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말도 안 되는(3권) (18/36)

8장. 말도 안 되는

***

무슨 정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 나쁜 꿈을 꾸었다고 위로를 받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유한의 집으로 오던 중 손을 잡고 위로 받으면서 차분해진 머리는 조금 더 이성적이 됐다.

우리는 딱히 말이 없었다. 나는 생각이 많았고 이유한은 아무래도 그런 나의 눈치를 봤겠지.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유한의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도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유한은 내 머리를 살짝 흩트리며 웃었다.

“기다려 봐, 물 줄게.”

그러고는 이유한은 바쁘게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유한을 따라서 부엌에 들어섰다. 따라오는 나를 보며 웃은 이유한은 분주하게 컵을 꺼내 물을 따르고 있었다.

“유한아.”

“응.”

이유한은 내게 물컵을 건넸다. 나는 그것을 두 손으로 받으면서도 이유한을 가만히 보았다.

“응. 말해.”

“만약에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유한의 웃던 얼굴이 단박에 굳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만약에 기억을 못 찾고, 그리고 미국에 꽁꽁 숨어 살았으면. 그러면…….”

“……지헌아.”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각자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유한은 미간을 찌푸렸을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 대답을 기다리다 손에 들린 물을 벌컥벌컥 마셔 버렸다. 속이 탔다.

“그랬겠지.”

손끝이 떨렸다. 들고 있는 컵을 놓칠 뻔해서 손에 힘을 줘야 했다.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막상 대답을 들으니 마음이 쓰렸다. 그럴 수 있는 애들한테 내가…….

“……라고 대답하길 기대한 건 아니지?”

여전히 굳어 있는 이유한을 나는 놀란 눈으로 마주했다. 이유한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갑자기 내 머리를 잔뜩 흩트렸다.

“10년이든 20년이든, 그보다 오래든 평생이든 그리워했을 거야.”

“……유한아.”

“못 잊었을 거야. 시간이 지나도 희미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선명해지기만 했어.”

“…….”

“근데 각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지 않았겠냐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조금 빨라지긴 했지만 높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유한이 화가 났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떠나지 않겠다고 했잖아.”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이유한은 한번 숨을 내쉬나 싶더니 다시금 평소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근데 참 이상하게도 오히려 화를 내지 않는 모습에 울컥 눈물이 났다. 너한테 나는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하지만 아마 확실한 건…….

“응.”

아무래도 나는 끝까지 이기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계속 이렇게 고민하고 괴로워하더라도, 미안해서 죽을 것만 같아도.

“안 가.”

너희들 옆에 있고 싶어. 이유한의 얼굴은 곧 부드럽게 풀어졌다. 곧 내 손에 들려 있던 컵을 식탁에 대충 내려놓은 이유한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네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많이 아팠을 거야. 아마 아주아주 오래.”

“…….”

“걔네들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나쁜 게 아냐. 네가 와서 다행이야. 진심이야, 지헌아.”

심장이 두근두근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품에 안겨 있어서 다행이다. 붉어졌을 게 분명한 얼굴을 어깨에 비비다 무심코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그새 이유한의 손이 어깨에 닿아 왔다. 홧홧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이유한이 말간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 이제 좀 괜찮아?”

문득 꺼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리만큼 방금 전 꾼 꿈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네 덕분에.”

“다행이네. 그럼 물 마저 마시고 세수하고 와. 눈가가 빨개 가지고 다 트겠다.”

살짝 눈가를 쓰는 손길에도 따끔거리는 것을 보면 내가 많이 울긴 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고 있던 물은 한 번에 마시고 식탁 위에 다시 올렸다.

“근데 나 샤워해도 돼?”

“어?”

“자면서 식은땀을 많이 흘렸나 봐. ……안 돼?”

“……어, 돼. 씻어. 입을 옷 줄까?”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한은 마주 보고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 방에서 편한 옷을 들고 나왔다. 저벅저벅 걸으며 다가오는 그 얼굴이 갑자기 복잡해 보여서 나는 옷을 받으면서도 고개를 까딱거렸다.

“왜?”

“응? 뭐가?”

“아니, 생각이 많아 보이기에.”

찰나의 순간에 이유한의 얼굴에 당황이 스쳐갔다 사라졌다. 내가 잘못 봤나 싶을 정도였다. 어느새 이유한의 얼굴은 장난기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 최대한 작은 걸로 들고 왔는데. 네가 입으면 질질 끌릴 것 같아서.”

제가 든 옷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나는 단박에 미간을 찌푸렸다.

“나 집에 갈 거야.”

“아, 장난이야. 진짜. 응? 얼른 씻고 와.”

이유한이 내게 옷을 건네주고는 내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나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엉겁결에 욕실 안으로 들어온 내 뒤로 욕실 문은 미련 없이 닫혀 버렸다.

“뭐가 저렇게 급해.”

진짜 집에 갈까 봐 걱정됐나.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어이없이 웃으며 화장실의 거울을 마주했다. 퉁퉁 부은 눈이 불어 터진 만두 같았다. 이런 얼굴로 잘도 안겨 있었구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옷을 훌훌 벗고 조금은 차갑다 싶은 온도의 물을 틀었다.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욕실에 물소리가 울려 퍼졌다.

같은 샴푸, 같은 바디 클렌저, 같은 치약, 같은 비누. 온통 이유한이 쓰고 있는 걸 사용하고 있다 생각하니 어쩐지 묘해지는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뭐랄까, 몽글몽글하고 발끝이 저릿한 기분.

나는 급하게 머리를 털어 내고 온몸을 수건으로 닦아 냈다. 그리고 이유한이 건넨 옷을 입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 옷을 입자마자 그 이상하던 기분은 깡그리 증발해 버렸다. 그저 어이없음에 웃음만 났다.

“완전 커.”

이렇게 체격 차이가 컸나? 일부러 자기한테도 큰 옷 준 거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목 부근은 훤히 보이고, 어깨 라인은 어깨와 팔꿈치 중간까지 내려왔다. 게다가 바지는 끈이 없는 것이었다면 줄줄 흘러내렸을 정도였다. 나는 일단 흘러내리지 않도록 끈을 조여 묶었다.

이상하다, 아빠 옷을 훔쳐 입은 기분에 시무룩해졌다.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너무 오래 있으면 또 걱정할 테니 일단 나가야 했다. 매번 화장실 앞에서 기웃대고 있던 이유한을 떠올리며 문고리를 돌렸다.

“뭐 해?”

문이 열리자마자 막 제 방에서 나오던 이유한과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듯 보이는 그 얼굴에는 어쩐지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더워?”

“응, 좀 덥네. 나 좀 씻을게.”

“응? 응.”

이유한은 그대로 나를 지나쳐 욕실로 들어갔다. 나갔다 왔나? 에어컨 때문에 안 더운데. 나는 무심한 생각을 하며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아, 좋다.”

아직도 축축한 머리카락을 그대로 두고 소파에 누우니 이유한이 씻고 있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꼭 노랫소리 같아 가만히 들으며 두 눈을 감았지만 그도 오래가진 않았다. 감은 눈이 온통 암흑이라 가만히 감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괜찮아, 이유한이 괜찮다고 했잖아. 안아 줬잖아. 꿈속에서처럼 나한테 떠나라고 하지 않아. ……떠나지 말라고 했잖아.

애써 불안감을 떨쳐 내려 나는 다시 한번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욕실 문이 열리고 이유한이 그 안에서 나왔다. 가벼워진 옷차림이었다.

“뭐 해?”

“응?”

“……왜 그렇게 웅크리고 있어.”

나는 그제야 웅크렸던 몸을 바로 했다. 수건으로 닦아 내고 있는 이유한의 머리카락에서도 물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헌아, 괜찮아?”

“응. 머리 말려 줄까?”

애써 웃으며 묻는 말에 이유한이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대신에 제 머리를 대충 털어 버리곤 수건을 아무 데나 던져 버렸다. 툭하고 떨어진 수건을 따라 시선을 옮겼을 때 이유한이 내게 다가와 나를 품에 안았다. 또다시 토닥이는 손길, 나는 그 품에서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었다.

“괜찮아?”

“응.”

“다행이네.”

이유한의 품속은 따뜻했다. 방금 막 씻고 나온 그 몸에서 나와 같은 향이 났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내 심장이 쿵쿵 뛰는 게 분명히 이유한도 느껴지리라 싶었다. 가만히 내 등을 토닥이던 이유한의 손이 머리카락에서 목선을 따라 슥, 하고 내려왔다. 너무나도 가벼운 손짓이라 스쳐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나를 품에 안은 이유한이 내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들이켜는 숨에 반대로 나는 숨을 참았다. 묘한 긴장감이 들었다.

“나랑 같은 냄새 나.”

“……같은 거 썼으니까.”

킥킥거리고 웃으며 하는 말에 내가 입을 비죽거렸다. 하지만 이후 녀석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어 의아했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곧 두 눈이 마주쳤다. 장난스럽게 웃던 얼굴은 언제 거두어졌는지 무척이나 곧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마주하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옷이 크네.”

느릿한 말과 함께 이유한의 손이 라운드 밖으로 드러난 쇄골을 훑었다. 단순하게 옷이 크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다가온 손길이라기엔 느릿해서 절로 침이 넘어갔다.

그 손길은 천천히 쇄골 부근에서 움직이다 내 목선을 톡톡 두드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발끝이 저릿했다. 이 이후로 있을 법한 상황으로 여러 가지가 자꾸만 떠올라서 그 생각을 떨쳐 내는 게 어려울 지경이었다.

“지헌아.”

“……응?”

낮은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마주한 눈빛이 강렬한 의미를 담고 일렁이고 있었다. 다시금 목을 타고 내려가는 시선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나를 마주하고 있는 시선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밭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아주 잠시간의 침묵.

그 일렁이던 눈빛에 갈등이 담겼다. 목울대가 넘어가며 내는 꿀꺽하는 소리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유한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민 많은 얼굴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야속할 정도였다.

결국 먼저 움직인 것은 내 쪽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녀석의 뺨을 어루만졌다. 동그란 눈이 나를 가만히 마주하고만 있었다. 천천히 힘을 주어 당기는 손에 아무런 저항 없이 다가온 얼굴이 내 입술을 머금었다.

마치 내 동의를 얻어 내길 기다렸다는 듯 입 속을 침범한 이유한의 혀가 급하게 이곳저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막상 입술을 가져다 대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주춤한 내 혀를 강하게 빨아들인 이유한이 입천장을 쓸며 다른 손으로 내 허리를 휘어 감았다. 나는 어느새 이유한의 다리 위에 앉아 있었다.

“으응…….”

잇새로 나오는 소리에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꽉 쥐었다. 갈 곳 잃은 손은 허공을 배회했다. 격하게 맞닿은 입술에 몸이 자꾸만 뒤로 넘어가니 이유한의 손이 내 등을 받쳐 안아 소파에 눕혔다.

한번 닿은 순간부터 떨어지지 않는 그 입술에 점점 숨이 막혀 왔다. 사실 이건 그 입술이 닿은 순간부터 터질 듯이 뛰어 대는 심장 박동 때문이었다. 나는 결국 조심스럽게 이유한을 밀어 냈다.

“아, 유한……아.”

이유한은 내 손짓에 바로 입술을 떼고 물러났지만 여전히 우리 사이의 거리는 좁았다. 기껏해야 2-3센티미터 남짓한 거리를 앞에 두고 나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지헌아.”

“…….”

“한지헌.”

여전히 숨을 고르고 있는 나를 부르는 소리에 작게나마 ‘응’ 하고 답했다. 그에 이유한이 눈웃음을 쳤다.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어 버릴 만큼 해맑은 웃음이었다. 녀석이 다시 한번 내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더니 뺨, 그러고는 이마에도 쪽쪽, 연달아 입을 맞췄다.

이유한의 손이 내 목을 스쳐 지나갔다. 강수하가 남긴 키스 마크가 있는 자리였다. 몸이 움찔 떨렸다. 당연히 화를 낼 것이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하지만 이유한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는 얼굴이었다.

“한 명 더 추가됐나 보네.”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무심히 말하며 이유한이 웃었다. 나는 왠지 기분이 오묘해졌다. 진짜 괜찮은 건지, 아니, 당연히 괜찮은 척하는 것이리라.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아……!”

그 순간이었다. 잠시 드는 생각에 아주 잠깐 멍해졌던 모양이었다. 목에 닿아 있던 손이 쭈욱 내려가 가슴께를 감싸는가 싶더니 노골적으로 유두 부근을 스쳐 지나갔다. 다분히 성적 의도가 분명한 손짓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을 터치당한 내가 당황함에 얼굴이 붉어지자 이유한이 푸흐흐, 웃으며 또다시 내게 입을 맞췄다. 쪽쪽 소리를 내는 입술이 뺨을 지나 귓가를 핥아 오고 있었다.

