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이유한 과거(2권) (9/36)

외전 1. 이유한 과거

“이유한!”

“어? 서경호?”

“아, 깨어났구나. 진짜로. 아,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병원 침대에 멍하니 누워 있던 유한이 쾅 소리를 내며 열린 문에 놀라 몸을 일으키며 웃었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병원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반가운 손님이었다. 서경호. 고등학교 시절 내내 단짝이었던 서경호였다. 유한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아, 내가 진짜 너 죽는 줄 알고……. 네가 얼마나 오래 잤는지 알아?”

경호는 목 끝을 차고 올라오는 울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이유한이 경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그 토닥임에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말았지만.

“나 안 죽었거든. 울지 말아 줄래. 기분 이상하거든.”

“아, 알아. 아는데 눈물이 나는 걸 어떡해. 와, 진짜 살아 있는 거 맞지?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

“닭살 돋으니까 그만해.”

유한이 큭큭대고 웃었다. 경호는 유한의 반응에 헛웃음을 쳤지만 두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정말 죽는 줄만 알았다. 다시는 못 볼까 두려웠다. 살아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음에도 믿기지가 않았다.

“이렇게 깨어날 거면 빨리 좀 깨어나지…….”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냐.”

“그건 그렇지만…….”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을 제 팔로 거칠게 닦아 낸 경호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야 조금 진정이 되는 듯해 보였다.

“저기 가서 음료수나 꺼내 먹어. 내가 아직 움직이기가 힘들다. 오래 누워 있었더니.”

“야, 평생 못 걷는 건 아니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음료수나 먹어.”

유한이 경호의 어깨를 밀었다. 그제야 얼굴에 웃음이 비친 경호였다. 냉장고에서 물 한 잔을 꺼내어 마시며 보조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유한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부담스럽다.”

“눈 뜬 걸 3년 만에 봐서 이상해서 그래.”

“그러니까. 3년 만에 보니까 너 좀 늙었다.”

“……재수 없어.”

경호의 반응에 유한이 낄낄거리고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였지만 바로 어제 본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었다. 유한이 웃다가 문득 생각난 듯 목소리를 낮췄다.

“야, 너 근데 말 안 했더라.”

“뭘.”

“나 왜 떨어졌는지.”

유한의 말에 경호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한숨을 푸욱 내쉰다.

“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말했어야 하는데.”

“아냐. 잘했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잘하긴 뭘 잘해. 내가 진짜 처음에는 네가 금방 깨어날 줄 알고 안 했던 건데.”

“내가 좀 오래 잤지?”

유한이 웃었다. 이게 웃을 일인가 싶어 경호가 눈을 흘겼다. 처음에는 수연이 때문이었다. 저 때문에 벌어진 상황에 정신이 빠져 버린 그 애 때문에. 이유한이 곧 눈을 뜰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었다. 하지만 이유한은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았고 경호는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왜인지 모른다 했던 그 상황을 번복하기에 경호는 너무 어렸다. 그 상황을 만들었던 당사자들이 도망치듯 학교를 떠난 후로는 더욱 말할 수 없었다. ‘사고였을 거예요’ 하고 말했을 뿐 그 이상의 말을 꺼낼 수 없는 저 스스로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수연이는 잘 지내?”

“잘 지낼 리가. 지금은 캐나다에 있어. 너 깨어났다는 소식은 전했어. 엄청 울더라.”

“하하. 미안하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한데. 네가 뭘 어쨌다고. 그 상황에 있었던 사람 중에 미안할 필요 없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경호가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그날 이후 경호는 원망하고 또 원망했었다. 그 상황을 만들었던 그들을. 그들도 그 죄책감을 지고 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경호의 생각을 유한도 알고 있었다.

경호는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며 이유한의 얼굴을 살폈다. 스물한 살의 이유한. 3년을 잃어버린 친구. 생각만 해도 마음 아팠다. 그날 자신이 좀 더 주의 깊게 봤더라면, 좀 더 빠르게 움직였더라면…….

