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이른 아침부터 벌어진 소동에 성안이 어수선해졌다. 퀼리는 처치를 끝낸 의원에게 귀엣말로 주인님이 정신도 몸도 아프신 것 같다며 언질을 주었고, 난데없는 소란에 하인들은 근처를 배회하며 수군거렸다.
‘영주님이 미치셨다며? 악마가 들었다던데?’
‘원래부터 악마 같은 분이니 벌을 받은 거 아냐? 죽어 간 영혼들이 분명 저주한 거야.’
‘이러다가 우리도 죽이시면 어떡해?’
세이아드는 침대에 걸터앉아 귓가에 들리는 복도 너머의 속삭임을 무심히 넘겼다. 티테르 중에서도 유독 오감이 발달한 세이아드에게 소곤거리는 귓속말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복도 너머의 속삭임은 바로 앞에서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귓가에 들리는 독설이 그에게 상처가 되지는 못했다. 저를 저주하는 말은 지겨울 정도로 들어왔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들었던 말 또한 증오에 가득 찬 경멸 아니던가.
‘당신처럼 끔찍한 이는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
불현듯 서늘한 보라색 눈이 떠올랐다. 남들에게는 언제나 온화하고 다정한 청년은, 오직 세이아드에게만 그렇듯 차가웠다.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없다는 상냥한 왕자가 치를 떨 정도로, 세이아드는 모두가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겨울이 제일 먼저 찾아오는 북쪽 땅 악시드를 지키는 프로시어스 가문은, 북부 전체를 수호하며 누구보다 강력한 티테르를 품는 것으로 이름난 이들이었다. 한때는 왕국 전체의 존경을 받았던 가문은 세이아드가 성년이 되던 해 생긴 일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세이아드의 어머니이자 프로시어스의 가주이던 세레나가 폭주로 인해 무고한 생명을 해친 것이다.
티테르는 능력을 쓸 때마다 힘의 근원인 내면의 파장이 흔들리게 된다. 날뛰는 힘을 가라앉히는 가이드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 능력을 계속 사용하면 끝내 자아를 잃고 공격적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를 ‘폭주’라 했다. 모든 티테르가 유일하게 두려워하고 죄악으로 여기는 것이기도 했다.
솔리아스의 왕후가 매년 거행하는 봄철 감사제에 참가했던 어머니는 때아닌 폭주로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을 죽였다. 북부 다음으로 강한 티테르를 배출하는 남쪽 영토의 실세인 실드라스 가문의 기사 스무 명이 죽었고, 그 자리에 있던 왕후 역시 목숨을 위협받았다. 왕후를 시해하려 한 어머니의 행동은 반역으로 간주되어 처형을 선고받았다. 실드라스 가문의 피가 희미하게나마 흐르는 왕후를 대변해 실드라스 가문이 북부를 뒤엎었다.
그 이후로 프로시어스 가문은 반역자의 집안이 되었다. 자칫하면 가문 전체가 사라질 뻔한 위기가 도래했으나, 그들은 살아남았다. 북부를 지키는 티테르를 함부로 죽일 수 없었기도 했고, 전 왕후의 소생인 왕세자의 간청 때문이었다.
이 일 이후, 세이아드는 한평생 가문의 명예를 복권하기 위해 살았다. 그의 가문을 구해 준 왕세자의 명을 따라 온갖 일을 했다. 현 왕후의 왕자들이 힘을 갖지 못하게끔 수많은 방해 공작에 손 담았고, 인류와 평생 대적하는 괴물인 니르아를 말살하기 위해서라면 그 과정에 누가 희생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그 누구보다 많은 니르아를 처치해 공을 인정받는다면, 그의 가문이 과거의 명예를 회복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보여 준 세이아드의 손속이 워낙 잔인했기에 그의 영지민들마저도 그를 두려워했다.
