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흰 늑대가 그려진 남색 깃발이 매서운 바람을 따라 요동치길 한참, 왕세자의 행렬이 지척에 보이기 시작했다. 태양이 그려진 붉은 깃발을 든 왕실 기사들을 선두로, 진즉 보내 두었던 프로시어스 가문의 기사들이 행렬을 보호하여 따라오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오는 깃발들마저 확인하고 나니, 세이아드의 기억과 현재 일어나는 상황이 똑같다는 게 확실해졌다. 이번 기원제에는 남쪽의 수호 가문인 실드라스가 참석하지 못했다.
실드라스 가문은 왕후의 친척으로, 어떠한 옹호도 받지 못하는 레사스 왕자의 유일한 편이기도 했다. 그마저도 완벽한 편은 아니었는데, 현 왕후의 둘째 아들을 우선시하며 레사스 왕자는 마지못해 지켜 주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차기 가주인 시온 실드라스만큼은 늘 레사스 왕자의 곁을 지키곤 했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연유는 승계를 위해서였다.
몇 년 전부터 병색이 완연했던 가주는 끝내 겨울을 맞이하지 못하고 죽었다. 티테르의 승계 문제는 왕국에서도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었기에, 실드라스 가문은 이번 기원제에는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예외를 얻었다.
그렇다면 정말 기억과 다름없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어느 정도는 오늘이 과거라고 여기면서도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 와서 분명해졌다. 어떻게 움직일지를 다시금 확신한 그는 성문 앞까지 당도한 왕세자를 맞이하기 위해 문을 나섰다.
금으로 장식된 왕실의 마차가 멈추는 동시에 세이아드 또한 말에서 내렸다. 그의 뒤를 따른 가신들 역시 말에서 내려 왕세자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발판을 가져온 기사가 마차의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왕국의 빛, 아스테르 전하를 뵙습니다. 솔리아스에 영광이 있기를.”
고개를 숙인 세이아드를 시작으로 가신들이 허리를 굽혔다. 솔리아스의 예법은 티테르에게만큼은 무척이나 너그러워, 당대의 가주를 맡은 티테르는 왕실에게 필요한 정도만의 예의를 보이는 게 통상적이었다. 명목상은 왕과 신하지만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반드시 필요한 관계이기에 생긴 규율이었다.
“잘 지냈는가, 나의 별.”
기사의 손을 잡고 내려온 왕세자, 아스테르가 웃으며 다가왔다. 날카로운 바람에 휘날리는 금발은 부서지는 햇빛처럼 찬란하고 화려했다. 청명한 하늘을 담은 듯한 푸른 눈이 싱글거리며 세이아드를 보고 있었다.
“이리 와서 그대 얼굴을 보여 주게나. 많이 그리웠으니.”
예를 거두라는 그의 명을 따라 세이아드는 고개를 들어 그에게 다가갔다. 앞에 멈춘 세이아드를 보던 아스테르는 이내 흰 가죽 장갑을 벗었다. 그러고는 맨손으로 세이아드의 턱을 그러쥐었다. 날카로운 턱선이 부드러운 손길에 의해 감싸졌다.
“그새 얼굴이 상했군.”
반듯한 손끝이 뺨을 살짝 눌렀다. 약한 힘으로 턱을 돌리며 얼굴을 확인한 아스테르가 속삭였다.
“뺨이 많이 차가워. 오래 기다렸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스테르의 손에서 온기가 퍼졌다. 얼어붙은 뺨을 녹여 주는 손길이 언제나와 같이 자상하고 부드러웠다. 아무도 오지 않던 어머니의 장례에 찾아와 그를 달래 주던 그때처럼 말이다.
“…아닙니다.”
짤막하고 건조한 대꾸에도 아스테르는 웃었다. 그는 차가운 뺨 전체를 손바닥으로 감싸더니, 다른 쪽 장갑도 벗어 아예 세이아드의 양쪽 뺨을 보듬었다. 아스테르가 만진 부위를 통해 정갈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엉망진창으로 얽힌 속을 풀어 주는 듯한 기운은, 그간 가이드 없이 겨울을 준비하던 티테르의 몸을 빠르게 진정시켰다.