“아으, 유한……아.”

“예뻐.”

귀를 물고 핥는 그 느낌에 움찔, 노골적으로 가슴을 긁는 손길에도 움찔. 하지만 이유한은 그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 노골적이고 느릿한 손이 어느새 내 상의를 집어 올리고 있었다.

“그, 어, 유한아…….”

그에 나는 다급하게 이유한의 손을 잡았다. 당황에서 나온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달뜬 얼굴의 이유한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러니까…… 무척이나 상기된 그 야해 빠진 얼굴을 마주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온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기분.

“아…….”

갑자기 홧홧하게 온몸에서 열이 끓어올랐다.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달아오르던 몸이 한순간 정신이 몽롱해질 만큼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지헌아.”

열기에 찬 목소리.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애처롭게 잡았던 이유한의 손을 놨다. 대신에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움찔하는 그 움직임이 무척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침대…….”

“응?”

“침대로 갈래.”

아주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내 말을 들은 것인지 잠시 이유한의 모든 동작이 멈췄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이었다. 다급한 손길이 몸에 닿아 왔다. 단번에 이유한이 나를 들려 올려 마주 안았다. 그리고 바로 저벅저벅.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유한은 나를 품에 안고 침실로 향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방망이질 쳤다. 그사이 나와 눈을 마주한 이유한은 짧게 눈웃음 지었다.

곧 침실의 문이 열리고 나는 침대 위에 눕혀졌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이유한은 내가 입고 있던 옷을 벗겨 냈다. 덕분에 갑자기 휑하게 상체가 드러났다. 직접 침대로 가자고 했으면서, 막상 몸을 가리고 있던 것이 사라지니 창피함이 물밀 듯 밀려오고 있었다.

“부, 부끄러워.”

“아, 진짜 너무 예쁜데. 어떡하지.”

이유한은 여전히 열에 달뜬 얼굴이었다. 덕분에 내 심장은 여전히 쉴 새가 없었다.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하고 이유한이 바로 내 목에 입을 묻어 왔다. 하지만 잠시였다. 키스 마크의 자리에 닿아 있던 입술은 판판한 가슴으로 옮겨 가 있었다. 아까 전 집요하게 괴롭히던 유두에 다다르자 이유한이 이빨을 세웠다.

“아읏…….”

그에 저절로 몸이 튀어 올랐다. 이유한은 제가 입술을 묻고 있는 곳의 반대쪽에도 손을 올려 뭉근하게 더듬었다. 입이 닿아 있는 유두는 그 혀에 조심스럽게 핥아 올려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닿아 온 적이 없었던 자리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애처롭게 이유한의 옷깃을 말아 쥐었다.

“왜 이렇게 단내가 나지.”

이유한이 나를 보며 웃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단내 같은 거 날 리가 없잖아. 어색하게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몸을 일으킨 이유한이 제가 입고 있던 옷도 벗어 던지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현실 시간으로는 7년 전. 여행을 떠나서 봤던 이유한의 몸과는 전혀 다른 단단한 몸이었다. 7년씩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소년 같은 이유한의 얼굴에서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던…….

“나 운동 되게 열심히 했는데.”

이유한이 내 시선을 느낀 듯 장난스럽게 말하며 키득거렸다. 훔쳐본 것을 들킨 것 같아 화들짝 고개를 들었지만 마주한 얼굴은 그저 해맑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그의 손끝은 내 상체를 타고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그 손길이 가슴을 지나, 배를 지나 하의에 닿았을 때 이유한은 나를 보며 씨익 웃음 지었다.

“지헌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굴러다니던 시선이 이유한을 마주했다. 더없이 색기로 가득 찬, 욕정으로 가득 찬 시선.

“너랑 하고 싶어.”

“…….”

“응?”

이유한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한참을 두 눈만 굴리다가 결국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듯이 내뱉은 말도 함께였다. 그에 이유한의 얼굴이 환해지는가 싶더니 단박에 내가 아까 전 꽁꽁 동여 멨던 바지의 끈을 풀어내 버렸다. 덕분에 하의마저도 순식간에 내 하체에서 사라졌다.

“아…….”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탄탄해 보이는 이유한에 비해서 나는 그저 마르기만 한 몸뚱이라 더 그랬다. 부끄러움에 몸을 움츠렸지만 내 허락을 얻은 이유한은 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바지와 브리프를 단번에 벗겨 낸 이유한은 거침없이 내 아래를 입에 담았다.

“읏, 아…….”

잇새에서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미 반쯤 서 있던 성기를 입에 담은 유한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파드득 얼굴을 가렸다. 입에 담긴 성기도 너무 뜨거운데 그 모습을 직접 보고 있으니 온몸이 터져 버릴 듯 열이 올라왔다.

“으응, 아……. 유한아, 아으, 아……!”

유한이 천천히 성기를 빨아들였다. 핥아 올려지는 느낌에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어느새 완연히 뻣뻣해진 성기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마구잡이로 뛰는 심장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현실감이 없었다. 내가 이유한하고, 지금…….

곧 이유한은 음낭까지도 혀를 꼿꼿이 세우며 애무했다. 허리가 들썩였다.

“예뻐. 안 예쁜 데가 없어.”

그냥 듣기에도 달콤한 목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바쁘게 움직이는 손에 그도 잠시뿐이었다. 제 성기를 그러쥔 긴 손가락이 위아래로 움직임을 시작했다. 부풀어 오른 아래가 팽팽해지고, 다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유한은 오므린 다리를 자비 없이 힘주어 벌렸다.

“아아, 아흣……. 아, 잠, 잠깐……! 아!”

덕분에 나는 몸부림쳤다. 머릿속이 온통 새하얘져 그저 손에 잡히는 이유한의 어깨를 꽉 틀어쥐었다. 이유한은 기꺼이 제 어깨를 내주며 입술을 맞댔다. 가로막힌 신음성이 웅웅, 소리를 내며 삼켜지고 있었다. 한참 만에 내게서 떨어진 유한이 나를 마주하며 웃었다.

“예뻐. 좋아해, 지헌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 나도……. 나도 좋아해…….”

이유한은 말갛게 웃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맺혔는지 눈꼬리를 타고 물줄기가 흘러내렸지만 그게 미처 뚝, 하고 떨어질 새도 없이 이유한이 입을 맞췄다. 그 입술이 어디 하나 닿지 않은 곳 없이 쪽쪽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 성기를 쥐고 있던 이유한의 손이 더듬거리며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열었다. 그리 얼마 지나지 않아 원하는 것을 찾은 듯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머쓱하게 웃었다.

“혹시나 싶어서 사긴 했는데…….”

영 민망한 얼굴로 녀석이 손에 쥔 건 젤이었다. 손에 주욱 짜낸 젤을 보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곧 일어날 일에 대한 마음의 준비 같은 거였다. 이유한이 천천히 내 성기에서 회음부로 손을 옮겼다.

아무도 손대지 않았을 그곳에 손이 닿아 왔다. 곧 부드럽게 안으로 들어온 것은 분명 손가락이었다. 으윽.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나는 이유한의 목에 감은 손을 풀지 않았다.

“안아 줘, 유한아.”

“응. 나 여기 있어.”

내 칭얼거리는 소리에 이유한은 다시 한번 내게 입을 맞췄다. 내 안으로 들어온 손이 여기저기를 깊게 찌르며 부단히 움직였다. 어색하게 그 손길을 받아들이는 얼굴에 계속해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아래를 들락이는 손가락에서 나는 마찰음이 적나라했다. 그 귓가에 걸리는 소리가 익숙지 않아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지만 이유한의 손이 내 턱을 붙잡았다. 곧은 시선을 마주했다. 살짝 찌푸린 미간에 마른침이 넘어갔다.

“왜 그렇게 봐…….”

“긴장돼서.”

웃는 낯으로 꺼내는 긴장이라는 단어에 헛웃음이 터졌다. 거짓말이라고 장난스레 대꾸하려 했지만 내 얼굴을 쥔 손끝이 떨려 오기에 말 대신 녀석의 눈을 가렸다. 기분 좋게 오르는 입꼬리에 짧게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눈을 가려도 잘생겼냐.”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이유한이 내 손끝을 쥐었다. 다시금 마주한 눈빛은 잔뜩 붉어져 야하게만 보였다. 조용한 이유한의 방에서 내 입술이 삼켜지는 소리에 섞여 녀석이 바지를 벗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는 목을 끌어안았다. 이유한은 나를 달래려는지 내 등을 토닥이며 곧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나는 그 모습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이유한이 어느새 들린 콘돔을 찢으며 꼿꼿히 선 제 성기에 밀어 넣었다. 진짜 하는구나. 하려거든 한참 늦은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조금 더 빨리 안아 줬으면 좋겠다는 도저히 뱉지 못할 생각마저도 들었다.

곧바로 뒤로 묵직한 것이 닿았다. 그 느낌에 스르르 손에 힘이 풀렸다. 침대 위로 내려간 손을 붙든 이유한이 깍지를 껴 잡았다. 그리고 다시 입에 쪽.

“너 우는 거 너무 마음 아팠는데.”

이유한이 조심스레 눈가에 입을 맞추며 천천히 내 안으로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손가락과는 전혀 다른 이물감에 미간을 찌푸리니 그 미간에도 이유한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덕분에 내가 널.”

“으, 하…….”

“안을 수 있어서 좋으면.”

“으응……. 아.”

“내가 좀 나쁜 거지, 아무래도?”

천천히 밀어 넣은 성기는 버거웠다. 뻣뻣하게 힘이 들어간 다리가 이유한의 단단한 옆구리에 닿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고개만 도리질 쳤을 뿐이었다. 이유한의 웃는 소리가 귓가에 달콤하게 들려왔다.

“유, 한……. 으읏, 아.”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은 후 이유한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천천히 시작되는 허리 짓에 나는 어느새 다시 이유한의 옷깃을 쥐어 잡았다.

“응, 괜찮아. 괜찮아. 좋아해. 지헌아.”

이유한은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내 입에서는 새된 소리가 튀어 나가고 있었다. 천천히 쿵쿵, 내 안을 찔러 오는 이유한의 움직임에 자꾸만 침대 위로 몸이 밀려 올라갔다.

“좋아해, 지헌아.”

다시 한번 그 낮은 목소리가 들렸을 때 이제야 막 내 안으로 들어온 참인데도 바로 가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밀려오는 사정감을 참아 보려 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참은 보람도 없이 이유한은 내 성기를 그러쥐었다.

“아, 아으……. 유한아, 나…… 가, 갈 것, 앗! 아흣, 같, 아아.”

“갈 것 같아?”

“응, 으윽, 어…….”

고개를 도리질 치며 힘겹게 내뱉은 말에도 이유한의 손은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엄지손가락으로 귀두를 천천히 쓸며 움직이는 손길에 정말 한계라도 다다른 듯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순간 이유한이 쿵, 하고 허리 짓했다.

“아, 아……! 앗, 아흣…….”

새하얘진 머리에 폭죽이 일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며 순간적으로 흥분감이 극대화되었다. 다리가 긴장감에 뻣뻣해지며 이유한이 잡고 있던 성기에서는 하얀 정액이 튀어 올랐다. 허억, 하고 숨을 내쉰 내가 몸을 비틀었지만 아직 절정에 오르지 않은 이유한의 허리 짓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 아읏. 아, 유한,아.”

“지헌아.”

“으읏, 아.”

사정을 하고 나서도 이유한의 움직임이 멈추지 않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고 덜덜 떨리는 손을 어렵사리 이유한의 얼굴에 가져다 댔을 때, 불현듯 이유한이 움직임을 멈췄다. 갑작스레 멈춘 자극에 심장이 쿵쿵쿵 뛰고 있었다. 이유한이 가까이 다가온 내 손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어, 어…….”

여전히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팽팽하게만 느껴졌다. 왜 멈춘 거지, 싶은 생각도 잠시였다. 곧 이유한이 내 이마에 입술을 묻었다.

“형이라고 불러 봐.”

“어?”

“유한이 형, 해 봐.”

갑자기 꺼낸 장난 투의 말에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입가에 웃음이 일었다. 몽롱한 정신으로도 눈앞에 보이는 이유한의 얼굴에 심장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네가 듣고 싶으면, 얼마든지.

“형.”

“……아.”

“유한이 혀엉.”

남들 앞이 아니라면 거의 꺼내지 않는 형 소리였다. 둘만 있을 때는 꺼내 본 적 없는 것이라 일부러 애교스럽게 형 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바로 밝게 웃을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이상하게도 이유한의 입매가 굳어 버렸다.

