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꼭 같은 편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에게 정화를 받을 정도로는 사이를 회복해야 했다. 분명 그의 가이드는 왕세자였으나, 왕세자의 힘으로는 제 폭주를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누구보다 강하다 일컬어지는 레사스의 힘을 믿어 봐야 했다.
물론, 레사스 왕자를 향한 거부감이 지금 얻은 결론으로 인해 단번에 사라진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긴 시간 적으로 삼고 미워했던 마음은 세이아드의 삶 전체에 얼룩져 있었다.
다만 전처럼 그를 삼킬 듯이 불타오르지도 않았다. 차가운 칼날이 그의 분노를 식혔는지는 몰라도, 저에게 죽음을 선사한 존재가 이상하리만치 전보다는 덜 증오스러웠다. 죽기 전 떠올린 그들의 과거 때문인지, 아니면 죽기 전 느낀 회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행동이 증오스럽진 않았다.
왜냐면, 왕자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폭주한 세이아드는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악인이었고, 왕자는 그런 그를 막았다.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도 물러나 있지 않고 가이드로서 그의 티테르들을 지켰다. 세이아드가 얼마나 그를 싫어했는지와는 상관없이, 왕자는 항상 곧고 선량한 존재였다. 가장 오래 지켜보고 부딪쳐 왔으니 그 또한 잘 알았다.
그리고 세이아드는 그와 대치하면서도 왕자의 행동만큼은 비난할 수 없었다. 그게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면서도 그는 왕세자의 옆에서 명을 따르며, 니르아를 죽이는 과정에서 힘없는 이들이 희생당하는 걸 무시해 왔다. 방법은 다르더라도 어쨌든 더 큰 악을 무찌르는 것이니, 왕세자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믿었다. 왜냐면 왕세자 또한 세이아드에게만큼은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손에 묻힌 피가 너무 많았다.
세이아드는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던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흉터와 굳은살이 박인 창백한 이 두 손에 남의 피로 칠갑이 되어 있었다. 살려 달라는 애원과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 증오에 찬 저주가 손 위에 고인 듯했다.
손이 살짝 떨려 와 주먹을 쥐었다. 지옥은 다른 곳이 아니라 그 장소에 있었다. 세이아드가 지옥이었으며 악마였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어머니의 오명을 벗어 내는 건 여전히 그의 숙원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무고한 생명을 죽이지 않도록 스스로를 제어하는 것이다.
“수정할 게 하나 있네.”
고심하던 세이아드는 캘러안에게 서류를 돌려주며 말했다. 확답을 기다리고 있던 집사장이 그의 말을 경청했다.
“레사스 전하의 거처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군. 본성에 있는 동쪽 침실을 내어 드려라. 부족함 없이 모시도록 충분히 사람을 붙이고.”
예상치 못했던 명인지, 내내 웃고 있던 캘러안의 눈에 놀란 기색이 얼핏 스쳤다. 그러나 노련한 집사는 사족을 붙이지 않고 금세 감정을 갈무리했다.
“그리하겠습니다.”
물러가려는 캘러안에게 세이아드는 한 가지를 더 명했다.
“그리고 퀼리는 이번 기원제 동안 저택에 머물 것이다. 다른 시종 역시 필요 없으니 그리 알거라.”
제 아들을 저택에 두라는 말에 집사장의 얼굴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기원제에 참가하는 것은 대대로 악시드 영지의 이들에겐 영광으로 여겨졌으니, 갑작스레 그걸 금하자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나 캘러안은 앞서 그랬듯, 노련하게 본인을 추슬렀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말을 몰 하인이라도 데려가심이 어떠신지요.”
“됐다.”
안 그래도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기원제이니 사상자는 한 명이라도 줄여야 했다. 나가 보라는 듯 침묵하는 세이아드를 잠시 주시하던 캘러안은, 이내 공손히 인사한 뒤 방을 물러났다. 그런 그를 보며 한마디를 해 주려다가 곧 그만두었다. 사람이 많이 죽을 것 같아 참여하지 말라는 말은 제정신으로는 믿기 어려운 일일 터니.
