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현실과 게임 사이 (7/36)

4장. 현실과 게임 사이

“언제까지 잘 거야?”

그리고 그 순간,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장우진을 따라 병실 안으로 들어서던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날의 병실이 아니라…….

“어, 엄마?”

엄마였다.

“게임도 정도껏 해야지. 컴퓨터 앞에서 몇 시간을 자는 거야?”

눈꺼풀이 무거웠다. 나는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상황 파악이 잘되지 않아 멍청하게 엄마의 얼굴만 보고 있던 내가 답답했는지 결국 등으로 엄마의 손바닥이 날아왔다. 악, 하는 내 비명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아, 왜 때려요!”

“정신 못 차리고 그렇게 멍 때리고 있으니까 그렇지.”

“아니, 아……. 뭐지? 아.”

다시 한번 내 등에 찰싹 소리를 내며 닿아 온 엄마의 손바닥에 나는 경기를 일으키며 몸을 일으켰다. 뭐야, 현실이야? 두 눈을 몇 번을 깜빡여 봐도 내가 있는 곳은 이유한의 병실이 아니었다.

현실로 돌아온 건가? 나는 멍청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아, 깨어났구나. 엄마가 깨워서. 외부 상황에 의해서 깰 수 있다는 튜토리얼의 설명이 그제야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한 달 반 정도를 게임 안에 있었다. 짧은 기간은 아니었다 보니 현실로 돌아왔다는 자각이 드는데 조금 오랜 시간이 소요된 모양이었다.

“알았어. 깼어. 아, 진짜 놀랐네.”

“무슨 꿈을 얼마나 깊게 꾸기에 몇 번을 불러도 안 일어나.”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에 내가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꿈은 아니었다. 게임이었지.

“얼른 일어나. 친구 왔어.”

“친구? 내 친구?”

“그래. 대충 옷이라도 갈아입고. 꼴이 이게 뭐니. 어휴.”

일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꼴이 어때서, 하고 무심하게 생각했지만 슬쩍 내려다보니 목이 축 늘어진 티셔츠가 먼저 보여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친구라고 하니 게임 속 다섯 사람이 먼저 떠올랐지만 당연히 그건 아닌 것 같고 아마 서준영인 것 같았다. 나는 옷장 안에서 좀 깔끔한 티셔츠를 꺼내어 입고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예상대로 소파 위 서준영이 앉아 있었다.

“왜 왔어?”

“얼굴 보자마자 너무 냉대하는 거 아냐?”

킥킥거리며 서준영이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게임 때문에 왔지.”

“게임?”

“어어.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

서준영은 슬쩍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궁금한 게 많았다. 갑작스럽게 설명도 없이 게임 안으로 들어가게 됐으니까. 서준영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 그럼 나 세수라도 좀 하고 올게. 조금만 기다려.”

나는 잰걸음으로 화장실로 바로 들어섰다. 근데 타이밍도 참, 하필이면 이유한 만나기 직전이라니.

화장실에 들어와 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내가 진짜 현실로 돌아왔구나, 하는 사실이 더 확 와닿았다. 앳된 열여덟 살의 내 얼굴은 당연하게도 사라져 있었고, 게임 속에서 잘랐던 머리카락은 다시 원래의 그 덥수룩해져 있었다. 다시 게임으로 돌아가면 또 이 머리로 돌아가는 거 아닐까?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한 기분에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따가울 정도로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아 머리가 아플 정도였지만 나는 꿋꿋하게 찬물로 얼굴을 씻어 냈다.

오묘한 기분이었다. 게임인 걸 알고 있었으면서 막상 현실로 나오니 확 실감이 났다. 내가 방금까지 게임을 했구나. 그 모든 사람이 게임 속 인물이었구나. 그 생각은 사람을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가자.”

“어. 어머니, 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또 와요.”

“네.”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서준영을 보다 나도 고개를 까딱거렸다. 나갔다 올게, 하는 소리에 엄마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집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잠들어 있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을 거였다. 하지만 게임 속의 시간은 한 달 반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었기에 그 익숙한 풍경이 조금 낯설어 보이기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제 차로 올라탄 서준영을 따라 그 옆 조수석에 앉았다. 하지만 서준영은 시동을 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를 빤히 보던 녀석이 문득 입을 열었다.

