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장. 해피 엔딩? (20/36)
  • 9장. 해피 엔딩?

    “조심히 가고. 가서 바로 연락하고. 알았지?”

    “내가 애니. 너야말로 잘 있고. 언제든지 미국 오고 싶으면 오고.”

    “어, 생각 좀 해 볼게.”

    “정도 없기는.”

    정신없는 일주일이 지났다. 엄마가 미국으로 출국하게 된 날이었다. 나는 지금 엄마와 함께 공항에 나와 있었다. 생각을 좀 해 본다는 내 말에 금세 불퉁한 얼굴을 한 엄마는 그러면서도 나를 두고 가는 게 영 마음에 걸리는지 내 품에 안겨 들어왔다. 작고 왜소한 몸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너무나도 바빴다. 엄마에게 신경 쓸 정신이 없을 만큼. 운이 좋게도 학교 근처 적당한 집을 찾아내고 계약을 하고 이사까지 했다.

    그랬기에 지금 이 자리에 서고 보니 조금이라도 엄마하고 시간을 더 보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가득 들었다. 막상 나를 두고 떠나려니 걱정스러운 기색을 여실히 드러낸 엄마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요. 자주 연락할게요.”

    “그래.”

    “미안해. 같이 못 가서.”

    “알면 됐다.”

    나는 푸흐흐, 하고 웃었다. 탑승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엄마는 내 품에서 벗어났다.

    “엄마 없다고 굶지 말고, 또 게임한다고 밤새고 그러지 말고, 술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응?”

    “알았어요. 걱정 말아요.”

    “너 놔두고 가려니 왜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지.”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가요.”

    엄마는 내가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내가 괜찮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몇 번이나 내게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그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아니라서 나 또한 몇 번이고 그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딩 시간이 임박하자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제 손에 짐을 들고 내게서 떨어졌다.

    “갈게. 가서 전화할게.”

    “응. 바로 전화해야 해.”

    “알았어. 얼른 들어가. 엄마 간다.”

    “응. 조심히 가요.”

    엄마는 그렇게 인사를 하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몇 번이나 나를 돌아봤다. 나는 그런 엄마를 향해 애써 밝게 손을 흔들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게이트 안으로 엄마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기분이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한 감정은 천천히 흘러넘쳐 결국은 폭발했다. 엄마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결국 터져 나온 눈물에 처량 맞게 끅끅거렸다.

    무슨 일 난 것도 아닌데 왜 울어. 울 일도 아닌데. 부모님이 같이 사시겠다는데. 나는 그저 독립을 한 것뿐이었다. 나는 울음을 멈춰 보고자 애써 머리를 털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지만.

    힘겹게 눈물을 삼켜 내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꼭 이런 타이밍에 전화가 울렸다. 시야가 뿌옇기에 빠르게 눈물을 닦아 내고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김현의 전화였다.

    “응, 현아.”

    -지헌아! 나 지금 입국 했, 울어?

    애써 갈무리한 목소리에서 울음기를 느꼈는지 평소처럼 밝게 말을 하던 현이 놀라 물었다. 이렇게 바로 알아차려 오니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은 건지 금세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아, 울면 안 되는데. 울 일 아닌데. 현이가 놀랄 텐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눈물은 내 제어를 벗어나 버렸다.

    “아으, 현아……. 으윽”

    -왜 울어? 어디야?

    결국 터져 버린 눈물에 다급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끅끅 삼키다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그저 미국으로 갔을 뿐인데도 오랫동안 못 본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저려 왔다.

    “으, 윽, 엄마가, 흑끄.”

    -엄마가 왜. 어딘데. 갈게. 응? 지헌아.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겨우겨우 숨을 참아 가며 울음을 멈추려 노력했다. 눈물이 눈가로 계속해서 흘러나왔지만 겨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갔어.”

    -어? 어딜 가? 응?

    “미국, 미국에. 으흐.”

    겨우 내뱉은 말을 김현은 선뜻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꾹꾹 눌러 참으며 억지로 숨을 깊게 내쉬었다. 현이가 걱정하잖아. 울면 안 돼. 한지헌. 울지 마. 울지 말자.

    -어머니께서 미국에 가셨다고? ……지헌아, 너 지금 공항이야?

    “윽끄, 응, 응.”

    -어디. 어디에 있어? 내가 바로 갈게. 잠깐만 기다려. 응? 울지 말고.

    김현이 나를 달래듯 간지럽게 얘기했다. 괜찮아, 울지 마, 지금 갈게, 하는 녀석의 목소리에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고 있었다. 정작 어디인지는 말하지 않고 있는 나 때문에 김현은 속이 타들어 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울지 말자. 멀리 가시긴 했지만 아버지랑 같이 계시려고 간 거니까. 내가 이렇게 울 일이 아니었다.