세포 하나하나가 기억하는 정화의 의식에 세이아드는 입을 다물었다. 이렇듯 다정하고 자상한 그의 주군일진대, 세이아드가 폭주하던 그 순간에 아스테르는 없었다. 항시 그를 곁에 두고 진정시키던 아스테르는 죽음을 선고받던 날에만 자리를 비웠다. 꼬박 하루 내내 이어진 폭주에도 나타나지 않고 마지막엔 그를 포기했다.
…생각보다도 더, 아스테르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덤덤하던 마음에 갑자기 인 물결이 불편했다. 왕세자로서 아스테르의 결정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다. 세이아드가 그의 위치였다면 별반 다르지 않게 행동했을 것이다. 폭주한 티테르를 말릴 수 있는 건 가이드가 유일했지만, 그 과정에서 가이드는 반드시 다치게 된다. 태양이 될 존재가 감수하기엔 지나치게 큰 위험이었다.
그러니 원망은 없다. 배신감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만, 아스테르는 그의 가이드로서 할 일을 했다. 그 이상을 기대한 건 욕심이고 망상이다. 그러니 아스테르를 미워할 필요는 없다.
레사스 왕자와의 관계를 되돌리려는 건 모두에게 최악의 결과를 막기 위해서지 왕세자를 굳이 적으로 대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밖이 추우니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무뚝뚝한 말에도 아스테르는 햇살처럼 웃었다. 뺨에서 손을 뗀 그는 이번에 세이아드의 손을 잡았다. 장갑도 끼지 않아 얼어 있던 손을 아스테르가 녹였다.
“그래, 그러지. 들어가서 네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
흔쾌히 응한 아스테르는 같이 가자는 듯이 세이아드를 이끌었다. 관성처럼 그를 따라 움직이려던 몸이 멈칫했다. 악시드 영지의 영주로서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는 건 그의 의무이나, 왕세자를 따르던 세이아드는 그가 원하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들어주고는 했었다. 지금처럼 맞이해야 할 손님들을 가신에게 맡기고 가는 일이 허다했다는 뜻이다.
주저하는 세이아드가 이상했는지 아스테르가 그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웃는 푸른 눈을 마주 보았다. 저 눈을 보고 있으면 그의 명을 따라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치밀고는 했었다.
…그러나, 오늘의 세이아드는 할 일이 있었다. 참사를 막기 위해서는 오늘 참석한 티테르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원래도 세이아드를 싫어하는 이들이니 여기서 더 반감을 샀다간 협력을 얻어 내지 못할 것이다.
“저는 금방 뒤따라가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먼저 들어가셔서 몸을 녹이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아스테르는 웃는 얼굴 그대로 세이아드를 빤히 보았다. 고개를 슬쩍 기울인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피식 웃었다.
“그대답지 않아.”
지나가는 말인 듯 하나 안에 담긴 내용이 그렇지 않았다. 세이아드는 생각해 둔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제가 배운 게 없어 그리 무례하다고.”
생각지 못했던 말인지 아스테르가 눈썹을 치켜떴다.
“누가 감히 그런 말을 하더냐?”
다정했던 푸른 눈이 청량한 하늘에서 얼어붙은 호수가 되었다. 세이아드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라 출처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행동이 전하께 누가 되는 듯하여… 오늘 같은 날은 예의 있는 시늉만이라도 하려고 합니다.”
실제로 항상 듣던 말이니 꾸며 낸 건 아니었다. 아스테르는 뚫어지게 세이아드를 주시하다가 천천히 원래의 웃는 얼굴로 돌아갔다.
“나의 별은 언제나 나를 기쁘게 하는군.”
아스테르의 손에서 차차 힘이 빠졌다. 놓아줄 듯 말 듯 손목을 맴돌던 손가락이 완전히 멀어졌다.
“그렇다면 말리진 않겠다. 하지만 나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야.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인내심이 없거든.”
말을 마친 아스테르는 눈을 휘어 웃어 준 뒤 등을 돌렸다. 세이아드가 선물한 늑대의 털로 만든 망토가 크게 펄럭이다 가라앉았다. 사라지는 뒷모습을 눈에 담던 그는 잡혔던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메마른 입을 축이며 세이아드는 뒤돌았다. 왕세자를 완전히 안으로 맞이하기 전까지 멈춰 있던 행렬이 그제야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다음으로 입장한 것은 서쪽의 티테르인 브리데히트 공작이었다. 그의 딸인 노바는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아 기원제에 참여할 자격이 되지 않았다. 기사들의 호위 아래 마차에서 내린 공작은 답지 않게 나와 있는 세이아드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찡그렸다. 그런 그를 향해 세이아드는 간략히 인사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모든 티테르간의 신분은 동일했다. 북부의 영지가 워낙 크고 척박한 탓에 프로시어스 가문에는 대공이라는 호칭이 주어지긴 했으나, 티테르 간의 신분 차이를 두는 건 아니었다. 다만 각자의 나이에 따라 서로 편한 대로 말을 높이거나 낮추기도 했는데, 나이가 제일 많은 브레드히트 공작에겐 모두 예의상 말을 높여 주었다.
