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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작당 모의 (15/36)

외전 2. 작당 모의

“그러니까 너희도 내 눈치 보지 말고, 나 너무 위해 주지 말고, 이기적으로 굴어. 그렇게 해 줘.”

조금씩 더 작아지는 목소리가 끊기나 싶더니 지헌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무도 그 이후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슨 뜻에서 한 말인지 알았기에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나와.”

조용한 목소리로 이유한이 말했다. 그제야 지헌이 덮고 있는 이불을 강수하가 한 번 더 정리하고 모두가 거실로 빠져나왔다. 거실은 다시 한번 적막. 그 적막을 깬 것은 김준이었다.

“내가 진짜 쓸데없는 소리를 했어.”

김준은 아까 전 제가 꺼냈던 말이 너무나도 후회스러웠다. 나 때문이다. 내 말 때문에 지헌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순간의 감정에 휘말려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됐던 건데, 준이 제 머리를 짜증스레 흩트렸다.

“지금 와서 그런 말하면 뭐 해.”

이유한은 생각보다 무심한 투였다.

“형.”

그 말투에 한동안 입을 닫고 있던 장우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응.”

“난 잘 모르겠어.”

무척 뜬금없는 소리였다. 동시에 네 사람의 시선이 장우진에게 향했다.

“그리웠고 만나게 돼서 행복해. 그건 확실한데.”

“…….”

“친구로도 괜찮은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지 아직 잘 모르겠어.”

자신 없어.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마음에 모두가 말이 없었다. 우진은 제 머리를 헤집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따금씩 한지헌이 생각나던 날도 많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잊은 채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날도 있었다.

적어도 얼마 전의 저는 이렇게 시간이 더 지나면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지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그냥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또 다른 사랑을 시작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보다는…….”

조심스레 김현이 입을 열었다.

“자신이 없어. 예전으로 돌아갈 자신이.”

“자신?”

“내가 또 지헌이한테 나 억울하다고 화라도 내 버리면 어떡하지.”

그 죄책감을 여전히 씻어 내지 못한 얼굴이었다. 김준이 김현의 어깨를 툭툭 쳤다. 무심한 손길이었기에 김현이 피식 웃어 버렸다.

분명히 자신은 욕심이 많았다. 온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질투심에 지헌을 힘들게 할지도 몰랐다. 그럴 바에는 친구로서 곁에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지헌은 맑은 얼굴로 제 곁을 그렇게 내줄 테였다. 내 마음만 정리하면 차라리 지헌도 자신도 편할지 몰랐다.

“강수하, 너는 그런 생각 안 해?”

제 머리를 정리하지 못한 김현은 강수하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강수하의 시선이 움직였다.

“돌아오기만 하면 좋다고 생각했어. 그냥 옆에만 있으면 좋겠다고.”

“나랑 같네.”

이유한이 웃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무것도 안 물어보고 화도 안 낼 거라고 생각도 했었고요.”

“근데?”

“근데 막상 만나니까 안 돼요. 화가 나고 내 지난 7년이 억울했어.”

강수하는 생각했었다.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 애가 무슨 일이 있었던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받아 줄 거라고, 충분히 기뻐하고 다시는 떠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그렇게 여러 번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한지헌을 만났을 때는 도대체 왜 떠나야만 했는지에 대한 서운함이 물밀 듯이 밀려왔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 괜찮다고 생각한들 그 말을 지킬 수 있을까. 그러니까 김현 너하고 똑같아. 자신 없어. 다시 그 7년 전으로 돌아갈 자신도…….”

한지헌은 분명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혹시라도 그게 또다시 반복된다면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지헌이는 친구로 지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잖아. 그냥 너희는 그렇게 해.”

문득 이유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척이나 심드렁한 표정이었기에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강수하가 무심결에 헛웃음을 쳤다. 저 태평한 얼굴이 이해되지 않았다.

“형은 그런 고민 안 해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듣고 있던 김준이 입을 열었다. 고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얼굴이었다.

“응.”

“어떻게요?”

“뭘 어떻게야? 난 지헌이랑 친구 안 해. 7년 전처럼 또 너희까지 다 만나겠다고 해도 난 상관없어.”

“와, 어떻게 그게 상관없을 수가 있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김준을 보며 이유한이 웃었다. 솔직히 김준은 그 어떤 것보다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 관계가 누가 보더라도 말도 안 되는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도 그리고 김현도 그 어떤 누구를 가져다 대도 이런 관계에 대해서 누군가 알게 된다면 타격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 조심스러웠고 더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단호한 이유한을 보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했던 제 머릿속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누군가 보기에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됐기에 더 조심하고 신중할 거라고 생각했던 이유한이 저렇게 단호하게 나오니 오히려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그만큼 좋으니까. 또 놓치기 싫으니까.”

“…….”

“7년 전에는 죄책감 때문에 나를 떠날까 봐 무서웠어. 근데 지금은…….”

“…….”

“내가 너무 좋아서 못 떠나게 만들 거야.”

