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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1. HAPPY BIRTHDAY TO YOU (34/36)

외전 11. HAPPY BIRTHDAY TO YOU

“그럼 이번 주까지 자료 조사한 거 메일로 보내 주고.”

“네.”

“다음 주 중으로 시간 내서 한번 모여요.”

“네.”

뻑뻑한 눈을 마사지하며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고작 한 학기의 대학 생활을 거친 새내기들은 아직까지 파릇파릇하기 그지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나만 찌들었지, 나만.

아, 과제 진짜 많다. 학점 관리 좀 잘해 둘걸. 머리가 지끈거렸다. 펑크가 났던 학점을 메우기 위해 들어온 수업은 내게 새내기 셋과 나 하나의 조별 과제를 선사했다. 그러니까 망했다는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새내기들을 데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큰일이었다.

“아, 오빠. 점심때인데 밥이라도 같이 드실래요?”

막 강의실을 빠져나갈 때 같은 조원이 내게 물어 왔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이 이후에 또 수업이 있었다.

“나 수업이 또 있어서. 다음에 같이 먹어요.”

“아, 아쉽다. 알겠어요. 다음 주에 봐요.”

방긋 웃는 얼굴에 마주 보며 웃어 주고 나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교양관까지 거리가 조금 있던 터라 걸음을 빨리해야 했다. 재수강 때문에 시간표가 꼬여 버렸다. 내 업이지, 뭐. 한숨이 터졌다.

그나저나 오늘은 다들 바쁜가.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며 핸드폰을 힐긋 내려다봤다. 오랜만에 조용한 휴대폰이 어색했다. 이상하게 아침부터 다들 연락이 없었다. 하긴, 바쁘긴 하겠지. 다시금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0월 중순.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매번 조별 과제, 장우진은 설계 과제 폭탄이었다. 그래서 매번 반 기절 상태로 우리 집으로 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강수하도 썩 다르진 않았다. 국가 고시가 1월 중으로 예정되어 있어서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김현은 이전에 들어간 드라마 촬영에 한창이었다. 거의 실시간으로 돌아가고 있는 촬영 환경에 우는 소리를 하며 전화가 왔던 게 어제였다. 김준은 프로 야구 시즌의 막바지로 여전히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고 이유한은 요즘 회사 일이 얼마나 바쁜지 매번 야근이었다.

최근에는 각자 바쁘기 그지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나도 그렇고. 덕분에 자주 보지 못하는 게 아쉽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휴학을 해야겠다고 짜증스레 말하던 장우진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오는 것 같아 무심결에 웃음이 나왔다.

겨우 속도를 내 도착한 교양관 중간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세이프. 강의 시작까지는 2분 정도 남아 있었다. 배가 좀 고프긴 하지만, 이 수업 끝나고 집에 가서 대충 먹어야지. 비록 세 시간 연강이긴 하지만. 무심한 생각이 들던 때.

“한지헌!”

“어. 아슬아슬했다.”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대학 동기 중 한 명인 신형이었다. 동기들 중 그나마 마음이 가장 맞아 거의 대부분의 수업을 같이 듣고 있는 친구였다. 뭐, 같이 놀러 다닌 덕에 이 친구도 학점 메우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긴 했지만.

“아씨. 시간표 완전 잘못 짰어. 공학 관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미친, 한나절이야.”

“그러니까 하루 이틀 학교 다니냐. 누가 시간표를 그따위로 짜.”

“잘못하면 그 성적으로 졸업하게 생겼는데 별수 있냐. 미친 것처럼 뛰어오면 어떻게든 들어오긴 하니까.”

어지간히 힘들었는지 밭은 숨을 내뱉던 녀석이 내 옆자리에 가방을 올려 두고 앉았다. 가을이라 나름대로 쌀쌀해진 날씨에도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아, 야. 옛다, 선물.”

“……뭐야?”

“뭐긴 뭐야. 선물이지. 아, 친구 진짜 잘 두지 않았냐.”

해맑게 웃으며 신형이 내게 건넨 것은 커피 우유였다. 무척이나 뜬금없는 데다 선물이라 이름 붙이고 줄 만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멍청한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야, 너 오늘 생일 아니야?”