“그렇게 보지 마.”

“뭐.”

“짠하게 보지 말라고.”

“누가 짠하게 봤다고.”

“아님 말고.”

이유한이 푸흐흐 웃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때의 우리는 쳇바퀴가 굴러가듯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고 있었다. 오로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하여 공부를 해야 하는, 인생 전체에 공부밖에 없는 세상 속.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에 공부를 했었지만 정말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잘 몰랐었다. 언제나 의문이 가득하던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열여덟 살의 이유한도 서경호도.

[오늘도 힘내.]

며칠째 이유한의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초코 우유와 쪽지를 경호가 먼저 발견하여 집어 들었다. 킥킥거리고 웃으면서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니 이유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 이유한 인기 엄청 많아.”

“시끄러워.”

“며칠째냐, 지금.”

경호는 부러움 섞인 얼굴이었지만 말투는 장난스러웠다. 유한은 별로 흥미 없는 얼굴을 하고서 음료수를 집어 들었다. 진짜 며칠째냐. 유한은 휙 한번 우유를 훑어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경호에게 내밀었다.

“너 먹어.”

“또 안 먹어? 좀 먹어 줘라. 정성이 있지.”

“됐어.”

그러고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 책상 서랍에서 참고서를 꺼내 드는 유한을 보며 경호가 혀를 끌끌 찼다. 이런 게 뭐가 좋다고, 매일 아침마다 이런 것까지 가져다주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득템. 개의치 않고 우유 입구를 열고 들이마셨다.

“근데 누군지 전혀 모르겠어?”

“어. 관심 없어.”

“왜 관심이 없지? 진짜 이해가 안 돼.”

“공부해야 하잖아.”

“어휴, 범생이.”

경호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부 벌레 아니라고 할까 봐 여자도 모르고 책만 파고 있는 녀석이었다. 사실 연애도 한 번씩 할 법도 한데 이유한은 아예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이렇게 며칠씩이나 초코 우유 사다가 책상에 두고 그러면 호기심이라도 생기지 않나? 어쩜 저렇게 관심이 없는 거지.

“야,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막 이거 주는 애가 민수연이면 어떡할 거야?”

경호가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이유한에게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민수연. 학교 내에서 예쁜 것으로 유명한 동급생이었다. 이유한도 아는 이름이었다. 유한이 헛웃음을 쳤다.

“민수연이면 뭐.”

“아니, 민수연이라니까? 얼굴 예뻐. 성격 좋아. 뭐 하나 빠지는 데가 없는데 네가 좋대. 완전 감사한 거 아니냐.”

“너 공부 안 해? 곧 기말이야.”

“아, 진짜 재미없어.”

경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와도 별로 관심 없다 이거지? 저 정도면 그냥 공부랑 연애하는 거지. 어휴.

“그러니까 누구라도 싫다는 거네.”

“싫은 게 아니라 부담스러워. 공부 하나 하는 것도 벅차.”

유한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한 치의 거짓 없는 말간 얼굴이었다. 웃는 얼굴과 웃지 않는 얼굴이 갭이 가장 큰 사람을 꼽으라면 경호는 늘 망설임 없이 이유한을 꼽을 터였다. 웃고 있으면 순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그 정도로 공부할 거면 하버드를 가라, 그냥.”

“가면 좋고.”

푸흐흐 웃으며 이유한이 더 이상의 대화는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듯 참고서에 얼굴을 묻었다. 경호도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남은 우유를 원샷 하고 쓰레기통에 우유갑을 버리고 쪽지는 이유한 가방 속으로 꾸역꾸역 넣었다.

“아, 왜 여기다 넣냐고.”

“그럼 쓰레기통에 버리냐. 예의 없이. 버릴 거면 집에 가서 버려.”

“하아.”