“베타 테스트 들어갔지?”

그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튜토리얼에서 내가 이 게임 안으로 들어온 게 베타 테스트라고 했지.

“……그게 진짜 가능하긴 한 거였구나.”

“알고 있었어?”

“어. 애초에 받을 때. 근데 난 당연히 안 될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 내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긴 해.”

아주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서준영이 곧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 학원 로맨스 개발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너를 만나고 싶어 해.”

“나를?”

“응. 아무래도 여러모로 궁금한 게 많을 테니까.”

흐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 가는 거야?”

“어, 싫어?”

“뭐, 아니. 궁금하겠지. 근데 내가 말해 줄 게 뭐 있나.”

그냥 신기했다. 모두가 살아 있는 사람 같았고 현실처럼 느껴졌다. 소감도 그 외에는 딱히 설명할 만한 게 없는데. 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묻는 말에만 대답해 주면 돼.”

“어.”

그 뒤로 서준영과 나는 말이 없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나는 멍하니 있었다. 한번 들었던 오묘한 기분이 잘 가시지 않았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은 당연히 학원 로맨스의 누구도 없는 세상이다. 자꾸만 그런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차는 회사가 있는 건물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서준영이 차를 주차하고 시동을 끈 다음에야 나는 메고 있던 안전벨트를 풀었다.

“근데 그래도 게임 같지?”

“뭐가?”

“꿈을 조작하는 거라고 해도 어차피 사람의 기술이잖아. 완전히 현실 같진 않을 거 아냐.”

아주 당연한 걸 말하듯 물으며 서준영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그 안에 나도 몸을 실으며 곰곰이 게임 속을 떠올렸다.

“아니. 현실 같아.”

“게임 안 같고?”

“응. 정보 창, 선택지 이런 거 안 뜨면 게임인 줄도 모를 것 같은데.”

내 말에 서준영이 혀를 내둘렀다. 무척이나 놀라운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저도 게임 회사에 다니고 있으니 그런 방면으로 꽤나 흥미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 근데 요즘 선택지가 뜨던가. 문득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안 뜬 지 좀 된 것 같은데……. 무심코 한 생각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자 서준영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덕분에 나는 서준영을 따라 천천히 걷다 걸음을 멈춰야 했다.

“…….”

주위는 온통 학원 로맨스였다. 그러니까 그 게임의 일러스트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이 층은 전체가 다 그 게임을 담당하는 모양이었다.

강수하, 김준, 김현, 장우진 그 외에도 내가 컴퓨터로 공략했던 캐릭터들의 일러스트가 가득했다. 나는 어쩐지 아까부터 나를 괴롭히던 이상한 감정에 다시 한번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에서야 떠올랐다. 마땅히 지금 내 감정을 표현할 만한 단어가.

“이리 와.”

“응.”

그러니까 그건 괴리감이었다. 현실과 게임 사이의 괴리감.

“아, 안녕하세요. 한지헌 씨 맞죠?”

“네, 안녕하세요.”

서준영을 따라서 작은 회의실에 들어서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한 여자분이 반갑게 고개를 숙였다. 어정쩡하게 따라서 고개를 숙인 내게 고갯짓을 한 서준영은 바로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나만 두고 어디를 가는 건지 당황스러워 입을 뻐끔거렸지만 이미 서준영은 나가 버린 후였다.

“저는 학원 로맨스 개발자 윤수진이라고 합니다.”

내 어색함을 눈치챘는지 호탕하게 웃으며 수진 씨가 제 소개를 건넸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개발자가 이분이구나. 나는 조심스레 수진 씨와 눈을 마주쳤다. 눈이 곱게 휘어지는 웃음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궁금한 게 많아서 조금 성급하게 초대했네요. 일단 앉을래요?”

“아, 네.”

그제야 아직도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의자에 앉았다. 다시 한번 수진 씨의 눈이 휘었다. 막상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아 있으니 더 어색한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그 다섯 명을 만나게 해 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 세상의 조물주 같은 거라고 해야 되나. 그렇게 생각을 하자 마주하는 것이 더욱 껄끄러워졌다.

