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말도 안 되는 (17/36)

8장. 말도 안 되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바라는 건 겨우 그건지, 단순히 내가 떠나지 않는 것만으로 괜찮은 건지. 아니, 애초에 어떻게 나를 좋아한다는 그 감정을 7년이나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전에는 게임 속이니까, 그러니까 나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연시 게임이라는 게 그렇잖아. 모든 것은 플레이어인 주인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이었다. 모두들 이제 자율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테고 또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근데 왜 넌 지금도…….

“머리 그만 굴려.”

“……안 굴렸거든.”

“거짓말.”

두 눈을 가늘게 뜬 이유한이 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복잡한 머릿속이 얼굴에서 티가 났던 건지, 이유한이 눈치가 빠른 건지. 이유한은 어서 먹으라는 듯 눈짓했다. 나는 별다른 소리 없이 숟가락으로 다시 한번 죽을 떴다. 맛있어. 그 와중에 죽은 참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어?”

“응.”

무심한 물음에 똑같이 대답했다. 이유한은 흐응, 하고 제 턱을 괴고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보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먹나, 한숨이 나왔지만 한 숟가락씩 먹다 보니 어느새 죽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도 참 철면피 같기도…….

어쨌든 다 먹은 그릇은 이유한이 싱크대 안으로 바로 치워 버렸다. 유난히 성큼성큼 움직이기에 영문을 모르고 가만히 앉아 있던 나는 다시 싱크대에서 돌아온 이유한에 의해서 거실 소파에 앉게 됐다. 정말 어찌나 순식간이었는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채였다.

“어, 왜?”

“그냥. 붙어 있고 싶으니까.”

사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아주 조금은 긴장도 했었는데 뜬금없이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에 얼굴에 열이 올라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왜 더 능글맞아진 것 같지……. 나는 슬금슬금 몸을 뒤로 빼냈다. 점점 더 내게 가까이 붙어 오는 이유한 때문에 긴장한 탓이었다.

“지헌아.”

“응.”

“그러니까 우리 연애하는 거 맞지? 어, 이미 뽀뽀도 키스도 해서 물어보기에 순서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아, 그런 말 하지 마…….”

아마 우리 관계를 정의하고 싶었던 것 같았지만, 나는 이유한의 말이 들리자마자 기함을 토했다. 그에 이유한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금세 예쁘게 휘었다. 귓가가 뜨거워지는 건 금방이었다.

“양, 양치를 좀 해야겠다.”

“이렇게 갑자기?”

“……칫솔 좀 줄래?”

이유한을 보지도 못하고 겨우 꺼낸 말에 이유한은 곧 키득거리고 웃었다.

“아, 칫솔 주라고…….”

누가 들어도 어색한 말을 듣고 나서는 아예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고 웃더니 곧 제 눈가를 닦아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이밍이 좀, 그렇잖아.”

“……뭐, 타이밍이 뭐 어때서.”

고개를 젓고 부정하긴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좀 타이밍이 그렇긴 했다. 뽀뽀니 키스니 하자는 말도 아니었는데 왜 혼자 이렇게 벌떡 일어서고야 말았는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말을 무를 수는 없어서 나는 애써 당당한 척 손을 내밀었다. 이유한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걸음을 옮기더니 새 칫솔을 꺼내다가 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나는 그것을 받자마자 빠르게 화장실로 걸음을 돌리려 했다.

“……아.”

“그러니까 대답은?”

하지만 채 걸음을 돌릴 새도 없이 양 뺨이 이유한에게 잡혔다. 대답? 무슨 대답. 새 칫솔? 이건 아닌데. 뽀뽀? 키스? 아니, 이유한이 뭘 물어봤더라.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너무 가까운 얼굴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 어……. 그러니까.

“응? 나랑 연애하는 거 맞지?”

두 눈을 예쁘게 휘어 웃으며 이유한이 아주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빳빳하게 굳은 목에 힘을 주던 나는 아주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바로 뒷걸음질.

다행히 원하는 대답을 들은 이유한이 환하게 웃으면서 제 손의 힘을 풀어냈기에 나는 어렵지 않게 그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주르륵. 화장실 벽에 기대어 쭈그려 앉았다.

미친. 나 아직 양치질도 안 했는데. 일어나서 세수는커녕 거울 한번 안 봤는데. 눈곱이라도 꼈으면 어떡하지, 자다가 침이라도 흘렸으면 어떡하지. 아, 다 모르겠다.

“심장 아파.”

이런 거 저런 거 다 모르겠고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내 얼굴을 쓸어도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헤집어 봐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꼭 이유한이 내 앞에 같이 쪼그리고 앉아 나를 보고 웃고 있는 것 같은 착각까지 일었다. 나는 급하게 머리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계처럼 칫솔 포장을 뜯고 물을 묻히고 치약을 짰다. 그리고 나서야 문득 내 얼굴을 확인했는데 다행히도 걱정했던 것들은 얼굴에 붙어 있지 않아서 그제야 좀 안심이 됐다. 아마 진짜 눈곱이나 침이 묻어 있었다면 쪽팔려서 바로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았거든.

“연애…….”

열심히 칫솔질을 하다 말고 다시 한번 내 얼굴을 감쌌다. 연애를 한다고, 연애. 아, 그래. 연애를 하기로 한 거지.

‘나는 계속 너를 위해 주고 마음껏 좋아할 거야. 그게 내가 너를 좋아하는 방식이고.’

‘…….’

‘네가 나한테 해 줘야 하는 건 미안해하는 게 아니라 나를 떠나지 않는단 그 약속 지키는 것뿐이야. 그거 할 수 있지?’

방금 전 이유한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나는 으윽,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심장 떨려. 이렇게 멋있을 일이야? 아, 이유한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나는 칫솔질을 멈추고 찬물로 입 안을 헹궜다. 그리고 얼굴까지 씻었다. 찬물에 머리가 띵해지는 것 같았지만 정신을 차리는 데는 직방인 법이었다. 몇 번이나 찬물을 끼얹고 나니 얼굴에 홍조가 일었다. 개운하다. 개운한데 왜 정신은 안 개운하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밖에는 이유한이 있을 텐데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자꾸만 방금 전에 봤던 이유한의 얼굴이 여러 차례 다시금 떠오르고 있었다.