잔뜩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겨 놓고서도 절대로 학교 쓰레기통에는 버리지 않을 것을 경호는 잘 알고 있었다. 그 후 담임 선생님이 반 안으로 들어오고 경호가 제자리에 돌아갈 때까지 유한은 참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유한은 공부를 곧잘 했다. 어렸을 적부터 잘했기에 가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을 정도였다. 분명 예전에는 공부를 즐겼던 것도 같다. 무언가 풀린다는 희열이랄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의무감이 자신을 짓눌렀다. 하지 않으면 안 돼.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면 안 돼.

그런 생각이 넘쳐흘렀다. 밝았던 성격이 차츰 조용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것은 가장 가까이에서 이유한을 봐 온 서경호도 확실히 느낀 차이였다. 하지만 그렇게 된 이유가 가늠이 되기에 경호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냥 평상시처럼 대할 뿐이었다.

“성적 관리 잘해야 해. 알지?”

새벽 6시에 일어나고 새벽 2시가 다 되어야 잠을 잔다.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은 오로지 공부뿐이었다. 사실 이제는 뭐가 목표인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경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놀고 싶다. 힘들다. 조회가 끝나고 선생님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경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 가서 세수라도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여전히 책을 보고 있는 이유한을 뒤로하고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경호.”

그런 경호를 누군가가 불렀다. 경호는 눈이 동그래졌다. 민수연이었다. 방금 전 제가 언급했던 대상이 눈앞에 있으니 경호는 괜히 찔리는 마음에 두 눈을 굴렸다. 들었을 리는 없고 욕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없는 자리에서 얘기했다는 게 괜히 마음에 걸렸다.

“어, 너 나 알아?”

그리고 애초에 서로가 같은 반 한번 된 적 없는, 거의 모르는 사이였다. 그저 동급생일 뿐이었다.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경호를 보며 수연이 웃었다.

“말해 본 적은 없긴 하지. 너 유한이 친구지?”

경호가 문득 이유한 책상 위에 있던 초코 우유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설마. 진짜? 이유한에게 민수연의 이름을 거론한 것은 그저 제가 알고 있는 학생 중에서 가장 예쁜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진짜 민수연이 그 초코 우유를 가져왔을 거라는 가정을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근데 설마 진짜 민수연이…….

“유한이 혹시 그, 책상에 있던 거 먹니……?”

경호는 지금은 제 배 속으로 들어간 초코 우유를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양심이 누군가 찌르는 것처럼 콕콕대고 아팠다. 민수연이건 아니건 이유한을 좋아하는 사람을 제가 마주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다시는 안 먹어야지, 경호는 남몰래 다짐하고 있었다.

“어, 안 먹……어.”

“아, 그래…….”

시무룩해진 얼굴이 신경 쓰였다. 진짜 민수연이라도 싫을까? 이유한도 그래도 남잔데, 이렇게 예쁜데? 내가 너무 외모 지상주의인가? 경호는 혼란스러웠다. 수연은 시무룩했던 얼굴을 애써 지우고 웃었다.

“혹시 유한이 지금 만나는 애라든가, 좋아하는 사람 있어?”

경호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 씨.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해. 이유한이 없는 자리에서 이유한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직접 물어봐, 하고 무시도 못 하겠다.

“그걸 왜 서경호한테 물어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바로 등 뒤에서 이유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이유한이 조금 피곤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이유한에 민수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좀 빠져 줘야 할 것 같은데, 생각하고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차마 경호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유한이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없어. 근데 나 누구 만날 생각도 없어. 내일부터는 그런 거 올려놓지 마.”

단호한 거절이었다. 수연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아, 씨. 하다못해 나라도 없을 때 거절하지 싶어 경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유한은 그저 경호의 어깨에 팔을 둘렀을 뿐이었다.

“화장실 가던 길이야? 같이 가. 나 세수 좀 할래.”

“어어…….”

어정쩡하게 어깨동무를 당한 자세로 경호가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 남겨진 수연을 한번 쳐다봤지만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화장실로 들어오자마자 경호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야, 그렇게 말을 하면 어떡해.”

