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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0. 여행 (33/36)

외전 10. 여행

“좋다.”

막 식사를 마친 내가 배를 통통 두드렸다. 낯선 공간, 낯선 음식은 놀랍도록 좋았다. 그 만족스러운 웃음에 앞자리에 앉아 있던 김현이 키득거리고 웃었다.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어느새 한겨울. 여기저기서 한파라고 떠들어 대는 그맘때였다. 나는 방학을 맞이했지만 취업 전선에 뛰어들면서 여러 가지를 준비하느라 바빴고, 이제 졸업 예정인 강수하는 곧 인턴이 될 예정이었다.

장우진은 무슨 과제니 공모전이니 할 것이 많은지 매일 학교에서 날을 새다시피 하고 있었다. 김현은 드라마 막바지 촬영이 한창이었다. 이유한은 회사에서 허구한 날 야근이었고 그나마 프로 야구 시즌이 끝난 김준만 조금 널널한 편이었다.

그런 우리 여섯 사람이 겨우 시간을 맞춰서 온 여행이었다. 나는 괜히 주위를 둘러봤다. 료칸이라 부르는 일본 특유의 숙소가 왠지 낯설었지만 새로워서 좋았다. 진짜 여행 온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좋아?”

“응. 오랜만이잖아.”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오랜만에 여섯이 다 같이 모여 있다는 거였다. 약 한 달 전 꼭 여섯 명이서 같이 여행을 가고 싶다던 나 때문에 맞춘 일정이었다. 요 근래에는 정말 한 사람도 자주 만나기 어려웠으니까.

“이렇게 여유롭게 다 같이 앉아서 쉬는 것도.”

어떻게든 짬을 내서 잠깐씩 얼굴을 보긴 했지만 그 덕에 늘 여유는 없었다. 시간에 쫓기는 것 같은 기분. 이맘때는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웠다. 좀 더 여유롭게 같이 시간을 보냈던 적이 언제였는지 이젠 알 수도 없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스케줄을 짜 맞췄다. 아주 잠깐이라도 여유롭고 싶었다.

“그러게. 배도 부르고 등도 따뜻하니 좋다.”

아무래도 요즘 가장 피곤했을 것은 김현이었다. 어찌나 스케줄이 많은지 정말 TV만 틀면 나왔다. 나야 그때마다 볼 수 있어서 즐거웠지만 너무 여기저기 나오니 잠 한숨 제대로 자고는 있을까 걱정이 됐다.

“피곤하지.”

“으응. 괜찮아.”

김현이 방긋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꾸 누울 자리 찾아가는 게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꾸물꾸물 구석진 자리에 등을 기대 누운 김현이 살짝 눈을 감았다. 아주 잠시 눈을 붙여도 됐다. 적어도 2박 3일 동안은 푹 쉴 수 있으니까.

“지헌아, 온천 할 거지?”

“응. 해야지.”

“치워 달라고 하고 소화시킨 다음에 가자.”

“응.”

이유한이 웃었다. 말간 얼굴에 김현과 마찬가지로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빨리 온천에 몸을 담그고 싶다. 노천탕에 들어갔다가 여기에서 잠들면 피로가 싹 풀릴 것 같았다. 사실 나조차도 요 근래 스터디를 한답시고 여기저기 굴러다닌 터라 피로했다. 두 눈이 느리게 끔뻑이고 있었다.

“눈 풀려 가지고 곧 잠들겠다.”

“아냐. 안 졸려.”

“안 졸릴걸. 그 잠깐 비행기 타면서도 코 골면서 자던데.”

장우진이 틱틱거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코까지 골았나? 비행이 끝났다고 장우진이 나를 흔들어 깨웠을 때를 떠올렸다. 하지만 당연히 기억날 리 없었다. 잠들어 있었는데 뭘 어떻게 알겠어. 우진의 말이 영 신빙성이 없지 않은 이야기라 당황한 내가 어색하게 웃었다.

“나 진짜 코 골았어?”

“어. 엄청.”

“……깨우지.”

