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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재회 (13/36)

7장. 재회

“오빠, 안녕하세요!”

10시가 되기 10분 정도 남겨 두고 들어오는 혜원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일찍 오셨네요’ 인사를 건넨 혜원은 오늘도 밝은 얼굴이었다. 그에 나도 살짝 웃었다. 하지만 나를 따라 웃던 혜원이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오빠, 근데 하루 만에 얼굴이 더 상했네요?”

“어? 그래?”

“네. 어, 술 냄새. 오빠 어제 술 마셨구나.”

“냄새 나?”

어제 서준영과 만나 마신 술 냄새가 지금까지 나는 모양이었다. 많이 마시긴 했지. 별 대화도 없이 짧은 주기로 짠 하고 마시고, 짠 하고 마시고의 반복이었으니까. 나는 다시금 떠오르는 초록색 소주병에 진저리를 쳤다. 어젯밤 내내 거의 변기통을 붙들고 있었다.

“뭐, 조금? 제가 좀 후각이 예민해서!”

“그래? 아, 미안.”

“뭐가 미안해요. 괜찮아요.”

혜원은 빠르게 나를 지나쳐 탈의실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어제보다 조금 더 좋아 보이는 기분에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야구 봤어?”

“어? 어떻게 알았어요?”

“어제 사장님이 너 야구 보러 갔을 거라고 하더라고.”

“아, 진짜요? 어휴. 우리 사장님 나한테 관심 너무 많다니까.”

혜원이 기분 좋은 티를 내며 웃었다.

“어제 야구 대박이었어요. 완전 진짜 대박!”

“어디랑 어디 붙었는데?”

사실 야구에는 원래 관심이 없는 편이라 의무감에 나온 질문이었다. 애초에 야구 경기는 준이 때문에 보러 갔던 게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불현듯 마운드 위의 김준이 떠올랐다. 정말 멋있었는데. 집중하여 살짝 찌푸렸던 그 얼굴이 떠오르자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피었다.

“어? 오빠 무슨 생각해요?”

“응? 뭐가?”

“방금 진짜 엄청 예쁘게 웃었는데.”

“내가?”

“네! 이번엔 억지로 안 웃었는데?”

억지로 웃는 거 다 알고 있었구나. 나는 들킨 기분에 머쓱하게 웃었다.

“방금 무슨 생각했어요?”

“……별생각 안 했어.”

“첫사랑 생각이라도 했어요?”

첫사랑은 무슨. 어색하게 웃는 나를 혜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봤지만, 나는 그 시선을 외면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을 것 같았는지 금세 혜원이 말을 돌려 버린다.

“하여튼 어제 진짜 대박이었어요. 완봉 승이었어요. 한 점도 안 내줬다니까요.”

“와, 진짜.”

“네! 진짜 목 다 쉴 뻔했어요. 너무 좋아서. 얼마나 열정적으로 응원을 했던지!”

혜원은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준이도 그때 9회 다 던졌는데…… 엄청 멋있게 이겼었는데…….

“하여튼 오늘 기분 좋으니까 음료 하나 만들어 드릴게요! 뭐 드실래요?”

“흐음. 아이스…… 아메리카노?”

“어? 오빠 아메리카노 먹어요?”

“음. 오늘은 좀 먹고 싶어서.”

혜원이 입을 비죽였다.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기왕이면 배울 수 있는 걸 먹는 게 어때요?”

“아, 다른 거 먹을까?”

“됐어요. 샷이나 뽑아 봐요.”

“……만들어 준다며?”

“연습 몰라요. 연습?”

능청스레 웃는 녀석에 나는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컵에 얼음을 한가득 담고 있는 혜원을 보면서 나는 커피를 뽑는 데 집중했다. 그래, 연습해야지 뭘 얻어먹나. 아직 능숙하진 않지만 더듬더듬 내린 샷에 혜원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나름대로 잘했다는 건지, 자신이 담아 놓은 얼음 컵에 내 샷을 가득 부어 낸다.

“자요. 마셔요.”

“어, 고마워.”

“나는 프라프치노 먹어야지”

그러면서 또 싱글벙글. 그렇게 좋을까, 싶은 생각을 하며 멍청하게 혜원을 보고 있다가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쭈욱 빨아들였다.

“윽”

“왜요? 쓰죠?”

“…….”

엄청 쓰네. 강수하나 장우진은 되게 맛있게 먹었는데. 무심코 떠오른 얼굴에 한숨이 터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꾸만 녀석들이 떠올랐다. 그게 너무 시도 때도 없어서 그 잔상을 떨쳐 내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괜찮다고 생각했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휴. 아메리카노는 절대 안 먹을 것 같더라니.”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퍽 장난스러운 혜원의 말에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거든. 나 아메리카노 먹어.”

“거짓말하지 말아요. 사약 들고 있는 표정인데?”

혜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딱히 부정할 수 없는 말이라 괜히 들고 있는 아메리카노에 시선을 내렸다. 숨이 막혔다. 괜히 마셨다, 싶었다. 그저 나만 가지고 있는 추억으로 남겨 놓기에 녀석들은 이미 내게 너무 큰 존재들이었다. 내가 이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내가 모두를 그저 추억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바꿀까요?”

“괜찮아.”

내 표정이 퍽 안 좋았는지 혜원이 슬쩍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혜원은 굳이 두 번 묻지 않았다. 혼자 있는 자리가 아니라 다행이다. 일을 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혼자 있었다면 끝도 없이 가라앉았을 것이다.

“아, 오늘도 야구 하는데. 보러 가야 되는데!”

고맙게도 혜원이는 내가 깊은 생각을 할 틈도 없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었다.

“오늘은 일찍 가기 힘들까?”

“흐음. 그래도 그건 좀 민폐잖아요.”

나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하긴, 알바 시간을 또 빼면서 가는 것도 좀 힘들긴 하겠지.

“아, 오늘도 선발이던데, 김준. 오빠도 알아요? 김준 선수?”

시무룩해졌던 혜원이 갑자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

“김준 선수요. 투수. 제가 김준 선수 엄청 좋아하거든요. 오빠도 알죠? 엄청 유명한데!”

하지만 두 눈이 커진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순간 낯익은 이름에 떨린 손을 어렵사리 진정시켰다. 김준이라고 했지? 김준. 혜원이에게 들은 그 이름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차분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게임에 들어가기 전에도 그런 선수가 있었던가? 하지만 내가 야구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탓인지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겨우 진정시켰던 손이 덜덜 떨려 왔다.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묘한 생각이 차올랐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히 그건 알고 있었지만…….

“어, 글쎄. 혹시 사진 있어? 잘 기억이 안 나네.”

“네? 뭐 인터넷에 치기만 하면 나오는데. 잠깐만요.”

어렵사리 웃으며 꺼낸 말에 혜원이 제 핸드폰을 두드렸다. 알고 있다. 이건 그저 내 과대망상이다. 이곳은 현실이고 내가 김준을 만난 곳은 꿈속이었으니까. 그저 궁금할 뿐이다. 김준과 똑같은 이름을 한 투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그게 궁금했을 뿐이다.

“여기요. 엄청 잘생겼죠! 얼굴에서 완전 빛이 난다니까요!”

분명히 그럴 텐데…….

“김준?”

나는 혜원의 핸드폰을 다시 한번 자세히 봤다. 얼굴을 찌푸린 채 마운드에 서 있는 남자는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분명히…….

“김준이라고 했지?”

“네? 네…….”

“투수, 김준.”

“……왜 그래요?”

한참을 핸드폰을 바라보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내가 자리에 풀썩 주저앉자 혜원이 놀라 다가왔지만 괜찮다고 말할 여유도 없었다.

혹시 지금 여기도 꿈이야? 아니, 분명히 아닌데. 근데 어떻게 김준이 정말로 있을 수가 있어? 꿈도 아닌 현실에 어떻게 김준이?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오빠, 괜찮아요?”

“……어. 괜찮, 괜찮아.”

나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지도 게임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김준이 지금 내가 있는 현실에 어엿한 야구 선수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제 사장님이 꺼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분명히 어제 사장님은 김준이 고등학교…… 후배라고 말했었다.

“저, 혜원아.”

“네?”

“그, 사장님 친구분.”

애써 가다듬은 내 목소리에 혜원이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나를 마주했다. 혹시,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준이 고등학교 후배라고 했고, 사장님의 친구는 너무 잘생겼다고 했다. 사장님의 나이는 스물여덟. 나보다 딱 세 살이 많은…….

“친구분 이름이 어떻게 돼? 혹시 알아?”

“이름이요? 어, 뭐였지? 이 뭐였는데. 이…….”

“혹시…… 이유한?”

“어? 맞아요! 오빠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결국 내 얼굴을 감쌌다. ‘오빠 괜찮아요?’ 하는 혜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혼란스러웠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조차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우습게도 지금 이 현실에서 김준과 이유한을 마주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심장이 아프도록 뛰고 있었다.

***

일이 하나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덕분에 온통 실수투성이였다. 쏟고 떨어트리고 깨트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사장님은 2시쯤 카페로 출근했다. 그를 마주치자마자 이유한에 대해서 묻고 싶었지만 나는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이유한에 대해서 제게는 물어 놓고 사장님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보며 혜원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지만, 그래도 굳이 자신이 먼저 그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지헌아.”

“네?”

“컨디션 너무 안 좋으면 들어가.”

“아…….”

“몸 너무 안 좋아 보여서 안 되겠다.”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괜찮다고 내 어깨를 두드리는 사장님을 슬쩍 보며 이유한에 대해 지금이라도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이 현실에 이유한과 김준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나를 모를 수도 있다. 애초에 나는 꿈속에서 만난 거였고 저들은 원래 존재했던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그들을 알지만,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카페에서 나오자마자 핸드폰을 들었다. 김준, 그 이름을 치니 끝도 없이 녀석에 대한 기사와 글들이 쏟아졌다. 내가 알던 열여덟 살 그때의 얼굴은 아니지만 거의 그대로 스물다섯이 된 김준의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하고 싶어도 선뜻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들이 나를 모를 수도 있다는 불안감, 그리고 그럴 리 없겠지만 나를 기억한다고 해도, 그때의 그 애들이 맞다고 해도……. 만약 그렇다면 나는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떠난 사람으로 그들의 기억에 남아 있을 터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라져 버린 채 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이었다.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만약에 애들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내가 갑작스럽게 사라진 이후의 삶을 살았다면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김준. 이유한.”

하지만 어쨌든 확실한 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세계에, 게임도 뭣도 아닌 현실에 김준과 이유한이 존재한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다른 애들도 있다는 걸까?

애써 꾹꾹 눌렀던 눈물이 눈가에 차올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내가 너희를 만나러 가도 되는 걸까. 아니면 이렇게 모르는 척해야 하는 걸까. 도저히 답이 나지 않는 생각이었다.

벤치에 앉아 머리를 꾹꾹 눌렀다. 이런다고 해서 무언가 결론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두통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갑자기 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오빠 멀리 안 갔죠?]

발신자는 혜원이었다. 나는 눈가의 눈물을 닦아 내며 핸드폰을 들었다. 답장을 할까 말까 했지만 굳이 문자를 보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 손가락을 움직였다.

[응, 왜?]

[빨리 가게로 와요. 급해요.]

조금 당황스러웠다. 복잡한 머릿속을 채 정리하지도 못하고 일단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가 급한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내가 실수를 하고 온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끈대는 머리를 애써 누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가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던지라 내가 가게에 도착한 것은 문자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사장님이 보였다.

“어? 지헌이 너 왜 다시 와? 뭐 놓고 갔어?”

“아, 그…….”

“오빠! 제가 불렀어요! 이리 와 봐요!”

카운터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혜원의 손길에 나는 종이 인형처럼 당겨졌다. 무슨 상황인지 가늠하지 못하고 당기는 대로 끌려가는데 혜원이 다짜고짜 어딘가에 손가락질을 했다.

“어?”

“봐 봐요. 맞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나는 두 눈만 굴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당황스러움을 감출 새도 없었다.

“뭐 하냐, 너네.”

“아, 있어 봐요.”

“뭘 있어. 아, 잘됐다. 지헌아. 어제 말한 내 친구 아직 휴가 안 갔었나 봐. 놀러 왔어. 다시 온 김에 인사해. 야, 이유한! 우리 새 알바랑 인사해!”

나는 사장님의 말에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고장 난 기계처럼 혜원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앉아 있던 남자가 사장님의 부름에 천천히 일어섰다.

아…….

“너희 알바랑 왜 내가 인사를 해. 내가 사장……?”

순간 돌아선 이유한은 예전의 그 앳된 얼굴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렇게 천천히 돌지 않았을 텐데 이상하리만치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느리게 느껴졌다.

돌아선 이유한은 무표정이었다. 아주 약간의 귀찮은 기색도 함께였다. 그리고 이유한과 나의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알아본 건가. 나를 알고 있나. 기대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나를 옥죄어 왔다.

“……사장도 아니고.”

“야, 너 보러 오는 손님이 태반이란다. 우리 아르바이트생님이. 사장보다 더 중요해, 네가.”

“맞아요.”

“참나.”

혜원의 맞장구에 사장님이 헛웃음을 쳤다. 세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나는 집중이 되질 않았다. 그 와중에 이유한의 시선은 올곧게 나를 향해 있었다. 이게 나를 알아본 건지, 아니면 그냥 낯선 이에 대한 호기심인건지 도저히 가늠되지 않는 시선이었다.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느 쪽이 맞는지 몰라 선뜻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이렇게 마주하게 될 거라고 기대조차 하지 못했는데.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안 된다. 울면 안 돼. 지금 울면 진짜 이상해지는 거야. 나는 아프도록 내 손을 꼬집으며 조심스레 이유한을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내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이유한도 내게 까딱하고 인사를 건넸다. 역시 모르는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하니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그 어색한 분위기에 사장님이 머쓱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쪽은 내 친구, 이유한. 어제 말한 친구야. 자주 올 테니까 친하게 지내.”

“아, 네.”

“그리고 이쪽은 한지헌. 스물다섯이래. 잘해 줘라.”

“……나 손님이거든.”

“어쨌든.”

장난스럽게 웃는 사장님과 헛웃음을 치는 이유한을 번갈아 보다가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애꿎은 손만 괴롭혔다.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막상 마주한 이유한이 나를 모르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감정과 괴로운 마음이 동시에 충돌했다. 나를 모른다면 적어도 내가 갑자기 사라지는 그런 일들을 겪지 않았을 테니 다행이었다. 차라리 이게 다행일 텐데……. 복잡한 내 옆으로 혜원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오빠, 괜찮아요? 몸 안 좋은데 내가 괜히 부른 거 아니에요?”

분명히 아는 사람처럼 굴었음에도 막상 마주친 두 사람이 서로 모르는 듯 인사를 하니 혜원은 오히려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혜원은 대놓고 묻지 않았다. 대신에 말을 돌렸을 뿐이었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혜원을 보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괜찮아.”

“괜한 짓을 했나 봐요.”

에둘러 미안함을 표하는 혜원의 얼굴이 완전히 울상이었다. 괜한 짓. 아니, 괜한 짓일 리가 없다. 혜원이 이렇게 나를 불러 주지 않았다면 나는 결국 고민하고 고민하다 도망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마주치는 것조차 못 했을지도 모른다.

“아냐. 괜찮아.”

“어, 지헌아. 그만 들어가. 그렇게 이유한 얘기를 하더니 보여 주고 싶었었나 봐. 이해해.”

“그럼요. 이해하죠. 고마워, 신경 써 줘서.”

나는 혜원의 어깨를 툭툭 쳤다. 혜원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온통 내 신경은 이유한에게로 쏠려 있었다. 별다른 말없이 가만히 서 있는 이유한의 시선의 끝에 내가 있을까? 아니면 나를 보고 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나를 보고 있든 아니든 어차피…….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어, 그래. 푹 쉬고 내일 보자.”

“네. 혜원아 내일 봐.”

“네, 오빠.”

나는 사장님과 혜원이에게 인사를 하고서 남모르게 심호흡을 하곤 용기 내서 이유한을 똑바로 봤다. 덕분에 나를 보고 있던 이유한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저절로 마음이 아렸다. 저런 표정, 지은 적 없었는데.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고 대답조차 듣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이게 다행이었다.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된 것도, 이유한이 나를 모르는 것도.

내가 갑자기 너희들을 잃고 아팠던 마음을 너희들은 겪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니까 이건 진짜 다행이다.

나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카페의 문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힘주어 문을 열었다. 아마 그때 들려온 이유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길로 카페 밖으로 빠져나갔을 터였다.

“많이 아파요?”

“……네?”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오늘 컨디션 엄청 안 좋아 보여서, 안 그래도 집에서 쉬라고 보냈었다. 얼굴 엄청 안 좋지.”

사장님의 말에 이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라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냥 고개를 숙였다.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데려다줄까요?”

“네?”

“아프다면서. 데려다줄게요.”

“아니, 그러실 필요는…….”

“가요. 데려다줄게요.”

“아니, 저기……!”

하지만 이유한이 내뱉은 말은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다. 당황스러움에 고개를 들고 손사래를 쳤지만, 이유한은 내 거절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자기 자리에 있던 음료를 집어 들었다. 이유한이 들고 있는 것에는 차 키도 있었다.

아, 이유한이 차를 타고……. 바로 얼마 전의 이유한과 지금 내 눈앞의 이유한 간의 새삼스러운 괴리감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도움을 청하고자 혜원을 봤다. 말려 달라는 의사 표시였다. 나는 이런 상황을 바란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혜원은 내 시선을 잘못 이해한 모양이었다. 혜원이 손을 동그랗게 말아 쥐더니 입 모양으로 파이팅을 외쳤다. 아니, 왜 파이팅이 나오는데?

“나 간다.”

“진짜 가?”

“어.”

“바로 휴가 가냐?”

“글쎄.”

이유한이 나를 힐긋 보고는 먼저 카페에서 나섰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일단 인사를 하고 카페 밖으로 나섰다. 카페의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차에 이유한이 차 키를 누르니 삑- 하는 소리와 함께 헤드라이트가 깜빡거렸다.

나는 쭈뼛거리며 운전석으로 걸음을 옮기는 이유한을 보고만 있었다. 심장이 쪼그라들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저는 그냥 알아서 갈게요.”

“타요.”

“아니, 저기…….”

“어차피 일어날 생각이었고 얼굴도 안 좋은데 그냥 타요.”

어렵게 내뱉은 말에도 이유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누군가가 나를 찌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이 시렸다.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가 알던 이유한이 아닌 것 같았다.

네가 어른이 됐다면 저렇게 어른이 됐을까? 아니, 내가 알던 이유한은 밝았고 웃음이 많았고 늘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차에 올라탔다. 솔직히 말해서 이유한이 내가 알고 있던 그 이유한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해도 나는 그의 말을 완강하게 거절할 수 없었다.

“집이 어딘데요?”

“어, 이 앞이긴 한데.”