“그럼 어떻게 말을 해?”

“아니, 좀 더 유하게 거절할 수도 있잖아.”

“……음.”

유한이 곤란한 듯 제 머리를 긁적였다. 듣고 보니 좀 실수한 것 같았다. 너무 기분 나쁘게 말했나.

“가서 사과해.”

“흐음.”

“야.”

“알았어, 알았어.”

이유한이 말갛게 웃으며 화장실에서 빠져나갔다. 경호는 그런 이유한을 따라가려다 남의 일에 엿듣기까지 하는 건 실례라는 생각에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세수나 해야겠다.

“어, 민수연.”

유한은 경호의 말대로 곧장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아직 자리에 서 있던 민수연이 보였다.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는지 놀란 얼굴이었다. 이유한이 머쓱하게 웃으며 다가섰다.

“미안해. 생각해 보니 말을 좀 심하게 한 것 같아서.”

“아, 아니야.”

“내가 지금 여유가 없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가지고. 그래서 좀 날 서게 말했나 봐.”

“…….”

“미안해. 좋아해 줘서 고마워.”

이유한이 살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수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걔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누군지 확실하지도 않잖아.”

“뭐가 확실하지 않아. 누가 봐도 민수연밖에 예상 안 되는데!”

경호가 짜증스럽게 제 머리를 털었다. 그날 이후 벌써 며칠째 물방울이 맺혀 있던 초코 우유 대신 이유한의 자리에는 터진 초코 우유갑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한은 한숨을 내쉬면서 화장지로 책상을 닦아 냈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경호가 더욱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막상 당사자인 유한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야, 넌 짜증도 안 나?”

“짜증 나. 근데 누군지 모르잖아.”

“민수연이라니까!”

“확실한 거 아니니까.”

답답한 듯 제 가슴을 팡팡 내리친 경호가 결국 짜증스레 유한이 가지고 있던 화장지를 일부 떼어 내어 책상을 닦아 내는 데 동참했다. 우유갑으로 책상을 내리친 게 틀림없었다. 경호는 짜증스레 미간을 구겼다.

“가서 물어보자.”

“뭘?”

“네가 한 거 맞냐고. 물어보자고.”

“아니면 실례야.”

“걔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이러냐?”

유한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예상 가능한 인물은 수연밖에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에 민수연이라고 해도 사실 얼마간은 참아 줄 생각이었다. 실례를 한 건 맞았으니까. 그런 유한의 생각을 꿰고 있던 경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하여튼 멍청해.”

“야, 네 자리나 가. 조회 시작해 곧.”

책상 정리를 대충 끝낸 유한이 쓰레기통에 휴지를 갖다 버리며 말했다. 아직도 큼큼한 우유 냄새가 났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찾아가서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분명 자기가 맞다고 할 리도 없고 그랬다가는 이유한이 화를 낼 게 분명했다. 당사자가 가만히 있으니 저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일도 이러면 나 진짜 찾아갈 거야.”

“나도 가만히 있는데 네가 왜 그러냐고.”

이유한이 어이없이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이유한을 보니 경호는 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게 뭐냐고, 이건 학교 폭력으로 신고해도 할 말 없는 거라고. 입 안 가득 내뱉고 싶은 말들이 맴돌았지만 그 말간 얼굴에 경호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네 맘대로 해.”

“하하. 누가 보면 네 책상이 테러당한 줄 알겠다.”

이 상황에 진짜 웃음이 나오는 이유한이 더 놀라웠다. 타이밍 좋게 담임 선생님이 반 안으로 들어섰다. 경호는 생각 같아서는 한바탕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결국 입을 다물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누군지 잡히기만 해 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

“야, 도저히 못 참아.”

경호가 뒤돌아섰다. 그에 유한이 다급하게 경호의 팔목을 잡았다.