하나 세이아드에게는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다. 처형대에 오르기 전, 피를 토하며 간청하던 어머니의 망령이 언제나 그의 옆에서 속삭였다.
‘나는 전하를 해하려 한 적이 없단다, 이드. 폭주도 하지 않았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태양이 저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덮치려 했던 거대한 니르아를….’
어머니의 증언을 입증할 사람은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실드라스 가문의 이들과 왕후만이 유일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입을 모아 어머니가 갑자기 폭주해 망령을 본 것이라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니르아는 오직 겨울의 밤에만 나타나는 괴물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결백을 밝힐 방법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그렇기에 세이아드는 왕이 되면 모든 것을 되돌려 주겠다는 왕세자를 따랐다. 오직 왕세자만이 어머니의 사건을 자세히 조사하겠다고 말했으며, 모두가 반역자라 칭하는 어머니를 훌륭한 티테르였다고 말해 주었다.
같은 가문의 사람들조차도 어머니에게 등을 돌렸으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왕세자만이 그의 편을 들었다. 세이아드가 그를 따르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평생 그가 충성을 바쳐 온 왕세자는 끝내, 세이아드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오명은 결국 지워지지 않았고 그의 아들인 세이아드 또한 폭주로 미쳐 끔찍한 학살을 했다.
죽기 전에 느꼈던 강한 회한이 세이아드를 흔들었다. 언제나 딱딱하게 굳어 무감각했던 마음에 균열이 갔다. 평생 옳다고 믿어 왔던 것이 뿌리째 뽑혀 나가는 기분이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각하.”
전신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허망함에 침묵하고 있던 그에게 안부 인사가 건네졌다. 고개를 돌리자 집사장인 캘러안이 그를 향해 인사했다. 퀼리의 아버지이며 오랜 가신인 그는, 퀼리의 죽음 이후 세이아드를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 정중한 면모는 그대로였으나 세이아드와 한자리에 있는 걸 피하더니, 세이아드가 죽기 전쯤엔 이곳을 떠나겠다 말했었다.
“전령이 먼저 도착했습니다. 전하의 행렬이 악시드 호수를 막 지났다는 소식이더군요. 위치로 미루어 보아 정오쯤에는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만찬은 시간 내로 준비될 예정이며 축하 연회도 점검은 끝났습니다. 귀빈들께서 머물 처소에 대해서만 마지막으로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캘러안은 앞선 소동이 없던 일인 것처럼 보고를 이어 나갔다. 이 또한 세이아드의 기억에 자리한 과거와 같았다. 그를 빤히 쏘아보던 세이아드는 집사장이 내민 서류를 받아든 뒤 물었다.
“올해가 언제인지 말해 보거라.”
“건국 357년입니다. 가주님께서 맞이하시는 다섯 번째 기원제의 시작일이기도 하지요.”
언질을 들은 건지 몰라도 캘러안은 차분히 답했다. 생각에 잠긴 세이아드에게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무래도 고약한 악몽을 꾸신 모양입니다. 몇 달간 쉬지 않고 일하셨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악몽이라.
그저 한낱 꿈이라기엔 직면했던 많은 일이 너무나 생생하고도 길었다. 그러나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마주한 이마다 입 모아 같은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 길이 당장 없으니, 눈앞에 닥친 것부터 해결하는 게 맞았다.
이것이 꿈이라면 언젠가는 깨어날 것이고, 만약 정말로 다시금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이라면… 나는….
세이아드는 서류 쪽으로 시선을 떨궜다. 본채와 별채로 나누어진 성의 공간에 따라 머물게 될 귀빈들의 명단이 나열된 것으로, 익숙한 이름들이 많았다. 본채에 머물 수 있는 이는 왕족을 비롯한 다른 가문의 티테르뿐이었고, 그 외의 귀족들은 모두 별채에 머물렀다. 애당초 기원제에 참여할 수 있는 귀족의 숫자는 각 티테르 가문의 가까운 방계까지였으므로 수가 많지 않았다.