내 어물거리는 대답에 이유한이 능숙하게 차를 움직였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심장 소리가 너무나도 커서 이유한한테까지 들리지 않을까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차는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차 안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가끔 어디로 가면 되느냐, 이유한이 물었고 나는 그 물음에 답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운전하고 있는 이유한을 힐끗힐끗 몰래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이유한의 얼굴이 낯설었다. 그렇게 그리웠던 얼굴인데 편하게 볼 수 없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차가 익숙한 골목에 들어섰다.

“여기서 세워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였다. 내가 입을 여니 이유한이 나를 보는가 싶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집이 이 골목이에요?”

“아니, 그건 아닌데 좀만 더 들어가면 되고…….”

“어디로 들어가면 되는데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파 보여서 베푸는 친절이라기에는 너무나 불친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유한은 물러설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여기에서 내리는 것을 포기하고 우리 집으로 안내했다.

그에 다시 한번 움직인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앞에서 멈춰 섰다. 차가 세워지자마자 메고 있던 벨트를 풀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하는 나를 이유한은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어쩐지 나는 느려진 손을 움직이며 차 문을 잡았다. 아주 조금만 더 이유한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좋겠다. 아주 잠시만 더. 나를 모르는 녀석을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아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온다고 했으니까, 그때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속에 들어차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서 다독거렸다.

“……어?”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차 문을 연 순간 갑작스레 이유한이 조수석의 차 문을 닫았다. 열렸다가 쾅 하고 닫힌 문에 당황한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유한을 바라봤다. 방금까지의 무표정한 얼굴 대신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이유한이 보였다.

“왜, 왜…….”

“한지헌 씨.”

“네?”

“지금 들어가면 내일 또 출근하는 거 맞죠?”

“아, 네?”

“그러니까 내일도 카페에 있냐고요.”

여전히 찌푸린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 나는 입만 벙긋거렸다. 이유한이 한숨을 내어 쉬었다.

“말해요. 내일도 출근해요?”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갑작스럽고 맥락 없는 질문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음에도 이유한은 여전히 문을 잡고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거의 코앞에 있는 얼굴에 나는 숨을 참았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유한은 여전히 문을 잡고 있었고, 나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문으로 손을 뻗었다.

“아. 저, 그럼 저는 이만…….”

하지만 이유한은 문을 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왜 이러는 거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도저히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나는 가만히 문만 잡고 있었다. 몸은 차 시트에 완전히 붙은 채였다.

“지헌 씨.”

“네?”

“한지헌.”

“……네?”

이유한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또 사라질 거면 내리지 마.”

“……아.”

“너 집에 못 가. 내리지 마. 불안해서 이렇게 못 보내겠어.”

이유한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 이유한의 눈이 흔들림 없이 나를 마주했다. 그에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기억……하는 거야? 이유한, 너 지금 나 기억하는 거야? 묻고 싶었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이유한의 일렁이는 눈이 선명했다. 아니, 사실은 굳이 내가 입을 열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선명했던 얼굴이 점차 뿌옇게 흐려졌다. 나는 이유한을 제대로 보고자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어느새 내 눈에 눈물이 고였던지 깜빡임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대신에 다시 한번 이유한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이유한…….”

“왜 나 모르는 척해? 응? 지헌아? 아니, 괜찮아. 이유가 있겠지. 그래. 네가 모르는 척해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 근데 나 두 번은 싫어. 그러니까 그냥 가지 마. 여기 있어.”

나는 맹세코 이유한이 나를 모르는 척해 주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픈 듯 일그러진 얼굴에 그런 말을 할 여유조차 들지 않았다. 어른의 얼굴을 한 이유한이 눈앞에 있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시간을 보낸 거야? 내가 사라진 7년을……? 완전히 그 세상이 사라진 게 아닌 거야? 나는 믿기지 않는 마음에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유한의 얼굴에 채 닿기도 전 거둬 내려 했다.

어떻게 된 건지도 알 수가 없는데 일단 이유한을 만난 게 너무나도 벅찰 만큼 좋아서 무심코 뻗은 손이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내가 갑자기 사라지고 7년이나 지난 다음이라면, 내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도 괜찮은 걸까?

아니, 아니다. 나는 일단 사과를 해야 했다. 그러니까 내가 사라진 세계는 나 없이도 움직였다고 하면, 그러면 내가 갑자기 떠났다는 것을 깨달은 채 7년을 보냈다는 말이 된다. 나처럼 누군가를 잃은 이 마음을 지니고 아주 오랜 시간을.

마주한 두 눈이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심장이 아파 왔다. 내가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뻗은 손이 차마 이유한에게 닿지 못하고 멀어졌다. 하지만 차 문을 잡고 있던 이유한이 내 손을 잡아 제 얼굴로 가져왔다. 이유한의 뺨에 결국 내 손이 닿았다. 어느새 눈물에 젖은 뺨이 안쓰러웠다.

“유한아.”

“왜 갔어. 왜 없어졌어. 왜 그렇게 갑자기…….”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아픈 얼굴이 아릿하게 느껴졌다. 나한테는 고작 한 달이었다. 고작 한 달을 살면서 숨이 막힌다고, 너무 힘들다고 매일을 울고 괴로워했다. 너에 비해 그토록 짧은 시간을 보냈어도 이렇게 괴로웠는데. 너는, 너희들은 나를 그 오랜 시간 동안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그래서 이렇게 아프게 울고 있는 걸까.

“미안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나를 원망하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들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유한은 그저 울기만 했다. 이유한이 내 손을 잡고 어깨에 얼굴을 묻어 왔다. 그리웠던 향이 내게 끼쳤다.

정말 이유한이다. 들썩이는 어깨를 가만히 토닥이며 나도 이유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웠어, 보고 싶었어.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꺼내지 못한 말이 입 안에 맴돌고만 있었다.

***

“안 믿겨.”

한참을 울던 이유한이 겨우 진정을 하고서 내뱉은 말이었다. 나 또한 눈물 젖은 얼굴로 이유한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여전히 우리는 차 안이었다.

“응, 나도.”

사실 정말 안 믿기는 쪽은 나였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도 알 수가 없는데 일단은 이유한이 내 앞에 있다는 게 속없이 좋았다. 잡고 있는 이유한의 손이 따뜻했다. 게임 속이라고 생각했던 세상이 아닌 현실에 있는 이유한이었다. 현실 속의 이유한. 그게 어찌 된 일이건 깊게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나는 이유한의 품에 안겼다. 자연스레 내 등을 감싸 오는 손이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또 깨어날까 두려웠다. 또 꿈이었다고 깨어나 버리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겨우 다잡았던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릴 것 같았다.

“많이 보고 싶었어.”

이유한은 여전히 다정했다. 그 목소리가 꼭 괜찮다고,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 말해 주는 것처럼 느껴져 다시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한국에 있을 거라고 생각 안 했었는데.”

이유한이 중얼거렸다. 그게 꼭 꿈을 꾸는 것 같은 목소리라 나는 그를 껴안은 손에 더욱 힘을 줬다.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미안해.”

“아니야.”

말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이유한의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하나도 안 변했네.”

“나 되게 많이 변했는데.”

내 말에 이유한이 바로 고개를 도리질 치며 부정했다.

“지헌이 너야말로 하나도 안 변했다.”

“…….”

“근데 왜 이렇게 말랐어. 안 그래도 말랐었는데.”

이유한의 손이 내 허리에서 날개뼈 부근으로 움직였다. 그 손길이 간지러워 몸이 움찔 떨렸다. 다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유한아.”

“그만 미안해해.”

“어떻게 그래.”

“……그래, 그럼 계속 미안해해. 그리고 절대 다시는 그러지 마. 알겠지?”

“응.”

사실 어떻게 내가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었는지 네가 왜 내 앞에 있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지만. 나는 그런 복잡한 생각은 모두 다 털어 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지금 네가 여기에 있으니까, 그거면……. 그거면 충분했다. 안타깝게 떨리는 이유한의 손끝이 다시 내 등을 토닥였다.

“미안해.”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절대 없어야 하는 일이다. 나는 몇 번이고 다짐하듯 생각했다. 나를 세게 안은 손길에 우리는 더욱더 가까워졌다. 7년이나 지났는데, 너는 왜 나를 잊지 못했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집에 가지 마.”

“……어?”

“싫어. 떨어지기 싫으니까 집에 가지 마. 아직 너 못 믿어.”

아주 조금은 장난스러운, 하지만 진심 어린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한 내가 잠시 몸을 떨어트리려 했지만, 이유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싫어. 떨어지기 싫다니까.”

“유한아…….”

“또 없어지면 어떡, 아니. 아니야, 싫어. 들어가지 마.”

칭얼대는 목소리에 당황스러워졌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래서 쉽게 밀어 낼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대신 이유한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안 사라져. 정말이야.”

“……아냐, 그래도 안 들여보낼 거야.”

쿵쿵 뛰는 심장이 분명히 이유한에게도 느껴질 터였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별수 없지. 그 대답에 절대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이유한이 내 품에서 떨어졌다. 어, 할 새도 없이 동그래진 이유한의 눈이 가장 먼저 보였다.

“진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유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근데 집에 잠깐 들어갔다 올게.”

“…….”

하지만 시무룩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이유한의 어두워진 얼굴을 쓰다듬었다.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거야. 요즘, 음. 좀 그럴 만한 일이 있어서. 갑자기 안 들어가면 많이 걱정하실 것 같아서 그래.”

“……응.”

근 한 달은 내게도 지옥 같은 날들이었지만,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는 나를 지켜보는 엄마의 심정도 나 못지않았을 터였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나를 보며 진심으로 기쁜 마음에 눈물까지 흘리던 엄마였다.

“괜찮지?”

“……같이 들어갈까?”

내 물음에도 여전히 불안을 가득 담은 눈동자가 쓰리게 다가왔다. 나는 가만히 얼굴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뭐 할지나 생각하고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까.”

이유한은 마지못한 얼굴이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얼굴을 보다 차 문을 다시 한번 당겼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이유한이 금세 내 팔을 붙잡았다.

“지헌아.”

“응.”

“이거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의미 모를 소리를 하나 싶더니 이유한은 내 핸드폰을 가져갔다. 그러더니 꾹꾹 제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기에 나는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었다.

“여기.”

“……갔다 올게.”

“응.”

그제야 조금은 안심한 듯 보이는 이유한을 두고 나는 차에서 내렸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바깥은 밝았다. 차 안에서 나를 보고 있는 이유한에게 한번 웃어 보인 후에 나는 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이 열리자 엄마가 단숨에 현관문 앞까지 뛰어나왔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 술병 나서 일찍 끝내 줬어.”

“그래, 몸 안 좋으면 좀 쉬어.”

“어, 엄마. 나 친구가 와서 나가 보려고 하는데.”

“그래?”

“응. 아마 내일 아르바이트 끝나고 들어올 것 같은데.”

내 말에 예전 같았으면 화를 냈을 엄마가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힘없이 돌아서는 모습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 상황이 힘들다 하여 못 보고 있었던 엄마의 뒷모습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대로 다가가 돌아선 엄마의 등을 껴안았다.

“얘가 왜 이래.”

엄마는 갑작스런 내 행동을 타박하면서도 털어 내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엄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요.”

“…….”

“다시는 안 그럴게요.”

“…….”

엄마는 말이 없었다. 떨리는 어깨가 금세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정말이야. 다시는 안 그럴게.”

“응. 그래.”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나는 가만히 엄마를 토닥였다.

“그러니까 예전처럼 화내도 돼.”

“내가 무슨 화를 냈다고…….”

“예전 같았으면 술을 그렇게 먹고 들어와 놓고 또 외박을 하겠다는 거냐고 화냈을 거잖아.”

내 능청스러운 소리에 그제야 엄마가 헛웃음을 쳤다. 그날 이후 정말 오랜만에 듣는 엄마의 웃음소리였다.

“……정말 미안해, 엄마.”

“됐어. 지헌아, 엄마 괜찮아.”

정말 괜찮아. 속삭이듯 몇 번이고 반복하는 말을 가만히 들으며 엄마를 토닥였다. 한참을 그렇게 안겨 있던 엄마는 친구가 기다리겠다고 어서 가 보라고 하며 웃음 지었다. 조금은 편해진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엄마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내 방으로 들어섰다. 옷을 갈아입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땀 냄새도 나는데 씻는 게 낫지 않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쫓기듯 이 방을 나갔었는데. 갑자기 내 방에 색깔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온통 회색빛이었는데.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가장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거울 앞에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이런 꼴로 만났었나. 그래도 아르바이트 시작하기 전에 머리라도 잘라서 정말 다행이라는 그런 생각마저도 들었다.

나는 슬쩍 창문 밖을 봤다. 여전히 서 있는 이유한의 차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빨리, 나가야 해. 기다리겠다. 나는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

하지만 너무 발걸음이 급했던지 쿵 소리와 함께 책상 서랍에 나는 발을 찧어 버렸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악 소리를 내뱉으며 발을 쥐었다. 그 아픔에 눈물까지 찔끔 나올 정도였다. 그 순간 탁 소리와 내 눈앞에 CD 케이스가 떨어졌다.

“…….”

아픈 발을 주무르며 보니 떨어진 것은 학원 로맨스 CD 였다. 나는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가만히 그것을 보았다. 갑자기 발에서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CD를 들어 다시 제자리로 올렸다. 의문투성이인 상황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걸까.

이유한, 그리고 김준이 현실에 있다. 어쩌면 다른 애들도 이 현실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근본적으로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가 게임에서 나온 것은 한 달 하고도 거의 일주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유한은 7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뒤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게다가 마지막으로 실행했던 CD에서 나오던 100%라는 안내창은 뭐였을까.

여러 의문이 머릿속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침 지이잉거리며 핸드폰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화면에 뜬 것은 방금 전 저장했던 이유한의 번호였다. 그제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혹시라도 전화를 늦게 받으면 걱정할까 싶은 마음에 다급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유한아.”

-아, 그게…….

“나 지금 내려가.”

-응. 알겠어.

나는 통화가 종료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 일단 지금은 이유한이 내 눈앞에 있으니까. 지금 당장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머니께 ‘다녀올게요’ 하고 인사를 건네고 집 밖으로 나가니 어느새 밖으로 나왔는지 차에 기대어 서 있는 이유한이 보였다. 내가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 불안한 빛을 띠던 이유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미안해. 늦었지.”

“아냐.”

녀석이 손사래를 치며 웃더니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타라고 눈짓을 했는데 왠지 미묘한 기분에 나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내가 조수석에 타자 이유한이 차 문을 닫더니 운전석으로 금세 자리 잡았다.

“뭐 하고 싶어?”

“음.”

내 물음에 이유한이 두 눈을 살짝 굴렸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너랑 같이 있을 수 있으면 그게 뭐든 상관없어.”

그 웃는 얼굴에 심장이 또다시 날뛰었다. 원래 내가 알고 있던 이유한인데 어째서 더 마음이 이렇게 날뛰는지, 저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일단 밥부터 먹을까? 밥 먹었어?”

“아니.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한번 씩 웃는 얼굴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못 볼 거라고 생각했던 얼굴이 눈앞에 있으니 더더욱 그랬다. 운전하는 내내 이유한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뭐가 그리 좋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가 내 광대도 어느새 아플 정도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 안은 적막할 새가 없었다. 궁금한 게 많았던지라 이것저것 묻다 보니 어느새 거의 목적지에 다다랐다.

“그럼 휴가야?”

“응. 일주일.”

“엄청 좋은 회사네.”

시답잖은 이야기를 해도 기분이 좋았다. 아마 나와 별반다르지 않을 이유한은 기어에 있던 손을 들어 내 손을 잡아 왔다. 나에겐 무척 익숙한 손이었다. 그러나 이유한에게는 7년 만에 붙잡았을 손이라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럼 이번 휴가는 뭐 하려고 했어?”

“음, 원래는 여행을 가려고 하긴 했는데…….”

이유한이 나를 보고 한번 씩 웃었다.

“안 가도 될 것 같아.”

그리고 덧붙인 말이었다. 그 여행이라는 말에 무심코 사장님의 말이 떠올랐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들었던 그 말.

“네가 매번 미국으로 휴가 가는 거야?”

“……서경호가 그런 말을 했어?”

“응, 매번 미국으로 간다고.”

“아, 그래?”

“응.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왜 항상 미국으로 가는 거야? 사장님이 너 거기에 애인 숨겨 놓은 거 아니……냐고, 했는데…….”

장난스럽게 사장님과의 대화를 말하려던 나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말꼬리를 늘였다. 멍청한 눈으로 이유한을 바라보니 슬쩍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웃어 보인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닐 텐데. 왠지 조심스러운 질문을 나는 해도 되는지 아닌지를 고민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설마, 미국 땅이 얼마나 넓은데……. 내가 미국에 있다는 말 때문에 갔을 리가.

“맞아.”

“어?”

“너 때문에 미국으로 간 거야.”

“……나 아직 아무것도 안 물어봤는데.”

“그냥 그런 생각하는 것 같아서.”

이유한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내 얼굴은 무섭도록 굳어 가는 게 느껴졌다. 나 때문에 갔다고? 매번 휴가를 미국으로 갔던 게 나 때문이었다고?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너는 도대체, 또다시 울컥해지는 기분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가 너는…….

“너를 찾으러 간 건 아니었고 그냥 혹시라도 언젠가 너를 우연히라도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작은 기대 같은 거?”

“…….”

대수롭지 않게 하는 말에도 나는 일그러진 얼굴을 도저히 펼 수가 없었다. 심장이 울리는 소리가 귓가에까지 생생하게 울렸다.

“미안해.”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이유한은 ‘그런 소리 하지 말라니까’ 하면서 웃었지만, 나는 도저히 그를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이유한은 결국 머쓱하게 제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

“……그렇게 미안하면 뽀뽀라도 한번 해 줄래?”

이유한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제 볼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따라 웃지도 못하고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이유한은 예전과 똑같이 나를 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친한 친구가 아니라 그때의 연인처럼…….

“무슨 생각해?”

“……어?”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심각해, 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유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니 어쩐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너는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렇게 시무룩한데?”

“나는 네가 그렇게 생각 많은 표정하고 있으면 무서워. 그냥, 예전에도 가끔 그런 얼굴이었으니까…….”

아주 조금은 조심스럽게 이유한이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이유한을 보기만 했다.

그래, 그때도 생각이 많았다. 특히 게임 속 기간, 그러니까 6월 말이 될수록 더더욱 자주 그렇게 혼자 생각을 했었다. 멍하게. 나는 애써서 입꼬리를 당겼다.

“뽀뽀를 할까 말까, 생각 중이었어.”

“……거짓말 못하는 것도 여전하네.”

여전히 불퉁한 얼굴이었다.

“진짠데.”

“그래서 결론이 뭔데?”

“응?”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빨간불. 신호에 걸린 차가 부드럽게 멈췄다. 동시에 이유한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래도 될까? 내가 전처럼 너한테 똑같이 굴어도 되는 걸까?