“부끄러워.”

왜 저렇게 직설적인 건데. 나는 고개를 저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렇게 심호흡을 몇 번이나 했는데도 마음이 진정이 안 됐다. 평소처럼 하자, 평소처럼. 아, 내가 평소에 어떻게 했더라.

그날 우연히 만난 이후 둘이 있던 그 순간에 항상 나는 굳어 있었고 이유한은 능글맞았다. 그럼 전에는? 그때는……. 하아, 잇새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애초에 그때의 이유한과는 성격이 생각보다 좀 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똑같은 이유한이라도 그때는 조금 더 순수하고, 조금 더 해맑은 편이었다면 지금은…….

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화장실을 나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았다. 다시 한 번만 더 심호흡하고……. 그렇게 겨우 마음을 다잡고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이상하게 어정쩡히 서 있는 이유한이었다.

“어, 뭐 해?”

“아, 너무 안 나오길래. 혹시나 쓰러지기라도 했을까 봐……. 노크하려고 했어.”

오히려 이유한이 나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노크하려고 했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먹 쥔 손이 올라와 있어 나는 어이없이 웃어 버렸다. 방금까지 긴장했던 게 우스울 정도였다.

“씻었어?”

“응. 세수만.”

“얼굴에서 뽀득뽀득 소리 날 것 같아.”

그새 평정을 찾은 이유한이 내 볼을 만졌다. 나는 화장실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대신 그 손길을 피하며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손길이 닿는 곳마다 홍조가 피는 듯 뜨끈해졌다.

“로션 발라 줄까?”

“어? 아, 아니 괜찮…….”

당황해 손사래를 치는 내게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던지 이유한은 물어봐 놓고 바로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고는 어느새 로션을 가져오더니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절할 새도 없이 다시 한번 이유한의 손길이 내 얼굴에 닿았다.

이유한에게서 가끔 나던 향이 근원이 이거였나. 어쩐지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부끄러워 죽겠는데 또 못 견디게 좋아서 오히려 곤란할 지경이었다.

“미친다, 진짜.”

내 볼에 치덕치덕 무언가를 바르던 이유한이 배시시 웃더니 내 볼을 붙잡고는 쪽쪽 입을 맞췄다. 당황해 고개를 뒤로 뺐지만 닿아 오는 입술을 멈출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유한아?”

“왜애. 너무 예쁘니까 그렇지.”

다시 한번 꽤나 직설적인 말이 닿았다. 그러면서 몇 번이나 입술이 닿아 왔다. 적막한 거실, 쪽 하는 소리, 푸흐흐 웃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참을 입술을 부딪쳐 오던 이유한은 불현듯 입술을 비죽거리기 시작했다.

“아, 너무 좋은데 오래 못 가겠지.”

그게 또 무척 뜬금없어서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가 표정을 관리했다. 왠지 아쉬워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워졌으니까. 하지만 이유한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런 생각은 안 하는 모양이었다.

“……뭐가?”

“곧 애들 올 것 같거든.”

이유한이 한숨을 내어 쉬었다.

“아, 온다고 했어?”

“……온다고 말은 안 했는데 아마 올 거야. 그것도 엄청 다급하게.”

“응?”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던져 놓은 이유한은 나를 끌어안았다. 이유한이 하는 행동에는 중간이 없어 당황스러움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니까 그동안 열심히 독점해야지.”

역시나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내 볼에 다시금 이유한의 입술이 닿았다. 그래도 좀 적응이라도 된 건지 가만히 앉아서 그 입맞춤을 받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그 입술의 생경한 감촉이 내 목덜미로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어…….”

멍청하게 갈 곳을 잃은 손을 이유한이 잡아 왔다. 다시 한번 입술이 닿았을 때는 잡힌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방금처럼 가벼운 입맞춤이 아니라서 그랬다.

이유한의 입이 내 입술을 담았다. 소파에 어정쩡히 앉아 있던 몸이 기댈 곳을 찾지 못하고 천천히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 낯 뜨거운 자세와 숨 막히게 깊은 키스에 머리로 피가 몰리듯 뜨겁게 열이 올랐다.

“아, 맞다.”

막 이유한의 손이 내 목덜미를 감싸 왔을 때 갑자기 입술이 툭 떨어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내 얼굴은 분명 의아함이 가득했을 것이었다. 아쉬워 보였을까, 급하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가파른 숨은 숨길 수가 없어 나는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나를 뒤로하고 이유한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상 이렇게 이유한이 멀어지니 미묘하게 아쉬운 느낌이 들어찼다.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도, 생각을 하는 것도 뭔가 굉장히 양심에 찔리지만……. 그렇지만 조금만 더 입술을 맞대고 싶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 기분에 나는 급하게 머리를 저어 버리고 입을 달싹였다.

“뭐 해?”

“어, 비밀번호 바꾸려고.”

“어?”

무척이나 태연한 말투였다. 이렇게 갑자기 비밀번호를? 왜……?

“우진이가 비밀번호 알거든. 바꾸려고.”

……그러니까 왜? 덧붙인 설명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유한은 빠르게 현관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누구 온 것 같은데…….”

“아, 진짜.”

하지만 이유한이 채 비밀번호에 손을 대기도 전에 인터폰이 울렸다. 누군가 방문한 모양이었다. 이유한의 얼굴이 짜증스레 찌푸려졌다.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인터폰의 화면을 확인했다. 김현이었다.

“어, 현이다.”

“…….”

“……안 열어?”

“없는 척하면 안 되겠지?”

장난 투였지만 그 안에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방해받기 싫었구나. 급작스레 비밀번호를 바꾸려던 이유한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얼른 열어.”

“아, 진짜 열기 싫다.”

그때 쿵쿵쿵 하고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김현이 그새를 못 참고 문을 두드린 모양이었다.

“연다, 열어.”

이유한이 짜증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현관을 향하던 발걸음이 휙 돌아섰다. 여전히 쿵쿵 소리가 나는 현관, 계속해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 그 모든 걸 외면하고 이유한이 빠른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어?”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할 새도 없이 이유한이 내 목에 입술을 묻었다.

“아.”