“놔. 가서 뭐라고 해야겠어. 이게 며칠째야. 이거 봐. 그대로 두니까 더 심해지잖아!”

유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경호의 말대로였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책상이었던 게 책상 서랍 안까지 모두 뿌려져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사물함에까지 번졌다.

책상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사물함까지 손대 버리니 유한의 사물함과 가까운 사물함을 쓰는 애들까지 피해를 보고 있었다. 유한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입장이기에 유한에게 무어라 말을 하지는 않지만 불편한 기색이 다들 역력했다.

“내가 할게.”

“네가 한다고?”

“응. 물어볼게. 내가.”

조금 짜증스러웠다. 놓으라고 손을 움직이던 경호의 움직임이 멈추자 그제야 유한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책상과 사물함을 대충 닦아 낸 휴지들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갔다 올게. 걔 몇 반이지?”

“……5반일걸.”

“응.”

유한이 힘없는 발걸음으로 반을 나섰다. 경호가 그 뒷모습을 보며 아직 조금은 남아 있는 잔여물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유한은 그 길로 곧장 5반으로 향했다. 다행히 막 반으로 들어가던 여학생이 한 명 있었다. 유한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민수연 있어?”

“어? 수연이?”

“응. 미안한데 한 번만 불러 줄래?”

그 애가 반 안으로 들어가자 유한은 발로 땅을 괜히 몇 번 찼다. 불편했다. 별로 좋은 소리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확실하지도 않은데 의심을 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 거기다가…….

수연이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반에서 빠져나오는 걸 본 이유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를 좋아한다는 사람한테 돌려주는 게 의심이라니. 최악이다, 진짜.

“유한아! 어쩐 일이야?”

발간 얼굴이 예뻤다. 유한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너한테 내가 진짜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점점 심해져서…….”

“응? 뭔데?”

“……아직도 아침마다 초코 우유가 오는데…….”

최대한 돌리고 돌려 유한이 입을 열었다. 수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 나 그날 이후로 안 올려 뒀는데…….”

“어, 그렇지? 알았어. 미안. 시간 뺏었네.”

유한이 살짝 고개를 도리질 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거짓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눈빛에 아무리 생각해도 괜한 의심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혹시 무슨 일 있어?”

수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유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말을 해도 되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짜증스레 머리를 흐트러트린 유한이었다. 결국 유한은 아침마다 터져 있던 우유갑에 대해 수연에게 설명했다.

미안하다, 어쩔 수 없이 네 생각이 나더라. 의심해서 미안하다. 근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둥의 변명도 함께였다. 수연이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히다가 이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상황상 뭐 그럴 수도 있겠네. 근데 나 진짜 아니야…….”

“응. 알겠어. 미안해. 의심해서.”

“아니야.”

“응. 들어가. 선생님 곧 오시겠다.”

유한은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섰다. 역시 괜한 의심을 했다. 제 반에서 멀어지는 유한의 뒷모습을 수연은 가만히 보고 있었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

끼이익 소리를 내며 옥상 문이 열렸다. 수업이 끝난 후 한 번씩 들르는 곳이었다. 하루 종일 공부와 씨름하고 나서 옥상에 올라와 하늘을 보며 누워 있다 보면, 그래도 마음이 좀 편안해져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날은 가끔 올라오곤 하던 유한이었다.

“너지?!”

아마 옥상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격앙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조금 전 생각했던 대로 편안한 휴식을 취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옥상에는 누군가 있었다. 유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옥상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귀에 꽂힌 이름이 제가 알고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면 미련 없이 옥상에서 내려갔을 거였다.

“수연아.”

민수연? 유한은 그대로 발걸음을 멈췄다. 처음에 발을 들여놨을 때 들렸던 여자의 목소리가 민수연의 목소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유한이 책상에 우유 터트려 놓은 거지?”

다시 또 그 목소리가 들렸다. 민수연이 맞구나 하는 생각에 유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를 터트린 주범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민수연이 아는 사람이었다는 거네.

