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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게임의 종료 (12/36)
  • 6장. 게임의 종료

    [D-5]

    [50%]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일주일이나 지난 날이었다. 일상은 평화로웠고 여느 날과 같았다. 다가오는 마지막 날에 가끔 참을 수 없이 우울해지긴 했지만, 그 끝은 어떻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지 간혹 그런 고민을 하는 하루하루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나름대로 평화로웠던 날들. 누군가가 입을 닫고 모르는 척하고 비밀을 만들어 가며 지켜 내고 있는 작은 평화.

    일요일의 아침이라 학교에는 나가지 않아도 되기에 나는 그냥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아마도 여기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주말이겠지. 씁쓸한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씁쓸한 것은 방금 전에 꾼 꿈이었다.

    정확하게는 꿈이 아니라, 일주일 전. 내게서 잘려 나갔던 그날의 기억이었다.

    ‘왜 너는 모두를 다 좋아하는 거야?’

    ‘왜 내가 아니야?’

    울먹이던 김현의 얼굴, 아마 많이 취했었던 것 같았다. 정확히 앞뒤 사정이 생각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김현의 눈물 젖은 얼굴만큼은 생생했다. 얼마나 서러운지 얼굴이 가득 젖어 있었다.

    “하아.”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가 있었을까. 꾹꾹 눌러 참았던 진심이 터져 버린 걸 나는 그마저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기억하지 못해 다행이라는 얼굴로 웃던 김현이 다시 떠올랐다. 서러울지언정 원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들어 있지 않던 얼굴. 마음이 어지러웠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사과를 하든, 아니면 좀 더 잘해 주든 고작 5일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러니까 고작 5일, 이 주어진 시간이 모두 지나고 나면 어떻게 될까. 나는 현실로 돌아가겠지. 그럼 다시는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되겠지. 순간 덜컥 내려앉은 심장이 갑자기 고장 난 듯이 뛰어 대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잖아…….”

    나는 혼자 다독이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알고 있었다. 그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닥쳐 오는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쉽사리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운 것이었다.

    “일단, 일단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만나야겠다. 사과를 해야 했다. 그리고 가기 전 단 몇 분이라도, 잠깐이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막 씻으러 들어가려던 그때,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어?”

    따로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바로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기사님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움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방 안으로 들어온 것도 그렇지만, 평상시의 사람 좋은 웃음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척이나 무감정한 표정. 기계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얼굴. 생전 보지 못한 얼굴을 한 기사님이 익숙하지 않았다. 왜 갑자기 들어오신 건지,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당황스러움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런 나를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기사님이 힐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서 전하라는 말이 있어 왔습니다.”

    “회장님……?”

    “부친 되십니다.”

    아, 나는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회장님이 누군지 모르는 거, 어떻게 알았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전하실 말은 오늘 당장 미국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고.”

    “네?”

    “도련님께서는 지금 당장 떠나셔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당황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헛소리였다. 뜬금없이 들어와서는 당장 어딜 떠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나는 급하게 머리를 도리질 쳤다.

    “무슨 소리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아니, 갑자기 어떻게 미국에 가요…….”

    “가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 학교도…….”

    “다니실 필요 없잖아요.”

    위화감이 들었다. 여전히 얼굴에 감정이라고는 없었다. 다니실 필요가 없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기사님은 말문이 막힌 나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플레이어 한지헌 님.”

    “……?”

    “게임은 끝났습니다.”

    “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시게 될 겁니다.”

    “……아니, 아니요. 아직 시간이 남았……!”

    “어떤 캐릭터도 공략하지 못했습니다. 게임은 끝났습니다. 플레이어님은 오늘 6월 25일, 아버지의 부름으로 미국으로 떠난 솔로 엔딩을 맞게 되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도무지 정신이 들지가 않았다. 이 사람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이곳이 게임인 걸 알고 있어. 그런데 엔딩이라잖아. 지금 이게……!

    “안녕히 가세요. 즐거운 게임이 되셨길 바랍니다.”

    “아니, 잠깐……!”

    너무 갑작스럽다고!

    내뱉지 못한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나는 두 눈을 떴다. 분명히 뜨고 있었는데, 다시 한번 떴다. 이제 익숙해져 버린 그 방이 아니라 스물다섯 한지헌이 살고 있던 방에서 깨어났다.