민망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문밖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들어오라는 말에 직원분이 살가운 미소를 띠며 들어왔다. 눈앞에서 치워지는 그릇들을 나는 멍청하게 보고 있었다. 그렇게 피곤했나, 내가? 코까지 골 정도로. 은근히 민망함이 밀려들어 왔다.

“안 골았어.”

“응?”

“너 코 안 골았다고.”

내 표정이 어색했던 모양인지 강수하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에 나는 바로 장우진을 노려봤다. 장우진은 바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 왜 거짓말하냐고.”

“그냥 숨이 좀 컸어.”

강수하가 웃었다. 뭐야, 그러니까 코를 골았다는 거야, 안 골았다는 거야. 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으니 결국 그 대화를 보고 있던 김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 코 좀 곤 거 가지고 왜 놀려. 그러니까.”

골았네. 골았어. 나는 터져 오는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내가 다시는 어디 이동하면서 잠자나 봐라. 괜한 다짐을 했다.

다 먹은 그릇들이 있던 테이블 위는 깨끗하게 정리됐다. 그 소리에 구석에서 눈을 감고 있던 김현이 반짝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어딜?”

“온천 하러. 나 온몸이 찌뿌둥해.”

방긋방긋 웃으며 김현이 몸을 쫙 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수영하는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마음이 맞은 듯 다들 자리에서 일어섰고 우리는 노천탕으로 향했다.

별채에 따로 들어와 있는 거라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대충 들어가기 전에 씻을 수 있도록 샤워기도 마련되어 있었다. 김현이 가장 먼저 제 옷을 훌렁 벗었다. 대충 씻으려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는 따라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살살 뒷걸음질 쳤다.

“왜?”

“어? 아니, 뭐 좀 두고 와서.”

바로 뒤에서 걸어오던 강수하의 물음에 내가 살짝 웃으며 방 안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휑해진 방 안이었다. 당연히 온천에 들어가려면 벗는 게 맞는 건데……. 나는 휙 내 옷 안을 살폈다.

“이거 어떡하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울긋불긋. 그러니까 한 이틀 전에 또 장우진이 문제였다. 그놈의 공모전하는 선배들하고만 모이면 왜 그렇게 술을 먹는지, 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장우진이 집에 다녀갔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어김없이 몸에 가득 남아 있었다.

다들 같이 만나는 걸 이해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가득한 흔적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전부터 다른 누군가의 자국이 남아 있을 때는 최대한 잠자리를 피하고 있었는데…….

“하아.”

한숨이 터졌다. 지금 와서 안 한다고 할 수도 없고 그냥 옷을 입고 들어갈까. 뻘한 생각을 하다 내 짐 구석에서 짧은 반바지 한 장을 챙겼다. 아무래도 입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춥다고 핑계대면 되지, 뭐.

그런 생각을 하자 내 똑똑함에 만족스러워졌다. 나는 다시 온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들 들어가 버려 한산한 곳에서 혼자 샤워를 대충 마치고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었다. 속옷도 안 입고 입으니까 좀 이상하긴 하지만 뭐.

“왜 옷을 입고 오지?”

나오자마자 칼바람이 파고 들어와 서둘러 노천탕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마자 이미 탕 안에 들어가 있던 김현이 나를 보며 의아하게 물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어으, 추워.”

“벗고 들어오는 건데.”

남자들 여섯이나 들어왔음에도 탕은 넓었다. 가족탕이랍시고 넓은 곳을 예약한 보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굳이 옷을 입고 들어오니 김준이 슬그머니 다가와 내 옷을 잡아당겼다.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추워서 벗을 수가 없었어. 감기 걸리면 어떡해.”

“젖은 옷 입고 있는 게 더 안 좋지 않나?”

“안에만 있으면 상관없나?”

녀석들이 의문을 가득 담아 강수하를 쳐다봤다. 그래도 의대생이라고 그런 쪽으로 궁금함만 생기면 다들 자연스럽게 강수하를 쳐다보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강수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벗는 게 좋다고 해야지, 멍청아.”