갑자기 왜 이런 표정을 하지, 얼떨떨한 생각은 잠시였다. 이유한이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도로 허리 짓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 사정으로 죽어 있던 성기가 다시 한번 꼿꼿하게 세워질 정도로 강했다.

“아, 아흑, 흐으……. 형, 아……. 아읏.”

“왜 이렇게 야해 빠져 가지고.”

“아, 아, 거기, 아읏……!”

“여기?”

눈앞이 새하얬다. 흘러가듯 탄식과 함께 내뱉은 말이었는데 바로 알아들은 이유한이 허리가 튀어 오르도록 한 곳만 찔렀다. 어느새 또다시 뻣뻣하게 솟아오른 성기가 찔끔거리며 쿠퍼액을 내뱉었다.

퍽퍽 소리를 내며 허리 짓을 하면서도 이유한은 계속해서 내 몸에 입을 맞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말 이유한의 입술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녀석의 입술, 손끝이 닿은 모든 곳에 열꽃이 피는 것처럼 간지러웠고 심장이 일렁거렸다.

나는 다시 한번 녀석의 목을 감았다. 끄는 대로 끌려오는 그의 목에 내 입술을 묻었다.

“읏, 형, 내, 내가…… 정,말 좋아해요.”

격한 허리 짓에 뚝뚝 끊기면서 내뱉은 말에 이유한이 내 입술을 머금었다. 강하게 빨아들이면서도 움직임은 점점 더 거세졌다.

일순 모든 동작이 멈췄다. 내 허리는 격하게 튀어 올랐고 다시 한번 사정했다. 길지 않은 틈에 두 번이나 쏟아 낸 터라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허억, 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내 몸에서 이유한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나도, 나도 정말 좋아해. 한지헌.”

다시 한번 내 입술에 입을 맞추는 녀석의 말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나른한 기분에 눈이 느리게 깜빡여졌다. 이유한은 바로 나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힘이 쭉 빠져 버린 몸은 이끄는 대로 바로 끌려가고 있었다.

“좋아해.”

“응. 나도.”

다시금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가슴께가 자꾸만 간질거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머리 위 이유한의 얼굴을 마주했다.

“근데.”

“응.”

“형 소리가 듣고 싶었어?”

“아…….”

문득 생각나 한 질문에 이유한이 눈을 굴렸다.

“듣고 싶으면 불러 줄 수 있어, 형.”

“아…….”

“형. 유한이 형.”

왠지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냥 던진 질문이었는데 이유한이 당황한 걸 보니 그게 귀여워 나는 키득거리고 웃었다.

“앞으로 형이라고 부를까?”

“지헌아.”

이유한의 허리를 감고 안으며 내가 재차 물었다. 하지만 내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어쩐지 진지해진 이유한의 얼굴이 돌아왔다.

“응? 왜 그래?”

무심코 혹시 내가 잠시 동안 실수를 한 게 있는지 되짚어 봤지만 아주 당연하게도 그런 건 없었다. 근데 왜 갑자기 저렇게 진지해졌지, 생각하는 것도 잠시.

“한 번 더 하고 싶어.”

“……어?”

“네가 자꾸 형이라고 부르니까아.”

……대체 형이라는 단어랑 한 번 더랑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거지? 당황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느새 이유한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 아니. 잠깐만. 나 힘든데, 나 진짜…….”

“많이 힘들어?”

당황한 내 손이 이유한을 가로막았다. 당연하게도 손길에 바로 멈춘 이유한이었지만 잔뜩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아…….”

“한 번만. 응?”

아……. 나는 여전히 당황한 채 제대로 이유한을 마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한은 나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아니, 나도 하고 싶긴 한데.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유한의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줬다.

“한 번만 더 하는 거야.”

“응!”

어느새 잔뜩 해맑아진 얼굴로 이유한이 다시 내 목으로 입술을 묻었다.

가끔은 좋겠지만 갑자기 하고 싶은 거 아니면 형 소리 안 해야지. 다시 한번 몰아치는 자극에 고개를 도리질 치며 나는 다짐했다.

***

“……시간 내라고…… 치고…….”

이른 아침인 것 같았다. 비몽사몽한 정신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유한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희미한 시야에 이유한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 나 어제……. 그 모습에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강렬한 기억에 나는 바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부끄러움에 발까지 동동 굴릴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이유한이 하는 통화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부끄러움보다 더 앞서는 궁금함에 나는 베개에서 얼굴을 떼고 여전히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애써 올렸다. 타이밍이 맞았는지 통화를 하고 있던 이유한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은 찌푸리고 있던 표정이 나를 보고 금세 펴졌다. 눈부신 아침이네. 해사한 얼굴에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끊어.”

그 다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조금은 무뚝뚝한 말투가 들려왔다.

“……누군데?”

“어, 회사 사람.”

전화를 끊고 한 걸음에 내게 다가온 이유한이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아, 회사 가려나 보구나. 단정하게 차려입은 슈트 차림에 내가 무심결에 웃음 지었다. 잘 어울린다.

“멋있다.”

“응? 진짜?”

“응. 잘 어울려.”

평상시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늘 차분하게 내려와 있던 것과는 달리 올라가 있는 머리도 인상적이었다. 섹시하기까지 하면 안 되지, 세상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어젯밤과 맞물리는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며 나는 이불을 좀 더 끌어당겼다. 두 눈이 끔뻑끔뻑, 다시 잠이 몰려오고 있었다.

“더 자.”

“……응.”

“안 예쁠 때가 없어서 큰일이네.”

그 말에 내가 푸흐흐, 웃었다. 오버하긴. 녀석이 내게 다가와 내 입꼬리에 입을 맞췄다.

“그냥 나랑 살면 안 돼?”

“참나.”

“왜애, 나 진심인데.”

은근히 투정 부리는 투로 이유한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는 감기는 눈을 어렵게 뜨고 있었다.

“아, 일 가기 싫다.”

그러고서는 또 내 이마에 쪽, 입을 맞추기에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이불 속으로 슬금슬금 들어갔다. 하지만 이유한은 내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이불을 거둬 내 버렸다. 어젯밤 이후 제대로 옷을 갖춰 입지 못하고 잠든 터라 훅 끼치는 한기에 몸을 움츠렸다. 부끄러운 마음에 그런 것도 있었다.

내 어깨에 촉, 하고 이유한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고는 곧 목 끝까지 이불이 올라왔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한계치라는 건 없는 걸까. 나는 어색하게 이유한을 밀어 냈다.

“얼른 가.”

“매정하다.”

“나도 이따가 일하러 가야 해.”

“흐음, 하루쯤 쉬지.”

말도 안 되는 소릴 한다고 킥킥거리니 녀석이 제가 말해 주겠다며 자신 있게 일어섰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얼른 가기나 해.”

“치이. 아쉽지도 않나 봐.”

어쩐지 서운한 기색의 이유한이었다. 나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 그 시무룩한 얼굴에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뽀뽀 한번 해 주고 갔다 와.”

“……아침부터 심장이 막 아픈데 어떡하지.”

이유한이 장난스럽게 제 심장을 움켜쥐며 내 입술에 쪽쪽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시계를 한번 보고는 한숨을 내쉰다.

“……아, 진짜 가야 해.”

“응. 잘 다녀 와.”

“하하. 응. 잘 다녀올게. 푹 쉬고 있어.”

“응.”

여전히 달달한 목소리로 이유한이 다시 한번 입을 맞추고는 몇 번이나 아쉬운 듯 돌아보며 제 방을 나섰다. 그렇게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까지 듣고 나서야 나는 눈을 감았다. 어젯밤, 그 이후로도 몇 번을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한 번만 더 한다더니.

그 덕분에 이렇게 체력이 떨어져 눈도 못 뜨고 있는데 쌩쌩하게 빠져나간 이유한이 대단할 정도였다. 새삼 어젯밤의 이유한이 떠올라 나는 얼굴로 확 열이 몰렸다.

아, 진짜 심장에 해로운 게 누군데.

***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 들어가.”

“오빠, 잘 가요!”

아르바이트가 끝난 4시였다. 분명히 처음에 혜원이랑 똑같이 끝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집에 갈 채비를 하지 않기에 물어보니 아르바이트 시간을 5시까지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돌아왔다. 어쩐지 사장님의 농간 같긴 하지만 거기까지는 내가 상관할 부분은 아닌 것 같으니…….

어쨌든 카페에서 나온 나는 앞에 서 있던 며칠 만에 보는 서준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 환한 인사에 서준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긴, 제정신 아닐 때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얼굴 밝아졌다?”

“어. 정신 차렸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정말로 다행이다 싶은지 한시름 놓은 표정이었다. 제 탓은 아닐까 걱정스러워했던 모습이 떠올라 나는 그 어깨를 두드렸지만, 서준영은 바로 제 어깨를 털어 냈다. 아, 역시 좀 재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바로 근처의 고깃집으로 향했다. 이른 저녁을 먹으며 소주라도 한잔 기울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걸음을 옮기면서 핸드폰을 슥 훑어보고는 다시 주머니로 넣었다. 오늘따라 핸드폰이 조용했다. 아침, 일어났냐는 연락에 답장을 보낸 후 아무도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바쁜가 보다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핸드폰을 계속 확인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 연락 기다려?”

“어? 아니. 들어가자, 덥다.”

“어.”

시간이 이른지라 한산했던 고깃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로 가득 찼다. 서준영은 자연스럽게 집게를 들고 불판에 고기를 올리고 있었다.

“요즘은 괜찮아?”

“아까 괜찮아졌다고 했잖아.”

“어, 그래 보이긴 하는데 혹시나 해서.”

소주잔에 술을 기울이며 묻는 말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괜찮아졌다. 나를 힘들게 했던, 그러니까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누군가를 잃었기 때문이었으니까.

서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갑자기 왜 괜찮아진 건지는 묻지 않았다. 나는 소주를 들이켰다.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아, 학원 로맨스 출시됐어.”

“그래?”

“어. 난리도 아니다. 그 게임이 우리 회사 다 먹여 살릴 것 같아.”

나는 그 말에 킥킥 웃었다. 하긴 그 게임이 뭇 여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긴 했, 어?

“출시됐다고?”

“어? 어. 너 해 봤잖아.”

나는 당황함에 입을 다물었다. 그 게임이 그대로 출시된다고? 내가 해 본 그 게임이?

어찌나 당황했는지 나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트렸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젓가락이 큰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게임은 그대로라면 게임 속의 인물들도 그대로일 터였다. 그러면 애들이 혹시라도 그 게임을 보게 되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 게임 속 인물과 자신들이 겹친다는 생각을 하진 않을까? 특히나 김준이나 김현은 꽤나 많이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본인들이 알기 전에 남들이 더 먼저 알게 될 텐데.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고 학원 로맨스를 검색했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면 한마디라도 써 놨을 텐데……!

“어?”

“뭐야, 검색해 봤어? 뭐 하러 하냐, 네가 다 해 본 건데.”

나는 떨리는 손을 가다듬었다. 아, 이거……. 뭐지?

“이거, 맞지? 학원 로맨스?”

“……미친놈이 또 불안하게 만들어. 네가 한 거잖아.”

“그러니까 맞냐고.”

“어, 그거 맞잖아. 그 캐릭터가 선우영 아냐?”

나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선우영? 낯선 이름이었다. 게다가 보고 있는 일러스트도 낯설었다. 혹시 이 선우영이라는 캐릭터 히든 캐릭터인가? 나는 분명 게임 속으로 들어가기 전 기본 캐릭터 7명은 전부 다 공략했었다. 그러면 내가 모르는 캐릭터라는 건 이유한이 아닌 다른 히든 캐릭터라는 건데…….

“걔가 처음에 같은 반으로 나오는 애지?”

서준영의 물음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같은 반으로 나오는 캐릭터라고? 같은 반? 아니, 아니었다. 같은 반이었던 공략 캐릭터는 분명 강수하와 김현뿐이었다. 그 둘 외에는 없었다. 그 외에는 김준, 장우진. 그리고 또 다른 반인 나머지 캐릭터 셋. 그 일곱 명 중에 분명 선우영이라는 캐릭터는 없었다.

“그럼 혹시 이 캐릭터는…….”

“그, 이름이 진수……혁인가?”

다시 한번 서준영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역시나 생소했다. 말도 안 돼. 이런 캐릭터 같은 거 없었는데. 혹시 바뀐 건가? 지금, 게임 캐릭터마저도 바뀐 거야?

아주 잠시 머릿속에서 지웠던 윤수진 씨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어떻게……. 이제는 놀랍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왜 그래? 또 하고 싶냐?”

“됐다.”

“그래, 한다고 해도 안 줘 이번엔.”

그 게임을 한 후 멘탈을 다스리지 못했던 나를 기억해 낸 준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사실 애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플레이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문득 떠오른 어제의 기억에 얼굴을 붉혔다.