“사실 여자분이실 줄 알았어요.”

“아아…….”

“남자분이실 줄 알았으면 남자 버전으로 만드는 건데.”

남자 버전은 뭐지. 뜻 모를 말에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공략 캐릭터들을 여자로 만든다는 건가.

“아, 별건 아니에요. 그냥 남자가 남자를 만난다고 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것들 있잖아요. 아직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성소수자에게 호의적이진 않으니까.”

“……아.”

나는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된 탓이었다. 그래서 머리를 쓰다듬고 친근하게 굴어도 아무도 신경을 안 썼었구나. 새삼스러운 생각이었다.

“뭐 깊게 생각할 부분은 아니죠. 그나저나 준영 씨 말 들어 보니까 베타 테스트를 성공했다고 하더라고요.”

“게임 안에 들어가는 거…… 말씀 하시는 거죠?”

“음, 그렇죠. 꿈속을 조작해서 게임을 실제처럼 할 수 있게 만든 걸 저희끼리는 베타 테스트라고 하거든요.”

애초에 튜토리얼에서도 내가 들어와 있는 그 게임을 베타 테스트라고 말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했어요.”

“하하, 다행이네요. 그럼 공략은 잘 진행되고 있으세요?”

“어, 네.”

나는 두 눈을 굴렸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서 그랬다. 게임 속 환경이 어떻냐든지 정말 현실 같은지 그렇다면 잘 만들어졌는지 따위를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나저나 공략을 내가 지금 하고 있던가. 그냥 다 같이 즐겁게 놀고 있는 것 같은데…….

“누구 공략하고 있으신데요?”

“어, 그…… 사실 아직 못 정했어요.”

“아. 그래요? 아……. 뭐 그럴 수도 있죠. 누구 하나 정하긴 힘들죠. 하물며 컴퓨터로 해도 한 명 못 정하는 플레이어님들이 태반인데.”

나는 의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보다는 누구 한 사람을 정해서 공략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한 지가 꽤 오래 지난 터였다.

“지헌 씨.”

“네?”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인데요.”

“아, 네.”

“……진짜 사람처럼 대하고 있는 건 아니죠?”

나는 아주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앞의 수진 씨를 보고 있었다. 대답이 없는 나를 여전히 웃는 얼굴로 보고 있는 상대를 향해 고개를 저은 것은 한참 만의 일이었다.

“……그럴 리가요.”

“그렇죠?”

손끝이 떨려 와 나는 테이블 아래로 급하게 내 손을 숨겼다. 그럼 내가 어떻게 대했어야 했지. 그저 내가 공략하는 캐릭터로만 대했어야 한다는 건가? 그럼 그렇게 다정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애초에 그렇게 사람같이 만들어 놓고 진짜 사람처럼 대하고 있는 건 아니냐고 물으면 안 되는 거 아냐?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대신하여 수진 씨가 입을 열었다.

“하긴 뭐 애초에 사람처럼 대하기 어렵긴 하죠?”

아주 당연하다는 듯 꺼낸 말이었다.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네?”

“결국은 프로그램 된 대로 움직이니까요. 컴퓨터로 플레이했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을 테니.”

컴퓨터로 플레이했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도저히 긍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오류가 발생할 리 없으니까요. 행여 그렇게 된다고 해도…….”

“……?”

“게임이 자동으로 리셋되었겠죠.”

“리셋이요?”

“네. 혹시라도 게임에 오류가 나게 되면 자동으로 리셋되게끔 설정되어 있거든요. 아무래도 꿈을 조작해서 하는 게임이라 위험하기도 하구요.”

“……아.”

멍청한 목소리가 잇새에서 새 나갔다. 리셋. 그 짧은 단어가 머릿속을 빙빙 돌고 있었다.

“리셋이 안 된다면 성공한 거겠지만.”

그래서였을까. 마지막에 수진 씨가 했던 말이 잘 들리지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멍청한 얼굴이었다.

