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6화 (6/147)

#06

“대공께서 친히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레사스의 목소리엔 경계심과 분노가 공존했다. 이렇듯 감정을 드러내는 레사스는 오랜만이었던지라, 세이아드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죽기 전까지 봤던 이인데도 많은 게 낯설었다. 기억과 다른 것들이 더러 있었다. 아직은 덜 자라 저보다 낮은 눈높이라든가, 미워할 감정조차 남지 않아 동요 없이 절 대하던 태도 같은 것 말이다. 그것들이 시사하는 바가 명확했다.

기억보다도 훨씬 어리군.

소년티가 물씬 묻어나는 앳된 모습에 기분이 묘했다. 날렵하고 매끈한 턱은 아직 선이 고왔고, 흰 피부는 부드럽다기보다는 보송해 보였다. 길쭉한 목덜미는 스물다섯의 레사스에 비해 아직 여린 티가 났고, 벌어진 어깨도 덜 여물어 보였다. 타고난 체격과 검술 훈련으로 잘 발달한 신체라는 건 한눈에 보이지만, 어린 청년 특유의 부드러운 선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장성한 레사스 왕자가 워낙 곧고 강한 인물이었던지라 잊고 있었으나, 그는 당최 세이아드보다도 네 살이 어렸다. 아스테르와는 정치적 노선부터 시작해 니르아를 퇴치하는 법까지 모두 마찰하던 레사스를 상대할 땐 나이 따위를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아무 힘도 없는 스무 살의 왕자를 보니… 곤혹스러웠다.

이렇게 어린 애송이에게 날을 세우고 있었나.

스물아홉의 세이아드가 보는 현재의 레사스는 한참 어렸다. 당장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시간까지 살아온 세이아드의 눈에 그는 정신적으로 아홉 살이나 어린 이였다.

이런 레사스를 설원에 두고 왕세자에게 갔다는 게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왕세자의 곁에는 최소 한 명 이상의 티테르가 대동하는 것이 규율이었기에 그는 당시 분명히 안전했었다. 항시 곁에 있는 왕실 기사단의 수도 충분했으니 말이다.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어린 것에게 지나치게 가혹했다.

어머니를 잃었던 당시의 세이아드 또한 저렇게 어렸기에, 감정에 휘둘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굳어진 마음은 관성이 되어 자연스레 현 왕후와 관련된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리는 쪽을 택했다. 어머니의 결백을 믿는다면 그들이 세이아드의 원수인 건 지당한 사실이었고, 그리 구는 쪽이 맞았다.

하지만 세이아드의 그런 태도에도 레사스는 한 번도 그에게 똑같이 되돌려 준 적이 없었다. 분노하고 경계하고 지탄하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일부러 모욕을 주거나 그를 위험에 빠지게끔 몰아가진 않았다.

왕후와 얽힌 이들 중에서 모순적이게도 왕후의 장자인 레사스만은 세이아드에게 어떠한 해를 끼치지 않았다. 실드라스 가문과 왕후가 힘을 모아 프로시어스 가문의 권위를 깎아내리려 하는 도중에도 말이다.

전에는 몰랐던 사실을 상기해 낸 세이아드가 생각에 잠겨 말이 없자, 레사스의 표정이 굳었다. 분홍빛 입술을 꾹 깨물던 레사스는 몇 분을 더 기다리다 가시 돋은 말을 뱉었다.

“무례하군요, 대공.”

아. 화나게 해 버렸군.

낯선 깨달음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게 화근이었다. 그를 어떻게 대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짧게 고민한 세이아드는 일단 정상적으로 굴어보기로 했다.

“급히 떠오른 게 있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낮게 깔린 세이아스의 말투가 워낙 무뚝뚝해, 레사스를 호위하기 위해 선 기사들이 몸을 굳히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레사스는 그의 목소리에 겁먹는 대신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아무래도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안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는 불필요한 대화를 이어 가는 왕자를 일단 숙소에 데려다 놓기로 했다. 등을 돌린 세이아드는 앞장서 성안으로 들어섰다. 긴 계단을 올라 홀으로 들어서자 훈기가 끼쳤다. 흘끗 곁눈질로 뒤를 확인하니 레사스의 안색이 한결 풀리는 게 느껴졌다. 얕은 한숨을 내쉰 그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떻게 한다.’

캘러안에게 명해 새로 지정한 왕자의 처소로 걸어가는 동안 그는 고민에 잠겼다. 당장 왕자를 친근히 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세이아드 자체가 긴 시간 감정을 다양하게 표현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고, 하루아침에 적개심을 지워 내고 다정히 군다면 레사스가 오히려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상냥한 말을 건네 본 적이 구 년 전이다. 웃음도, 친절도, 염려도 모두 먼 과거의 일이었다. 웃는 법도 우는 법도 잊었으니 세이아드가 레사스에게 감정적으로 친근히 구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세이아드가 원하는 건 왕자의 능력을 빌리는 것뿐, 그의 측근이 될 마음은 없었다. 그러니 레사스의 호감을 살 필요는 없다. 그의 성격 자체가 원체 공평한 이이니, 지난 잘못을 바로잡는 정도만 되더라도 그는 세이아드에게 기꺼이 정화의 힘을 빌려줄 터.