이유한이 그 제스처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덕분에 나는 킥킥거리고 웃었다. 어쨌든 자연스럽게 넘어갔으니까. 이 상황에서 아무래도 당연하겠지만 장우진은 조용했다. 분명 이틀 전의 저를 기억하고 있기에 그렇겠지. 나는 아무도 모르게 은근히 눈을 흘겼다. 장우진이 머쓱하게 웃었다.

“따뜻하니 좋다.”

“그러게.”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그고 겨울 공기를 마시는 기분은 생각보다 상쾌했다. 입 속에서는 입김이 나왔지만 몸은 따뜻하니 오히려 더 몸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종종 오자. 엄청 좋아.”

“그래. 다음엔 둘이 오자.”

“웃기고 있네.”

장난스러운 김준의 말에 단호하게 김현이 대답했다. 자주 있는 일이라 나는 개의치 않고 발장난을 쳤다.

요 근래에는 그래도 운동을 좀 해서 몸이 탄탄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있는 녀석들을 보고 있으니 운동했다고도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잘 보이지도 않는 물속에 잠긴 내 몸을 슬쩍 봤다가 다시 시선을 올렸다. 자주 보는 몸인데 한곳에 모아 놓고 보니 더 놀라웠다. 어쩌다가 쟤네들이 나한테 발이 묶였지. 시답잖은 생각까지 들었다.

“지헌아. 너 얼굴 엄청 빨간데.”

“어지러운 거 아냐?”

“어? 아니. 아닌데.”

그새 얼굴이 빨개진 모양이었다. 자주 보는 몸이라고 적응이 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적응하기엔 시각적 자극이 너무 거셌다. 봐도 봐도 자꾸 눈이 간다고. 볼 때마다 얼굴이 빨갛게 익어 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 왜 이렇게 빨갛지.”

“아아, 너무 담그고 있었나 봐.”

무어라 설명할 말이 없어 나는 목에서 찰박이던 물이 가슴께에 닿을 만큼 몸을 일으켰다. 물에 담겨 있던 몸을 일으키자 입고 있던 티셔츠가 축 늘어져 무거워졌다.

“입김 나와. 봐 봐. 하아”

붉어진 내 얼굴에 대해 관심이 금세 입김을 불고 있는 김현에게로 옮겨갔다. ‘애냐?’ 하는 장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돌아간 관심에 감사하며 늘어진 옷을 정리했다.

무거워. 씨, 불편해. 바지 정도는 입어도 윗옷은 벗고 싶은데. 나는 그새 또 얄미워진 장우진의 다리를 괜히 발로 차 버렸다.

“아. 왜?”

“그냥 꼴 보기 싫었어. 방금.”

“……아.”

장우진이 내 옷을 한번 내려다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찔리는 데는 있는 모양이었다. 장우진이 별다른 대답이 없자 이유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몇 마디 했어도 해야 되는데, 장우진이.”

“그러게요. 너무 아무 말도 안 하는데.”

강수하까지도 장우진과 나를 번갈아 봤다. ‘무슨 몇 마디를 해’ 장우진이 애써 태연하게 덧붙였다.

“나 왠지 알 것 같아.”

순간 김준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너무 훅 들어오는 녀석에 내가 움찔거리며 살짝 몸을 뒤로 뺐지만 김준에게 어깨를 잡히는 것은 금방이었다. 너무 딱 붙은 것 같아 나는 당혹스러움에 두 눈을 굴렸다. 김준은 아무 거리낌 없이 내 티셔츠의 목 부분을 들어 올렸다.

“아, 잠깐……!”

“……장우진 너지?”

손으로 막을 새도 없이 들어 올려진 티셔츠 안을 들여다 본 김준이 헛웃음을 치며 장우진을 바라봤다. 김현이 머리를 기웃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급하게 내 옷을 잡아 눌렀다. 라운드는 비록 늘어났지만 내 몸뚱이 하나는 가릴 수 있었다.

“왜? 뭐 있어? 마크 남겨 놨어? 장우진이?”

