다는 허무맹랑한 말보다는 이쪽이 설득력이 있기도 했고. 브리데히트는 흥미롭다는 듯 세이아드의 말을 들었으나, 베트리아는 단칼에 세이아드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 시기에 중급 니르아가 나온 적은 역사상 한 번도 없소. 고작 꿈자리가 사납다는 이유에, 확실하지도 않은 추측으로 전력 편성을 바꾸라는 건 터무니없는 소리임을 대공 본인도 알 텐데.’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말을 끊은 베트리아는 세이아드를 노려보며 추궁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닌 대공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으니 더욱 믿기 어렵군. 당신이 타인의 안위를 신경 쓰다니, 쥐새끼도 믿지 않을 말이야. 무슨 꿍꿍이인진 모르겠지만, 우리 동쪽의 베트리아는 그대의 농간에 다시는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워낙 강경한 베트리아의 태도에 브리데히트 공작 결국 동조했다.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은 여전했으나 브리데히트 역시 세이아드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솔리아스의 빛들을 지키는 게 우리의 최우선 아니겠소. 전하의 곁에 제일 강한 이들이 있어야 함은 당연하고, 기원제의 목적은 어린 기사들에게 경험과 경계심을 심어 주는 것이니, 그대의 청은 들어주기 어렵겠네.’

논리적으로는 반박할 거리가 없는 대꾸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세이아드였어도 그리 행동했을 것이다. 그들을 붙들어 다시 설득하는 대신 세이아드는 처음 생각했던 방식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사태는 최대한 홀로 수습하는 쪽으로.

원래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자라 온 적 없었으니 차라리 이 방식이 편했다. 타인은 언제나 변수를 만들고, 통제 불가한 상황은 실수를 불러온다.

“우리는 티테르잖소. 대공의 꿈자리가 사나웠다면 그게 일종의 예언이 될지 누구도 모르는 거 아니겠소.”

“그렇다면 왜 아까 대공의 말을 듣지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하하하, 어디까지나 가정이지요, 가정.”

브리데히트 공작의 한담이 이어지는 사이에 그들은 밤의 숲의 경계 근처에 다다랐다. 어지간한 작은 성보다 높은, 거대한 침엽수가 펼쳐진 지역이 북쪽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일 년 내내 눈이 거의 녹지 않고 항시 어둠이 깔린 이곳은 태초에 악마가 태어나 자리 잡은 곳이라고 불리었다.

숲의 경계 바로 앞에는 오래된 신전이 자리해 있었다. 대리석으로 높게 지어진 신전은 의식의 장소이자 과거에는 악마를 봉인한 곳이기도 했다.

말에서 내린 세이아드는 행렬의 중앙으로 향했다. 의식의 중심인 왕세자는 세이아드가 오는 것을 보자마자 손을 내밀며 웃었다. 대낮처럼 환하게 빛나는 횃불 아래에서 아스테르의 금발이 화려하게 물들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다른 기사들의 손을 거절한 왕세자는 구태여 세이아드를 고집했다.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던 세이아드는 천천히 검은 가죽 장갑을 벗었다. 아스테르는 언제나 세이아드와 직접 닿기를 원했다.

흉터로 얼룩진 창백한 손을 내밀자 만족스럽다는 눈웃음이 아스테르의 눈에 걸렸다. 흰 가죽 장갑을 벗은 그는 자연스럽게 세이아드의 손을 맞잡았다. 힘주어 그를 당기는 힘에도 꼼짝 않고 있자, 아스테르가 곧 말에서 훌쩍 내려왔다. 그러고는 익숙한 걸음으로 신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날이 아주 좋군. 바람도 불지 않고 눈도 거의 내리지 않는 것이, 평온한 기원제가 될 것 같아.”

왕세자의 덕담에 그를 따르던 서기 한 명이 고개를 조아리며 공감했다.

“다 전하의 은총 때문입니다. 지난 몇 년간 전하께서 주도하신 기원제의 날씨가 나빴던 적이 한 번도 없지요.”

“그건 두고 봐야겠지. 오늘은 비구름이 하나 섞여 있지 않은가.”

아스테르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왕세자의 행동을 따라 움직이던 이들이 하나같이 멈춰 선 후 그가 보는 곳을 주시했다. 뾰족한 시선이 몰린 끝에는 레사스 왕자가 우뚝 서 있었다. 화사하게 눈을 휘어 웃은 아스테르가 레사스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도 돌아가질 않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언제까지 폐하를 부끄럽게 만들 셈이야. 네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외려 솔리아스의 크나큰 수치인 것을.”

아스테르의 말을 따라 그의 기사들이 웃었다. 의식을 기록하기 위해 따라온 서기관들과 왕자의 시종들 역시 슬며시 비웃음을 띠었다.

레사스 왕자의 몇 없는 기사마저도 그 말엔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왕세자의 말에 감히 반박할 이도 없었지만, 그들 모두 아스테르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공작들 또한 표정의 변화 없이 왕세자를 지켜보았다. 티테르에게 있어 왕실은 가이드의 힘 때문에 가치 있는 곳이었고, 정화의 힘이 없는 왕실의 핏줄은 충성과 보호의 대상이 아니었다.

레사스는 그를 향한 업신여기는 시선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수치스러워하거나 동요하는 일 없이, 그저 무표정으로 아스테르를 향해 답했다.

“폐가 되지 않도록 잘 처신하겠습니다.”

“네가?”

아스테르는 다정하게도 되묻더니,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그러거라.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게 좋을 것이야. 주제도 모르고 설쳤다가 괜한 이들이 희생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입꼬리를 올린 아스테르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를 따라 멈췄던 무리는 다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오직 그 속에서 레사스와 그의 기사들만이 멈춰 있었다. 레사스는 앞서가는 아스테르의 등을 하염없이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그의 시선이 세이아드와 순간 마주쳤다.

레사스는 입술을 꾹 다물더니 고개를 먼저 돌렸다. 그런 그를 향해 입술을 살짝 달싹이던 세이아드 또한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발길을 틀었다. 그렇게 신전 안으로 향하는 세이아드의 등 뒤로 얼핏, 그의 기사들에게 사과하는 레사스 왕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모자라 그대들을 같이 욕보이는군. 미안해.”

왕자의 말에 안카 경이 나서 그를 위로했으나, 그들 누구도 왕세자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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