    나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분명히 게임 속의 방이었는데. 뭐야, 진짜 끝난 거야? 그렇게 갑자기? 나 아직 작별 인사도 못했는데……? 아무런 말도 없이, 사과도 뭣도 아무것도 못하고…….

    “말도 안 돼.”

    나는 다급하게 일어섰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급하게 컴퓨터의 화면을 확인했다. 당연히 게임의 메인 화면이 띄워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화면은 [50%]라는 안내창만 띄워져 있을 뿐이었다.

    “뭐냐고, 이게. 대체.”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런 끝은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내 이기심이든 뭐든 인사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애들이 내가 사라진 걸 모르더라도, 그 세상은 사라지게 되더라도! 내가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은 줬어야 하잖아.

    “켜져. 제발, 켜지라고!”

    하지만 CD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50%]라는 문구만 떠 있을 뿐이었다. 진짜 끝난 거야? 이제 다시 못 들어가는 거야? 컴퓨터를 껐다가 켜도, CD를 뺐다가 넣어도 똑같았다. 저 50%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결국 그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

    결국 나는 무너지듯 엎드렸다.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런 끝을 원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 다시는 못 보게 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이기적으로 굴걸. 아니, 아니다. 조금 더 착하게 굴걸. 좀 더 같이 있을걸. 이렇게 제대로 정리할 새도 없이 내가 현실에 와 버릴 줄 알았다면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다시는 볼 수 없는 거야, 정말? 정말 이게 끝인 거냐고. 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누구 하나 편하게 마음을 주지도 못한 것 같은데.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뭐냐고!

    “지헌아?!”

    꺽꺽거리며 숨넘어가는 소리가 방 안 가득 들어찼다. 그 소리를 들은 듯 방문을 열고 엄마가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것은 엄마도 마찬가지였던 듯 일단 나를 안았다. 엄마에게 안기자마자 모든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끝났다, 정말로. 나는 현실로 돌아와 버렸다.

    ***

    “너 얼굴이 왜 그래?”

    방문이 열리고 서준영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날 이후 멍청하게 앉아만 있는 나를 걱정한 엄마가 불렀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해 낼 수 있었다. 나는 서준영을 한 번 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는데. 너.”

    꺼져 있던 불을 켜고 서준영이 내 앞에 앉았다. 갑자기 켜진 불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한지헌!”

    “조용히 해. 시끄러워.”

    “미쳤어? 너 왜 그러는데?”

    나는 서준영을 가만히 봤다. 처음부터 하지 말걸. 그런 게임, 차라리 안 겪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나는 금세 고개를 저었다. 시작도 하지 않았으면 만나지도 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정도로.

    “지헌아. 어머니께서 걱정하셔. 도대체 왜 그래.”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준영아.”

    “응.”

    “어떻게 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어?”

    “어?”

    “수진 씨한테 물어봐 주면 안 돼? 어떻게 해야 다시, 그 안으로 갈 수 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서준영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꺼져 있는 컴퓨터를 가리켰다. 서준영이 내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나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지헌아, 너 진짜 왜 이래.”

    “학원 로맨스.”

    “…….”

    “게임 안으로 말이야.”

    나는 간절했다.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 줘. 너무 보고 싶단 말이야. 응? 무너질 듯 위태로운 마음이었다. 서준영의 찌푸려진 얼굴은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르는 건가. 아, 그런가.

    “너는 모르면 수진 씨한테라도……!”

    “지헌아.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데. 어? 너 갑자기 왜 이래.”

    “…….”

    “게임 안이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건데. 게임 안으로 보내 달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수진 씨는 또 누군데?”

    나는 고개를 들어 서준영을 마주했다. 거짓말, 왜 모르는 척하는 거지. 현실로 나왔을 때 직접 회사로 나 데리고 갔으면서. 왜 모르는 척을 하는 거지. 데려갈 수가 없어서? 완전히 없었던 일인 척이라도 하는 건가. 왜? 베타 테스트라고 직접 넣었으면서 왜?

    “서준영.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나도 아니야. 너 진짜 왜 그러는데?!”

