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게임 같지 않은 게임
[15%]
[D-25]
“어째서 내일이 현충일인데 오늘 안 쉬는 걸까?”
월요일 2교시가 막 끝난 시간이었다. 김현이 징징거리는 투로 말했다. 내일이 현충일인 거랑 오늘이랑 무슨 상관이지 하는 뻘한 생각을 하고는 널브러진 김현을 보며 웃었다.
“왜 오늘 쉬어야 해?”
“샌드위치잖아. 이런 날은 쉬어 줘야지.”
“고2가 너무 많은 걸 바란다.”
안타깝게 널브러져 있던 김현을 향해 강수하가 무심하게 말했다. 덕분에 김현은 ‘옳은 말도 강수하가 하니까 재수 없어’ 소리를 하며 징징거렸다. 월요일이라 많이 피곤한가. 킥킥거리며 김현의 목을 주물렀다. 뭉친 목을 주무르니 김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으, 시원하다.”
“노인 같아.”
“……아니거든.”
방금까지 앓는 소리 낼 땐 언제고 노인 같다는 말에 김현이 몸을 빠르게 바로 했다. 장난인데. 덕분에 김현의 목에서 손을 떼어 낸 내가 턱을 괴고 앉았다.
“공부하기 싫다.”
언제나 그렇듯 수업 시간은 지루했다. 이제 25일 남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일자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 달째 남았을 때부터 세기 시작한 날짜였다. 그러니까 이 게임의 엔딩까지의 시간.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이 게임에서 나가게 될 터였다. 그리고 나면 지금은 내 눈앞에 생생한 모두를 게임 속 일러스트로나 만날 수 있겠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기분이 금세 착 가라앉았다.
“너희 진짜 많이 친한 것 같아.”
김현의 짝꿍이지만 거의 말을 해 보지 않았던 녀석이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그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
“아니, 그냥 그래 보여서…….”
하고 말하더니 싱겁게 웃어 보인다.
“응. 친하지. 내가 지헌이 엄청 좋아하니까.”
김현이 어째선지 자랑스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말에 짝꿍은 ‘아, 또 좋아하기까지 해?’ 하며 웃는다. 그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한 것은 내 쪽이었다. 근데 또 그게 김현다워서 결국 푸흡, 하고 웃어 버렸다.
“혹시 둘이 썸 타는 거 아냐?”
둘이 마주 보고 웃는 것을 가만히 보던 짝꿍이 다시 한번 덧붙였다. 음흉한 눈도 함께였다. 썸?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만한 단어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라 나는 순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김현도 어쩐지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니, 그렇잖아.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 친하니까.”
“썸은 무슨.”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우리를 대신해 강수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끼어든 강수하에 짝꿍은 당황한 듯 보였다.
“아, 그냥 친구라기에는 너무 가까워 보이기에. 장난이야.”
아예 정색을 하고 대답한 강수하 때문에 민망했는지 녀석이 웃으면서 변명했다. 나는 괜히 강수하의 어깨를 툭 쳤다.
“야, 썸이라고 하면 이상하지.”
내 손의 의미를 알기라도 한 건지 강수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끝난 줄 알았던 썸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앞자리에 있던 녀석의 입에서 다시 한번 흘러나왔다. 뒤돌아 앉아 하는 말에 ‘뭐가 이상해?’ 하고 짝꿍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남자끼리 무슨 썸이야. 게이도 아니고.”
“게이?”
“그래. 게이. 썸은 남녀 사이에나 해당되는 거고, 얘들이 그냥 별나게 친한 거지.”
순간 정적이 흘렀다. 다른 세 사람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의미로 입을 다물었다. 놀랐기 때문이었다. 다시금 녀석이 한 말을 곱씹었다. 게이라고 했지? 당황한 잇새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게 뭐야?”
“어?”
“게이가 뭐야?”
처음 듣는 단어에 김현이 흥미롭게 반응했다. 애초에 앞자리 녀석을 제외하고는 전부다 익숙지 않은 말인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수진씨는 분명 남자 버전이라는 둥 이야기를 하며 이런 설정을 넣지 못했다고 말했었으니까.
“남자끼리 사귀는 사람들 게이라 하잖아. 너희 몰라?”
근데 이 아이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혼란스러움에 미간이 좁혀졌다.
“남자끼리 사귀면 게이라고 불러?”
“어. 동성애자라고. 외국에서는 그렇게 부른다던데. 한지헌 너 몰라?”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다고 하기도 모른다고 하기도 어려운 질문이었다.
“아, 그렇구나.”
“응. 너희는 그런 것도 모르냐.”
녀석이 의기양양해졌다. 아무래도 자기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바싹 말라 버린 입술을 축였다. 이상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은 남녀가 사귀는 거잖아. 근데 남자끼리, 여자끼리 만나면 이상한거지. 너 남자끼리 사귀는 거 본 적 있어?”
다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으니 점점 더 자신감이 붙은 듯 녀석은 굳이 내뱉지 않아도 될 말까지 내뱉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짜증스레 짓씹었다.
“그거 이상한 거 아니야.”
나는 녀석의 말을 끊었다.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잠깐 기억 안 났는데, 미국에 꽤 있어. 그런 사람들.”
“진짜?”
“응. 네가 잘못 안 거야, 그거.”
이 게임 속에서는 해당되지 않은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 말에 이번에는 앞자리 녀석이 입을 벌렸다. 조금은 당황한 듯 구겨졌던 김현과 강수하의 미간도 살짝은 펴졌다. 나는 애써 괜찮은 척 웃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수업 준비나 해. 곧 수업 시작한다.”
녀석은 조금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고 돌아섰다. 그제야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
“아아, 진짜 모르겠다.”
내 방 안의 침대 위. 나는 여느 때처럼 대자로 뻗어 있었다. 몸은 편한 상태였지만 안타깝게도 머릿속은 그렇지 못했다. 아니, 진짜 오늘 뭐였지? 갑자기 걔 무슨 소리 한 거지?
오늘 아침, 앞자리 녀석이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게이라고? 이상한 거라고? 그 단어를 네가 어떻게 알고 어떻게 그딴 인식이 심어져 있을 수가 있는 거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내가 수진 씨한테 들은 이야기를 잘못 이해한 건 아닐까. 이 게임에 그런 설정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이해해 보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남자분이시네요, 하던 수진 씨의 말이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게다가 손을 잡거나 사소한 스킨십을 했을 때도 단 한 번도 그런 식의 시선을 받아 본 적 없었고.
“아, 뭔데. 뭐냐고.”
짜증스레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흩트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안 나왔다. 현실로 가서 수진 씨에게 직접 물어본다면 모를까. 혹시 지금이라도 설정을 넣은 것은 아닌지, 이렇게 생겨날 수 있는지. 어디에서 들었다고 해도 애초에 이 게임에 그런 말이 존재를 해야지만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반복하고 반복하던 생각을 털어 냈다. 아무리 궁금한들 내 의지로 게임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나가는 것도 싫었다. 또다시 못 들어올까 봐 전전긍긍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빠르게 겉옷을 챙겨 입었다.
답이 나오질 않는 생각은 그만하고 싶었다. 하도 못살게 굴어 엉망이 된 머리카락 위로 대충 모자를 눌러 쓰고는 방에서 빠져나왔다. 일전에 봐 두었던 공원이나 가 봐야겠다. 찬 바람이 쐬고 싶었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진동이 긴 것으로 봐서는 전환데, 누구지? 무심하게 핸드폰을 꺼내 보니 화면에 ‘이유한’이라는 세 글자가 띄워졌다. 이 시간에 웬일이지, 싶으면서도 차고 올라오는 반가움에 나는 굳이 웃음을 숨기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어, 유한아.”
-어? 밖이야?
막 집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그것을 받자마자 알아채는 게 신기해 나는 킥킥거리고 웃었다.
“눈치는 엄청 빨라 가지고.”
-어딘데?
“집 앞 공원에 산책 가려고.”
-아, 거기가 어디야?
“어, 우리 집 앞?”
-그게 뭐야.
어이없는 웃음소리에 나는 두 눈을 굴렸다. 하지만 딱히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냥 우리 집 앞 공원인데, 뭐라고 말해야 하지,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 즘 이유한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으음, 보고 싶은데.
나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봤다. 마땅히 주소도 뭣도 모르는 터라 아무리 생각해도 설명할 말이 없었다. 결국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쪽으로 갈까?”
-여기?
“응. 병원으로 가면 되는 거 아냐?”
-아……. 아냐. 나 외출 나왔어. 지금 학교 근천데, 괜찮아?
“응. 괜찮아. 그쪽으로 갈게.”
나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혼자 공원에 처량 맞게 앉아 있어 봐야 복잡한 머릿속이 털어 내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택시를 잡아야겠다.
“근데 왜 학교 근처에 있어?”
-아. 누구 좀 만났어. 그리고 병원 다시 가려는데 네가 보고 싶잖아.
해맑은 목소리로 가감 없이 제 감정을 표하는 이유한 때문에 나는 괜히 길바닥을 발로 툭툭 두드렸다. 온몸이 배배 꼬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눈앞에 보이는 택시를 잡았다.
“나 지금 택시 탔어.”
-말 돌리긴.
알 만하다는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택시에 목적지를 말하고 차 시트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 멀지 않은 터라 금세 눈에 익숙한 풍경이 스치고 지나갔다.
“거의 다 왔다.”
-가까운가 보네. 어느 쪽에 있을까? 학교 앞에 있을까?
“응. 아, 도착했다.”
차는 금세 멈춰 섰다. 기본요금밖에 나오지 않는 거리였다.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니 이유한이 밝은 얼굴로 내게 뛰어오고 있었다. 여직 끊기지 않고 있던 전화를 끊고 이유한에게 손을 흔들었다.
“유한아!”
“생각보다 더 빨리 왔네!”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이유한은 바로 내 손을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순간 당황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그에 오히려 이유한이 당황해서 나를 쳐다봤다.
“왜 그래?”
“아, 아니야.”
사실 불안한 감정이 앞섰다. 누군가는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우리를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렇게 손을 잡고 돌아다녀도 되는 걸까? 하지만 다행인지 주위 스쳐 지나가는 몇몇의 사람들은 우리가 손을 잡고 있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에 오히려 의문은 더 커졌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마음이 놓였다.
“근데 약속 있었다고?”
“응. 어, 네 애인들 만났어.”
이유한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애인들이라고 말하니 뭔가 좀 이상해 머쓱하게 웃으니 이유한이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학교 근처의 공원에 다다른 우리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다 말하고 왔어.”
“응?”
“나도 너랑 사귈 거라고.”
“……응.”
나는 힐끔거리며 내 핸드폰을 살폈다. 아무도 연락이 없었다. 사실 이유한이 그런 말을 하고 왔다면, 다른 네 사람 중 누구라도 내게 연락해서 싫은 소리 한번은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무도 연락이 없으니까 이상할 정도였다.
“별말 안 해?”
“응. 처음에 좀 놀라긴 하더라고.”
놀라기만 했을까……. 궁금함이 차고 넘쳤다. 무어라고 말을 했는지 그리고 애들은 뭐라고 답했는지. 그러기로 한 건지, 왜 그러기로 한 건지. 하지만 본격적으로 물어볼 태세인 나를 보며 이유한은 그저 웃어 보였을 뿐이었다.
“물어봐도 뭐라고 말했는지 말 안 해 줄 거야.”
“왜?!”
“내 마음이지.”
장난스러운 얼굴에 어쩐지 이유한의 머리에 땅콩을 한번 먹이고 싶어졌다. 내가 당사잔데 왜 말을 안 해 준다는 건지. 말해 달라고 징징거려 봤지만 절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결국 입만 비죽거렸다. 대체 뭐라고 말을 했기에.
“애들한테 물어볼 거야.”
“응, 근데 말 안 해 줄걸.”
어쩐지 정말 너무 얄미워졌다. 불퉁한 내 입술을 한번 톡 하고 두드린 이유한을 힐끗 바라봤다. 시선을 마주하는 이유한의 얼굴이 순간 진지해져 있었다.
“……왜?”
“지헌아.”
“응?”
“근데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뜬금없지만 아주 조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응?’ 하고 되물으니 이유한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 아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애들이 다 걱정하더라. 오늘 하루 종일 네가 넋을 빼고 있었다고.”
침이 꼴깍 넘어갔다. 표정 관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침 이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네 사람이 얼마나 나를 주의 깊게 보고 있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거짓말.”
불퉁해진 얼굴이었다. 아니라고 해 봤자 믿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마땅히 설명할 말도 없었다.
“그, 너희 반 애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고 그러더라. 김현이.”
하지만 내가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이유한은 거의 대부분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 때문에 신경 쓰는 거야? 이상한 거 아니라고 네가 말했다고 하던데.”
“…….”
모르는 게 뭘까. 정말 다 듣고 왔구나.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때문에 시작한 고민은 맞았지만 이유한이 짐작하는 이유와는 조금은 시점이 비켜 나간 것일 테다. 하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으니까.
“응. 이상한 거 아니긴 한데 막상 들으니까 좀 그렇더라고. 더군다나…….”
“응.”
“그 이상하다는 관계를 나는 무려 다섯 명하고 가지는 거잖아.”
어색하게 웃은 것치고는 그럴듯한 변명이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단박에 이유한이 시무룩해질 만한 정도의 변명이었다.
“싫어. 번복하기 없어.”
시무룩한 얼굴로 이유한이 말했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안 해.”
내 대답에 이유한의 표정이 다시금 밝아졌음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별수 없지. 그냥 걔가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너희가 너무 좋으니까.”
애써 무심한 척 나는 말을 이어 갔다. 이유한은 배시시 웃었다. 네가 아니라 너희라고 말하는데도 너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지헌아.”
내가 하는 생각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밝아진 이유한이 애교스럽게 웃으며 제 팔을 벌렸다.
“안아 줘.”
팔을 벌린 모양새가 안기라는 것 같았는데 말은 안아 주라니. 뭔가 안 맞는 것 같았지만 나는 거절 없이 그 품에 바로 안겼다.
“좋다.”
이유한이 내는 목소리에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이유한의 팔이 나를 감싸 꽉 안았다가 떨어졌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이번에는 제 입술을 톡톡 두드린다.
“뽀뽀해 줘.”
“응?”
“뽀뽀.”
입술을 쭉 내밀고 하는 말은 여전히 애교스러웠다. 하지만 그에 나는 주위를 살폈다. 주위에 사람은 없었다. 고민스러웠다. 해도 되는 걸까? 누군가가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하지만 내 이런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순간 이유한이 직접 내게 다가와 입술을 쪽, 하고 맞댔다가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어…….”
“기다리다 목 빠질 것 같아서.”
“아.”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을까. 불안하게.”
한 품에 이유한이 나를 끌어안았다. 그 걱정스러운 말투에 나는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수십 번, 수백 번 고민한들 무엇 하나 결론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머릿속을 복잡한 것들이 채우고 있었다.
도대체 왜 어떻게 알았던 건지,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기에 그 애가 그런 말을 한 건지, 것보다 애초에 오류는 뭔지 왜 어장 관리라는 건 안 나온 건지, 왜 호감도는 보이지 않는지 생각하고자 하면 한도 끝도 없었다. 나는 급하게 머리를 저었다.
“아무 생각 안 해.”
“거짓말쟁이.”
한숨 섞인 이유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퉁한 목소리와는 상반되게 나를 끌어안은 팔에는 힘이 들어갔다.
“진짜야.”
“내가 믿어 주는 거지, 믿는 게 아니야.”
“그래?”
“그래. 그냥 믿어 주는 거야. 네가 그렇다고 하니까.”
“…….”
“근데 그래도,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답답하면 털어놔도 돼. 나도 걔네들도 다 들어 주고 이해해 줄 수 있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게도 너희들이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을 테지만, 그렇게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위안이 됐다.
“고마워.”
배시시 웃으며 꺼낸 말에도 이유한은 한숨을 내쉬며 내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나는 그 어깨에 얼굴을 묻으면서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미뤄 두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이렇게 가만히 있고 싶었다.
“그럼 유한아.”
“응?”
쓸데없는 생각은 털어 내고 나는 조심스레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왠지 긴장한 듯 나를 토닥이는 이유한의 손길이 무거워졌다.
“애들한테 진짜 뭐라고 했어?”
하지만 그 긴장과는 다르게 내가 물은 것은 오늘 모여서 했다던 대화의 내용이었다. 순간 어이가 없는지 이유한이 웃으며 나를 떼어 냈다.
“뭐야. 긴장했잖아.”
“긴장을 왜 해. 바보야. 무슨 얘기 했는데.”
“별 얘기 안 했어. 그리고 비밀이라니까.”
당황한 듯 보였던 이유한은 금세 또 능청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나를 안으려고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유한의 어깨를 잡아 막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말 안 해 주면 안 안을 거야.”
“와, 치사해.”
“응? 뭐라고 했는데?”