물론 김준의 반응으로 바로 알아챈 것 같았지만. 나는 눈만 가만히 굴렸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다들 은연중에 알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는…….

“어. 그제 한지헌 집에서 잤어. 근데 그게 아직도 남았어?”

결국 제 머리를 털어 낸 장우진이 이실직고하며 내게 다가왔다. 그 태연한 물음에 당황해서 눈을 굴리고 있던 나는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얼마나 물어 댔……! 아니, 아니다.”

욱한 마음에 말을 하려다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뱉을 말은 다 뱉어 버린 후였다. 나는 격하게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순간 내 허리께로 손이 다가왔다. 누구의 손인지 짐작할 새도 없이 옷이 위로 올라가더니 훌렁 벗겨졌다. 내 옷을 들고 간 것은 김현이었다.

“장우진, 잠수해. 그리고 나오지 마.”

김현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장우진은 이제 뻔뻔하게 나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녀석은 당황한 기색도 하나도 없이 손을 휘휘 저었다. 어쩌다 보니 옷을 벗어 버리게 된 나만 부끄러워져 시선을 돌렸다.

“난리 났네.”

“얼마나 애를…….”

강수하와 이유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서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하기에 부담스러워 슬그머니 몸을 물속에 목 끝까지 담갔다.

“그만 쳐다보면 안 되겠어?”

내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내 허리께로 큰 손이 감겨들어 왔다. 어, 할 새도 없이 내 몸이 그쪽으로 당겨졌다.

“으앗.”

김준이었다. 순식간에 당겨진 몸은 김준의 다리 위로 올라왔다. 허리를 감은 손이 은근히 몸을 매만지고 있었다.

“부끄러워? 왜? 다 알고 있었는데도?”

그러곤 해맑은 소리를 해 대기에 나는 바보같이 입만 어버버거렸다. 그사이 김현도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래서 자국 남기는 거 싫어했구나. 우리가 싫어할까 봐. 착하게.”

무척이나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다가온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나는 얼떨떨한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 때문에 영 꺼려졌던 것은 사실이니까.

“좀 짜증 나긴 하네.”

불퉁한 목소리를 내는 김현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웃는 얼굴이었다. 표정과 말의 거리에 의아하게 쳐다보는 것도 순간, 김현이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어 왔다.

“아, 뭐 하는데.”

“응. 쟤 것만 남아 있으니까 좀 짜증 나서.”

배시시 웃으면서 하는 말에 귓가에 김준의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다시 김현이 내 목에 입술을 마주해 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김준의 입술마저도 어깨에 닿아 오고 있었다.

“아, 하지 마. 응?”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감각도 감각이지만 보는 눈이 셋이나 더 있었다. 가까이 온 쌍둥이들도, 멀찌감치 떨어져 보고 있는 세 사람도 무엇 하나 신경 쓰이지 않는 게 없어 다급하게 두 사람을 밀어 냈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내 말 한마디에 멀어졌을 두 사람이 이상하리만큼 미동 없이 내 옆에 붙어 있었다. 슬금슬금 김현의 손이 복부를 타고 위로 올라왔다.

“아…….”

그 손이 가슴께에 닿는 것은 금방이었다. 허리에 감겨 있던 김준의 손은 차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머리를 도리질 쳤다.

“그만, 그만하라고. 응? 준아, 현아.”

열심히 몸을 비틀었다. 순간 나는 쌍둥이들 사이에서 강수하의 품으로 옮겨갔다. 수하가 팔을 잡아당긴 탓이었다. 순식간에 수하의 품에 안기게 된 나는 다급한 손길로 수하의 목을 둘러 감았다.

“씨이.”

품을 옮겨 가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되어 김형제에게 눈을 흘겼다. 잔뜩 붉어진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아주 잠시였다. 나는 쌍둥이들의 품에서 꺼내 주었다고 생각한 강수하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수하야?”

“…….”

다급히 마주한 눈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몇 번이고 봤던 얼굴. 흥분에 가득 찼을 때의 수하. 아니, 근데 도대체 왜 갑자기…….

“싫은 거야?”

