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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9. 네가 없는 7년 (32/36)

외전 9. 네가 없는 7년

[D+1]

“말도 안 돼.”

어느 한적한 공원 구석 벤치에 다섯 사람이 모여 있었다. 멀리서 봐도 한번쯤 눈을 돌리게 될 만큼 눈에 띄는 남자들이었기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은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풍기고 있는 분위기 때문에 선뜻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얼굴을 굳히고 있었던 탓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연락도 없이 미국을 가요. 진짜 말도 안 돼.”

믿을 수가 없다는 투의 김현이었다. 어제 하루 종일 연락이 되지 않아 불안하긴 했지만 집에 무슨 일이 있었겠지, 바쁜 거겠지, 하고 가볍게 넘겼던 지헌의 소식은 월요일 아침이 되어서야 선생님께 들을 수 있었다. 지헌이 집안 사정으로 갑자기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정이 있었겠지.”

강수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김현은 한숨을 내어 쉬었다. 그래, 사정이 있었겠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거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남에게 하는 말인지 분간하지 못할 만큼 작고 빠른 말이었다.

“연락 오겠지. 핸드폰 번호도 다 알고, 국제 전화로 걸 수 있으니까.”

“그러겠죠. 그냥 누구한테 먼저 올지 내기나 할까요.”

“참나. 너는 이 상황에 그런 소리가 나오냐.”

“이미 갔고, 연락은 올 텐데 뭐 하러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어. 지헌이가 뭐 부모님이 오라면 오는 거지, 자기 의사가 있었으려고.”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김준이 말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장우진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외에 생각할 만한 것도 없었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곧 오겠지. 어쩔 수 없었다는 우는 소리를 하며 연락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겨우 얼굴이 풀어졌다.

징징거리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아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너도 얼마나 놀랐겠어, 갑자기 미국으로 가게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금방 연락 오겠지. 우리가 기억하는 그 목소리를 하고, 미안한 기색을 띠면서.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D+7]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김현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침울한 김현의 목소리에도 강수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저라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저조차도 왜 연락 한 통 없는지 알 수가 없는걸.

수하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오겠지, 바쁜 거야. 갑자기 가게 되어서 적응하느라고 힘든 것일 테다. 그러니까 지금은 연락하기가 어렵겠지, 그런 거겠지. 사실 강수하는 그런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혼자 반복하고 있었다. 조금씩 피어오르는 마음 한구석의 불안감이 제 마음을 완전히 잠식하지 않도록.

무심결에 강수하가 시선을 돌려 뒷문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문을 열고 미안하다고 웃으며 한지헌이 들어올 것 같았다. 사실 그런 기분이 너무나도 자주 들어서 수업 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할 것 없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저 뒷문으로 시선을 돌려 대고 있었다.

“지헌이 보고 싶어.”

김현이 몸을 축 늘어트리며 우는 소리를 했다. 여전히 곧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강수하와는 다르게 사실 김현의 머릿속은 온통 불안함으로 가득해져 있었다. 혹시, 혹시…… 하는 생각이었다.

일전에 그랬잖아, 유한이 형이. 죄책감이 들면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고. 혹시 내가 그때 여행 가서 했던 말 때문에 지헌이가 죄책감이 들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 때문에 가 버린 건 아닐까? 나한테 미안해서? 안 되는데. 나한테 안 미안해도 되는데. 나는 이렇게 가 버리는 게 더 싫은데.

그런 죄책감이라면 가지지 않는 편이 훨씬 나았다. 현은 빠르게 머리를 저었다. 그냥 내가 상상력이 너무 뛰어나서 그런 거다. 지헌이는 금방 연락할 거다. 내가 걱정했었다는 말을 듣고 미안하다고, 걱정했냐고 웃어 줄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이었다.

“땅굴 파지 마라.”

“어, 안 파. 너나 파지 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일었다. 꽉 들어차 있는 교실 안에 지헌의 자리만 비어 있을 뿐인데도 이상하게 온 교실이 다 빈 것 같은 기분이었다.

[D+30]

“미친놈이냐.”

“……왜 왔어?”

운동장을 미친 듯이 돌고 있던 김준이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이른 아침. 학교에 이르게 나오는 편인 강수하는 멍한 눈으로 김준을 보고 있었다. 그런 강수하를 발견한 김준은 한참을 더 돌고 나서야 그 앞에 섰다.