    서준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나는 녀석을 계속 바라봤다. 서준영은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 답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꿈이라도 꾼 거야?”

    꿈?

    “서준영.”

    “어.”

    “너 진짜 내가 무슨 소리 하는 줄 몰라?”

    “몰라. 모르겠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모르겠다고? 모른다고? 아니, 네가 모르면 안 되는 거잖아.

    “수진 씨는?”

    “그러니까 수진 씨가 누구……!”

    “윤수진 씨. 이 게임 개발자!”

    “……게임 개발자?”

    준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개발자 이름 중에 윤수진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보는 듯했다. 아니, 네가 지금 이렇게 오래 고민할 일이 아니잖아. 네가 모를 리가……!

    “아냐, 그런 사람 없어. 윤수진. 확실히 없어.”

    단호한 대답이었다.

    말도 안 돼. 그럼 내가 게임 속으로 들어갔던 게 아니라고? 모두 다 꿈이었다고? 엄마가 깨워서 너랑 같이 회사에 갔던 것까지 모조리? 수진 씨를 만났던 것도 전부 다?

    “지헌아. 정신 차려. 왜 그러는 거야.”

    “하.”

    게임 속도 아니었다고? 꿈이었다고. 그럼 진짜 내가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는 거야? 꿈속에 나와 주길 바라는 것밖에 없다고……?

    “아, 준영아. 아, 나 어떡해.”

    “한지헌!”

    눈물이 다시 한번 차올랐다. 진짜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미칠 것 같아.”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아. 어떡해, 준영아.

    나는 무너져 내렸다. 자그마한 희망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결국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제 아예 존재하지 않을 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저 내가 꾸었던 꿈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깨지 말았어야, 깨지 않았어야 했는데 그 세상에서 내가 나와 버리고 만 거다.

    ***

    현실로 돌아온 지 거의 한 달가량이 지났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낸 게 며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의 눈물을 기어이 보고 나서야 나는 몸을 추슬렀다.

    이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모두를 생각할 때마다 여전히 숨이 턱턱 막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그렇게 방 안에 박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이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다잡는 게 힘들었을 뿐이었다.

    조금은 멀끔한 얼굴로 방 밖으로 나왔을 때 안도의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금이나마 바빠져야 했다. 그래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면, 녀석들과의 추억에 완전히 잠식되어 버릴 것 같았다.

    서준영이 다녀간 그날 이후로 아예 컴퓨터는 켜지도 않았다.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기에 그랬다. 학원 로맨스의 CD는 책상 서랍 깊은 곳에 들어가 있었다. 일러스트만 봐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한지헌!”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미리 와 있던 서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준영도 나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었는지 얼굴이 어느새 반쪽이 되어 있었다. 제가 준 게임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건 아닐까, 불안했겠지. 나는 애써 웃음 지었다.

    “살 빠졌어?”

    “별로.”

    별로는 무슨.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것인 듯 아이스 초코를 미리 시켜 놓은 준영은 아메리카노를 먹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다시 한번 머릿속에 떠오르는 잔상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알바를 한다고?”

    “어. 집에 박혀 있으니까 돌아 버릴 것 같아서.”

    “잘 생각했다. 어디서?”

    “저쪽에 카페에서. 전화했더니 면접 보러 오라더라고.”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안 해도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온 나를 보며 안심한 모양이었다. 미안한 감정이 올라오고 있었다.

    “요즘은 좀 괜찮냐?”

    “괜찮아 보여?”

    “……어, 별로 안 괜찮아 보인다.”

    “어. 아직 안 괜찮아.”

    나는 내 귓가에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는 제스쳐를 취했다. 사실 지금도 이게 꿈인지, 그게 꿈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잠을 잘 때마다 다시 그곳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잠에 들었다. 그게 벌써 한 달째였다. 매일 밤 지속되는 기대와 실망에 점차 나는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런 게임 주는 게 아니었는데. 이럴 줄도 모르고.”

    “그게 왜 네 탓이야. 달라고 조른 건 난데. 그리고 그 게임 때문이 아니라 내가 꾼 꿈 때문이지.”

    “어쨌든 그 게임 때문에 꾼 거니까.”

    서준영이 제 머리카락을 짜증스레 흩트렸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그 얘기 그만하자.”