부러 더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이유한이 갈등하듯 두 눈을 굴렸다. 아주 잠깐의 침묵 끝에 이유한이 민망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내가 너 좋아한다고 했어. 너희 모르는 새에 내가 많이 따라다녔다고.”
“으흠.”
“근데 걔들도 네가 나한테 마음 있다고 알고 있던데.”
“어, 진짜?”
이유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야?”
“응.”
하지만 나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애들이 마음이 넓은 거야, 아니면 이유한이 거짓말을 하는 거야. 내가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유한은 석연찮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더 있지?”
“없어.”
“누가 거짓말쟁이인지 모르겠다.”
결국 이유한에게서 민망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말해 줄 의향이 눈곱만큼도 없는 듯 이유한은 내 양 볼을 잡아 왔다.
“말 안 해 주면 안 안을 거라니까.”
“몰라. 싫어. 오늘부터 사귀는 건데 걔들 얘기 이제 그만할 거야.”
내 투정 부리는 말에도 이번엔 이유한이 무척이나 단호했다. 양 볼을 잡은 이유한은 그대로 나를 잡아끌어 제 입술을 맞댔다. 아무런 예고도 없었던지라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가까워진 이유한은 저도 눈조차 감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채로 눈을 휘며 웃고 있었다.
입에 맞닿았던 입술은 아까처럼 잠시 닿았다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유한은 내 눈을 보면서 입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유한의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을 때에야 나는 다급하게 두 눈을 감았다. 그에 이유한이 입꼬리를 올렸다. 맞닿은 입술에 그 감촉이 생생할 정도였다.
어느새 허리로 내려간 손을 나는 맞잡았다. 방금까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머릿속이 쿵쿵 울려 대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이유한이 내게서 천천히 멀어졌다. 애써 꾹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뜨고 이유한을 마주 봤을 때는 그는 다시금 배시시 웃고 있었다.
“아, 진짜 좋다. 한 번만 더 할까?”
그 해맑은 얼굴로 묻는 말에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고야 말았지만.
***
“와, 집 엄청 커.”
“……하하.”
“저번에 기사님 계시는 거 보고 부자인가 보다 생각하긴 했지만, 우와.”
이유한과 나는 지금 우리 집 앞이었다. 택시 타고 가면 된다는 나를 굳이 데려다주겠다고 기어이 우리 집 앞까지 온 이유한이었다. 이럴까 봐 데려오지 않으려 했는데.
그래도 다른 애들과는 다르게 기사님도 한번 본 이유한이니까 괜찮겠지 생각했었지만, 집을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지는 걸 보니 바로 후회가 됐다. 하긴, 나조차도 처음 보고 나서 입이 안 다물어졌었는데.
“얼른 가. 병원 들어가 봐야지.”
“응, 가야지.”
“가. 얼른.”
“……너무 매정한데.”
가라는 말에도 이유한은 내 어깨에 제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아, 들어가야 하는데…….”
하면서도 내 허리를 잡고 놓을 생각은 하지 않아 곤란함에 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사실 힘주어 풀고자 하면 풀 수 있을 터였다. 굳이 안 푸는 건 나도 좀 헤어지기 싫어서겠지.
“좋은 냄새 난다.”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목소리를 내는 이유한 때문에 어깨가 간지러웠다. 나는 키득키득 웃으면서도 이유한의 등에 손을 올려 토닥거렸다. 나도 좀 더 이렇게 있고 싶다.
어차피 내일 학교도 안 가는데 좀 더 늦게 들어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지만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유한은 돌아가야 했다. 나는 결국 손에 힘을 주어 이유한을 밀어 냈다. 한껏 아쉬운 얼굴을 한 이유한이 내게서 멀어졌다.
“얼른 가.”
“치. 알았어. 아, 맞다. 나 수요일에 퇴원해.”
“진짜?”
“응. 그때부터는 통원 치료할 거야.”
기뻐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자 나까지도 기분이 좋았다. 병원에 계속 있는 게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었다.
“좋아져서 다행이다.”
“응. 다 네 덕분이지.”
“그게 왜 내 덕분이야.”
“나 있지, 지헌아. 사실은 아직도 잘 안 믿겨.”
“뭐가?”
“내가 살아 있다는 거.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있다는 거.”
두 눈을 내리깔고 웅얼거리듯 말하는 투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유한이 다시 눈을 내게 똑바로 마주쳐 왔다.
“그러니까 네 덕분이야.”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학교 옥상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겠지.”
“…….”
“날 봐 줘서 고마워.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해 줘서 고마워. 이 말 꼭 너한테 한 번은 제대로 하고 싶었어.”
이유한은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있었다. 쿵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나는 이유한을 마주하고 웃었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가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어?”
“나야말로 고마워. 이렇게 건강하게 깨어나 줘서.”
문득 이유한이 사라졌던 병원에서의 그날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진 이유한, 한동안 깨어나지 않던 너. 사실 깨어나지 않고 이대로 네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었다. 그러니 오히려 무사히 깨어나 준 네게 내가 더 고마웠다. 괜한 짓을 하여 너를 잃을까 봐 무서웠으니까.
“좋아해, 지헌아.”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이유한이 이내 맑게 웃으며 내 목을 끌어안았다. 안는 대로 끌려가며 나는 녀석을 따라 웃었다.
***
[25%]
[D-24]
현충일의 아침이었다. 그 이른 아침부터 나는 분주하게 여기저기를 오가고 있었다. 이유는 아침부터 내게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지헌아, 잤어?
전화 발신자는 김현이었다. 비몽사몽 해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도 못 하고 일단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8시 반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응……. 아침부터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감은 채 물었다. 어젯밤 늦게 잠들어 눈이 부었는지 눈을 뜨는 게 좀 무거운 느낌이었다.
-놀이공원 가자!
“어?”
-놀이공원! 김준까지 셋이 놀러 가자!
“……어?”
-놀이공원! 일어나, 어서. 눈 떠.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억지로 정신을 차려 보려 했지만 말이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어디를 가자고? ……놀이공원?
“놀이공원?”
-응! 가고 싶지! 재미있겠지?
김현은 목소리부터 한껏 신이 나 있었다. 옆에 있는 듯 나도 바꿔 달라는 김준의 목소리와 함께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도 들렸다. 이미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잠결에 헛웃음이 나왔다. 안 간다고 하면 엄청 실망하겠네.
-지헌아!
“응. 준아.”
-조금 더 잘래? 천천히 가도 되는데.
“현이가 엄청 기대한 것 같은데.”
-으음, 티가 많이 나지?
조금 머쓱한 티가 나는 대답에 나는 소리 내서 웃었다. 일어나야겠다. 아침 일찍부터 바쁘게 준비하고 있을 쌍둥이들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침대에 더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준비할게. 가자.”
-진짜?
“응. 한 시간 정도 있다가 봐도 괜찮아?”
-응, 충분해. 천천히 준비해!
김준의 옆에서 김현이 ‘지헌이 간대? 간대?’ 하는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얼마나 가고 싶었으면 이렇게 한껏 들떠 있나 싶기도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바로 씻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여유가 있었지만 혹시라도 늦을까 싶어 분주해졌다.
그나저나 놀이공원은 진짜 오랜만이었다. 사실 놀이 기구를 썩 즐기는 편은 아니라서 고등학교 때 이후로는 한 번도 간 적 없었다. 김현하고 김준은 놀이 기구 잘 탈 것 같은데, 나는 거의 못 타는데…….
롤러코스터 앞에서 한껏 신이 난 표정의 쌍둥이들과 사색이 된 내 얼굴이 어쩐지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되고 있었다.
***
만나기로 한 장소는 놀이공원의 앞이었다. 쌍둥이들은 집 앞까지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겨우 만류하고 잡은 약속 장소였다. 놀이공원 근처에 다다르니 여러 사람의 시선을 한눈에 받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연예인 저리 가라라니까. 카메라만 있었어도 연예인인 줄 알고 사람들이 모여들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준아, 현아”
두 사람은 내 목소리에 동시에 뒤돌아섰다. 나를 보자마자 두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에 나도 손을 흔들었다.
“빨리 왔네!” ㄴㄴㅇ
“응. 너희도 되게 빨리 왔네.”
“우리도 방금 왔어.”
한껏 들뜬 얼굴이었다. 저렇게 좋을까. 놀이공원의 안에서는 꺄아악 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벌써부터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머지않아 내가 저렇게 소리 지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얼른 들어가자. 나 자이로 드롭 타고 싶어!”
……김현의 밝은 얼굴에서 눈물 콧물을 다 빼며 사색이 된 채 자이로 드롭을 타고 있는 내가 얼핏 보인 것 같은 건 착각일까?
불과 한 시간 전, 놀이공원에 같이 가겠다고 대답했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왜 그랬을까, 내가. 놀이 기구라고는 쥐뿔도 못 타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 하지만 거의 울기 직전인 내 속을 알 리 없는 김현과 김준은 그저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우와, 줄 완전 길어.”
공휴일의 놀이공원은 미친 듯이 북적거렸다. 우리도 이 많은 사람들 중 하나겠지만 걷다 보면 어깨를 한 번씩 부딪쳐야 할 정도였다. 김현이 방방 뛰며 타고 싶다고 말했던 자이로 드롭은 적어도 두 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아쉬운 얼굴을 한 쌍둥이들과 다르게 내게서는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많이 타면 두 번 정도겠다. 단 한 번 타는 것만 상상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싫지만.
“오늘 사람 엄청 많다.”
“그러니까.”
일단은 줄 가장 뒤편에 섰다. 6월 초의 날씨는 벌써 여름에 접어들어 가는지 후덥지근했기에 벌써부터 땀이 배어 나왔다.
“나 이렇게 사람 많은 거 처음 봐.”
“그러니까. 보통 이렇게 많진 않은데.”
김현과 김준이 뭔가 아쉬운 눈을 하며 중얼거렸다. 나는 가만히 앞에 서 있는 줄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게임에 들어와 이렇게 긴 줄을 본 것도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당연히 게임이니까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점점 현실하고 비슷해지고 있는 것 같은…….
정도를 모르고 커질 것 같은 상념에 나는 급하게 머리를 털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어제 이후로 사소한 것까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목마르다. 내가 음료수라도 사 올게.”
“어? 같이 가.”
“나도 갈래.”
가만히 서 있자니 왠지 입이 바짝바짝 말랐기에 콜라 한잔이라도 먹고 싶어진 내가 발걸음을 옮기려 들자 녀석들이 나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덕분에 나는 두 발자국도 못 움직이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럼 줄은 누가 서?’ 하니 녀석들도 머쓱하게 웃는다.
“그냥 우리 둘 중에 한 명이 다녀오자.”
“그래. 가위바위보?”
“좋아.”
갑작스레 두 사람이 저들끼리 가위바위보를 시작했다. 내가 가려고 했는데, 뻘한 생각이 들었지만 저 두 사람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기에 나는 그냥 녀석들이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어차피 내가 가겠다고 해도 자기들이 가겠다고 우길게 뻔했다.
“가위바위보!”
누가 보면 사생결단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싶을 만큼 진지한 얼굴을 하고 둘이 동시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김준은 가위, 김현은 주먹. 김현의 승리였다. 김준은 무너졌고 김현은 승리에 환호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음료수를 사러 가는 쪽이 위너였다. 그나마 거긴 좀 더 시원하니까.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뜩 기분이 좋아진 김현이 입을 열었다.
“얼른 다녀와. 지헌아, 뭐 마실 거야?”
“난 콜라.”
“나도 같은 걸로!”
“아, 씨. 김현한테 지다니 진짜 굴욕이다.”
아무래도 김준은 김현에게 진 것이 무척 기분 나쁜 모양이었다. 어쨌든 녀석은 줄에서 이탈해 근처 음료수 가게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줄에는 김현과 나만 남았다. 나는 줄어들 기미가 없는 줄의 끝을 한번 보다 차라리 집에 갈 때까지 짧아지지 않았으면 싶은 생각을 했다. 자이로 드롭이라니, 단 한 번 타 볼 생각도 한 적 없는 것이었다.
“아, 지헌아. 혹시 놀이공원 좋아해?”
김현이 물어볼 타이밍으로는 한참을 늦은 지금에서야 내게 물었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저으려다 참고 끄덕였다.
이거 탈 생각에 잔뜩 신이 나 있는 얼굴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었다. 녀석 성격에 내가 싫어한다, 못 탄다 하면 분명히 자신도 안 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김현의 얼굴은 내 예상대로 환해졌다.
“다행이다. 난 놀이기구 엄청 좋아하거든. 혹시나 너 못 타는데 억지로 데려온 걸까 봐 걱정했어.”
역시 긍정하길 잘했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면 시무룩해졌을 김현이 보지 않았는데도 왠지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아냐. 근데 갑자기 웬 놀이동산이야?”
“그냥. 오늘 아침에 눈을 떴는데 너랑 너무 가고 싶었어. 근데 김준한테 걸려서 혹 하나 달고 오긴 했지만.”
김현은 입을 비죽거리며 김준을 혹이라 표현했다. 그게 또 못내 귀여워 푸흐흐 웃었다.
“사실 매일매일 보다가 하루 못 보면 보고 싶기도 하고 말이야.”
무심한 듯 말을 던지면서도 금세 김현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오히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나까지도 민망함이 감돌았다. 귀엽다니까. 슬그머니 머리를 긁적이며, 나는 그새 짧아지는 줄에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침묵. 김현은 여전히 민망한 모양이었다.
“아, 맞다.”
잠시 둘 다 말이 없다 보니 무심코 어제 이유한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제 다 같이 만났다고 했었지. 그럼 혹시 이유한이 말 안 해 준 내용을 쌍둥이들은 말해 주지 않을까? 나는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현이를 마주했다.
“현아, 어제 혹시 유한이 형…….”
“지헌아, 콜라!”
혹시나 싶어 조심스레 꺼내던 말은 생각보다 빨리 나타난 김준 덕분에 뚝 끊겼다. 김현의 동그란 눈이 나를 마주하다 휙 돌아섰다. 나는 일단 김준이 건네준 콜라를 받아 들며 머쓱하게 웃었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김준이 커피를 들고 웃으며 물었다. 나는 콜라를 한 모금 쭉 들이켰다.
“어제 유한이 형 만났다며.”
“아.”
해맑게 물어 오던 김준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그런 표정 변화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 나는 괜히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다시금 묻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어, 들었거든. 대충.”
“응. 뭐. 그렇게 됐어.”
대수롭지 않은 척 김현이 말했다. 나는 괜히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
“……이상하지 않았어? 뭐,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하기로 한 거야? 유한이 형이 뭐라고 했길래…….”
사실 물으면서도 영 껄끄러웠지만 궁금한 것은 궁금한 거였다. 김준과 김현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버린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미안한데 지헌아. 그건 비밀.”
“……왜?”
“우리 마음이야.”
김현과 김준이 동시에 어깨를 으쓱했다. 어렵사리 꺼낸 질문이 비밀이라는 말로 뚝 끊어져 버리니 억울해져 입을 비죽거렸지만, 그 입술이 금세 김준에게 잡혀 버렸다.
“몰라. 기억 안 나. 나 기억 상실이야.”
무척 장난스러운 말이 돌아왔다. 나는 왠지 불퉁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지만 더 이상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아예 고개를 저어 버린 두 사람이 절대 내게 말을 해 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말을 했길래 쌍둥이들도 말을 안 해 주는 거지. 궁금증만 더욱 커지고 있었다.
“금방 여름 될 것 같아.”
“그러게. 지금 물놀이 가도 될 듯.”
그 이후로 30분 정도 시간이 흘러갔다. 어제의 일에 대한 것만 제외하고 김현과 김준은 다른 말에는 곧잘 대답했다. 그렇게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줄은 그런대로 많이 짧아져 있었다. 애초 두 시간을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한 시간 내로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점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이번 여름에 놀러 가자. 지헌아.”
“응?”
“바다 가자. 바다.”
“아, 바다 좋다. 우리 부산 갈까?”
멍하니 자이로 드롭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있던 내게 김준과 김현이 해맑게 물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여름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기간이 정해진 나는 맞이하지 못할 계절이었다.
“왜애, 가기 싫어? 어쩐지 안 내키는 표정인데.”
“아냐. 안 내키긴.”
“가자. 바다 놀러 가고 싶어. 별로 좋진 않지만 강수하랑 장우진도 데려가자.”
“…….”
“뭐, 유한이 형도.”
싫다고 말할 수는 없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하는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저기요.”
내 끄덕임에 얼굴이 환해진 김준과 김현의 사이로 모르는 여학생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낯선 사람에 두 사람이 벙벙한 표정을 했다. 아까부터 저쪽에서 김준과 김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여학생은 김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혹시 김준 선수 아니에요?”
나는 그 말에 입을 헤, 벌렸다. 와. 김준을 아는 사람도 있구나. 하긴, 생각해 보면 야구장에서 김준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팬들이 꽤 많았었다. 그런 팬들 중 한 명인가. 여학생의 친구들이 뒤에서 꺅꺅거리며 오히려 더 수줍어하고 있었다.