여전히 복잡한 생각이 가득했지만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그런 걱정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유한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빠르게 떨어졌다.

“할 거야.”

“……아.”

이유한은 멍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진짜 할 거라고 예상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그때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바로 뒤에서 빵, 하는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이유한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 진짜…….”

“왜, 뽀뽀해 달라고 했잖아.”

“응? 어, 알지. 좋아서 그렇지.”

곧 능청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만.”

“응?”

“그렇게만 웃어 줬으면 좋겠어.”

“…….”

“떠나고 싶어서 떠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

“…….”

“나는 이제 다 괜찮으니까 예전처럼 그렇게 나 보면서 예쁘게 웃어 줘. 응?”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인지 차는 부드럽게 멈춰 섰다. 이유한이 다시 내 눈을 마주했다. 하지만 이유한의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 무게와 네 무게가 동등할 수 있을까. 나는 고작 한 달, 너는 7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는데. 근데 왜 너는 여전히 내게 이렇게 따뜻할까. 아픈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아 내며 이유한을 마주 봤다.

“응.”

네가 그렇게 해 달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

적막한 집 안, 이 집에서 울리는 소리라고는 이유한이 들어간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뿐이었다. 나는 앉지도 가만히 서 있지도 못하고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이유한의 집이었다. 그것도 이유한이 혼자서 살고 있는 집. 나는 결국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소파에 몸을 묻고 앉았다. 밥을 먹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덥다며 욕실로 들어간 이유한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 미치겠네.”

한번 물밀 듯이 밀려온 긴장감은 좀체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유한이 같이 있자고 말했을 때, 그리고 그에 대답을 했을 때 이렇게 둘이서 집 안으로 들어온 상황은 생각하지 않았던 내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저 당장 이유한을 만났다는 게 너무 좋아서, 그래서…….

나는 머리를 빠르게 저었다. 적막한 실내에 물소리만 들리니 마음이 간질간질한 탓에 무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다 테이블 위에 올려 있던 리모컨을 발견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들어 올렸다. TV 소리라도 들리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적막했던 실내에 TV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키워 봐도 소용없었다. 물소리는 내 귓가에 잘만 들려왔다. 미치겠다, 진짜. 발만 동동 굴렀다.

그 순간 갑자기 욕실에서 물소리가 멈춰 들었다. 아, 끝났나 봐. 나는 발버둥을 치고 있던 몸을 일으켜 뻣뻣하게 앉으며 사실은 하나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TV의 채널을 돌렸다. 뭐라도 보고 있었던 척, 자연스러운 척을 하고 싶었다.

“……어?!”

하지만 방금까지도 온통 욕실 문으로 쏠려 있던 내 정신은 의미 없이 돌아가던 TV의 한 채널에서 빠르게 돌아왔다. 나는 빳빳하게 세우고 있던 몸을 멍하니 일으켰다. 순간 손에 힘이 풀린 탓에 리모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둔탁한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뭐 해?”

타이밍 좋게 이유한이 욕실에서 나왔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다가오는 이유한을 보고 나는 입만 뻐끔거렸다. 그러고는 멍청하게 말도 하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TV를 가리켰다. 내 행동에 의아한 얼굴을 한 이유한이 성큼 걸어와 내가 보고 있던 TV로 시선을 돌린다.

“아아.”

무심한 반응이었다.

“뭐, 뭐야?”

“뭐가?”

“아니, 왜 TV에……!”

너무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나를 되레 이유한이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몰랐어?”

“어?”

“……몰랐구나.”

그럴 줄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이유한이 대수롭지 않게 제 머리를 털던 수건을 세탁실에 넣어 두고는 이쪽으로 다가와 소파에 앉았다. 나는 그런 이유한을 보다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설명이 필요했지만 이유한은 무심하기만 했다.

“김현이 왜 TV에 나오고 있어?”

결국 나는 이유한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TV속에 나오고 있는 남자는 분명히 김현이었다. 예전에 자주 보던 토크 쇼 방식 예능 프로그램의 게스트인 것 같았다. 나는 당최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고 있었지만 이유한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현이 연기해, 배우.”

“……진짜?”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전혀 몰랐다는 표정을 짓는 내가 더 놀라운 모양이었다.

“몰랐어…….”

여전히 얼빠진 얼굴을 한 내 머리카락을 이유한이 웃으면서 흩트렸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살았어? 김준이 야구 선수 된 건 알아?”

“아, 아아. 그거 아까 혜원이한테 들어서…….”

“우와, 진짜?”

그걸 오늘에야 알았다는 사실에 이유한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날 이후 7년이 흘렀으니 모두들 각자 자기가 하려 했던 일들을 하며 살고 있겠지. 만약 이 세계에 녀석들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렇게 생각은 했었지만 김현은 너무나도 의외였다. 정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이었다.

“4년 전엔가 데뷔해서 갑자기 엄청 유명해지더라고. 지금은 거의 얼굴도 못 봐. 너무 바빠서.”

“와.”

“근데 정말 몰랐다는 것도 놀랍다. 계속 미국에 있었어?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거야?”

멍청한 내 얼굴을 보며 이유한은 자연스레 내 지난날을 물었다. 하지만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 내가 미국으로 떠난 걸로 알고 있었지. 나는 조금은 쭈뼛거리는 모양새로 이유한을 마주했다.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이전의 현실과, 지금의 현실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바뀐 건지. 게임이 현실이 된 건 어떤 부분인지. 나조차도 이해하지 못한 상황을 이유한에게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당연히 게임 이야기는 할 수 없었고, 모두 꿈이었다고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그게 게임인지 꿈인지, 대체 뭐였는지도 알 수 없으니까.

“말하기 어려우면 안 해도 돼.”

내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자 다행히도 이유한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에 그제야 안심한 듯 웃으니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긴다.

이유한은 자기가 많이 변했다고 했지만, 내가 본 녀석은 변한 구석이 없었다. 미안할 정도로. 나는 이번만큼은 무어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미안함에 얼굴을 찌푸리고 이유한의 품에 안겼다.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리며 녀석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여전히 TV 속에서는 김현이 나오고 있었다.

“요즘 저 쌍둥이 난리도 아니지.”

“그래?”

“응. 김준은 투수에서 거의 탑, 김현은 배우에서. 근데 그 둘이 쌍둥이라고 하니까 난리도 아니었어.”

“아아.”

“잘생겼다고 난리더라. 그냥 흔한 얼굴 같은데.”

무심한 듯 중얼거린 말에 나는 그제야 웃음을 터트렸다. 흔한 얼굴. 정말 이번은 눈곱만큼도 동의할 수 없는 말이었다.

“흔하진 않지.”

“흐음.”

“잘생겼잖아.”

이유한이 제 품에서 나를 떼어 냈다. 갑작스럽게 이유한과 눈을 마주친 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갑자기 진지해진 얼굴에 나는 두 눈을 굴렸다.

“나는?”

“응?”

“나는?”

하지만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내뱉은 말은 바로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싱거웠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잘생겼지.”

“진짜?”

“네가 우리 카페 먹여 살린다던데.”

이유한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혜원의 이야기에 살을 붙여서 장난스럽게 말하니 그가 배시시 웃었다. 확실히 내가 오버한 건 아닐 것 같은 게 이런 얼굴로 카페에 앉아 있으면 지나가다가도 들어갈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패널들의 말에 차분히 대답하며 웃음 짓고 있는 김현을 바라봤다. 예전보다 차분해진 것 같은 말투와 더 잘생겨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이유한은 내 뒤에서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는 간지러운 듯 웃으며 다시 TV의 화면에 집중했다.

[김현 씨, 예전에 인터뷰에서 첫사랑에 대해서 얘기한 적 있었잖아요?]

[그랬죠.]

[그 얘기 좀 자세히 해 주세요. 그때 로맨틱하다고 얼마나 난리가 났었는데.]

“첫사랑?”

나는 키득거리고 웃었다. 김현의 첫사랑이라, 왠지 흥미가 당기는 내용이었다. 이유한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너 쟤가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웃는 거야?”

“응? 누군데?”

“와, 너는 진짜…….”

어이없는 눈을 한 채로 이유한이 웃었다.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그렇게 로맨틱한가요? 하하. 별 이야기 아니었는데.]

[아직도 못 잊으신 거 아니에요?]

[처음으로 뭐든 다 해 주고 싶을 만큼 좋아했는데……. 너무나도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그래서 기억에 더 남는 것 같아요.]

TV 속에서 김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뒤돌아 이유한을 마주했다.

“……나?”

“참나.”

이유한이 헛웃음을 쳤다. 아, 나는 그제야 탄식을 내뱉었다. 당연히 내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이걸 보며 웃던 나를 보고 이유한이 어이없어한 것도 갑자기 이해가 됐다.

[뭘 하고 사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아직도 너무 궁금하네요.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어쩐지 무언가를 기억해 내는 듯 차분해진 목소리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 나보다 좀 더 전에, 그러니까 다른 사람일 줄 알았어.”

“너무한다. 김현 서운하겠어.”

장난스러운 말투에 나는 민망하게 웃었다. 내가 첫사랑이었구나. 어쩐지 마음이 일렁이고 부끄러워졌다.

[지금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음. 아마도요.]

꺄악, 하는 주위 방청객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첫사랑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가 가득한 대답이 여심을 흔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되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왜 나 같은 거 하나 못 잊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거라니.”

“뭐 하나 잘한 거 없는데. 나같이 나쁜 놈이 어디 있다고.”

“네가 어디가 나빠.”

“나빠. 유한아, 알잖아. 나 때문에 힘들었잖아. 근데 너희는 왜 나를 추억으로 가지고 있어. 나쁜 기억으로 가지고 있었어도 나는 아무런 할 말이 없는데.”

힘없이 내뱉는 말에 내 허리를 감싸고 있던 이유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웃고 있는 김현의 얼굴이 예전에 내가 봤던 그 해맑은 웃음이 아니라 더 마음이 아렸다. 차라리 그딴 새끼, 짜증 난다고 바로 잊어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이유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꺼 버린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네가 왜 나쁜 기억이야.”

“……나는 갑자기 사라졌고.”

“그리고 이렇게 돌아왔고, 지금 내 옆에 있잖아.”

“7년 동안 나 원망 안 했어?”

“…….”

무척이나 단호하게 말하던 이유한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다시 그 단호한 말투가 들려왔다.

“어떻게 원망을 안 했겠어. 그때는 너도, 나도, 우리 다 어렸는데.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 그냥 이렇게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

“그렇게 됐으니까.”

울컥 쏟아진 눈물이 그새 뚝뚝 흘러내렸다. 어느새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싼 손이 눈가를 살살 쓸었다. 떨어지는 눈물도 부드럽게 닦아 냈다. 두 눈이 마주치고 그렇게 한참 동안 이유한은 나를 달래고만 있었다. 한번 터진 눈물이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애들 보고 싶지.”

나를 가만히 보며 쓰게 웃은 이유한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놀라 크게 뜬 눈 사이로 그새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뚝뚝 떨어지네.”

다시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 낸 이유한은 조심스럽게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가 떨어졌다. 그러고는 내 목에 얼굴을 묻으며 나를 껴안았다. 그대로 폭삭 안긴 나를 이유한이 번쩍 들어 제 다리 위로 올렸다. 갑작스레 녀석의 다리 위에 마주 보고 앉게 되어 버렸다.

나는 당황스러움에 두 눈만 동그랗게 뜨고 그를 마주했다. 아무리 살이 빠졌어도 가볍진 않았을 텐데 나를 들어 올렸던 이유한은 퍽 태연한 얼굴이었다.

“어, 어. 유한아.”

“자꾸 울면 뽀뽀 계속할 거야.”

이유한은 장난스레 말했지만 진심인 듯 내 뺨을 잡고 있었다. 나는 도르륵 눈을 굴렸다.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어, 뽀뽀한다고 했더니 안 울어. 서운하게.”

하지만 짐짓 서운한 체를 하며 입술을 비죽거리는 모습에 나는 결국 웃고 말았다.

“이제야 웃네. 바보가.”

마치 내가 웃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유한은 곧장 나를 끌어안았다. 방금 씻은 탓인지 좋은 향이 훅 끼쳐 왔다. 미안함에 울렁이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애들 부를까?”

내 등을 살살 어루만지며 다시 이유한이 입을 열었다.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보고야 싶지. 정말 보고 싶지. 하지만…….

“응?”

이유한이 다시 한번 재촉했다. 너무너무 보고 싶었는데 애들도 나를 보고 싶어 할까? 복잡한 머릿속에 나를 향해 원망을 쏟아 내는 누군가의 얼굴이 상상됐다. 당연히 받아 내야 하는 원망인데, 생각만 해도 마음이 찌릿찌릿 아려 왔다.

“안 되겠다.”

이유한이 나를 제 품에서 떼어 냈다. 당황한 내 얼굴을 한번 보고는 내 목 뒤로 깊숙이 손을 넣었다. 훅 들어온 손길에 몸이 움찔거렸다. 이유한이 그길로 나를 끌어당겼다. 금세 이유한과 입술이 맞닿았다.

“으, 음…….”

이유한은 내 허리를 꽉 안아 당겼다. 아까처럼 가벼운 뽀뽀를 예상했지만 실상은 굉장히 깊은 키스였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혀에 바이킹을 탄 것처럼 심장이 간질거렸다. 줄입천장을 혀끝으로 쓸어 낸 덕분에 나는 다급하게 이유한의 어깨를 잡았다. 자꾸만 허리께에 힘이 들어갔다.

“아, 유한아. 자, 잠깐만……. 응?”

내게 어깨를 밀린 이유한이 푸스스 웃으며 입술에 한 번, 볼에 한 번, 그리고 귓가에 한 번 입술을 맞추고 멀어졌다. 내 얼굴이 빨개졌을 것은 안 봐도 뻔했기에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좋아도 되나, 너무 좋아.”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언가 오묘한 정적이 흘렀다. 천천히 이유한의 손이 내 어깨를 감쌌다. 나른했던 얼굴이 차차 평소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이유한의 핸드폰이 지이잉, 하며 진동했다.

“타이밍 좀 봐. 전화하려고 했는데.”

이유한이 힐끗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말갛게 웃었다. 여전히 홧홧한 얼굴에 부채질하며 나는 가만히 이유한을 보고 있었다.

“우진이야.”

“장우진?”

“응. 보고 싶지?”

“……응.”

나는 어렵사리 대답했다. 보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매일매일 오늘 밤 꿈속에서는 볼 수 있을까,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잠에 들곤 했었는데…….

“그럴 줄 알았어. 잠깐만.”

이유한이 웃으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래 지속된 진동으로 끊어지기 직전이었던 휴대폰 너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 약간의 소리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 우진아.”

오랜만에 듣는 이름. 그 이름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렇게 하면 목소리가 더 잘 들릴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 내 행동의 의미를 금방 알아챈 듯 이유한은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응, 그래. 아니, 우리 집으로 와. 응 뭐, 잠을 잘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별일 없어. 그래. 응.”

통화 내용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다만 이유한의 말로 장우진이 이곳으로 올 것이라는 건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기대감과 불안감이 섞여 마음을 어지럽혔다. 이유한은 내 뺨을 부드럽게 쓸며 기분 좋게 웃었다.

“다들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했어.”

“…….”

“엄청 기뻐할 거야.”

다시 한번 이유한이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나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애써 억누르며 쓰게 웃었다. 좀체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

“우진이 학교가 이 근처라서 아마 금방 올 거야.”

“아. 어, 학교……. 우진이는 방학 아니야?”

“응, 뭐. 방학일걸. 근데 공모전 때문에 날 샜다던데.”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유한의 말을 곱씹었다. 학생이구나. 어느 학교에 다니고 있을까. 공부를 그래도 곧잘 하는 편이었으니까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을까? 공모전은 뭘까? 어느 과지? 여러 궁금증들이 몰려왔다.

하지만 금세 또 한숨. 나 물어볼 수는 있을까, 얼굴 보자마자 화내고 가 버리는 건 아닐까.

“잠깐만 틈을 주면 땅굴을 파네, 너는.”

“아……. 아, 그냥 좀 불안해서.”

“불안할 거 없어. 좋아할 거라니까.”

이유한이 단호히 말했음에도 불안한 마음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장우진은 나를 보고 무슨 말을 할까, 나는 그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여러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화내겠지? 화가 많이 났겠지? 뭐라고 해야 되지? 뭐라고 해야…….”

“진정해, 지헌아.”

“아, 나중에 볼까? 지금은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가…….”

나는 멍청하게 굴며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도 이유한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하지만 내가 채 일어나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이유한이 팔목을 붙잡아 왔다. 방금까지의 웃는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진지하기 그지없어 나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피하는 건 안 돼.”

“하지만…….”

“화를 내면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되고, 울면 달래 주면 되고,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면 돼.”

“…….”

“근데 도망치는 건 안 돼.”

분명히 이유한은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단호함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얼굴에 방금까지 초조하던 마음이 진정이 되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젠가는, 내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어쨌든 언젠가는 만나게 될 텐데. 내가 피하면 안 되겠지.

“얼마나 걸릴까?”

그제야 마음을 다잡은 나를 이유한이 기특하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마 곧?”

참 신기한 타이밍이었다. 이유한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삑- 하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으니까. 뭐야, 벨을 누르는 게 아니라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오는 거야? 덕분에 화들짝 놀란 내가 어깨를 떨었지만 이유한은 그저 한 번 웃더니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잔뜩 긴장한 탓에 강아지처럼 그 뒤를 졸졸 따르고 있었다.

곧 삐리릭,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비밀번호 잠금이 풀리는 소리였다.

“왔어?”

“응.”

열린 문 사이로 두 눈을 반쯤 감은 장우진이 들어섰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눈을 떼지 못하고 보고 있었지만, 정작 장우진은 제대로 눈도 못 뜨고 있어 아마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많이 피곤한가……. 그 얼굴을 보자마자 왠지 안쓰러워졌다. 장우진이 신발을 벗으며 한 발자국 안으로 발을 들이려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누구 있어?”

아마 내 신발을 본 것 같았다. 그제야 눈을 바로 뜨며 장우진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무척이나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은 그 앞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칠 때까지도 그대로였다.

손끝이 덜덜 떨려 주먹을 쥐는데 장우진은 말없이 멍하니 나를 보기만 했다. 하지만 침묵은 잠시였다. 장우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 내가 잠을 못 자긴 했나 봐.”

조금은 생뚱맞은 소리를 하며 우진이 제 눈을 벅벅 비볐다. 그리고 고개를 다시 한번 들었다. 어김없이 시선이 맞물렸다. 이유한은 슬쩍 장우진과 나를 한 번씩 보더니 곧 한 걸음 물러섰다. 반면에 장우진은 어느새 내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와 있었다.

“……형.”

“어.”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 아닐 거고.”

“어.”

“……형이 닮은 사람을 만나는 건가?”

