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 이유한 외전
“이제 오빠 혼자 해도 될 것 같아요.”
커피 샷이 내려오는 것을 멍하니 기다리고 있던 때에 혜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뜬금없는 소리에 혜원을 의아하게 봤지만 금세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많이 적응해서 음료 정도야 어렵지 않게 뽑아내고 있었다.
“혜원이 너 은근히 떠넘기려고 칭찬한 거 아냐?”
3시가 되어 가는 시각이라 한창 바쁜 때는 지나간 참이었다. 덕분에 여유를 찾은 사장님이 킥킥거리며 혜원을 놀렸다. 당연하게도 혜원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맞는 거 같은데. 나한테 다 떠넘기려고.”
“아니라니까요. 진짜.”
나까지도 한마디 덧붙이며 카페모카에 생크림을 올리고 진동벨을 울렸다. 손님이 다가와 음료를 가지고 가고 나니 혜원이 툴툴거렸다. 귀엽다니까.
이런 사소한 장난을 칠 정도로 카페는 이제 여유로웠다. 하지만 그 여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금방 딸랑이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손님이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문이 열리고 들어 온 사람은 한 여자분이었다. 한눈에 봐도 다시 한번 시선이 돌아갈 만큼 예쁜 사람이라 우리는 무심결에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와, 진짜 예쁘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어, 어서 오세요.”
그나마 빠르게 정신을 차린 혜원이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그 여자분이 싱긋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금세 표정이 의아해졌다. 왜 그러는지 싶은 생각은 사장님의 목소리에 금방 사라졌다.
“민수연?”
아, 사장님 아는 분인가? 혜원과 내가 눈을 마주쳤다. 놀란 듯 크게 떠진 눈이 금방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보조개가 들어가는 예쁜 웃음을 지으며 여자분이 다가왔다.
“서경호, 오랜만이다.”
아는 분 맞구나. 혜원과 내가 살짝 눈치를 보며 카운터에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대신에 사장님과 손님이 가까이 붙었다. 혜원이 내게 속삭였다.
“엄청 예쁘다. 그쵸.”
“그러게.”
두 사람은 반가운 기색을 띠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멀지 않은 테이블에 자리를 옮겼다.
“아, 진짜 예쁘다.”
두 사람이 먹을 아메리카노의 샷을 뽑으며 혜원이 말했다. 어쩐지 불퉁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에 어이없이 웃었다.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고는 생각했는데 저렇게 툴툴거리는 표정을 보아하니 진전이 있긴 있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모르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진짜 예쁘다. 게임 속 사람인가? 그러니까 사장님하고도 아는 거겠지. 그럼 이유한도 알고 있으려나. 학교 동창 같긴 한데. 어렵지 않게 생각난 이유한의 얼굴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다시 한번 가게의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자동적으로 나오는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을 때는 방금 전 내가 떠올렸던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 이유한…… 형.”
무심결에 나오는 이름에 형 소리를 어색하게 붙이니 녀석이 웃으면서 내게 다가왔다. 혜원이 금세 발그레해진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이유한도 마찬가지였다.
“아르바이트 끝날 때 됐지?”
“어? 어.”
카운터로 가까이 온 유한이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그사이에 이유한을 발견한 사장님이 이 쪽으로 손을 들었다.
“이유한.”
그 목소리에 유한이 고개를 돌렸다. 사장님이 없는 줄 알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던 녀석이 그 옆에 앉아 있던 여자분을 보고 어, 소리를 냈다. 역시 아는 사람인가? 낯선 이를 보는 눈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이유한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어? 유한아.”
여자의 입에서 이유한의 이름이 나왔다. 역시 아는 사람이구나. 그 목소리에 내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여성분의 눈이 어쩐지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 같았다. 뭐지, 이 전개는. 나는 두 눈만 굴리고 있었고 혜원도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어, 오랜만이네. 지헌아. 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부탁 좀 할게.”
“응.”