“와, 김준 인기 좀 봐.”
“그러니까.”
우리는 장난스럽게 킥킥거리며 김준에게도 들릴 만한 소리로 말했다. 김준이 민망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그 팬으로 보이는 여학생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혹시 사인해 줄 수 있어요?”
“어, 저 사인 없는데”
“그럼 사진 찍어 주시면 안 돼요?”
곤란한 얼굴로 김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해 줘, 해 줘’ 하자 그제야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학생은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져서는 김준을 향해 그리고 우리를 향해 두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김준이 학생의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고서 머쓱하게 웃을 때까지 김현과 나는 여전히 킥킥거리고 웃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노세요!”
여학생은 모든 목적을 달성한 사람처럼 밝은 얼굴로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사라졌다. 김준은 어색하게 손을 휘휘 저으며 인사했고 김현과 나는 그냥 고개를 까딱거리며 웃었다.
여학생이 사라지고 나자 그 자리에는 얼굴이 잔뜩 붉어진 김준만이 남아 있었다.
“준아. 너 인기 너무 많은 거 아냐? 벌써부터 막 알아보고.”
“아니야, 그런 거.”
“왜 민망해해. 네가 잘생겼는데 야구도 잘해서 그런 걸.”
킥킥거리고 웃는 내 말에는 분명 진심이 가득했다. 덕분에 김준의 얼굴은 더더욱 붉어졌지만 어째선지 김현의 얼굴이 불퉁해졌다.
“나는?”
김현이 김준과 내 사이에 들어왔다. 잔뜩 골이 난 표정이었다.
“어? 현이 너도 잘생겼지. 물어 뭐 해.”
“하아.”
그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나? 나는 김준을 바라봤다. 혹시나 김준은 현이가 듣고 싶은 말이 뭔지 알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준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슬그머니 김현의 손목을 잡았다. 그에 김현의 시선이 내 손을 따라오고 있었다.
“왜 그래? 응?”
“……지헌아.”
김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건지 몰라 나는 잡은 손에 힘만 줬다. 딱 안아 주고 싶은 표정인데 여기는 바글바글 사람이 많은 놀이공원의 중심이었다.
“김준은 야구 해서 더 멋있지?”
“응?”
“김준은 야구, 그니까 자기가 할 거 다 정하고 열심히 하는데. 나는……. 나는 나중에 뭐 하지.”
그 불퉁한 표정의 원인이 그거였나. 나는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중이었다.
“강수하도 장우진도 다 자기가 할 건 생각해 놓고 살던데…….”
아무래도 저 혼자 비교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벌써부터 강수하나 장우진은 미래도 다 생각해 놨나, 대단하네. 나 그 나이 때는 그런 거 생각 안 했었는데…….
잠시 든 뻘한 생각은 접어 두고 나는 김현의 팔을 당겼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이자 나는 씨익 웃었다.
“현아.”
“……응.”
“나도 안 해. 그런 생각.”
“…….”
“우리 아직 애야. 아직 열여덟밖에 안 됐어.”
배시시 웃는 내 얼굴에 김현이 조금은 어이없이 웃었다.
“천천히 지나다 보면 하고 싶은 거랑 내가 잘하는 게 생기겠지. 응?”
“……그렇겠지?”
“그나저나 놀이공원 그렇게 오고 싶어 하더니 그렇게 시무룩하게 있을 거야? 줄 거의 다 줄어들었는데, 그냥 타지 말까?”
부러 장난스럽게 한 말에 김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 말처럼 어느새 줄은 몇 걸음이나 앞으로 당겨져 있어 곧 나는 자이로 드롭에 몸을 싣게 될 예정이었다.
“아, 탈 거야!”
그새 밝아진 김현이 짧아진 줄에 걸음을 옮겼다. 아, 안 탄다고 했어도 괜찮은데. 아쉬운 마음이 샘솟았다.
***
“말을 하지 그랬어.”
눈썹을 팔자로 늘어트린 김현과 김준이 내 양쪽에 앉았다. 저런 놀이 기구는 도대체 누가 만든 걸까? 나는 욕지거리가 나오려는 입을 애써 틀어막았다. 욕보다 오바이트가 더 먼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니까, 왜 억지로 참고 타. 바보냐고.”
속상한 김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웃을 힘도 없었다. 사실 조금 얕봤다. 그냥 올라갔다 내려오는 거니까 금방 끝나겠지, 하고. 그 생각은 안전 바가 내려옴과 동시에 사라졌었다.
“이렇게 무서울 줄 몰랐어.”
“괜찮아? 속 안 좋으면 화장실이라도 다녀올까?”
“괜찮아. 조금만 쉬면 될 것 같아.”
두 사람은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한참 만에 겨우 하나 탔는데 나 때문에 더 못 타게 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나 여기서 쉬고 있을 테니까 뭐라도 타고 올래?”
“너 여기에 두고 뭘 타. 괜찮아.”
“그래도…….”
“됐어. 너 없으면 하나도 재미없어.”
“맞아.”
쓸데없이 단호했다. 그래도 아주 조금 시간이 흐르니 울렁거리던 속은 진정이 되어 갔다.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나 이제 좀 괜찮아.”
“그래? 그럼 이제 일어날까?”
“어디 가게?”
“회전목마 타러.”
김준이 제 어깨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속이 좀 가라앉은 참이라 따라 일어서긴 했지만 회전목마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거 타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볼멘소리를 해 봤지만 이미 녀석들에게는 먹히지 않는 듯 보였다.
“진짜 괜찮은데.”
“그럼 바이킹?”
“어, 그래.”
“그래는 무슨. 얼굴이 사색이 되어 놓고는.”
“아까도 저랬을 텐데 왜 몰랐지, 우리?”
“그러니까.”
쌍둥이들이 어이없이 웃으며 양쪽에서 나를 끌었다. 꼼짝없이 회전목마를 타러 갈 모양이었다. 그렇게 얼굴에 티가 났나? 아, 물론 당연히 바이킹은 싫었다. 속이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은 분명히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걸음을 옮긴 우리는 회전목마 앞에 다다랐다. 어린아이들이 아니고서야 요즘은 잘 타지 않다 보니 자이로 드롭과는 비교도 안 되게 줄도 짧았다. 왠지 좀 창피했지만,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는지 김현이 바로 뛰어가 줄을 섰다.
“회전목마 엄청 오랜만에 타 봐.”
“나도!”
스릴 있는 놀이 기구도 못 타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신이 난 듯한 두 사람이 방방거렸다. 우리 차례가 되자 김준과 김현이 먼저 말에 올라탔다. 모르겠다. 나도 왠지 창피하다는 생각을 접은 채 말을 하나 잡고 올라탔다. 올라타고 보니까 신나는 것 같기도 했다.
“지헌아 같이 탈까?”
“굳이?”
“응, 원래 연애는 ‘굳이’스러운 걸 하는 거야.”
김현이 야살스레 웃었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어 가지고, 헛웃음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김준이 시끄럽다고 훼방을 놓아서 진짜 같이 앉진 못하게 됐지만 그럼에도 즐거운 듯이 보였다.
회전목마가 느리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돌았다. 오랜만에 타니까 이것도 재밌네. 나는 킥킥거리고 웃었다. 다 큰 남자애들 셋이 회전목마에 올라타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긴 했지만 우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음은 범퍼카!”
물 만난 고기처럼 김현이 뛰었다. 어쩜 저렇게 신이 났을까 싶으면서도 왠지 나도 어린 시절 동심이라도 찾은 것처럼 들떠 왔다. 울렁거리던 속은 이미 다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김현을 따라 뛰며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김준에게 손짓했다.
“빨리 와, 준아.”
“응. 가자.”
그에 뒤처져 있던 김준이 빠르게 내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쌌다. 잠시 움찔하긴 했지만 나는 웃으면서 범퍼카를 향해 걸었다. 아주 기분 좋은 휴일이 된 것 같았다.
***
[D-23]
“아, 진짜 죽을 것 같아.”
“너 체력 진짜 어떡하냐…….”
수요일의 아침. 어제 놀이공원에서 한바탕 뛰어다녔던 덕분인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온몸을 누군가 때린 것같이 아팠다. 어떻게 학교에 오긴 왔는데 온몸이 쑤셨다.
별로 격정적인 놀이 기구는 타지도 않았는데. 자이로 드롭 한 번에 그 이후부터는 그냥 회전목마, 범퍼카, 회전컵……. 그따위의 것들이었는데…….
“범퍼카 때문인 것 같아. 이래서 교통사고는 무서운 거야.”
“김준이랑 나는 멀쩡한데?”
“…….”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김현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너희들의 체력을 내가 따라갈 수 있겠냐마는 내 체력이 유난스럽게 저질인 것도 사실이었다.
“재밌었어?”
키득거리는 김현의 뒤로 강수하가 불퉁한 얼굴로 물었다. 놀이공원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쭉 저 얼굴이었다. 강수하에게도 장우진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간 거라 미안함에 어색하게 웃는 내 대신 김현이 입을 열었다.
“먼저 찜한 사람이 임자야, 몰라?”
그 말이 썩 강수하의 불퉁한 얼굴을 잠재워 주지는 못했지만서도.
“너 그 말 후회하지 마라.”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강수하는 김현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하지만 김현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해 보였다.
“내가 후회를 왜 하냐.”
유치하기 그지없는 말투. 그 위로 파지직 스파크가 튀는 것 같은 두 사람을 뒤로하고 나는 그냥 책상 위에 엎드렸다. 피곤하다, 나는 모르겠다. 그러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사실 어제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잠만 자려고 하면 온갖 상념이 들어차는 탓이었다.
“피곤해?”
“한숨 자게 둬. 너희 따라다녔으면 힘들었겠지.”
“흐음.”
둘이 티격거릴 때는 언제고 내가 엎드리자마자 조용해졌다. 아마 김현도 강수하의 말에 어느 정도는 수긍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10분이라도 두 눈을 붙이고 싶었다.
“어? 김현. 어제 놀이공원 갔었어?”
슬금슬금 정신이 아득해져 가고 있었다. 그때 몽롱한 정신에 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문이 빠르네,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어. 왜?”
“사진 떴길래. 김준 놀이공원에서 봤다고.”
하지만 곧이어 들린 말에 나는 결국 눈을 뜨고 부스스한 몸을 일으켰다. 사진이 떴다는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어디에 사진이 떠?”
“포털 메인에 떴는데? 존잘 야구 유망주래.”
녀석이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김현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한걸음에 다가간 김현이 녀석이 보고 있는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여기 봐 봐, 완전 댓글도 난리야.”
하며 녀석은 설명까지 덧붙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아주 흥미롭게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김현의 미간이 서서히 접혔다.
“글도 웃겨. 꼭 셋이 사귀는 것처럼 친해 보였대. 완전 웃긴다.”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덧붙인 말에 나는 김현이 들고 있던 녀석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어제 김준과 찍은 셀카로 시작한 글은 그 외에도 우리가 놀고 있는 사진을 몰래 찍은 것으로 몇 장이 더 채워져 있었다.
이렇게 찍어도 된다고 한 적 없는데,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보다 더 짜증스러운 것은 아래 한 번씩 달려 있는 사족이었다.
[저 작은 친구 분을 엄청 애지중지하는 것 같았어요. 엄청 친한 친구인 듯.]
[꼭 셋이 사귀는 것 같지 않아요?]
[사진 찍어 줄 때도 저분이 찍으라고 고개 끄덕이니까 그때서야 찍어 줌. 정말 엄청 친해 보였어요.]
“아.”
저절로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나저나 김준 선수 진짜 잘생겼다. ㅋㅋㅋ]
[키 비슷한 분이 쌍둥이래요? 와, 쌍둥이도 엄청 잘생겼어.]
└[ 그러게요. ㅋㅋㅋㅋㅋ 유전자 어디 안 가나 봄.]
[근데 쌍둥이들이 저 친구분만 보고 있는 거 같은데 저만 그렇게 생각하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귀는 거 같음. ㅋㅋㅋ]
└[셋이 같이 사귀는 거 아님?]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ㅋㅋㅋ 남자들이에요.]
└[김준 선수 제대로 운동 시작하기도 전에 끝내게 하고 싶으세요? 왜 그러세요. ㅋㅋㅋㅋㅋㅋㅋ]
댓글은 갈수록 가관이었다. 마지막 댓글까지 읽어 낸 나는 결국 핸드폰을 주인의 손에 돌려주며 머리를 헝클였다. 저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장난스럽게 쓴 이야기들이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그러지 마. 친해 보인다는 걸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 같은데.”
내 짜증스러운 반응을 이런 식으로 엮었음에 대한 짜증으로 해석한 것인지 핸드폰을 돌려받은 녀석이 머쓱하게 웃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때문에 짜증이 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동성애라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적어도 나는 괜찮았다. 이상하게 생각하건 말건, 익숙하게 받아 오던 시선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를 제외한 모두는 달랐다. 단 한 번도 이상하다는 생각은커녕 그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본 적도 없었을 터였다. 나를 안 만나고 있다면 모를까, 만나기 시작한 지금 이 상황에 이런 말을 듣게 된 모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이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이방인 같은 것은 아닐까? 내가 비정상이구나. 나는 사람들과 다르구나. 내가 틀렸구나,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처음 내 성적 취향에 대해서 깨달았던 딱 이맘때 어린 날의 나처럼.
그때 그 괴로웠던 마음을 나로 인해서 모두가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참을 수 없이 괴로워졌다. 내가 편하게 모두와 함께 지냈던 건 적어도 그런 시선은 겪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그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서 차라리 수진 씨가 내가 남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 세상이 그것을 깨닫도록 바뀌고 있다면…….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미 비정상적인 관계인데.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수하와 김현의 시선이 빠르게 나를 좇았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같이 갈까?”
“괜찮아. 금방 다녀올게.”
복잡한 머리를 털어 내고 싶었다. 그런 머릿속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은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
“열려 있네.”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해 봐도 짜증스러운 기분은 풀리질 않았다. 결국 수하에게 잠을 못 자서 너무 피곤해 양호실에 가 있겠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려 달라고 문자를 보내 놓고 바로 옥상으로 온 참이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냐며 지금 양호실로 오겠다는 답장이 왔지만 괜찮다고 다시 한번 답장을 보냈다.
[한 시간만 쉬다 갈게.]
하고 문자를 보내자 바로 답장이 왔다.
[응.]
그 답장을 보고 나서야 나는 옥상의 문을 열었다. 폐쇄되었다던 옥상 문은 어느 날부터인가 열려 있는 일이 많았다. 아무래도 관리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조심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사고가 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보니 점점 관심에서 잊혀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옥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다.
“어, 한지헌?”
하지만 그 옥상에 장우진이 있는 것은 내 예상 안의 일은 아니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너 왜 여기 있어?”
“넌 수업 어쩌고 왔어?”
장우진의 손이 내 머리를 아프지 않게 툭 쳤다. 나는 입을 비죽거렸다. 생각을 좀 하고 싶어서 옥상에 올라왔는데 생각은커녕 혼만 났다. 자기도 지금 옥상 위에 올라와 있으면서……. 금세 불퉁해진 내 얼굴에 장우진이 헛웃음을 쳤다. 여전히 내 얼굴은 불퉁한 채였다.
“여기서 뭐 해?”
“……그냥, 바람 쐬고 싶어서.”
“나도 바람 쐬고 싶어서 올라온 거거든.”
내 대답에 장우진이 어이없이 웃었다.
“수업 안 듣지.”
“선생님이냐고.”
잔뜩 잔소리를 퍼부을 것 같아 나는 고개를 휙휙 젓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장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근데 무슨 일 있어?”
“뭐.”
“표정이 완전 안 좋은데.”
그새 표정이 풀린 장우진이 내 머리카락을 살짝 쓸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별일 없어’ 하고 대답했다. 그냥 쓸데없이 나 혼자 생각이 많은 것뿐이었다.
나는 옥상에 누웠다. 뻥 뚫린 하늘이 무척이나 높았다. 멍한 눈을 깜빡였다. 대체 이 게임 속은 나한테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걸까? 튜토리얼과 수진 씨에게서 들은 내용, 그리고 지금 이 게임 속은 무엇 하나 같은 게 없었다.
심지어 이제는 정보 창도, 남자 친구 탭도, 설정 창도 아무것도 안 떴다. 이제는 이 세계가 게임이 아니라 실제라고 해도 수긍이 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게임이라고 할 만한 증거가 될 게 단 하나도 없다는 거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데.”
“별생각 안 해.”
“거짓말하네. 머리 복잡한 거 티 나는데.”
장우진이 무심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뺨을 한번 쓸고 멀어졌다. 무심한 표정과는 상반되게 그 손길이 무척이나 다정해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너도 다른 애들도 나를 이렇게 좋아해 주는 걸 보면 게임이 맞긴 맞네, 시답잖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말하기 싫어?”
“나중에 얘기할게.”
“그래, 그럼.”