“그렇게 돈다고 생각이 없어지나.”

“미친놈처럼 공부만 하고 있다는데, 누구 말로는 네가.”

강수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헛웃음도 안 나왔다. 그 언젠가 이렇게 이른 아침에 한지헌도 여기에 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리만큼 오래된 기억처럼 느껴졌다. 기껏해야 세 달도 되지 않은 이야기일 텐데.

“김현, 수업은 잘 듣고 있어?”

김준이 물었다. 한지헌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서 가장 많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은 김현이었다. 강수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잘 듣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나도 여유가 없어서. 꺼내지 못한 말은 삼켰다. 하지만 알 만하다는 듯 김준의 미간이 좁혀졌다.

“올까?”

방금까지는 김현에 대한 물음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단박에 이해되는 질문에 강수하는 입을 다물었다.

글쎄, 올까? 우리한테 한지헌이 다시 올까? 제 스스로에게도 다시 물었다. 지헌이 미국으로 간 후 벌써 한 달이었다. 적응을 하려거든 충분히 적응했을 시간인데, 지금까지도 지헌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과연…… 올까……?

“오겠지.”

수하의 대답에 김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는 너를 믿고 있으니까. 우리는 다 너를 믿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곧, 오겠지. 그저 적응하는 데 조금 더 시간이 걸리고 있는 거겠지. 불안해진 마음속은 스스로 지헌의 변명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몇 번이고, 그게 몇십 번이고.

[M+3]

“김준.”

“아, 시비 걸 거면 가라.”

짜증스러운 얼굴로 김준은 공을 던지고 있었다. 그 뒤에는 장우진이 삐뚜름하게 서서 그 꼴을 보고 있었다. 완전히 미쳤다.

같이 야구 하는 감독이나 동료들이야 미친 것처럼 야구에 달려드는 김준을 보고 좋아한 모양이지만, 우진과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제 마음을 풀 데가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였지만 김현과 김준, 두 형제는 유독 더 심했다. 장우진이 한숨을 내어 쉬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야구하고 때려치울 거냐?”

“왜 왔어?”  ????????

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왜 왔겠냐. 미친놈 얼마나 미쳤는지 보려고 왔지. 우진은 답답한 속을 풀어 보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지만 의미 없는 몸짓이었다. 그날 이후로 가슴 한구석이 응어리가 진 것처럼 좀체 풀리지가 않았다.

쌀쌀해진 날씨가 시간이 흘렀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지만 아직도 저도 녀석들도 그 여름의 기억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적당히 해. 몸 챙겨.”

“무슨 상관이야.”

유난히 날카로워진 김준이었다. 언제나 허허실실 웃고 다니던 얼굴은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다. 밝아 보인다고 생각했던 얼굴은 웃음기가 사라지자 차가워 보였다. 우진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오겠지. 올 거야. 좀 더 믿어.”

“미친놈. 벌써 3개월이야. 적응을 해도 한참을 했을 시간이라고.”

“사정이 있겠지.”

“사정은 무슨. 지금까지 안 온다는 건 간 거야. 우리 버리고 간 거라고!”

“말 함부로 하지 마.”

“……그래, 너 혼자 그렇게 믿어. 난 안 믿어.”

한숨을 내쉬며 김준이 완전히 장우진에게서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가득한 몸짓이었다. 장우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나날이 불안함은 커지고만 있는데 다른 녀석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니까 더욱 무서워졌다.

믿어, 제발 좀 믿어줘. 나도 정말로 안 올까 봐 걱정되고 무서우니까 나랑 같이 믿어 주라. 제발.

우진은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삼켜 냈다. 불안감으로 터질 것 같은 심장에 응어리가 점점 더 커지고만 있었다.

[M+6]

유난히 추운 것 같은 1월.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새 고3이 되어 있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멍한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우진이었다. 터덜터덜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유한을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한 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날부턴가 자꾸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일단 한숨이 먼저 나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거니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딸랑, 소리가 나고 카페의 문이 열렸다. 저 먼 창가 쪽에 앉아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유한이 보였다.

“형.”

“어, 왔어?”

언제나 반갑게 웃음 지으며 누군가를 대하던 유한이었다. 지금도 웃고는 있었다. 하지만 진심은 담겨 있지 않은 듯했다. 그저 입꼬리를 살짝 올렸을 뿐이었다. 표정 관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진은 웃고 있지도 않은 채였지만.