녀석은 그 길로 그 테이블로 다가갔다. 오랜만이네, 하는 소리가 테이블에서 들려왔다. 나는 아닌 척하면서도 최대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닥 크지 않은 대화였기에 다른 손님들의 대화 소리에 묻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다 아는 사람들인가 봐요. 고등학교 동창인가? 사장님하고 친구분하고 동창이랬으니까.”
“그런가 봐.”
“근데 진짜 예쁘다. 자꾸 시선이 가요. 이렇게 보면 안 되는데.”
“하하. 그러게.”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기분이 그랬다. 이유한을 보자마자 촉촉하게 젖어 들어간 것 같은 눈빛 때문이었다.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저런 눈빛이지 않을까? 근데 무슨 이유?
“오빠, 이거 제가 가져다줘도 돼요?”
혜원이 완성된 아메리카노를 들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사장님이 신경 쓰이는 것 같아서였다. 나도 이유한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갈래, 하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혜원이 웃으며 아메리카노를 들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유한이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며 웃었다. 이쪽으로는 시선이 넘어오지 않아서 어쩐지 서운해졌다. 서운할 것도 많다. 불현듯 드는 생각에 저절로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저분 사장님 친구 구 여친인 거 같아요.”
“어?”
금세 커피를 주고 다가온 혜원이 조금은 홀가분한 얼굴로 말했다. 구 여친? 제대로 들은 건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녀석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여자분은 눈이 촉촉하게 젖어서 미안하다고 하고 있고, 사장님 친구분은 괜찮다고 웃고. 막 엄청 다정하고. 어휴.”
아, 그런가. 전 여자 친구인가? 나는 힐끔 그 테이블을 훔쳐봤다. 괜히 마른침이 삼켜졌다.
“잘 어울리네.”
딱히 거짓은 아니었지만 말을 내 입으로 내뱉고 나니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이건 무슨 기분이지. 이유한의 전 여자 친구라고 해도 무슨 상관이라고.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데.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세 사람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내가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끔 보는 여자분의 얼굴은 혜원의 말처럼 미안한 기색을 띠고 있었고 이유한과 사장님은 한 번씩 손사래를 쳤다.
예쁘게 웃으며 흘러내리는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는 것을 보다 나는 괜히 커피 머신에 비춰지는 내 모습을 들여다봤다. 나름대로 정돈을 해 놓고 나온 건데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못나 보였다.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애써 정리해 봤지만 여전히 내 마음에 들진 않았다. 결국 다시 한숨.
“왜 한숨을 쉬고 있어?”
언제 왔지? 커피 머신에 고정했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어느새 내 앞에 다가왔는지 웃고 있는 이유한이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녀석을 따라 웃었다.
“머리 정리가 안 돼서.”
“예쁜데?”
녀석은 무심하게 말했지만 괜히 기분이 오묘해졌다. 자리를 끝낼 모양인지 어느새 사장님과 여자분도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나 먼저 가 볼게. 일이 있어서. 나중에 연락할게. 술이나 한잔하자.”
웃으면서 하는 그분의 말에 이유한과 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보자.”
간단한 인사도 함께였다. 나는 웃던 얼굴을 유지하며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내 인사 한마디에 생긋 웃는 얼굴이 너무나도 예뻤다. 저렇게 예쁜 분이랑 만났었구나. 나는 다시 한번 힐끔, 내 눈앞의 커피 머신에 비친 내 모습을 살폈다. 왜 이렇게 오늘따라…….
“오빠 시간 끝났어요.”
뻘한 생각에 젖어 있을 때 혜원이 방긋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시곗바늘이 어느새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옷 갈아입을게요.”
“어. 그래.”
나는 조금 바쁜 걸음으로 탈의실로 옮겨 갔다. 들어가서 문을 닫자마자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머릿속에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멀어진 그 사람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탈의실 안의 거울에 내 모습이 비춰졌다.
“오늘따라 진짜 왜 이렇게 별로인 것 같지…….”