“네가 그 새끼를 좋아하니까.”

“뭐?”

“알잖아.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유한은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옥상 문 앞에 서서 가만히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복수라도 한다는 건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핸드폰이 울렸다. 서경호의 어디냐는 메시지였다. ‘옥상에 올라왔어, 곧 내려갈 거야’ 하고 답장을 보냈다. 동시에 조금 높아진 민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싫다고 했잖아. 그만해 달라고, 제발.”

“수연아. 내가 진짜 잘해 줄게. 나랑 만나자. 어?”

“놔. 싫다니까. 대체 왜 이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유한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친한 사이가 아닌가. 수연의 그 목소리에는 공포감마저 서려 있었다. 그에 유한은 차마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소리의 근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몇 번 본 것 같긴 한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동급생이었다.

“뭐 해?”

유한이 퍽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유한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수연이 눈을 크게 떴다. 유한은 그 시선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얼굴로 일단 수연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고 있는 남자부터 거칠게 떼어 냈다.

“뭐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놓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조금 짜증스러웠지만 유한은 웃으면서 말했다. 수연이 발걸음을 살짝 움직여 유한의 뒤로 숨다시피 했고 그에 남자가 헛웃음을 쳤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유한아. 내려가자.”

수연이 유한의 옷을 잡아끌었다. 유한의 옷을 잡은 수연의 손끝에 남자의 시선이 닿았다. 박호윤. 명찰에 적힌 이름이 여전히 생소했다. 유한은 호윤을 한번 쳐다보곤 수연의 뜻대로 뒤돌아섰다. 별로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 상황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조금 쉬고 싶었는데.

“민수연!”

호윤의 목소리가 옥상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유한과 수연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수연의 비명 소리가 옥상을 울려 퍼졌다. 유한이 시선을 돌린 그 끝에는 박호윤이 옥상 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유한이 곧장 박호윤에게 달려갔다. 다행히도 호윤이 난간을 넘어가기 전 유한의 손에 잡혔다.

“미쳤어?!”

“네가 내가 싫으면 별수 없지. 내가 사라져 줄게!”

완전히 미친 듯한 눈이었다. 제정신이 아니야. 유한은 온몸에 오소소 솟아나는 소름에 몸서리를 쳤다. 수연이 다급하게 다가와 호윤의 다른 팔을 잡았다. 떨어질까 걱정됐는지 손이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봐, 너도 나 좋아하잖아. 잘 생각해 봐. 네가 좋아하는 건 나라니까?”

박호윤이 웃었다. 이유한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수연아. 내려가서 우리 반 가면 서경호 있을 거야. 데려와.”

“하, 하지만…….”

“말 들어. 어차피 우리 둘이선 이 새끼 감당하기 힘들어. 얼른.”

수연이 바들바들 떠는 손을 추슬렀다. 박호윤이 발버둥을 쳤다.

“너 가면 진짜 떨어질 거야! 민수연!”

완전히 미친 새끼 아니야. 이유한은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난간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박호윤을 말렸다. 수연이 나가지도 못 하고 갈팡질팡했다. 유한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빨리 갔다 와!”

그제야 수연이 다급하게 옥상 문을 빠져나갔다. 민수연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박호윤은 더욱 버둥거렸다. 그것을 유한은 겨우 붙잡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뭘 하는 거지? 이러는 이유가 민수연을 좋아해서라고? 이게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정에서 비롯될 수 있는 거야?

혼란스러웠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제 옆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 건 이 녀석의 이기심이다. 그런 마음을 가져 본 적 없지만 그런 확신이 들었다.

수연이 빨리 서경호와 올라와야 할 텐데. 발버둥을 치는 녀석을 힘으로 제압하기가 어려웠다.

“놔, 이 새끼야!”

“너 적당히 해! 미친 거 아니야?”

“네가 뭘 알아!”