이름을 훑던 금색 눈동자가 멈춘 곳은 별채에 머물 이들이 나열된 끄트머리였다. 그곳에는 현 왕후의 장자이자 둘째 왕자인 레사스 라만 솔리아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왜 그가 이곳에 있나를 곱씹던 세이아드는, 곧 이것이 자신의 결정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가이드가 아닌 왕족은 곧 귀족과 다름없으니,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라.
왕세자인 아스테르는 서신으로 먼저 그에게 명했다. 예법과 규율에 맞지 않는 대우임에도 세이아드가 명을 따른 이유는, 왕세자의 권력이 굳건해서이기도 했으나 레사스 왕자의 처참한 입지 때문이었다.
태초에 티테르가 생겨나며 동시에 이 땅에는 가이드도 존재했다. 막강한 힘은 언제나 정신의 균열을 불러왔으며, 그런 균열을 잠재울 수 있는 건 가이드 외엔 없었다. 솔리아스의 왕족은 대대로 티테르를 돕는 가이드의 힘을 유일하게 지녀 왔다.
가장 강력했던 통치자인 라만 1세는 상성을 가리지 않고 많은 티테르의 파장을 정화했다는 말이 전해지나, 보통은 한 명의 왕족이 한두 명의 티테르를 담당할 역량을 지녔다. 현왕족들은 선조만큼 무분별하게 정화할 수는 없었지만 현존하는 티테르의 수가 언제나 일정했기 때문에, 그 정도의 힘을 가진 것만으로도 왕족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사스 왕자에게선 왕족을 대표하는 어떤 것도 없었다. 솔리아스의 왕족들이 대대로 타고나는 금발과 벽안 대신 그는 흑발을 타고 태어났으며, 가이드의 증표로 불리는 등 뒤의 반투명한 문양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글을 배울 시기쯤에 나타난다는 가이드 특유의 자가치유력도 없었으니, 그에게 어떠한 힘도 없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이번 기원제 이후에는 모든 것이 바뀌겠지만.’
세이아드가 겪은 현실이자 미래가 그대로라면, 레사스 왕자는 이번 기원제를 기점으로 조만간 힘을 각성한다.
그를 무시하고 비웃던 이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왕자의 힘은 설화로 전해지던 라만 1세의 것을 그대로 빼닮은 강력한 능력이기도 했다. 그는 어떠한 티테르와도 완벽한 상성을 지닌, 전에 없던 가이드였다. 정화 능력 자체도 워낙 강해,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티테르를 안정시키는 레사스 왕자가 단숨에 왕위 계승권 후보에 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 생에서 세이아드는 그런 그와 수도 없이 대치했다. 그가 모시는 왕세자가 원했던 일이기도 했으나 세이아드 개인이 그를 싫어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레사스 왕자의 안에 흐르는 현 왕후의 피를 혐오했으며 그의 주변인 또한 증오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서류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종이가 구겨졌다. 여태껏 그가 해 왔던 대로라면 왕세자의 명을 당연히 따라야 했다.
하지만….
하나 이대로 과거와 같은 길을 밟는다면 똑같은 죽음에 도달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왕세자는 그의 은인이 맞았지만 동시에 그를 버렸다. 가문의 명예를 찾기 위해 임한 모든 일은 오히려 그를 솔리아스의 악마라 불리우게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으나, 세이아드가 택한 길은 잘못됐다. 과거와 똑같은 선택지를 고른다면 그가 보게 될 미래는 뻔했다. 왕세자의 편에 서서 전에 했던 일들을 반복하고, 그러다가 끝내 폭주를 맞이하는 것.
폭주의 원인은 알 길이 없지만, 과거를 반복하면 결과는 같겠지.
그걸 피하고 미래를 바꿀 방법은 하나뿐이다. 적으로 돌렸던 레사스 왕자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