오히려 이상한 눈을 한 신형이 내게 다시금 물었다. 생일?

“오늘 며칠이지?”

“……진짜 세상 퍽퍽하게 산다. 12일. 10월 12일, 네 생일. 등신아.”

“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하도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가다 보니 생일인 줄도 몰랐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그제야 커피 우유를 집어 들었다.

“야, 근데 이게 선물이야?”

“챙겨 준 게 어딘데.”

“참나. 그으래, 고맙다.”

어이없음에 웃음을 흘리며 어쨌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까먹고 있던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나,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엄마가 미국에 가 있으니 당연히 아침에 미역국이랄 것도 없어서 완전히 기억에서 지우고 있었다.

근데 엄마는 아들 생일인데 어떻게 전화 한 통 없을 수가 있지. 막 교수님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설 때는 괜히 그런 불퉁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세 시간쯤 지나면 연락이 올 것 같다. 거기는 아직 어제일 테니까. 오늘로 넘어가는 때에 연락 오겠지. 왠지 엄마라면, 그런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아, 엄마 보고 싶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

“가라.”

“집에 가냐? 아, 수업 아니면 밥이라도 같이 먹는 건데.”

“됐어. 나도 과제 폭탄이야. 할 일 많아.”

“생일날은 좀 쉬어라.”

“다음 주부터 시험 시작인데 과제도 산더미라.”

“으, 듣기 싫어. 간다.”

세 시간 연강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녹초 상태였다. 다른 건 모르겠고 배고프다. 벌써 4시였다. 그래도 수업은 끝났고 그나마 금요일은 공강이니까. 그걸로 위안을 삼으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가서 뭐 먹지. 집에 먹을 게 뭐가 있던가. 머릿속에 뻘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러다 문득 다시금 휴대폰을 힐긋. 여전히 조용한 휴대폰에 어쩐지 입술이 비죽거려졌다.

“나 오늘 생일인데…….”

왜 하필 너희는 오늘 그렇게 바쁜지.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 나니 서운한 마음이 밀려 올라왔다. 하지만 그냥 그건 내 투정이었다. 알고 있으니까. 바쁜 걸 어떻게 하겠어. 게다가 딱히 내 생일이 언제인지 말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말을 안 했는데 어떻게 알겠어.

괜히 불퉁해졌던 마음을 숨기며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엄마한테 전화나 해 볼까. 너무 시간이 늦었을까, 막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핸드폰이 울려 왔다.

“응, 엄마.”

-어떡해, 지헌아. 미안해.

“뭐가아.”

-엄마가 거기 날짜하고 여기 날짜 다른 걸 깜빡해서……. 어떡하니.

“아하하. 그럴 줄 알았어.”

역시 우리 엄마였다. 예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은 말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방금까지 불퉁하던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생일 축하해. 미역국은 먹었어?

“……응.”

-다행이네. 엄마가 챙겨 줘야 하는데.

무거운 발걸음을 집으로 옮기며 나는 웃고 있었다. 분명히 웃고 있었는데 마음이 시려 왔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어리광이라도 피우고 싶은 건지.

-잘 챙겨 먹고. 요즘도 바빠?

“응. 예전에 공부 좀 잘해 놓을걸 그랬어.”

-그래, 너 게임만 할 때 알아봤어.

푸흐흐,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렇게 듣기 싫던 잔소리였는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기도 하지.

“알았어요. 늦었을 텐데 어서 주무세요.”

-그래. 생일 축하하고, 전화 좀 자주 해.

“알았어. 엄마도.”

-그래. 들어가.

전화가 끊겼을 때 타이밍 좋게 집 문 앞이었다. 괜히 들어가기 싫은 울적한 기분이 들어찼다. 그깟 생일이 뭐라고, 이렇게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애도 아니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여니 적막한 집 안이 나를 가장 먼저 반기고 있었다. 역시 울적하다. 할 거 되게 많은데. 밥 먹고 과제도 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신발은 대충 벗어 던져 놓고 바로 침실로 들어섰다. 널찍한 침대에 풀썩 드러눕고 나니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잠깐만 잘까.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괜찮아질 것도 같았다. 가방은 대충 침대 아래로 내려놓고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보고 싶다. 다들 바쁘겠지. 손에 쥔 휴대폰은 아직도 조용했다. 연락을 해 볼까, 나 오늘 생일이라는데 와 주면 안 되냐고 말해 볼까. 그런 생각을 잠깐 하긴 했지만 바쁜 녀석들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투정 부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생일이 뭐라고…….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끔뻑이는 눈을 감았다.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

“지헌아.”