“뭐냐.”

“……뭐가?”

“기분 나쁘게 왜 얼굴을 붉히지?”

정말 기분 나쁘다는 표정이었기에 나는 확 얼굴을 구겼다. 하도 여기저기서 친절한 사람만 만났더니 이런 취급이 어색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 소주잔을 들어 녀석과 짠 하고 부딪쳤다.

“술이나 먹어.”

술판의 시작이었다.

***

“미친. 한지헌, 죽여 버려.”

“아! 세상이 흔들린다. 미친 듯이 흔들린다.”

“가만히 있으라고!”

삼겹살도 먹고 소주도 먹었다.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환해진 나 때문에 서준영도 기분이 좋았는지 정도를 모르고 마셨다. 얼마 전 우울한 기분으로 마셨을 때는 취하지도 않았었는데, 기분이 좋은 덕분인지 술술 들어간 술에 나는 금세 잡아먹혔다. 서준영이 나를 보며 그만 먹으라고 외쳤을 때 나는 이미 세상이 빙빙 도는 것을 경험하고 있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나를 잡아 질질 끌고 가던 서준영이 짜증스레 외쳤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내 어깨를 꽉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준영에게 기댄 채로 걸어가고 있었다.

“야아! 왜 연락이 안 올까?”

“뭐?”

“아니이, 핸드폰이 너어무 조용하잖아!”

“……뭐래, 이게. 가만히 있으라고!”

흔들리는 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옆으로 기우뚱하자 준영이 잡아채면서 머리에 땅콩을 먹였다. 그 강도가 좀 세서 머리를 붙잡고 녀석을 째려보니 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미친놈아! 왜 때려!”

“지금 미친놈이 누군데.”

씨, 나는 내 머리를 붙잡으며 녀석을 째려봤다. 재수 없는 새끼.

“재수 없는 새끼.”

“어디다 대고 재수 없대.”

서준영이 다시 한번 손을 올리기에 나는 다급하게 내 이마를 가렸다. 그 다급함에 서준영이 어이없이 웃었다. 하지만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거였다.

네가 뭔데 날 때려. 어? 너나 이렇게 취급하지. 다른 애들은……! 어휴, 할 말은 많지만 굳이 말 안 한다, 내가. 그래, 네가 뭘 알겠어.

“네가 뭔데 날 때려. 어? 너나 이렇게 취급하지. 다른 애들은……! 어휴, 할 말은 지만 굳이 말 안 한다, 내가. 그래, 네가 뭘 알겠어.”

“굳이 말하지 않아? 웃기고 있네. 너 지금 말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르지?”

“뭔 소리야아.”

“……됐다. 취한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냐.”

아닌데. 난 아직 취하지는 않았다고. 물론 길거리가 좀 울렁거리고 있긴 하지만 그건 술을 좀 먹어서 살짝 어지러운 거야.

“아닌데. 난 아직 취하지는 않았다고. 물론 길거리가 좀 울렁거리고 있긴 하지만 그건 술을 좀 먹어서 살짝 어지러운 거야.”

“길거리가 울렁거리는데 안 취했다고.”

“어? 너도 울렁거려?”

놀란 내가 서준영을 바라봤다. 하지만 내 물음에는 헛웃음이 돌아왔다. 나는 입을 비죽거렸다. 나 진짜 안 취했는데.

걸으며 흔들리는 팔에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채였다. 나는 핸드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역시 아무것도 안 왔어. 왜 아무도 안 오지. 아니, 아니다. 바쁜가 보지. 아, 그래도…….

“역시 아무것도 안 왔어. 왜 아무도 안 오지. 아니, 아니다. 바쁜가 보지. 아, 그래도…….”

“야, 너 연애하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애? 연애…….

“어라, 웃는 거 봐라. 너 진짜 연애해?”

내가 웃었나? 그러고 보니까 은근히 입꼬리가 아팠다. 연애, 연애하지. 그래, 연애를 하고 있긴 하지. 근데…….

“연애, 연애하지. 그래, 연애를 하고 있긴 하지. 근데…….”

“근데 뭐.”

“어?”

“근데 뭐.”

나는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나 취했나 봐. 내 머릿속을 지금 서준영이 다 알아채고 있었다. 아마 또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생각을 그만해야겠다. 무슨 생각하지. 아, 노래를 불러야겠다. 노래. 무슨 노래 부르지? 음. 아, 애국가. 그래,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미친, 시끄러워. 미친 새끼야.”

“하느님이 보~우 하사 우리나라 만~세!”

“아, 이 또라이야!”

발걸음이 거의 집 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 골목만 돌아가면 우리 집인데. 아, 근데 진짜 내 핸드폰 고장 난 거 아닐까? 왜 이렇게 조용하지?

“아, 근데 진짜 내 핸드폰 고장 난 거 아닐까? 왜 이렇게 조용하지?”

“……어휴.”

서준영이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나는 입을 비죽거렸다. 이렇게 질질 끌려가는 것도 억울한데 너무 막 당겨서인지 골목을 막 돌아서는 순간 다리가 꼬였다. 다행히도 휘청하는 나를 준영이 빠르게 허리를 잡아 끌었지만 너무나 세게 당기는 바람에 우욱, 하고 속에 있는 걸 게워 낼 뻔했다. 짜증스레 내가 녀석의 어깨를 쳤다.

“미친놈아, 진짜 토할 뻔했잖아!”

“바닥에 박아서 머리 깨지는 것보다 낫지 않냐?”

“……아,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하, 드디어 다 왔어.”

“오. 집이다.”

“진짜 버리고 오고 싶었다.”

이제 고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는지 준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한지헌.”

그때였다.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간 것은.

“야, 나 환청 들려.”

“……누구세요?”

서준영은 나를 전혀 보고 있지 않았다. 내 말에 대답도 없고 뜬금없는 소리까지 했다. 나는 게슴츠레 한 시선으로 준영이 쳐다보고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순간 보이는 익숙한 인영에 내가 몸을 비틀거렸다. 타이밍 좋게 서준영이 내 어깨를 다시 한번 잡아챘다.

“아, 그냥 머리 깨지게 뒀어야 하는데.”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내 시선은 곧게 한 곳만을 보고 있었다.

“와아.”

나는 살짝 몸을 비틀었다. 서준영이 여전히 어깨를 잡고 있었지만 그 손은 털어 낸 후였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인영에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에게 닿았고 그 품에 안겼다.

“우진아.”

우진이었다. 어쩐 일이지?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지? 왜 우리 집 앞에 있는 거지? 궁금하면서도 왠지 심장이 콩콩콩 뛰고 있었다. 하루 종일 그 아무도 연락이 오지 않았던 터라 사실은 조금 불안했었기에 마주한 지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한지헌, 아는 사람이야?”

“응? 응. 내가 엄청 좋아하는……. 어, 친구.”

“장우진입니다.”

“아. 서준영입니다.”

두 사람의 인사가 오고 갔다. 아직 나는 장우진의 품 안에 있었다. 어쩐지 둘 사이에 샌드위치 같은 기분이라 살짝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장우진은 나를 감은 팔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계속 안겨 있는 상태였다.

“……아, 연애.”

문득 서준영이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여전히 팔에 들어가 있는 힘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기에 나는 가만히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기만 했다.

“그만 들어가세요. 제가 들여보낼게요.”

이번엔 장우진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 품 안에서 장우진을 올려다봤다. 꽤나 무신경한 표정이었다.

“……뭐, 네. 한지헌, 나 간다.”

“응? 응. 잘 가.”

“……어.”

곧 저벅저벅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얼굴은 보고 인사를 해야 하는데, 오늘따라 이상한 심통을 부리는 것 같은 장우진은 나를 품 안에서 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우진이 조금 어색할 지경이었다.

“저, 우진아.”

“술 마셨어?”

그 어색함에 조심스럽게 부른 이름에 다짜고짜 장우진이 질문을 했다. 일단 마신 건 맞으니까 고개를 끄덕거리니 한숨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둘이?”

“어? 누구? 서준영이랑?”

“어.”

“응. 삼겹살이랑 소주 먹었지.”

기분 좋게 먹은 메뉴까지 읊어 줬는데도 다시 한번 한숨. 왜 그러는 거지? 당황스러워 나는 일단 몸을 비틀었다. 스르르 풀린 손이 내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마주했다.

“왜 화나 있어?”

“……아니, 나 화 안 났는데.”

거짓말. 잔뜩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나는 입을 비죽거렸다. 얼굴을 보니 반가운데 막상 저런 표정이라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질 않았다.

“어, 웬일이야?”

그렇게 할 말을 고르던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가 난 게 아니면 무슨 일이 있나?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우진은 아무런 말없이 나만 응시하고 있었다. 너무 빤히 보는 시선에 심장이 괜히 요동을 쳐서 나는 애꿎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왜…… 그래?”

장우진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신에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다시금 그 품 안에 있었다. 왜 그러지, 오늘 따라. 나는 조심조심 나를 껴안은 장우진의 등을 두드렸다.

“우진아. 무슨 일 있어?”

“…….”

“왜 그래. 힘든 일 있었어?”

어쩐지 처진 것 같은 어깨에 마음이 동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하루 종일 연락도 없었는데, 혹시나 했는데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하루 종일 연락도 없었는데, 혹시나 했는데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연락 기다렸어?”

장우진의 손이 조심스럽게 내 머리카락을 쓸고 있었다. 연락, 기다렸다. 하루 종일 한 통의 연락도 없어서, 혹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닌지 했는데.

“하루 종일 한 통의 연락도 없어서, 혹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닌지 했는데.”

“걱정했구나.”

“……응.”

“미안, 조금 고민스러운 일이 있어서.”

정말 무슨 일이 있긴 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하루 종일 서운해했었는데……. 나는 가만히 장우진은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안 좋은 일은 없어야 되는데, 무심코 드는 생각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하루 종일 서운해했었는데…….”

“…….”

“안 좋은 일은 없어야 되는데.”

“널 어떡하면 좋지.”

장우진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나? 왜?”

“왜 내 걱정을 하고 있어.”

선뜻 장우진이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 두 눈만 끔뻑였다. 곧 내 머리에 장우진의 큰 손이 닿았다 사라졌다.

“울었다며.”

“응?”

“많이 힘들어했다며.”

“……무슨 소리야?”

“근데 왜 네가 날 걱정해.”

나는 두 눈을 끔뻑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은 탓이었다.

“무슨 말이야?”

“……별거 아냐. 아, 보니까 좋다.”

가볍게 웃는 얼굴이 방금보다 확실히 풀어져 있었다. 나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장우진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술 냄새는 안 나는데…….

“술 냄새는 안 나는데…….”

“나 술 안 마셨거든.”

“아, 진짜?”

“마시긴 네가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장우진이 곧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일단 고개를 도리질 쳤다.

“많이 안 마셨어.”

“거짓말.”

나는 입을 비죽거렸다. 하긴 가만히 있어도 나한테서 이렇게 냄새가 풀풀 나는데…….

“지헌아.”

“응.”

“나 할 말 있어서 왔어.”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장우진과 시선을 마주했다. 할 말? 머릿속에 의문이 들어찼다. 장우진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오늘 유한이 형을 만났거든.”

그 차분한 말에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한의 이름이 섞이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유한을 만났다고? 오늘 아침만 해도 만난다는 말 없었는데……. 뻘하게 드는 생각이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만난다는 말 없었는데…….”

“……오늘 아침?”

문득 잠결에 들었던 딱딱한 목소리의 통화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만나자는 식의 대화였던 것도 같았다. 아, 그럼 아침에 하던 통화가 회사가 아니었나. 비몽사몽한 정신에 들었던 그 말이 기억이 날 것도 같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 그럼 아침에 하던 통화가 회사가 아니었나…….”

“……아, 진짜.”

하지만 그 여러 생각에 복잡했던 머리는 순간 들린 한숨 소리에 순식간에 휘발됐다. 나는 장우진을 마주했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번뜩이며 머리를 스쳐 지나간 것이 있었다.

“혹시 우진아.”

“……어.”

“내가 입으로 말했어?”

“참나.”

내 물음에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장우진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딱딱하던 얼굴이 풀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넌 화도 못 내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입으로 말했구나.”

그럼 말이라도 해 주지. 그랬으면 입이라도 틀어막았을 텐데……. 나는 급하게 내 뺨을 찰싹였다. 너무 급하게 마신 술기운은 여전히 핑핑 올라왔다. 하지만 뺨을 두드리던 손은 금세 장우진에 의해서 잡혀 버렸다.

“그런다고 술 안 깨. 멍청아.”

“치.”

“치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 말에 집중 안 할 거야?”

“……해. 그래서 만났는데, 뭐.”