    서준영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억지로 웃지 마. 꼴 보기 싫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챈 준영이 헛웃음을 쳤다. 나는 결국 입꼬리를 내리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날 이후 웃음이 잘 나오질 않았다. 애써서 웃어 보려고 해도 힘겹게 입꼬리를 당기는 게 다였다. 덕분에 내가 확실하게 깨달은 게 있다면 그 모두를 정말 많이 좋아했다는 것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래.”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는 확신. 그것뿐이었다. 그것을 인정하려 들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그래서 애써서 외면하는 중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 믿으면서, 그렇게 하루하루를.

    “면접 몇 신데?”

    “어, 곧.”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안 그래도 일어나려고.”

    남아 있는 음료를 마시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영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날 이후 한 번씩 이런 불편한 얼굴로 서준영은 나를 바라봤다. 아마도 죄책감이 아닐까. 나는 준영의 어깨를 툭 쳤다.

    “하지 마. 징그러워.”

    “말을 해도 꼭.”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서준영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에 마주하기 껄끄러운 얼굴을 하고서 서준영도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낮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정신 차리자, 한지헌. 네 마음 때문에 또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 주지 말자. 네 이기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말자.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던 말을 떠올리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면접을 보기로 한 카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하얀색으로 인테리어한 개인 카페였다. 개인 카페치고는 큰 편이라 막상 앞에 서니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차라리 바쁜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며 카페의 문을 열었다.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어서 오세요’ 하는 짧은 인사말이 들렸다.

    “저…… 안녕하세요. 오늘 아르바이트 면접 보기로 한 한지헌이라고 합니다.”

    “아, 네. 잠시만요. 사장님!”

    단발머리의 여자가 나를 보고 생긋 웃어 보이고는 창가 쪽에 자리하길 권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멍하니 창밖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내가 앉은 테이블이 똑똑 두드려졌다.

    “아.”

    “한지헌 씨?”

    “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내가 여기 사장.”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손을 맞잡으니 웃으면서 위아래로 흔들고는 바로 앞자리에 자리를 잡는다. 사장님은 내 생각보다 조금 더 젊어 보였다. 기껏해야 20대 후반. 그래도 이 정도 되는 카페 사장님이라 조금 더 나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인상이 참 좋네.”

    “하하……. 감사합니다.”

    “억지로 웃지는 말고.”

    “아.”

    눈치 엄청 빠르네. 나는 머쓱하게 두 눈을 내리깔았다.

    “보시다시피 카페가 좀 커요. 청소하는 데 한나절이야, 괜찮아요?”

    “아, 네. 그럼요.”

    “근데 손님은 그렇게 안 많아. 알바 시간 내내 청소만 할 수도 있어.”

    장난스러운 말에 나는 헛웃음을 쳤다. 마음에 안 드나. 일을 시키려는 생각이 없는 사람 같았다.

    “저는 상관없긴 한데요. 차라리 바쁘면 좋고…….”

    “진짜?”

    “어, 네.”

    “그래. 좋아.”

    남자가 배시시 웃었다. 나는 뭐가 좋은지 알 수 없어 두 눈을 깜빡거렸다.

    “내일부터 출근해요.”

    “……정말요?”

    “네. 시급은 최저 임금보다 조금 더 쳐줄 거고 시간은 알고 왔겠지만, 오전 10시부터 4시까지. 궁금한 거 있어요?”

    “아, 아니요.”

    “그래요.”

    사장님은 제 할 말은 다 했다 싶은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일사천리로 진행된 일이라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나도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시고 싶은 음료 있으면 하나 마셔도 돼요.”

    “아. 마시고 와 가지고…….”

    “알바할 가게 말고 다른 데서 마시고 온 거야? 안 되겠네.”

    사장님이 끌끌 혀를 차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마도 빨개졌을 것 같았다. 어김없이 남자가 킥킥거리고 웃었다.

    “장난이에요. 그럼 내일 봐요. 늦지 않게 오고.”

    “아, 네.”

    “아아. 맞다.”

    걸음을 옮기던 남자가 다시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어정쩡하게 다시 한번 손을 맞잡자 씨익 웃어 보인다.

    “서경호예요. 잘 부탁해요.”