왜 이렇게 편하게 입고 온 거야. 좀 더 깔끔하게 입을걸. 편한 회색 티셔츠가 눈에 거슬렸다.
***
“지헌아.”
나는 이유한의 집 침실에서 그와 입을 맞대고 있던 중이었다. 녀석의 집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며 영화를 보기로 했기에 이 집으로 온 것이었지만 현관문을 닫자마자 나는 이유한에게 매달렸다.
이상하게 점점 마음이 안달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 아까 그분에 비해서 내가 너무 초라한 것 같은 기분.
녀석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제게 매달리는 나를 보며 웃으며 기꺼이 침실로 나를 옮겨 와 입술을 맞췄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하지만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도 금방이었다. 입술을 맞부딪혀 오는 내게서 살짝 떨어진 이유한이 의아하게 물었다. 나는 아무런 말 없이 그 입에 내 입술을 다시 맞댔다. 하지만 기꺼이 입술을 받아 준 유한은 금세 내게서 떨어졌다.
“왜애.”
“아니, 좀 뭔가…….”
이유한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의심스러운 얼굴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내 입술에 입을 쪽쪽 맞춰 왔다. 나는 녀석의 목에 팔을 감았다. 자연스레 내 턱을 감싸 오던 이유한이 혀를 내어 내 입술을 핥아 내다 갑자기 뚝 떨어졌다.
“진짜 이상한데.”
“……뭐가?”
나름대로 자연스레 뱉은 대답에 이유한이 입을 다물었다. 이유한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은 계속하고 있는 모양인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눈을 굴리다 녀석의 입술을 찾았다. 하지만 쪽, 한 번 닿았다 떨어진 입은 다시 한번 닿아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의문 가득한 눈빛이었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봐도 될까. 근데 진짜 맞다고 하면 어떡하지. 오히려 이상한 걱정이 들었다. 뭐, 이유한이 나를 좋아하는 걸 의심하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너무 비교가 되니까…….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내 뺨을 이유한이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였다.
“진짜 왜 그러는 거야? 응? 무슨 일 있었어?”
나는 목에 감았던 손을 풀며 이유한의 뺨을 천천히 쓸었다. 근데 너무 물어보고 싶어.
“있잖아.”
“응.”
“아까 카페에 오셨던 여자분.”
“누구? 아, 민수연?”
아. 민수연이구나. 이름도 예쁘네. 잠시 머리에 드는 뻘한 생각은 바로 접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분…….”
“응.”
나는 두 눈을 굴렸고 이유한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결국 숨을 크게 한번 몰아쉬고 입을 열었다.
“아까 그분이 혹시 전 여자 친구야? 아까 혜원이가 그런 것 같다고 해서, 궁금하기도 하고. 어, 좀 신경 쓰이기도 하고…….”
한번 말을 꺼내니까 나도 모르게 우다다, 뱉은 말에 이유한이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다 보니 좀 빨랐던 것 같아서 잠시 말을 멈추고 눈치를 살피니 녀석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야.”
“응?”
“전 여자 친구 아니야. 그랬으면 네 앞에서 내가 걔랑 편하게 얘기를 했을 리가 없잖아.”
일단 가장 처음 뱉은 말은 부정이었다. 이유한이 조심스레 내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어, 동창이야. 고등학교.”
석연찮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파고들어 묻기가 껄끄러웠던 탓이었다.
“그렇구나. 혹시나 했어.”
하지만 더 묻지 못한 대신에 그냥 동창이었다면 유한이가 저렇게 어색해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백하게 의심이었다. 이유한이 그렇다고 하는데 왜 나는 이 사소한 걸 믿지 못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네가 싫어하겠지. 문득 기분이 가라앉았다.
“키스해 줘.”
그 가라앉은 기분을 풀어 보고자 나는 부러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유한은 빤히 나를 보기만 했다. 녀석은 입술을 맞춰 오는 대신에 한숨을 내쉬었다.