캘러안의 발소리가 한참 멀어지고 난 후에야 세이아드는 침실과 이어진 서재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 벽면에 붙어 있는 어머니의 초상화가 문득 눈에 밟혔다. 말없이 그림을 응시하던 그는 문을 열고 서재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작은 책상에 놓인 종이와 깃펜을 집어 들어 창가에 앉았다.
창밖 아래로는 순찰을 돌고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모두 가문의 훌륭한 기사들이나 세이아드에게 충성하는 이들은 아니었다. 그리고 저들 중 누군가는 오늘 있을 일로 죽게 될 것이다.
깃펜을 든 세이아드는 복잡하게 얽힌 과거의 일을 종이에 써 놓고자 했다. 기억은 언제나 흩어지고 불분명해지기 마련이라, 확실하게 떠올릴 수 있는 건 적어 두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당장 기억나는 큰 사건은 단연코 오늘 있는 일이었다.
혹한기가 무사히 지나가길 기원하는 축제인 기원제는 겨울이 처음 오는 악시드 영지에서 이루어졌다. 첫날의 의식이 기원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가이드인 왕족들과 각 영지의 티테르가 모두 이곳에 모여 밤의 숲 경계에 있는 니르아를 죽이는 거였다.
니르아는 솔리아스 왕국의 모든 끝을 둘러싼 숲에서 나오는 고대의 괴물로, 그들의 왕국을 고립시키는 존재이자 유구하게 왕국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했다. 겨울이 찾아오면 숲의 중심에서부터 기어 나온 니르아는 보이는 모든 인간을 해친다. 그 크기와 힘은 어느 곳에 서식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나뉘었다.
숲의 경계 쪽에 서식하는 니르아는 대개 늑대와 여우 사이의 몸집을 한 괴수로, 잘 훈련된 기사라면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존재였다. 니르아는 밤의 그림자로부터 나오는 괴물이기에 그 형태가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경계의 니르아는 대부분 날짐승의 모습을 했다. 짐승과 다른 점이라면 어둠 속에서만 움직이며 사람의 정신을 잡아먹는다는 점이다.
대대로 기원제는 사고 없이 안전하게 이루어졌다. 원래는 다른 지역보다도 석 달이나 빠르게 겨울이 찾아오는 북부 영토를 다른 가문의 티테르들이 일정 기간 도와주기 위해 모인 것에서 유례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연합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정착했다.
그러나 이번 기원제에는 경계에 있어선 안 될 숲 중반부의 니르아가 빠져나오며 재앙이 닥쳤다. 중급 니르아를 상대해 본 적 없는 기사들이 경험 미숙으로 죽었고, 놀라서 도망치는 이들 사이에서도 사상자가 나왔다. 왕족을 대피시키기 위해 희생된 이들은 더더욱 많았다.
이 일로 인해 기원제는 올해를 기점으로 취소되었고, 레사스 왕자는 그의 최측근 중 하나를 잃었다. 죽은 이는 어려서부터 왕자를 지켜 온 오래된 호위 기사였다. 어찌 본다면 그저 호위 기사의 죽음일 뿐이겠으나, 왕자에게 있어서 그 기사는 퍽 소중한 존재였던 모양이었다.
‘부탁합니다, 대공! 제발 우리를 구해 주시오. 아니, 나는 괜찮으니 제발 안카 경이라도…!’
아수라장에 휩쓸려 숲으로 들어가게 된 레사스 왕자는, 그를 지키다 쓰러진 늙은 기사를 살려 달라고 세이아드에게 간청했었다. 눈물에 젖어 엉망이 된 얼굴로, 자존심이라곤 없이 그를 끌고 기어 와 세이아드를 붙들면서 말이다.
‘제발, 세이아드. 살아서 나간다면 뭐든 할 테니, 부디 안카 경을 구해 줘요….’
왕자는 꼭 어릴 적 그를 부르던 때처럼 매달렸다. 얼어붙은 손으로 기사를 끌어안으면서, 그에게 남은 마지막인 것처럼 말이다. 아마 그날이 왕자가 소중한 이를 잃은 마지막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이아드는 그 뒤로도 왕자의 소중한 이들이 죽어 가는 걸 방관했었다.
레사스 왕자는 그런 식으로 어른이 되었다. 능력 하나 없던 그를 지켜 주던 자들을 모두 잃고 나서야 그의 옆에 사람이 생겼다. 아스테르 왕세자는 그런 그를 보고 운이 지나치게 좋다 말하고는 했었다.