문득 강수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움직이던 손은 어느새 우뚝 멈춰 있었다.

“응?”

“부끄러운 거야? 아님 이렇게 자국이 많아서 미안한 건가.”

부드럽게 강수하의 손이 내 상체를 훑고 지나갔다.

“아님 진짜로 싫은 거야?”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하고 집요하게 물어 오는 강수하를 따라 주위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로지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조금은 긴 침묵. 결국 입을 연 것은 나였다.

“내가…… 싫다고 하면 안 할 거야?”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사실은 싫을 리가 없다. 수하의 말대로였다. 그저 조금 부끄럽고 어찌됐든 누군가와 밤을 보낸 흔적을 보여 주기 미안했을 뿐이었다. 내 물음에 강수하가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당연한 걸 왜 물어. 네가 싫은 건 안 해.”

그 말 한마디에 이상하게도 아랫배가 당겨 왔다. 가만히 보고 있는 녀석들을 힐끗 살펴보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안일한 생각이었다.

고작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순간 고개를 끄덕였던 것을 미친 듯이 후회하고 말았다.

“안 싫어.”

대답이 끝나자마자 강수하의 입술이 맞물렸다.

***

“으응, 앗! 자, 잠깐만!”

어느새 나체가 된 나는 그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내 허락을 얻고 나자 이성이라는 것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사람들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왜 이렇게 표현을 하느냐 하면 나는 지금 누구의 이름을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우리를 본다면 분명히 내가 잡아먹히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맞았다. 나는 지금 잡아먹히고 있었다.

“읏…….”

집요하게 목덜미를 핥아 오는 게 도대체 누구인지.

“아흑!”

가슴께를 지분거리는 것은 또 누구인지.

“으, 아, 아응……. 흣.”

등허리에 붉은 꽃을 피우는 사람은, 아래를 지분거리는 손은, 뒤로 들어오는 손은 또 누구의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자극에 흔들리고 신음성을 내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지헌아, 입술.”

몽롱한 정신으로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내 뺨을 김현이 양손으로 잡아 왔다. 곧장 김현의 입술이 내게 닿았다. 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그 혀가 너무 뜨거워서 머리가 아찔해졌다.

“으응…….”

“야해. 심장 터질 것 같아.”

귓가로 김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슴께를 지분거리고 있었던 것이 김준이었던 모양이다. 손가락만 움직이며 내 얼굴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녀석이 가슴을 물었다. 혀끝으로 콕콕 눌리는 느낌에 허리가 비틀렸다.

“아씨, 진짜 이래도 되나 싶은데 나는.”

이유한이었다. 부정적인 어투였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착실하게 앞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후회가 밀려 왔다. 괜히 괜찮다고 했나 봐, 이 다섯 명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졌다.

“으윽, 앗! 자, 잠깐! 아!”

그때였다. 누군가 허리를 잡아 내 몸을 들어 올렸다. 착실하게 뒤를 풀고 있던 수하였다. 한참을 여기저기 찔러 오던 손가락이 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언제 그렇게 됐는지 딱딱한 성기 위로 내리눌렸다.

“넣을게.”

“윽.”

낮은 목소리와 함께 단번에 찔러 들어 온 성기가 아래를 묵직하게 채워 왔다. 순식간에 아래가 꽉 찬 느낌에 갈 곳 잃은 손이 흔들렸다.

강수하는 내 허리를 붙들고 허리 짓을 시작했다. 물속에 잠긴 몸이 흔들리며 파도치듯 몸이 일렁였다. 그렇게 수하가 허리 짓을 하는 동안 순간 나를 만지고 있던 손이 전부 동작을 멈췄다.

제정신이 아니면서도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서 어렵게 눈을 떴다.

“아……. 으, 너.”

그러자 아주 발간 얼굴로 나를 가만히 보고만 있는 녀석들을 마주했다. 만져지는 것보다 더욱 몸이 달아올랐다. 수치심이었다. 나는 급하게 머리를 저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아, 그, 그만. 아읏.”

