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1. 연옥
“헉, 허억….”
세이아드는 식은땀에 젖은 상체를 일으켰다. 헐떡이는 숨을 내쉬던 그는 거친 손길로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넘겼다. 끔찍한 악몽을 꾸다 깬 것처럼 속이 뒤틀렸고 기분이 더러웠다. 무언갈 목격한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리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없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다 바닥에 부딪히며 깨어난 것처럼 전신이 욱신거렸다. 익숙한 통증이었다. 겨울이 다가오면 달고 사는 감각으로, 무리해서 능력을 쓴 후에 엄습하는 ‘대가’였다. 이걸 느끼는 건 유별난 일이 아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가 감각을 느끼는 이 상황 자체였다.
‘난 분명 죽었다. 처형당하지 않았더라도 죽었을 몸 상태였고.’
세이아드는 손을 들어 가슴팍을 확인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매끄러웠다. 서늘하고 창백한 상체는 어떠한 상처도 만져지지 않았다. 분명 저의 몸은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고 성한 곳 하나 없는 상태여야 하는데 말이다.
유독 짙은 눈썹을 찡그린 세이아드가 고개를 들었다. 은은한 그림자가 깔린 방이 눈에 아주 익었다. 손길이 묻은 오래된 가구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며,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타고 있었다. 생전 그가 쓰던 방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지옥이 이런 곳인가?
어떤 논리로도 설명되지 않는 광경을 훑던 그는 침대를 벗어났다. 땀으로 척척해진 로브가 펄럭이는 소리가 선명했다. 차가운 나무 바닥을 맨발로 내디딘 그는 창가로 걸어갔다. 두꺼운 커튼을 걷어 창을 열자, 매서운 소리와 함께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들이닥쳤다.
살을 에는 추위에 소름이 돋았다. 바람이 멀리서부터 실어 온 마른 나뭇가지 냄새와 차갑게 언 공기 따위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끝없는 하얀 눈밭만이 펼쳐진 풍경은 그가 자라 온 영지의 모습이었으나, 어쩌면 이게 그의 지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끝없는 추위와 고독뿐인 곳에 갇히는 건 저에게 가장 어울리는 형벌이 아닌가.
“각하, 기침하셨나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그를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흠칫하며 몸을 튼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문을 보다가, 성큼성큼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휙, 하고 젖혀진 문 뒤에는 세숫물을 담은 물통을 든 청년이 서 있었다. 그를 본 순간 서늘하던 세이아드의 눈이 흔들렸다.
“퀼리?”
퀼리는 집사장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세이아드를 보필해 온 시종이었다. 세이아드의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몇 없는 존재이기도 한 그는 5년 전에 죽었다. 혹한기의 시작을 알리는 기원제 첫날 벌어진 ‘그 일’ 때문에 말이다. 진즉 재가 되어 사라진 존재를 다시 볼 거라곤 여긴 적이 없어서, 늘 냉철하던 세이아드로서도 순간 동요하고 말았다.
“……? 괜찮으신가요, 각하? 안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놀란 것은 퀼리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주인을 살폈다.
“의사를 부르도록 할까요? 기원제 때문에 미리 불러들인 이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금방 올 겁니다.”
기원제라는 단어가 세이아드의 할 말을 앗았다. 눈앞의 퀼리는 꼭 생전 그가 하던 것처럼 굴고 있었다. 기원제를 앞두고 가장 분주해지는 북쪽 영지의 영주를 돕는 건 퀼리가 맡은 역할이었기 때문이었다.
퀼리는 세이아드가 짊어진 무게의 일부였다. 그가 지켜야 할 이들 중 하나였으나 지키지 못했던 이. 퀼리는 언제나 충성스럽고 성실했다. 명백한 치하의 표시가 없어도 늘 세이아드를 위해 뛰었고, 남들이 모두 세이아드로부터 등을 돌렸을 때도 묵묵히 그의 옆을 지켰다.
세이아드 자신이라면 몰라도 퀼리는 지옥에 있을 법한 이가 아니었다. 수백의 생명을 도륙한 살육자와 퀼리는 비할 바 되지 못했다. 죽음 뒤에도 이어지는 삶이 있다면 지옥 외에는 없을 거라 여겼던 세이아드에게 이 상황은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유추할 수 없으니 남은 길은 직접 묻고 찾아내는 것뿐이었다. 세이아드는 원래도 서늘한 표정을 더욱 굳힌 뒤 퀼리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지?”
질문을 들은 퀼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당혹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그가 간신히 되물었다.
“네?”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되묻는 퀼리에게 추궁에 가까운 질문이 쏟아졌다.
“넌 언제부터 여기 있었고, 내 몸의 상처는 어떻게 된 건가?”