이미 제 음료까지 시켜 놓은 덕분에 우진은 그냥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헌이 없어진 이후로는 이유한조차도 잘 만나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이제 우진도 꼭 올 거라고 믿었던 그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이쯤 지났으면…….

“대학 들어갈 준비는 잘되어 가?”

“준비할 게 뭐 있어. 그냥 노는 거지.”

무심한 얼굴로 유한이 말했다. 공부했던 게 있어서인지 5개월 정도의 시간 동안 검정고시에 수능까지 끝내 버린 유한이었다. 참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지헌이 사라지고 공부에만 매달린 강수하를 보면 이유한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예상했다. 우진이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잘 지내?”

“……뭐, 그럭저럭.”

“다행이네.”

이유한은 단순히 우진의 안부만 물은 것은 아니었다. 지헌이 떠난 이후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은 비단 둘만은 아니었으니까. 이유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불현듯 지헌이 떠오를 때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진짜 너는 우리를 떠난 걸까? 왜? 우리가 혹시 부담스러웠던 걸까? 그래서 우리를 떠났을까? 아니면 정말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걸까? 어쩔 수 없이 우리를 떠났을까.

“벌써 6개월이나 지났네.”

불현듯 우진이 중얼거렸다. 유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지헌이 이렇게도 그리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M+12]

유한은 더운 날씨에 눈살을 찌푸렸다. 덥다, 진짜. 작년에도 이렇게 더웠던가. 아, 기억이 잘 안 난다. 유한이 제 머리카락을 짜증스레 헤집었다. 자연적으로 머릿속에는 그맘때의 더위보다는 그때 제 옆에 있던 누군가가 더 쉽게 떠올랐다.

왜 1년이나 지났는데도 이렇게 생생한 건지. 제 옆에서 웃던, 제 손을 잡았던, 입술이 맞닿았던 한지헌밖에 생각이 안 났다.

1년이나 지났으니까 이제 잊힐 법도 한데 잊히지가 않았다. 괴로우리만큼 생생한 기억이었다. 도대체 네가 뭐라고, 나는 아직도 너를 지우지 못하고 있는 걸까.

“김현?”

멍청하게 걸음을 옮기던 이유한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아, 나 또 여기 왔나. 예전 한지헌의 집이었다. 생각 없이 걷다 보면 꼭 이쪽으로 왔다. 멍청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 이상 한지헌은 여기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그런 짓을 하는 건 저뿐만은 아니었던 듯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이유한이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공허한 눈이 제 눈을 마주했다. 이유한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너 뭐 하냐.”

“……아, 형이에요?”

집 앞에 쪼그려 앉은 김현은 얼굴이 엉망이었다. 다들 아무리 힘들어해도 자기 생활을 찾아가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 녀석을 심어 놓고 그래도 살아가고 있었다. 근데 얘기를 듣긴 했지만 너는, 너는 왜 아직도…….

이유한이 한숨을 내쉬며 김현에게 다가갔다. 바짝 다가온 이유한을 한번 본 김현이 다시 멍하니 땅을 내려다봤다.

“일어나.”

“……먼저 가요.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요.”

“일어나라고 했어.”

“싫어요.”

이상한 고집이었다. 결국 유한이 김현의 팔을 잡아 올렸다. 김현의 몸이 힘없이 끌려왔다. 몸이 안쓰러울 정도로 말라 있었다. 이유한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너 정신 안 차려?”

“아, 나 좀 그냥 둬요. 형.”

“김현!”

“제발 저 좀, 아…….”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김현은 혼자서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 있었다. 몇 번이나 우진을 통해서 김현에 대해서 듣긴 했었지만 막상 마주하고 보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현아.”

“미안해요.”

“김현.”

“내가 그날 지헌이한테 그런 말만 안 했어도…….”

이유한이 이를 악 물었다. 도대체 너는, 다들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데 도대체 왜 너는 아직도. 이유한은 후회스러웠다. 그날 죄책감을 느끼지 말게 하자고 말했던 저 스스로를 원망했다. 그 말 한마디로 누군가 이렇게 무너질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런 말 안 했을 텐데.

“사정이 있었을 거야. 너 때문이 아니라고.”

“미안해요, 으윽. 죄송해요.”