    “현아…….”

    -응, 지헌아. 어디에 있어? 나 지금 출국장 쪽으로 가고 있어.

    방금 전 막 입국했다는 말을 꺼내던 김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내가 갈게. 거기에 있어.”

    -아냐, 내가 갈게. 거기 있어. 어딘지만 말하면…….

    “여기 사람 많아. 내가 갈게. 응?”

    -아냐. 내가 지금 출발했으니까.

    “내가 가는 게 빨라. 보고 싶어, 현아.”

    -아…….

    여전히 물기 섞인 목소리였지만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내 말에 김현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은 듯했다. 나는 아직도 새어 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입국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빨리 만나고 싶다. 만나서 안기면 조금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여기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이유니까.

    순간 말을 잇지 못하던 김현이 더듬더듬 제 위치를 설명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김현이 있는 곳에 도착한 나는 어렵지 않게 김현을 발견했다. 엄청 눈에 띄는 녀석이 안절부절못하며 왔다 갔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김현을 향해 달렸다. 현이 내가 달려오는 것을 발견한 듯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헌아!”

    나는 빠르게 현이에게 다가섰다. 김현은 내가 다가서자 바로 안으려고 한 것 같았지만, 나는 일단 김현을 저지했다. 바깥이었다. 누가 김현을 알아볼지 모르는데 그런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생각을 알아챈 듯 녀석이 바로 옆에 세워져 있던 승용차에 눈짓했다.

    “일단 타.”

    “응.”

    차에 올라타자마자 김현은 일단 차를 출발시켰다. 스케줄이 끝나고 막 도착한 터라 연예인 벤 같은 거 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평범한 승용차였다. 내가 조금은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돌리니 김현이 푸흐흐, 웃는다.

    “너 여기 있다고 해서 다 보냈어. 매니저 형이 쓰려고 회사 차를 하나 가져와서 다행이었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됐다. 모르는 사람들 있었으면 김현하고 편하게 이야기도 못 했을 테니까. 나는 조수석에 자리 잡고 앉아 김현을 봤다. 김현은 그 말을 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녀석이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세웠기 때문이었다.

    공항 내 가장 구석의 주차장에서 급하게 정차한 김현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바로 내 눈가를 쓸었다.

    “왜 울었어. 응? 눈물범벅이야.”

    아무래도 많이 신경 쓰였었는지 녀석의 눈썹이 팔자가 됐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눈가를 살살 쓸어 주는 손길에 심장이 콩콩 뛰고 있었다.

    “엄마가 미국에 갔어.”

    “미국에 갑자기 왜 가셨어? 무슨 일 있었어?”

    조심스레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김현이 다정히 물었다. 그 손길이 좋아서 나는 가만히 머리를 맡기고 있었다.

    “아버지랑 같이 살려고 가셨어.”

    “응?”

    “아버지께서 미국으로 오라고 하셨거든. 그래서 가셨어.”

    “……이렇게 갑자기?”

    김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모두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터라 갑자기일 만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됐어. 이씨, 막 다시는 못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안 좋지?”

    상황을 설명하며 다시 떠올린 엄마의 뒷모습에 나는 또 눈물을 글썽였다. 김현이 입꼬리를 따라 내리며 나를 품 안에 안았다. 나는 그 품 안으로 들어갔다. 폭 안긴 품이 따뜻해서 금세 또 기분이 풀리고 있었다. 나는 그 허리에 내 팔을 감았다.

    “울지 마. 진짜 다시 못 보는 것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몇 번이고 가. 내가 데리고 가 줄게, 응? 울지 마.”

    어쩐지 믿을 만한 말이었다. 김현이라면 얼마든지 데리고 가겠지.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달래려고 하면서 저도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더욱 그랬다.

    “너는 왜 울먹거려.”

    “네가 우니까.”

    나는 결국 헛웃음을 쳤다. 나오던 눈물도 김현 덕분에 사그라들고 있었다.

    “근데 지헌아.”

    한참을 그렇게 안겨 있었을까. 갑자기 김현이 나를 제 품에서 빼냈다. 갑자기 왜 그러는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니 녀석이 배시시 웃었다.

    “나 그 말 한 번만 더 해 줘.”

    “무슨 말?”

    “나 보고 싶다고.”

    나는 멍청하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곧 배시시 웃었다. 그 말이 듣고 싶었을까? 몇 번이고 말할 수 있고 늘 생각하는 건데. 김현의 눈을 나는 똑바로 마주했다.