그에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따가워. 멍청한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얼이 빠진 나완 다르게 이유한은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게서 멀어졌다. 그 어떤 설명도 없었다. 이유한은 바로 현관으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은 상기된 김현이 바로 현관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멍청한 얼굴을 애써 숨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뭐 한 거지? 하지만 머릿속은 의문투성이였다.

“아, 왜 이렇게 늦게 열어요.”

“내 마음이야.”

“어, 현아 왔어?”

“지헌아.”

조금은 짜증 난 기색을 띠던 김현의 얼굴은 나와 마주치자 금세 밝아졌다. 현이는 망설임 없이 내 품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쿵쿵거리며 뛰고 있는 심장에 조용히 숨을 깊게 내쉬며 그 등을 토닥였다. 사실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나 스케줄 취소됐어. 오늘 노는 날이야.”

“아, 진짜? 잘됐다.”

“그치? 완전 좋아.”

“……잘되긴.”

이유한의 툴툴거림이 들렸다. 그에 돌아간 시선에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한이 서 있었다. 김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그새……?”

“글쎄.”

“아, 형!”

만나자마자 저게 뭘 하는 건지, 김현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괜스레 눈치가 보였기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순간 이유한의 손이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리고 옮겨 간 손은 김현의 머리에 콩, 하고 꿀밤을 쥐어박았다. 무척이나 큰 온도 차이였다.

“왜 때려요!”

“생각을 끝내고 온 거야, 생각도 안 끝났는데 생떼 쓰는 거야?”

“제가 무슨 생떼를……!”

“어제, 오늘 내가 한 말 다 귓등으로 들었지.”

뭔가 잘못한 학생을 혼내는 것 같은 분위기가 풍겨 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어제, 오늘? 한 말? 무슨 말을 했기에 그러지? 아마 내가 자고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뭔데?”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내가 물었다. 김현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저 형이 너한테 무슨 짓 안 했어? 응?”

“무슨 짓?”

“나쁜 짓.”

입술을 비죽거리는 김현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쁜 짓. 김현의 기준에서 나쁜 짓은 뭘까. 이유한이 나를 괴롭혔거나 혹시나 싸웠거나 이런 것을 예상하는 건 아닐 거고, 덕분에 떠오르는 것은 김현이 들어오기 바로 직전의 상황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저으며 목덜미를 가렸다. 그냥, 직접 내가 보진 못했지만……. 어쩐지 가려야 할 것 같았다. 이유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하지만 그 낌새를 금방 알아챈 듯 김현이 내 손을 잡아 왔다. 애써 가리고 있는 손에 힘을 줘 봤지만 준 보람도 없이 힘없이 목에서 떨어져 나갔다. 김현의 눈썹이 대번에 치켜 올라갔다.

“뭐. 내가 얘기했잖아.”

하지만 김현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이유한이 태평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거 한다고 얘기 안 했잖아요…….”

“그 말이 그 말이지. 왜, 마음 바꿨어?”

장난스럽게 이유한이 내뱉었다. 김현은 아무런 말도 없이 입만 불퉁하게 내밀었다. 이쯤 되니 정말 내가 자고 있는 사이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궁금해졌다. 호기롭게 내 손을 떼어 낸 김현은 그 손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응? 어제 무슨 얘기 했는데?”

“아냐, 아무것도…….”

김현은 무척 시무룩했다. 그러면서도 말할 생각은 없는지 그러고는 입을 꾹 다물어 버리기에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말해 주지 않는다면 묻지 말까, 순간 고민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한 사이에 했던 대화가 늘 썩 유쾌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김현의 손을 꽉 틀어잡았다. 동그란 눈이 나를 마주했다.

“또 너희들끼리만 알지 말고 말해 줘. 어차피 내 얘기잖아.”

김현뿐 아니라 이유한마저도 그 단호한 말에 당황한 듯 보였다.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이유한을 힐끗, 그러고는 다시금 김현을 바라봤다.

“얘기해 줬으면 좋겠어. 응?”

죄책감을 가지지 않게 하자고 했다던 김준의 그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은 절대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아…….”

김현은 우물쭈물했다. 이유한은 입을 다물었다. 무척이나 갈등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 감고, 귀 막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너희들만 아프고 힘들었어. 그거 싫어. 나 안 할 거야.”

“지헌아.”

“무슨 이야기했는데.”

결국 김현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들어 내 목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그게 무척이나 조심스러워서 나는 잠시 숨을 참아야 했다.

“나는 아직도 네가 좋은 거 같아.”

“……응?”

“7년 전에 너를 만났을 때처럼 지금도 네가 너무 좋아, 좋은데…….”

김현은 그리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래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게 무서웠어.”

“…….”

“내가 그 어렸을 때처럼 또 너한테 화라도 내 버리면 어떡하지, 그것 때문에 네가 상처라도 받으면…….”

“현아.”

“그래서 그때로 돌아가는 게 좋을지 적당히 친구 사이로 지내는 게 좋을지, 그게 고민이 됐어.”

어느새 김현은 내 어깨에 제 얼굴을 묻어 왔다. 그리고 또 침묵. 그 적막한 사이 이유한의 핸드폰이 지이잉 울렸다. 이유한이 제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이유한은 나를 보며 살짝 눈짓했다. 전화를 받고 온다는 뜻인 것 같아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김현을 토닥이고 있는 손길은 그대로였다. 이유한이 테라스로 나가고 나자 김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 뜻대로 해. 현아.”

“…….”

“그게 뭐든 상관없어.”

“…….”

“말했잖아. 네가 나를 떠나게 된다고 해도…….”

“안 떠나. 안 가. 아무 데도 안 간다고.”

그새 푹 젖어 버린 얼굴이었다.

“너야말로 아무 데도 가지 마. 응?”

“…….”

“응?”

“응.”

자꾸만 말을 할 때마다 한숨이 섞였다. 이렇게 마음을 아프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모든 원인이 나라는 게 싫었다. 그 따끔따끔거리는 마음의 한구석, 차라리 모두 다 나를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너희들의 마음이 편하다면 좋을 텐데. 그리고 남은 나는,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지헌아.”

“응.”

“친구 하는 거 어렵겠지.”