내 말에 장우진이 내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흩트렸다.

“아, 진짜!”

“진지하게 들어. 나 지금부터 진지하게 얘기할 거니까.”

정말 그 말대로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이었다. 덕분에 나는 순간 잔뜩 찡그렸던 얼굴을 바로 했다. 장우진이 이유한을 만났다고 하면 사실 무슨 얘기가 오고 갔을지는 뻔했다. 울었다며, 힘들었다며. 방금 전 장우진이 내뱉은 말은 덕분에 이제야 이해가 되고 있었다.

“응. 그래. 말해.”

“……하루 종일 생각을 했어. 나는 사실 너도 짐작했겠지만 네가 어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도 들었고.”

장우진이 잠시 숨을 삼켰다.

“그래서 고민했어. 내 멋대로, 내 마음대로 너한테 다가간다는 게 너한테 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

“하루 종일 고민을 했는데…….”

장우진이 또다시 말을 멈췄다. 나는 고개를 들어 장우진의 눈을 마주쳤다. 나와 마주친 그 눈이 예쁘게 휘며 웃었다. 순간 장우진이 한 걸음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

“친구를 하자고 하면 거리를 둬야 할 거고.”

조심스러운 손길이 내 뺨을 감쌌다.

“이렇게 만지는 것도 안 될 거고.”

가까운 거리, 낮은 목소리. 나는 흡, 하고 숨을 삼켰다. 아주 조심스레 장우진의 얼굴이 내게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입술 바로 앞, 장우진의 움직임이 멈췄다. 노골적으로 입술을 보는 시선이 강렬했다. 내리깔린 눈 탓에 유난히 새카맣고 긴 속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키스도 못 하겠지.”

오로지 입술만을 보고 있는 시선에 심장이 크게 두방망이질 쳤다.

“어, 그…….”

나는 멍청하게 입을 달싹였다. 그 시선이 내 눈을 한번 마주했다가 다시 입술을 향했다. 무척이나 진득한 시선이었다.

“근데 또 네가 힘든 건 싫어서, 하루 종일 고민이 많았어.”

“…….”

“그래서 연락 못 했어. 미안해.”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꺼내는 진지한 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도리질 치지도 못했다. 무슨 대답을 하긴 해야 할 텐데 안 그래도 술기운에 핑핑 도는 머리가 코앞에 있는 장우진의 얼굴에 새하얘진 탓이었다.

“근데 그렇게 오래 고민했는데도.”

“응.”

“그래도 나는 7년 전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

어쩌면 이렇게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예상했던 말이었다. 쿵쿵거리는 심장은 귓가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키스하고 싶어.”

“우진아…….”

“네가 힘들 걸 알고 있는데도 이렇게, 나는 이기적으로 굴어.”

나는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이게 네가 이기적인 걸 수가 있어.

“어떻게 이게 네가 이기적인 걸 수가 있어.”

“아니, 내가 이기적인 거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힘들 걸 알면서도 내 욕심을 부리는 거잖아.”

심장이 내려앉듯 쿵, 하는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에 울컥 메여 오는 목이 답답해져 왔다.

“그러니까 지헌아.”

“…….”

“죄책감 가지지 말고 다시 돌아가자.”

“…….”

“응?”

달콤한 목소리였다. 너는 그래도 괜찮아. 나쁜 건 나야. 그러니까 우리 다시 돌아가자. 하지만 그 달콤함에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울지 마.”

장우진의 손끝이 눈가에 닿았다. 조심조심 쓸어 내는 그 손길에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미안해. 욕심 부려서 미안해. 지헌아.”

귓가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관계의 시작은 나였다. 내가 모두를 만나고 싶어 했다.

“욕심을 부린 건 난데, 왜 네가…….”

흐려진 말끝은 차마 이어지질 못했다. 울먹임에 금세 말문이 막힌 탓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이기적이고 이기적인 내 마음은 그랬다. 하지만 제 스스로가 나쁘다고까지 말하면서 다가오는 너를 내가 그렇게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여전히 장우진과 내 사이의 거리는 가까웠다. 아주 조금만 움직이면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여전한 그 거리에서 장우진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래도 내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으니까.”

“…….”

“그래서 내가 나쁜 거야. 그러니까…….”

“…….”

“힘들 때마다 내 원망하더라도, 아니, 그렇게 해서라도 옆에 있어 줘.”

나는, 나는.

“입 맞출 수 있게 해 줘.”

침착해야 했다.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내 눈을 마주하고 있는 장우진의 시선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그래도 되는 걸까, 내가 정말 그래도…….

“응?”

다시금 재촉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정쩡하게 있던 손을 올려 장우진의 목을 감았다. 입술이 닿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대로 내 손에 끌려온 장우진에게서 푸흐흐,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도 곁들여져 있었다.

장우진은 바로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어느새 벽에 기대게 된 나를 숨 막힐 듯 몰아세우고 있었다. 마치 7년간 하지 못했던 것을 모두 다 보상이라도 받고 싶은 것처럼 갈급한 키스였다.

“흐아…….”

그렇게 한참 후에야 장우진은 조심스럽게 떨어졌다. 입술 사이에서 은색 실이 생겼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제야 물밀 듯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나는 장우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홧홧한 얼굴이 너무 뜨거웠다.

“아, 미쳤지. 내가. 이렇게 좋은데. 무슨 친구를 하겠다고.”

그 머리 위로 장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더욱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 번 더 해 주면 안 돼?”

나는 급하게 머리를 도리질 쳤다. 두 번은 못해. 하지만 내 거절에도 장우진은 제 어깨에서 내 얼굴을 떨어트렸다. 붉어졌을 얼굴이 창피해 고개를 내려 봤지만 그 시선을 따라 숙여 오는 얼굴에 의미 없는 행동이 됐다.

“아, 좀…….”

나는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러다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장우진은 집요했다. 녀석이 내 고개를 붙잡아 제 얼굴과 똑바로 맞췄다. 덕분에 나는 더 이상 그 눈빛을 피할 수도 없게 됐다.

“아, 저기…….”

“왜.”

방금까지 다정했던 장우진은 어디로 갔는지 여전히 내 입술에만 시선을 두고 툭 던지는 대답에 나는 눈을 굴렸다. 다시 또 장우진의 입술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손으로 장우진의 입술을 막았다. 덕분에 내 손에 가로막힌 장우진의 눈썹이 들썩였다.

“어, 여기 우리 집 앞이고, 우리 엄마 왔다 갔다 할지도 몰라.”

급하게 댄 핑계였지만 그게 꽤나 신빙성이 있었던 탓인지 방금까지 못마땅해하던 우진이 금세 놀라 내게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그게 또 얼마나 빨랐는지 나도 모르게 입에서 풉, 하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올 정도였다. 당황하여 한 발자국 멀어졌던 장우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놀렸지, 너.”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

여전히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장우진이 어이없이 웃으며 다시금 다가왔다.

“그래서 옮길까?”

“응?”

“어제는 유한이형 집에서 잤으니까.”

“……아.”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잘래?”

여전히 장난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게 농담처럼은 느껴지지 않아 큰일이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어젯밤의 기억 때문이었다.

“……얼굴 빨개지네.”

“아, 아닌데.”

“아니긴.”

그새 불퉁해진 얼굴로 장우진이 내 뺨을 잡아 쪽쪽 입을 맞췄다. 덕분에 나는 또 두 눈을 질끈.

“키스해 달라는 거지. 그거.”

장우진이 내 머리에 제 머리를 콩 하고 부딪혔다. 나는 다시 눈을 떴다가 너무 가까운 거리에 급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심장이 쿵쿵,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그때 골목 쪽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 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건 장우진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집 앞이다 보니 신경 쓰이는 게 많았던지라 무척 빠른 움직임이었다.

“아.”

하지만 조금 당황했던 그 얼굴이 짜증으로 물드는 것은 또 한순간이었다. 아는 사람인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차 소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영 익숙하지 않은 차였다.

“누구지.”

“지헌아!”

궁금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집 앞으로 향해 오던 차가 멈추고 운전석에서 김준이 내렸기 때문이었다. 아, 이거 김준 차구나. 무심한 생각도 잠시 밝은 얼굴로 내게 다가오는 김준에 그 생각도 금세 사라져 버렸다.

“……둘이 뭐 해?”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다가오던 김준이 발걸음을 갑자기 멈췄다. 그 밝았던 얼굴에 슬쩍 짜증이 서리는 것은 찰나였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도 순식간이라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닌지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보면 몰라. 딱 네가 방해한 것 같은데.”

장우진의 심드렁한 말에도 김준은 웃는 낯이었다. 그뿐인가.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일 정도였다.

“그럼 타이밍을 잘 맞췄네.”

그러고는 덧붙인 말에 장우진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작은 한숨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김준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내 얼굴을 마주했다. 마주한 얼굴이 잠시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는가 싶더니 내 눈가를 조심조심 쓸어 낸다.

“울었구나.”

“…….”

“장우진이 울렸지. 나쁜 놈이네.”

김준이 장우진에게 눈을 흘겼다. 그 덕분에 나는 급하게 손을 내저어야 했다.

“아냐, 어, 나 안 울었어.”

“……거짓말을 잘하기라도 해야 믿는 척이라도 해 줄 텐데.”

장우진이 어이없어하며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래 놓고는 눈가에 쪽, 하고 짧게 입술을 붙였다가 떨어진다.

“아.”

“뭐.”

“……뭐, 아무 말도 안 했어.”

잔뜩 불퉁한 얼굴을 하고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김준을 힐끔 살피는 얼굴이 붉어진 듯 열이 올랐다. 눈가에 닿은 입술의 감촉이 생생했다.

“지헌아.”

찌푸렸던 얼굴이 다시금 펴지고 이번엔 김준이 내 얼굴을 잡아 왔다. 두 사람 사이에 어쩌다 보니 껴 있는 태세라 얼굴에만 올랐던 열이 귓가에서 목까지로 전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일단 차에 타자. 사람 없긴 한데 영 신경 쓰여서.”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김준이 나와 장우진을 보며 말했다. 곧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유명인이니까. 우리는 김준의 차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보통 차에 타게 되면 누군가는 운전석에 그리고 누군가는 뒷좌석에 타는 법인데…….

“왜 우리 다 뒷자리에 앉았어?”

“옆에 앉고 싶으니까.”

부쩍 칭얼대는 투였다. 그게 또 생각보다 귀여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고 있으면서 그 와중에 웃음이 나오는 걸 보면 나도 참 답이 없었다. 그런 뻘한 생각을 할 때 갑자기 장우진이 나를 제 쪽으로 잡아끌었다. 순식간에 큰 손이 내 허리를 감싸 왔다.

“표정 관리해야지.”

나를 끌어당긴 탓에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듯 들리는 장우진의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그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표정 관리라는 말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 표정이 어땠던 건지 나는 볼 수도 없지만.

“아니, 지헌아. 너 말고 나. 멍청아. 주어를 써야지.”

“아.”

장우진과 김준이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자기라는 말에 내가 시선을 들어 김준을 보았지만 예의 그 웃는 얼굴이라 도대체 무슨 표정 관리를 하라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모든 상황이 어색했다. 이렇게 둘 사이에 앉아 있는 이 상황 전체가.

“불순물이 하나 있을 거라고 생각은 안 했는데 일단 없는 셈 치고 얘기해야겠다.”

김준이 무심하게 웃었다.

“지헌아. 어, 사실 대충 예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

“내가 지금부터 너한테 무슨 얘기를 할지…….”

잠깐 사이에 진지해진 얼굴에 나는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허리에 감긴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아, 장우진. 네 얼굴 자꾸 보여서 신경 쓰이는데 나가 있으면 안 되냐?”

“싫은데.”

“재수 없어.”

불퉁한 투로 내뱉던 김준의 말은 장우진의 무심한 대답이 받아쳤다.

“그래. 됐다. 너한테 뭘 바라겠냐.”

“…….”

“하여튼 지헌아. 나도 오늘 하루 종일 생각을 좀 많이 해 봤어.”

“…….”

깊은 숨이 김준에게서 빠져나왔다. 덩달아 나까지도 속에 한숨이 가득해졌다.

“나는, 걱정되는 게 많았어. 그때처럼 우리는 어리지도 않고……. 각자 어쩌면 그런 관계에 따라서 가십거리가 생길 수도 있는, 그런 일을 하고 있으니까.”

“……응.”

김준은 야구 선수였다. 무척이나 능력 있는 프로야구 선수. 그런 선수에게 아주 작은 스캔들일지언정 피해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관계는 작은 스캔들도 아니라는 거지.

“내가 너를 7년 동안 계속해서 원망했던 건 분명히 여전히 너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인 걸 알았지만…….”

“…….”