장우진은 깊게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에 나를 따라 하늘을 보고 누웠다. 수업 종이 울리는 소리가 옥상까지도 들려왔다. 어라, 근데 장우진 수업은…….
“우진아 너 수업은?”
“그러는 너는?”
“어? 나 아프다고 거짓말했는데.”
“……까져 가지고.”
“아, 씨. 근데 너는?”
“몰라. 원래 잠깐 있다 가려고 했는데 안 들어가지 뭐.”
“누가 누굴 보고 까졌다고 하는 거야?”
그 태연한 대답에 어이가 없어진 내가 헛웃음을 치자 장우진이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느새 녀석은 나를 향해 돌아누워 있었다. 그쪽으로 고개만 돌려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다시 한번 푸흐흐 웃는다.
“엄청 심각한 얼굴로 들어오길래 걱정했잖아.”
“아…….”
“요즘 혼자 뭐가 그렇게 복잡하냐, 너는.”
살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손길이 좋아서 가만히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복잡한 머릿속이 장우진의 손길이 머리에 닿을 때마다 깨끗해졌다. 깊은 숨을 내쉬었다. 늘 그랬듯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머릿속에서는 결론을 지을 수가 없는 문제였다.
“너야말로 안 좋은 일 있어?”
“없는데.”
“근데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장우진이 내 눈을 가만히 마주쳐 왔다. 새카만 눈동자를 곧게 마주하니 심장이 울렁거렸다.
“……너 보려고 그랬나 보지.”
“어?”
“못 들었으면 말고.”
방금까지 마주하고 있던 얼굴이 정면으로 돌아섰다. 나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다 설핏 입가에 웃음이 걸리는 것도 순간이었다. 나는 턱을 받치고 엎드렸다. 장우진은 나를 힐끗 보더니 조금은 붉어진 얼굴을 하고 하늘만 보고 있었다.
“나 마주치니까 좋구나.”
“뭐라는 거야.”
“응? 너도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사람 설레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또 순식간이었다. 여기 오고 나서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기분이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것이 일상이 된 것 같았다.
“그새 또 기분 좋아졌네.”
장우진은 그런 내 기분을 무척이나 빠르게 파악했다. 이래서야 거짓말도 못 하겠다니까, 무심한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나는 다시금 빙글 돌아 장우진처럼 하늘을 보고 누웠다. 그냥 높기만 했던 하늘이 이제는 청량하게 보였다. 나도 참 단순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먼저 몸을 움직인 것은 장우진이었다. 갑작스레 장우진의 손이 내 허리께로 옮겨 왔다.
“어?”
순간 당황한 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장우진을 쳐다본 것도 잠시, 순식간에 내 몸이 당겨졌다. 허리를 감은 손은 그대로였다. 다만 내 고개 뒤 제 팔을 끼워 넣은 덕에 영락없이 팔베개를 한 꼴이 됐다.
“뭐 해?”
“너 좀 자라고.”
나를 향해 돌아누운 장우진의 목소리가 꽤나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나는 좀 더 붙어 있고 싶고.”
“……어?”
“이렇게 둘만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화르륵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나는 바보처럼 하늘만 보며 두 눈을 깜빡거렸다. 허리께에 있던 장우진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 내 눈을 감쌌다. 따뜻한 손이 두 눈에 닿자 무거운 눈꺼풀이 내려와 앉았다.
“좀 자. 깨워 줄게.”
여전히 내 눈가를 덮고 있는 장우진의 손을 굳이 떼어 내려 하지 않고 나는 ‘응’ 소리를 내뱉었다. 그때 입가에 무언가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순간 반짝하고 눈을 뜨려 했지만 여전히 눈가에는 장우진의 손이 닿아 있었다.
“베개값. 잘 자.”
터질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 그럼 조금만, 잘게.”
“어.”
심장이 쿵쾅거려서 바로 잠들지 않을 것 같았는데 눈이 무거워서인지 내가 잠이 들 때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아마 좀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인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장우진의 가슴팍이었다.
와, 나 진짜 잠들었어?
“어, 장우진. 자?”
“깼어?”
“응.”
“엄청 잘 자네.”
잠긴 내 목소리와는 다르게 장우진의 목소리는 멀쩡했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내가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장우진은 품 안에서 나를 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손길에 다시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좀 더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눈에 힘을 줬다.
“얼마나 지났어?”
“한 30분쯤?”
“어, 꽤 잤네. 진짜.”
“응. 팔 저려.”
눈을 떴음에도 가만히 누워 있던 나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에 뻣뻣하게 힘을 줘 들었다. 30분 이상을 내 머리에 팔을 대고 있었으면 저리겠다.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팔에서 무게감이 갑자기 사라지니 장우진이 웃으며 나를 토닥이고 있던 손을 머리로 옮겼다. 그러고는 꾹 누른 덕분에 나는 다시 장우진의 팔에 머리를 기댈 수밖에 없었다.
“팔 저리다며.”
“장난이지.”
“완전 진담 같았는데…….”
나는 툴툴거렸다. 웃는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베개값 더 줘. 그러니까.”
무심한 듯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기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내려다보고 있었는지 시선이 맞물렸다. 푸흐, 하고 웃음을 흘린 것은 금방이었다.
“베개값?”
“응.”
잠들기 직전 설렜던 그 감정이 다시금 올라왔다. 나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장우진의 옷깃을 붙잡았다. 의아한 듯 보는 눈이 내가 진짜 베개값을 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래서 아주 조금 오기가 생겼다.
나는 재빨리 장우진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댔다가 떨어졌다. 웃고 있던 장우진의 입매가 빠르게 굳었다.
“아.”
“……그럼 나 좀 더 베고 있는다.”
아, 민망해.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막상 저질러 버리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장우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오그라드는 민망함에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라왔다.
“한지헌.”
“……왜.”
“잠깐만 고개 들어 봐.”
나는 좀 더 그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땅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절대 고개를 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도리질까지 쳤다. 짧게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오나 싶었다. 그러다 순간 내 몸이 정면으로 돌아 세워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엄마야!”
갑자기 몸이 돌아간 것도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정면으로 누운 내 시야에 보이는 것은 아까의 그 하늘이 아니라 장우진의 얼굴이었다.
내 위로 팔을 세워 엎드린 장우진의 얼굴이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고개를 돌려 보려고 했지만 장우진의 손이 내 뺨을 감싸 왔다. 가만히 눈을 마주치고 있는 탓에 발가락이 꼼지락거려졌다. 그 차분한 시선이 못내 심장을 떨리게 만들고 있었다.
“얼굴 빨개졌다.”
“아, 그……. 이씨. 이렇게 있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
입술이 빠르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덕분에 나는 하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눈이 갈 곳을 잃고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떻게 이렇게 좋을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
씩 하고 휘어지는 눈매가 야살스레 접혔다. 그 시선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어떻게 이렇게 떨릴 수가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장우진은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다시 입술에 닿겠구나, 싶어 두 눈을 감았다. 예상대로 입술을 금방 맞물렸다. 하지만 가볍게 다시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장우진은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며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무심코 장우진의 어깨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정도면 장우진도 내 떨림을 알겠다 싶어서 빠르게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 나니 갈 곳을 잃은 손이 허공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 손은 얼마 안 가 장우진의 손에 잡혔다.
손가락 사이에 맞물린 장우진의 손가락이 부드러워 침이 꼴깍 넘어갔다. 발끝이 저릴 정도로 긴장되었다. 온몸에 피가 너무 빨리 돌아 머리가 핑핑 돈다고 생각했을 때쯤 장우진이 서서히 멀어졌다. 붉어진 눈가가 나만 긴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아, 진짜.”
“……어?”
“시간 얼마나 남았지? 한 시간 정도는 더 안 들어가도 될 것 같지 않아?”
그런 눈을 하고서 진지하게 묻는 얼굴에 나는 결국 장우진의 머리에 내 머리를 콩 부딪쳐 버렸다.
“미쳤나 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부끄러웠다.
***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민망한 기분에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내 생각에 8할은 김현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 강수하와, 그러니까 무려 강수하와 둘이서 땡땡이를 치고 있었다.
“이래도 돼, 수하야?”
“몰라.”
“세상에. 강수하가 수업을 안 들어가다니.”
“그러니까, 네 덕에 별걸 다 해 보네.”
강수하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어이없이 웃었다. 그나저나 나는 이래도 되나? 이렇게 하루 종일 수업에 안 들어가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서 대학 갈 거 아니니까 하는 태평한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나보다는 강수하 쪽이 더 걱정이었다.
“진짜 괜찮아?”
“하루 도망간다고 큰일 안 나.”
강수하가 무척이나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저도 처음 있는 일이라 익숙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수하였다. 전교 1등 모범생 강수하.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이 일의 원인 제공자인 김현을 떠올렸다.
‘괜찮아?’
‘응. 나 지금 엄청 잘 자고 왔어.’
때는 아침. 2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나서 교실에 내려왔을 때였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던 장우진은 쉬는 시간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칼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솔직히 좀 더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내가 아쉬울 정도였다. 하지만 나도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자 하나 달랑 보내 놓고 계속해서 돌아오지 않으면 강수하나 김현이 걱정할 테니까.
어쨌든 교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김현은 내게 쪼르르 달려왔다. 꼬리만 없었지, 주인 돌아오길 기다린 강아지 같았다.
‘양호실에서 쭉 잔 거야?’
자리에 앉은 내게 강수하가 물었다. 나는 무심결에 일단 고개를 저었다.
‘그럼?’
김현이 의아한 듯 물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옥상에 바람을 좀 쐬러 갔는데.’
‘옥상?’
‘응. 근데 거기에 우진이가 있더라고.’
민망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 소리를 내며 강수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입을 달싹이긴 했지만 그것을 가로막고 내 말에 대답을 한 것은 김현이었다.
‘역시 따라갈걸.’
‘……하하.’
‘둘이서 잔 거야?’
‘어, 어.’
그냥 순수한 잠을 일컫는 건데 제멋대로 해석하려 하는 머릿속을 빠르게 비워 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시 떠올라 버린 방금 전 일은 머리를 털어 내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어, 근데 잠만 자진 않았지…….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말은 속으로 삼켰다.
‘강수하 또 한발 늦었네.’
둥둥 떠다니는 장우진의 얼굴을 애써 날려 내고 있을 때, 김현이 명백한 놀림조로 강수하에게 말했다. 덕분에 강수하의 얼굴은 확 찌푸려졌다. 아침부터 놀이공원으로 염장을 지르더니……. 김현은 강수하 놀리기에 재미라도 들린 모양이었다.
‘장우진은 따로 연락 안 해도 막 지헌이 딱딱 만나는데.’
‘그만해라.’
‘강수하는 같은 반이면서 데이트도 한번 제대로 못 했대요.’
‘야.’
결국 강수하가 짜증스럽게 말을 끊어 냈다. 항상 무심하던 표정이 짜증으로 물들었는데 그게 또 우습게도 귀여워 보여서 나는 슬그머니 다가가 강수하의 어깨를 두드렸다.
‘힘내.’
‘뭘 또 힘내래, 이게 누구 때문인데.’
어이없다는 듯 강수하가 헛웃음을 쳤다. 그 반응 역시 귀여워서, 그리고 아마도 김현은 재미있어서. 우리는 마주 보고 킥킥거렸다. 그게 불과 아침의 일이었다. 그 이후로는 평소와 같았다. 평범하게 수업을 들었고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다만 마지막 한 교시를 남겨 두고 김현이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고 사라진 그때, 강수하가 내 가방을 들어 쥐었을 뿐이었다.
‘뭐 해?’
‘가자.’
‘어딜?’
‘어디든.’
사실 나는 강수하가 그렇게 즉흥적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일단 가자고 하니 어정쩡하게 일어난 나를 강수하는 급하게 잡아끌었다. 그러니까 그게 아마도 강수하 인생에 최초일 땡땡이에 대한 전말이었다.
하지만 막상 나오고 보니 딱히 갈 곳이 없었다. 평생 일탈이라고는 어쩌다 한번 늦잠 자서 지각이나 해 봤을 것 같은 강수하를 데리고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리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라고는 길거리에 우리밖에 없기도 했다. 누가 봐도 학교를 몰래 빠져나온 몰골이었다.
“뭐 하지?”
“배는 안 고파?”
흠. 나는 왠지 고민돼서 머리를 긁적였다. 저녁 먹을 시간이 조금씩 가까워 오긴 했다. 막 그렇게 배가 고프진 않지만 지금 적당한 가게를 찾아서 들어가면 배가 고파지겠거니 싶었다.
“그래. 밥 먹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라면?”
“라면?”
내 말에 강수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라면을 먹나, 싶은 얼굴이었다. 근데 난 라면이 먹고 싶었다. 사실 나는 면이라면 환장을 했다. 특히 라면. 몸에 안 좋은 거야 알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먹어 줘야 하는 건데, 막상 이 게임 속으로 들어오고 나서는 라면은 구경도 못하고 있었다.
막상 한번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니 정말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나는 영 내키지 않아 하는 강수하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응, 라면 먹자, 라면. 라면 먹고 싶다.”
“무슨 라면이 먹고 싶대.”
강수하는 말하지 않아도 얼굴에 이미 쓰여 있는 것이나 다름없던 말을 내뱉었다. 예상했던 말에 푸흐흐 웃으니 강수하가 어이없어 하면서도 따라 웃는다.
“난 지금 라면이 엄청 먹고 싶어. 넌 싫으면 다른 거 시켜 먹어. 분식집 가자.”
“음…….”
“가자, 안 가?”
“끓여 줄까?”
“응?”
“라면 끓여 줘?”
“어? 어디서?”
“우리 집.”
고심하던 강수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예상했던 내용은 아니었다. 어째선지 당황스러움이 밀려 들어왔다. 강수하는 전혀 의도치 않았을 것이 분명하지만 내 귀로 흘러 들어온 그 말은 ‘라면 먹고 갈래?’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불순한 생각이었다.
“무슨 생각해?”
“어?”
“얼굴 빨개. 더워?”
“어, 조금?”
“흐음. 그래?”
강수하가 미묘하게 웃었다. 나만, 불순한 생각한 거 맞지? 갑자기 일말의 의심이 피어올랐다.
어쨌거나 우리는 강수하의 집으로 향하게 됐다. 학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라 걸어서 5분이면 충분하다고 하니 마땅히 거절할 만한 이유도 없었다.
강수하의 말대로 얼마 걷지 않아 우리는 한 아파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들어와.”
결국 강수하의 집 현관문이 열렸다. 나는 누가 봐도 티 나게 쭈뼛대며 안으로 들어섰다. 변명을 하자면 좀 이상하고 어색한 기분이 든 탓이었다. 아, 뭐……. 누군가와 연애를 하면서 그 사람의 집에 방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쌍둥이들 집에 가 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사귀자고 한 상태도 아니었고, 게다가 단체로 친구들과 놀러간 느낌이 강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왠지 드는 긴장감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정작 나를 집으로 데려온 강수하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만 이런 기분인가 싶은 생각에 심통이 났다. 나는 현관에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으면서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쓸데없는 심통이었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깨우친 덕분이었다.
그러던 차에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왜 그래?”
“아, 문자.”
“보나 마나 김현이겠지.”
강수하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제 방에서 나왔다. 집으로 오자마자 거실을 슥 훑어보는가 싶더니 금세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것이었다. 어렵지 않게 그게 강수하의 방이라는 것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뭐, 숨길 거라도 있는 건가. 꼭 들어가 봐야지. 흥미가 돋는 것은 금방이었다. 일단 나는 핸드폰의 화면을 확인했다. 발신자는 역시나 김현이었다.
[나 완전 상처받았어……. 나만 버려두고…….]
미안하긴 하지만 웃음이 나오는 문자였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둘 다 사라져서 당황했겠지. 교실에서 혼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김현이 떠오르자 참을 수 없어 나는 소리 내 웃었다. 일단은 미안하다는 답장을 보냈다. 어디에 있느냐는 김현의 메시지가 바로 날아왔다.
흐음, 강수하의 집이라고 보내도 되려나. 슬쩍 강수하를 쳐다보니 방금 전 들어갔다 나온 방이 신경 쓰이는지 시선이 그쪽으로만 향해 있었다. 나는 빠르게 수하네 집이라고 답장을 보내고는 슬금슬금 그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왜?”
“네 방 구경하려고.”
내 말에 당황했는지 강수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상기되었다. 방금까지 태연하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방에 뭐 있나,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방 더러워.”
“네 성격에?”
“응. 더러워.”
“오, 재밌겠다.”
강수하는 제 방에 나를 들여보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들어가고 싶었다. 강수하와 나는 방문 앞에서 대치했다. 결국 먼저 포기한 것은 내 쪽이었다. 뭐, 이따가 들어가면 되지.
“아, 아까 문자 현이한테 온 거 맞았어.”
“뭐래?”
“너무하다고, 하하. 근데 어디냐기에 너희 집이라고 했어.”
“잘했어.”
“응.”