    “아, 한지헌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사장님.”

    참, 정신없는 사람이었다.

    ***

    컴컴한 방 안, 나는 조심스럽게 불을 켰다. 내 방에 들어오고 싶지 않아 밖에서 몇 번을 돌고 돌다 보니 어느새 한밤중이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앉아 나는 멍하니 컴퓨터를 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켜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저 서랍 안에는 학원 로맨스의 CD도 들어 있을 터였다.

    나는 한참을 앉아 컴퓨터를 노려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켜 보자. 마지막으로. 버리지 못한 미련이었다.

    컴퓨터의 전원을 눌렀다. 컴퓨터가 켜지는 것을 확인하며 서랍 안에서 CD를 조심스레 꺼냈다. 익숙한 일러스트가 그려진 CD. 또다시 울컥하는 느낌과 함께 목이 메여 왔지만 울지 말자는 생각에 입술을 짓씹으며 꾹 눌러 참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컴퓨터에 CD를 넣었다. 화면을 보는 시선이 초조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저 하얀 화면뿐이었다. 모든 게 꿈이었다면서 왜 게임조차 실행이 되질 않는 건지. 답답한 마음이 차올랐지만, 그 생각도 잠시였다, 하얀 화면 가운데 뜬 분홍색 창 때문이었다. 일전에 50%라는 문구가 떠 있던 그것이었다.

    “100%?”

    하지만 그날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100%였다. 뭐야, 이거? 혹시 나 지금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거야? 갑작스러운 기대감에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렸음에도 그 문구 이후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완료되었습니다’라는 작은 창을 띄우고 그 문구마저도 사라졌다. 게임은 자동으로 종료됐다.

    그리고 끝이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참았던 눈물이 또 울컥 눈가에서 배어 나왔다. 손을 바들바들 떨며 CD를 뺐다 넣어도 봤지만 이제는 그 하얀 화면조차 뜨지 않았다. 나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엎드렸다. 한동안 잘 참아 냈다 생각했던 눈물이 다시금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끝났어.”

    이제 정말 끝났다. 나는 다시는 게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꾸만 숨이 막혔다. 혹시나 새 나갈까 입을 틀어막고 나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더 이상 볼 수 없을 그 얼굴들을 떠올리면서.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

    이른 아침의 서점. 밤새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터라 그냥 아침 일찍 나와 버렸는데 막상 나오고 보니 갈 곳이 없었다. 덕분에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서점이었다.

    바로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서점에 오면 고등학교 참고서를 훑어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이 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발걸음은 저절로 그쪽으로 먼저 향했다. 고등학생 참고서를 멍하니 보고 있던 나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걸 보자, 다른 것.

    낡은 서점을 둘러보며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하지만 딱히 책을 읽는 편도 아니었던지라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베스트셀러 부분을 보다가 다시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다가……. 그렇게 무심하게 책장을 훑어보던 내 눈에 한 책이 들어왔다.

    끝없는 이야기, 미하엘 엔데.

    언젠가의 아침, 강수하가 읽고 있던 그 책이었다. 애써 내게 빌려줬음에도 결국 읽어 보지도 못하고, 돌려주지도 못한 책.

    나는 조심스럽게 그 책을 책장에서 꺼냈다.

    살랑살랑 흩날리던 옅은 카키색의 머리카락, 아침 햇살이 들어오던 교실,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던 강수하. 눈앞에 선연하게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에 또다시 울컥 눈물이 올라왔다.

    울지 말자, 애써 머리를 도리질 쳤지만 어느새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나는 급하게 닦아 냈다.

    ‘읽어 볼래?’

    ‘읽고 줘. 다 읽은 책이야.’

    하지만 귓가를 울리는 강수하의 목소리에 눈가에는 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어떻게든 참아 보려 입술을 짓씹었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시야가 흐릿해진 탓에 선명했던 제목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눈가를 거칠게 닦아 내고 꾸역꾸역 책장을 넘겼다. 다른 생각을 하고 싶었다.

    “어?”