    “보고 싶어. 보고 싶었어. ……스케줄은 잘 다녀왔어?”

    “응.”

    김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진짜 스케줄 다녀와서 이렇게 행복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러더니 녀석이 제 심장께를 움켜쥐었다.

    “완전 심쿵이야.”

    듣기 좋은 소리를 하며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에 나도 웃어 버렸다.

    “우리 지헌이는 울었는데 나는 이렇게 좋아서 어떡하지.”

    “하하, 괜찮아. 나도 네 덕분에 괜찮아졌어.”

    “그럼 다행인데, 안 되겠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응.”

    금세 밝아진 현이 기어를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출발할 것처럼 굴더니 금세 다시 기어를 P자로 바꿔 놓는다.

    “왜?”

    “아, 잊은 게 있어서.”

    김현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내 목덜미를 잡아 왔다. 그대로 넘어온 현이 내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 맞댔다가 떨어지는 게 아닌 혀로 입 안을 농밀하게 핥아 내는 키스였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내가 녀석의 어깨를 잡았지만 오히려 조금 더 깊게 들어왔을 뿐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김현이 내 입술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얼굴에 열이 올랐는지 후끈한 기분이었다.

    “보고 싶었어.”

    김현이 해맑게 웃었다.

    ***

    “와아. 진짜 하나도 정리 안 됐네.”

    “그렇다고 했잖아.”

    김현이 아직 정리 하나 되지 않은 내 집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 안절부절못했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 엄마가 미국으로 가게 된 이야기를 하며 어쩔 수 없이 내뱉은 독립이라는 말에 김현은 눈을 반짝였었다. 그러더니 이사한 집에 가고 싶다며 졸라 대기 시작한 터라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으로 온 참이었다.

    “그럼 이제 혼자 사는 거야?”

    “응. 곧 개강이고 학교에서 집이 너무 멀어서 힘들었거든.”

    “그렇구나.”

    김현은 기분 좋게 흥얼거렸다. 거실로 쓰고자 한 곳은 온갖 박스들이 널려 있던 터라 침실로 들어간 현이가 거리낌 없이 침대에 가 앉았다. 사실 앉을 자리가 거기밖에 없기도 했지만. 곧 해맑은 얼굴로 김현이 제 옆자리를 팡팡 쳤다.

    “많이 울어서 피곤할 텐데 여기 앉아.”

    “……피곤해서 앉는 거 맞아?”

    “글쎄.”

    내 장난스러운 물음에 녀석은 그저 킥킥거리고 웃었다. 웃고 있는 현이에게 나는 천천히 다가가 앉았다. 애초에 앉아 있을 자리가 이 침대 위밖에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뭐라도 좀 먹어야 할 텐데. 배고프지.”

    “으음. 이사한 날은 자장면이긴 한데.”

    김현이 골똘한 얼굴로 말했다. 이사라면 이틀 전에 했지만 집 상황을 보니 오늘이 이사한 날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김현의 말에 핸드폰을 두드렸다.

    “시키자. 자장면 먹을 거야? 근데 너 밀가루 먹어도 돼? 좀 더 좋은 거 먹어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 그런 거 먹어도 몸매 안 망가져.”

    “……그런 의미로 한 말 아니거든.”

    어쩐지 당당한 말에 내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그런 내 얼굴을 보며 김현은 웃으면서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새삼스럽게 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벗은 몸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질 뻔했다.

    나는 빠르게 상념을 털어 내고 핸드폰에 집중했다. 자장면 두 개에 탕수육 하나. 이거면 되려나. 나는 가만히 김현이 먹는 양을 가늠했다. 음, 곱빼기로 하자.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주문을 하고 나서 주위를 둘러봤다. 오늘부터는 여기서 자는구나. 오묘한 기분이었다.

    “와. 이상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내가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현이 중얼거렸다. 외려 당황한 내가 시선을 올리니 현이는 눈웃음을 쳤다.

    “네 집으로는 들어와 본 적이 없으니까.”

    “아.”

    “꼭 우리 신혼집 생긴 거 같지 않아? 신혼부부같이.”

    해맑은 얼굴로 김현은 붉어질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방금 겨우 진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어색하게 나는 손으로 부채질했다. 그런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또 진짜 신혼부부 같았다. 같이 사는 집, 같은 느낌.

    누군가의 집에 내가 놀러간 적이야 많았지만 내 집, 내 공간에 누군가를 들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부끄러워?”

    “뭐, 아닌데.”

    “아니긴. 얼굴 빨개져 가지고.”