“그동안 죽도록 노력했던 게 한순간 무너지는 건 또 무서웠거든.”

“…….”

“내가 좀 겁이 많아졌더라고. 그사이에.”

머쓱하게 웃는 김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나는 그 시선을 가만히 마주했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스쳤다.

“근데 못 할 것 같아.”

짧게 내뱉은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아니 사실 모두가 김준과 같은 선택을 할 거라…….

“나 너하고 다시 만나고 싶어.”

“……어?”

내가 예상했던 내용의 말이 아니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진 못할 것 같다는 대답을 생각했는데, 어째서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말이 나오는 거지? 당황스러워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가 죽을 만큼 노력한 건 어쩌면 네가 지나가면서라도 나를 볼 수 있길 바라서였을지도 몰라.”

“아, 그…….”

“내가 유명한 야구 선수가 되면 어딘가에서 한번쯤은 내 이름을 들을까 봐. 그리고 한번쯤은 찾아와 줄까 봐.”

김준은 내 말은 들을 새도 없이 말을 이어 갔다. 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살았던 모든 이유가 너였는데 그걸 지키겠다고 너를 놓으면…….”

“…….”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목표를 잃는 것하고 똑같더라고.”

아주 무심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 말투에 덜컥 내려앉은 심장이 쉴 새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결정을 하고 나니까, 네가 너무 보고 싶어졌어. 그래서 바로 왔어. 나 잘했지.”

밝아진 얼굴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분명히 기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한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게 아무나 겪을 수 있을 행운일까. 하지만 그 반면에 슬픈 마음도 차고 올랐다.

나만 아니었어도 좀 더 괜찮은 사람과 평범한 연애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멍청한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내가 놔주었다면, 나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하지만 이건 결국 또 멍청한 생각일 뿐이었다.

“생각 길게 하지 말고. 응? 망설이지도 말고. 죄책감도 가지지 말고. 지헌아.”

“……너희들은 다 멍청이야.”

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꾸역꾸역 참으며 겨우 내뱉은 말에 김준이 웃음 지었다. 멍청이라는데 왜 웃는지 정말 바보가 아닐까. 하긴 웬만한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런 결정을 내릴 수가 있었다. 다시 한번 명치끝에서부터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응. 나는 멍청해서 너 아니면 안 되려나 봐.”

다정한 그 말에 결국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장우진이 내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울먹임에 떨리는 몸은 더욱 세게 감싸 왔다.

“울지 마.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울면 차인 것 같잖아.”

“…….”

“차는 건가.”

다분히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말에도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 그게, 아니라.”

“알아. 웃었으면 좋겠어서 한 말이야.”

김준이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고 내 눈가를 조심스레 닦아 냈다. 퐁퐁 쏟아지는 눈물이 주체할 수가 없어 곤란했다. 김준도 장우진도 미안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자꾸만 흐르는 눈물이 멈춰지질 않았다.

“장우진, 손 좀 풀어 봐.”

김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던 허리의 손이 스르르, 풀려 나갔다. 동시에 나는 김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나는 지금 엄청 마음이 가볍고 좋아. 계속 돌덩이가 얹힌 것 같았는데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행복해졌어.”

“…….”

“그거면 된 거잖아. 너는, 우리가 아프지 않았음 하는 거니까.”

김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열심히 눈물을 참아 봤는데도 끅끅거리는 소리가 잇새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프지도 않고 행복해. 장우진도 그럴 거고 다른 놈들도 그럴 거야. 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해.”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은 여전히 들고 있었지만 그 생각을 나는 외면하고 있었다. 조금은 울음소리가 줄어든 나를 김준이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덕분에 마주하게 된 얼굴은 여전히 부드럽고,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고민 길게 해서 미안해.”

나는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

“정말이야.”

그 다정한 목소리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꺼내어 놓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조심 내 턱 끝을 잡은 김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키스를 하고 싶은데.”

“…….”

“장우진, 너 진짜 안 나가냐?”

내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면서 우진을 향하는 목소리는 불퉁하기 그지없어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은 눈물범벅이면서 웃음 짓는 게 얼마나 우스울지 알면서도 한번 터져 버린 웃음이 쉽게 멈추지 않았다.

잠시 의아한 눈을 하던 김준이 예쁘게 눈을 휘며 웃었다. 곧 내 머리카락 사이로 김준의 손이 스쳐 지나갔다.

“……나중에 하지 뭐.”

아주 달디단 목소리였다.

***

나는 지금 김준의 집에서 조금 민망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한참을 울다 겨우 진정한 나를 달래며 김준이 제 집으로 가자고 한 탓이었다. 바보같이 왜? 하고 묻는 내 질문에 김준은 아주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었다.

‘내가 지금 같이 있고 싶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오게 된 김준의 집은 적막했다. 현이는 스케줄에 갔다고 했으니까.

“근데 넌 왜 왔어?”

“……너 같으면 나랑 한지헌이랑 우리 집 간다고 하면 너는 너네 집 가겠냐?”

“안 가지.”

쓸데없는 소리도 오고 가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소파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민망해?”

그런 어색한 기분은 김준과 장우진은 금세 알아챘다. 한참을 울어 버린 데다 시간도 꽤 지나 술도 다 깼을 테니, 분명 입 밖에 낸 소리는 아니었을 텐데도 두 사람 다 내 기분을 무척이나 빠르게 눈치챘다.

“아니야.”

하지만 나는 들킬 것을 알면서도 입으로는 일단 부정의 말을 뱉어 냈다.

“거짓말.”

어김없이 걸리고야 말았지만.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한참을 울어 버리고 나니 차라리 속은 개운한 것 같았다. 비록 머리야 좀 띵하고 울렸지만.

“진동 소리 들린다.”

뻘한 생각을 막 하고 있었을 때 문득 장우진이 중얼거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내 주머니였다. 전화가 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강수하였다. 나와 액정을 같이 확인한 김준과 장우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받으라는 것 같아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수하야.”

-……울었어?

내가 울고 나면 그렇게 티가 많이 나는 걸까? 받자마자 묻는 말에 나는 어이없이 웃었다.

“아니야.”

-그렇다고 쳐줄게.

“진짜 아닌데…….”

-괜찮아?

아니라는 말에도 강수하는 전혀 믿는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힘들어했다고 하길래.

나는 강수하의 말에 딱히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수하는 조근조근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오늘 연락 못 해서 미안해. 어떻게 해야 네가 그렇게 힘들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이 돼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사실은 이렇게 힘들어할지 몰랐어. 내가 안일했어. 미안해.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강수하는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겨우 진정했던 마음이 다시 울컥 올라왔다. 왜 너희들이 이렇게 미안해야 하는 거지.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관계와 상황의 원인은 나일 텐데.

-또 울려고 하지, 너.

“아닌데…….”

-아니긴. 목소리가 완전히 울먹거리는데.

조금은 웃음기 섞인 강수하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 들어왔다. 가만히 내가 통화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김준이 내 손을 잡아 왔다. 장우진은 다시금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참 묘한 느낌이었다.

-뭐 하고 있었어?

“아……. 준이 집에 왔어.”

-……김준? 혼자?

“아니. 우진이랑.”

-시간 늦었는데 집에 안 가?

통화 내용이 들리는 것도 아닐 텐데 대충 내용이 예상이라도 되는 건지 김준이 킥킥거리고 웃었다. 나는 왠지 머쓱해졌다.

“방금 왔어.”

-…….

강수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언제까지 있을 건데?

한참 만에 전화기 너머에서 짧은 물음이 들려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김준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 자고 가라고 하긴 했었는데, 확실하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은 하지 않았었다. 나는 망설이다 조심스레 대답했다.

“아마, 자고 갈 것 같은데.”

-…….

다시 침묵. 뭐가 그렇게 웃긴지 김준은 아예 눈꼬리에 눈물까지 맺힌 채 웃고 있었다. 등 뒤의 장우진에게서 피식,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응, 끝나고 그리 갈게.

“여기에?”

-응, 빨리 끝내고 갈게.

꽤나 단호한 대답이 들렸다.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빨리 와.”

강수하에게서 알았다는 단호한 대답이 들리고 나서야 전화는 끊어졌다.

“온데?”

“응? 응.”

“여기가 무슨 모임 장소도 아니고…….”

김준의 표정이 불퉁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준은 손에 힘을 줘 나를 끌어당겨 꽉 껴안았다. 장우진의 품에서 김준의 품으로 순식간에 옮겨 오게 된 것이었다.

“뭐 하냐?”

“너 좀 씻어라. 내가 좀 깔끔해서.”

“……미친놈.”

장우진이 어이없이 웃었다. 바로 어제도 이 집에 왔었는데,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깔끔하다는 말을 뱉는 준이 너무나 능청스럽게 느껴져 나까지도 킥킥거리고 웃었다.

“됐거든. 내가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너 나 오기 전에 둘만 있었잖아.”

“그러니까 네가 좀 더 빨리 오지 그랬어.”

두 사람이 말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김준의 품에 어색하게 안겨 있었다. 날이 서 있는 건 아닌데 싸우는 것 같은 기분도 들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됐다. 그만해. 지헌이 눈치 봐.”

가끔 느끼는 거지만 다들 눈치가 귀신같아서 좀 소름 돋을 때가 있었다. 지금이 딱 그런 순간이었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네가 안 가면 그냥 네 앞에서 해야지, 뭐.”

하지만 내 입술에 금세 닿아 오는 김준의 손에 그도 오래가지 않았다. 김준은 무심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할 새도 없이 김준의 입술이 입에 닿아 왔다. 아, 아까 전에는 다음에 한다고, 무심결에 그런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참나.”

등 뒤에서 장우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전 그때, 소원 내기로 모두의 앞에서 키스를 나눴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적어도 소원이라는 명목이 있었던 입맞춤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다 같이 사귀든 어쨌든 이렇게 면전에서 입을 맞추게 되는 상황은 생각지 않았던 탓이었다. 하지만 심장은 쿵쿵쿵,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 당황스러운 마음과 더불어 막상 입술을 맞대니 미친 듯이 심장이 울려 대고 있는 것이었다.

등 뒤에서는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았다. 앞에서는 김준의 혀가 깊숙이 들어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뒤의 장우진도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손끝이 저리도록 떨리고 있었다.

“읍…….”

그때, 목 뒷덜미에 생소한 감촉이 느껴졌다. 손은 아니었다. 분명히 이 느낌은 입술이었다. 그 부드러운 느낌에 몸을 흠칫 떨며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동시에 내 반응이 이상했는지 김준도 눈을 떴다. 하지만 여전히 맞대고 있는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금 그 목덜미 근처 생소한 자극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입술이 아니었다.

“자, 잠깐……!”

분명히 혀끝이었다. 분명히 혀끝으로 핥아 낸 생경한 감촉에 나는 다급하게 몸을 비틀었다. 덕분에 김준과도 입술이 떨어졌다. 움찔, 몸이 그 자극에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

심장이 쿵쿵쿵 미친 듯이 뛰고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이러다가 심장이 터지지나 않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와.”

당황한 내가 눈을 굴리고만 있을 때 문득 김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장우진 때문에 멈춘 터라 혹시라도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까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그 소리에 마주한 김준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야.”

문득 김준이 장우진을 마주봤다.

“나 지금 위험한 취향에 눈뜰 뻔했어.”

“……이미 뜬 것 같은데. 눈이 맛이 갔는데.”

두 사람의 대화가 오고 갔다. 그 낮은 목소리에 심장이 반응하고 있었다.

김준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고개를 도리질 치며 그길로 부엌으로 향하는 걸음이 조금은 다급하게 느껴졌다. 그를 따라 움직이던 시선은 곧 제 쪽을 바라보게 하는 우진이에 의해서 멀어졌다. 김준과 딱히 다르지 않은 눈이었다.

“이렇게 야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렇지.”

살짝 웃는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위험하다. 그런 생각이 드는 시선이었다. 그때, 타이밍이 좋았던 건지 어쩐 건지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다시금 울렸다.

“받아.”

힐끗 핸드폰을 확인한 장우진이 고갯짓했다. 발신자는 이유한이었다. 나는 숨을 한번 깊게 내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유한아.”

-어디야?

차분한 목소리였다. 나는 큼큼거리고 애써 목을 가다듬었다.

“그, 준이 집.”

-둘이?

“아니, 우진이도 있어.”

-아…….

잠시 탄식을 내뱉은 이유한이었다. 나는 괜히 마른 입술을 축였다. 무언가 나쁜 일을 하다 걸린 아이가 된 느낌이었다.

-나 일 끝났거든. 지금 그쪽으로 갈게.

“지금?”

-응. 금방 가.

“아, 응.”

-금방 가니까 걔네들한테 멀리 떨어져 있어.