    하지만 채 두 페이지가 넘어가기도 전 코를 찌르는 익숙한 향에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건 분명히…… 강수하한테서 나던 섬유 유연제 향이었다. 그 향이 너무 좋아서 혼자 코를 킁킁거렸던 기억이 선명했다. 심장이 쿵쿵쿵 달음박질을 쳤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강수하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심코 헛웃음이 터졌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이렇게까지 선명할 필요는 없는데……. 입 안이 썼다. 쓸데없는 기대를 했다가 무너지니 겨우 눌러 참았던 눈물이 또 떨어졌다. 서점 한가운데서 눈물을 질질 짜내고 있는 남자를 주위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그 시선에 나는 급하게 눈가를 닦아 냈다.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한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그때,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울렸다. 서준영이었다.

    “어, 왜.”

    -울었어?

    “뭔 소리야.”

    목소리에 티가 났나. 나는 조용히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밖이야, 벌써?

    “응. 좀 일찍 깨서. 왜?”

    -어. 오늘 나 일 끝나고 술이나 한잔할까 해서.

    한숨 섞인 목소리였다.

    “응. 그래, 알바 끝나고 연락할게.”

    -어. 나 들어가야겠다.

    “어.”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직도 그 꿈속에 갇혀 있어서 다들 내 걱정을 하고 있다. 그러니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잊은 척, 괜찮은 척해야 했다. 나는 잠시나마 선명해졌던 강수하의 기억을 애써 지우며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

    “무조건 투샷 들어가거든요. 샷 뽑으면 얼음하고 물 먼저 넣어 두고, 여기에 붓기만 하면 돼요. 쉽죠.”

    “그러네.”

    아르바이트의 첫날. 생각보다 너무 많은 음료의 종류에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그래도 만드는 방법을 다 배우긴 했지만 그냥 다들 아메리카노만 시켜 줬으면 좋겠다는 게으른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빠 근데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응?”

    “아니, 세상 안 좋은 일 있는 사람 같아서…….”

    “아, 그래?”

    “네. 웃으면 엄청 귀여울 얼굴인데.”

    예쁘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건넨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이가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친구였고 무척이나 싹싹했다. 만나자마자 ‘정혜원이에요. 스물둘이고요. 오빠라고 부를게요’ 하고 능청을 떨기에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그 싹싹한 성격에 금세 나도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칭찬 고마워.”

    “아하하하. 웃을 줄 알았는데.”

    머쓱하게 웃는 혜원을 보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방금 전 만든 아메리카노를 손님에게 드리고 나니 바로 정적이 흘렀다. 어제 사장님의 말처럼 손님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찾아오는 사람이 꽤 있는 카페였다. 아기자기하면서도 깔끔해 나름대로 인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사장님 안 나오셔?”

    “아, 오후에 나오실 거예요. 한 2시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글서글하게 잘생긴 사장님의 얼굴이 떠올렸다. 아르바이트 첫 날이라 당연히 사장님이 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기 좋게 빗겨 간 예상에 나는 괜히 머리카락만 만지작거렸다.

    “아, 오늘도 그분 왔으면 좋겠다.”

    혜원이 혼잣말을 하듯 테이블에 등을 기대고 섰다. 멍했던 정신이 그제야 돌아왔다.

    “누구?”

    “아, 사장님 친구분 중에 진짜 정말 엄청 잘생긴 사람 있거든요.”

    얼마나 잘생겼기에 덧붙이는 부사가 세 개나 들어가는 거지.

    “연예인 저리 가라예요. 얼굴에서 막 빛이 난다니까요. 내 생각에는 카페에 오시는 손님 분들 중에는 그분 한번 만날까 싶어서 오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그 정도야?”

    “오빠도 보면 입 딱 벌어질걸요.”

    킥킥거리고 덧붙인 말에 내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잘생겼다는 얼굴을 기억해 내기라도 한 건지 혜원의 얼굴에 홍조까지 생겼다.

    “제 인생에 그렇게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잘생기긴 엄청 잘생긴 모양이었다. 그 애들도 현실에 있었다면 저런 소리 엄청 많이 들었을 텐데. 그렇게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도 독보적으로 시선을 끌던 녀석들이었다. 그러니 분명히 이 현실에 녀석들이 있었다면…….

    아무리 해 봤자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자주 오시니까 오빠도 볼 수 있을 거예요!”

    “응, 그래. 기대되네.”