“지헌아.”
“응?”
“궁금해?”
이유한이 물었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했다. 무슨 사이였는지. 이유한이 살짝 웃음 지었다.
“그, 음. 동창은 맞아.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고.”
“응.”
“그냥 그때 나 사고 났을 때 그 사고 현장에 같이 있었어. 그날 이후로 처음 본 거고.”
생각을 정리한 듯 한참 후 이유한이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문득 사장님의 말을 떠올렸다.
‘죽겠다고 한 것도 지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이유한을 좋아해서 그런 거거든.’
아. 아…….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아, 그래서 그런 눈으로 이유한을 봤구나. 나는 그제야 이해되는 그 표정을 떠올렸다. 그 이후로 처음 본 거라면 나라도 그런 얼굴을 했겠다. 깨어난 이후로 처음 보는 거잖아. 하,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거기다 이유한이 선뜻 말해 주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됐다. 내게 사고가 있었던 날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주길 꺼려하던 녀석이었다. 내가 그렇게 울면서 제 집으로 왔던 그날 이후로 더더욱.
“미안.”
“어? 뭐가?”
생각해서 말하지 않은 건데 나는 의심 따위나 했다는 게 미안했다. 말을 하지 않으면 안 한 이유가 있는 건데, 멍청하게. 나는 고개를 붕붕 젓고는 다시 한번 녀석의 목을 감았다.
“이제 이해했으니까 빨리 키스해 줘.”
“……너 은근히 스킨십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유한이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할 거야.”
“응?”
“그렇게 안기면 내가 무조건 안을 줄 알아?”
은근히 불퉁한 티를 내면서 이유한이 말했다. 나는 어이없이 웃었다.
“왜. 안 안아 줄 거야?”
“머리 복잡한 걸 이런 식으로 풀려고 하지 마. 왜 그래, 진짜.”
짐짓 서운한 티가 많이 나고 있어서 내가 미안함을 담아 녀석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냥 내가 좀 부족하게 느껴져서. 가만히 내 손길을 받고 있던 녀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내가 나빴다. 소개도 안 시켜 주고.”
“아니, 그거 아닌데…….”
“차라리 거기서 동창이라고 바로 말했으면 혼자 이렇게 생각 안 했을 텐데.”
영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내가 화들짝 놀라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유한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아, 그게 아니고 내가 좀 창피해서 못 물어봤어.”
“네가 뭐가 창피해.”
“아니, 그냥 너무 예쁘시더라고.”
“……그게 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내가 좀 오늘 옷도 이상하게 좀 초라하기도 하고.”
“네가? 네가 초라하다고?”
이유한이 순간 고개를 저었다.
“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덧붙이는 말도 있었다.
“네가 나한테 얼마나, 와.”
“……아니이, 그게.”
“어떻게 초라하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이유한은 정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얼굴로 내 볼을 잡아 왔다. 이리저리 꾹꾹 눌린 손 사이로 볼살이 움직였다.
“누가 그런 생각 하라고 했어.”
“어, 그러게.”
“이거 벌 받아야 해. 혼나야 해.”
이유한이 짐짓 장난스레 웃었다. 나는 조금은 풀린 것 같은 녀석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다.
“손 들고 있을까?”
부러 시무룩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니 결국 이유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에 장난기가 어느새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손 들어.”
“응.”
나는 거리낌 없이 양손을 들었다. 녀석이 뭐가 그렇게 웃긴지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눈치를 살피며 그대로 손을 들고 있었다. 이유한은 한참을 웃더니 곧 내게 다가와 올라가 있던 양손을 한 손에 그러쥐었다. 덕분에 한 손에 양팔이 잡힌 내가 놀랄 새도 없이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눕혀졌다. 녀석은 위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귀여워.”