강수하가 웃으면서 내 손목을 잡고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내가 방으로 들어갈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아니, 도대체 뭐가 있기에 그러지. 진짜 이미지에 안 맞게 완전 난장판인 것 아냐? 무심코 드는 생각에 나는 키득거리고 웃었다.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았다.
“라면 끓여 줄게.”
“응.”
아까 전 보낸 문자에도 김현은 답장이 없었다. 수업이라도 듣고 있나, 그런 생각을 할 때에 부엌으로 들어온 강수하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나 내가 뭐 할 거 없나, 해서 옆을 기웃거려 봤지만 뭐가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가만히 식탁에 앉았다.
강수하는 일단 냄비를 꺼내 물을 받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그리고 가스 불을 켰다. 아주 단순하고 쉬운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탁탁탁탁 하는 소리만 날 뿐 가스에 불이 붙지 않았다. 그 모습에 강수하의 미간이 접혔다.
“수하야.”
“응.”
“가스 밸브 잠긴 것 같지 않아?”
그제야 강수하가 가스 밸브로 시선을 돌렸다. 어김없이 잠겨 있는 밸브를 여는 강수하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저러다가 뭐 사고라도 치는 건 아니겠지? 평상시라면 김현을 보며 했을 법한 생각을 하며 나는 조심스레 의자에서 일어섰다.
“앉아 있어.”
“으응.”
“……못 믿겠어?”
“어, 그건 아닌데. 그냥 좀 불안하네.”
“같은 말 아냐?”
강수하가 헛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덕분에 나도 킥킥거리고 웃었다. 가스 불이 제대로 붙는 것을 확인하자 강수하가 찬장에서 라면 두 개를 꺼내어 봉지를 뜯었다. 다 뜯어서 준비가 끝났는데도 아직 물이 끓지 않으니 그제야 강수하가 나를 끌어다가 식탁에 다시 앉혀 놓았다.
“앉아 있어. 신경 쓰여.”
“나 아무것도 안 하고 보기만 했는데?”
“어. 아무것도 안 하고 보기만 해도 신경 쓰여.”
내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녀석 때문에 나는 입만 비죽거렸다.
“평소에 자주해. 그냥 좀 긴장해서 그래.”
“긴장?”
“……막상 내 공간에 네가 있다고 하니까 기분이 좀 이상해서.”
수하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 말에 나도 민망하게 웃었다. 나만 어색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었구나, 생각하니 왠지 위안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강수하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섰다. 냄비 안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까보다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녀석을 지켜보았다. 요리하는 강수하라니, 그게 설령 라면이라고 할지언정 입가에 미소가 띄워지고 있었다.
“맛있게 끓여 줘.”
“어……. 노력해 볼게.”
사뭇 비장한 대답이었다.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흘리며 내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다가오는 나를 힐끔 본 수하가 ‘앉아 있으라니까’ 하면서도 웃는 얼굴을 채 가리지 못했다.
“계란 넣을까?”
“아니. 탁해져서 싫어.”
“그래.”
“그릇 꺼낼까?”
“내가 할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딱히 하는 일도 없이 수하의 옆에서 알짱거렸다. 스프를 넣고 면을 넣는 단조로운 레시피에도 수하는 심혈을 기울이듯 진지한 얼굴이었다. 어느새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라면이 끓어올랐다.
강수하는 곧 라면을 두고 찬장에서 그릇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냉장고로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김치도 꺼냈다. 그 뚝뚝 끊기는 행동의 흐름이 평상시 강수하하고 너무 달라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잘 끓이고 있는 거 맞지?”
“어.”
“불안한데.”
“……참나.”
굉장히 억울한 얼굴이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없는 듯 강수하가 입을 다물었다. 제가 생각해도 조금은 정신없이 굴었다고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새 식탁에는 라면과 그릇, 김치가 채워졌다. 한번 식탁을 훑어본 강수하가 이제 다 차렸다 싶었는지 내게 앉으라고 턱짓했다. 나는 쪼르르 의자에 앉았다. 배가 별로 안 고프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군침이 돌았다.
“잘 먹을게.”
“응. 많이 먹어.”
강수하는 친절하게 내 그릇에 라면을 덜어 주기까지 했다. 다정하기도 하지. 씨익 웃으면서 강수하의 그릇에도 라면이 담기는 것을 보고 난 후에야 나는 젓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강수하는 제 그릇에 덜기만 했을 뿐 먹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왜 안 먹지? 의아함을 가득 담아 쳐다보니 먼저 먹으라고 손짓한다. 어, 맛보라는 건가. 어째선지 좀 긴장된 것 같은 얼굴이기도 하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또 입을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아 내야 했다. 라면은 웬만하면 다 맛있는데 맛없을까 봐 걱정하는 건가.
나는 왠지 긴장되는 그 눈빛을 받으며 먼저 라면을 한 젓가락 집어 들었다. 후루룩 입 안으로 들어간 라면을 우물우물 씹고 있는 나를 강수하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맛있다.”
“응.”
그제야 안심했는지 강수하가 젓가락을 들었다. 아무래도 수하는 제가 자신 없는 일을 시키면 긴장하는 모양이었다. 그 신선한 깨달음에 나는 비식비식 웃음이 나오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수하가 못할 만한 게 또 뭐 있을까. 다음에 또 시켜 봐야지. 누군가 보면 악취미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라면 두개는 금방 비워졌다. 정작 끓인 강수하는 몇 젓가락 먹지도 못한 거 같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냄비가 텅 비어 있었다. 깨끗하게 빈 그릇을 치우는 강수하를 보며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안 부족해?”
“어, 괜찮아.”
“나 너무 배부르게 먹었는데.”
빵빵해진 배가 신경 쓰였다. 눈치를 살피며 내 배를 통통 두드리는데 그걸 그새 봤는지 강수하가 킥킥거렸다.
“나도 충분히 먹었어.”
녀석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근데 입이 좀 맵다.”
“양치질할래?”
“어? 칫솔 있어?”
“있을걸?”
강수하는 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 너무 가지가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남의 집에서. 그따위의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양치질은 해야지.
곧 수하는 파란색의 칫솔을 들고 화장실에서 빠져나왔다. 머릿속을 금방 메우는 불순한 생각을 티 내지 않으려 건네는 칫솔을 받자마자 도망치듯 화장실로 들어섰다.
내가 양치질을 하고 있는 동안 강수하는 뒷정리를 계속했다. 입 속을 물로 다 헹궈 내고 나서 밖으로 나왔을 때, 이제야 강수하는 정리를 끝내고 화장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설거지는 내가 해도 되는데.”
“손님이 왜 설거지를 해.”
“흐음, 그런가.”
너무 단호해서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앉아 있어, 하는 소리에 그대로 소파에 앉았다. 화장실 안에서 양치질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음. 좀 심심한데. 기껏해야 5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나는 발을 굴렀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하야.”
“어.”
“네 방 구경해도 되지?”
“어?”
“네 방 구경할래.”
대답은 필요 없었다. 나는 그 길로 쪼르르 강수하의 방으로 향했다. 지헌아,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땐 이미 수하의 방문을 연 후였다.
깔끔하게 정돈된 방이었다. 지저분하다더니, 전혀 아니었다. 믿지도 않았지만. 아침에 학교에 오다 보면 정리하기 힘든 이불도 정갈하게 펼쳐져 있었고, 오른쪽에 있는 책상에는 빽빽하게 책들이 들어차 있었다. 모범생 아니라고 할까 봐. 나는 킥킥거리고 웃으며 꽂혀 있는 책들을 쭉 훑었다. 몇 개 걸려 있지 않은 옷가지도 있었다.
“정말 별거 없네.”
“뭘 기대한 거야?”
무심하게 내뱉은 혼잣말에 바로 뒤에서 강수하의 대답이 들렸다. 금세 양치질을 마친 모양이었다.
“너 하는 걸 보면 뭔가 숨긴 것 같긴 한데.”
“뭐가.”
“되게 안절부절못하고 있단 말이지.”
나는 침대에 털썩 앉았다. 방 안에 아무것도 없으면 저렇게까지 눈치를 살피지 않지 않나.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방을 뒤져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방 안에도 사실 무대포로 들어온 건데 막 서랍 뒤지고 하면 너무 예의가 아니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무심하게 침대 뒤로 손을 짚으며 비스듬히 앉았다.
“어?”
순간 뒤로 짚은 손에 침대의 푹신함 대신 무언가 딱딱한 촉감이 느껴졌다. 어, 뭐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는 강수하가 보였다.
“여기에 뭐 숨겼어?”
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강수하에게 물었다. 강수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민망한 듯 제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바로 손에 짚이는 곳의 이불을 들춰냈다. 그에 문 앞에 서 있던 강수하는 빠르게 내게 다가왔다. 손이 잡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내 놀란 눈과 강수하의 눈이 마주쳤다.
“어, 썩 안 봤으면 좋겠는데.”
“어, 이미 본 것 같아.”
하지만 강수하가 조금 느렸다는 게 문제였다. 이미 알록달록한 선물 상자를 내가 보고야 말았으니까. 강수하가 주려고 했던 건 아닌 것 같고 선물 받은 건가?
“선물 받은 거야?”
“음…….”
“그냥 책상에 두지, 왜 숨겨 놨어. 숨겨 놓으니까 더 수상하잖아.”
나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말했다. 강수하가 인기가 많긴 하구나. 언제 받은 거지? 학교에서는 이런 거 받는 거 못 봤는데……. 입술이 비죽거리며 튀어나왔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이제는 게임 같지도 않고 현실과 점점 비슷해지는 것 같은데……. 혹시 공략 캐릭터들의 마음도 현실성 있어지는 건 아닐까? 만약에 지금 내 앞에 있는 강수하의 마음이 현실성 있어 진다면 굳이 나를 계속 좋아할까? 모두 게임이 아니라면 애초에 나를 이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을 테니까…….
참 이기적이게도 그런 생각이 드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 부적절하고 이상한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질투심이었으니까. 나는 애써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어디에서 받은 건지, 언제 받았는지, 선물을 받아 좋겠다는 둥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놨다.
아무 말 없이 내 말을 듣던 강수하는 헛웃음을 쳤다. 여전히 내 양 손을 잡고 있는 차였다. 강수하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나는 가만히 강수하를 보고 있었다. 물은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너는 저게 언제 어디서 받았는지가 중요한 거지?”
“어?”
대신에 생각지도 못한 소리를 했다. 나는 두 눈을 빠르게 굴렸다.
“됐어.”
짧은 한숨과 함께 강수하는 그냥 웃었다.
“라면도 먹었고, 양치질도 했고.”
“…….”
“라면만 먹고 갈 건 아니지?”
선물에 대한 건 완전히 다시 언급하지도 않을 투였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응?”
강수하가 다시 한번 되물으며 내게 다가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어라 말을 해야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내 머릿속을 알지 못할 강수하는 어느새 내 입술을 머금고 있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입에 닿았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강수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꾸만 몸이 뒤로 넘어가려 했지만, 강수하가 내 손을 꽉 잡고 있는 탓에 아슬아슬하게 침대에 등이 닿지는 않았다.
아,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강수하의 물음을 곱씹어 보면 내가 저 선물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그건 정말 오해였다. 나는 급하게 고개를 뒤로 뺐다. 닿아 있던 강수하의 입술이 떨어졌다.
“수하야.”
“…….”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잖아.”
제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도 다시금 다가오던 강수하가 덧붙인 말에 멈춰 섰다.
“당연히 질투 나고 싫어. 아니, 근데 내가 그럴 자격이……. 아니, 그러니까…….”
차마 정리하지 못하고 급하게 내뱉은 말은 자연스레 이어지질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강수하는 가만히 나를 보고만 있었다.
“아, 그냥 내가 싫은 티를 내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 같아서…….”
내가 그런 말을 해서 이제는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될 수도 있는 거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임이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한참을 말이 없던 강수하가 문득 입을 열었다.
“왜, 그게 이상해? 당연히 싫어해야 하는 거 아냐?”
강수하가 천천히 다시 다가오다 흡, 하고 숨을 참은 내 입술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오히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으면, 안 되지.”
“어…….”
“나는 네가 다른 사람하고 말만 섞어도 질투가 나는데.”
딱딱한 말투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강수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잡아먹을 듯 내 입술을 물어 왔다. 그러고는 갑자기 느릿느릿 아랫입술만을 괴롭혔다. 핥았다가 깨물었다가를 반복하는 탓에 혀가 들어오는 것보다 오히려 기분이 미묘해졌다.
“어, 그……으, 수하야.”
살짝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나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몸이 거의 반쯤 뒤로 넘어가 있었다. 그에 강수하가 나를 빤히 보다가 이내 내게서 멀어졌다. 그러고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아, 미치겠다. 진짜.”
“……아.”
“완전히 나를 가지고 놀아.”
그 웃음 섞인 말에도 나는 얼떨떨했다. 강수하는 내 팔을 붙잡아 침대에서 일으켜 세웠다.
“나와.”
그러고는 내 팔목을 잡고 방 밖으로 끌어당겼다. 방금까지 진짜 잡아먹힐 것 같았는데 갑자기 미련 없이 일어서니 무슨 상황인지 빨리 파악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앞서가는 강수하의 기분은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일단은 뭐, 그거면 됐지. 그제야 웃음이 나왔다. 강수하의 방문이 굳게 닫혔다. 그 문소리에 내 심장도 덜컥 내려앉았다.
“과자 좀 줄까?”
하지만 강수하는 태연했다. 어쩐지 불퉁해졌다. 굳게 닫힌 문과 강수하를 한번 번갈아 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 선물은?”
“……어?”
아마도 강수하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인 것 같았다.
“저거 저렇게 계속 가지고 있을…… 거야?”
근데 또 말을 하다 보니 자신이 없어졌다. 아니다. 당연히 싫어해야 하는 거라고 했으니까…….
“어, 저렇게 가지고 있을 거냐고…….”
쭈뼛거리는 나를 강수하는 바보처럼 바라보다 결국 꽉 껴안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버릴게. 지금 버릴까?”
무척이나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아, 나는 진짜 양심도 없는 놈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 단호한 말에 기분이 좋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강수하는 다시 한번 웃었다.
“과자 먹을래.”
그 웃음소리에 민망해진 나는 괜히 말을 돌렸다. 알 만하다는 듯 웃은 강수하는 금방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곧장 과자 몇 개를 꺼내러 간 강수하를 빤히 보다 소파 위에 앉았다.
“아.”
과자를 들고 오던 강수하가 돌연 자리에 멈추더니 숨을 내뱉었다. 과자를 내려놓고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는 빠르게 휴대폰 화면을 두드렸다. 그 모습에 호기심이 생긴 내가 슬그머니 다가가니 빠르게 핸드폰을 집어넣어 버린다.
“왜?”
“아니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뭐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까. 하지만 강수하의 핸드폰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전화인 모양인지 진동이 길었다. 멀리서 봐도 눈에 띄게 강수하는 거절 버튼을 눌렀다. 누구 전화인데 안 받는 거지? 아, 혹시…….
“그거 혹시 현이야?”
“…….”
“현이구나.”
어쩐지 아까 이후로 너무 잠잠하다 생각했는데 강수하에게 연락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현이 왜?”
“……여기 올 거래.”
“여기?”
“응. 그래서 오지 말라고 했어.”
강수하가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킥킥 웃었다. 그래, 당장 달려오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아까 전 내 대답에 끊긴 문자가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었다. 그때 내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이제 현이가 내 핸드폰으로 연락하는 건가 싶었다.
“어…….”
이유한이네. 내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강수하는 김현인 줄 알았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알려 주지 말라는 제스처였다. 나는 곤란한 듯 미소 지었다.
“현이가 아니네.”
“그럼?”
“어, 유한이 형?”
강수하는 내 대답에 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유한은 지금 막 퇴원을 했다는 문자를 보낸 참이었다. 퇴원한다더니 지금 했구나, 축하한다는 답장을 보낼 때까지 강수하는 아무런 말 없이 나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문득 수하에게 이유한이 했던 말을 물어본다면 대답해 줄까, 의문이 들었다. 수하라면 말해 줄 것 같기도 한데.
“수하야, 혹시…….”
“몰라.”
“어?”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강수하는 이렇게 단호할 수가 없었다. 놀이공원에서 김준과 김현이 대답해 주지 않았듯 강수하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제대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어쩜 이렇게 단호한지 당황한 내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 아직 아무것도 안 물어봤거든.”
“그게 뭐든 유한이 형하고 관련된 거면 아무것도 몰라.”
나는 입을 비죽거렸다. 왜 아무도 말 안 해 주는 거지.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이쯤 되니 정말로 궁금해졌다. 어차피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평화롭게, 아니 뭐 평화로웠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론을 낸 것 같긴 한데. 정확하게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그 누구도 설명을 해 주지 않으니 답답해졌다.
“왜 아무도 말 안 해 주는 거지.”
“신경 쓰지 마.”
“아니 어떻게…….”
“그렇게 나 앞에 두고 다른 사람 생각도 하지 말고.”