무척 고민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김현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될 것 같다가도 안 될 것 같고 그래. 특히…….”

다시금 부드러운 손길이 목덜미에 닿았다. 아까보다 느긋하게까지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이런 거 보면, 속이 막 뒤집히는데.”

미묘하게 바뀐 눈빛은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삼켜질 정도로 진득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그 눈빛은 금세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해맑은 얼굴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여튼 네 목에 이딴 거나 남겨 놓고. 이건 완전히 자기 거라고 침 발라 놓은 거잖아.”

짜증스러운 얼굴을 한 김현의 시선이 테라스로 갔다가 돌아왔다. 누가 봐도 이유한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목에 닿아 있던 손길이 천천히 얼굴로 올라왔다. 닿은 손이 얼굴을 간질이고 있었다.

“내가 질투하고 그래도 참아 줄 거야?”

그러고는 문득 꺼낸 말.

“근데 난 네가 참아 주길 바라진 않는데…….”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데도 김현은 별로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모르겠다. 진짜…….”

무척이나 고민이 많은 얼굴이었다. 나는 너에게, 너희에게 또 고민만 안겨 주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김현의 손을 잡았다. 바보처럼 혼자 중얼거리던 김현이 손끝을 떨었다.

“네가 뭘 해도 내가 너를 싫어할 일은 없을 테니까.”

“…….”

“내키는 대로 해. 그래도 돼.”

애써 웃음 지으며 꺼낸 말에 김현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이었나. 내가 그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 때 김현이 무척이나 티 나게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너 그 말 되게 위험했는데.”

“응?”

영문 모를 소리였다. 무슨 소리인지 의미를 묻고자 했던 것은 때마침 테라스에서 거실로 다시 돌아오는 이유한 때문에 막혔다. 김현의 시선이 이유한에게 잠시 닿았다가 다시 내게 돌아왔다.

“……너희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

아주 조금은 짜증스럽게 들어오던 이유한이 멈칫거렸다. 나는 여전히 멍청한 얼굴이었다. 김현이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친구 안 할래요.”

“……뭐?”

“결정했어요. 친구 안 해. 지헌아. 나 너랑 친구 안 할래.”

무척이나 뜬금없는 선언이었다. 이유한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무어라 대답을 할 수 없을 만큼 단호한 말투였다.

“마음대로 할 거야.”

해맑은 얼굴을 한 김현이 나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한은 한숨 쉬듯 미간을 찌푸렸다.

***

“오빠. 이게 무슨 일이에요?”

혜원의 넋 빠진 목소리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별달리 설명할 말이 없어 웃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월요일의 낮, 나는 아르바이트를 위해 카페에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 주세요.”

어쩐지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을 때도 나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커피 기계를 만지작거리며 탬핑에 온 힘을 다 쏟고 있었다. 그랬기에 뭔가 익숙한 목소리네, 하면서도 굳이 뒤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어, 네, 아, 아이스,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세 잔요?”

“네.”

“아, 그러니까, 아이스 아메…….”

아마 생전 안 그러던 혜원의 목소리가 그렇게까지 떨리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커피를 뽑는 데 온 정신을 기울이고 있었을 터였다. 더듬는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심결에 뒤돌아 봤을 때 보인 낯익은 얼굴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어?”

“한지헌, 안녕.”

뒤돌자마자 보이는 사람은 아주 해맑은 얼굴을 하고 있는 김준이었다. 나는 순간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두 눈을 급하게 끔뻑였다. 하지만 몇 번을 깜빡여도 여전히 제자리에 있는 김준에 나는 한걸음에 앞으로 다가갔다.

“웬일이야? 어떻게 알고 왔어?”

“어, 유한이 형한테 들었어. 잘 어울리네.”

방긋 웃으며 하는 말에 내가 조금은 쑥스럽게 웃었다. 잘 어울릴 리가, 아직도 커피 샷 하나 뽑는 것도 버벅거리고 있는데.

내가 김준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자 바보처럼 말을 더듬고 있던 혜원이 놀란 눈으로 나와 김준을 번갈아 봤다. 그 모습에 그제야 혜원이 왜 그렇게 말을 더듬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혜원이가 김준의 엄청난 팬이었지. 거기다 덤으로 나와 김준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하는 이 상황이 혜원이 보기에 이상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혜원아, 인사해. 굳이 소개 안 해도……?”

“아, 네…….”

“내 고등학교 동창이야.”

“진짜요?”

“응. 준아 인사해. 정혜원이라고 나랑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동생이야.”

“아, 안녕하세요.”

내 소개에 예의 그 자상한 웃음을 띠며 김준이 혜원에게 인사했다. 덕분에 순식간에 혜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래,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TV나 야구장 멀리서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가까운 거리니까.

“근데 웬일이야, 정말?”

“저기 봐 봐.”

김준이 손가락으로 한 테이블을 가리켰다. 나는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것은 혜원도 마찬가지였다. 그 손의 끝을 확인한 혜원이 갑자기 입을 가리고는 억,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김준이 잠시 의아한 눈으로 보기에 내가 머쓱하게 웃었다. 언제 왔는지 조금 떨어진 자리에 강수하와 장우진이 앉아 있었다.

“놀러 왔어?”

“응, 나 오늘 경기 없거든. 장우진은 공모전 제출작 마무리했다고 하고 강수하도 이번 주는 쉰대.”

“아, 잘됐네.”

“응. 근데 내가 가위바위보 이겨서 계산하러 왔지.”

……보통 진 사람이 오지 않나?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안 바쁘니까 내가 가져다줄게.”

“응. 근데 커피 뽑는 거 구경하면 안 돼?”

김준은 여전히 웃음을 띠며 내게 물었다. 조금은 진정한 혜원이 잠시 일어섰다가 다시 윽,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야 상관없지만, 이쪽이 안 될 것 같네…….

“금방 가지고 갈게.”

“흐음. 알겠어.”

내 대답에 김준은 아쉬운 기색을 보이긴 했지만 별다른 말없이 계산을 하고 카운터에서 멀어졌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혜원이 일어난 것은 그다음이었다. 무척이나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혜원은 다짜고짜 내 팔을 붙잡았다.

“오빠.”

“응?”

“이게 무슨 일이에요.”