아주 조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이유한이 말했다. 덕분에 조금 긴장했던 나도 웃음이 나왔다.

“뭘 또 멀리 떨어져.”

그사이 부엌으로 갔던 김준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한번 보고는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아직도 그 미묘하고 저릿했던 기분에 머릿속이 새하얬다.

-걔들 못 미더워.

“둘이나 있는데?”

-둘이라서 더 못 미더운데.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주 당연하게도 방금 전 그 미묘한 기분을 느꼈던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10분 안으로 도착할 거니까, 기다리고 있어.

“응.”

곧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끊긴 전화를 힐끗 보고는 양옆에 다시 자리 잡은 김준과 장우진을 번갈아 봤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뭐래?”

“10분 안으로 온다고.”

“……다행인지 뭔지.”

김준이 킥킥거리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나도 딱 그런 마음이었다. 다행이랄지 아니랄지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현관문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내 시선이 현관으로 향했다. 이 집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올 사람이라면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쪼르르 현관으로 다가갔다.

“나왔…….”

“현아!”

“어, 어? 지헌아?”

역시나 김현이었다. 조금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집 안으로 들어서던 현이 나를 보고는 그대로 멈춰 섰다. 내가 여기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놀란 기색은 순식간에 반가움으로 물들었다. 단걸음에 내게 다가온 김현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와, 완전 좋아. 퇴근했는데 지헌이가 집에 있다니.”

잔뜩 신난 목소리로 제 머리를 부비적거리는 게 어쩐지 많이 피곤했던 것 같아 나는 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무심한 말투의 김준이었다. 어쩌다 보니 여기가 사랑방이라도 된 것 같았다. 강수하에 이유한도 오기로 했으니까. 금방 북적북적해질 것이다.

“곧 가려는 건 아니지? 자고 갈 거지?”

해맑은 얼굴을 한 김현은 내게서 떨어질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묘했던 분위기가 현이의 등장으로 풀어지고 있었다.

“응. 자고 가려고.”

“진짜? 완전 좋아. 그럼 내 방에서 자!”

얼마나 신났는지 방방 뛰는 음성으로 현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에 나도 설핏 웃음이 걸렸다.

“네 방에서 지헌이가 왜 자. 내 방에서 잘 거야.”

“뭐래. 싫어. 나랑 잘 거야. 그치?”

“미친놈들.”

“뭐야. 장우진은 또 왜 여기에 있어?”

방금까지 웃고 있던 김현이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나 온도 차이가 큰지 나는 웃음을 터트렸고 장우진의 표정은 단박에 찌푸려졌다.

“수하랑 유한이 형도 올 거야.”

“……오늘 여기서 모임 해?”

“어. 어쩌다 보니까.”

“흐음.”

김현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거실로 끌어당겼다. 당기면 당기는 대로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소파위에 옹기종기 자리 잡았다.

“근데 어떻게 셋이 같이 있어?”

“아, 우진이랑 준이가 우리 집 앞에 왔었어.”

“으음. 그래?”

김현이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 얼굴이 금세 배시시 웃음을 띠었다. 하지만 웃는 얼굴인데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가만히 김현을 보았다.

“뭐, 그럴 줄 알았어.”

금세 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한 그 얼굴을 보고 있던 내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스케줄을 마치고 바로 돌아와서인지 얼굴에는 메이크업이 되어 있었다. 진짜 연예인 같네.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냥, 신기해서.”

“아, 화장? 해야 된대. 나도 갑갑해서 하기 싫은데.”

“그러게. 안 해도 충분히 잘생겼는데.”

무심한 투로 뱉은 말이었다. 안 해도 피부도 좋고 잘생겼는데, 굳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치? 아, 역시 지헌이밖에 없어.”

하지만 그 무심한 말에도 김현의 얼굴은 대번에 밝아졌다. 기분이 좋은지 내 머리카락을 흩트린 현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얼른 씻고 올게. 얼굴 간지러워.”

“응. 갔다 와.”

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걸음을 옮겼다. 김준과 장우진을 힐끗 보는가 싶더니 그대로 제 몸에 있던 옷을 떨쳐 낸다. 걸으면서 벗어젖히는 옷이 김현의 걸음마다 떨어지고 있었다.

“야, 미친놈아.”

어느새 상체 탈의가 끝난 김현이 김준의 욕에 무심하게 돌아봤다. 그 돌아본 시선과 마주쳤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부끄러운 탓이었다.

“……지헌아. 손가락을 그렇게 넓게 펴면 어차피 다 보이지 않아?”

아, 들켰다. 나는 그 말에 머쓱하게 웃었다.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지만, 어쩐지 7년 전 계곡에서 봤던 그 몸보다 더 좋아졌는걸.

“변태네. 변태야.”

김현은 킥킥거리고 웃으며 바로 욕실로 들어섰다. 여전한 부끄러움에 붉어진 얼굴이 채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마치 흔적을 남기듯 거실에 널브러진 옷들이 신경 쓰였다. 원래 늘 이러나, 그런 생각에 웃음이 비식비식 새어 나왔다.

“설마 지금 김현 몸 때문에 그렇게 웃고 있는 거 아니지?”

“응?”

“그런 거야? 그럼 내 몸이 더 좋아.”

김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치 지금이라도 상의를 벗어젖힐 것 같은 움직임이라 나는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아냐. 나 그것 때문에 웃은 거 아냐. 진짜!”

아무래도 오해를 산 것 같았다.

***

“오, 집 좋네.”

김준과 김현의 집. 정말 사랑방이 되어 버린 이 집에 나를 포함한 여섯 사람이 모였다. 마치 집을 보러 온 사람처럼 집 안 구석구석을 구경하던 이유한이 심드렁하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에 대답한 것은 김준이었다.

“집 사게요?”

“……흔한 월급쟁이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한다.”

이유한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흔한 월급쟁이. 맞는 말인데 이상하리만큼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이유한은 퇴근하자마자 바로 왔는데 이 시간이라며 여전히 아침에 봤던 그 슈트 차림 그대로였다.

“여기 방 좀 내줘라, 그냥. 둘이 살기엔 충분히 넓은 것 같은데.”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는 이유한의 집도 썩 좁은 편은 아니었지만 쌍둥이 집에 비할 데는 아니었다. 유명 야구 선수와 배우의 집이 오죽하겠냐마는.

덕분에 괜스레 이유한을 따라 집을 한번 둘러본 나는 왠지 기분이 오묘해졌다.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김준이나 김현, 이유한은 이미 자리를 잡아 버린 것 같고 장우진과 강수하도 학생임에도 나와는 전혀 다르게 바쁘게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근데 나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방학은 심지어 게임만 했다. 그 덕에 모두를 만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뭐라고 할까,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나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지헌아.”

“응?”

“왜 그래?”

“뭐가?”

“표정이 별로 안 좋아서.”

문득 내게 가까이 다가온 김현의 말에 대화를 나누던 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동시에 시선이 내게 집중되자 당황스러움에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야. 다들 열심히 살고 있구나, 생각하고 있었어.”

자연스럽게 넘어가려 한 말인데도 다들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덕분에 머쓱해진 내가 말을 덧붙였다.

“나는 이번 방학에도 아무것도 안 했거든.”

물론 덧붙여 놓고 바로 후회하긴 했지만…….

“그런 게 어디 있어. 매일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으면서.”

“으음, 그치?”

강수하가 다정하게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 아르바이트도 아마 내가 너희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안 했겠지만, 그러고 보니 만약 그랬다면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번 들어찬 생각은 끝도 없이 맞물리고 있었다.

“나는 네가…….”

아주 잠깐 멍해진 사이 내 뺨을 쥔 손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강수하의 손이었다. 덕분에 두 눈을 마주하게 된 강수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이렇게 생각 많은 얼굴이면 불안하더라.”

무척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내뱉은 그 말에 증명을 하듯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짧게 숨을 내쉬었다.

“열심히 살려고. 그런 생각 하고 있었어. 정말이야.”

배시시 웃으며 꺼내는 말에 강수하가 살짝 웃음 지었다. 그새 걱정스러운 얼굴이 된 모두가 어색하면서도 그게 또 무척이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하고 있었다. 내가 진짜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건 아닐까,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어떻게 그 게임에 들어가서 너희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새삼스러운 생각이었다.

“근데 딱히 열심히 안 해도 너 정도는 충분히 먹여 살릴 텐데.”

무척 장난스러운 이유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그냥 나한테 와도 돼. 장가와.”

그러곤 덧붙인 말에 내가 킥킥거리고 웃었다. ‘미쳤어요?’ 하고 나 대신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그 목소리에도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아,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너무 좋은데 어떡하지.

여전히 머릿속에는 이렇게 지내도 되는지에 대한 일말의 도덕심이 남아 있었음에도 나는 끝끝내 외면하고 있었다. 오랜 고민을 털어 버린 마음에는 떠나지 말라, 곁에 있어 달라 하던 누군가의 바람만 간직되었다.

누군가의 마음이 언젠가 변하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그 사람을 잡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마음껏 좋아하고 행복하면 안 될까. 이기심인 걸 알면서도 나는 어느새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 준비할 새도 없이 모두를 잃어 봤기에 그래서 더 이기적으로 마음껏 좋아하고 싶었다.

“지헌아.”

문득 이유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또 상념에 빠져 있던 내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웃었다.

“응?”

“좋은 생각만 하고 있지?”

조금은 나긋한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응. 당연하지.”

“그럼 됐어.”

배시시 웃는 얼굴에 걱정이 지워졌다. 금세 내 입가에도 웃음이 감돌았다. 그러고 보니 게임 밖으로 나온 후로는 이렇게 다 같이 맨 정신으로 있었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처음에 만났을 땐 준이가 먼저 가 버렸고 두 번째는 내가 몸이 안 좋았으니까.

나는 무심코 내 주위에 있는 모두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바람을 내뱉었다.

“다 같이 여기서 자면 안 돼, 오늘?”

아주 오랜만에 우리가 7년 전 여행을 갔을 때처럼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 그렇게 무심하게 꺼낸 말에 모두가 순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놀랄 만한 얘기였나, 했던 것도 잠시.

“응. 돼. 무조건 돼.”

김준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진짜?”

“너 다시 만난 이후로 네가 직접 뭐 하고 싶다고 하는 거 처음이야. 알고 있어?”

“아, 그랬나.”

“응. 네가 하고 싶다는데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다 돼.”

무척이나 기분 좋은 기색이었다.

“다시 여행 온 것 같고 좋네. 나 편한 옷 좀 줘.”

이유한이 기분 좋게 일어서며 말했다. 안 그래도 정장 차림이라 영 불편할 것 같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정말 그랬던 모양이었다. 불현듯 김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다른 건 모르겠는데, 지헌이 옷으로 주고 싶은 게 있어.”

그러더니 엄청나게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는 제 방으로 후다닥 달려가 버린다. 너무 순식간이라 벙한 채였던 내가 그를 따라서 일어섰다. 일단 내가 입을 편한 옷을 준다는 것 같았다. 곧 김현이 들어간 방으로 걸음을 옮기니 방 안 한구석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뭘 그렇게 구석에서 찾아?”

“아, 찾았어. 이거야. 이거 입어. 응?”

김현이 웃으며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옷 같긴 한데 왜 이렇게 모양이 이상하지, 생각한 것도 잠시.

“이거, 동물 잠옷…….”

“응! 고양이! 완전 잘 어울릴 거야. 전에 예능 하러 갔다가 받았는데 잘됐다. 얼른 갈아입고 와.”

얼마나 해맑게 웃는지 나는 그 얼굴에 선뜻 싫다는 말을 건네지 못했다. 곧 방문이 닫혔다. 나는 덩그러니 그 방 한가운데에 서 있게 됐다.

“아, 나 이런 거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데…….”

나는 받은 동물 잠옷을 침대 위에 펼쳤다. 하얀 고양이, 배는 핑크색이었다. 찬찬히 뜯어보면 볼수록 민망해서 입지 못할 것 같았다. 이걸 다 같이도 아니고 나 혼자 입어야 하는 거잖아. 민망한데…….

나는 김현이 나간 방문을 애처롭게 바라봤다. 엄청 기대하는 것 같았는데. 잇새로 한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결국 나는 주섬주섬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던졌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꽤나 기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커…….”

아무래도 김현이 받아 온 것이라서인지 내게는 좀 컸다. 물론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마치 잠옷에 뒤덮인 느낌이었다. 방 안 거울 앞에 서서 내 꼴을 살피니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지헌아, 멀었어?”

그때 문밖에서 김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고 방문을 열어야 했다.

“다 했어. 근데 현아, 이거 너무 커.”

은근히 툴툴거리며 문을 열고 나오니 바로 앞에 있던 김현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찬찬히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사실 그것은 김현뿐 아니라 모두가 다 그랬다.