이런 자세로 귀엽다고 말하면 좀 이상하지 않나. 이렇게 누워 있는데 귀여우면 그거 내가 문제인 것 같은데. 내 시끄러운 머릿속이 들릴 리 없는 녀석은 곧바로 내가 입고 있던 상의를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맨살이 공기에 노출됐다. 나는 두 눈을 굴렸다.
“방금 안 한다고 했잖아.”
“왜. 하기 싫어?”
녀석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건 아니긴 한데. 내가 별다른 대답이 없자 이유한은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한 손으로 내 바지 버클을 풀어 내리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아직 밖이 밝은데 침대에 그것도 이렇게 잡혀서 누워 있으려니 갑자기 확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유한아.”
“응?”
“커튼이라도 쳐 주거나, 너도 벗거나. 아니면 이 손이라도 놔 주면 좋겠는데…….”
녀석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엄청나게 단호하게.
“싫어. 내 마음대로 할 거야.”
평상시 같으면 다정하게 내 뜻대로 했을 녀석이지만 오늘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 듯했다. 아니, 나 너무 민망한데.
나는 이유한의 손에 잡혀 있는 팔에 힘을 줬다. 발버둥 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내리누르고 있어서 그런가. 풀리지가 않았다. 심지어 나는 낑낑거리고 있는데 이유한은 웃는 얼굴이었다.
굴욕적인 마음에 나는 그만뒀다. 어느새 상의는 목 끝까지 올라왔고 하의는 속옷까지 내려져 무릎 아래로 어정쩡하게 걸쳐져 있었다. 반면에 이유한은 셔츠가 목 끝까지 잠겨 있었다. 아, 진짜 너무 창피한데.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그런 생각 다시는 하지 마. 알았지?”
이유한이 배시시 웃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그렇게 빠르게 대답하면 녀석이 나를 놔 주진 않을까 싶어서였지만, 이유한은 만족스럽게 웃으면서도 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손을 상체에서부터 살살 내렸을 뿐이었다. 내려간 손이 배를 지나 내 성기를 쥐었다. 한 치의 거리낌 없는 손짓이었다.
“아.”
평상시의 부드러운 손짓과는 달랐다. 손은 망설임 하나 없이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녀석은 일그러지는 내 얼굴을 웃으며 보고 있었다.
“아, 이, 하읏, 이유한, 너……. 아읏.”
“네가 손 들었잖아.”
아니, 그건 이렇게 드는 게 아니었잖아. 반박하고 싶었지만 점점 더 빨라지는 녀석의 손길에 나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되는 자극에 허리를 들썩이는 것밖에 없었다.
“으, 윽, 앗……! 가, 갈 것……. 흑.”
“가도 돼.”
이유한은 손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결국 버티지 못한 내 머릿속이 순간 하얘졌다. 녀석의 손놀림에 사정까지 한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유한이 웃으며 내 입술에 입을 쪽, 하고 맞췄다.
“종종 보고 싶다. 이거.”
“……죽일 거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손을 못 놓잖아.”
이유한이 입을 비죽거렸다. 녀석의 말처럼 이유한의 손은 여전히 풀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에 입술이 다가왔다. 뜨거운 입술은 목을 타고 천천히 내려갔다.
한 손에 쥐어져 있던 양손은 이유한이 깍지를 껴 왔다. 이러나저러나 잡혀 있는 것은 똑같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덜 굴욕적인 느낌이었다.
“유한아아.”
내게 입 맞추고 있는 이유한을 애처롭게 불렀다. 응, 소리가 들렸지만 여전히 머리는 아래에 있었다. 녀석은 배꼽 부근을 핥아 올리며 붉은 자국을 내는 데 열중했다. 나는 몸을 들썩이며 머리를 도리질 쳤다.
“나, 도…….”
“응?”
“나도……. 으, 너 만질래.”
여전히 입을 맞추는 데 열중하고 있던 이유한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마주쳤다. 녀석의 붉어진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스르륵, 내 손을 잡고 있던 그 손에서 힘이 풀어졌다.
“와. 나 방금 엄청 설렜어.”