무척이나 멍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힐끔거리며 세 사람이 있는 테이블을 보고 있었다. 대놓고 보지는 못하는 게 또 못내 귀여워 보여 나는 결국 킥킥거리고 웃었다.

“오빠, 저기에서 광채 나는 것 같은데요, 막.”

“아, 무슨 소리야.”

“나 김준 선수 이렇게 가까이에서 처음 보는데, 거기에다가 친구분들까지 완벽…….”

김준이 사라지고 나서야 혜원이는 평소처럼 재잘재잘 떠들어 댔다. 얼마나 놀랐는지 벌어진 입이 다물리질 않기에 직접 닫아 주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괜히 그쪽 테이블을 힐긋 곁눈질했다. 음, 진짜 거기만 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멍청한 생각이었다.

“잘생기긴 했지?”

“그냥 잘생긴 게 아니라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요…….”

중얼중얼거리는 그 넋 빠진 대답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냥 흘러간 말인데 혼자 양심에 찔렸던 탓이었다.

“오버하긴.”

“전혀 오버 아닌데요. 아, 근데 오빠 고등학교 동창이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혜원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 한 3개월 같이 학교 다니긴 했지만.”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녀석들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잘 몰랐다. 무슨 관계라고 표현하기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수진 씨의 말에 의하면 현실과 게임 사이에 동기화가 이루어졌다. 결국 내가 잠깐이나마 저 녀석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던 것은 현실이 된 것이었다.

그에 맞게 내 주위 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수정된 것 같긴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이제 마음 편하게 모두를 소개할 수 있었다.

근데 그 이후로 수진 씨 연락 안 왔지. 무심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건지 궁금했지만 그날 이후 전화가 왔던 그 번호는 몇 번을 다시 걸어 봐도 연결되는 법이 없었다.

“와, 그 학교 어디래요? 저 얼굴들이 한 학교에 있을 수가 있어요?”

“어어. 뭐…….”

김현에 이유한까지 같은 학교였다고 얘기하면 까무러칠지도 모르겠네.

“진짜 대박이다. 아, 일단 커피, 커피를 뽑아야겠어요. 내가 진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가 뭔지 보여 줄게요.”

한동안 감탄을 이어 가던 혜원은 곧 팔까지 걷어붙였다. 결국 나는 소리까지 내며 웃어 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열정적인지 탬핑을 하는 하얀 손에 힘줄까지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얼음 컵을 만들었다.

“맛있게 드시라고 꼭 전해 주시고요. 기왕이면 김준 님 사인 좀 받을 수 있는지 여쭤봐 주시면 안 될까요?”

어느새 커피를 뽑아낸 혜원이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꾹 붙들며 물었다. 볼까지 발갛게 물들인 그 얼굴에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긍정적인 끄덕임에 혜원이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그리고 이건 오빠 거. 가서 놀다 와요.”

“에이, 어떻게 그래.”

언제 만들었는지 생크림을 잔뜩 올린 아이스 초코를 쟁반 위에 올리며 녀석이 생긋 웃었다. 와, 진짜 감동이다. 나는 왠지 마음이 찡해졌다. 혜원이 코끝을 찡그렸다.

“나중에 내 친구들 오면 오빠가 봐주면 되죠.”

그 말에 그제야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혜원이 내 손에 몸소 쟁반까지 쥐어 주었다. 그러면서 이전 이유한과 나를 내보낼 때처럼 손을 동그랗게 말아 쥐었다.

“파이팅.”

그러니까 뭐가 파이팅이냐고. 굳이 숨길 필요도 없는 웃음을 지으며 나는 카운터에서 나와 걸음을 옮겼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테이블로 향하자마자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자연스럽게 비어 있던 강수하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하, 우진이 안녕.”

“응.”

나는 아직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던 강수하와 장우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리에 앉아 각자 음료를 가지고 가고 나니 혜원이 만들어 준 아이스 초코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생크림 많이도 올렸네. 어느새 내 취향을 파악한 게 기특하기까지 했다.

“지헌아.”

“응?”

강수하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지만 막상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왜 불러 놓고 말을 안 하지? 뻘한 생각을 하며 주위로 고개를 돌렸는데 이상하리만큼 다들 조용했다. 뭐지, 이 분위기는? 뭔가 좀 위화감이 들었다.

“왜 그래?”

그 어색한 분위기에 아무 생각 없이 음료를 마시려던 나는 두 눈을 도르륵 굴렸다. 왜 그러지. 아, 혹시 내가 너무 편하게 굴었나? 그날 이후로 다들 바빠서 만나지도 못했었는데. 그냥 김준이 아까 전 편하게 대하기에 나도 모르게 똑같이 굴었던 모양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였나. 근데 그럼 어떻게 대해야 되는 거지?

갑자기 아무 생각 없던 마음에 부담이 깔렸다. 나는 조용히 마시고 있던 음료를 내려 두고 곧게 앉았다. 어쩐지 분위기 파악이 잘 안 되고 있었다.

“아, 아니, 왜 갑자기 눈치를 봐. 아니야. 그게 아니고……!”

내가 눈치를 보는 것이 느꼈는지 김준이 다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생각하는 게 다 얼굴에 티라도 나는 건지, 눈치가 빠른 건지. 나는 급하게 표정 관리를 하려 입꼬리를 올렸다. 굳어 있던 녀석들도 어색하게 웃음을 띠었다. 나도 저런 얼굴일까, 싶을 정도로 어색해 보였다.

“아니, 그게.”

“응?”

“있잖아. 저기…….”

김준이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딱 현이 같은데.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고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김준의 말에 집중했다. 내가 눈치를 봐야 할 일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싶어서였다.

“하아. 모르겠다.”

“……뭐가?”

“야, 장우진. 네가 물어봐.”

“왜 나한테 떠넘기는데.”

장우진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러더니 그 시선이 강수하를 향했다. 하지만 강수하조차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버렸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 건지, 말을 해 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알던 그때로부터 7년이나 지나 버린 지금은 더더욱.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애들이 말을 하지 않으면 나라도 입을 열어야 했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쌓일 수 있는 오해나 상처는 피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는 거 불편해?”

“응? 아니야, 그런 거!”