세이아드는 왕자를 내버려 두지도 않았으나 도와주지도 않았다. 그의 뒤를 따르던 기사들에게 왕자를 지키라고 명했지만, 사실 잘 알고 있었다. 이들만으로는 늙은 호위 기사까지 살릴 수 없으리란 걸. 그리고 그게 레사스 왕자 같은 사람의 영혼을 오히려 더 괴롭게 할 거라는 사실도.
무엇이 레사스 왕자를 괴롭게 하는지, 세이아드는 어쩌면 왕세자보다도 더 잘 알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별궁에서 외로이 크던 왕자에게는 그를 아끼는 사람이 누구보다도 소중했다는 걸 세이아드가 직접 겪어 봤었으니까.
세이아드는 한때 왕자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시기가 있었다.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다. 세이아드는 회상을 멈추고 다시금 종이에 사건을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레사스 왕자의 일을 잠시 미뤄 두고 그는 이 뒤로 이어진 니르아와 얽힌 사고를 기록해 나갔다. 그때 당시에도 이상하게 여겼던 것들이 종이 위에 적고 보니 하나의 공통점을 보였다.
니르아의 행동반경이 넓어지고 있었다.
어둠 아래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니르아는, 1년 중 해가 제일 짧아지는 겨울이 되면 왕국 전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니르아의 속성은 고대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건국 설화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었다.
태초에 어둠과 인간이 공존하던 시대가 있었다.
낮이 되면 악마는 잠이 들고, 달이 떠오르는 밤이면 깨어나 인간들의 영혼을 훔쳤다. 어둠이 찾아와야만 움직일 수 있던 악마는 더 많은 인간을 잡아먹기 위해, 어느 날 태양을 삼켰다.
태양이 뜨지 않는 어두운 시간 동안 인간은 악마의 먹이가 되었다. 끝없는 밤이 이어졌고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숨었다. 피가 강물이 되어 흐르는 것을 지켜보던 달은, 더는 이를 내버려 둘 수 없어 그의 별들을 지상으로 내려보냈다.
네 개의 별은 힘을 합쳐 악마의 배를 갈라 태양을 구했다. 다시금 돌아온 태양은 저 높은 하늘로 올라가 지상을 비췄고, 그를 삼킨 악마의 영혼을 봉인한 뒤 버림받았던 인간들을 모아 태양의 나라를 세웠다.
여기서 태양은 솔리아스의 왕을 말하고, 티테르는 지상에 내려온 별들을 의미했다. 설화에 따라 탄생한 티테르는 동, 서, 남, 북 네 개의 가문으로 나뉘어 태양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었다.
이렇게 오래간 변함없이 이어지던 니르아의 행동 양상은 역사상 언제나 동일했다. 그러나 세이아드가 죽기 전부터 니르아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왕국의 중앙부에서도 출몰하기 시작했고, 정해진 규칙들을 어겼다.
‘여태까지 한 번도 생긴 적 없던 이변들이 점점 잦고, 빠르게 일어나고 있군.’
무언가 눈에 보일 듯하면서도 당장은 결정적인 것이 없어, 세이아드는 일단은 굵직한 사건을 마저 적어 나갔다. 얼추 기억난 모든 걸 기록한 뒤 그는 종이를 접어 갈무리했다. 당장은 제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파악해야 하니, 이것만 붙들고 있을 수 없었다.
서재에 꽂힌 수많은 서책 사이에 자리한 작은 책 하나를 꺼낸 그는 그 속에 종이를 숨겼다. 그의 서재에 들어올 이는 저 외엔 없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서였다.
책을 집어넣으려던 그는 책의 표지를 보고 멈칫했다. <작은 별 이야기>라고 적혀진 그 책은 밤하늘에서 떨어진 작은 별이, 그를 포기하지 않고 찾아 준 달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어린아이들이나 읽을 법한 내용이었다.
잠시 멈춰 있던 손이 느릿하게 움직여 책을 제자리에 두었다. 두꺼운 서적들 사이에 꽂힌 얇고 작은 책을 말없이 주시하던 세이아드가 곧 몸을 틀었다. 곧 손님들이 도착할 시간이니, 그 또한 준비할 것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