하지만 강수하는 여전히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허리를 감싼 손으로 더욱 나를 끌어당겼다. 다들 가만히 보고만 있는데 나처럼 민망하지도 않은 모양인지 강수하의 행동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부끄러운 것은 나뿐이었다. 흔드는 대로 흔들리는 몸에 욕정 가득한 시선이 무서울 정도로 따라오고 있었다.

“으흣…….”

그 시선 때문에 딱 죽을 것 같았다. 뒤에서 치고 오는 자극도 버티기가 힘든데 그걸 지켜보고 있다는 게 더 죽을 맛이었다.

나는 다급히 손을 뻗었다. 손끝에 어느새 잔뜩 열이 오른 장우진의 손이 잡혀 왔다. 나는 팔에 힘을 주어 장우진을 당겼다. 당기는 대로 다가온 장우진의 입술에 입을 맞댄 것은 금방이었다.

“아, 좀만 가까이 있을걸.”

웅웅거리는 귓가로 아쉬운 기색의 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장우진은 방금까지 멀찍이 떨어져 보고만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 내 아랫입술을 깨물어 왔다.

“으응.”

끙끙 앓는 소리에 골반을 잡은 강수하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치고 올라오는 속도도 얼마나 빠른지 몸이 위아래로 미친 듯이 흔들렸다. 와중에 장우진은 내 입술을 핥아 올리며 손가락으로 가슴을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못 참겠는데…….”

머릿속이 온통 새하얬다. 순간 물속에 있던 몸이 밖으로 일으켜 세워졌다. 찬 공기가 훅 느껴져 어깨를 떨었지만 그에 맞춰 따뜻한 손길이 내 몸에 닿아 왔다. 여전히 누구의 손이 닿은 건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적당히 가라. 수하야.”

귓가가 멍했다. 허리 아래 움직임이 어찌나 거센지 장우진과 입을 맞추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그렇게 떨어진 입술 사이를 김현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물 밖으로 나온 내 아래에 어느새 이유한이 자리 잡았다.

“으윽, 흣.”

성기가 이유한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앞뒤로 오는 자극에 신음이 튀어나오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키스에 가로막혔다.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녀석들이 다시금 조심스레 다가오고 있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강수하의 허리 짓이 점점 강해졌다. 흔드는 대로 흔들리고 있을 때 순간 내 몸에서 강수하의 성기가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도 절정에 다다랐다.

“아, 유, 유한아. 윽……! 자, 잠깐!”

아직도 입으로 내 것을 물고 있는 이유한을 필사적으로 밀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 입에 사정을 해 버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헐떡임에 상체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절정의 여운에 긴 생각이 어려웠다.

“비켜. 빨리.”

그렇게 멍한 사이 내 몸이 김준의 품으로 옮겨 갔다. 다급한 몸이 비틀렸다.

“아니, 아니. 조금만 쉬었다가……!”

“응. 미안.”

다급하게 내지른 말에도 김준이 단호하게 내 몸 안으로 제 성기를 찔러 넣었다. 방금 전 사정한 여운으로 민감해진 몸은 기다렸다는 듯 반응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들어간 성기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나는 또다시 흔들렸다.

“으응! 앗!”

“아, 좋아. 좋아해. 지헌아.”

“응. 으응……. 윽.”

다시금 김현이 입술을 물었다. 추운 줄도 모르겠을 만큼 온몸에 열이 올랐다. 나만큼이나 열에 달뜬 녀석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더듬더듬 손을 움직였다. 한걸음에 이유한과 장우진이 가까이 다가왔다.

“해, 해 줄, 흣, 게.”

이유한과 장우진의 미간이 접혔다. 김현도 살짝 떨어졌다. 내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이유한과 장우진의 성기를 그러쥐었다. 윽, 하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적으로 파고들었다.

“아, 응.”

분명히 형편없는 손놀림이었을 텐데도 두 사람의 얼굴이 흥분으로 젖었다. 입술을 맞대던 현이의 성기는 입으로 물었다.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하긴 했지만 막상 입 안으로 성기가 들어가자 으윽, 하는 짧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윽, 으……. 흐.”