멍한 얼굴로 장우진이 말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고 이유한은 헛웃음을 쳤다.

“아닐걸.”

장우진이 한 걸음 더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고작 한 걸음이었다.

“그러니까.”

“…….”

“한지헌이라고?”

장우진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에 나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내 턱을 감싼 장우진의 손에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한지헌이네.”

이유한은 그 말이 들리자 곧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자리를 피해 주려는 것 같았지만, 무심결에 이유한을 따라 시선이 움직였다. 하지만 내 턱을 감싸고 있던 장우진의 손에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순간이었다.

장우진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나를 유심히 보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덕분에 나도 장우진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대로였다. 그저 조금 더 어른이 되었을 뿐이었다. 하얀 얼굴도, 새카만 머리카락도, 빨간 입술도 모두 다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우진아.”

그렇게 한참을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다 겨우 내뱉은 말은 고작 장우진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에 장우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이 무너지듯 내 어깨로 떨어졌다. 속눈썹이 애처로울 정도로 떨렸으나 나는 손을 제대로 뻗지도 못했다.

움찔거리는 손이 그 얼굴께로 가려다가 멈칫, 가려다가 또 멈칫. 멍청한 짓만 반복하고 있었다.

“꿈을 꾸는 건지 현실인지 모르겠어.”

장우진이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꿈은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유한이 형 집에서 너를 만날 줄은 몰랐어서…….”

장우진은 제 머리를 도리질 쳤다. 정신을 차려 보려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멈칫거리는 것을 반복하던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내 어깨에 닿아 있는 장우진의 손을 잡았다. 다시금 우진이 시선을 마주쳐 왔다.

“……지헌아.”

“응.”

“지헌아.”

“……응.”

장우진의 젖어 있던 눈에서 결국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우진이 급하게 제 눈가의 눈물을 닦아 냈지만 아무리 닦아도 계속해서 뚝뚝 떨어졌다. 덕분에 내 눈가에도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진짜 만났구나, 우진이도. 여전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이 현실에서 너희들을 만나게 되다니…….

“……하.”

우진이 진정을 해 보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를 마주치는 상상을 정말 많이 했었는데.”

“…….”

“정말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장소라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한 번도 너희들을 마주칠 수 있다는 기대조차 하지 못했었다. 이렇게 만날 수 있으리라는 그 어떤 기대도. 그랬기에 정작 내가 마주하고 있는 장우진이 더욱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정말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무슨 말조차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내가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어, 일단은.”

장우진이 다시금 한숨을 내어 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담담하게 내뱉는 말인데 목 끝에서부터 울음이 올라왔다.

“어, 잘 지냈어?”

“윽…….”

꾸역꾸역 입술에 힘을 주어 참아 내려 해 봤지만 결국은 잇새로 울음소리가 새어 나갔다. ‘아’ 하는 짧은 탄식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장우진이 나를 제 품안에 끌어안았다. 나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보고 싶었어. 네가, 정말 많이.”

“……아, 흑.”

아무리 꾹꾹 눌러 참아 봐도 터져 버린 눈물이 끝도 없이 밀려 나왔다. 너무 반갑고, 이렇게라도 보게 되어서 기뻤다. 하지만 그보다 미안함, 그 감정이 너무나 컸기에 더욱 슬퍼졌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나를 향해 그리움을 토로하는 장우진의 얼굴이 진심뿐이라서 더 그랬다. 그 얼굴에 갑자기 자신을 떠났던 나에 대한 원망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그래서…… 그래서.

“윽, 보고 흐, 싶, 었어. 으윽, 나도……. 흐으.”

터져 버린 눈물에 말이 뚝뚝 끊겼다. 어느새 나를 달래는 꼴이 되어 버린 장우진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미, 미안해. 흐으, 윽.”

“화도 못 내겠다. 왜 이렇게 울어. 또 왜 이렇게 말랐어.”

장우진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 말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새어 나오는 울음을 힘겹게 참아 냈다. 겨우 참아 낸 보람이 있는지 여전히 눈물은 흘러내렸지만, 그래도 우는 소리는 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장우진에게 조금 떨어져 섰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장우진을 조금은 힘들게 마주했다.

“이제 내도, 돼.”

말은 조금 끊기긴 했지만 그래도 우는 소리를 밖으로 내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어?”

“……후우. 이제 화내도, 된다고.”

오히려 내가 울어 버리는 바람에 장우진이 화를 내지 못할까 나는 눈을 부릅뜨고 눈물을 참아 냈다. 잠시 벙벙하게 나를 보던 장우진이 헛웃음을 치며 나를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화를 낼까.”

웃음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어왔다. 다시 내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을 것 같았다. 애써 억눌렀던 울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애를 왜 이렇게 울려.”

거실로 갔다고 생각했던 이유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속상하게 왜 이렇게 울지.”

토닥이는 손길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울지 마. 미안해.”

아,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다시 웃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내 허리께를 부드럽게 안은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데리고 들어와. 쓰러지겠다.”

“응.”

이유한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오히려 걱정을 끼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가 뭘 잘했다고, 나를 7년씩이나 그리워한 사람들 앞에서 울어. 고작 한 달 주제에.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장우진은 이유한의 말대로 나를 거실로 끌었다. 어깨를 감싼 손이 너무나도 다정해서 쉽게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내가 울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앉아서 얘기하자.”

나를 소파 위로 끌어 앉히고 장우진은 그 앞에 앉았다. 눈물 가득한 얼굴에 부드러운 손이 닿았다.

“근데 왜 형이 데리고 있었어, 한지헌.”

내 눈물을 닦아 내며 장우진이 무심한 듯 물었다. 그에 이유한이 제 머리를 긁적이더니 답했다.

“음. 데리고 있었다기보다는……. 우연히 만났는데.”

“응.”

“도망갈까 봐 잡아 왔어.”

잡아 왔다는 말에 무심코 헛웃음이 나왔다.

“지헌아, 웃을 일이 아니야. 너 지금 잡혀 온 거야.”

부러 오버스럽게 말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아직도 축축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대충 닦아 내며 민망하게 웃었다. 얼굴에 남아 있던 눈물은 장우진이 마저 쓸어 냈다.

“잘했네.”

장우진은무척이나 집요한 시선으로 줄곧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보고 있는데도 안 믿겨.”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유한도, 장우진도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가 않았다. 나도, 하는 말이 입 안에 맴돌았지만 굳이 꺼내지는 않았다.

“지헌아.”

“응.”

“……미치겠다. 진짜.”

이렇게까지 기뻐하는데 나도 힘들었다고, 나도 너무 보고 싶었다고 징징거릴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무심코 손이 움직이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장우진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순간 그것을 깨달은 내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 냈다.

“괜찮아.”

하지만 장우진은 편하게 웃고 있었다. 그때 조금 떨어져 있던 이유한이 다가와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덕분에 앞에는 장우진이 뒤에는 이유한이 있는 이상한 모양새가 됐기에 나는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뭐 해?”

“……나이 먹어서 속이 좀 좁아졌나. 나도 오늘 오랜만에 만난 거거든.”

불퉁한 투의 대답이었다. 장우진의 입꼬리가 어이없는 기색을 띠며 올라갔다.

“질투도 할 줄 알았어?”

장난기가 묻어나는 어투였다. 그에 오히려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와는 전혀 상반되게도 이유한은 미간을 찌푸리고야 말았지만.

“회포 다 풀었으면 떨어져. 짜증 나니까. 괜히 불렀어. 배은망덕한 게.”

“참나.”

골이 난 이유한의 말에 장우진이 헛웃음을 쳤다. 그런 와중에 나는 그제야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유한이 몇 가지 마실 거리를 내오고 나서 본격적으로 우리는 서로가 몰랐던 그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거의 질문은 내가, 대답은 장우진이 하는 식이었다.

“어쩐지 엄청 피곤해 보이더라.”

“찌들었다는 말을 돌려 하는 것 같은데.”

“전혀 아니야.”

장우진은 건축학과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군대에 다녀오느라 지금은 3학년이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건축은 방학 때도 바쁘구나.”

“공모전 때문에…….”

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질린 듯한 얼굴이었다.

“근데 다른 애들은 만났어?”

“아직, 현이랑 준이는 기사나 TV로 보긴 했는데…….”

“걔들은 모르기 힘들지.”

“응, 혹시 수하는?”

아직까지 무얼 하고 사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건 수하뿐이기에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유한과 장우진이 서로를 마주 봤다.

“수하 의대 다니나?”

“어, 의대. 지금 본과 4학년인가.”

“의대?!”

와, 진짜 잘 어울려. 눈앞에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강수하가 스쳐 지나갔다. 그저 상상을 했을 뿐인데도 그게 무척이나 잘 어울려서 꼭 실제로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보고 싶어?”

장우진이 턱을 괴고 나를 보며 물었다. 아까 전 이유한이 물었던 것과 비슷한 말투였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러다가 오늘 다 만나게 되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어김없이 심장이 쿵쾅였다. 보고 싶냐 물어본다면 나는 당연하게도 언제든 고개를 끄덕일 터였다.

“응.”

“그럼 봐야지.”

그 단호한 대답에 왠지 마음이 울컥해졌다. 아까도 그렇게 울어 놓고 어떻게 또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지, 나는 올라오는 울컥한 감정을 꾹꾹 눌러 내려앉혔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이 보이기라도 하는지 이유한이 내 눈가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나는 어렵게 입꼬리를 올렸다.

“울보야.”

“…….”

“그렇게 또 울 거면 안 부를 거야.”

하지만 보람도 없이 장우진이 단호히 말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급하게 도리질 쳤다.

“아냐, 나 안 울어.”

“안 울어?”

“응, 나 안 울어. 진짜.”

단호하던 얼굴에 다시금 웃음이 올랐다.

“7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너는 그렇게 그대로지.”

“그러니까. 나도 그 생각했었는데.”

이유한과 장우진 사이에 무심한 대화가 오고 가고 있었다. 나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야, 나는 고작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딱히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러 볼게. 다들 바빠서 사실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응.”

하지만 다행히도 내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던지 장우진이 금세 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바로 전화를 거는 모양이었다. 무척이나 빠른 행동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화기 너머 통화 연결음이 어렴풋이 들려오고 있었다.

“바빠?”

잠시 후, 상대방이 전화를 받은 모양인지 장우진이 내 손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아니. 안 바쁘면 유한이 형네 잠깐 오라고.”

누구지? 불친절하게도 통화 상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터라 나는 궁금함에 조금씩 전화기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다지 멀리 가지는 못했다. 등 뒤에서 이유한이 내 허리를 잡아 안았기 때문이었다. 화들짝 놀란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해 보니까 아까 너 아프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장우진이 통화중이라서인지 소곤소곤한 목소리였다. 나는 멀뚱히 이유한을 보고 있었다. 아팠나, 내가? 무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순간, 내가 오늘 아르바이트를 조퇴했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

“괜찮아? 아픈데 울기까지 해 가지고…….”

이유한이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때마침 통화를 마친 장우진마저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다가왔다.

“아팠어?”

“응, 오늘 몸이 별로 안 좋다고 했었는데…….”

“아, 아냐. 그냥 술병 났었어. 어제 술을 좀 많이 먹어서…….”

사실 그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럴듯한 변명거리였다. 이유한과 장우진의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허. 서경호한테 일러야지.”

이유한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주 그냥 신나서 술 드시고 다니나 봐요.”

“아…… 아니야. 어제, 아니, 요즘 뭐 그런 일이 있어서.”

나는 눈을 굴리며 대답을 피했다. 전적으로 내가 술을 마신 원인은 다 너희들에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근데 누구 부른 거야?”

나는 화제를 돌려 보고자 장우진에게 물었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던 장우진은 핸드폰을 두드리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강수하.”

“……아아.”

“다행히 별로 안 바쁜가 봐. 얼굴 보기도 힘들더니. 지금 온다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준이랑 김현은?”

“걔들 전화 잘 안 받아서 일단 문자를 보내긴 했는데…….”

찌푸린 미간을 따라 나는 장우진의 대답만 기다렸다.

“확실하진 않네. 김준은 오늘도 아마 경기 있으니까.”

“오늘도 선발이래?”

“글쎄. 연락 기다려 보고.”

타이밍이 맞는다면 오늘 당장에라도 전부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에 아까의 우진이를 만날 때와 똑같이 기대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마음을 잠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이 만남을 나중으로 미루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유한이 말했듯이 원망한다면 들을 테니까. 내게 원망을 털어 낸다면 그 마음이 풀릴 때까지 얼마든지 들어 줄 수 있었다.

순간 지이잉, 소리를 내며 장우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김현.”

아마 문자를 본 김현에게서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나는 슬금슬금 장우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래. 별수 없지. 어, 괜찮아. 안 괜찮은 건 너일걸.”

하지만 역시나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나는 시무룩하게 앉았다. 그런 내 표정을 힐끗 본 장우진이 눈을 휘며 웃었다. 왜 그러지?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잠시, 전화기를 손에서 떼고는 스피커폰으로 바꾸었다. 그제야 김현의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크게 들려왔다. 나는 숨을 삼켰다.

-뭔데. 뭐 있어, 거기?

“어, 뭐 있어. 아마 못 보면 후회할 거.”

-뭐라는 거야.

무척 차분한 목소리로 김현은 틱틱거렸다. 예전에는 엄청 밝은 목소리였는데…… 울컥 치미는 감정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유한이 제 허리에 제 팔을 감아 왔다. 마치 내 기분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다정한 손길이 나를 달래고 있었다.

“근데 될 수 있으면 왔으면 좋겠네.”

장우진은 그런 나와 이유한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진이 들고 있는 그 전화기 너머에서는 여전히 낮은, 그리고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야, 나 피곤해.

“그럼 어쩔 수 없고.”

-아, 뭔데? 진짜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인데?

김현은 영 찝찝한 듯했다.

-아, 짜증 나. 간다, 가. 너 별거 아니면 죽는다, 진짜.

결국 전화기 너머로 수락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이유한을 마주했고 이유한은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장우진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예전의 내가 알던 그 밝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무심코 아까 TV에서 봤던 김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는 그저 밝기만 했었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건 나 때문이었을까. 상상만 해도 마음이 아파 왔다.

곧 전화가 끊어지고 장우진이 내게 다가왔다. 통화 내내 내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다들 좋아할 거야.”

“……응.”

“너는 안 좋아? 만나기 싫은 거야?”

“아니야! 만나고 싶어!”

장우진의 물음에 급하게 부정하는 나를 보며 녀석이 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보고 싶고 만나고 싶었다. 다만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내가 무어라고 말을 해야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을지…… 그게 고민이 되었을 뿐이었다.

***

“지헌아, 좀 앉아 있어.”

안절부절못하고 거실을 왔다 갔다 움직이는 나를 보던 이유한이 결국 내 손을 잡아끌었다. 손톱도 깨물고 있었나. 잡아끌린 손의 손톱이 못생기게 망가져 있었다.

“다 상했네.”

막상 김현이나 강수하가 도착할 시간 즘이 되니 마음이 초조해진 탓이었다. 부드럽게 손을 어루만지는 이유한의 손길을 가만히 받으며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초조한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질 않았다.

“많이 화났겠지.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까…….”

불안함에 초조하게 떨리는 다른 손은 장우진이 잡았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하고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장우진이 이유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지헌, 아까 나 만나기 전에도 이랬어?”

“어, 더했어.”

그 대답에 그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러고는 곧 내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걱정할 것도 많다. 괜찮아.”

“…….”

“아마 화를 내지는 않을걸.”

장우진은 나를 달래고자 하는 말인 것 같았지만 그것도 문제였다. 장우진은 화를 내기는커녕 나를 달래기까지 했다. 강수하와 김현을 만나게 된다면 절대로 울지 말아야지, 내가 외려 울어 버리니 정작 화를 내고 원망해야 할 사람이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이 켜지고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이었다. 아마도 김준은 아무런 말이 없었으니 강수하와 김현이 같이 온 모양이었다.

“앞에서 만났나?”

“그런가 봐.”

이유한이 천천히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아니, 사실 그리 천천히 걸은 것은 아니었지만 유난히 느리게 느껴졌다. 나는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이유한을 따라갔다.

“어. 왔어?”

“형, 오랜만이에요.”

하지만 내가 채 현관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들린 강수하의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나는 두 사람을 마주하지 못했다. 장우진이 내 근처로 다가왔다. 꾸역꾸역 눈물이 찼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참자, 참아야 했다.

“장우진은요?”

“……안에.”

“뭔데 오라고 난리예요? 무슨 일 있어요?”

강수하에 이어 김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플 정도로 뛰는 심장에 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여기서 딱 한 걸음만 더 가면 녀석들을 만날 수 있다.

“음, 근데 어떻게 둘이 같이 와?”

“아, 이 앞에서 만났어요. 아, 김준한테도 연락 왔었다던데.”

“응. 오늘도 경기래?”

“선발은 아니래요. 근데 자리는 못 비운다고 아까 전화 왔길래 끝나면 이리 오라고 했어요.”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나는 결국 한 걸음을 걸어가는 대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막상 마주하려니 겁이 난 탓이었다.

내 옆에는 장우진이 서 있었다. 가만히 나를 보고 있는 눈에 흔들림은 없었다. 장우진은 무슨 말을 하는 대신에 내 등을 천천히 토닥이기만 했다. 나를 달래는 그 손길에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근데 진짜 무슨…….”

나는 용기를 내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무심하게 말을 이어 가던 김현과 눈이 마주쳤다. 부자연스럽게 말이 멈췄다. 김현은 당황한 듯 입만 달싹였다.

“아…….”

그렇게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김현이 다리가 풀린 듯 자리에 주저앉았을 뿐이었다. 탄식을 내뱉은 것은 강수하였다. 강수하는 그 길로 내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내게 가까이 선 강수하가 내 뺨을 부드럽게 잡았다.

“지헌아.”

“응, 수하야.”

“하.”

강수하는 실소를 내뱉었다.

“너, 왜……. 아.”

내 뺨을 문지르면서도 강수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 줘야 하는데 왜 꼭 앞에만 서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는지. 숨을 내쉬는 것조차 어렵게 느껴졌다.

일단은 사과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 순간 어느새 다가온 김현에 의해서 나는 강수하의 손에서 벗어나 버렸다.

“좀 보자, 한지헌. 지헌아.”

그 잠깐 사이에 김현의 얼굴에는 울음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무너진 얼굴이 안쓰러워 내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이미 가득 젖어 버린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김현이 내 손에 제 얼굴을 맞대어 왔다.

“미, 안해. 윽, 내가, 잘……못했어.”

“무슨 소리야. 네가 뭘, 잘못했다고…….”

얼굴을 맞대자마자 하는 소리가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네가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다고. 잘못한 게 도대체 뭐가 있다고…….

“내가 너무……. 으윽, 끅, 욕심을…… 부렸, 윽, 어. 내, 내가…….”