얼마나 잤을까. 무거운 눈꺼풀 밖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렵사리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흐릿한 시야로 눈썹이 축 처진 김준이 먼저 들어왔다. 푸흐흐,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왔어?”

“응…….”

뭔가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축 처진 모습에 오히려 이상함을 느낀 내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응?”

“왜 그렇게 시무룩한 얼굴이야.”

겨우 정신을 차리며 꺼낸 말에 김준의 얼굴이 더욱 시무룩해졌다. 진짜 무슨 일 있었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흩트리니 김준의 입이 삐죽거린다.

“아니야.”

“아니야?”

“일단 일어나…….”

그렇게 잔뜩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서 나를 일으키는 손길을 따라 나는 그대로 일어섰다. 옷도 못 갈아입고 학교 갔던 차림 그대로인 나를 보니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나 많이 피곤했구나.

자고 일어나니 그래도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대충 널브러진 가방을 힐긋 보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김준이 나를 거실로 끌어당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응?”

“미리 물어봤어야 했는데.”

영문 모를 소리였다.

“뭐가?”

“바보야.”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갑자기 바보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방문은 열렸다. 일단 끌리는 대로 나는 걸음을 옮겼다. 어두컴컴한 거실이 시간이 꽤나 많이 지났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어?”

“생일 축하해.”

그 어두운 거실 가운데 케이크가 놓이고 그 위에 촛불이 넘실거렸다. 영문을 모르는 내 시야로 네 사람이 들어왔다. 언제 다 우리 집에 왔지? 더 생각할 새도 없이 김준이 나를 잡아당긴다.

“일단 불어. 축하 노래 불러 줄까?”

“어?”

“생일 축하해. 늦게 와서 미안해.”

잔뜩 시무룩한 얼굴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아, 그래서 시무룩해 있었나.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다른 네 사람의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 무척이나 미안한 기색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후, 하고 촛불을 불었다. 민망한 기분이었다. 곧 어두웠던 거실에 환하게 불이 켜졌다.

“어, 고마워.”

사실 아직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말해 주지. 그럼 진짜 엄청 크게 해 줬을 텐데. 아, 아니다. 내가 물어봤어야 했는데.”

“어? 아냐. 뭘 또 크게 해 줘. 하하.”

김현이 여직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대도 안 했는데 이렇게 다들 집 안에 들어와 있으니 오히려 놀라웠다. 진짜 어떻게 알았지.

“근데 다들 바쁠 텐데, 어떻게 왔어.”

“바쁜 게 대수야. 네 생일인 거 알았으면 새벽같이 왔을 텐데.”

“아하하. 그게 뭐야.”

“진짜야. 하필 오늘 진짜 너무 바빠서……. 아, 연락도 한 번을 못 하고.”

“아냐, 괜찮아.”

“형도 못 했어요?”

다들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 봤다.

“아, 진짜…….”

강수하가 제 머리를 짜증스레 흩트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녀석들끼리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괜히 입이 탔다. 이렇게 미안해할 줄 알았으면 그냥 연락하는 건데. 나는 민망스레 웃으며 케이크에 꽂힌 초를 뽑아냈다.

“괜찮아. 배고프다. 이거나 먹자. 응?”

“…….”

하지만 다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조금 울적하긴 했지만 내가 굳이 연락을 하지 않은 탓이었다. 하필 타이밍이 안 좋게 맞아서 다들 연락을 못 주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서운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밥 안 먹었어?”

시무룩한 분위기 속에서 이유한이 물었다. 나는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이런 분위기에 고개까지 저으면 분명히 더욱 미안해할 것 같았다. 미안해할 이야기도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 친구랑.”

“……너 오늘 4시까지 풀강 아닌가?”

장우진의 무심한 대답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시간표 꿰고 있어?”