“그럼 왜 그러는데. 말을 해 줘야 알지.”

내 말에 다들 두 눈만 굴리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장우진이 입을 열었다.

“한지헌, 너…….”

“응.”

“저기 알바생이랑, 아씨.”

하지만 말을 하다 말고 제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알바생이라는 말에 나는 무심코 카운터로 시선을 돌렸다. 혜원이 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혜원이?”

“…….”

내 물음에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는 것이 뻔히 보였다. 그러면서도 힐끗거리며 카운터로 향하는 시선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얘들 보기에도 귀엽나. 하긴, 혜원이가 귀엽긴 하지. 누구와 붙여 놔도 혜원이는 다 잘 어울렸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주 이성적인 면에서. 하지만 문득 상상되는 누군가와 혜원의 다정한 모습은 순식간에 기분을 가라앉게 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뜻대로 하겠다는 말이 얼마나 말뿐인 것인지 증명하는 옹졸한 생각이었다.

“친해?”

내 복잡한 머릿속을 알 리 없는 강수하가 물었다. 그 미묘한 표정을 보다 나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영 내키지 않았지만 안 친하진 않으니까. 그 한마디를 물어보고는 강수하는 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는 꽤나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게임 속이었을 때도 현실에 있는 지금도 이렇게 다른 사람한테 보이는 관심에 치졸한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몇 배는 더 이기적인 모양이었다. 나는 숨을 한번 깊게 내쉬고는 애써 밝게 웃었다.

“혜원이 귀엽지?”

내 물음에도 다들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시 한번 힐끔, 혜원이를 보다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이유한을 만나게 해 준, 김준이 이 현실에 있다는 걸 알려 준 고마운 친구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한테 이런 치졸한 질투를 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밝게 웃었다. 가릴 수 있다면 가리고 싶었다.

“데려올까? 어차피 손님도 없…….”

“됐어.”

애써 꺼낸 말을 장우진이 딱 잘랐다.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무엇을 원하든 그냥 모든 것을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일까. 내가 할 수 있을까.

“미안.”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달싹였다. 자신이 없어졌다. 손바닥 뒤집듯 금세 마음이 바뀌었다. 나는 아마 수긍하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치졸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어?”

“혜원이한테 관심 보이지 마. 질투 나. 나도 내가 그럴 자격 없는 거 아는데, 질투 나. 그러니까 다른 사람 만나고 싶으면 내가 모르는 사람한테 관심 보이면 안 돼?”

내가 생각해도 양심 없는 말이었다. 덕분에 세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하지만 말은 이미 뱉은 후였다. 순간 제정신이 돌아왔다. 미쳤지, 미쳤어. 대답 없는 세 사람 사이에서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타이밍 좋게 손님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이렇게 손님이 반가웠던 적이 언제인지, 나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손님. 갔다가 다시 올게. 얘기하고 있어.”

“어? 어…….”

나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은 다급한 걸음으로 카운터로 내가 들어오자 혜원이 밝게 웃었다. 그러면서 ‘혼자서도 할 수 있는데’ 하는 게 방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감정이 떠올라 차마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네? 뭐가요? 아, 손님도 없었는데 뭐가 미안해요! 나중에 오빠도 나 친구 왔을 때 그래 주면 된다니까?”

해맑은 얼굴에 더욱 양심이 찔렸다. 하지만 미안해할 틈이 없었다. 막 들어온 손님들은 각기 다른 음료를 주문했다. 덕분에 혜원이와 나는 정신없이 움직였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 뒤로도 줄줄이 손님이 들어왔다. 그렇게 정신없이 움직이다 막 손님이 끊기고 나니 어느새 40분이나 시간이 흘러가 있었다. 훅 가 버린 시간에 나는 헛웃음을 쳤다.

“오빠, 얼른 가 봐요. 친구들 왔는데 가 보지도 못하고 어떡해요.”

자기가 더 신경 쓰이는 듯한 표정에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세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쩐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렇다고 안 가겠다고 버틸 수도 없어 별수 없이 그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가오는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었다.

“미안, 갑자기 손님이 밀려 가지고…….”

“지헌아.”

머쓱한 말투에 문득 김준이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는 모양이라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관심 보인 거 아냐.”

“……응?”

“저 친구한테 관심을 보인 게 아니라 네가 저 친구하고 엄청 친해 보여서, 그래서 우리가 질투한 거야.”

생각지 못한 말에 나는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예쁘게 웃으면서 편하게 구니까.”

“……어?”

“우리랑 있을 때는 아직 어색하게 눈치 보고 있는 게 다 보이는데 너무 편하게 해맑게 웃으니까. 많이 친해 보여서 그래서, 질투 나서.”

“…….”

“미안해. 신경 쓰이게 해서.”

눈을 팔자로 떨어트린 김준이 말을 마쳤다. 나는 어벙하게 녀석을 보고 있었다.

“어, 응.”

한참 만에 나는 겨우 그 정도의 말을 내뱉었다. 무어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질투를 하는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게 보였나? 내가 편해 보였나? 아니, 편하긴 했다. 혜원이는 내가 그 어떤 죄책감도 뭣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니까.

어색한 시선이 갈 곳을 잃었다. 이미 녹아 버린 아이스 초코를 휘휘 저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런 말이 없는 나 대신 강수하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친하게 굴지 마.”

얼굴이 펑 하고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아예 대놓고 표현하는 감정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멍청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는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꼭 혜원이한테 김준 사인을 가져다줘야 할 것 같았다.

***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우리는 김준의 집으로 와 있었다. 아무래도 얼굴이 알려진 터라 돌아다니기 어렵다는 김준의 의견을 존중해서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별다른 대화가 오고 가진 않았다. 그냥 평상시 친구들끼리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다들 그날 내가 했던 말에 대해서도 카페에서 있었던 일도 없었던 일처럼 굴었다.

아마 김현과 동일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더더욱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려웠다. 안 그래도 질투니 뭐니 해서 혼란스럽게 한 것 같아 미안할 정도였다. 뭐가 ‘너희들의 뜻대로 하겠다’인지. 이렇게 간단하게 욕심을 보일 거면서.