억지로 한 자, 한 자 뱉어 내는 말에 내가 숨을 삼켰다. 무슨 욕심을 부렸다는 건지 몰라 나는 일단 김현을 품에 안았다. 서럽게 울고 있는 현이를 안은 나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윽, 내, 가……. 흐윽, 너한테 그런, 흡, 말만……이라도 안, 끅, 했어도…….”

눈물 젖은 목소리가 서러워서 너무나 마음이 아파졌다. 하지만 김현이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응? 현아, 미안해.”

“으, 흑……. 나 때문에, 아…….”

도대체 뭐가 너 때문이라는 거야. 나는 꽉 안긴 현이의 몸을 더욱 끌어안았다. 안쓰럽게 몸이 떨려 오고 있었다. 나는 머릿속을 헤집었다. 도대체 김현이 왜? 뭐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는 거지? 다급하게 한 달가량 전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다 불현듯 어떤 날의 김현이 스쳐 지나갔다.

‘왜 너는 모두를 다 좋아하는 거야?’

‘왜 내가 아니라?’

울먹이던 오늘처럼 젖어 있던 그 얼굴.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김현을 품에서 떼어 냈다. 마주한 얼굴이 형편없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너, 설마…… 여행 갔을 때 얘기하는 거야?”

“윽, 미안, 해……. 흐으, 내가 너한테 화를……. 으윽.”

누군가에게 내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현아, 그거 아니야. 진짜 아니야. 너 때문 아니야. 아, 정말 아냐……. 현아.”

“윽끄, 흐윽, 내……. 내가 잘, 잘못했…….”

“아니라고. 현아, 진짜 아니야. 너 때문에 그랬던 거 아냐. 현아, 미안해. 아, 아.”

나는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나를 보며 울던 그 얼굴에 내가 사과조차 하지 못하고 왔다는 생각은 자주 했었지만, 그게 김현에게 죄책감으로 남아 있을 거라고는……. 정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지고 있어야 할 죄책감과 미안함이었다. 네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현아, 진짜 아냐. 미안해…….”

끅끅거리며 눈물을 터트린 김현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배우가 됐다고 해서 잘 지내고 있었을 거라고 믿었는데, 나를 추억하고는 있지만 이런 죄책감 속에 갇혀 있을 거라고는 정말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는데. 너는 도대체 왜.

“미안해. 으윽, 끄, 내가 잘못했어, 지헌아.”

나는 도대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걸까. 나는 현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나처럼 주저앉아 버린 김현의 얼굴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어렵사리 말을 골랐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아, 내가 미안해. 네가 이렇게……. 아, 정말 그것 때문이, 아니었는데……. 미안해, 현아……. 아.”

내 품 안의 김현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내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변명을 하고 싶었는데 변명할 말이 없었다. 나는 갑자기 떠났고, 갑자기 돌아왔으니까. 나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나 봐.”

“…….”

“지헌아, 나 봐. 응?”

그 울먹이는 말투에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밝은 갈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여전히 눈물을 퐁퐁 쏟아 내고 있으면서 곧은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김현이 차츰 흐리게 보였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헌아.”

“미안해, 현아.”

김현의 손이 조심스레 내 뺨에 닿았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내는 손이 부드러웠다. 나를 그리워했을 거라고, 나를 원망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건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내가 아닌 모두에게는 7년 전일 그날, 김현의 얼굴과 지금 내 눈앞의 김현이 오버랩 됐다. 그날처럼 김현이 눈물을 쏟아 내는 이유는 결국 나였다. 나만 아니었어도…….

“아니야, 울지 마. 미안해.”

“네가 뭐가 미안해, 현아.”

“미안해, 지헌아. 울지 마, 응?”

김현의 품에서 나는 서러운 눈물을 삼켰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게 아닌데……. 이 자리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랬기에 김현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한참.

다행히도 시간이 차츰 지나면서 진정이 되는 모양인지 가파르게 오르내리던 김현의 가슴이 천천히 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지, 뭐.”

우리가 좀 진정된 것 같았는지 장우진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먹이던 나와 김현이 고개를 들고 장우진을 마주했다. 시큰둥한 말투와는 다르게 장우진의 눈가는 잔뜩 붉어져 있었다.

“야! 이 미친놈아! 내가 안 온다고 했어도 무조건 오라고 했어야지! 미친놈이, 못 간다고 하니까 진짜 오지 말라고 했어!”

방금까지 울먹이던 목소리로 생전 하지도 않던 미친놈 소리까지 섞어 가며 소리를 지르는 김현이었다. 화가 난 듯 씩씩거리는 김현이 아직도 마르지 않았던 눈물을 벅벅 닦아 냈다.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아니, 아! 짜증 나. 쟤 진짜 싫어.”

짜증스레 중얼거린 김현이 다시 내 품에 안겼다. 얼굴을 부비적거리며 어깨를 떠는 게 서러운 마음이 가시질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나도 비슷한 처지였던지라 똑같이 어깨를 떨며 김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야, 그쯤 하고 떨어져. 강수하는 지금 재회도 못 하고 저러고 있잖아.”

“싫어. 몇 년 만인데 벌써 떨어져. 안 떨어질 거야.”

내가 기억하던 김현의 목소리, 말투.

“수하도 7년 만이잖아.”

이유한이 말했다. 그제야 김현이 불퉁한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내 품에서 떨어졌다.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착한 성격은 결국 김현을 자리에서 일어서게 했다.

“짧게 좋아하고 떨어져.”

강수하에게 김현이 조용히 말했다. 그제야 강수하와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만 있던 수하였다. 예전에도 말이 많았던 편이 아니었다. 내게는 늘 다정했지만 그래서인지 화를 내는 것도 짜증을 내는 것도 거의 보지 못했었다. 그러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 수하의 생각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수하야.”

“잘 왔어.”

짧은 한마디였다. 강수하는 나를 마주하고 있던 눈을 아래로 내리깐 상태였다. 나는 수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진 않았다. 무어라 말을 붙여 보려던 나는 입을 달싹이다 결국 다물었다.

“…….”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숨을 한번 내쉬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지 않은 수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

“음, 어……. 의대에 갔다고 들었어. 역시 공부도 엄청 잘하더니, 음.”

하지만 채 정리되지 않은 말은 뚝뚝 끊어졌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사라져서 미안해.”

“…….”

“정말로 미안해. 수하야.”

결국 또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내가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한들 7년 중 단 하루라도 메워질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많이 보고 싶었어. 정말이야.”

“…….”

“좀 더 빨리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왜 꼭 7년씩이나 지난 다음에 내가 애들을 볼 수 있었던 걸까. 왜 7년이나 흘러 버린 걸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찼다.

“……빨리 오지 그랬어.”

한참 만에야 강수하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고개는 들지 않은 채였지만, 그 목소리가 반가우면서 낯설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주 조금은 잠겨 있는 목소리였다.

“미안해. 변명밖에 안 되겠지만, 올 수가 없었어.”

너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돌아왔을 텐데……. 애초에 왜 이렇게 만나게 되었는지조차 모르는 내게는 사치스러운 후회였다.

강수하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올렸다. 느릿느릿 올라오는 눈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강수하의 붉은 눈가가 눈에 들어왔다. 손을 들어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책은.”

아주 한참 후에 다시금 열린 입에서 뜻 모를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무심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언제 돌려줄 건데.”

웃음기 섞인 말이 다시 들려왔다. 그에 얼마 전, 서점에서 다시 구매했던 책이 떠올랐다. 그 예전 강수하에게 빌렸던 책. 그것을 떠올린 내가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미안. 아직도 못 읽었어.”

“…….”

“곧 돌려줄게.”

비록 새 책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푸흐흐, 웃음을 짓는 강수하가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강수하의 두 눈을 마주했다.

“안아도 돼?”

“……응, 이리 와.”

그제야 나는 강수하에게 푹 안겼다. 편안하게 감싸 오는 그 품 안에 들어가 있자니 심장이 쿵쿵거렸다.

“네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좋아.”

“…….”

“투정 부려서 미안해.”

나는 품 안에서 도리질 쳤다. 미안해할 이유도 없었다 미안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안 믿기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응.”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강수하는 나를 가만히 토닥였다.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너에게 나는 얼마나 더 미안해해야만 할까. 얼마나 사과해야 너희들이 상처받은 7년의 시간의 발끝만큼이라도 위안이 되어 줄 수 있을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이었다.

***

“물 좀 마셔. 탈수 오겠다.”

따끔거리는 눈가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이유한이 내게 물을 내밀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한 번에 마셔 버려 그런지, 아니면 너무 많이 울었기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지금 우리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강수하, 김현과 그 눈물 젖은 재회 이후 김현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김현처럼 티를 내진 않았지만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이 넓은 거실에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좀 떨어져도 될 것 같은데.”

“네가 떨어져.”

장우진의 불퉁한 말에 김현이 똑같이 불퉁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김현은 오지 말라고 했던 장우진의 말에 영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었다. 장우진이 짜증스럽게 헛웃음을 쳤지만 김현은 그저 내 품만 더 파고들었다.

“현이 너 TV에서 봤어.”

나는 살짝 웃으면서 김현에게 말했다. 김현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봤어?”

“응, 미안해. 계속 모르다가 아까 전에 알았어. 진짜 미안.”

“진짜? 아, 하긴. 못 봤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나 나름 유명한데.”

아쉬운 기색을 한 김현에게 나는 미안하다는 듯 어깨를 토닥였다. 김현은 금세 배시시 웃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왔다. 묘한 향수 냄새가 김현에게서 풍겨 왔다.

예전에 알고 있던 김현의 향기가 잘 느껴지지 않아 조금 아쉽긴 했지만 이 향기도 나름 그와 잘 어울렸다. 그래도 그냥 아무것도 안 뿌렸을 때 나던 향도 진짜 좋았는데. 뻘한 생각이었다.

“어, 김준 왔나?”

아마 그렇게 앉아 있었던 지도 꽤 오래된 모양이었다. 어느새 밤 10시가 넘어 버렸으니까. 반가움과 미안함에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김준이 올 수 있는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깨달은 것은 이유한의 집 인터폰이 이미 울린 다음이었다.

무신경한 이유한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덕분에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김현이 내 곁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에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어, 김준. 맞다.”

이유한이 중얼거리며 현관문으로 향했다. 또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이 뛴 심장이 이러다가 멎어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저, 지헌아.”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어정쩡하게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내 팔목을 김현이 조심스레 잡았다. 마주한 얼굴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새라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춰야 했다.

“응?”

“……그, 너무 상처받지 말고.”

“어?”

“어, 진심은 아니야. 그냥…….”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를 하며 김현이 말꼬리를 늘였다. 하지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어쩐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김현의 얼굴이 어두웠다.

“형, 안녕하세요.”

“어. 왔어?”

“네. 애들 다 와 있나 보네요.”

“어어.”

현관 쪽에서 들리는 김준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조금 더 남자다워진 목소리였다. 그에 나는 김현이 잡고 있는 손을 애써 떨어트렸다. 이제 마주해야 했다. 이렇게 하루 만에 모두 다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게다가 예상과는 다르게 그 누구에게도 원망을 듣지 않았다.

외려 그것이 더 마음 아팠다. 누군가는 차라리 원망하고 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현의 얼굴을 봤을 때는 아마도…… 준이는 내 원망을 많이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야, 무슨 일 있어? 왜 불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하고 김준이 들어서다가 걸음을 멈췄다. 거실 한가운데 바보처럼 서 있는 나와 마주친 탓이었다. 김준이 생각보다 빨리 들어온 탓에 당황하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그것은 김준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미간이 확 찌푸려지는 걸 보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지만 나는 애써 마른침을 삼켰다.

“준아.”

김준을 부르는 내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내 목소리에 김준의 미간은 더욱 찌푸려졌다.

“한지헌?”

그 입에서 내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 목소리는 이전의 녀석들과는 무척이나 다른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나는 애써 입꼬리를 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깬 것은 김준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냉기가 뚝뚝 흐르는 말투에 마음까지 시렸다. 당겼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김준의 얼굴이 전혀 펴질 생각을 않고 있었다.

“어, 준아.”

“네가 지금 여기 왜 있느냐고 물었는데.”

“미안해. 내가…… 너, 그리고 너희 만나고 싶다고 했어.”

“……네가 무슨 자격으로?”

자격. 자격이라기보다는 그저 다른 애들의 배려였다. 보고 싶지 않은지, 보고 싶다면 불러 주겠다던 배려. 나는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미안해. 그때 갑자기 떠나 버려서…….”

“사정이, 사정이 있었대…….”

“사정?”

천천히 다시 미안하다는 말을 붙이는 내 말에 김현이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내 편을 들어주고 싶었던 것 같았지만, 그 목소리에 김준의 표정이 더 싸늘하게 굳어 버렸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 그것을 이렇게 보게 되니 심장이 따끔거렸다. 김현이 두 눈을 굴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김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준아, 미안해.”

“……하.”

김준의 입에서 실소가 튀어나왔다. 그 소리에 울컥 눈물이 차올랐지만 나는 애꿎은 내 손을 꼬집으며 버텼다. 울지 마, 한지헌. 울지 말자. 김준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저렇게 화가 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내가 상처받을 일이 아니야.

“무슨 사정? 들어나 보자. 도대체 어떤 사정이 있어야 7년 동안 단 한 번도 연락이 없을 수가 있는데?”

김준이 물었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사실은 김준뿐만 아니라 다들 내게 한 번쯤은 묻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면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텐데, 당연한 걱정을 했지만 그 누구도 내게 묻지 않았다.

그것을 김준이 물어본 것이다. 모두의 시선은 내게 향했다. 궁금했을 테지.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거든 7년 동안 연락하지 못할 사정이 있어?”

김준이 격앙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무것도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다들 내가 미국에 갔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마저도 깊게 파고들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가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뭐든 떳떳하게 어떠한 사정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 머릿속을 뱅뱅 돌고 있는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나조차도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이것 봐. 너는 아무런 설명도 못 해. 어떻게 그게 사정이 있었던 게 돼? 너희들은 이게 이해가 돼? 이해가 돼서 여기서 이렇게 등신들처럼 앉아 있는 거야?”

“말이 심하잖아.”

“심하다고? 여기서 심한 사람이 누군데?”

김준이 어깨를 들썩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장우진이 한마디를 던졌지만 오히려 김준의 화를 부채질한 것 같았다.

“내가 미안해, 준아.”

“내 이름, 부르지 마.”

일그러진 얼굴이 안쓰러웠다.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안 할게. 용서해 달라고도 안 할게. 상처 줘서 미안해. 내가.”

“……너 진짜 이기적이다.”

김준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조여 오는 심장을 가다듬는 것마저도 아팠다. 무슨 설명을 어떻게 할 수도 없으면서, 어쩌면 나는 그맘때 녀석들의 성격을 기억하고 혼자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이해해 줄지도 몰라,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고. 그따위 안일한 생각.

“나는 너 용서 못 해.”

“……응.”

“아니, 용서가 안 돼. 너 때문에 나는, 김현은!”

김준의 입에서 김현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나는 옆에서 어느샌가 또 울먹이는 얼굴로 서 있는 김현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어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어떻게 살았을지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차라리 변명이라도 해 봐. 왜 그래야만 했는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대라고!”

이유한의 집 거실에 김준의 목소리가 울렸다. 울컥한 건지 눈물기가 섞여 있는 목소리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설명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진짜 네가 너무 싫어. 다시는 안 만나고 싶어. 다시는…….”

결국 일그러진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나왔을 때 김준이 제 눈가를 벅벅 닦아 냈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김준을 향해서 다시 한번 입을 열려 했을 때.

“지헌이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

울먹이는 김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현.”

“하지, 마. 너 때문에, 윽, 또 사라지면, 흑…….”

김현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단걸음에 녀석에게 다가갔다.

“아무 데도 안 가. 현아.”

“……보여, 한지헌?”

“…….”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네가 직접 봐. 얼마나 사람을 등신으로 만들어 놨는지, 네가 직접 보라고.”

“…….”

“나는 너 용서 안 해. 그러니까 계속 그렇게 미안해해.”

김준은 돌아섰다. 그리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무너지는 마음을 애써 추슬렀다. 여기에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사실은 모두가 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잖아. 나를 기다렸던 마음이 원망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을 터였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원망했다고 마음 아파하겠어. 나는 울고 있는 김현을 품에 안았다.

“미안해, 미, 안해. 준이가, 으윽, 준이도, 너……. 진짜 많이…….”

“응, 알아. 괜찮아. 울지 마. 너 이렇게 우는 게 더 마음 아파. 울지 마, 미안해. 내가 미안해.”

김준이 사라져 버린 집 안은 그저 김현의 우는 소리, 그리고 그를 달래는 내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다들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괜찮았다. 그냥, 이런 말을 하고 간 김준이 오히려 나 때문에 마음 아프진 않을까 걱정돼서, 그게 너무 걱정이라서. 그것뿐이었다, 정말로.

***

김준이 사라지고 나서는 온 집 안에 정적이 가득했다. 일부러 더 밝게 띄워 보려 다들 노력하는 것 같았기에 나도 최대한 웃어 보려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굳어 버린 입꼬리가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잘한 것 하나 없으면서, 나는 나를 스스로 채찍질했다. 그럴 때마다 입꼬리가 아프도록 웃어 보려 노력했지만 그것은 금세 수포로 돌아가곤 했다. 순간 아무 데다 던져두었던 내 핸드폰이 진동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모르는 번혼데…….”

무심결에 중얼거리는 사이 오랫동안 전화를 받지 않은 탓인지 전화가 뚝 끊어졌다. 스팸이었나, 생각도 했지만 다시금 울리는 전화에 나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지헌 씨 핸드폰 맞죠?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통화 볼륨을 꾹꾹 눌러 내렸다. 그냥 왠지 좀 불편했던 탓이었다. 네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누구세요?”

-어, 저예요. 윤수진.

“네?”

-혹시 기억 안 나요?

“아, 아니요. 나요! 나요! 수진 씨요?”

하지만 그 어색함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상대방이 밝힌 이름 때문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 반응에 모두 놀란 얼굴을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게 보이질 않았다.

-아하하, 다행이네요. 많이 놀랐어요?

“네? 네, 괜찮아요. 아니, 근데 어떻게…….”

나는 막 게임에서 나왔을 때 서준영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분명히, 그러니까 분명히……. 윤수진 씨라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아니, 수진 씨는 어떻게 내 번호를 알고…… 그냥 애초에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어?

무심코 나를 보고 있는 모두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아니,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이 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전 돌아가 버린 김준까지도.

-어, 놀랐을 것 같긴 한데. 일단 만날까요?

“아, 네. 어디로…….”

-아마 어머니께 전화가 올 거예요.

“저희 어머니요?”

-네. 일단 집으로 오세요. 거기서 기다릴게요.

뚝, 끊어진 전화가 당황스러웠다. 수진 씨에게 전화가 온 것도 모자라서 엄마한테 전화가 올 거라고? 집으로 오라고? 기다리겠다고? 이게 지금 무슨…….