“이불 덮은 것 같…….”

“완전 귀여워.”

다시금 내뱉으려던 불퉁한 말은 내 볼을 감싸 쥔 김현에 의해서 단숨에 사그라졌다.

“어?”

“완전 잘 어울려. 아, 귀여워. 어떡하지?”

잔뜩 신이 난 얼굴에 웃음이 만발했다. 어느새 멀찌감치 있던 네 사람도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 미쳤나 봐.”

이유한이 조금은 붉어진 얼굴을 하고 내게 다가왔다. 입꼬리가 올라간 게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좋나. 나는 무심하게 내가 입은 옷을 내려다봤다. 이상한 것 같은데, 도대체가 이해를 할 수 없는 취향이었다.

“이게 귀여워?”

“……너는 네가 얼마나 예쁘고 귀여운지 모르나 봐.”

김준의 말이었다. 그게 또 어찌나 진지한지 나는 괜히 얼굴을 붉혀야만 했다.

“말 한마디에 그렇게 얼굴 붉히는 것도…….”

“사람 아주 미치게 하지.”

무심한 듯 바람 빠진 웃음소리와 함께 김준과 장우진이 오랜만에 의견이 맞은 모양이었다. 나는 괜히 쭈뼛거리며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귀엽다고 하니 기분이 나쁘진 않은데 딱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정확히는 동물원의 고양이인가.

“진짜 고양이 같다. 귀여워.”

생각지도 못했던 강수하마저도 말을 덧붙였다. 나는 결국 녀석들을 따라서 어이없이 웃어 버리고 말았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입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의 상기된 얼굴이 귀여웠다.

“야옹.”

덕분에 나는 굳이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다. 그러니까 일종의 서비스 같은 거. 아주 작은 소리로 짧게 낸 고양이 흉내였다. 그렇게 한마디 던져 놓고 나니 바로 얼굴이 뜨끈해졌다. 막상 내뱉고 나니 민망함이 차고 올라온 탓이었다. 그러나 내 그 작은 소리를 똑똑히 들었을 녀석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지헌아.”

짧은 침묵이 지나고 적나라한 침 삼키는 소리와 함께 김현이 입을 열었다.

“응?”

“한 번만 더 해 봐.”

“어?”

“너무 귀여워서 그래. 한 번만. 응?”

정말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서 나를 빤히 보는 김현은 진심으로 간절해 보였다. 나는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기왕 시작한 김에…….

“야옹.”

다시금 내뱉은 말에 김현의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사실 그건 김현뿐은 아니었다. 모두가 말이 없었다. 아.

“아, 둘만 있는 자리가 아닌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갑자기 이유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형 아니었으면 그냥 엉겨 붙을 뻔했어요.”

“미친놈이냐.”

“나 이러다가 진짜 위험한 취향에 눈뜰 것 같다니까.”

“이미 뜬 것 같다고.”

“야, 너도 피차일반이거든.”

그 순간부터 갑자기 나를 제외한 다섯 사람이 티격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황했던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내가 소리 내 웃자 당황한 것은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정말 너무 좋다.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지 싶을 정도로 너무 좋아. 좋아서 미칠 것만 같은 밤이었다.

***

“너는 그냥 나가서 살지 그러니.”

“……내가 외박이 좀 잦았지?”

이틀이나 외박을 하고 돌아온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보인 것은 도끼눈을 한 엄마였다.

“엄마 혼자 두고 잘도 쏘다녀.”

“아이, 왜 그래. 미안. 응?”

부러 내는 애교스러운 목소리에 엄마는 헛웃음을 쳤다. 풀린 것 같긴 하지만 아무래도 외박이 잦은 것이 못내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집엔 엄마와 나, 단둘뿐이었다. 그런 집에서 매번 내가 외박을 하면 휑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제 외박 안 할게. 응?”

“됐어. 어제 네 아빠한테 연락이 왔었어.”

“아빠가?”

“응.”

사실 아버지는 미국에 계셨다. 게임과 유일하게 비슷한 것이 있다면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다만 회장님은 아니지. 현실과 게임 사이에 드는 미묘한 괴리감에 나는 살짝 웃었다.

웃는 내 얼굴을 빤히 보던 엄마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언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덕분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헌아. 혹시…… 미국으로 같이 갈 생각은 없니?”

“네?”

“아버지께서 너랑 나, 모두 미국으로 오길 원하셔.”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 다섯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또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고 있었다.

***

엄마와 이야기를 마치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의자 위에 앉았다. 문득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폰을 꺼냈다.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연락이 닿질 않는 수진 씨의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통화 연결음.

-네, 지헌 씨.

수진 씨가 전화를 받아 놀란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아, 아. 받으시네요.”

-제가 연락이 좀 안 됐죠?

웃음기 서린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일 있어요?

무척이나 태연한 말이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서요.”

-네, 말씀하세요.

“수진 씨가 말하는 베타 테스트는 어디까지 적용되는 거죠?”

-어디까지라면, 무슨 뜻이에요?

미국행.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주 당연하게도 게임이 떠올랐다. 또다시 그때처럼 내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녀석들과 이별을 할까 두려워지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현실이 아니라 게임일까 싶은 마음이었다.

“아버지께서 미국으로 오라고 하세요.”

-네.

“……그것도 게임 스토리의 일부인지 궁금해서요.”

-아.

수진 씨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예의 그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베타 테스트로 변하는 건 과거, 그러니까 게임 캐릭터들이 밖으로 나오기 위해 필요한 과거뿐이에요.

“…….”

-즉, 지헌 씨 아버님께서 미국으로 오라고 부르신 건 베타 테스트를 했건 안 했건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요.

“……그렇구나.”

나는 한숨 쉬듯 대답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 탓이었다.

-아마 오늘이 지나면 나는 더 이상 연락을 못 받을 거예요.

“……네?”

-하나만 기억해요. 앞으로 벌어지는 일은 다 현실이에요. 그리고 이전에 있었던 일들도 다 현실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럼 편하잖아요.

무척이나 대수롭지 않게 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정말 미국 가게 된 거예요?

“……아니요. 안 가겠다고 했어요.”

-그것 봐요. 이건 게임 속처럼 강제로 벌어지는 일은 없어요. 다 지헌 씨가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할 거 없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녀석들 모두가 내 옆에 있는 것도 다 현실이고 변하지 않을 상황이라는 거지. 그나마 내 상황을 털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에게 듣는 확답이라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 게 사실이었다.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에요. 걱정 말아요.

다시금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만 끊어야 할 것 같네요.

“아…….”

-고마웠어요. 너무 고민하지 말고 잘 지내요.

“아, 네. 저야말로 고마웠습니다.”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지만 어쩐지 다시는 연락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다급하게 내뱉었다. 웃는 소리와 함께 곧 전화는 끊어졌다. 어찌 됐든 모두를 만나게 해 준 사람이었다. 그게 어떤 의도였건.

나는 다시금 책상 위에 있던 CD를 바라보다 책상 서랍의 구석에 찔러 넣었다. 이 모든 상황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적어도…….

그 순간 핸드폰이 진동했다. 전화의 화면에는 이유한이라는 글자가 띄워져 있었다.

“응. 유한아.”

-아르바이트 잘 다녀왔어?

“응. 잘 갔다 왔지.”

-다행이네. 어머니는 뭐라고 안 하셔?

“혼났어. 이제 외박 못 할 것 같아.”

-아, 아까워라.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는 소리가 무척이나 좋아서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곧 퇴근하는데 저녁 같이 먹을까?

“아. 미안. 오늘은 엄마랑 먹어야 할 것 같아.”

-흠, 어쩔 수 없지. 알겠어.

“응. 맛있는 거 먹어.”

-하하. 너도.

이 간질간질한 기분을 앞으로도 쭉 이어 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끊어진 전화를 가만히 바라보다 나는 침대로 자리를 옮겨 누웠다. 방금 전 엄마와 나눴던 대화가 다시금 떠오르고 있었다.

사업 때문에 돌아올 수 없는 아버지. 하지만 그 오랜 세월을 혼자서 살았던 만큼 무척이나 외로웠을 것이다. 무척 오래 참아 오다 어렵게 꺼낸 말이었겠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저는 여기 남고 싶어요.”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순전히 내 이기심이었다.

“유학 가서 공부하고 들어오는 게 네 미래에도 좋아. 지헌아.”

“제가 그렇게 하고 싶을 때 할게요. 엄마.”

하지만 또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그때처럼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를 7년이나 기다렸던 모두에게 또다시 기다림을 선사하고 싶진 않았다.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엄마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던 아들이었다. 당연히 혼자 남겨 놓고 가는 것이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얼마 전 같은 일 없어요.”

그랬기에 나는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내 생각은 변함없었다. 나는 여기에 남을 것이다. 그 게임의 결말을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무슨 생각해?”

그 말도 안 되는 연애가 다시 시작된 지 3주의 시간이 흘렀다. 고등학교 때처럼 매일 만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나고 같이 즐겁게 보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일상이었다. 다만 그 평범한 일상에서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엄마의 미국행이었다.

엄마만 미국으로 가게 되면서 여러모로 복잡한 일이 많기도 했지만, 가장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은 이 기회에 차라리 학교에서 좀 더 가까운 쪽에서 살아 보는 게 어떻겠냐는 엄마의 제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30분이 넘는 통학 거리 때문에 학교에 다니던 내내 불편해했던 나는 그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갑작스럽게 독립을 하게 되어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니, 별생각 안 해.”

자취를 하려면 집도 미리 구해야 하고 이후에는 이사 준비도 해야 하는데 여태까지 집도 구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 버렸다. 엄마가 미국으로 가기까지 겨우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즉, 내가 집을 구하고 이사 준비를 하는 것도 그 정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물론 대학가 근처의 자취 집이야 작정하고 고르면 오늘 당장에라도 고를 수 있었지만 문제는 녀석들이었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엄마의 미국행, 그리고 내 독립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다. 왜 설명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야…….

“엄청 근심 걱정 가득한 표정인데.”

“그러게. 아, 지헌아. 오늘부터 우리 집 와서 자. 김현 며칠 동안 해외 스케줄이래!”

“아, 뭐라는 거야.”

나는 김준의 말에 당황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까 이것 때문이었다. 물론 나도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지금도 틈만 나면 제 집에서 자라고 하는 모두인데, 내가 엄마의 미국행으로 거처가 불분명하다는 말을 들으면 누군가는 분명히 제 집 방을 내어 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같이 살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게 피해를 끼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얹혀사는 기분. 그리고 그래도 연앤데 적당한 거리도 좀 필요하지 않을까, 어쨌든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 때문에 나는 이사를 완전히 끝낼 때까지 녀석들에게 절대 일언반구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지헌, 진짜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내 근심 가득한 표정에 강수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은 월요일이었고 김준과 강수하가 다른 일 없이 스케줄이 비어 있는 날이었다. 덕분에 녀석들은 두 시간 전부터 내가 일하는 카페로 놀러온 참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혜원이 덕분에 녀석들과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는 강수하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어’ 하는 말을 덧붙이면서.

“지헌아. 아르바이트 곧 끝나지? 저녁 먹으러 갈까?”

“미안. 나 오늘 집에 빨리 들어가 봐야 해.”

김준의 묻는 말에 나는 미안하지만 바로 거절했다. 내 대답에 준이 바로 시무룩한 표정을 했지만 나는 가만히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오늘은 진짜 집을 구해야 했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시간이 지나다가는 길거리에 나앉게 될지도 몰랐다. 살고 있던 집은 이틀 전, 팔렸다고 엄마가 내게 통보를 해 왔으니까 말이다. 사실 좀 늦게 구하더라도 집에 있으면 되지, 하고 생각했었던 것도 무너져 버린 것이었다.

“진짜 미안. 엄마랑 하기로 한 게 있어서.”

“요즘 집에 엄청 빨리 들어가네. 집에 무슨 일 있어?”

강수하가 정말 진심으로 걱정되는 듯 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머릿속이 복잡한 터라 표정도 안 좋았을 테고, 요즘에는 엄마가 미국으로 가기 전 같이 시간을 보내며 이것저것 출국 준비를 하느라 집에 빨리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으니까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아무 일 없어?”

다시 한번 강수하가 물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양심의 가책이 밀려왔지만 무슨 큰일이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애써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진짜 아무 일 없어.”

“……그래.”

아무래도 나를 못 믿겠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강수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만 참아주라. 이래저래 빨리 집을 구해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은 꼭 이사 갈 집을 구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나는 초코 음료를 쪽쪽 빨아 마셨다.

그때 딸랑이는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네 명의 사람들이 카페로 들어왔다. 나는 음료수를 먹다 말고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갔다 올게.”

“응.”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복잡한 머릿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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