***

[게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어느새 어두워진 방 안에서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컴퓨터 화면에는 게임 속으로 들어가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 문구가 띄워진 상태였다.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앉아 있었던 것 같았다. 초조한 마음이 들어차고 있었다. 그 마음을 대변하듯 아까부터 딱딱 소리를 내며 깨물던 손톱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네] 버튼에 향해 있는 마우스를 겨우 손을 뻗어 잡았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게임의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어떡하지. 아니, 게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면 나는 어떡하지.

이 모든 상황이 오류라 처음으로 리셋이 되어 버린다면……. 물론 게임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처음으로 돌아가 만난 녀석들이 내가 알던 그 사람들일까?

프로그래밍된 대로 움직이는 캐릭터들이라 했다. 내가 만난 녀석들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기에 오류라고 했다. 그럼 내가 알던 그 녀석들과는 엄연히 다른, 얼굴만 같은 게임 속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차라리 지금 끝낼까. 지금, 지금부터 그만할까.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마우스를 움직였다. 이대로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혹시나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다시 이 게임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달칵, 하고 마우스 버튼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순간 처음 게임에 들어갔던 그날처럼 시야가 밝아졌다.

“왜 그래?”

두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떴다. 밝은 빛이 사라진 시야에는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방 안이 아닌 이유한의 병실이 보였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장우진이 뒤이어 눈에 들어왔다.

“아…….”

게임 밖으로 나오기 직전의 상황임을 깨달으니 그제야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러면서 온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렸다. 방금까지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휘청거리니 놀란 것은 장우진이었다.

“왜 그래, 갑자기? 어디 아파?”

“아냐. 아니, 아니야.”

“갑자기 왜 그래.”

당황한 장우진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장우진은 일단 병실에 들어가던 것을 멈추고 그 옆에 있던 의자에 나를 앉혔다. 덜덜 떨리는 손이 바로 진정이 되지 않았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에 애써서 입꼬리를 올렸다.

모든 것은 그대로다. 리셋되지 않았다. 오류라면 리셋될 것이라 수진 씨는 말했지만 프로그래밍된 게임의 내용과 다른 것이 자명한데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지헌아.”

“아, 그냥 좀 갑자기 어지러워서. 미안, 놀랐어?”

“의사 선생님 데려올까? 괜찮아?”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야. 잠깐 쉬면 돼.”

걱정스러움에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새하얘진 장우진의 손을 토닥거렸다. 그게 장우진을 달래려는 건지, 나를 달래는 건지 나도 모를 손짓이었다.

괜찮다. 어쨌든 내가 나갔던 그 시점으로 돌아왔으니까. 근데 어떻게? 개발한 사람이 리셋될 거라 말했는데 왜 나는 또 똑같은 시점으로 온 거지. 안도감 이후에는 의문이 들었다.

“안 되겠다. 의사 선생님 모셔 올게. 잠깐만 여기에 있어.”

“아, 아니야. 괜찮아. 그러니까 그냥 여기 있어.”

말이 없는 내가 여간 걱정스러웠는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서는 장우진의 팔을 급하게 붙잡았다. 눈앞에서 사라지면 또 현실로 돌아갈까 봐 겁이 났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임이 끝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다니.

“잠깐만 여기 있어 줘. 응?”

“…….”

애원하다시피 하는 말에 장우진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장우진의 팔만 붙들고 있었다. 촉감은 여전히 생생했다. 오히려 방금 전 꿈의 밖으로 나갔던 그 순간이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안. 놀랐지.”

“괜찮아?”

“응. 이제 괜찮아.”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고 나자 조금은 진정이 된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장우진에게는 갑작스러웠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잠깐 동안 현실이 됐다가 다시 게임 안으로 들어온 거지만, 장우진은 잘 걷던 애가 갑자기 휘청거리더니 쓰러진 거나 다름없으니까.

“갑자기 왜 그래.”

“어, 갑자기 좀 어지러웠어. 미안해.”

“아냐. 미안할 일은 아니고. 그냥 좀 놀랐어.”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든 게 변하지 않았다. 점차 마음이 안정되고 있었다.

“얼른 들어가자. 기다리겠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응. 괜찮다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나를 보는 장우진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뻔히 보여 나는 장우진의 손을 꾹 한번 잡았다. 안심하라는 의미였지만 또 휘청이기라도 할까 걱정스러웠는지 장우진이 오히려 더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고요한 병실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어…….”