박호윤은 이제 떨어지는 것을 포기했는지 이유한에게 달려들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이유한의 몸이 밀쳐져 난간에 부딪혔다. 허리 쪽에서 통증이 찌르르 올라왔다. 그걸로는 모자랐는지 주먹을 들고 달려드는 박호윤을 유한이 발로 걷어찼다. 도대체 제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유한은 한껏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넘어진 박호윤은 포기하지 않고 유한에게 달려들었다. 도대체 민수연이 제 마음을 받지 않은 걸 왜 저에게 풀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러니까 안 받아 주지, 완전히 미친 새끼잖아. 그런 생각마저도 들었다.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애초에 얼마나 많이 좋아하든, 얼마나 오래 좋아하든 상대방이 좋아해 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 아니야? 하고 싶은 말이야 넘치고 흘렀지만 제 분노를 자신에게 풀고 있는 녀석을 받아 주기도 벅찼다.

아, 미친 서경호 왜 안 와.

“근데 네가 수연이를 뺏어 간 걸로도 모자라서 버려?!”

이 정도면 피해망상이었다. 누가 뺏고 누가 버렸다는 거야. 이유한은 다시 한번 달려드는 박호윤을 거세게 밀쳤다. 박호윤이 옥상 바닥을 나뒹굴었다. 저절로 숨이 거칠어졌다.

“야, 착각하지 마. 내가 민수연을 만나지도 않았지만, 애초에 너랑도 아무 관계 아니었던 거잖아?”

“수연이도 날 싫어하지 않았어. 너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미친 새끼. 너 그거 정신병이야. 아니,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너를 싫어하면 싫어했지, 절대 좋아하진 않았을 거야.”

숨을 몰아쉬며 유한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 말에 박호윤이 더욱 분노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유한은 한번 물꼬를 튼 말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많이 좋아한다고? 오래 좋아했다고? 웃기고 있네. 상대방 감정은 눈곱만큼도 신경 안 쓰고 네 마음만 강요하는 게 좋아하는 거야?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야?”

“멋대로 지껄이지 마!”

박호윤이 유한에게 달려들었다. 난간에 기대어 서 있던 이유한의 멱살을 잡은 그가 으르렁거렸다.

“아는 척하지 말라고!”

“이유한!”

그때 옥상 문이 열리고 서경호와 민수연이 들어왔다. 아,씨. 좀 빨리 좀 오지. 힘들어 죽겠는데. 멱살을 잡은 박호윤의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유한이 박호윤을 거세게 밀어 냈다.

“저 미친 새끼 뭐야?”

“아, 몰라. 데리고 내려가야 돼.”

아까 전 죽겠다고 설쳤던지라 이유한이 짜증스레 말했다. 저걸 왜 데리고 내려가야 하지? 하는 의문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일단 그러자고 하니 서경호는 박호윤의 근처로 다가갔다.

“야, 뭔진 모르겠는데 내려가자.”

“수연아.”

면전에 서경호가 있는데 박호윤은 민수연만 보고 있었다. 아예 개무시를 당한 서경호가 헛웃음을 쳤다.

“내가 진짜 잘해 줄게. 나만큼 너 좋아할 사람 없는 거 알잖아.”

갱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은데. 유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한데 난 너 안 좋아해……. 지금도, 앞으로도.”

수연이 어렵사리 대답했다. 몇 번째의 거절인지 알 수도 없을 정도였다. 사실 수연은 이제 호윤이 무서웠다. 처음에는 미안하기라도 했지 지금은 난간을 붙들고 악다구니를 쓰던 호윤의 얼굴만 떠올랐다. 유한이 없었다면……. 수연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거짓말.”

“…….”

“너는 내가 좋아질 거야. 조금만 더 지나면…….”

“와, 이거 완전 또라이네.”

상황을 모르던 경호가 금세 호윤이 이상한 것을 인지해 냈다. 혀를 끌끌 차는 경호에게 호윤의 싸늘한 눈이 스쳤다.

“와, 씨. 무서워.”