“제발 정신 차려. 응? 내가 미안해. 현아.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

“……제가 죄송해요. 윽, 나, 나 때문에!”

이유한은 몸을 비트는 김현을 끌어안았다. 눈물범벅이 된 녀석이 목을 놓아 울었다. 미안하다, 죄송하다 몇 번이고 말하면서.

이게 네 잘못일까. 아니, 떠난 것은 지헌이다. 죄책감이니 뭐니 지껄인 것은 자신이다. 그 모든 짐을 네가 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유한이 몇 번이고 녀석의 등을 토닥였다. 벗어나, 그 기억에서 벗어나. 유한은 그날 처음으로 지헌을 원망했다.

[M+20]

“몸조심하고.”

“어. 근데 뭐 징그럽게 이렇게 다 와 있냐?”

“네가 너무 빨리 가서 그렇잖아.”

훈련소 앞이었다. 다섯 사람 중 가장 먼저 입대하는 김현을 배웅하기 위해서 다들 나와 있던 참이었다. 강수하와 김준, 이유한, 장우진은 대학에 입학했다. 다들 그럭저럭 제 할 일을 찾아서 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현은 유별났다.

그 죄책감이 무언지 지헌이 사라진 지 1년이 넘게 지나서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녀석은 대학을 가는 것도 마다했었다. 그저 집 안에만 박혀 있었다. 없어졌다 싶으면 지헌의 집 앞이었다. 그 덕에 모두가 속이 끓었다.

다들 그리웠고 힘들었지만 무너지고 있는 김현이 걱정스러웠다. 그런 김현은 지헌이 없어 모일 일이 없던 다섯 사람이 만나는 계기가 됐다. 서로 위로를 해 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헌이 남겨 놓고 간 마지막 연결 고리였으니까.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도 김현은 점점 괜찮아졌다. 좋아졌다기보다는 그저 점점 사람다워졌다. 그러다 불현듯 군대에 가겠다고 했다.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모두가 차라리 무언가를 하기를 바랐으니까.

“너희도 곧 가야 돼.”

“나는 면제받아서.”

“……좋으시겠네요.”

장난스러운 말에 김현이 헛웃음을 쳤다. 농담도 치고 좋겠네. 나는 속이 아직도 이렇게 말이 아닌데. 하지만 김현은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농담이랍시고 말을 뱉는 이유한의 표정도 예전에 보던 그 얼굴은 아니었으니까.

“나 들어가 봐야겠다.”

“어. 들어가.”

김준이 김현의 어깨를 토닥였고 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걸음을 옮기려다 잠시 녀석이 멈춰 섰다.

“어, 혹시라도.”

“…….”

“연락 오면 꼭 알려 줘야 해.”

쭈뼛거리며 내뱉은 말에 김준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나머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김준이 화를 낼 수는 없었던 건 무너졌던 저 스스로를 겨우 일으켜 세운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을 바라보다 김현은 휙 뒤돌아섰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Y+5]

우진이 카페 안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강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넘쳐흐르는 과제를 정리해서 가방에 넣었다. 설계 과제도 있는데. 무심한 생각을 막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우진이 시선을 돌렸다.

“아, 안녕하세요. 제가 아까부터 봤는데 너무 제 스타일이셔서, 혹시 여자 친구 없으시면…….”

쭈뼛대며 다가온 낯선 사람이었다. 우진은 무심하게 그녀를 보다가 무심코 그녀가 들고 있던 전공 책에 시선을 뒀다. 한지현. 아, 저절로 삐뚜름한 웃음이 걸렸다. 우진은 순간 복잡해진 머릿속을 빠르게 털어 냈다.

“죄송합니다.”

“아, 여자 친구 있으신가 봐요.”

“…….”

우진은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다 입을 다물고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고는 카페에서 빠져나왔다. 한지헌. 숨이 찰 정도로 바쁘게 살다 보면 그래도 아주 잠깐은 너를 잊을 수 있었는데. 실소가 나왔다.

네가 내 옆에 왔던 그해 여름으로부터 벌써 5년이 흘렀다. 어느새 나는 스물셋이었다. 너도 나와 같겠지. 스무 살이 넘어간 스물 셋의 너는 어떨까. 그때처럼 여전히 맑을까. 예쁠까. 귀여울까.