약간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강수하가 말했다. 나는 순간 놀란 마음에 입을 꾹 다물었다. 곧게 나를 보고 있는 눈빛에 흔들림은 없었다.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 미안.”
“미안할 건 없고.”
녀석은 배시시 웃으며 옆으로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게 또 못 견디게 다정해서 나까지도 웃음이 날 정도였다.
“집에 가서 답장하면 안 돼?”
아마도 이유한에게 온 답장인 듯 내 핸드폰이 짧게 다시 한번 진동했다. 그 핸드폰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마주 잡으며 강수하가 말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끄덕이는 내 입가로 수하가 쪽쪽거리며 입을 맞추곤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누군가가 내 심장께를 간질이고 있는 기분이었다.
“착하다.”
다정스레 뱉은 말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칭찬받은 강아지가 된 것 같았다. 강수하는 내 목덜미에 조심스레 손을 대며 나를 끌어당겼다.
***
[D-13]
“우와! 여기 진짜 좋다!”
6월 중순의 날씨라기에는 더운 날, 우리는 서울 근교에 와 있었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나도 몰랐던 우리 집 소유의 별장에 말이다. 나를 포함한 여섯 명이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김현 때문이었다.
“물놀이를 가자.”
“……지금 6월이다.”
그러니까 때는 금요일 점심시간이었다. 한참 점심을 먹다가 꺼낸 김현의 뜬금없는 말에 모두가 헛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 표정이 얼마나 비장한지 대화를 듣지 못한 누군가 봤다면 싸우기라도 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6월이 8월처럼 더우면 물놀이도 6월에 가는 거지.”
“뭔 소리야.”
김현은 이미 결심한 듯 보였다. 이건 우리의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완연한 통보였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왜?”
“그냥, 물놀이 가고 싶어. 지헌아, 갈 거지?”
물놀이 가기엔 좀 춥지 않을까,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애초에 6월이 지나면 게임이 끝나 버리는 상황이라 지금이 아니면 나는 같이 여행을 떠날 기회도 없었다. 나는 고심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수긍하자 김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너만 가면 돼. 너네 다 안 가지?”
의기양양한 얼굴을 한 김현이 낄낄거렸다. 덕분에 다른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 물놀이하면 감기 걸려, 지헌아.”
“흐음. 그래도 가고 싶은데. 안 갈 거야?”
“아니, 네가 가면 가긴 가야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결국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 뭐야. 안 간다며?”
하고 김현이 입을 비죽이다가 김준에게 입을 맞긴 했지만, 어찌 됐든 그렇게 우리는 여행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당장 내일 가겠다는 김현의 말은 모두가 만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큼은 힘들다고 갈 곳도 정해야 하고 당일치기로 다녀올 게 아니라면 숙소도 정해야 할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 말에 김현은 금세 시무룩해졌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여행지를 정하는 것도 숙소를 정하는 것도,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기사님과의 대화에서 한 방에 해결되고 말았다.
“그럼 별장으로 가시면 어때요?”
“별장이요?”
“네. 근교에 별장 있잖아요. 그 근처에 계곡 사람도 별로 없고 깨끗하고 좋은데.”
나도 존재를 모르던 별장 덕분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다 돈이 최고라고 하나 봐.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에게 연락했고, 당장 다음 날 떠날 여행은 그렇게 쉽게 그리고 갑작스럽게 확정된 것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별장이라는 둥 기사님이라는 둥 여러 가지를 애들에게 말을 해야 하기에 조금 꺼림칙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대략 2주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게임의 기간 때문에 모두에게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뭐, 덕분에 편하게 여행을 오긴 했으니까.
“방 엄청 많은데. 어디 쓰지?”
“어, 그러게.”
처음에는 놀란 듯 보였던 모두도 금방 적응을 한 건지 별다른 말없이 그저 즐거워 보였다. 별장 안을 두리번거리며 이유한이 물었다. 하지만 나도 처음 보는 공간이라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도움말이 떴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뜨지 않은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터였다.
“지헌아, 방 어디 쓸 거야?”
“음, 글쎄.”
“빨리 정해. 따라가게.”
“따라가긴 어딜 따라가.”
장난스러운 김준의 말을 이유한이 바로 잘라 냈다. 한 번밖에 본 적 없는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녀석들은 어색함 하나 없어 보였다. 생각해 보면 이유한을 데려가겠다고 한 것도 김준이었다. 다른 애들도 딱히 부정적인 의사를 보이지 않았었다.
이쯤 되니 정말 이유한이 뭐라고 말했는지 궁금했지만 뭐, 물어봐도 말 안 해 주겠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지헌 방은 모두 출입 금지야.”
이유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단호한 말에 어쩐지 내가 더 아쉬워졌다. 원래 여행 온 날은 다 같이 끼어 자고 그러는 건데, 이건 뭐 방이 워낙 많으니 각자 한 개씩 차지해도 남을 것 같았다.
“얼른 나가자. 물놀이 가자, 물놀이!”
방을 정하는 것도 제쳐 두고 거실 한구석에 제 짐을 던져 놓은 김현이 방방 뛰며 말했다. 어찌나 신이 났는지 방이고 뭐고 당장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새였다. 언제 옷을 갈아입었지 김현은 흰색 민소매에 무릎까지 오는, 편해 보이는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자. 얼른 가자.”
“물놀이 못 해 죽은 귀신 붙었냐.”
계속해서 보채는 김현을 보며 김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말에 이유한과 나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귀신 소리에 저절로 서로를 쳐다본 탓이었다.
“물놀이 못 해 죽은 귀신은 없을 거야.”
이유한이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이유한이 왜 웃는지 모를 김준과 김현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에 웃은 건 아마도 나뿐일 것이었다.
어느새 강수하와 장우진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왔다. 일단 나가야겠다고 김현이 계속 재촉한 탓이었다. 덕분에 짐이라고 하기에도 뭐할 정도이긴 하지만 제대로 풀지도 못하고 별장 밖으로 나섰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사님이 말했던 계곡이 있었다.
“어, 엄청 좋은데? 우리밖에 없어!”
한참은 신나 있는 김현이었다. 딱히 여기라서가 아니라 시기가 시기인 만큼 사람이 없는 것 같았지만, 나는 굳이 별다른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무척이나 신이 난 것 같은데 굳이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계곡에 도착하자마자 김현은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렇게 좋을까, 생각하는 것도 잠시.
“으악! 추워!”
0.1초도 걸리지 않은 비명 소리였다.
“멍청이냐. 내가 추울 거라고 했지?”
장우진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다가서더니 손가락만 몇 개 담그며 김현에게 물을 흩뿌렸다.
“아, 춥다고!”
김현이 소리치며 징징거렸지만 장우진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나마 날이 6월치고는 꽤 더운 편이라 다행이었다.
“아, 씨. 장우진 죽었어.”
김현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계곡에서 뛰쳐나왔다. 허벅지의 절반만큼 물에 젖은 채로 뛰쳐나온 김현에 그제야 장우진이 도망쳤지만, 달리기로 1등 했던 김현을 이기기는 무리인 듯 얼마 지나지 않아 붙들렸다.
“야, 놔!”
“물이 시원하고 좋아. 같이 들어가자.”
“미친 또라이야!”
장우진이 질질질 물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김현의 힘만으로는 장우진을 끌어가기가 힘들어 보였지만, 이럴 때 죽이 참 잘 맞는 김준이 어느새 달려들었다. 결국 양쪽에서 김 형제에게 붙잡힌 장우진이 풍덩 소리와 함께 계곡물 안으로 몸을 담그고 말았다.
“하하하하, 꼴좋다.”
“아, 미친. 차가워!”
어찌나 제대로 넘어트렸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젖어 버린 장우진이 짜증스레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 엄청 섹시한데.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내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섰다.
“다 죽었다. 진짜.”
장우진이 빠른 속도로 김현과 김준을 잡아 제 한 몸 희생해 가며 계곡물로 빠졌다. 으아악 소리가 나며 서로 담그고 담기는 것의 반복이었다. 나는 이유한과 강수하와 함께 조금 멀찍한 곳에서 웃으며 녀석들이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자기들끼리 죽이겠다고 달려드나 싶더니 번뜩 김준이 이쪽을 쳐다봤다. 왠지 불안한 예감에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지헌아! 들어와!”
“너네 엄청 추워 보이는데?”
“한 개도 안 추운데?”
김현이 말했다. 거짓말, 아까 전에 그렇게 소리까지 질러 놓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발만 담근다면 모를까 저렇게 완전히 다 담그는 건 사양이었다. 하지만 내 고갯짓에 김 형제와 장우진이 얼굴을 마주했다. 다시 한번 별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강수하!”
“…….”
김현이 강수하를 불렀다. 그에 나는 옆에 서 있던 강수하를 슬쩍 봤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강수하가 곧 한숨을 푸욱 내어 쉬더니 내 어깨를 감쌌다. 수하야, 너까지 그러지마. 나는 다리에 힘을 줬다. 하지만…….
“물놀이하러 가자.”
안타깝게도 가만히 있던 이유한까지 합세했다. 나는 아까의 장우진처럼 계곡으로 질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아, 나 추운 거 진짜 싫은데. 응? 수하야. 유한아.”
“형인데, 막 반말하고 안 되겠네.”
이유한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 다급해서 반말했다. 나는 도리질 쳤다.
“유한이 형! 형, 형! 아, 제발.”
“수하야. 꽉 잡아.”
“네.”
이유한이 바로 앉아 내 다리를 잡았다. 어느새 먹이를 찾은 하이에나처럼 장우진과 김준, 김현까지 이 근처로 몰려든 판이었다.
“너희 왜 그러는데. 뭘 했든 내가 잘못했어. 진짜.”
“잘못한 게 뭐 있어. 같이 놀자는 거지.”
어느새 들린 내 등허리에 차가운 물이 닿고 있었다. 아, 완전 얼음장이잖아. 내가 기겁하며 매달렸지만 강수하와 이유한은 인정사정없이 그 물 안에 나를 담갔다.
“으악!”
계곡물에 머리끝까지 담긴 나는 격하게 도리질 치며 일어섰다. 와, 진짜 차가워. 나는 갑자기 차가운 물에 몸이 담긴 탓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차가운 물이 온몸에서 흘러내렸다. 웃는 소리가 들리던 주위가 갑작스레 조용해졌다.
“괜찮아?”
담가 놓고 나니 심했나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얼굴에서 여전히 흘러내리는 물을 닦아 내고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너네 다 후회하게 해 줄 거야.”
그 이후 나까지 뛰어들면서 물놀이는 곧 난장판이 됐다. 모두가 누구를 잡고 누구에게 물을 퍼붓는지도 모른 채였다. 추운 것도 잊고 서로를 잡고 잡히는 게 반복되고 있었다.
몇 번이나 계곡물에 풍덩 빠졌던 나는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고 손에 잡히는 녀석의 어깨를 잡았다. 김준이었다.
“아, 지헌아. 나 물 많이 먹었는데!”
내게 잡힌 김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몸에 힘을 주어 꼿꼿이 섰다. 힘껏 잡아당긴 보람도 없이 김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나무 하나가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덕분에 오기가 생긴 내가 두 손까지 써 가며 잡아당겼지만 작정하고 힘을 준 김준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녀석은 한술 더 떠 순식간에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안 돼, 너무 많이 먹어서 배부를 정도야.”
“이씨. 힘주는 게 어디 있어?”
“힘 풀면 담글 거잖아!”
김준은 나를 끌어당긴 손에 힘을 주며 웃었다. 의도치 않게 김준에게 안긴 꼴이 된 내가 억울함에 손을 담가 물이라도 끼얹었다. 으악, 소리를 내면서도 내 허리를 감은 손을 녀석은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도리질 치며 얼굴에 끼얹어진 물을 털던 김준과 내 눈이 마주쳤다.
“어…….”
김준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내 얼굴로 올라왔다. 웃음기 서렸던 얼굴이 순간 당황으로 물들었다. 갑자기 왜 그러지? 왜 당황한 거지? 뻘한 생각을 하다 나는 바로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낚일 줄 알고…….
“아, 가만히 좀 있어 봐.”
나는 급하게 바둥거렸다. 하지만 내 허리를 감은 손은 좀체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 이러다가는 김준을 물 먹이려다 내가 물 먹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나는 결국 노선을 틀고 김준의 목에 팔을 감았다.
“어…….”
“떨어트리지 마. 진짜.”
“응.”
다행인지 뭔지 김준은 나를 떨어트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마음이 놓이니 갑자기 김준이 왜 그러는지 의아해졌다.
“근데 지헌아.”
목을 감은 덕에 가까워진 김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게 또 너무나 가까워서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어, 어?”
김준은 발걸음을 바깥으로 옮기고 있었다. 물 밖으로 나가는 걸음이 무척이나 빨라 내 몸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왜 흰옷을 입었어.”
“엉?”
하지만 김준이 뱉은 말은 아주 조금 뜬금없는 소리라 나는 손에 힘을 풀고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김준의 눈이 잠시 내 눈을 마주하는가 싶더니 힐긋 아래를 향했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덕분에 나도 김준을 따라 그 시선이 닿았던 곳으로 눈을 돌렸다.
“……헐.”
“야해, 야해.”
김준은 다시금 나를 품 안으로 끌어안고는 물 밖으로 빠르게 나갔다. 얼굴이 화끈해졌다.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김준은 나를 내려놓고 어느새 챙겨 왔는지 근처에 있던 수건으로 내 몸을 꽁꽁 감싸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나를 보며 웃는 얼굴에 나는 여전히 화끈거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힐끗 다시 본 수건 속의 흰옷은 물에 젖어 내 마른 몸을 여실히 비쳤다.
“앉아 있어.”
김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색한 느낌이었다. 남자끼리 웃통 좀 볼 수도 있는 건데, 뭐가 이렇게 민망한지. 더군다나 김준이 좀 보인다고 과민 반응한 탓에 더욱 민망해지고 있었다.
내게는 수건을 칭칭 감아 놓고서는 김준은 제 몸에 딱 달라붙은 옷을 쥐어 가며 물을 짜냈다. 그래도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자 불편했는지 내 앞에서 웃옷을 훌렁 벗어 버렸다.
아니, 그럼 나는 왜 이렇게 칭칭 감아 놨는데? 너는 그렇게 편하게 벗을 거면서? 왠지 모를 반발심이 들었다. 그래서 무어라 말하려는데 바로 구릿빛 피부의 등 근육이 눈에 들어왔다. 아, 씨. 억울한데……. 말해야 하는데.
내 이 억울함을 알지 못하는 김준은 벗어 낸 제 옷을 빨래 짜듯 꽉 짜내고 있었다. 덕분에 등이 더 성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대충 짜낸 옷을 바닥에 널은 김준이 뒤돌아섰다. 저절로 헉, 소리가 날 것 같아 입을 힘주어 다물었다.
“응? 왜?”
“아, 아니. 아냐. 아무것도.”
하아,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결국 내 억울함을 토로할 타이밍을 놓치고야 말았다. 됐다, 나는 다시금 내 몸을 들여다봤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좋은 구경하고 잘됐지, 뭐……. 헛웃음이 나왔다. 그때 김현이 물에서 나와 이쪽으로 다가왔다.
“지헌아, 왜? 추워?”
“입술 파랗기에 데리고 나왔어.”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다가온 김현이 ‘아, 진짜?’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짓말. 참 능청스럽기도 하지.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지만 그냥 모르는 척했다. 달리 할 말이 없기도 했고,
사실 김현이 나오는 순간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현도 하얀 옷이었다. 그러니까 물에 젖은 하얀 옷. 왜 아까까진 못 봤지……. 물에 젖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몸을 무심결에 또 힐끗거리다가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야 말았다.
한번 김준 때문에 의식하기 시작하니 몸만 보였다. 눈이 돌아가고 있었다. 운동을 하는 김준만큼은 아닐지라도 균형 잡힌 몸이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해 보여서 무심코 손을 뻗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정도였다. 나는 혹시라도 빈약한 내 몸이 보일까 수건을 꽁꽁 싸맸다.
“많이 추워?”
물속에 있던 모두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곧 내게 다가온 강수하가 다정하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들 젖은 옷이 무거웠는지 나오자마자 물기를 짜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강수하는 옷을 벗어 들진 않았지만 허리께의 옷을 잡아 돌려 짜내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강수하의 복근을 감상할 수 있었다. 아, 좋은 구경이다. 무심결에 드는 생각에 나는 급하게 머리를 휘저었다.
어느새 나온 장우진도 웃옷을 벗었다. 새하얗지만 다부진 몸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나는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지헌아.”
올라가는 입꼬리를 기어이 꾹꾹 누르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이유한이 나를 불러 왔다. 어찌나 조용히 불렀는지 수박이나 먹을까, 하는 시답잖은 대화를 하고 있는 녀석들은 못 들은 모양이었다.
“응?”
“침 떨어지겠다.”
“……티 났어?”
이유한의 말에 내가 당황해서 웃었다.