“대충.”

막상 대놓고 물으니 민망한 듯 장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쉬는 시간에 대충 먹었어.”

뭐, 커피 우유긴 했지만 뭘 먹긴 했으니까.

“미역국은 먹었어?”

“어, 아니, 사실 나 오늘 생일인 줄 몰랐어. 아까 친구가 말해 줘서 알았어.”

“잘한다.”

다시금 불퉁한 장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입을 비죽거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불퉁하게 있을 거야. 뭐야, 선물 줘. 생일인 거 알았으면.”

잔뜩 미안한 기색을 띠고 있는 게 민망해서 나는 부러 더 칭얼거렸다. 덕분인지 녀석들 사이에 설핏 웃음이 걸렸다. 10시, 생일이 지나기까지 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응? 선물 없어?”

“뭐 갖고 싶어. 뭐든 사다 줄게.”

김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진짜 무엇을 말하든 사 올 태세라 나는 어이없이 웃었다.

“음. 뽀뽀.”

부러 낸 장난스러운 대답이었다. 김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다시 시무룩.

“그거 말고. 선물.”

“에이, 해 주기 싫어?”

내 대답에 김현이 빠르게 고개를 휘저었다. 당연히 아니라는 듯 내 뺨을 붙잡고 두 번, 세 번 쪽쪽거리며 입을 맞췄다.

“해 줄 수 있어. 근데 다른 거. 응? 갖고 싶은 거는?”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듯 김현의 눈이 단호했다. 나는 덕분에 고민에 빠졌다. 딱히 갖고 싶은 거 없는데.

“음, 그러면…….”

“응.”

“이번 겨울에 다 같이 놀러 가자. 그거면 될 것 같아.”

고심 끝에 내놓은 말에 다들 표정이 불퉁해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인 것 같았다. 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진짜 그거면 돼.”

“그럼 내 내키는 대로 사 와야지. 뭐, 차 사 줄까?”

“미쳤나 봐.”

김준이 덧붙인 말이었다. 당황한 내가 손사래를 치니 다시금 웃음이 걸렸다.

“그러면.”

아, 진짜 없는데. 고민스러워졌다.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어 큰일이었다. 딱히 뭔가 갖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애초에 뭐가 필요하다 싶으면 사다 나르는 게 녀석들이었다. 귀신같이들 알고. 어쩜 그렇게 눈치가 빠른지, 가끔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럼 나 천천히 생각해 볼게.”

결국 내가 내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내가 지금 당장은 생각지 못할 것을 알았는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요즘처럼 바쁠 때 다 같이 모이니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았다. 자꾸만 잇새를 새어 나오는 웃음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 나 너무 좋아.”

“뭐가 좋아. 벌써 10신데, 생일 다 지났어.”

“그래도. 요즘 다 바빠서 만나기 힘들었잖아.”

“……그냥 나 일 그만둘까? 그럼 맨날 만날 수 있는데.”

이유한이 답지 않게 어린애처럼 굴었다. 나는 어이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거든요.”

“아니면 그냥 내가 이 집에 들어올까?”

강수하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생전 그런 소리 안 하던 녀석이라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강수하는 진심인 듯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냥 다 같이 살자. 응? 큰 집 구해서.”

그 말에 김준이 다시금 말을 덧붙였다. 아, 진짜 귀여워 미치겠네.

“참나. 됐거든. 나 이제 케이크 먹어도 돼? 배고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젓가락을 가져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채 일어서기도 전에 장우진과 강수하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가만 보면 내가 손 하나 까딱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 같단 말이지.

“내가 해도 되는데, 여기 우리 집인데.”

“응. 네 집인 거 알아.”

부엌으로 걸음을 옮기며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나저나 배고프다, 진짜. 수업 끝나자마자 밥 먹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벌써 10시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오늘 먹은 거라고는 아까 신형이 준 커피 우유가 다였다.

“아, 솔직히 말해 봐. 너 밥 먹었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득 강수하가 발걸음을 멈췄다.

“응?”

“아무리 생각해도 안 먹었을 것 같은데. 너 아침도 잘 안 먹잖아.”

묻고는 있지만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마주친 시선을 슬금슬금 피했다. 그런 얼굴로 물어보면 거짓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먹었어…….”