쓸데없는 생각을 머릿속에 되뇌다 우진은 쓰게 웃었다. 정말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 되풀이한들 나는 다시 너를 만날 수 없을 테니.

우진은 빠르게 공학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맘때쯤이 되면 그해의 너를 몇 번이고 다시 떠올린다. 잊어버리려 해도 어찌나 강렬한 기억인지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말갛게 웃던 네가 지금이라도 내 앞에 나타나 오래 기다렸지? 하고 물어 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그렇게 된다고 해도…….

“하아.”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된다고 해도 내가 너를 그때처럼 웃으며 맞이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네가 싫다. 어떠한 사정이 있었던 나를 버린 네가 싫다. 나를 이렇게 기다리게 만든 네가 싫었다. 다시 나타난다면 화를 내리라, 욕을 퍼부어 주리라 몇 번이고 다짐해 왔다.

나를 놓친 네가 후회하고 또 후회하길 바랐다. 꼭 그렇게 되기를. 그렇게 생각해야 이렇게 무거운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졌다. 나만 힘든 게 아니기를 바라는 그 원망스러운 마음이 지속되고 있었다.

“장우진! 뭐 하냐, 멍 때리고 있어. 길 한복판에서?”

“아, 안녕하세요.”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들어가자. 수업 곧 시작한다.”

“네. 가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네게 아무 일도 없길,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은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평범하게, 생각보다 아주 평범하게 잘 살아가고 있으니 너도 나처럼 편안하길 바라고 있었다. 이중적인 마음이었다. 네가 불행했으면 좋겠다가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와, 근데 날씨 엄청 덥다.”

땀이 흐를 정도로 더운 날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봤다.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하고 살까. 몇 번이고 외면하고 외면한 생각이지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다. 지헌아. 한지헌, 네가 너무 보고 싶어.

[Y+6]

“프로 입단 축하한다.”

“어, 고맙다.”

김준은 잔을 부딪혀 오는 동료들에게 화답하며 소주를 들이켰다. 쓰다. 언제나 술은 썼다. 그래도 축하받는 자리니 지켜야만 했다. 사실 생각 같아서는 이럴 시간에 공을 던지거나 운동장을 도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물론 축하받을 일이긴 했지만 이상하리만큼 기쁘지가 않았다. 이때 녀석이 있었다면…….

“야, 좋은 날 그렇게 죽상을 하고 누가 자작을 하냐.”

“……술이 좀 땡겨서.”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제 잔에 다시 한번 술을 따라 낸 준이 술을 한입에 털어 냈다. 술은 썼다, 여전히. 털어 낸 소주잔에 소주가 따라졌다. 그래, 술이 당긴다는데 한번 마시고 죽어 보자 하는 동료의 목소리가 들렸고 다시 술잔이 맞부딪혔다. 몇 번이고 들이켠 술은 썼지만 머릿속은 변함없이 멀쩡했다.

취하고 싶은데 취하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취한 걸지도 모른다. 머릿속은 이미 녀석으로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더욱 더 선명해졌다.

내게 다가오던 너, 웃던 네 얼굴, 맞대 오던 입술. 그리고 그 마지막. 너는 뭐가 무서웠을까. 뭐가 무서워서 도망가 버렸을까. 그 말도 안 되는 관계를 지속하는 게 무서웠을까? 그럼 말을 하지. 그랬으면 기꺼이 그 관계는 버렸을 터였다. 그리고 얼마든지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었다. 나는 그럴 수 있었다. 다른 녀석들도 그랬을 거다. 근데 너는 왜.

“왜 버렸을까, 왜.”

“뭔 소리야.”

“응? 나는 진짜 하자는 대로 다 할 수 있었는데…….”

“이 새끼 취했나 본데. 또 이 소리 하네.”

“그러니까. 뭘 버려. 정신 차려, 김준.”

내가 너를 다시 만난다면 꼭 물어볼 것이다. 왜 그랬냐고. 왜 그래야만 했냐고. 네가 무엇을 원했든 나는 그대로 했을 텐데. 그게 네가 나를 떠나는 것만 아니었다면 그게 뭐든 했을 텐데.

[Y+6]

“안녕하세요.”

“어머, 김현 씨 안녕하세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어휴, 저야말로 잘 부탁하죠. 이쪽으로 앉으세요.”