    “우와, 그렇게 기대 안 되는 표정으로 기대된다고 하면 누가 믿어요?”

    혜원이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 덕에 끝도 없이 이어지던 상념을 지운 내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아, 미안.”

    “아니에요. 미안하라고 한 말은 아니고.”

    혜원은 퍽 장난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마 내가 너무 얼굴을 굳히고 있기에 분위기를 풀려 부단히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알 것 같았기에 표정 관리를 열심히 해봤지만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지내다 보면 점점 괜찮아지겠지. 그래도 내가 단 하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나만 이렇게 마음을 추스르면 된다는 거였다. 다들 애초부터 없었던 세계라면 나처럼 갑작스럽게 좋아하던 사람을 잃은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러면 나처럼 힘들지도 아프지도 않겠지. 나 혼자만 이렇게 힘들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다행이었다.

    “어? 사장님?”

    카페 문이 열리는 딸랑, 소리에 혜원이 기댔던 몸을 바로 했다. 나도 곧장 시선을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오후에나 나올 거라던 사장님이었다. 어쩐지 어제보다 해쓱한 상태여서 당황했지만 혜원은 익숙한 일인 듯 고개를 젓는다.

    “또 술 진탕 드셨구나.”

    “어. 친구가 오늘부터 휴가래서.”

    “근데 더 쉬시지, 왜 벌써 나오셨어요?”

    “새 아르바이트생이 왔는데 그래도 한번 봐야지.”

    비몽사몽한 얼굴로 사장님이 내게 까딱 인사했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어, 나올 생각은 있었던 모양이었다.

    “숙취 해소라고는 눈곱만큼도 안 되신 것 같은데.”

    “……나이가 먹으니까 하루가 다르게 느려진다.”

    “하하. 누가 보면 한 마흔 된 아저씨인 줄 알겠어요.”

    장난스러운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근데 사장님은 몇 살이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닌 것 같은데, 몇 살쯤 됐을까. 어려 보이기는 하는데.

    “지헌 씨. 어때요? 일은 괜찮아요?”

    “아, 네. 혜원이가 잘 가르쳐 줘서요.”

    “어. 벌써 말도 놨어?”

    “그럼요. 제가 또 한 친화력 하잖아요.”

    뿌듯한 얼굴을 한 혜원이 밝게 웃었다. 그에 사장님도 킥킥거리고 웃는다.

    “근데 사장님 그 친구분이 혹시 그 친구분이에요?”

    “누구?”

    “그 있잖아요. 그 엄청 잘생기신 친구분. 그분하고 드신 거예요?”

    “아아.”

    사장님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너 가끔 느끼는 건데 온통 관심이 거기에 가 있다?”

    “그럼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와. 처음 왔을 때는 잘생긴 사장님 있어서 좋다며.”

    “아휴. 사장님도 잘생겼죠. 근데 사장님 친구분이 말도 안 되게 잘생겼잖아요.”

    “아, 이거 좀 상천데.”

    두 사람의 대화에 이쯤 되니 그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잘생겼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 애들처럼 잘생겼을까? 음,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어쨌든 그분도 그럼 숙취 엄청 심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해장국이라도…….”

    “내 친구한테 눈독 들이지 마라. 정혜원.”

    “치.”

    부루퉁한 표정의 혜원에 사장님이 어이없이 웃었다. 나마저도 헛웃음이 나왔다. 귀엽네, 진짜.

    “그래서 뭐 많이 배웠어요? 혜원아, 잘 가르쳤어?”

    “그럼요. 제가 경력이 얼만데요.”

    “어, 3개월.”

    “아, 씨. 3개월이면 아르바이트치고는 충분히 길거든요?”

    두 사람은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만하면 또 다시 투닥거렸다. 저러다가 정분나는 거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친구분 휴가면 자주 오시겠네요?”

    “휴간데 여길 왜 와. 여행 가야지.”

    “아, 진짜요? 아쉽다.”

    단호한 말에 혜원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네가 왜 아쉬워.”

    “아니, 뭐. 지헌이 오빠도 궁금하다고 했거든요. 얼마나 잘생겼는지. 그쵸?”

    “어? 아, 어어.”

    나는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궁금하진 않은데.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아, 맞다니까요. 그러니까 놀러 오라고 해요. 네?”