“장난치지 말고 데리고 내려가자고.”

“그냥 버리고 가면 안 돼? 말이 안 통할 것 같은데.”

경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귀찮다고 생각하는 게 뻔히 보이는 얼굴이었다. 유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까지 말 여러 번 하게 하지 말아 줄래…….”

“근데 너 맞았냐?”

“보면 몰라?”

경호가 웃으면서 이유한에게 다가섰다.

“쟤 하나를 못 이겨서.”

“진짜 네가 먼저 죽을래?”

자연스럽게 장난을 치려던 서경호가 이유한이 완전히 정색을 하자 고개를 까딱였다.

“근데 이거 치정 싸움이야? 왜 둘이 싸우고 있어?”

“아, 좀. 시끄러워.”

“무슨 말만 하면 시끄럽대.”

툴툴대며 경호는 유한을 일으켜 세웠다. 교복 여기저기 옥상을 나뒹굴기라도 한 것처럼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아, 빨아 달라고 해야겠네. 얼굴이 확 구겨졌다.

“박호윤!!”

그때 수연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잠깐 눈을 뗐을 뿐이었는데, 그 소리에 놀란 경호와 유한이 동시에 박호윤 쪽을 바라봤다. 박호윤은 결국 난간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아, 진짜 저 미친 새끼가.

유한이 박호윤 쪽으로 달렸다. 서경호도 놀라 달려오는 중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붙잡은 박호윤을 서경호와 함께 끌어당겼다.

“놓으라고!”

박호윤이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두 사람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한 채 질질 끌려 옥상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그제야 경호와 유한이 숨을 돌렸다. 넘어진 박호윤은 더 이상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유한은 난간에 몸을 기댔다. 공부한답시고 운동을 게을리 했더니 체력이 좀 달리는 것 같아 숨을 몰아쉬었다.

“어.”

그 순간 난간에 기대고 있던 이유한의 몸이 기우뚱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아차, 하는 순간은 이미 늦어 있었다. 순간 불어온 바람과 약해져 흔들린 난간에 이유한의 몸이 난간 너머로 넘어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유한!”

놀라 소리치는 서경호와 민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순간 눈에 보였던 녀석들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일 텐데 이상하게 느리게 느껴졌다.

떨어지는 건가? 죽는 건가? 이렇게 어이없이? 저딴 새끼 죽는 거 말리다가?

이상했다. 공포감보다는 미묘한 감정이었다. 화가 났고,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눈을 감으니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

안 되는데. 엄마가 슬퍼할 텐데.

***

“무슨 생각해?”

큰 나무 아래 벤치. 아무런 말이 없는 유한을 보며 지헌이 물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잠깐 들어찼던 상념을 털어 버리고자 유한이 고개를 저었다. 지헌이 웃고 있었다.

“별생각 안 했어.”

“그래?”

장난스럽게 웃는 지헌을 따라 유한이 말갛게 웃었다. 유한은 다시 한번 박호윤을 떠올렸다. 민수연에게 제 마음을 받아 주길 강요했던 놈이었다.

결국 유한이 3년 동안 눈을 뜨지 못했던 것은 단순히 사고였고 자신의 부주의함이었지만 모든 사달의 원인은 박호윤이었다. 하지만 유한은 그를 원망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자신에게 3년을 버리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한지헌을 만났다. 그것으로 되었다. 누군가 듣는다면 그것으로 됐다고 표현하는 저를 멍청하다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랬다.

“지헌아.”

어쨌든 어떤 형태로든 지금 한지헌이 내 옆에 있게 되었으니까. 자신은 괜찮았다. 충분히 괜찮았다.

“응?”

“좋아해 줘서 고마워.”

“아아…….”

“내가 너를, 정말 많이 좋아해.”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할게. 절대로 네게 내 마음을 강요하지 않을게. 네가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네 의견대로 할 거야. 그러니까 아프지도 힘들어하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유한이 지헌을 보며 말갛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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