오랜만에 찍은 영화였다. 영화가 막 개봉하면 홍보차 인터뷰가 잡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김현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생각으로 자리에 앉았다. 카메라가 세팅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큐 사인이 들어가고 리포터가 입을 열었다. 이번 영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더불어 주인공을 모신다는 안내와 함께 박수를 쳤다. 김현은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카메라 앞에서는 언제나 그랬듯 웃는 얼굴이었다.

“진짜 너무 잘생겼어요. 알고 계시죠?”

한참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을 때 문득 리포터가 대본에 없던 질문을 꺼냈다. 김현은 살짝 의아하게 눈을 떴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저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뭐, 자주 듣긴 하죠.”

“얼마 전에 프로 야구 입단한 김준 선수랑 쌍둥이라고 들었는데…….”

“네, 맞아요.”

“어머 정말요? 어쩜 쌍둥이라도 그렇게 다르게 잘생겼어요?”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현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준이 입단하고 나서부터는 유난히도 자주 듣는 질문이었다. 또 자기 얘기했다고 지랄하려나. 아니, 뭐 물어보는 걸 어떡하라고. 김현이 문득 드는 어이없는 생각에 헛웃음을 쳤다.

김준은 김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저조차도 그 기억 속에 묻혀 살고 있으면서도 김현이 묻혀 사는 것은 싫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군대 가기 직전까지 정신 나간 놈처럼 살았으니 그랬을 법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간혹 예전에 찍었던 지헌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현을 볼 때마다 준은 불같이 화를 냈다. 한 번은 핸드폰을 뺏었던 적도 있었다. 그날 정말 오랜만에, 아주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 녀석과 주먹다짐을 했었다.

그때 김현이 말했었다. 네가 지헌이를 잊으려고 하는 건 상관없다고, 내 추억까지 뺏어 가려고 하지 말라고.

그 이후로 김준은 김현에게 어떠한 터치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간혹 그런 말을 했다. 우리를 버린 거라고, 그렇게 좋은 기억인 양 기억하지 말라고. 김현은 그게 듣기 싫었다. 버렸다면 정말 우리를 버린 거라면, 그건 모두 내 탓이니까.

“시청자분들이 질문을 준 게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네.”

인터뷰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이건 저도 진짜 궁금하긴 한데 김현 씨 첫사랑은 어땠어요?”

김현이 실소를 내뱉었다. 이것도 대본에 없었던 질문이었다. 김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리포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첫사랑. 아, 첫사랑.

“아주 맑고 예쁜 친구였어요.”

“아…….”

순간 리포터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김현 씨한테 이런 표정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엄청 많이 좋아했었나 봐요.”

화들짝 정신을 차린 후에 덧붙인 말에 김현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죠.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잘 지내면 좋을 텐데.”

어쨌든 결론적으로 내가 한지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마음은 요즘은 이런 것이었다. 어디에 있든 잘 지내고 있는 것. 그리고 네가 나를 잊지 않았기를.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Y+7]

강수하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의 연속이었다. 본과 4학년에 올라오고 나서부터는 국시 준비까지 겸해지는 바람에 더욱 정신이 없었다. 잠을 줄이고 공부를 하고 학교를 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쁜 게 훨씬 나았으니까. 쓰러지듯 잠을 자고 일어나서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아예 무슨 생각이라는 것을 할 틈이 없는 그런 생활이 훨씬.

“강수하, 어디 가냐?”

“어, 서점. 사고 싶은 책이 있어서.”

“와, 그 와중에 책도 읽어? 너 진짜 대단하다.”

동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강수하는 그저 고개를 까딱였을 뿐이었다. 동기는 자기는 차라리 잠을 좀 자야겠다며 손을 흔들고는 사라졌다. 강수하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려 근처의 서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서점 안을 둘러보며 사고 싶었던 책을 골라 손에 들었다.

잠깐의 짬이 날 때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무언가 하나라도 손에 그러쥐고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그러던 중에 제 눈에 띈 책이 있었다. 끝없는 이야기. 강수하는 헛웃음을 쳤다.

그러고 보니 돌려받지 못했었다. 읽어 보겠다고 밝게 웃으며 가방 안으로 책을 넣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이 남아 있을까. 강수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책은 아직 가지고 있을까. 너도 나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을까.