어쨌든 김준과 김현은 둘이서만 같이 살고 있다고 했다. 김현은 지금 스케줄 때문에 집을 비운 상황이었다. 처음 들어가자마자 참 쌍둥이들 집 같다고 생각했던 건 어지러이 널려 있던 옷들 때문이었다. 김준은 머쓱하게 웃으며 다급하게 옷가지를 치웠다.

“근데 지헌아, 목에 밴드 뭐야?”

“응?”

편하게 소파에 누워 있던 김준이 갑자기 물었다. 목? 잠시 멍청히 되물었지만 내 목에 붙어 있던 밴드가 떠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제 이유한이 키스 마크를 얼마나 진하게 남겼던지 이틀이 지난 지금도 채 사라지지 않고 희미하게나마 자국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누군가는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자국이라 어쩔 수 없이 목에 밴드를 붙이고 아르바이트를 갔었기에 그것을 발견한 김준이 당황스러울 다름이었다.

“다쳤어?”

무어라 변명을 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강수하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움찔거리며 몸을 뒤로 뺐다. 다쳤다고 해도 되려나, 어색하게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디 봐.”

사실 그렇게 말하면 수긍하고 넘어갈 거라 생각한 거였는데 강수하는 단걸음에 다가왔다. 나는 다급하게 내 목을 가렸다. 덕분에 강수하는 다가오던 것을 멈췄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무척이나 미묘했기에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왜 유한이 형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네.”

그에 장우진이 조용히 읊조렸다. 괜히 찔린 내가 다급하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그 덕에 세 사람의 눈이 의심으로 가득 찼다. 아, 나 진짜 멍청인가. 방금 꺼낸 말에 막심한 후회가 들었다.

“뭐가 아니야?”

어김없이 김준이 물었다. 대충 파악을 한 것 같은 김준은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분명히 예전에는 내 목에 김현이 남긴 키스 마크를 보고 벌레 물렸냐고 했던 것 같은데, 7년이라는 세월이 밴드만 봐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될 수 있도록 한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내 변명에도 여전히 의심스러운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결국 강수하가 내 목덜미를 잡았다. 어, 할 새도 없이 목에 있던 밴드가 떼어졌다. 무척이나 순식간이었다.

“어…….”

“이유한이네.”

이제 형 소리는 어디다가 집어 치워 버린 모양이었다.

“으, 짜증 나.”

김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셔 버린다. 강수하와 장우진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걸 이해해야 된다는 거지.”

“…….”

“이게 뭔지 물어볼 자격 자체를 가지지 못하거나, 이걸 이해하거나.”

장우진이 잔뜩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뿐, 그 이상 어떤 말을 더 붙이지는 않았다. 다시금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사실 나도 무척이나 헷갈렸다. 모두 다 하는 행동은 7년 전의 그때와 같았다. 여전히 나를 좋아하고 있다. 그것은 바보가 아니고서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답을 알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모두가 나를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 모두에게 너희들의 뜻대로 하겠다고 한 것은 결국 다들 내게 돌아오길,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길 원했던 거다. 착한 척, 이기적이지 않은 척, 모두를 배려하는 척 내가 이기심을 부린 것이다.

그쯤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채 정리하지 못하고 결국 크게 한숨을 내어 쉰 그 순간 내 몸이 강수하에 의해서 훅 당겨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강수하는 그대로 내 몸을 당겨 제 품에 넣고는 이유한이 남긴 키스 마크가 있던 목에 제 입을 맞췄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당황한 내가 두 눈을 크게 떴지만 그 순간 목에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아, 강수하!”

장우진과 김준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수하는 태평한 얼굴로 멀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멍청하게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고 강수하는 내 목을 내려다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됐다.”

그러곤 무심하게 말했다. 나는 여전히 말을 못 하고 있었다. 강수하는 그런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내 뜻대로 한다고 했잖아, 네가. 나는 마음 정했어.”

“미친, 네가 마음을 정한 거랑 키스 마크 남기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격해진 말투로 김준이 발을 쿵쿵 굴렀다. 얼굴에 짜증이 한가득이었다.

“난 친구 못 해.”

“아…….”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아까 확신했어. 나는 친구 못 해. 안 할 거야.”

무척이나 가벼운 얼굴이었다. 이 부적절한 관계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소리를 하면서 왜 그렇게 홀가분한 표정인지.

“되게 마음 편해 보인다.”

그 생각을 나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장우진이 약간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어, 남들도 만질 수 있다는 거 빼곤 다 편하네.”

강수하는 굉장히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는데 그에 나는 또 종이 인형처럼 바로 끌려갔다. 상황 파악을 끝낸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오는 것 같았다.

“난 진짜 너희가 이해가 안 돼.”

“이해하지 마. 더는 안 늘어났으면 좋겠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김준을 보며 강수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틀렸다. 나는 또 결국 모두가 내게 돌아오게 만들고 있었다. 목이 졸리듯 숨이 막혀 왔다. 나는 도대체 너희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 앞에 나타났는지 모르겠어.”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든 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나는 잠이 들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꿈속이 분명했다. 애초에 어딘지도 모르는 생소한 장소였으니까.

나는 어색하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바로 앞에 누군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낯익은 목소린데 누군지를 모르겠다. 애들 중 한 명인 것 같은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 누구야?”

내가 물었다.

“네가 내 옆에 있어서 힘들어.”

마음을 쓰리게 하는 말이 다시금 들려왔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군지 궁금했지만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을 포기하고 제자리에 섰다. 알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꿈속이라 할지라도 이런 말을 하는 누군가를 마주치는 것은 숨 막히게 괴로운 일이었다.

“넌 너무 이기적이야.”

내 앞의 인영이 다시 한번 내게 말했다.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알고 있었다. 오늘도 수백 번, 수천 번 했던 생각이었다. 나는 너무 이기적이다.

“내 곁에서 사라져 줘.”

이상했다. 분명히 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보이지 않는 인영이 둘로 늘어나 있었다. 나는 주춤거리며 한 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것은 내 의사가 아니었다. 꿈속의 나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앞의 인영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있었다.

“그래야 내가 살아.”