“응. 엄청.”
“아, 하하.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냐.”
이유한은 입을 비죽거렸다. 잔뜩 골이 난 얼굴이었다. 질투하는 건가. 내가 애들 몸 보고 좋아해서? 잠시간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곧이어 이유한이 덧붙인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응?”
“조금만 더 지나면 나도 생겨.”
“……어?”
“운동한다, 내가 진짜.”
그 말에 무심결에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내 시선이 떨어지자마자 이유한이 다급하게 제 몸을 엑스자로 가렸다.
“변태야. 어딜 봐.”
“……아니거든?”
“뭐가 아냐. 봤잖아.”
“아니, 그런 말을 하는데 어떻게 안 봐.”
“보지 마, 변태야.”
이유한이 왠지 수치스러운 얼굴을 했다. 나는 어이없이 웃었다. 3년을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없는 게 당연한 걸 왠지 부끄러워하니 웃음이 났다. 내가 웃으니 이유한이 어쩐지 더 시무룩한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근처에 있던 장우진에게 다가가 벗은 몸의 배를 콕콕 찔러 본다.
“뭐야, 뭐 해?”
“하아.”
배를 찔렀지만 쑥 들어가는 것도 없어 이유한의 손만 아플 것 같았다. 이유한은 결국 세상 무너질 듯 한숨을 내어 쉬었다. 나는 그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져 버리고 말았다. 아, 어쩌려고 저렇게 귀엽냐.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고 웃던 내가 모두의 시선에 고개를 저었다.
“수박이나 먹자.”
“……어? 그래.”
당최 내가 왜 저러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이유한을 다시 한번 보고 킥킥거리고 웃다가 문득 다시 수건 안의 내 몸을 확인했다. 음, 남 보고 웃을 때가 아니구나. 오늘부터는 윗몸 일으키기라도 한번 해야겠다…….
***
나는 아무래도 좀 망한 것 같았다. 아니, 좀이 아니고 많이.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는 정신을 다시 한번 챙기며 앞에 있던 술을 한번에 들이켰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왜 술을 마시고 있는가 하면, 그 이유는 불과 30분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야 했다.
30분 전, 나름대로 바비큐 파티랍시고 고기까지 배 터지게 먹으며 놀러 온 기분을 내던 우리는 밤이 깊어지자 어김없이 김 형제에 의해 술판을 벌이게 되었다.
“어쭈, 술도 먹어?”
물론 이전 김준, 김현의 집에서 술을 마셨을 때 없었던 이유한은 처음 보는 자연스러운 장면에 어이없이 웃고야 말았지만, 다행히도 ‘그래, 먹고 싶기도 하겠지’ 하며 금세 수긍해 버렸다. 다만 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이유한은 우리와 함께 술을 먹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나 아직 환자야. 오늘 물놀이한 것도 모자라서 술까지 마셨다고 하면 의사 선생님 뒷목 잡을걸.”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로 이유한이 그렇게 말했었다. 같이 마시면 좋을 텐데. 나도 참 그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어찌 됐든 미리 가져온 술들은 거실에 풀어 헤쳐졌다. 그래도 전에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던 강수하와 장우진조차 이제는 적응이라도 한 건지 외려 두 눈을 형형히 반짝이고 있었다.
“너네 되게 자주 마시지.”
그 눈빛에 이유한이 혀를 차며 물었다.
“한 번밖에 안 마셨어.”
그리고 그 와중에 장우진이 착실하게 이유한의 말에 대답했다. 흐응, 하며 믿지 못하는 기색이었지만 정말이라고 덧붙인 말에 이유한은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찌 됐든 그렇게 각 잔에 술도 채우고 이유한의 잔에는 물을 채웠다. 그리고 첫 잔이니까 건배 정도는 해 줘야지, 하며 우리는 잔을 맞부딪쳤다. 그리고 나는 급하게 잔을 들이켰다.
“으, 쓰다.”
단번에 들이켜고 나니 입이 써서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당연히 맥주인 줄 알았는데 어째선지 처음부터 소주와 맥주가 섞여 있었다. 빨리 마시고 빨리 자자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유한이 내 입으로 과자를 내밀었다.
“고마워.”
바삭거리는 과자를 입에 넣으니 좀 나아졌다. 이유한은 ‘술도 잘 마시고 과자도 잘 먹고’ 하는 소리를 하며 내 머리를 잠시 쓰다듬었다.
“형도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그러게, 아깝다. 한 달 뒤쯤엔 나도 마실 수 있을까?”
술을 들이켠 모두를 쳐다보는 이유한의 눈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애초에 깨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나는 혼자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뒤쯤에 나랑 같이 먹어 줘야 해.”
이유한이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나를 보며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당황한 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한 달 뒤…….
“응? 싫어?”
내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이유한의 눈썹이 금세 팔자로 내려갔다. 나는 다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아냐, 아냐. 좋아. 응.”
“대답이 너무 늦는데…….”
조금은 심술궂은 말투였지만 이유한은 웃고 있었다. 나는 괜히 삐질 땀이 났다. 한 달 뒤에는, 난 여기에 없는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거짓말을 한 것이라 양심이 콕콕 찔려 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진짜 얼마 안 남았네……. 고작 2주, 아니, 채 2주도 남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게임의 엔딩까지.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어떻게 엔딩이 날까. 아니, 그보다 엔딩이 나고 나면 다시는 이렇게 만날 수 없겠지. 조울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방금까지 즐거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나는 다급하게 술을 찾아 다시 한번 입에 털었다.
“다음 잔은 내가 만들게!”
아주 다행스럽게도 술자리에 집중한 모두는 그런 내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굳이 내가 다음 잔을 만들겠다고 너스레를 떨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우리 그냥 마시면 심심하니까 게임할까?”
다음 잔을 따르려다가 내게 뺏긴 김현이 개의치 않고 웃으면서 제안했다. 나는 총 다섯 잔에 소주를 조금씩 따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게임?”
“어, 진실 게임?”
“……애냐?”
강수하가 어이없이 웃었다. 게임하자기에 대학에 들어가서 하던 술자리 게임을 생각하던 내가 좀 불순하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진실 게임이라, 언제 해 보고 안 해 봤더라. 기억을 더듬어 봐도 초등학교 때쯤 친구들이 좋아하는 아이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용도로 썼던 기억밖에 없었다. 이 중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없다 그런 류의 기억.
그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리다 문득 지금 여기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게임이지, 하는 무심한 생각도 들었다.
“재밌잖아. 그냥 재미로 하자, 재미로. 말 못 하면 마시는 걸로.”
“유한이 형은?”
“유한이 형은 다 진실만 말하면 되잖아.”
“……너무한 거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유한은 뭐라 더 말하지 않고 웃었다. 다들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김현은 정말 하고 싶은 듯 보였다. 잔뜩 기대가 되는 얼굴로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게 꼭 강아지 같았다. 꼬리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는 강아지.
“응? 한다? 내가 제안했으니까 먼저 질문할게?”
“그게 뭐야.”
“질문하고 싶은 사람은 당연히 지헌이.”
김현은 결국 모두의 동의를 듣지 않고 일단 시작했다. 시작하자마자 갑작스럽게 지목당해 당황했지만, 김현의 눈이 너무나 반짝거려 싫다고도 못하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저러겠지? 도대체 무슨 질문이기에.
“해 봐. 현이 질문하고 나면 나 질문할 거야.”
내가 결국 고개를 끄덕거리자 김현의 얼굴은 밝아졌다. 방방 뛰는 게 이제는 무슨 질문일지 기대까지 될 정도였다.
“있지, 지헌아. 나 뽀뽀해도 돼?”
“……그게 질문이야?”
“응? 응!”
하지만 막상 나온 질문은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둘러본 주위는 안타깝게도 나만큼이나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그렇지, 서로가 사귀기로 한 마당에 딱히 물어볼 만한 것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나는 어이없이 웃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해? 안 돼.”
“아, 왜!”
“내 마음이지. 그럼 나 이제 질문한다?”
김현이 불퉁하게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내가 ‘응’이라고 할 거라 생각했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머릿속을 알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어영부영 내 차례가 됐다. 사실 하고 싶은 질문이 있긴 한데, 나는 무심한 얼굴로 다섯 사람을 둘러봤다. 일단 이유한은 술 못 먹으니까 패스하고. 음, 누구한테 하지.
“그럼, 나는 준이?”
“어……. 응.”
갑자기 지목당한 김준이 두 눈을 빠르게 굴렸다. 제게 질문할 만한 게 뭐가 있는지 가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지금 궁금한 거 하나밖에 없어.”
“뭔데?”
“그날. 내가 몇 번이나 물어봤었잖아. 이유한, 아니 유한이 형하고 너희끼리 만난 날. 무슨 이야기 했어?”
내 질문에 김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걸 물어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순간 정적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 누구도 말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주제였다. 하지만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내가 당사잔데 왜 나한테 숨기는 거지? 하지만 진짜 이해할 수 없는 건 김준이 결국 벌주를 마시는 것을 택했다는 거였다.
“나 이제 물어보면 돼? 으, 쓰다.”
“뭔데 그렇게까지 숨기는 거지?”
“대답 안 하려고 마신 거잖아. 아, 너무 쓴데. 이거.”
김준이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소주가 좀 많았나. 무심한 생각이 들었다.
“나 그럼 질문한다, 지헌아.”
“나한테?”
“내가 너 말고 궁금한 사람이 어디 있어.”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이 김준이 웃으며 답했다. 아, 그런가. 김준의 말이 나도 모르게 수긍이 되었다. 그러자 어쩐지 이 게임이 나한테 전혀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떻게 해도 한 번 내가 질문하고 나면 나한테 질문이 돌아온다는 거잖아.
나는 그제야 미간을 찌푸렸다. 한 치 앞을 못 봤다. 김준은 어느새 싱글벙글하다가 이제 질문을 하려는 듯 사뭇 비장한 얼굴이 됐다. 딱히 질문할 거리가 없긴 한데, 김현하고 비슷한 얘기를 하려나? 그럼 간단하게 부정해 버리고 또 물어봐야지, 뻘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금방이었다.
“김현하고 나하고 대면 솔직히 내가 더 낫지?”
“어?”
“뭐라는 거야.”
“솔직히 얘보단 내가 낫지 않아?”
하지만 막상 김준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오히려 너무 당황스러워 입이 벌어지는 질문이었다. 이유한이 어이없이 터져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강수하와 장우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나는 얼빠진 얼굴이었고 김현은 억울한 얼굴이었다.
“야, 솔직히 너보다 내가 낫지.”
“무슨 소리야. 내가 훨씬 낫지.”
“말도 안 돼. 지헌아, 내가 좋지?”
“아닌데. 김현, 너는 아니거든.”
갑자기 김준과 김현이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장면을 가만히 보다가 결국 가운데 있는 컵으로 손을 뻗었다. 누가 더 좋은 것을 선택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김 형제의 평화를 위하여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단숨에 입에 술을 털어 냈다.
“아, 이거 맥주 한 방울 아냐?”
알싸한 알코올 향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에이, 그럴 리가.”
능청스러운 김준의 대답이 들렸다.
그리고 지금. 그러니까 그 이후로 30분이 지난 지금, 진실 게임의 의미는 퇴색되어 버린 지가 한참이었다. 누구도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아까 전 김준이 했던 예의 그 시답잖지만 대답을 하긴 뭐한 부류의 질문이, 그리고 녀석들에게는 아까 전 했던 똑같은 질문이 오고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는 내가 술을 진짜 너무 많이 마셨다는 이야기다.
“아, 나 술 마시면 안 되는데.”
아무 말이나 막 할 텐데.
“아무 말이나 막 할 텐데.”
나는 무거운 머리를 꾹꾹 눌렀다. 핑핑 돌아가는 술병이 가끔 두 배로 늘어났다가 다시 원상 복귀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 지금 말했나?”
아닌가, 생각만 했나?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안 취했나? 나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기는 했지만 딱히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아직 거기까진 안 취했구나.”
머리가 핑핑 도는 걸 봐서는 진짜 꼭지까지 취한 줄 알았는데, 술이 좀 세졌나.
“술이 좀 세졌나.”
“지헌이, 왜 이래?”
순간 조용하던 거실에 이유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쪽으로 바로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눈이 크게 떠지지가 않았다. 풀렸나, 막 엄청 무거운데. 어쨌든 이유한은 완전히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음, 저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아마 또 입으로 내뱉었나 보다. 술이 세진 건 아니었나 보네. 나는 빠르게 수긍했다.
“술버릇인 거 같아요.”
“아마도 입으로 일단 내뱉는 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의식적으로 내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입으로 내뱉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제 술을 더 마시면 안 되겠다,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놈의 진실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제 강수하가 질문할 차례라는 거였다. 모두들 아직은 게임을 끝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 진짜 더 마시면 안 되는데, 또 마시게 생겼다.
“나도 하고 싶어.”
막 강수하가 질문을 던지려던 차에 이유한이 뾰루퉁하게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이유한에게로 갔다. 술을 못 마시다 보니 내가 이유한한테 한 번도 질문을 안 했다. 서운했나 보네. 조금 미안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제 차롄데, 그냥 형이 할래요?”
“응? 그래도 돼?”
이유한의 얼굴이 삽시간에 밝아졌다. 질문을 받는 게 아니니 술을 마실 일도 없는지라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가 저 질문이 나한테 올 거라는 게 떠올라 다시 휙휙 저었다. 왠지 웃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술기운이 점점 더 올라오고 있었다.
“어지러워.”
“흠, 안 마셔도 되는 질문 할게.”
“으음, 응.”
두 눈을 깜빡이며 이유한을 마주했다. 이유한의 첫 질문이었다.
“오늘 나랑 같이 잘래?”
잘못 들었나? 같이 자자고 한 것 같은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유한을 바라봤다. 밝게 웃고 있는 말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같이 자자고?”
“응. 나랑.”
“……같이?”
몇 번 되묻는 내가 되레 이상한 듯 이유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잠을.
“아, 잠을.”
술에 취해서인지 상황 파악이 빠르게 되지 않아 나는 그제야 이유한의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잠을 자자는 거잖아. 그 자자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잠을 자자는 거잖아. 그 자자는 게 아니고…….”
나는 내 뺨을 두드렸다. 불순한 생각을 치우려는 몸부림이었다.
“그, 자자는 게 아니고……?”
이유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생각을 곱씹었다. ……생각을 곱씹었다고? 아, 나 방금 입으로 말했나?
동그래졌던 이유한의 눈이 나와 마주치며 서서히 휘었다. 웃음기가 돋아나는 그 표정에 나는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입으로 말했네. 나는 급하게 내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자자는 게 뭐야? 무슨 뜻이야? 응?”
건수를 잡은 사람처럼 이유한이 능글맞게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도리질 쳤다. 입을 막고 있는 손도 그대로였다. 머리를 움직이니 안 그래도 무거운 머리가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말해 봐. 그게 뭔데?”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었다. 죽어도 말 못 해. 생각 같아서는 내 입을 붙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디 접착제 없나. 입술을 붙이든 손바닥을 붙여 버리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참나, 귀여워 죽겠네. 지헌아, 내 질문에 대답은 해 줘야지. 안 그러면 또 마셔야 해.”
결국 푸흐흐, 웃은 이유한은 내 앞에 있는 술잔을 가리켰다. 나는 그제야 앞에 있는 술을 살폈다. 그래도 양심껏 적당한 비율로 섞인 소맥이긴 했지만, 진짜 여기서 한 잔만 더 마시면 이제 입으로 말한다는 자각도 없어질 것 같았다.
뭐, 물론 지금도 없긴 하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가리던 손을 뗐다.
“안 자.”
그리고 빠르게 다시 입을 막았다. 나는 내 주둥아리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급하게 다시 입을 막은 것 때문인지 이유한이 이제는 얼굴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다른 네 사람도 이유한처럼 웃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얼굴까지 빨개져서 웃기 시작한 터라 나만 두 눈을 굴렸다. 어쨌든 대답했으니까 나 안 마셔도 되는 거 맞지?
아직도 웃고 있는 모두를 제쳐 두고 혼자 고민에 빠졌다. 누구한테 무슨 질문을 하지?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궁금한 거나 물어볼까. 어차피 아까부터 묻던 그날의 이야기는 몇 번을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김준.”
나는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뗐다가 다시 급하게 틀어막았다. 갑자기 제 이름을 지목당한 김준이 웃다 말고 의아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목덜미가 불그스름해진 채였다.
“조금 쓸데없지만 궁금한 게 있어.”
그리고 또다시 틀어막았다. 김준이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
“응?”
“너는 연애 몇 번 해 봤어?”
아마도 김준은 내 질문이 예상 범위에 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김준이 다시 한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쓸데없는데 사실 김준의 연애 경험 횟수는 좀 궁금했었다. 분명 연애 한두 번으로는 나올 수 있는 다정함이 아니었다고…….