금세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와는 상반되게 이유한의 눈가가 붉었다. 무척이나 흥분했을 때 나를 보던 눈빛과 흡사해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킨 녀석이 제 목을 채우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어냈다. 어렵지 않게 금세 풀어낸 셔츠가 단번에 벗겨졌다. 곧바로 녀석이 내 품으로 들어왔다.
목까지 올라와 있던 내 옷을 벗겨 내고 어깨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팔을 따라 내려간 입술이 내 손가락을 물었다. 느릿하게 핥아 내는 게 야해 나는 만지고 싶다는 말도 잊은 채 녀석이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만져 줄 건데?”
“어?”
“응? 어떻게 만져 줄 거야?”
내 손가락을 물고 핥으며 묻는 얼굴이 야했다. 이러다가는 손가락을 핥아지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손을 들어 녀석의 상체를 천천히 쓸어 당겼다. 아직 벗지 않은 바지에 손을 대 그것을 풀어 내리니 이유한이 눈웃음을 치며 내 손가락을 살짝 물었다.
“하루가 다르게 야해져, 아주.”
“내가?”
녀석은 대답 없이 웃으며 자신과 내 위치를 바꿨다. 갑자기 위에 올라타게 되어 당황했지만 이유한은 개의치 않고 협탁을 뒤적거렸다. 나는 그런 녀석의 바지를 단번에 벗겨 내고 내게 했던 대로 손을 움직였다. 이유한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나는 가만히 녀석을 응시했다. 이런 기분이었나. 흥분에 찬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 속이 당기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이유한의 하체도 뻣뻣해져 있는 걸까.
입가에 웃음이 폈다.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어느새 손에 콘돔을 쥔 녀석이 나를 빤히 보며 떨리는 손끝으로 포장지를 벗겨 냈다. 나는 그 손에 있던 콘돔을 내 손으로 가져왔다.
“뭐 해?”
“씌울 거잖아.”
씩 웃는 나를 얼빠진 얼굴로 보던 이유한이 제 성기에 콘돔을 씌우는 모습을 보더니 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나는 콘돔이 씌워진 성기 위에 자리 잡았다. 이유한이 손을 움직였다.
“풀어야지.”
“어어…….”
“그대로 있어.”
녀석이 무릎으로 서 있는 내 뒤로 손가락을 넣어 빠르게 움직였다. 순간 무너질 것 같아 나는 어깨를 잡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멈출 생각이 없는 듯 이유한은 손가락을 늘려 갔다.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손가락에서 찌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끄러움에 붉어진 얼굴을 감추고자 나는 이유한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녀석도 기꺼이 내 입술을 받아 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뒤가 갑자기 허전해진 기분이 듦과 동시에 녀석이 내 골반께를 잡았다.
“조금 급해서, 미안.”
이유한이 짧게 속삭였다. 내 골반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윽.”
갑자기 아래를 꽉 채운 느낌에 내가 단발의 소리를 내며 녀석의 어깨로 쓰러지듯 머리를 기댔다. 하지만 이유한은 바로 허리 짓을 시작했다. 급한 움직임이라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나는 그 몸 위에서 흔들렸다.
위에서 흔들리던 내 가슴을 녀석이 입에 담았다. 잘근잘근 씹으며 혀를 놀리기에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나를 이유한은 침대에 바로 눕혔다.
“지헌아.”
“으, 응……. 아.”
이유한은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였다. 어느새 내 양다리를 잡고 나를 보고 있었다. 하반신을 채우며 안을 찌르는 자극도 거셌지만 그 이글거리는 시선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으, 아, 앗! ……아흑.”
“아, 진짜.”
이유한이 내 입술을 단번에 머금었다. 혀를 가르고 들어오는 입술을 받아 냈다. 아까와는 전혀 비교도 안 되는 흥분이 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허리를 들썩였다. 이유한도 절정에 가까워 오는 모양인지 빠르게 움직였다. 머리가 새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