“지헌아, 무슨 전화야?”

“어?”

“왜 이렇게 두 눈이 동그래졌어. 무슨 일 있어?”

김현의 물음에 나는 여전히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생각지도 못한 전화에 놀란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아, 아니. 어, 어! 엄마다. 잠깐만.”

멍청해 보일 정도로 고개를 말을 잇지 못할 때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방금 수진 씨의 말대로 엄마에게서 온 전화였다. 당혹감에 손이 떨렸지만, 일단 전화를 받았다. 엄마라는 말에 한 발자국 물러난 이유한이었다.

“네, 엄마.”

-지헌아, 바빠?

“……아니요. 안 바빠요.”

-그, 집에 와야 할 것 같아.

머뭇거리는 목소리였다. 그에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전화가 올 줄 알았던 거지? 어떻게 집으로 오라고 할 줄은 알았던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 호,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음. 전화로 설명하긴 좀 그렇고. 오기 힘드니?

조심스러운 말투가 누군가 시켜서 전화를 걸었다기보다는 무슨 일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요 근래 이해를 할 수 없는 일들이 내게 일어나곤 했지만 단연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게요. 금방.”

내 대답을 들은 이유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발신자가 엄마였다 보니 별다른 말은 못 하는 모양새였다. 엄마는 내 대답에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고 이내 전화는 끊어졌다.

잠시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엄마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 데다, 수진 씨가 했던 말은 뭔지 궁금한 것투성이었다.

“가려고?”

“진짜 너무 미안한데,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아서.”

내 말에 모두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떨어지게 된 이유가 우리 집에서 미국으로 갑작스레 보냈던 탓이었던지라 더욱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 마음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나는 할 말을 골랐다.

무어라 말해야 녀석들이 불안해하지 않을까. 머리를 굴려 봐도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은 나조차도 불안했다. 갑작스레 온 수진 씨의 연락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만나야 했다. 적어도 내가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을 이해시켜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 믿어 주면 안 돼?”

“…….”

“못 믿을 만한 거 알아. 그럴 수 있는데, 절대로 두 번 반복 안 할게. 절대로 안 그럴게.”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제야 만났는데……. 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 의지로 사라지려고 하지 않는 이상은 내가 굳이 이 모두를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득 이유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데려다줄게.”

다행히도 이유한은 수긍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그 얼굴이 신경 쓰여 나는 말을 덧붙였다.

“절대로 걱정하는 일 없을 거야. 연락도 꼬박꼬박 다 받을게. 절대로 안 그럴게. 미안해.”

“진짜 약속한 거다. 나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할 거야.”

김현이 잔뜩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걱정하는 일 없도록 할게.

내가 일어서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우진은 다시 학교로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애초에 잠시 눈을 붙이러 온 것이었다고. 김현은 새벽 스케줄이라 집으로 돌아가서 한숨 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잠이 올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며 덧붙인 말에 나는 민망하게 웃었다.

“수하는 집에 갈 거야? 데려다줄까?”

“좋죠.”

“나도 학교까지 데려다줘.”

이유한의 질문에 강수하가 고개를 끄덕였고 장우진이 덧붙였다. 그에 이유한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너희 지헌이 집 어딘지 확인하려고 그러는 거지?”

“…….”

장우진과 강수하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왠지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던 것은 이유한의 질문에 김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기도 따라가겠다 조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며 이유한이 단호하게 밀어 내긴 했지만.

“내려가자.”

이유한의 집에서 나오면서도 김현은 입을 비죽거렸지만 주소 알려 준다는 내 말에 금세 밝아졌기에 다행이었다.

김현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의 차를 타고 먼저 자리를 떠야 했다. 몇 번이나 나를 힐끔 보며 불안해하는 기색을 보이기에 손을 잡고 안심하라 일렀지만, 그래도 갈 때까지 표정이 풀리지를 않아 미안한 마음에 그를 안고 몇 번이나 토닥여야 했다.

그리고 나서 장우진과 강수하, 그리고 나는 이유한의 차에 올라탔다. 차는 우리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너희 없었으면 절대 집에 안 보냈을 거야.”

이유한이 차를 운전하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가 무슨 의미인 줄 몰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유한은 내 눈을 마주쳐 왔다.

“둘만 있었으면 집에 안 보냈을 거라고.”

불현듯 머릿속에 집에 안 보낸다는 말의 의미가 빙빙 돌았다. 그 의미를 깨닫자 귓가가 홧홧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유한이 푸흐흐, 하고 웃어 버리는 소리가 그 귓가로 들려왔다.

“한지헌 건들지 마, 진짜. 죽어.”

“와, 이거 하극상 아니야?”

“형이고 뭐고 진짜 죽어.”

장우진이 이렇게 단호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한은 죽인다는데도 기분도 안 나쁜지 킥킥거리기만 했다.

이유한의 집과 우리 집이 그리 거리가 먼 편이 아니었다.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앞에 멈춰 섰다. 차 안은 어느 순간부터 조용했다. 그저 다들 창밖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도 웃으면서 편하게 말을 하기 어려웠다. 집에 다 와 갈수록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쳐서 나고 있었다.

“아, 다 왔네.”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수하야, 우진아. 너희도.”

“응. 전화하면 받을 거지?”

“응응. 받을게.”

“그래, 조심히 들어가.”

집 앞까지 데려다줘 놓고는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나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세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먼저 가는 것을 보고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유한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내가 먼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움직일 생각인 모양이었다.

별수 없이 인사를 건넨 내가 먼저 뒤돌아섰다. 몇 번이나 다시 뒤돌아 손을 흔들 때도 여전히 이유한의 차는 그대로였다. 그렇게 한참 만에야 나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 소리를 들었는지 엄마가 다급하게 달려 나왔다.

“엄마, 무슨 일 있어요?”

그 다급함에 수진 씨가 혹시나 집에 있는 건가 싶어 집을 둘러보던 나는 당황스러워졌다. 엄마의 손이 조금은 떨리고 있었다.

“왜 그래요? 어? 무슨 일 있었어?”

“지헌아. 아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데…….”

엄마는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두 눈을 굴리며 숨을 고르는 엄마를 나는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잡혔대. 지헌아.”

“네? 뭐가요?”

“뺑소니범이, 잡혔대.”

뺑소니범……?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의 뺑소니범이라는 거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엄마가 어깨를 토닥였다.

“네 사고, 뺑소니범이 잡혔어.”

“……제가 사고가 났었어요?”

“응, 그래. 났었지.”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고가 났었다고? 아무리 머릿속을 헤집어 봐도 그런 기억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엄마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

엄마의 설명이 끝나고 난 후,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해가 되지도 않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말이 거짓일 리도 없었다.

그럼 저게 진실이라는 건가? 아니, 진실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엄마는 내가 7년 전,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미국으로 오기로 한 그날, 갑작스럽게. 그리고 그 때문에 내 어렸을 적 기억이 송두리째 날아갔다고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말이 안 됐다. 애초에 나는 어렸을 적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잃어버린 기억 따위는 없었다. 미국으로 가기로 한 적도 없었다. 게임 속이 아니고서야……. 그런데 왜 엄마는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마치 진실인 것처럼.

“그래서 처벌을 원하는지, 합의를 원하는지 묻더라. 당연히 처벌해야지. 그놈 때문에 네가 기억을 모조리 다 잃었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격앙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엄마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진정해요. 일단 진정해요, 엄마.”

엄마는 지금 당장이라도 경찰서에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시간도 늦은 데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 내가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서. 우리 내일 날 밝으면 가요. 네?”

“지헌아.”

“내가 당사자라면서. 응? 나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그래.”

마지못한 듯 보였지만 엄마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를 애써 진정시킨 후 나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털썩 소리를 내며 침대에 앉았다.

때마침 핸드폰이 지이잉, 하며 움직였다. 복잡해진 머릿속을 단박에 정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뿐일 것 같았다.

윤수진, 아까 전 왔던 모르는 번호가 다시금 띄워진 화면을 보며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었다.

“네, 여보세요.”

-……지헌 씨. 들었어요?

확실했다. 이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나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섰다.

“어디에요?”

-집 앞이에요. 잠깐 나올래요?

더 기다릴 것도 없었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을 박차고 나오자 집 앞에서 낯설지 않은 얼굴을 금세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얼굴에 나는 숨을 짧게 내쉬었다.

“윤수진 씨.”

“오랜만이네요.”

방긋 웃는 얼굴에서 위화감이 밀려 들어왔다.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네요.”

“…….”

“잠깐 자리 옮길까요?”

하지만 수진 씨는 무척이나 태연했기에 나는 애써 무던한 척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적한 카페 안으로 들어서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나는 속사포처럼 궁금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사고는 뭐예요? 왜 애들이 다 현실에 있는 거죠? 게임이에요, 뭐예요? 아니, 제가 지금 있는 여기가 현실인 건 맞아요?”

“……어, 무슨 마음인지 이해는 하지만 하나씩 천천히 설명해 줄게요. 시간은 많으니까요.”

씨익 웃는 얼굴에는 여유마저도 느껴졌다. 나는 여유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데, 정작 나를 이렇게 몰아넣은 사람은 여유가 넘치니 어쩐지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다급하게 묻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테였다.

“일단은 여기가 현실인지부터 설명하자면 맞아요, 현실이에요. 지헌 씨가 살아오던 현실이요.”

“근데 어떻게 애들이 다 여기에 있는 거죠? 분명히 게임, 안에 있었잖아요.”

게임이라고 말을 하던 내 목소리가 순간 줄어들었다.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맞아요. 게임이었죠. 학원 로맨스 게임의 공략 캐릭터들이에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되레 온갖 궁금증을 증폭하는 대답이기도 했다.

“근데 말이 안 되잖아요. 어떻게 게임 캐릭터들이 현실에 있을 수가 있죠, 그리고 수진 씨도……!”

“지헌 씨가 한 게임은 베타 테스트였죠.”

“……그렇죠.”

“나는 이번 베타 테스트에 몇 가지 실험을 했어요. 일단 미안해요. 동의 없이 그런 실험을 하게 돼서.”

전혀 미안한 기색이라고는 없으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는 수진 씨를 향해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나올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하나 물어보죠. 지헌 씨, 게임에서의 하루는 현실에서 몇 분이죠?”

“……20분이요.”

나는 튜토리얼을 들었던 기억을 더듬었다. 수진 씨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지헌 씨가 게임에서 빠져나온 지 한 달 하고도 절반이 지났죠.”

“근데 그게 뭐가…….”

“7년이라는 시간은 2555일. 그걸 하루 20분으로 계산하면 51100분. 즉, 35일 정도의 시간이 돼요.”

“그게 뭐, 어……?”

“대충 알겠어요? 그러니까 지헌 씨가 게임에서 나오고 나서 그 캐릭터들이 게임 속 7년을 보낼 만큼의 기간이 이 현실에서 지나간 거예요.”

나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기간. 그래, 기간은 그렇다고 치자. 근데 애초에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데? 물어볼 것이야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지헌 씨에게 내가 왜 이걸 만들었는지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다만 이 모든 건 내가 만든 실험적 상황이고, 그 실험이 성공했다는 거죠.”

“아니, 수진 씨…….”

“나는 처음부터 이 게임 캐릭터들이 현실로 나올 수 있는 베타 테스트를 만들었어요. 지헌 씨가 가지고 있는 CD에만 특별하게 들어간 프로그램이죠.”

“…….”

수진 씨는 차분히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믿지 않는들 무어라 설명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왜 모두가 이 현실에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수진 씨가 하는 얘기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내가 보았던 50%와 100%는 현실과의 동기화. 즉, 게임과 현실 간의 간극을 없애는 작업이었다. 35일이 지난 후에야 100%가 된 것이었고 내가 봤던, 내가 이름을 알고 있던, 그리고 게임 캐릭터들의 스토리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현실로 나왔다. 예를 들자면 사장님처럼.

나는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었을 때 헛웃음을 쳤다. 하지만 수진 씨는 꿋꿋하게 이야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로 게임 캐릭터가 나오기 위해서는 달라져야 하는 것도 있어요.”

“……뭔데요.”

“지헌 씨의 과거. 어머니께 들으셨죠?”

“…….”

“지헌 씨는 7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미국으로 떠나라는 말에 그 캐릭터들에게 인사라도 하고 오겠다고 집을 나서다가 뺑소니 사고를 당하죠. 그 사고로 인해서 들었겠지만 모든 기억을 잃게 됐고요.”

나는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너무 여러 가지가 물밀 듯이 들어와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정작 나를 혼란스럽게 한 장본인은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그럼……. 저를 뺑소니 친 사람도 게임 속 인물이에요?”

“그렇죠.”

“…….”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당장이라도 죗값을 받게 하겠다고 말하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렸다. 하지만 게임 캐릭터라면 갑자기 교통사고를 내는 것으로 정해진 스토리 때문에 현실 속에서 갑자기 감옥에 가게 될지도 몰랐다.

저 사람, 윤수진 씨가 만든 겨우 그 스토리 때문에…….

“미안해요?”

“네?”

“그 사람. 지헌 씨를 뺑소니 친 사람이요. 아무 죄 없이 감옥에 가는 것 같나?”

마치 내 마음을 읽는 것만 같아 나는 기분 나쁜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박호윤. 스물여덟이에요. 누군가에게 물어보세요. 이유한이어도 괜찮고 서경호여도 괜찮겠네요. 물어보고 나서 결정해요. 죗값을 치르게 할지, 말지.”

무척이나 단호하고, 또 무척이나 자신감 넘치는 말투였다. 나는 밭은 숨을 내쉬었다.

***

“박호윤?”

“네, 혹시 사장님하고 같이 학교 다닌 사람인가 싶어서요.”

다음 날, 어김없이 아르바이트를 나온 나는 하루 종일 사장님만을 기다렸다. 사장님이 출근을 하면 박호윤에 대해서 물어볼 생각이었다. 결국 윤수진 씨의 말대로 움직이는 게 찝찝하긴 했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유한에게 물어볼까 생각했지만, 왠지 내가 그 학교에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장님 쪽이 조금 더 편할 것 같았다.

“……네가 박호윤을 어떻게 알아?”

출근하자마자 던진 내 질문에 사장님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대답했다. 게임 속의 인물, 사장님이 아는 인물이라는 건 맞았다. 근데 그래서……? 수진씨는 무슨 말을 듣기를 바란 거지?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우연히 알게 됐어요.”

“……그 새끼를?”

무척이나 적대적인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문득 수진 씨의 말이 떠올랐다. 이것도 게임 스토리겠지. 다 정해진 스토리. 그런데도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화가 난 기색이 역력한 건지.

“그 사람이, 엄청 나쁜 사람인가 봐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말에 사장님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나쁜 사람? 죽어야 마땅할 놈이지.”

나는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얼마나 나쁜 놈이길래 죽어야 마땅할…….

“그 새끼 때문에 이유한이 3년을 버렸으니까.”

이유한? 3년? 나는 사장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씩씩거리는 사장님의 목소리가 당황스러웠다. 왜 여기서 이유한이 나오는 거지?

“왜, 왜요? 그 사람이 뭐 했어요?”

“……하, 됐다. 내가 무슨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

사장님은 말은 꺼내 놓고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을 들은 나는 그 이야기를 꼭 들어야 했다. 박호윤과 이유한, 둘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알아야 했다. 나는 자리를 뜨려 하는 사장님의 팔을 붙잡았다. 얘가 왜 이러나, 싶은 표정의 사장님이 나를 마주했다.

“사장님, 말해 주세요. 왜요?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데요?”

꼭 알아야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나를 사장님이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봤다. 결국 사장님의 입에서 한숨이 내쉬어졌다.

“그래, 뭐 다 지나간 얘기니까.”

“…….”

“이유한이 고등학교 때 옥상에서 떨어져서 3년 동안 혼수상태로 있었어.”

“헐, 사장님 친구가요?”

같이 있던 혜원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옥상에서 떨어진 건 사고긴 했는데, 결론적으로 박호윤 때문이었거든.”

“네?”

“그 새끼가 죽겠다고 지랄만 안 했어도 이유한이 옥상에서 떨어질 일은 없었어. 그놈 말리다가 그렇게 된 거였으니까.”

“네?”

“죽겠다고 한 것도 지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이유한을 좋아해서 그런 거였고. 진짜 손으로 밀지만 않았지, 민 거나 다름없었어. 그 새끼 때문에 이유한이 3년이나 침대 위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었다.”

사장님의 분노한 목소리에 속 한구석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박호윤이 그런 사람이었다고? 누군가에게 물어보라고 하던 수진 씨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거였어? 당연히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한 게 분명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마저도 윤수진 씨 뜻대로 되겠네.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놓고 지는 외국으로 도망갔지. 근데 한지헌. 너 박호윤을 진짜 어떻게 알아?”

나는 사장님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옥상 위에서 말간 얼굴로 내게 웃어 보이던 이유한이 자꾸만 떠오르고 있었다.

“7년 전에 뺑소니 사고를 당했어요.”

“어?”

“그 뺑소니범이 잡혔는데 박호윤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학교 다녔던 건 우연히 알게 됐고…….”

“미친. 그 새끼 진짜 안 되겠네. 여기저기 사람 인생 조지고 다니고……!”

“그래서 말인데…… 제가 오늘 어머니랑 경찰서에 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사장님.”

그 조심스러운 말에 사장님은 단박에 나를 조퇴시켰다. 절대로 합의해 주지 않을 것이었다. 윤수진 씨의 생각대로 놀아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지금 당장 내 머릿속을 메우는 것은 오로지 이유한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

이유한의 집 앞이었다. 경찰서에서 합의는 없다, 기소를 원한다고 모든 절차를 다 밟고 오는 길이었다. 그 상황이 모두 끝나고 나니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서러워졌다. 이유한의 3년이 억울해졌다. 내가 너무 억울했다. 그러니까 결국 모든 게 나로 인해 시작된 것이었다. 10년이었다. 10년을 버렸다. 스토리 때문에 시작됐던 긴긴 외로움이었다.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초인종만 누르면 이유한이 있을 텐데. 나는 계속 집에 있다던 이유한의 문자를 떠올렸다. 분명히 이 안에 있을 터였다. 나는 눈을 벅벅 비볐다. 운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 온들 뭐가 달라지겠냐마는 그래도 눈곱만큼이라도 위로가 되길 바랐다. 이제 외롭지 않게 만들 거라는 내 나름대로의 다짐이기도 했다. 숨을 크게 내쉬며 손을 움직여 벨을 눌렀다. 인터폰 소리가 들렸고 안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 지헌아?”

인터폰으로 내 모습을 확인한 듯 이유한이 다급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나는 한 걸음 다가섰다.

“지헌아, 울었어?”