    그 말에 고개를 숙일 새도 없이 김현이 내 양 볼을 잡아 눈을 마주쳤다. 그 와중에 어찌나 잘생겼는지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곧 김현이 낮게 웃었다. 이상한 기분은 여전했다.

    “뽀뽀하고 싶다.”

    “…….”

    “키스도 하고 싶다.”

    “…….”

    “응?”

    “……하면 되지.”

    그 머쓱한 대답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돼?’ 입으로는 내게 묻고 있으면서 김현은 불쑥 내게 다가왔다. 입술이 바로 맞물렸다. 나는 피하지 않고 현이의 목에 내 팔을 감싸 안았다. 현이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내게 가까이 끌려오고 있었다.

    곧 큰 손이 내 허리께를 감싸 느긋하게 쓸어 올렸다. 그 생소한 느낌에 나는 허리를 비틀었다. 그에 내 입술을 머금고 있던 김현이 조금 떨어지더니 혀를 내어 내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야릇한 기분에 발가락까지 오므려졌다.

    “근데.”

    하지만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이 떨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허리를 감싸 오던 손길도 어느샌가 떨어져 있었다.

    “응?”

    “내 처음을 이런 데서 할 수는 없어.”

    그 갑작스러움에 오히려 얼떨떨해진 내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지만 김현은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이었다.

    “어?”

    “너랑 하는 처음을 이런 데서 할 수는 없어. 엄청 좋은 데서 할 거야.”

    정말 쓸데없이 단호한 소리였다. 그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내가 어이없이 웃어 버렸다.

    “너 우리 집 무시하는 거지, 지금.”

    “어? 아니! 그게 아니고. 여긴, 음. 박스가 너무 많아.”

    김현은 눈을 굴리며 적당한 변명을 찾는 것 같았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써 하는 아무렇지 않은 척이었다. 심장이 쿵쿵쿵 뛰고 있었다. 완전히 분위기를 탈 뻔했다. 정말 김현 말대로 박스가 굴러다니는 이런 곳에서.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나중에 기대한다.”

    나는 부러 장난스럽게 녀석에게 말했다. 그게 생각지도 못했던 말인지 현이의 얼굴이 펑, 하고 붉어졌다.

    “아, 왜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아니, 그건 내가 할 소리였다고. 나는 킥킥거리고 웃어 버렸다.

    ***

    “뭐야?”

    “선물.”

    이틀 뒤면 개강이었다. 그 전에 겨우 시간을 짜 맞춘 모두가 내 집으로 모였다. 김 형제의 집에서 잤던 날 이후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인 자리였다. 오늘은 명목상으로는 집들이 를 하는 날이었다.

    집들이랍시고 부르긴 했지만 그냥 다 같이 놀자고 만든 자리인데 다들 그 명목에 꽤나 충실했다. 집에 들어올 때마다 집들이 선물이랍시고 무언가를 들고 들어온 거다. 나는 그 선물을 손에 받을 때마다 머쓱하게 웃었다. ‘이런 거 안 가져와도 되는데……’ 하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강수하 왜 이렇게 늦게 와. 배고파 죽는 줄.”

    “이제 끝났어. 먼저 먹지 그랬어.”

    대수롭지 않게 집을 둘러보며 강수하가 대답했다. 이제야 끝났다는 녀석의 말대로 미묘한 소독약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병원 냄새 별로 안 좋아하는데, 강수하한테 나는 냄새는 좋은 걸 보면 나도 참 중증이었다.

    “맛있는 거 많네.”

    “응, 지헌이가 다 시켰어.”

    “……만들어 주길 원했어?”

    “그럴 리가.”

    장난스럽게 말하는 김준에 나는 괜히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은 강수하가 가져온 선물은 다른 녀석들이 가져온 선물과 함께 두었다. 이따가 같이 열어 봐야지, 싶었다.

    강수하는 여러 가지 배달 음식이 쌓인 테이블을 잠시 보더니 다시 집 구경을 하는 것으로 관심을 돌렸다. 다른 녀석들도 한차례씩은 다 했던 것이라 나는 강수하를 졸졸 쫓았다. 강수하는 거실을 지나 내 방 침실 문을 열었다. 달칵하고 깨끗하게 정리된 침실이 보였다.

    “집 괜찮네. 다 치웠구나.”

    “응. 괜찮지?”

    “응. 미리 말했으면 도와줬을 텐데.”

    “에이, 이삿짐 아저씨들이 다 해 주셨어. 괜찮아.”

    괜히 머쓱하게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박스가 널브러져 있던 집은 요 며칠 사이 다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강수하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심드렁한 표정이 살짝 찌푸려진 것은 금방이었다. 그 표정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알아낸 내가 머쓱하게 웃었다.