퀼리는 당황한 표정으로 세이아드의 질문 세례를 듣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의 말에 하나씩 답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냐니요, 각하. 대대로 북부를 지켜 온 위대한 프로시어스 가문의 악시드 령 아닙니까. 저는 태어나서부터 스무 해가 넘게 각하를 모셔 온 충실하고 귀여운 퀼리이고요. 주인님, 괜찮으신 건가요?”
퀼리는 과거에서 그대로 나온 사람 같았다. 아니, 그와 함께했던 마지막 기억에서보다 훨씬 앳된 아이처럼 보였다. 기억 속의 퀼리는 세이아드와 같은 나이의 청년이었으나, 지금 서른을 앞둔 세이아드가 보기에는 한없이 어린 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상처는 또 무슨 말이시고요? 혹한기를 준비하시려 몇 주간은 성에만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그새 또 혼자 시찰을 돌고 오셨던 건가요!”
세이아드는 호들갑을 떨며 눈대중으로 제 모습을 살피는 퀼리를 묘한 눈으로 보았다. 기억은 끝내 흘려보낼 수밖에 없는 모래알 같아서, 붙들어 두려 해도 손아귀를 빠져나가곤 했다. 퀼리에 대해서는 어느 것도 잊지 않았다고 여겼음에도, 마치 과거로 돌아온 듯한 장면을 지켜보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이 시끄럽고 활기차졌다. 너무 긴 시간 침묵만이 세이아드의 옆에 남아 있었기에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차이였다.
‘꼭 진짜 같군.’
눈앞의 퀼리를 비롯해 그가 느끼는 감각들이 하나같이 현실 같았다. 마치 시간을 되감아 과거로 돌아온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 죽기 전 마지막으로 되뇌었던 소원이 하나 떠올랐다. 어떻게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서라도 그가 저지른 일을 막고자 했던 소원 말이다.
영혼을 바쳐서라도 간절히 바라기는 했지만, 그저 죽어 가는 자의 미련에 불과했다. 고작 그런 염원 따위로 시간이 되돌아갈 수 있다면 세상은 진즉 망자들의 미련으로 엉망이 됐을 터였다.
물론 세이아드는 평범한 망자는 아니었다. 그는 태초부터 이 땅을 지배해 온 괴물들인 니르아로부터 인류를 지킬 수 있도록 능력을 안배받은 ‘티테르’였다. 솔리아스 왕국의 건국과 함께해 온 티테르는 태어난 순간부터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으며, 그 능력은 매번 예상하기 어렵게 기상천외하고 변덕스러웠다.
그러나 세상에 아무리 기이한 능력이 있다고 해도, 일어난 일을 바꾸는 힘이 존재한다는 건 어디에서도 들어 보지 못했다. 그리고 설령 그런 이능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런 일이 그에게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굳이 시간을 되돌려 세이아드를 살아 있게끔 할 만한 티테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존하는 모든 티테르는 세이아드를 혐오했다.
그러니 과거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지는 건 모두 허상이다. 지옥이 만든 질 나쁜 환상임이 분명했다. 이 환상에서 깨어나는 방법은 하나뿐.
결정을 내린 세이아드는 곧장 행동에 나섰다. 퀼리로부터 등 돌린 그는 방으로 휙 돌아가, 침대로 향했다. 묻는 말에도 답 없이 서 있던 세이아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퀼리가 안절부절못하며 따라왔다.
“아무 말씀도 없으시니 이 퀼리는 너무 불안하군요. 안 그래도 말이 없으신 분이 오늘은 묵언 수행이라도 하시는 것처럼….”
옆에서 종알거리는 퀼리를 무시하고, 세이아드는 베개 밑에 둔 단검을 꺼내 들었다. 난데없이 단검을 든 세이아드로 인해 퀼리의 눈이 커질 대로 커진 순간, 세이아드는 망설임 없이 단검으로 팔목을 그었다.
“세이아드 님!”
날카롭게 벼려진 검날이 쉽게 살을 갈랐다. 흰 피부 위로 새빨간 핏줄기가 주륵, 흘러내렸다. 경악한 퀼리가 달려와 세이아드의 허리를 붙들었다.
“갑자기 왜 이러시나요, 네? 아까 말씀하신 건 다치겠다는 예고셨나요! 아니, 이게 아니지. 밖에 누구 없나? 의사! 의사를 불러오거라!”
난데없는 소란에 복도가 어수선해졌다. 기겁한 퀼리의 외침에 하인들이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아이고, 아이고, 곡 소리를 내는 퀼리를 내버려 둔 채 세이아드는 피가 흐르는 팔뚝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불에 덴 듯 화하게 올라오는 강한 통증이 핏줄을 타고 전신에 퍼지고 있었고, 환상이라고 여긴 그를 둘러싼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지속되었다.
깊게 베인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벌겋게 벌어져 세이아드를 마주했다. 이게 현실이라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