반가운 기색이 감돌던 이유한의 얼굴이 금세 놀라움과 걱정으로 물들었다. 운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바로 울컥 눈물이 올라왔다. 애써 꾹 눌러 참으며 이유한의 목에 내 팔을 감아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유한은 내 손이 제 목을 감싸 안자 당황한 듯 그대로 굳어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허리를 받쳐 들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혔을 때에도 나는 이유한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대고만 있었다.

그 따뜻함에 겨우 눌러 참은 눈물이 다시 한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처음 만나던 날, 차갑던 이유한의 손이 떠올랐다. 울면 안 되는데, 이유한이 걱정할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은 이미 내 자의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헌아, 왜 그래. 왜 울어. 응?”

흘러내리는 눈물을 느꼈는지 내게서 떨어진 이유한이 내 뺨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그 물음이 너무나도 다정해서, 눈가가 따가울 정도로 시큰해졌다. 나는 입술을 꾹 누르며 눈물을 참으려고 했다. 지금 가장 억울한 건 이유한인데, 왜 내가 우는 거야.

“울지 마. 마음 아프게 왜 그래.”

하지만 결국 그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소리를 내며 울어 버리고 말았다. 자신에게 푹 안겨 서럽게 우는 나를 보며 많이 당황한 듯 이유한의 손이 떨렸지만 그 떨리는 손으로도 나를 계속해서 토닥이고 있었다.

이유한은 현관 앞에서 나를 안고 거실로 걸었다. 안겨서 걸어가는 그 순간에도 나는 계속해서 울고만 있었다. 소파 위에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내려놓은 이유한은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얼굴에 온갖 걱정이 내려 앉아 있었다.

“왜 그래. 응? 무슨 일 있었어?”

“나…….”

“응.”

“달래지 마.”

뜬금없는 말에 이유한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 달래 주지, 마.”

“……왜?”

나는 애써 울음을 눌러 삼키며 조심스레 내 손을 이유한의 얼굴로 가져갔다. 이유한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달래지 마, 오늘은 내가 너 달래러 온 거니까.”

“……네가 날 달래러 왔다고?”

이유한이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앞뒤 설명 없이 내뱉은 말이라 더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이유한은 제 뺨을 감싸고 있는 내 손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응. 그러니까 나 달래지 마.”

“뭘 어떻게 달래러 왔는데?”

점점 웃음기가 도는 목소리에 나는 이유한의 뺨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별다른 저항 없이 끌려오는 이유한의 입술에 쪽쪽, 몇 번이고 입을 맞추니 곧 푸흐흐, 하고 웃어 버린다.

“아, 진짜 너무 좋긴 한데……. 나 오늘 생일인가? 아닌데, 생일 아닌데.”

내 의중을 모르는 이유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입술이 닿을 때마다 입꼬리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그 목을 다시 한번 감싸 안고 이유한을 품에 안았다. 가만히 끌려온 이유한이 내 등을 토닥였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서러운 얼굴을 하고 나한테 왔어. 속상하게.”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더듬더듬 입을 열려다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막상 이유한에게 달려오긴 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내가, 그런 일이 있었대. 근데 그런 일을 벌인 사람이 너를 3년이나 귀신으로 떠돌게 한 사람이래. 그래서 내가 너무 아파서, 너무 슬퍼서 달려왔어. 조금이라도 너한테 위로가 되고 싶었어.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들이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말하기 싫어?”

나는 머리를 도리질 쳤다.

“그럼 천천히 얘기할까?”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한은 내게 웃음 지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이라도 한잔 줄게.”

부엌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이유한을 나는 가만히 시선으로 좇았다. 그 뒷모습마저도 짠하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 생각은 말갛게 웃으면서 나를 마주하고 웃는 이유한 때문에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상황 설명도 안하고 나 지금 입술부터 들이민 거야? 갑자기?

같이 있고 싶어서 달려오긴 했지만 그렇게 바로 입술부터 들이밀어야겠다는 생각은 정말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었다. 근데 얼굴 보자마자 입술부터 부비다니, 한지헌 미쳤구나. 미쳤어. 나는 녀석 몰래 내 머리카락을 미친 듯이 헤집었다. 심장이 날뛰고 있었다. 왜 이제야 이렇게 부끄러워지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대화를 했어도 됐잖아. 왜 그랬을까, 진짜. 어느새 물컵을 들고 돌아오고 있는 이유한을 힐끗 보며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창피해, 부끄러워.

“자. 마셔.”

“으, 응. 고마워.”

그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이유한은 태연하게 내게 잔을 내밀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민망해진 마음에 손이 자꾸 헛손질을 했다.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며 뻗은 손을 이유한이 보더니 어이없이 웃어 버린다.

“먹여 줄까?”

“어?”

“물컵 못 잡을 거 같아서.”

그러면서 컵을 들어 내 입가에 가져가나 싶더니 갑자기 제 품으로 다시 가져간다. 뭘 하는 건가 싶어 빤히 보고 있으니 곧 이유한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입으로 먹여 줄까?”

“……그냥 이리 줘.”

“에이, 뭘 또 정색까지 하고 그래.”

이유한이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 장난에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내가 컵을 손으로 집어 들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차가운 물이 속으로 들어오니 그래도 진정이 되어 가고 있었다.

“좀 진정됐어?”

“응? 아……. 응.”

“그럼 이제 말해 줄 수 있어? 왜 그렇게 서러운 얼굴이야. 응?”

무척이나 다정한 얼굴이었다.

“……유한아.”

“응.”

“그러니까, 7년 전에 말야.”

나는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어디에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천천히 생각하며 입을 연 탓이었다. 하지만 그때, 이유한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인 모양인지 진동 소리가 길었다. 이유한이 힐끗 핸드폰을 보더니 그냥 뒤집어 버렸다. 받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어, 급한 전화일 수도 있잖아.”

“별로 안 급할 거야.”

“……받고 와. 내가 할 말 그렇게 급한 이야기 아니니까.”

조심스레 건넨 말에 이유한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나한테 너보다 급한 건 없는데…….”

그 무심한 말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나는 애써서 그 마음을 추슬렀다.

“나도 조금만 더 할 말 정리하고 싶어. 전화 받고 와.”

“……그럼 천천히 생각하고 있어. 금방 받고 올게.”

“응.”

“……어, 서경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들린 익숙한 이름에 들고 있던 컵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런 나를 보지 못한 이유한은 별다른 표정 없이 전화를 받으며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고 나는 그런 이유한을 보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오늘 내가 했던 말을 전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유한은 헛웃음을 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가, 몇 마디를 나누는가 싶더니 갑자기 입매가 굳어 버렸다. 그러고는 내게 향하는 시선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오늘 있었던 일을 전한 게 맞는 모양이었다.

이유한이 갑자기 전화를 끊고는 내게 한걸음에 달려왔다. 내 표정이 무척이나 어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헌아.”

“응.”

“이게 지금 무슨 말이야?”

너무나도 앞뒤 맥락 없는 질문이었지만 어떤 의미인지 알아들은 내가 쓰게 웃었다.

“아마 들은 대로일 것 같은데.”

“……박호윤한테 뺑소니 사고를 당했었다고?”

“……그렇대.”

“7년 전에?”

“응, 그렇다고 하네.”

이유한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유한아, 7년 전이라니까.”

다급하게 내 몸을 살피는 이유한을 보며 내가 어이없이 웃었다. 그제야 이유한도 머쓱하게 제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이유한을 토닥거렸다.

“안 아파. 사고 났었던 줄도 몰랐어.”

“……하, 그 새끼는 진짜 변하질 않네.”

이유한의 입에서 나온 격한 말투에 나는 웃었다. 생전 쓰지도 않던 단어까지 쓰기에 더 그랬다. 7년 전이라는데도 내 몸이 아픈 곳은 없는지 살피는 기색이 역력한 이유한을 보며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늘 하려고 했던 말도, 그것 때문이었어.”

“왜? 어디 안 좋대? 막 마지막 인사 그런 거 아니지?”

“……미쳤나 봐.”

장난스럽게 말을 받아쳤지만 이유한은 그새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내 말 하나에 불안했다, 즐거워했다 하는 것은 가끔은 무척이나 무서운 일이었다. 슬픈 일이기도 했고.

“7년 전에, 내가 왜 말도 없이 미국으로 갔는지. 왜 가서도 연락 한번 없었는지 많이 궁금했지.”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유한이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날의 일을 내가 언급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도 몰랐어.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

“나는 평범하게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에 들어왔어. 미국에 있지 않았어.”

“그게 무슨 말이야?”

순간 이유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7년 전 미국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던 건 맞대. 근데 내가 그 미국으로 가던 날 교통사고가 났다고 해. 그날…….”

“…….”

“그날 사고로 그 전의 기억은 모조리 잊어버렸고.”

“뭐?”

“그러니까…….”

나는 한번 숨을 골랐다. 어째선지 숨이 찼다. 스토리를 풀어내는 입 안이 썼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사라진 그날, 나는 사고로 너희들을 잊어버렸어.”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 말을 뱉어 내고 있는 건 버려졌다고 생각해서 깊게 패였을 상처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지는 않을까, 그런 작은 기대에서였다. 이유한은 말이 없었다.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은 나 한 달 전에 너희들에 대한 기억이 났어. 근데 마지막 기억이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기사님의 말이었거든.”

“……응.”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은 기사님도 없고, 그렇게 부자도 아니라서……. 나는 미국에 가 본 기억도 전혀 없어서, 그래서 당연히 꿈이라고 생각했어.”

두 눈이 시큰해졌다.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점점 말이 느려지고 있었다. 내뱉는 변명이 꼬이기라도 할까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래서 찾을 생각조차 안 해 봤어.”

“아, 아, 그래서……. 아.”

이유한은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해서인지 바보처럼 탄식만 내뱉었다. 나는 다시금 숨을 몰아쉬었다.

“안 찾아서 미안해. ……너희들만 나를 기억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 유한아.”

내 말이 끝나자 이유한이 참은 숨을 내뱉었다. 그 내뱉는 숨에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무척이나 참았던 모양이었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그 이후로 뚝뚝 끝도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안 온 게 아니라, 못 온 거였어?”

나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픈 듯 일그러진 얼굴이 안쓰러워 그저 이유한을 품에 안았을 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내가 널 얼마나 원망했는데, 아.”

오히려 원망하지 않았다는 게 더 말도 안 되는 일인데도 이유한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몇 번이고 말해도 이유한의 울음이 잘 멎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나조차도 결국은 똑같이 눈물을 쏟아 내고 말았다. 그렇게 현실과 게임의 스토리가 모두 맞물렸다.

***

“아, 진짜 너무 좋다.”

이유한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넓은 소파에서 나는 굳이 이유한의 다리 위에 앉아 있었다. 옆자리에 앉으려고 했지만 굳이 꼭 여기 앉혀야겠다고 이유한이 칭얼거린 탓이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나 오늘 달래 주러 온 거라며!’라 나는 어쩔 수 없이 녀석의 위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슬금슬금 목덜미에 이유한의 입술이 닿아 왔다. 뽀뽀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닿아만 있는 그 입술이 못내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거기에 온통 적막한 집 안이라 나는 다급하게 TV의 전원을 켜며 몸을 비틀었다.

“하지 마, 간지러워.”

“단내 나.”

사람 몸에서 어떻게 단내가 나, 머쓱하게 웃으면서 나는 정신없이 TV의 채널을 돌렸다. 온 정신은 목덜미에 가 있으면서 손은 의무적으로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어?”

그런 내 시선에 꽂히는 채널이 있었다. 내 허리를 감싸며 볼에 뽀뽀를 하기 시작하던 이유한도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4회 초, 마운드에 선 김준 선수입니다.]

[오늘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아요, 김준 선수.]

우연찮게 틀어진 TV 채널에 일그러진 얼굴의 김준이 마운드 위에 서 있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유한과 나는 말이 없었다. 어제 아픈 말을 내뱉고 돌아섰던 김준이 떠올랐다. 일그러진 얼굴이 어제와 오버랩 됐다. 힘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1구 던집니다.]

[아, 깊습니다. 데드볼이에요. 오늘 너무 컨디션 안 좋은 것 같은데요.]

[마음대로 안 되는 것 같죠. 평소답지 않네요.]

해설 위원들이 덧붙이는 말에 나는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유한도 가만히 TV를 보고 있었다.

“신경은 엄청 쓰였나 보네.”

등 뒤에서 불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까이 손이 닿는 이유한의 다리를 토닥였다.

[어? 김준 선수! 폭투를 던집니다!]

[공 따라 가는데요. 늦어요!]

[1루, 2루 주자 빠르게 움직입니다!]

흥분에 찬 해설 위원들의 설명에 내가 몸을 바로 세웠다. 1루와 2루에 있던 주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포수의 뒤로 넘어가 버린 공을 포수가 주워서 던질 태세를 마쳤을 때는 이미 주자들은 1루씩 진출해 버린 상황이었다. 김준이 제 얼굴을 감쌌다. 제 뜻대로 되질 않아 힘든 모양이었다. 결국 마운드 위로 감독이 올라왔다. 무어라 말을 하는가 싶었는데.

[아, 결국 투수 교체 들어가네요.]

[네, 오늘 너무 안 좋았어요. 어제의 패배에 대한 설욕전을 많은 팬들이 기대했는데 말이죠.]

[마운드는 한주원 투수로 결국 교체가 됩니다.]

결국 김준은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축 처진 어깨가 안쓰러웠다. 나 때문일까? 그렇게 말하고 가서 신경이 쓰였던 건 아닐까. 아니,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일까. 불편해진 마음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 탓 아냐, 쟤가 못한 거야. 멍청이가.”

이유한이 나를 달랠 요량인지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에 나는 웃음 지었지만 그 표정을 본 이유한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자.”

“응?”

“나가자고.”

“어딜?”

“김준 보러.”

제가 말해 놓고 스스로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말투는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이유한을 따라서 일어섰다.

“……이렇게 갑자기?”

“저 멍청이도 야구 말아먹고 너는 또 울려고 하고. 미뤄 봐야 좋을 것도 없겠는데, 뭐.”

이유한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김준이 원했던 게 그 7년 동안 연락 못 한 이유였잖아. 이제 설명 못 할 이유가 있어?”

그 단호한 말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근데 일단 밥부터 먹을까?”

부산하게 움직이던 이유한이었다. 금방이라도 나갈 것처럼 말하던 이유한이 걸음을 옮긴 곳은 부엌이라 나는 의아해하며 녀석을 졸졸 따라섰다. 배시시 웃는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김준, 끝나려면 아직 멀었고 너 왠지 밥 안 먹었을 것 같아서.”

나는 그 말에 슬그머니 두 눈을 굴렸다. 사실 저녁밥을 먹지 못하긴 했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게 없던가. 그 생각을 하니 신기하게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혼날 것 같으니까…….

“으음, 저녁은 안 먹었다.”

“…….”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유한은 내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아침은? 점심은?”

들켰나. 왜 물어보지? 나는 일단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먹었지.”

“……뭐 먹었는데?”

하지만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것은 단순히 내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의심 가득한 그 시선에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아, 좀 그냥 넘어가면 안 되냐. 눈치는 빨라 가지고.

“배고파, 유한아.”

“……안 먹었어?”

“아, 너무 배고프다. 이유한이 맛있는 거 해 주면 참 좋을 텐데.”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소파에 다시 힘없는 척 털썩 주저앉은 내가 능청을 떠니 이유한이 헛웃음을 치며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흩트려 버린다.

“아, 좀!”

“아, 좀은 무슨. 누가 밥도 안 먹고 그러고 다니래. 너 말랐다고 내가 얘기했지.”

그사이에 잔소리가 엄청 늘었네. 나는 입을 비죽거렸다. 여전히 TV에서 야구 경기는 진행 중이었다. 간혹 벤치에 앉아 있는 김준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나는 이유한을 한번 힐끗 보고는 완전히 TV를 보겠다는 듯이 자리를 잡았다.

“맛있는 걸로 해 줘. 알았지?”

“우리 지헌이 능청스럽기도 하지.”

이유한이 내 머리를 여전히 쓰다듬고 있었지만 어쩐지 거기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털어 냈다. 싱겁게 웃은 이유한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보지 않는 척 힐끔거렸다. 진짜 뭘 해 주려는 건가? 궁금한 마음에서였다.

“유한아.”

“응.”

“근데 너 집에서 뭐 해 먹긴 해?”

“……어, 어. 아마도.”

무언가 대답이 너무 석연찮았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이유한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다가오고 있는 나를 보며 배시시 웃는다.

“왜 와.”

“믿을 수가 있어야지.”

“나 못 믿어? 나 못 하는 거 없어.”

능청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헛웃음을 쳤다.

“믿어도 돼?”

“응. 믿어, 믿어.”

이유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제 냉장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냉장고의 내용물을 확인하자마자 녀석은 나를 힐끔 봤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너야말로 뭘 먹긴 하는 거야?”

“……왜 아무것도 없지?”

당황한 이유한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가득 차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가서 먹자.”

이유한이 여전히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김준의 집 근처에서 차는 부드럽게 멈춰 섰다. 이유한의 만나자는 말에 경기가 끝나고 집에서 씻고 나오겠다는 김준의 말에 아예 집 근처로 와 버린 참이었다. 주차를 마친 이유한이 곧 제 핸드폰을 심각하게 바라봤다.

“왜?”

“어, 김준 답장 왔길래.”

나는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설레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동시에 들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 생각이 이유한에게 티가 날까 싶어 나는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자주 쌓이는 김현, 강수하, 장우진의 문자에 답장을 해 주기 위해서였다.

“애들 연락 자주 하지?”

“응. 아무래도. 나 때문이지.”

“흐음. 뭐, 네 탓도 아니었잖아.”

이유한이 고개를 저었다.

“애들한테도 다 설명해 줘. 그러면 이렇게까지 불안해하지 않을 거야.”

“…….”

“단순히 네 변명을 위해서 하라는 거 아니야. 그래야 애들도 불안해하지 않을 거니까 그래.”

“……응.”

나는 이유한을 보고 있었다. 너도 이제는 불안해하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김준 나왔다는데.”

“진짜? 근데 나 있다고 얘기 했어?”

“음, 했으면 안 올걸…….”

왠지 눈치를 보는 모양에 내가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물어본 것 같았다. 나는 이유한을 한번 봤다가 창밖을 한번 보며 불안함에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했다. 보자마자 돌아서서 가 버리면 어떡하지,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 긴장에 손에 땀이 잔뜩 뱄다.

“어, 김준이다.”

이유한의 말에 나는 모든 행동을 멈췄다.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멀리서 김준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 씻고 나온 듯 머리카락이 조금 젖어 있는 게 차 안에서도 보였다. 이유한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차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일단 내게 나오지 말라고 이르기에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유한이 차 밖으로 나갔고 김준과 마주했다. 완전히 밝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나를 만날 때처럼 싸늘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래도 내가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들한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김준의 시선이 차 쪽으로 왔다가 바로 거둬졌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었다. 이유한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불안함에 심장이 떨렸다.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가 버리면 어떡하지, 떨리는 손으로 나는 차 문을 잡았다. 막상 김준이 가 버리면 따라서 가지도 못할 거면서 저절로 올라간 손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김준은 돌아서지 않았다.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고 김준이 이유한이 앉아 있던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나는 두 눈만 동그랗게 뜨고 김준이 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유한에게 시선을 던지니 이유한이 손을 살짝 흔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김준이 운전석에 자리 잡았다.