“아, 자나 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유한은 잠든 건지 눈을 감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혈색이 좋아져 있었고 복잡하게 들어차 있던 의료 기기도 많이 사라져 있었다.

“나중에 다시 올까?”

“아냐. 곧 일어나겠지. 잠깐 앉자.”

이유한의 얼굴까지 확인하니 좀 더 마음이 안정됐다. 쓸데없는 고민을 오래 하고 싶지 않아 나는 급하게 머리를 털어 냈다. 어찌 됐든 지금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

“몸 안 좋은 거 아냐?”

“아냐. 괜찮다니까.”

“괜찮은 애가 그렇게 갑자기…….”

장우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게 또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고 있어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라면 생각지도 못할 만큼 솔직한 얼굴이었다.

“진짜 괜찮아.”

“그냥 병원 온 김에 진료라도…….”

“아, 우진아.”

다시 한번 의사를 만날 것을 권유하려던 장우진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린 이유한의 목소리에 뚝 끊겼다. 내가 알던 이유한의 목소리보다 아주 조금은 더 어른스러워진 목소리였다. 장우진과 내가 동시에 침대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뜬 이유한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아, 일어났어?”

여전히 내가 못내 신경 쓰이는 얼굴이었지만 장우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장우진의 어깨를 나는 살짝 두드리고 이유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순간 이유한과 내 눈이 마주쳤다. 이유한이 사라진 날 이후로는 처음 보는 거라 긴장이 돼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이유한은 나를 슬쩍 보는가 싶더니 곧 장우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아,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어쩔 수 없이 실망감이 먼저 들어찼다. 하지만 나는 금세 스스로를 다독였다. 예상했던 것이기도 한 데다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제 몸을 찾아 더 이상 영혼으로 떠돌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받았으니까, 그걸로 괜찮았다.

게다가 그 오랜 기간 동안 학교 옥상에서 혼자 외로움에 떨었을 텐데 그런 기억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게 훨씬 나을 터였다.

“응. 언제 왔어?”

이제는 앉아서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더니, 이유한은 그저 조금 힘이 없어 보일 뿐 아픈 곳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떨어져 녀석을 유심히 보고 있자니 어쩐지 조금씩 기뻐졌다. 진짜 이유한이 살아났다는 거잖아.

“방금 왔어. 아, 이쪽은 내 친구 한지헌. 처음 보지?”

장우진이 이유한의 말에 대답을 하며 자연스레 나를 소개했다. 그에 가만히 이유한을 관찰하고 있던 나는 어정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유한, 이유한 하며 친구처럼 굴었었는데 처음 만난 사람처럼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니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손을 흔들 수는 없는 거였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 지헌아.”

이유한이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나를 처음 보는 것일 텐데도 마치 친한 사이처럼 편하게 말을 놓는 게 늘 옥상에서 보던 이유한의 모습과 겹쳐 보여 나는 그냥 답으로 웃기만 했다. 곧 나와 인사를 나눈 이유한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게 무언가를 찾는 모양새라 장우진이 입을 열었다.

“왜? 뭐 찾아?”

“아. 목말라서.”

주섬주섬 옆에 있던 빈 물병을 들어 보인 이유한이 당황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물이 떨어졌나. 장우진이 그에 저도 자리에서 일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냉장고를 열었다.

“어, 물 없네. 떨어졌나 봐.”

“아, 그래? 미안한데 우진아, 밖에 정수기 있으니까 혹시 물 좀 가져다줄 수 있어?”

“응. 아, 아니다. 나나 한지헌도 음료수라도 하나 먹게, 사 올게.”

“어, 안 그래도 되는데.”

“아니야. 애초에 올 때 사 왔어야 했는데.”

장우진이 머쓱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긴, 병문안 오면서 음료 한 박스라도 사 왔어야 했는데. 나는 장우진을 따라서 일어섰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왜?”

“어? 같이 가게.”

“됐어. 그냥 앉아 있어.”

“……여기에?”

“응. 그냥 앉아서 쉬어.”