    “근데 침대 왜 이렇게 커.”

    침실을 본 사람이라면 무조건 묻는 말이었다. 심지어 짐을 다 정리하고 나서 엄마와 영상 통화를 했을 때도 그랬다. 쓸데없이 무슨 침대가 그렇게 크냐고. 넓지 않은 방에 침대가 꽉 차 있는 것 같았다. 나조차도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었다. 나는 강수하의 물음에 그저 허허, 하고 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김 형제가 사다 줬대.”

    민망하게 웃고 있는 나를 대신해 장우진이 대답했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는 우진도 사실 처음 침실을 보자마자 미간을 확 찌푸렸었다.

    “저걸?”

    “어. 침대가 너무 작다고.”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 듯 장우진이 헛웃음을 쳤다. 이유한마저도 제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어이없이 웃고 있었다.

    “너희들은 저기에 손도 대지 마.”

    김준이 불퉁한 얼굴을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원래 있던 내 침대는 김현이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침대로 바뀌었다. 혼자 편하게 쓰던 싱글 침대가 너무 작다는 게 이유였다.

    혼자 쓰는데 왜 저렇게 큰 게 필요한 거냐는 내 물음에 왜 혼자 쓸 거라고 생각하느냐 반문한 김 형제였다. 너무 당당한 반문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방 안에 저 침대를 들여놓고야 말았다.

    “좋은데.”

    그 으름장에도 강수하는 개의치 않고 침대에 풀썩 앉았다. 그러고는 몇 번 콩콩 움직여 보는가 싶더니 그 입가에 곧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 웃는 얼굴로 나를 마주한 덕에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오르고 말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덕분에 머리를 툭툭 털어 내야 했다.

    “지헌아. 밥 먹자, 이제.”

    자리에 앉아 있던 이유한이 언제 일어났는지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아끌었다. 바로 끌려 자리에 앉게 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수하가 오고 나서 먹자고 손도 대지 않았던 음식을 보니 배가 그제야 꼬르륵거리고 있었다.

    “어. 한지헌, 꼬르륵거려.”

    그 소리가 컸는지 장우진이 웃었다. 나는 부끄러움에 배를 부여잡았다.

    “얼른 먹어. 그런 거 얘기하는 거 아니야.”

    애써 단호하게 우진을 향해 말하니 곧 웃음이 돌아왔다.

    모두가 차려진 음식에 젓가락을 뻗었다. 나도 앞에 있던 젓가락을 쥐어 들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고작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새삼스럽게 가슴이 따뜻해졌다.

    “나 이 집 마음에 들어. 여기서 살까?”

    “미친놈. 너네 집이 훨씬 넓은데 왜 여기서 살아?”

    “지헌이가 있잖아.”

    무척 장난스러운 말투였는데 이상하게 갑자기 속이 울컥했다. 가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처럼 느껴져 울컥거릴 때가 있었다. 나는 겨우 목을 내리눌렀다.

    “어느 순간 정신 차려 보면 여기서 여섯 명 사는 거 아니야?”

    “……김 형제 돈 좀 투자해 봐. 좀 더 넓은 집으로 가자.”

    장난스럽게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나는 웃음 짓고 있었다. 사실 이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 당장은 내가 너무 행복해서 이게 깨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싶었다. 적어도 앞으로 오랫동안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아, 싫거든요. 다 같이 어떻게 살아. 지헌이만 데려가면 모를까.”

    김준이 나를 보며 은근하게 웃었다. 나는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피하는 것은 없었다. 그저 똑바로 마주 보고 있는 힘껏 좋아하기만 할 거다.

    “근데 여기 비밀번호 뭐야? 지헌아.”

    “그걸 왜 물어.”

    “아니, 자주 올 것 같은데 알아 두면 좋으니까.”

    “웃기고 있네. 대답하지 마. 지헌아. 그냥 너만 알아.”

    나는 편하게 웃으며 와글와글 떠들어 대는 모두를 가만히 둘러봤다. 몽글몽글한 마음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지헌아, 얼른 먹어. 시끄러워서 안 들어가?”

    “좋아서 그러지.”

    내 대답에 김준이 다정하게 웃었다. 방금까지 와글와글 떠들어 대던 모두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나도 좋아. 진짜 너무 좋아.”

    곧 김현이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언제까지든 깨고 싶지 않은 행복이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없이 가벼워진 마음은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내가 지금 행복하면 됐지. 이기적이고 안일한 그 생각이 정답인 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내가 너희들하고 같이 있으면 됐어. 그 끝이 어디라고 해도.

    <미연시 게임에 대한 고찰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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