그런 와중에도 김준은 뒤를 계속해서 찌르고 있었다. 느끼는 지점에 한 번 닿아 온 김준은 계속해서 그 부위만 찍어 대고 있었다.

강수하가 내 등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느리게 움직이는 손끝이 내 몸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손가락이 한번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예민해진 몸이 비틀렸다. 감당할 수가 없는 자극이었다.

“아, 목소리 듣고 싶은데.”

등 뒤로 김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끝내기나 하라고. 참는 사람 안 보이냐.”

“너희 다 넣게?”

“…….”

녀석들 사이 대화가 오갔다. 마지막 물음에 내가 급하게 입에 물고 있던 성기를 뱉어 냈다.

“아, 그……. 으, 안 돼. 으윽! 절대, 안 돼.”

두 사람만으로도 벅찼다. 셋이나 더 남았다고? 셋을 다 넣는다고? 절대 안 됐다. 흥분에 찬 머리에 그 정도의 이성은 있었다. 벌써 힘이 풀린 다리가 자꾸만 접히고 있었다.

“아윽!”

그러던 중에 김준이 속도를 올렸다. 아마도 절정에 가까워 오는 모양이었다. 찰박이는 물소리가 몸이 흔들리는 것에 맞춰 들려왔다. 결국 그 뒤에서 박아 대는 자극에 내가 먼저 사정해 버리고 말았다. 여전히 김준은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임에 정처 없이 흔들리며 여기까지만, 여기까지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더는 너무 힘들었다.

“아…….”

급하던 움직임이 일순 뒤에서 빠져나갔다. 김준도 사정을 한 모양이었다. 모든 힘이 풀린 내가 김준의 위에 힘을 풀고 앉았다. 밭은 숨이 흘렀다.

자고 싶다.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이유한의 품 안이었다.

“으으, 그만할래. 응?”

“응, 미안해…….”

잔뜩 풀 죽은 얼굴로 이유한이 내 허리께를 붙잡아 왔다. 급하게 도리질을 치는 내 얼굴에 쪽쪽 입을 맞추면서 다시금 아래가 채워졌다. 움찔, 몸이 떨려 왔다.

“이씨. 말로, 윽, 만 미안하다고, 흐읏.”

“진짜 미안해. 빨리 끝낼게.”

도리질 치는 내 얼굴을 그새 장우진이 잡아 왔다. 입술을 맞대 안쪽 깊숙이 입천장을 쓸어 내던 혀끝이 귓가로 옮겨 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 어깨에는 이미 김현이 닿아 있었다. 몸이 이유한이 움직이는 대로 계속해서 흔들렸다. 하얘진 머릿속이 쉽게 진정이 되질 않았다.

“으윽, 응, 앗, 흐읏!”

다시금 내 성기를 입 속에 넣은 것은 강수하였다. 버둥거리는 내 몸을 한 품에 감싼 이유한이 몸을 움직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 와중에 뻣뻣해진 김현과 장우진의 성기가 눈에 들어왔다.

강수하와 김준은 한 번씩 했음에도 불구하고 슬금슬금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나는 무척이나 다급해졌다. 한 번씩도 힘든데 여기서 다시 하겠다고 하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답이 없었다. 나는 급하게 장우진과 김현에게 손을 뻗었다.

“아, 지헌아…….”

“흐, 응? 해 줄게. 흐읏, 그니까, 쫌만, 윽, 참아, 주라. 응?”

주체할 수 없는 흥분감에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꿀꺽 침을 삼키는 목울대가 눈에 그대로 들어 왔다. 곧 장우진과 김현이 다가왔다. 나는 흔들리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혀를 내었다. 양손에 두 사람의 성기를 쥐고 있는 게 무척이나 부도덕한 느낌이 들었는데 어째선지 그런 생각을 하니 발끝이 금방도 저려 왔다.

가까이 다가온 성기를 양손으로 한가득 쥐었다. 한 개도 벅찬데 두 개의 성기가 한 입에 들어갈 리 없었기에 혀를 내어 핥았다. 동시에 핥아 오는 혀끝에 장우진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있었다.