장우진이 내 어깨를 눌러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어정쩡한 자세로 자리에 앉게 된 나는 당황해서 두 눈을 굴렸다. 아, 아까 휘청거렸던 것 때문에 그런가. 어지러웠던 거 아닌데…….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렇게 둘만 두고 나가면 어색할 텐데.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장우진은 금방 다녀온다는 말을 남기고 바로 병실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결국 덕분에 둘만 남았다. 이유한과 나만. 하,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랑 둘만 있으니까 어색하구나.”

“네? 아니, 아니에요.”

하지만 어색함을 느끼는 나와는 전혀 다르게 이유한은 해맑은 얼굴이었다. 그래, 전의 이유한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완전 어색해 죽겠다는 얼굴인데.”

“아닌데요…….”

사실은 어색했다. 침대와 멀찍이 떨어진 간이 의자. 이유한과 내 마음의 거리가 이 정도쯤 될까. 적어도 이유한은 이것보다는 좀 더 멀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다.

“존댓말 하니까 이상하다.”

“……네?”

“이유한, 이유한. 잘만 불러 놓고 왜 갑자기 그렇게 말을 높여.”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나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어, 네?”

“하하. 진짜 바보 같은데, 지금.”

이유한이 손을 올려 제 턱을 괴고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곧게 나를 보는 시선에 나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러니까, 왠지…….

“혹시 나, 기억나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 와중에 혹시나 내가 헛다리를 짚은 걸 수도 있으니 존댓말을 해 가면서. 푸흡, 하는 웃음이 이유한에게서 터져 나왔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눈꼬리에 눈물까지 맺힌 이유한이 아주 한참을 그렇게 웃는가 싶더니 겨우 입을 달싹였다.

“나는 진짜로 엄청 생생한 꿈을 꿨다고 생각했어. 사실 네가 진짜 있었던 사람이면 나를 찾아왔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아.”

“근데 꿈이 아니었네. 진짜 있었네. 한지헌.”

이유한이 환하게 웃었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어색하게 웃던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났다. 나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였다.

“왜 안 왔어? 엄청 기다렸는데.”

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원망의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 말이 서운한 기색은 무척이나 많이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아냐. 바빴으면 그랬을 수도…….”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이유한은 재촉하는 기색도 없이 가만히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할까 봐 무서웠어.”

어째선지 그 말을 하면서도 눈가가 시큰해졌다.

“내가 너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영혼이었을 때 기억이 없어지기라도 했을까 봐.”

“그럴 리가 없잖아.”

“응. 근데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어. 네가 나를 잊고 싶지 않아 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뜨고 나서부터 계속해 나를 기다렸을 이유한에게 참을 수 없이 미안해졌다.

“다 기억해. 지헌아, 나는.”

“응. 미안해. 쓸데없는 생각해서 기다리게 만들었네.”

애써 웃는 얼굴을 하고 나는 이유한에게 다가섰다. 내게 내민 이유한의 손을 맞잡았다. 이전의 차가운 느낌은 전혀 없었다. 따뜻하기만 한 손이었다.

“따뜻하네.”

“네 덕분이지.”

이유한이 말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뭘 했다고.”

“너 아니었으면 나는 내가 살아 있는 줄도 몰랐을 텐데 뭐. 아, 기분 완전 좋아.”

정말 기분이 좋은 것이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 있는 이유한을 따라 웃었다. 걱정했던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럼 나 이제 형이라고 부를 거야?”

“어?”

“내가 형이잖아. 형이라고 부르는 거지?”

조금은 뜬금없는 소리에 내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잔뜩 기대한 얼굴은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형이라고 불렀으면 좋겠어?”

“어? 음…….”

이게 뭐라고 제법 고민되는 듯 보였다. 생각에 잠긴 이유한을 빤히 보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한아.”

“……음.”

“이유한.”

“참나. 마음대로 불러라.”

결국 이유한이 헛웃음을 쳤다. 나는 녀석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때 병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놀란 내가 이유한에게서 한 걸음 빠르게 물러섰다. 이유한은 그런 나를 보고 웃으며 제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 엄청 어색할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니었나 보네.”

“응. 지헌이가 친화력이 좋네.”

“……그런가?”