    “여행 간다니까.”

    사장님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 상황이 정신이 없으면서도 왠지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정신없는 게 좋았다. 어떤 생각도 할 틈이 없었으면 좋겠다.

    ***

    “먼저 들어가 볼게요!”

    “응, 수고했어.”

    카페에서 나서는 혜원을 보며 나는 손을 흔들었다. 원래는 나와 알바 시간이 똑같지만 오늘은 일이 있어서 조금 더 빨리 퇴근한다고 말하며 기분 좋게 발을 굴리던 혜원이었다.

    “아주 신이 났네, 신이 났어.”

    멀어지는 혜원을 슬쩍 보며 사장님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유난히도 발걸음이 가벼워 보이긴 했다.

    “왜요? 일찍 퇴근하면 좋은가?”

    “오늘 뭐 야구 보러 간다던데.”

    야구. 그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혜원이가 야구를 좋아하나 봐요.”

    “정확하게는 야구보다는, 선수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선수요?”

    이야기를 하는 사장님은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혹시 혜원이 좋아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응. 김, 뭐더라? 하여튼 있어. 잘생긴 투수. 아주 그냥 엄청 좋아하지. 경기만 있으면 달려가니까.”

    좋아하는 것 맞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생각과는 별개로 사장님의 말에 떠오른 얼굴이 있었던 탓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지우려 행주를 들었다. 몸을 움직이는 게 잡다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우리 학교 후배라던데. 아, 왜 이름이 갑자기 기억이 안 나지?”

    “사장님 친구분도 잘생겼다더니 그 학교는 뭐가 있나 보네요.”

    “응? 그렇지? 우리 학교가 좀 애들이 잘생기긴 했어. 나만 봐도.”

    꽤 뿌듯한 대답에 나는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잘생긴 얼굴인 건 맞으니까.

    “정혜원이 그 선수 보고 태어나서 그렇게 잘생긴 남자는 본 적 없다고 했지.”

    “아까 사장님 친구분 두고도 그러던데.”

    “입버릇인가 봐.”

    사장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헛웃음이 터졌다.

    “혜원이 좋아하시나 봐요.”

    “……아닌데?”

    “그래요?”

    아니면 말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을 닦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사장님은 나를 졸졸 따라왔다. 왜 따라오지 싶어 의아하게 바라보니 두 눈을 도록도록 굴린다.

    “아, 가니까 나도 모르게 따라왔네.”

    “…….”

    “왜, 뭐. 심심해. 손님도 없는데 왜 일해. 쉬어.”

    “아…….”

    우다다 쏟아 내는 말이 어찌나 어색한지 오히려 내가 더 민망해져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좋아하는 것 맞네. 하지만 덕분에 확신이 들었다. 불그스름해진 얼굴에 한숨이 나왔다. 본인도 내 직설적인 물음에 당황해서 따라왔던 모양이었다.

    “사장님은 휴가 안 가세요?”

    하지만 사장님은 딱히 할 말은 없어 보였다. 결국 내가 먼저 말을 돌렸다. 어색한 탓이었다.

    “어, 휴가? 가야지. 사실 친구랑 같이 가려고 했는데 곧 죽어도 지 혼자 가야겠다고 해서.”

    “혜원이가 말한 분이요?”

    “어.”

    “아, 그래요? 어디로 가셨는데요?”

    “글쎄. 미국이나 가겠지.”

    “미국이요?”

    “응. 보통 휴가로 미국을 가나? 걘 이상하게 맨날 미국으로 가더라.”

    하여튼 별난 놈이야, 하며 사장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휴가 기간이 되게 긴가. 왜 굳이 미국을 가는 거지. 나라고 이해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게요. 미국에 좋은 거 있나.”

    “애인이라도 숨겨 놨나.”

    쓸데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나는 애꿎은 행주만 만지작거렸다. 썩 흥미를 동하게 하는 주제는 아니라 집중이 안 된 탓이었다.

    “하여튼 여기서 일하다 보면 자주 볼 거야.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오거든.”

    “흐음. 혜원이 좋아하겠네요.”

    “……그래?”

    사장님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얼굴에 앞으로는 그 친구분이 카페에 오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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