“난 안 볼래. 저거 보다가는 한 번 더 달려들 것 같아.”

“…….”

김준의 말에 강수하는 별다른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걸음을 한 걸음 뒤로 물렸다. 조금은 안도감이 들었다. 허리가 벌써부터 지르르 울려 대고 있었다. 분명히 내일 일어서지도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무서운 것은 내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는 흥분이었다. 어떤 생각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윽, 지헌아…….”

양손에 쥐고 위아래로 움직이는 성기 끝에 맑은 물이 배어 나왔다. 형편없는 움직임일 텐데도 장우진과 김현은 착실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한번 올려다봤다가 다시 열심히 움직였다. 이유한의 성기는 어째선지 들어와서도 점점 커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응, 읏. 흐…….”

툭, 한참을 흔들렸을 때 이유한이 다시 내 허리를 들어 올렸다. 사정이 임박한 모양이었다. 내가 잡고 있는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손을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

“윽.”

짧은 목소리. 동시에 아래를 채우고 있던 이유한의 성기가 빠져나갔다. 김현과 장우진도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사정했다. 얼굴 가까이에 있었던 지라 급하게 몸을 뒤로 뺐음에도 상체를 타고 정액이 흘러내렸다.

아, 끝났다. 하지만 찝찝함이나 그런 것은 없었다. 오로지 ‘이제 그만’이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할 뿐이었다. 조심조심 김현이 내 몸을 들어 올렸다. 나는 감기는 눈에 힘을 줘 조금씩 끔뻑이고 있었다.

“지헌아. 졸려?”

“……응.”

품속에 나를 안은 채 김현이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지헌아.”

“응.”

“……미안해.”

그 짧은 목소리에 나는 눈을 반짝 떴다. 미안하다고. 왜? 영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등허리에 무언가 딱딱한 게 닿아 왔다.

“현아, 현아. 아니…….”

“금방 할게. 미안해. 미안.”

숙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김현은 이불 위에 나를 눕혀 왔다. 나는 다급하게 발버둥 쳤다. 하지만 이미 흥분에 눈이 돌아가 버린 김현은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녀석들이 내 주위로 다시금 가까워졌다.

짐승들에게 잡아먹히는 초식 동물이 된 것 같았다. 그만하라는 내 목소리는 다시금 가까워진 장우진의 입술에 먹혀들어 가고 있었다.

***

“자?”

“잘 거야.”

“……미안해.”

“저리 가.”

똥 마려운 강아지들처럼 내 주위를 알짱거리는 녀석들을 나는 외면했다. 몸을 풀고 싶어서 온천에 들어간 건데 온갖 피로만 다 가지고 돌아왔다. 싫다고 했는데, 그만하라고 했는데! 아, 진짜 너무 힘들다. 온몸이 너무 아파.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그런 내 허리로 누군가의 손이 닿았다. 조심스레 주물러 오는 손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손도 대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 손길이 너무 시원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굳이 보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김준인 것 같았다.

“미쳤었나 봐.”

“……힘들어.”

“힘들지. 미안해.”

귓가에 들리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낑낑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을까. 안 봐도 훤히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여행 온 건데 이렇게 화를 내고 있어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 순간 주무르는 손길에 허리가 찌르르 울렸다.

오늘은 화낼 거야. 내일부터 풀 거야. 마음속으로 그런 다짐을 했다.

“너희 오늘은 다 떨어져서 자.”

“아, 지헌아아.”

“아무것도 안 할게. 응? 설마 우리가 너를 또…….”

“시끄러워. 다 떨어져. 저리 가.”

절대 오늘은 안 풀어 줄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하루쯤은 안절부절못해 봐야 다시는 안 그러지.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솔직히 말해서 안 좋았다고 하면 거짓이지만 한 명도 제대로 받아 내기 힘든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았다.

체력을 기르든가 해야지. 모두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그냥 그런 다짐을 했다. 아마 녀석들에게는 긴긴 하룻밤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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