막상 김준이 차 안에 타기는 했지만 우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되는데 목이 자꾸만 잠기고 있는 것 같았다. 김준은 운전석에 탔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김준에게서 방금 씻은 듯 바디워시 향이 풍겨져 오고 있었다.

“저, 준, 아니, 저기…….”

무심코 준이의 이름을 부르던 내가 제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화를 내던 그 말을 기억해 내고 말을 바꿨다. 덕분에 처음 꺼내는 말 자체가 꼬여 버렸기에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해야 했다. 김준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떻게든 내가 먼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7년에 대해서, 변명하라고…… 그랬었잖아.”

“…….”

“혹시…… 들어 줄 수 있어?”

조심스럽게 물은 말에 김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다행히 거절은 하지 않았다. 짧은 고갯짓이 있었다. 다행이다. 그 작은 행동에도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새부턴가 손끝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아까 전 이유한에게 했던 얘기를 다시 한번 천천히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미국행, 갑작스러운 사고, 잃어버린 기억, 얼마 전에서야 모두가 기억났다는 그 낯 두꺼운 변명들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한 거였다.

생각보다 이야기는 길었지만 김준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너희는 7년을 그렇게 나를 그리워했다고 말하는데, 나는, 나는 다 잊어버렸었어. 미안해. 힘들게 해서 미안해. 근데 준아, 내가 정말 그러고 싶었던……. 아니, 아니야. 미안해. 내가 미안해.”

줄줄 새어 나오던 변명들이 마지막에 가서는 나 스스로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를 만큼 꼬여 있었다. 그것은 계속 아무런 반응이 없는 김준의 눈치 때문이었다. 무어라 화를 내든 뭘 하든 무슨 말이라도 해 주면 좋겠는데, 김준은 말이 없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고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해야 하는, 할 수 있었던 말들은 다 한 후였다.

계속해서 하고 싶었던 그 말은 결국 너희들에게 너무나 미안하다는 것. 그렇게 떠나 버려서, 그렇게 너희들에게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사라져서. 그렇게 떠나 단 한 번도 연락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하다는 것뿐이었다.

“……잊어버려서 미안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준아.”

모든 것은 진심이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갑자기 떠나서 그것 때문에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리워하게 해서, 그래서 너무나 미안했고 슬펐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겼던 건 아닐까, 그래도 곧 연락이 오지 않을까 몇 번이고 생각했을 터였다.

“……그러곤 계속 미국에 있었어?”

한참 만에 김준이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잠시 미국에 있었대.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국에 들어와서 학교를 다녔어. 내 기억은 거기서부터고.”

아마도 그 시점부터는 내가 진짜 살아온 현실이겠지. 김준이 제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용서받기 어려울 거 알아. 근데 언제든지 마음이 풀리면, 그러면…….”

“지헌아.”

김준이 부른 내 이름에 내 횡설수설하던 말이 뚝 끊겼다. 나는 말을 마저 잇는 대신 김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할까, 걱정되는 마음에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한지헌.”

“응.”

여전히 손에 얼굴을 묻고 있는 김준을 나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아, 어떡해.”

김준의 어깨가 들썩였다. 쓰러지듯 운전대에 머리를 박은 김준이 몇 차례나 그 행동을 반복했다. 깜짝 놀란 내가 그 사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쿵, 하고 제 머리를 핸들에 찧은 준이 감촉이 달라진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김준은 놀란 눈으로 나를 마주했다. 녀석의 눈이 어느새 눈물로 젖어 있었다.

얼마나 세게 박았는지 생각보다 핸들과 김준의 머리 사이에 꼈던 손이 아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뒤로 뺐다. 하지만 내가 뒤로 빼는 속도보다 김준이 내 손을 잡는 게 더 빨랐다.

“아프지? 그러게 왜 거기에 손을 넣었어, 다치게!”

당황한 듯 소리를 지른 김준이 제 목소리에 당황했는지 눈을 굴렸다.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는 것은 그대로였다.

“아, 미안해. 소리 질러서 미안해, 지헌아.”

왜 네가 미안해해, 지금은 네가 미안할 상황이 아닌 건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김준이 과거 내가 알던 모습을 보이자 갑자기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눈물을 참아 냈다.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준아.”

“……응.”

“보고 싶었어.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아.”

김준이 짧은 탄식과 함께 내 무릎 위로 무너졌다. 그 무너진 등을 나는 가만히 토닥였다. 무릎께가 젖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준이는 소리 내어 울진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김준은 여전히 엎드린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지헌아.”

“응. 응, 말해.”

“네가……. 네가,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했어.”

힘겹게 내뱉는 말이 뚝뚝 끊기고 있었다.

“유한이 형이 한 말도 그랬고, 그래서……. 그래서, 네가…….”

김준이 내뱉는 말에 왠지 입에서 쓴맛이 나는 것 같았다. 내가 버렸다고 생각했다는 그 말이 시리도록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여전이 내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는 김준의 어깨를 잡아 조심스레 일으켜 세웠다. 얼굴은 그사이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나는 두 뺨을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내 얼굴은 이보다 훨씬 더 일그러져 있을 것 같았다.

“미안해, 준아. ……근데 진짜 아니야. 나는 너희를 버리려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었어. 정말이야.”

“그때 유한이 형이, 너 만나겠다고, 했던 날…….”

김준은 숨을 고르게 쉬고 싶은 듯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나는 준이 하는 말에 귀를 세웠다. 이유한이 나를 만나겠다고 했던 날, 내가 몇 번이나 너희들끼리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었지만 끝까지 말해 주지 않았던 그날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네가, 우리 모두를 좋아하니까.”

“응.”

“그것 때문에, 떠날까 봐 무섭다고, 그랬어.”

“……어?”

“언제든, 죄책감이 생기면 떠나 버릴까 봐, 무섭다고.”

“…….”

“그래서, 그래서 형은 네가, 그 어떤 죄책감도, 안 가지게 하고 싶다고, 그랬어.”

“그게 무슨…….”

“너를 두고, 우리가 서로 싸우지 않고, 네가 죄책감 가지지 않게만, 하자고, 네가 떠나는 게, 제일 무서운 일이었으니까.”

“준아.”

“그래서 모두 다, 이해하기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네가 떠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나는 김준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게는 불과 얼마 전이나 다름없던 모든 행동들이 순식간에 이해가 되고 있었다. 내가 모두를 좋아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모두 다 같이 사귀는 것을 수긍했던 것.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한도 나와 사귀기로 했다는 말을 했음에도 별다른 말없이 그와 편하게 지내던 것도 분명 그런 이유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해했던 내게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그래서…….

‘……윽, 내,가……. 흐윽, 너한테 그런, 흡, 말만……이라도 안, 끅, 했어도…….’

바로 어제 김현의 얼굴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나는 탄식을 내뱉었다. 죽을 만큼 괴로웠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애써 눌러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심장이 터질 것같이 아파 왔다. 나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꺽꺽이며 눈물을 뱉어 냈다. 괴로웠다. 죄책감이 터질 듯 들어오고 있었다.

눈물을 보이던 김준이 오히려 내 모습에 놀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제가 한 말이 실수였다고 깨달았는지 김준이 다급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한번 터져 버린 눈물은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바깥에 있던 이유한이 곧장 조수석의 문을 열고 다가왔다. 차 안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까? 사실 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김준도, 이유한도 다들 어떤 생각으로 7년 전 나를 만났는지 깨닫고 난 지금은 그 무엇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지헌이 왜 이래?”

“아, 형. 형,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이유한의 놀란 목소리와 김준의 눈물 섞인 목소리가 윙윙거리며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턱 끝까지 숨이 찼다.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느샌가 이유한이 내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지헌아, 괜찮아? 왜 그래.”

“흐, 유,한…….”

그에 고개를 든 내 눈앞에 이유한이 흐릿하게 보였다. 흐릿한 얼굴이 눈물 때문인지 머리가 둔해졌기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지헌아!”

“한지헌!”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아마 너무 어지럽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

평소보다 눈을 뜨는 게 두세 배는 더 어려웠다. 그 옛날 눈병에 걸렸을 때 이런 기분을 느껴 봤던 것도 같았다. 부어서인가? 무심한 생각을 하며 두 눈을 깜빡였다. 익숙지 않은 천장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아, 여기…… 이유한 집 같은데.

몸을 일으키니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나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김준과 이유한의 차 안에 있었는데…….

“아……. 쓰러졌나?”

무척 어지럽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아마 쓰러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유한의 집으로 옮긴 건가. 나는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그냥 누워 있지.”

그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당연히 이유한이 들어올 거라 예상했던 나는 막상 들어온 강수하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 밖에서 ‘지헌이 깼어?’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수하야.”

“어. 좀 괜찮아?”

“응.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내 물음에 강수하가 대답할 새도 없이 방문을 열고 우르르 녀석들이 들어왔다. 한두 명이 아니고 모두가 다 이유한 집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모양이었다.

“괜찮아, 지헌아?”

“안 어지러워? 괜찮아?”

그새 울먹이는 얼굴과 쏟아지는 질문이 당황스러웠다. 반응으로 봐서는 이유한의 차 안에서 쓰러졌던 게 확실한 것 같았다. 탈수였나, 너무 많이 울어서? 아, 또 걱정했겠네.

“미안해. 걱정했어?”

“뭐가 미안해. 미안할 거 없어.”

“아니, 넌 좀 미안해야 돼.”

눈썹을 팔자로 떨어트린 김현의 말을 강수하가 받아쳤다.

“영양실조에 피로 누적이래. 말이 돼?”

생전 나한테 싫은 소리 한번 안 하던 강수하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도 이렇게 쓰러지기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영양실조에 피로 누적. 정말 단 한 번도 내가 걸릴 거라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들이었다.

“……미안.”

“아, 강수하! 너 때문에 또 미안해하잖아. 죽어, 진짜.”

내 말을 들은 김준이 강수하에게 발길질을 했다. 그러고 보니 김준이 여기에 있었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해를 해 준 걸까? 그래서 준이가 여기 있는 걸까? 나는 멍청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을 알아챈 김준이 내게 한달음에 달려왔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나는 그 말에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나 빠르게 저었는지 머리가 순간 띵하고 울리는 바람에 미간을 찌푸려야만 했지만. 그 작은 표정 변화에 모두의 다급한 손길이 다가왔다. 어, 할 새도 없이 나는 침대에 눕혀졌고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야 했다.

와, 한여름인데 너무 갑갑한데. 슬쩍 손을 이불 밖으로 내어 봤지만, 안타까울 정도로 친절한 손길은 내 손을 이불 속으로 다시 되돌려 놓았다. 아, 참 친절하기도 하지…….

“나와. 지헌이 더 자게.”

장우진이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나는 두 눈을 깜빡이다가 애써 웃었다.

“나 괜찮아.”

“쉴 때 쉬어. 얼마 안 잤어.”

그 말에 그제야 나는 방에 있는 디지털시계에 시선을 돌렸다. 얼마나 잤나 싶어서. 시계는 ‘00:43’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다. 저게 지금 하루가 넘어갔다는 건가?

“뭐야, 12시 43분?”

“응. 너 병원에서 링거 맞고 이리 옮겨졌거든.”

그동안 아예 깨지 않았나? 완전히 꿈도 안 꿨는데. 당황스러움에 입이 딱 벌어졌다. 그나저나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일단 엄마한테 전화를 해야 했다. 아직도 불안감에 잠 못 이루고 있는데 전화 한 통 없이 지금까지 안 들어갔다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을 터였다.

“아, 나 핸드폰. 엄마한테 전화해야 되는데……!”

“지헌아. 누워 있어. 아까 전화드렸어.”

“어?”

“걱정하실까 봐, 아프다고는 말씀 못 드렸는데 여기서 자고 갈 거라고 말씀드렸어.”

이유한이 내게 해 준 설명에 나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나는 얌전히 다시 침대에 누웠다.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다들 언제 온 거지. 각자 연락이라도 한 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도통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모르니.

“다들 어떻게 왔어?”

“너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에 갔는데 강수하가 실습 중이더라고.”

“아아…….”

“그래서 혹이 늘었어. 어쩌다 보니.”

김준이 무언가 머쓱한 웃음을 짓기에 나도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렇게 마주 보고 웃을 수 있다니…….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그 감격과 함께 죄책감도 같이 다시금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 그리고……. 얘기 들었어. 7년 전에, 사고.”

애써 그 죄책감을 억누르고 있을 때 문득 강수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시선을 돌려 강수하를 마주했다. 어쩐지 붉어진 눈매가 울었다는 걸 짐작하게 했다.

“미안해. 기다리게 해서.”

내 말에 김현이 목을 감싸 안아 왔다. 갑작스럽게 김현의 품에 안긴 나는 당황스러움에 눈을 굴렸다. 김현은 제 머리를 내 어깨에 부비고 있었다.

“미안해. 그런 줄도 모르고 의심하고, 불안해해서 미안해.”

아, 너희들이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특히나 현이 너는……. 나는 이불 속에 묻혀 있던 손을 꺼내 김현의 등을 토닥였다.

“현아, 미안해. 그런 생각하게 해서 미안해. 너 때문 아닌 거 알지? 당연히 할 수밖에 없었던 생각이었잖아.”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던 날, 내가 김현을 만나서 했었어야 하는 이야기였다. 적어도 그런 이야기라도 하고 떠났다면 녀석이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네가 그런 생각을 했던 건 너무나도 당연한 거고, 이 모든 것은 내 이기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나쁜 건 내 쪽이지.”

내 말에 다들 고개를 저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너무 부드러워서 다시 한번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다. 눈가가 따끔거렸다.

“울지 마. 진짜 탈수 왔었어, 너.”

“……그게 내 맘대로 되나.”

나는 불퉁한 척 툴툴거리면서 미안한 기색을 띠며 서 있는 모두를 한 번 더 천천히 봤다. 두 번은 떠나지 않을 거다. 그렇다고 고등학교 때 같은 일을 반복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때 내가 그렇게 했던 건 아무리 현실 같았을지라도 게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즐겁고 행복하게 모두와 지내기만 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

하지만 아까 전 김준을 통해 그날의 진실을 깨달은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떠날까 봐 두려워서 자신들이 상처받는 것을 감내했던 모두를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멍하니 눈을 굴리던 내 머리카락을 강수하가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그 손길은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지금도, 여전히 한 사람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내 이기심을 잠재우고 싶었다.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잠 와?”

“……응, 조금.”

강수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막상 눈을 감으니 조금씩 정신이 멀어지고 있었다.

“조금 더 자.”

달콤한 목소리. 점점 멀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나는 입을 달싹였다.

“있잖아.”

“응.”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너희를 떠나지 않을 거야.”

“……응?”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할게.”

나를 떠나겠다 하면 잡지 않을게. 내 옆에 있겠다고 하면 옆에 있어 줄게. 그러니까 너희도 내 눈치 보지 말고, 나 너무 위해 주지 말고, 이기적으로 굴어. 그렇게 해 줘.

아주 작은 목소리도 잘 들릴 만큼 방 안은 적막했다.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

내가 눈을 뜬 것은 아마 그로부터 한참 뒤인 것 같았다. 친절하게 커튼까지 쳐 놨지만 그 사이로 강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 몇 시지. 무심결에 확인한 시계는 아침 10시를 가리켰다. 순간 아르바이트에 늦었다는 생각에 몸을 움찔 떨었지만 이내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는 것을 기억해 내고 한숨을 몰아쉬었다.

나 진짜 오래 잤네……. 잠들기 전 주위에 있던 녀석들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갔나. 하긴, 바쁠 테니까.

나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막 발을 땅에 내딛었을 때 달칵하며 문이 열렸다. 이유한이었다.

“잘 잤어?”

“응. 몸이 엄청 개운하네.”

진심이었다. 요 근래에 들어서 이렇게 몸이 개운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잘됐다. 나와. 아침 먹자.”

뭐, 아침 겸 점심이겠지만. 무심하게 말하는 이유한에 나는 그를 졸졸 따라나섰다. 거실로 나오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애들은 다 갔어?”

“응. 김현은 스케줄, 김준은 운동, 장우진은 학교, 강수하는 실습.”

일일이 모두의 행방을 말해 주는 이유한 때문에 나는 킥킥거렸다. 그렇게까지 말 안 해 줘도 되는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부엌의 식탁에 자리 잡고 앉았다. 당연히 배달을 시켰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만든 모양이었다.

“뭐 했는데?”

“죽?”

어쩐지 고소한 냄새가 계속 나더라니. 곧 내 앞에 죽 한 그릇이 내어졌다. 여러 야채가 들어간 죽이 무척이나 맛있어 보였다. 소고기인가? 고기도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잔뜩 호기심에 차서 숟가락으로 죽을 저으니 이유한이 멋쩍게 웃었다.

“사실은 요리는 잘 못해.”

“응?”

“내가 다른 건 다 잘하는데 요리는 잘 못해.”

갑작스러운 진실 고백이었다. 나는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덕분에 이유한은 더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서 강수하가 해 놓고 갔어.”

“진짜? 수하가 요리도 해?”

“응. 생각보다 잘하더라.”

의외네. 생각하며 나는 죽을 한 숟가락 들었다. 맛있다. 그래도 환자용이라고 간이 세지는 않았지만 고소한 내가 진동을 하는 죽이었다.

“맛있다.”

“그래?”

이유한은 가만히 내가 먹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이유한을 힐끗 보고는 다시 죽을 휘휘 저었다. 웃음기 서렸던 목소리는 금세 사라진 후였다.

아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이유한이었다.

“난 안 힘들어.”

고개를 들어 이유한과 눈을 마주했다.

“네가 없었던 게 몇 배는 더 힘들었어.”

“…….”

“그러니까 내가 너를 떠날 일은 없을 거야.”

단호한 말이었다. 나는 가만히 죽을 젓고 있던 손을 멈췄다.

“나는 네 옆에 있을 거야”

“…….”

“그러니까 너도 약속 지켜. 떠나지 않겠다고 했던 말 꼭 지켜.”

“…….”

“나는 계속 너를 위해 주고 마음껏 좋아할 거야. 그게 내가 너를 좋아하는 방식이고.”

“…….”

“네가 나한테 해 줘야 하는 건 미안해하는 게 아니라 나를 떠나지 않는단 그 약속 지키는 것뿐이야. 그거 할 수 있지?”

“…….”

“응? 대답해.”

“……응.”

어쩐지 메여 버린 목에서 듣기 싫은 목소리가 튀어나왔지만 이유한은 환하게 웃음 지었다.

“그거면 돼.”

망설임 하나 없는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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