눈웃음을 치는 이유한의 얼굴이 환해졌다. 마음을 정한 얼굴은 걱정이라곤 없었다. 단호한 말에 다들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지헌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 옆에서.”

“보살이 따로 없네요.”

“글쎄. 지금 당장이라도 너희들 없으면 저 방 안에 들어가고 싶은데, 보살인가?”

“아, 형!”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이유한이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러니까 빨리 너희 집에 가.”

“아, 미쳤나 봐. 그런 말하는데 어떻게 집에 가요?”

“어차피 예전처럼 안 돌아간다면 너희는 그냥 친구잖아. 이런 생각은 안 해 봤어?”

“……생각을 다시 해 볼게요. 진짜 싫다.”

김현이 진심으로 질색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 침묵은 금방 찾아왔다. 각자의 머릿속에서 미친 듯이 굴리고 있을 여러 가지 생각이 안 봐도 훤해서 이유한은 그저 웃었다.

7년 간의 부재. 제가 그 7년 동안 가장 걱정했던 건 제 마음이 아니었다. 오로지 한지헌의 마음.

혹시라도 나를 잊은 건 아닐까. 내가 싫어졌던 건 아닐까. 아직도 저를 기억하고 있는, 저를 그리워하고 있는 나를 부담스러워하지나 않을까. 하지만 아니었다. 지헌이는 여전히 그날, 7년 전의 그때처럼 사랑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뭐가 문제지? 아직도 나를 사랑해 주고 있는데 도대체 뭐가.

이유한은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사실 어차피 7년 전 그 관계를 반복하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결국 이 녀석들이야 지들이 알아서 깨우칠 테지만, 지나간 시간만큼 겁이 많아져 제 마음에 빗장을 치려 하는 한지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유한한테 가장 중요한 건 어차피 한지헌이었다.

***

“와, 이 새끼들. 진짜 아무도 안 갔어.”

이른 아침. 어디선가 풍겨 오는 죽 냄새에 눈을 뜬 유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 하나 돌아간 사람 없이 모두 있는 집 안을 보며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마치 제 집 처럼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 놓고 뭐 친구? 웃기고들 있네, 진짜.

제 집 부엌인 듯 한지헌 먹일 죽을 부산스레 만들고 있는 강수하도 어이가 없었다. 야, 누가 친구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냐? 아침 일찍부터 죽을 사 왔다고 해도 별나다고 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유한이 머리를 다시 한번 저었다. 어이가 없었다.

“가야 되는데 왜 가기가 싫을까?”

지헌이 잠들어 있는 방 앞을 기웃거리면서 김현이 안절부절못했다. 그 초조한 시선의 끝에는 이유한이 있었다.

“형은 회사 안 가요?”

“휴간데?”

“아, 그 휴가 대체 언제까지예요?”

“평생 쉬려고.”

“아아, 짜증 나.”

김준이 짜증스레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저는 곧 나가야 해서 더 안절부절못한 모양이었다. 아마도 제가 어제 장난스럽게 내뱉었던 말이 신경 쓰였던 거겠지. 아니, 친구의 연애사에 너희들이 그렇게 안달하면 안 되지. 차라리 어제 그런 말이라도 하지 말든지. 이건 뭐 바보들인가. 한심함에 이유한은 혀까지 찼다.

“형, 지헌이 일어나면 이거 꼭 먹여요.”

“어련히 먹일까. 야, 근데 이거 먹을 수는 있는 거지?”

“적어도 형이 한 것보다야…….”

“……그래.”

반박할 수 없는 말을 한 강수하가 지헌이 있는 방을 힐끗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곧 나가 봐야 하는 상황이라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안 가고 싶은데 그렇게까지 집에 남아 있으면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 같았다. 게다가 머릿속의 이성이 끝도 없이 소리치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하는 친구가 어디 있냐고.

“장우진 너도 가야 되잖아.”

“……하루쯤 빠져도 선배들이 해 주지 않을까?”

“그 하루에 네 이름도 빠지지 않을까?”

장우진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공모전 막바지인 탓에 안 그래도 거의 날밤을 새면서 작업 중이라 어제도 겨우 빠져나온 거였다. 사실 가야 되는데, 진짜 차마 발길이 안 떨어졌다. 장우진은 제 인생 최초로 이유한을 불신 가득한 시선으로 훑었다. 그 시선에 이유한이 헛웃음을 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형, 진짜 건드리지 마.”

“뭘 건드려.”

킥킥거리고 웃는 이유한의 웃음소리에 녀석들의 한숨 소리가 짙어졌다. 아, 그러니까 친구는 개뿔이라고.

마치 발에 족쇄라도 걸어 놓은 것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떼어 낸 다섯 사람이 현관 앞에서 방황했다. 그 앞에서까지 한지헌이 잠들어 있는 방문을 몇 차례나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유한은 그것을 모조리 무시하고 문을 닫으며 딱 한마디를 던졌다.

“고마워, 자리 비워 줘서. 한지헌 친구들.”

그것도 무척이나 해맑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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