하면, 일단 오늘 생길 일을 막는 것부터 생각하자.

때맞춰 레사스의 처소가 보였다. 동관 끝에 위치한 그의 방은 바로 옆에 작은 방이 두 개 붙어 있어 기사들도 머물 수 있었다. 연회장이나 정원과는 거리가 한참 있지만, 아스테르의 바람처럼 별궁에 머무는 것보다는 나았다.

안내된 방을 살핀 레사스는 별다른 불만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안카 경이 안쓰러운 듯한 얼굴로 레사스를 봤을 뿐 당사자는 덤덤했다. 기실, 조금 놀란 것 같기도 했다. 몇 번이나 방을 살피던 레사스는 경계 어린 눈으로 세이아드를 주시했다.

“오늘따라 평소와 다르군요, 공.”

별다른 일을 하지 않은 것 자체로도 의심을 살 관계이긴 했다. 무시하지 않고 그를 상대해 본 게 한참도 더 전의 일이었으니.

“내게 바라는 것이라도 있는 건가요?”

비단 지금 말하려는 것 때문에 그에게 이리 굴지는 않았지만, 왕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굳이 그를 기다려 만난 건, 단지 얼굴을 확인하고자 한 일은 아니었다.

“기원제는 이번이 처음이시니 잘 모르심이 당연하지만, 축제라기보다는 위험한 의식에 가깝습니다.”

기원제를 언급하는 순간 살짝 풀어져 있던 레사스의 얼굴이 굳었다.

“특히나 경험이 없는 이에게는 더 위험하고.”

세이아드는 이 의식 자체에 레사스가 참여하지 않길 원했다. 만약 그 장소에 있게 됨으로써 왕자가 그의 측근을 잃게 된다면, 애당초 그의 구실을 만들지 않는 쪽이 옳았다. 굳이 레사스에게 어떤 호감을 사고자 안카 경이 다치는 상황을 기다리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경험이 아니라 능력이겠죠.”

그때 레사스가 날카롭게 말을 쳐 냈다.

“당신답지 않군요. 보통의 귀족처럼 돌려 말하는 건 그대의 방식이 아닐 텐데. 차라리 그냥 전처럼 말하지 그랬습니까. 쓸모라곤 찾아볼 수 없으니 물러나 있으라고.”

흰 얼굴이 분노로 타올랐다. 무언가를 조금이나마 기대했다가 놓아 버린 사람처럼 레사스는 그를 쏘아보았다.

분위기가 한층 삭막해졌다. 레사스의 호위 기사들은 아예 충성심이 없는 것은 아닌지 굳은 모습으로 세이아드를 보고 있었고, 안카 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이아드는 왕자에게 제가 전하고자 하는 걸 좋게 설명할 길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언변이 좋았다면 모르겠지만, 그는 긴 시간 이런 교류와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게다가 왕자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바로 얼마 전까지 저런 말을 달고 살았다면, 더더욱.

“아예 참석하시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기원제의 시작 의식에는 함께한 뒤 사냥이 시작하기 전에 돌아가시란 뜻입니다.”

그러자 안카가 왕자를 대신해 나섰다. 왕실의 한낱 기사인 그에게는 티테르인 세이아드를 제지할 힘이 없었으나, 실례를 무릅쓰고도 입을 연 것이다.

“더는 전하를 욕보이지 말아 주십시오, 대공. 전하께서는 엄연한 솔리아스의 빛이십니다.”

“그러나 가이드는 아니지.”

세이아드의 적나라한 지적에 안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공공연한 사실임에도 이걸 입 밖에 꺼낼 수 있는 이는 몇 없었다. 세이아드는 왕자를 달래는 대신 현실을 설명해 주기로 했다.

“니르아는 약점인 핵을 정확히 파괴해야만 죽는 괴물입니다. 머리를 날려도 죽지 않고 사지가 잘려도 자라나는 그런 괴물이니, 아무리 크기가 작더라도 경험이 없다면 당황할 터. 지킬 사람이 늘어나는 걸 달가워하는 티테르는 없습니다.”

“나나 내 기사들 모두 자신을 지킬 정도의 힘은 있습니다. 그대의 말은 왕실의 방패를 욕보이는 것과 다름없고.”

레사스는 앞서 보이던 분노를 차차 삼키기 시작했다. 세이아드는 어렴풋이, 그가 제게 더는 화를 내지 않기 시작한 시점이 이로부터 머잖은 미래라는 걸 상기했다. 더는 화조차 내고 싶지 않다는 듯 레사스는 대화를 끝냈다.

“솔리아스의 왕자는 기원제에 참석해야만 하고, 나는 그 전통을 깰 생각이 없습니다. 나의 존재가 그대에게는 거슬릴지 모르나 그게 명분이 되진 않지요. 이만 물러가세요.”

더는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대신해 레사스는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피하는 그를 보던 세이아드는 일단 물러가기를 택했다.

“그럼 편히 쉬시기를.”

조롱이라 여겨졌는지 기사들의 눈빛이 한층 매서워졌다. 왕자를 모심에도 그에 따른 권세를 누리지 못하는 기사들을 훑어본 세이아드는 왕자를 한 번 더 살폈다. 저를 보지 않고 고개를 돌린 레사스의 옆모습을 보다가 세이아드 또한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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