“환대에 감사드리오.”
무슨 영문으로 마중을 나왔냐는 듯이 세이아드를 관찰하던 공작은 이내 한마디를 덧붙였다.
“노바가 있었으면 반가워했겠군. 내년에도 이런 일이 생기길 바라야겠소.”
내년부터는 기원제가 열릴 일은 없겠지만, 세이아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를 끝냈다. 별 반응 없는 모습에 공작은 김이 식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 공작 일행에게 안내를 붙인 세이아드는 그다음으로 동쪽의 티테르를 맞이했다. 베트리아 공작은 마차에서 내린 뒤, 그녀를 기다리는 세이아드를 보다가 비웃음을 지었다.
“별일이군.”
그 말을 끝으로 공작은 세이아드를 지나쳤다. 공작의 딸, 스텔라가 없는 걸 보면 실드라스 가문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양이었다. 작위를 수여받지 않은 티테르는 비상시가 아니면 항시 동원되진 않으니, 규칙을 어기진 않았다. 더군다나 스텔라는 세이아드를 피했기 때문에, 오지 않는 쪽이 옳았다. 이것마저도 기억과 일치했다.
두 명의 티테르를 마중한 뒤에 세이아드는 다섯 개의 가문을 더 맞이했다. 그들은 모두 각 공작들의 방계로, 티테르의 피가 반만 섞인 존재들이었다. 티테르처럼 완벽한 이능을 지니진 않았으나 평범한 이들과는 구분되는 능력을 조금씩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행렬의 끝에 다다라서야 마지막 손님을 볼 수 있었다. 앞서 지나간 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의 기사들이 겨우 마차를 지키고 있었고, 마차는 오래되어 낡아 있었다. 방치되고 버려져, 그저 존재하고 있는 누군가처럼 말이다.
이제 막 갓 성인이 된 게 분명한 갈색 머리의 기사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세이아드를 보고 있었다. 서임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듯한 것이, 어떻게 굴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티테르를 처음 만나는 이들이 흔히 보이는 모습이기도 했다.
“악시드 대공을 뵙습니다. 저희는 레사스 전하의 호위 기사입니다.”
그때 백발이 희끗희끗한 노기사가 정중한 인사와 함께 앞서 나왔다. 그런 그를 따라 기사들이 황급히 예를 취했다. 경험이 하나같이 부족해 보이는 어린 기사들 속에서 유일하게 연륜이 묻어나는 이였다. 인자해 보이는 인상의 노기사를 보며 세이아드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안카 경.”
제 이름이 불리자, 노기사는 생각조차 못했다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세이아드를 보았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노인의 얼굴을 세이아드는 무표정으로 훑었다. 그의 기억에 있는 안카는 본인의 피와 이미 죽은 기사들의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멀끔한 상태의 노기사는 그때와는 동일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당시의 안카는 비참하게 죽어 가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겠군. 그대의 주군을 모시게.”
세이아드의 명에 노기사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얼른 마차로 다가간 그는 낡은 문을 열었다. 발판을 가져다주는 이 하나 없이 어수선한 장면을 보고 있자니 왕족의 마차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왕자는 익숙하다는 듯 그 안에서 나왔다. 허리를 굽히며 성큼 마차 밖으로 발을 딛고는, 쉽게 균형을 잡으며 땅 위에 섰다. 서서히 상체를 바로 편 왕자와 세이아드의 시선이 마주쳤다.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왕자의 검은 머리칼을 헤집었다. 부드러운 곱슬기가 살짝 스민 머리칼이 이마를 덮었다가 흩날리길 반복했다. 새벽 하늘 같은 보랏빛을 담은 눈동자가 세이아드를 빤히 보았다. 그와 동시에 웃고 있던 부드러운 눈웃음이 서서히 가시기 시작하더니, 매섭게 얼어붙으며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