사실 자신이 없었다. 벌써 7년이나 지나간 이야기였다. 녀석이 나를 지금까지 저처럼 안고 살 것이라는 자신이 없었다. 사실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저를 기억하고 있다면 한번 정도는 연락했었겠지. 알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녀석은 나타나지 않은 거다.

어느 날은 원망을 하다가도 또 어느 날은 그리워했다. 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아직도 너를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네가 사무치게 그립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네가 보고 싶었다.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네가 나타난다면 나는, 그래, 나는 그 무엇도 묻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나타나 줘서 고맙다고. 충분히 기뻐하고 다시는 놓지 않을 것이다.

이 7년 동안 네가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나는 다 이해할 것이다. 그러니 한 번만 너를 더 보고 싶었다.

들고 있는 책을 바로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코끝에 그맘때 한지헌에게서 맡았던 향이 느껴졌다. 가끔은 무서웠다. 이렇게나 기억이 선명해서, 너를 평생 잊지 못하면 어떡하지.

나름대로 참아 내고 있던 것들이 무너질 것 같았다. 수하는 머리를 젓고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녀석을 기억하고 있는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Y+7]

“가게 놀러 와라.”

“뭐 툭하면 가게에 놀러 오래.”

“우리 알바가 너 되게 보고 싶어 하거든.”

“……미친놈이냐? 좋으면 좋다고 얘기를 해.”

유한의 말에 경호가 민망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미친놈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버럭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네가 걔 좋아하는 거 알겠는데 굳이 또 아니라고 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유한이 쯧, 혀를 찼다.

“휴가 기간에 뭐 할 거야.”

“여행 가야지.”

“미국?”

“…….”

유한은 내일부터 일주일간 휴가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미국행 비행기를 끊을 생각이었지만 이번 휴가는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내가 너를 이제 조금씩 놓아 가고 있는 건지 우습게도 이번 여름에는 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 넓은 땅에서 너를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매번 이렇게 미국으로 향하는 제가 멍청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휴, 미친놈.”

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서경호는 이미 대답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유한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내일이라도 당장 마음이 바뀌면 비행기 티켓을 끊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 맞다. 우리 아르바이트생 새로 뽑았는데.”

“……그걸 나한테 왜 말하냐.”

“걔 좀 묘해.”

“아니, 나한테 왜 말하냐고.”

서경호는 이유한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제 말만 하는 거야 한두 번도 아니지만 그때마다 늘 어이가 없었다.

“걔가 너처럼 웃더라고.”

이유한이 헛웃음을 쳤다.

“내가 뭐, 새끼야.”

“그 한 7년 전쯤부터 뭐, 지금도 그렇지만 너 존나 공허하게 웃잖아. 마치 세상의 짐 다 가진 사람처럼.”

“뭐래.”

“근데 걔가 그렇게 웃더라니까.”

어이가 없어진 이유한은 고개만 저었다. 저처럼 웃는다는 게 무슨 말인 건지. 7년 전부터라면 지헌이 사라진 그때쯤부터였다. 그때의 내 얼굴과 똑같이 웃는 사람이라. 괜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신은 누군가를 잃어서 그러는 건데 그 사람도 그러려나. 어쩐지 얼굴도 보지 못한 그 새로운 알바생한테 동질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뽑았어.”

“……미친놈.”

자랑스레 녀석이 말했다. 이유한은 한숨을 내어 쉬었다. 누군가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자기처럼. 자신이 한지헌을 떠나보냈던 그날처럼 누군가를 잃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런가 왠지 기분이 오묘해졌다.

아, 지헌이 보고 싶다.

하지만 결국 제 모든 생각의 끝은 그것이었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녀석이 보고 싶었다. 늘 어디에서나 머릿속에 녀석이 따라다녔다. 당장이라도 내 눈앞에 나타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도대체 언제까지 너를 그리워하고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너를 잊을 수는 있을까?

아니, 지헌아. 너는 내게 다시 돌아올까?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날까? 나타나기만 해 준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정말, 정말로 다시는 너를 놓지 않을 텐데.

네가 다시 나를 만나서 내가 싫어졌다고 하면 어떡하지. 나를 모르는 척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나타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아니다. 그 어떤 상황이라도 괜찮다. 그저 네가 영원히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만 아니라면 나는 무엇이든 괜찮다. 그러니까 내게 나타나만 주라. 응? 지헌아,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만 줘. 제발.

언제 사라질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괴로운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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