다시 한번 들리는 목소리는 어느새 세 사람으로 늘어 있었다. 입술을 깨물며 참던 눈물이 터졌다. 나 때문에 힘들다고 하는 말에 숨이 턱턱 막혀 왔다. 하지만 그런 내 상황과 관계없이 다시 한 발자국 앞으로 걸음이 옮겨졌다. 그만 다가가. 다가가지 마. 얼굴이 보일 것 같단 말이야.

“응? 제발 지헌아.”

어느새 또 네 사람. 나는 또 한 걸음.

“너 때문에 우리가 괴로워.”

다섯 사람. 마침내 눈앞에 모두가 나타났다. 아픈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그 얼굴에는 원망이 서려 있었다. 뚝뚝, 눈물에 흐려진 시야인데도 그 마음이 생생하게 느껴져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나 때문에 그래,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안 됐는데, 지금 당장 괴롭더라도 놔줬어야 했는데……. 내가, 내가…….

“다 너 때문이야.”

내가, 너희를 놔줬어야 했는데.

“윽, 으흐……. 흑.”

갑자기 눈앞이 어둠으로 덮였다. 내 앞에서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던 모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온 세상이 까맣게 됐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다급하게 눈을 떴다. 어느새 익숙한 내 방 천장이 보이고 있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두 눈을 깜빡였다. 헉, 소리와 함께 두 눈에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여전히 그 꿈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심장이 터질 듯이아파 와 나는 자리에서 몸을 웅크렸다. 꿈속에서 내게 하던 말이 몇 번이고 다시 들리고 있었다. 너 때문에, 우리가 괴로워. 다 너 때문이야. 수십 번 내 귓가에 울렸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꺽꺽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아팠다. 심장이 터질듯이 아팠다. 틀린 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다 나 때문이었다. 모두 다 나 때문이었다. 누군가 아프고 누군가가 힘든 것은 모두 다 내 탓이었다.

그때,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했다. 전화가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눈앞이 뿌예서 누구에게 전화가 온 건지도 알 수가 없어 소매로 눈을 급하게 닦아 냈다.

핸드폰 액정에는 이유한이라는 이름이 띄워져 있었다. 여전히 흐르고 있는 눈물을 꾸역꾸역 참아 내며 나는 숨을 내쉬었다. 아파서 죽을 것만 같은데 전화를 받지 않으면 이유한이 걱정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화를 받으면 이유한이 더 걱정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숨을 삼켰다.

너무 오랫동안 받지 않았는지 전화가 뚝 끊어졌다. 내일, 잤다고 말하자. 그렇게 말하면 돼. 스스로를 위로하며 나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한번 터져 버린 눈물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그때 다시 한번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에도 이유한에게서 온 전화였다. 분명히 내가 지금 전화를 받으면 걱정할 텐데, 분명히 그럴 텐데 이유한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 다정한 목소리가 못 견디게 그리웠다. 나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는 역시 이기적이었다.

-어, 지헌아. 잤어?

“윽, 유, 한아. 끅.”

-……울어?

부드러웠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굳었다. 나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 고개를 흔들었다.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말을 내뱉었다가는 정말 엉엉 울어 버릴 것 같았다.

-지헌아.????????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났다. 꿈속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완전히 다른데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 다정한 목소리로 이유한이 내게 이별을 고할 것 같았다.

“보, 흡, 보고…… 싶, 윽, 어.”

-…….

“미안, 으윽. 미안해.”

-지헌아.

“아, 내가……. 하, 내가 잘못, 했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상처 줘서 미안해.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울음에 막혀 나오지 않자 나는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전화기 너머로 이유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지헌아. 그만 울고 나와. 응? 집 앞이야. 나와.

애처로운 이유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대에서 내려가며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우당탕하고 넘어졌지만 아픈 줄도 모르고 방에서 빠져나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보지 못하면 죽을 것만 같았다.

빠르게 현관문을 박차고 나오니 정말로 이유한이 있었다.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고 있던 이유한이 나를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나는 이유한에게 그대로 달려가 품에 안겼다. 얼굴을 보고 나니 오히려 더 울음이 끓어올랐다.

“으윽, 유한, 유한아, 아흑.”

“응. 나 여기 있어. 응, 울지 마. 왜 그래. 지헌아.”

이유한은 나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그 손끝이 떨리고만 있었다.

“미, 안해. 내가 미안, 흑.”

“네가 뭐가 미안해. 미안해하지 마. 미안할 거 없어. 다 내가 그러겠다고 한 건데 왜 네가, 이렇게 울어. 응? 마음 아프게. 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이유한의 품에서 울었다. 녀석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괜찮다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를 달래는 손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안겨 있고 나서야 조금씩 울음이 잦아들었다. 나는 이유한의 품에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지헌아.”

울음이 잦아들자 이유한이 내 이름을 불렀다. 응, 하고 내가 대답하니 곧 머리 위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악몽 꿨어?”

“…….”

“엄청 슬픈 꿈 꿨나 보다.”

그 목소리가 또 무척이나 다정해서 다시 왈칵 눈물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눌러 참았다. 나는 좀 더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내일 얼굴 엄청 붓겠다, 한지헌.”

“…….”

“못생겼겠다.”

장난기 섞인 이유한의 목소리에 내가 피식 웃었다. 그제야 녀석이 푸흐흐,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미안해.”

“네가 뭐가 미안, 끅, 해.”

“너한테 너무 큰 짐을 줬나 봐.”

이유한이 한숨 쉬듯 말했다. 짐을 준 건 내 쪽인데 왜 또 네가…….

“그러지, 마. 나한테, 끅. 미안하다고, 하지 마. 너희들은, 윽. 하나도, 하나도.”

결국 또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알았어. 미안해. 울지 마. 아니야, 안 그럴게. 그런 말 안 할게.”

이유한이 다급하게 나를 꽉 껴안았다. 그 품 안에 있으니 방금 전 꾼 꿈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생생했던 꿈이 뿌연 안개 속에 들어가고 있었다.

“다 울었어?”

그렇게 또 한참을 녀석의 품에 있었다. 얼마 후에야 이유한이 물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이유한은 나를 품 안에서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싫어.”

그 말에 대답하는 듯한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결국 이유한은 나를 떼어 내는 것은 포기하고 나를 품 안에 더 밀어 넣었다.

“지헌아.”

“……응.”

“……우리 집에 가자.”

이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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