시선을 피하며 하는 대답에 한숨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강수하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타이밍 좋게 장우진이 젓가락을 들고 오고 있었다.

“야, 나중에 먹여.”

“왜.”

“한지헌,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어. 밥부터 먹이게.”

“……진짜, 아.”

장우진의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김준과 김현, 이유한도 마찬가지였다. 기다렸다는 듯 다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유한이 내 몸을 들어 단박에 일으켜 세웠다.

“어…….”

“밥 먹으러 가자. 맛있는 거 사 줄게.”

잔뜩 골이 난 표정을 하고서 이유한이 내 손을 잡아당겼다. 어느새 김현은 케이크를 정리해서 냉장고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동작이 얼마나 빠른지 지금 서 있는 곳이 김현의 집 같을 지경이었다.

“괜찮은데.”

“안 괜찮아. 생일인데 밥도 못 먹이고, 이게 뭐야.”

“…….”

“지헌아. 뭐든 얘기해 주면 안 돼? 응? 말 안 하는 거 없었으면 좋겠어. 사소한 거까지 그냥 다 얘기해 줘. 응?”

이유한은 미안한 기색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나 서경호 아니었으면 너 생일인 줄도 몰랐을 거야. 그럼 오늘 지나갔을 거고. 미안하게 왜 그래.”

아, 말하지 않은 걸 어떻게 알았나 했더니 사장님 때문이구나. 저번에 일을 하면서 생일 얘기를 한 적 있었는데 기억하고 있었나, 머쓱한 마음이 들었다.

“응, 미안해.”

나는 어색하게 사과했다. 이유한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미안하라고 한 말 아니야.”

곧 불퉁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애써 웃었다. 그래도 생일인데 잔뜩 시무룩한 얼굴만 보는 것도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뭐 먹으러 갈 거야? 나 뭐든 좋은데. 응?”

“……참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나갈 채비를 마친 녀석들이 현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 각자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고작 생일 정도야 별것 아니니까. 근데 이렇게까지 미안해하는 걸 보니 내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긴, 나도 녀석들 생일도 모르고 그냥 넘어가 버리면 무척이나 미안할 테니까. 집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녀석들을 따라가다 가까이 서 있던 강수하의 손을 잡았다. 나를 보는 곧은 시선이 못내 좋아서 웃음이 나왔다.

“고마워.”

“뭐가.”

“어, 축하해 줘서?”

두 눈을 굴리며 한 말에 강수하가 낮게 웃었다. 곧 짧은 입맞춤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곧 비어 있던 다른 손이 잡혔다. 문득 든 얼굴에 장우진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간질간질한 심장에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한테 뭐든 다 해 주고 싶어.”

“…….”

“그러니까 그렇게 할 수 있게 좀 도와주라. 좀.”

달달함과 불퉁함을 넘나드는 짧은 말이었다. 그게 또 장우진스러워서 웃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 나도. 나도 뽀뽀할래. 나가면 못 하니까.”

그새 쪼르르 다가온 김준이 나를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쪽쪽, 쉴 새 없이 맞부딪혀 오는 입술에 정신이 없었다. 김준이 장난스레 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냥 여기서 먹을까 봐.”

나는 자연스레 이유한 품으로 옮겨졌다. 입술에 닿아 오는 따뜻한 촉감이 아까 잠들기 전에 느꼈던 우울함은 완전히 기억조차 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 얼굴들이 좋았다. 가끔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나는 그 품에 푹 안겼다.

“어딘들 싫겠어.”

이렇게 다 같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게 어딘들 내가 싫어할까. 나는 그 품속을 비비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 맞다.”

“응?”

“내 생일 선물로 절대 들고 오면 안 되는 건 있어.”

문득 생각난 것이었다. 걸음을 옮기던 녀석들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콘돔, 젤. 그거 사 오지 마. 죽어, 진짜.”

나를 의아한 듯 바라보던 녀석들에게서 곧 큰 웃음이 터졌다. 현이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건 항시 비치해 놓는 거 아냐?”

“죽을래?”

“아하하하. 얼른 가자. 밥 먹으러.”

김현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역시 여기에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문득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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