잠시 의아하게 나를 보던 김준이 고심하듯 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아주 진지하게 숫자를 세는 모양새였다. 와, 손가락까지 펴서 세네. 대체 얼마나 많기에 손가락이 필요한 거지?
“와, 손가락까지 펴서 세네. 대체 얼마나 많기에 손가락이 필요한 거지?”
나는 김준을 따라 손가락을 펴 봤다. 하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난 한 명인데. 하긴, 준이는 많을 줄 알았어.
“난 한 명인데. 하긴, 준이는 많을 줄 알았어.”
“뭘 많을 줄 알아. 나 그리고 아직 대답 안 했어.”
김준이 킥킥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기우뚱했다. 나 방금 생각만 했는데……? 순간 다리 위 우두커니 떨어져 있는 내 손이 보였다. 음, 언제 입에서 손을 뗐더라.
“음, 언제 입에서 손을 뗐더라.”
“정신없네. 한지헌, 한 명이야?”
장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웃으며 물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
순간 거실에 한숨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웃는 거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나는 멍청하게 주위만 보고 있었다.
“지헌이 많이 취했네.”
“그러게.”
“으응, 나 안 취했어.”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좀 취한 것 같기도 하고……. 뭐, 내가 아무리 취했어도 다들 걱정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건 확실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아직 안 취했어.
“나 아직 안 취했어.”
“……참나.”
하지만 다들 믿어 주는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불퉁하게 입을 비죽거렸다. 그런 와중에 순간 김현이 갑자기 방긋 웃으며 제 손을 번쩍 들었다.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럼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다 대답해 주겠지?”
“으응?”
“지헌아. 너는 우리 중에 누가 제일 좋아?”
김현이 밝게 웃으면서 물었다. 아주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김현은 내게 물어 놓고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숨을 한번 내어 쉬었다.
“너 차례 아닌데.”
“……아.”
“나 아직 그 정도 정신은 있어.”
나는 우물거리듯 대답했다. ‘에이, 안 넘어가네’ 하며 킥킥 웃는 김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나 아직 안 취했다고. 하지만 고개를 조금 격하게 끄덕였는지 순간 몸이 기우뚱 움직였다. 마치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
“지헌아!”
순간 몸이 뒤로 넘어갈 뻔했지만, 다행히도 넘어가진 않았다. 양쪽에 있던 강수하와 이유한이 내 몸을 받쳐 들었기 때문이었다. 반응이 얼마나 빨랐는지 얼마 넘어가지도 않았다. 나 혼자서도 안 넘어질 수 있었는데…….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가 된 심정이었다.
“나 혼자서도 안 넘어질 수 있었는데…….”
“진짜 미치겠네.”
갑자기 다들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느새 강수하와 이유한은 내게 한 뼘 더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무심하게 쳐다보다 다시 김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근데 준이 대답했나?”
“아니, 아직.”
“그럼 마셔야지.”
“대답할 시간은 줬냐고. 너 전에 네 명 만났어. 나 대답했다?”
“오.”
씩 웃는 김준을 따라 손가락 네 개를 펼쳤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적네. 열 손가락이 모자랄 것 같았는데……. 순간 뻘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적네. 열 손가락이 모자랄 것 같았는데…….”
“아, 적어?”
김준이 눈웃음을 쳤다. 김준도 아무래도 제가 만난 수가 생각보다 적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닌가. 열여덟에 네 명이면 적은 건 아니지 않나.
“아닌가. 열여덟에 네 명이면 적은 건 아니지 않나.”
“와, 진짜 미치겠네. 또 갑자기 적은 건 아냐?”
“너 왜 내 생각 읽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입 밖에 내지 않은 말이었다.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입을 열자 갑자기 모두가 완전히 웃음을 터트렸다. 심지어 몇 녀석은 눈꼬리에 눈물까지 맺혀서! 뭐가 그렇게 웃긴 거지? 다들 웃고 있는 이 상황에서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이제 내 차례야.”
한참을 웃더니 김준이 여전히 남아 있는 술잔을 내게 밀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술잔부터 내미는 게 먹이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것 같았다.
“넌 우리 중에 누가 제일 좋은데?”
그러니까 방금 전 김현이 했던 질문을 그대로 가져온 모양이었다.
“……다 좋은데?”
“그런 게 어디 있어. 한 명만 골라야지.”
김준이 입을 비죽거렸다. 하지만 진짜로 누구 한 사람에게 한정된 감정이 아니었다. 찰랑거리는 술잔이 그냥 마시라고 내게 속삭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내어 쉬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야?”
김준이 웃었다.
“……내가 너희들 중에 누구 한 명만 좋아했다면.”
애초에 이런 관계를 만들지도 않았겠지. 나는 결국 술잔을 단번에 입에 털어 냈다.
***
[D-12]
[40%]
“아.”
지끈거리는 머리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두 눈을 몇 번 깜빡여도 바뀌지 않는 천장에 잠시 머리를 굴리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별장에서 잠들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내 허리께를 감고 있는 묵직한 팔이 느껴졌다. 김현이었다. 잘 깨지 않는 잠에 무거운 눈을 비비적거리며 그 팔을 조심스럽게 치워 냈다. 아마 다들 어느 방도 들어가지 못하고 잠든 모양인지 우리 모두 거실 바닥에 대충 널브러져 있었다.
“일어났어?”
그 와중에 가장 먼저 일어났는지 이유한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나는 여전히 비몽사몽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찍 일어났네.”
“응, 너도 진짜 일찍 일어났네.”
이유한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분명 퉁퉁 부었을 것 같은데 이유한은 방금 일어났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잘생겼다. 참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속은 괜찮아?”
바로 부엌으로 가서 물을 떠 온 이유한이 내게 잔을 건네며 물었다.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물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머리가 다시금 찌르르 울렸다.
“속도 머리도 난장판이야. 얼마나 마신거야, 대체.”
“많이 마시긴 했지.”
이유한은 어제 한 잔도 마시지 않았던 터라 꽤 멀쩡한 얼굴이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더 마신 건지. 그러니까 어제 김준의 질문을 받고 술을 마셨고……. 거기서부터 필름이 끊겼다. 나 무슨 실수라도 한 건 아니겠지?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혹시 유한아.”
“응?”
“나 어제 실수한 거 있어?”
“음, 아니. 없는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이유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없었던 것 맞겠지? 이유한의 반응을 봐서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나는 그제야 조금 안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은 얼굴에 물이라도 끼얹어야 할 것 같았다.
“근데 어제 기억 안 나?”
어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던 내게 이유한이 넌지시 물었다.
“응, 필름이 끊겼어. 왜?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니, 뭐…… 하하, 별일 없었어.”
굉장히 미심쩍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머리가 더 아파 오는 것 같았지만, 멍한 정신을 깨우는 데는 이만한 게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얼굴에 물을 끼얹고 나서 물이 뚝뚝 흐르는 얼굴을 닦아 냈다. 나는 그제야 거울에 비춘 내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와, 엄청 퉁퉁 부었네. 이유한이랑 이런 얼굴로 마주했나? 엄청 깨겠는데. 새삼 부끄러움이 밀려 들어왔다. 결국 찬물을 몇 번이고 더 끼얹었다. 그런다고 해서 바로 가라앉진 않겠지만.
“……어?”
한참을 찬물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내고 나서 다시 한번 거울을 확인했다. 여전히 부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거울 속에서 내 부은 눈이 아닌 다른 것을 보고 말았다.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다, 이거.
“……키스 마크 같은데?”
절대 내 목에 있을 리가 없는 키스 마크가 눈에 띄었다. 나는 거울에 가까이 다가섰다. 아무리 봐도 확실했다. 애인과 여행을 다녀온 친구 목에 선명하게 있던 그것이었다. 확실히. ‘아, 자국 남았었네……’ 하고 말끝을 흐리며 당황하던 친구의 얼굴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근데 이게 왜…….”
나는 손으로 목을 벅벅 문질러 봤다. 당연하게도 지워질 리가 없었다. 뭐가 묻은 게 아니니까. 근데 이게 대체 왜 생긴 거지? 도대체 누가?
어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머릿속에서 잘려 나간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으로 술잔을 들이켰던 기억만 확실할 뿐 그 외에는 무엇 하나 기억나는 게 없었다.
“누구지?”
나는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았다. 혹시 이거 키스 마크가 아닌가? 내가 어디 부딪쳤거나 벌레에 물렸거나 그런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다시금 거울을 확인했다. 아니, 이건 어떻게 봐도 확실히 키스 마크였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생각, 생각을 해 보자. 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날 거야. 나는 두 눈을 감고 어제 일을 계속해서 되새김했다. 내가 술을 들이켜던 그 장면부터…….
똑똑.
한참 기억을 다시금 되짚던 때 화장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지헌아, 괜찮아?”
“아, 응. 괜찮아.”
이유한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아 걱정된 모양이었다.
“나 양치질만 하고 나갈게.”
“응.”
대충 둘러대며 칫솔을 꺼내어 들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어제의 일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떠오르지를 않으니 평상시 내가 필름이 끊겼을 때의 행적으로 유추해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술버릇은 없었다.
친구들은 그저 내가 뇌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만 했다. 정말 뇌가 무용지물이라는 게 어떤 건지 몸소 보여 줬다며 킥킥거렸을 뿐, 이렇게 키스 마크가 생길 만한 주정을 부린 적은 없었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입 속을 헹궈 내고 나는 화장실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꽤 오래도록 나오지 않은 탓인지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자고 있던 녀석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저 중에 한 명인데. 와중에 내 머릿속은 대체 키스 마크의 원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 지헌아 안녕.”
“응. 준아, 잘 잤어?”
“응.”
고개를 끄덕이는 김준의 시선이 어쩐지 내 목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목이 신경 쓰여서 그렇게 보이는 건가. 아니면 김준인가……?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너야?”
나는 결국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김준은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
“아, 아니야.”
이 키스 마크 네가 한 거냐고. 목구멍까지 말이 나왔지만 나는 결국 삼켜 냈다. 어제 어떤 상황이 어떻게 벌어진 건지도 알 수가 없었던 터라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말을 하려다 만 나를 김준이 의아하게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응? 뭔데?”
“아무것도 아니야. 배고프다. 밥 먹자.”
나는 고개를 젓고 빠르게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를 따라오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부엌에 들어오니 이번에는 찬물을 벌컥벌컥 마셔 대고 있는 장우진과 마주쳤다.
“어, 줄까?”
“아냐, 괜찮아.”
“속은 괜찮고?”
“응. 너도?”
“응.”
짧은 대화가 오고 가는 와중에 장우진은 다시 한번 물을 따라 마셨다. 어제 많이 마셨나? 내 기억에는 나만 취한 것 같았는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아니, 나 어제 많이 취했지?”
“응, 많이 취했지.”
“혹시 나 실수 안 했어?”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장우진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히 안 한 것 같은데.”
“으음, 그럼 아무 일도 없었어?”
“……기억 안 나?”
장우진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내게 되물었다. 그런 장우진을 가만히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빤히 보던 장우진은 ‘아, 그래……’ 하며 말끝을 흐렸다.
“글쎄. 그런가?”
그러더니 한 대답이 이도 저도 아닌 것이어서 ‘무슨 대답이 그래?’ 하며 나는 어이없이 웃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냐. 아무 일도 없었어.”
“늦었어.”
“아, 늦었어?”
장우진이 푸흐흐, 웃더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진짜 별일 없었어.”
거짓말. 나는 입을 비죽거렸다. 목에 있는 키스 마크가 별일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또 다들 입을 다문 모양이었다. 좀 부끄럽긴 하지만 아무래도 모두를 모아 놓고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 길로 거실로 갔다. 대부분 정신을 차린 듯했지만, 그 와중에 김현은 두 눈을 아직 감고 있었다.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어, 있잖아.”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김현도 억지로 떠지지 않는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내가 세수를 하다가 뭘 하나 발견을 했는데…….”
“응?”
나는 조심스레 목에 손을 짚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 손을 따라 목에 닿았다.
“아…….”
순간 김현이 입을 벌렸다. 다른 애들은 그저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왠지 느낌이…….
“그게 뭐야?”
이유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왔다. 왠지 이상한 기분에 나는 목을 휙 가렸다.
“아, 어디 부딪쳤나 해서. 혹시 나 어제 어디서 굴렀어?”
“……아니? 왜 그러지? 벌레라도 물렸나?”
이유한의 말에 거짓은 없는 느낌이었다. 그건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사람 김현만 제외하고. 당황한 듯 도로록 굴러가는 김현의 눈을 보며 확신했다. 이건 김현 짓이다. 분명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너희도 모르면 말고, 하고 자리를 떴다. 이건 왠지 김현과 둘만 있을 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
해장하는 겸 라면을 먹고 나니 어느새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먼저 잠들고 자기들끼리 술을 더 마셨다고 하더니, 이제 하나둘 낮잠에 빠져들기 시작한 터라 거실은 고요했다. 나는 다들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깥에서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다. 앞의 계곡에나 나가 볼까, 무심한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잠들었다고 생각했던 김현이 반짝 눈을 떴다. 얼마나 먹은 건지 여전히 눈이 부어 있었다.
나는 김현에게 눈짓했다.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잘됐다. 김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어제 놀았던 계곡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에 자리 잡고 앉아 발을 담그니 금세 시원해졌다.
“시원하다.”
“그러게.”
김현은 답지 않게 말이 없었다. 아까 전 밥을 먹던 중 어제 일이 기억 안 난다는 말에 화색을 짓던 현이라, 아마도 내가 어제의 일을 물어볼까 봐 불편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현아.”
“응.”
“이거 너야?”
나는 일단 아침부터 나를 혼란으로 이끌었던 키스 마크를 짚었다. 김현이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했다. 맞구나. 사실 예상했던 대상은 아니었다. 이유한이나 김준이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김현 같은 경우는 이게 키스 마크인지 뭔지조차 모를 거라고 생각했었다. 정작 이유한과 김준이 생전 처음 본다는 눈을 했지만.
“그런 게 생길 줄 몰랐어.”
시무룩한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제 일이 기억이 안 나서. 이게 왜 생긴 거야?”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김현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듯 두 눈을 굴렸다. 이상하리만큼 부은 눈이 신경 쓰였다. 나는 슬쩍 그 눈에 손을 댔다. 현이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눈은 또 왜 이렇게 부었어. 술 많이 마셨어?”
“응? 응.”
평소랑 많이 다른데, 왜 이러는 거지?
처음에는 키스 마크를 만든 것에 대한 민망함과 미안함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김현의 태도는 뭔가 좀 달랐다. 그러고 보니 전에 술 마셨을 때도 김현 눈이 부었던가. 아니, 분명히 안 부었었는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기억이 날 것 같은데…….
“어제 자다가, 미안해. 내가 너한테 안겨서 잤는데……. 목이 보이길래 뽀뽀를 한다고 했는데. 저런 게 생기는지 몰랐어.”
“으응, 그래. 뭐 알았어.”
뽀뽀만 한다고 생기는 건 아닐 텐데……. 하지만 왠지 키스 마크가 생긴 게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어쩐지 중요한 기억을 잊은 것 같은데.
“화났어?”
“……아니.”
화가 난 게 아니라……. 나는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잔상을 떠올리려 애썼다. 잃어버린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했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니까 어제.
‘왜 너는…….’
나는 갑작스레 떠오르는 김현의 얼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울고 있다. 그래, 울고 있었다. 나를 보며 울고 있던 모습을 떠올린 내가 김현을 마주했다. 그래서 부었구나. 근데 왜? 왜 울었어? 무어라 더 말을 한 것 같은데 그 뒤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현아.”
“응.”
어색하게 나를 보고 있는 김현이 정말 키스 마크를 남긴 것에 대해 미안해서 저러는 걸까? 혹시 어제 있었던 일을 내가 기억해 버릴까 무서운 건 아닐까. 다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는 이유가 뭘까. 김현이 울었는데 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는 거지? 나는 찌푸리던 미간을 애써 풀며 웃었다.
“너 변태야?”
“어?”
“이런 거 막 남겨 놓고. 어떡할 거야. 나 집에 어떻게 가? 기사님이 이거 보고 뭐냐고 물어보면 어떡해?”
“어, 어? 어떡하지? 아, 어떡하지?”
시무룩하던 김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나는 일부러 더 오버스럽게 징징거렸다.
“이 여름에 목도리를 할 수도 없고.”
“아, 미안해. 진짜.”
“하하하하. 장난이야.”
“어떡하지, 진짜.”
김현은 내 목에 있는 키스 마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긴장한 것처럼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은 풀어진 것을 보며 나는 웃었다. 아무래도 물어보진 못할 것 같았다.
경험상 시간이 지나면 끊겼던 필름도 돌아올 테니 물어보는 것보다는 기다리는 게 낫겠지. 직접 물어보기에는……. 나는 부어 있는 김현의 눈을 다시 한번 쓸었다. 김현이 내 눈을 곧게 마주했다.
“괜찮아.”
김현에게 속삭였다. 김현이 여전히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울었어? 현아, 무슨 일이 있었어? 대체.
묻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