무심한 얼굴을 한 장우진은 그래도 둘만 두고 간 것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이유한의 능청스러운 말에 조금은 안심한 듯 보였다.

“자. 이거 마셔.”

“나는?”

“형은 물.”

“……나도 초코 우유 좋아하는데.”

“환자가 무슨 초코 우유야.”

내게는 초코 우유를, 이유한에게는 생수를 건넨 장우진이 쏟아지는 불평에 단호하게 답했다. 이유한의 얼굴이 대번에 불퉁해졌다.

“나도 음료수 먹고 싶다, 진짜. 커피도 먹고 싶어.”

“이거 먹으면 안 되나?”

“딱히 안 된다고 하지는 않았는데……. 아직 깨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 돼서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 불퉁한 표정에 들고 있던 우유를 건넬까 고민했던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맞다. 멀쩡해 보이긴 하지만 3년이나 혼수상태였던 몸이었다.

“안 되겠네, 요. 물드세요.”

“……너무해.”

너무하다고 하면서도 이유한은 킥킥거리고 웃었다. 미묘하게 친해진 것 같은 나와 이유한을 번갈아 보던 장우진이 금세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친화력이 좋은 건지, 형이 좋은 건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사이라는 걸 알 수가 없기에 우진이 영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애꿎은 볼을 긁적였다.

“내가 좋은 거지. 너희들하고도 금방 친해졌잖아.”

그러고는 일부러 능청스럽게 말했다. 장우진이 곧 헛웃음을 쳤다.

“그렇다고 치자.”

“치긴 뭘 쳐. 그게 사실인데.”

병실 안의 분위기가 다행히도 금세 풀어졌다. 턱을 괴고 우리가 하는 것을 보고 있던 이유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시끌시끌하니 좋아서.”

문득 장우진이 한 말에 이유한이 자연스레 대답했다.

“어, 그래?”

“응. 그러니까 자주 와. 나 심심해.”

그 말에 장우진과 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이 병원에서 혼자 계속 앉아 있으면 심심하겠다. 다음에 올 때는 읽을거리라도 가져와야 하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퇴원은 언제쯤 할 수 있대?”

“예상은 한 달 정도 후인데……. 내가 회복 속도가 좀 좋대. 그래서 좀 더 빨리 퇴원하고 통원 치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병원에만 있으면 내가 너무 답답하기도 하고.”

“흐음. 그렇겠네.”

장우진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까딱였다. 하지만 나는 조바심이 들었다. 벌써 게임의 중간쯤 지난 터라 이유한이 한 달씩이나 후에 퇴원을 해 버리면 그땐 이미 게임의 끝부분이었다.

“빨리 퇴원하면 좋겠네요.”

“그치? 나도 빨리 퇴원하고 놀고 싶어.”

“그렇게 답답해?”

“당연하지. 네가 여기 있어 봐.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한껏 답답함을 담은 얼굴이 무척 불퉁했다.

“그리고 하루 세끼 병원 밥이야. 다른 건 못 먹게 하잖아. 답답해.”

곧이어 들리는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영혼일 때보다 조금 더 어른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하는 행동은 이전과 똑같았다. 원래 영혼이 되기 전에도 이런 성격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왜?”

아마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멍청하게 이유한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유한이 나를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냥 어, 남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어서요.”

“……남동생?”

딴생각을 생각을 하다 들킨 기분에 어색하게 변명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어색한 변명이 무척이나 싫었는지 이유한의 미간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반면에 장우진은 풉, 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실수를 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였다.

“와, 남동생.”

이유한이 다시 한번 내 말을 곱씹었다. 진짜 실수했구나. 나는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 뭐라고 할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 어, 귀여워서…….”

“귀여워서…….”

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게 왜 답지 않게 애처럼 굴어.”

결국 장우진이 입을 열었다. 다른 말보다 답지 않다는 말이 먼저 귀에 꽂혀 들었다. 어, 원래는 안 그랬나? 사람을 잔뜩 궁금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원래는 안 그러셨어?”

“응. 딱히…….”

장우진이 말을 줄였다. 3년 전의 이유한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맘때의 이유한은 어땠을까. 잔뜩 궁금증이 일었다.

“하던 대로 하려고 그랬지.”

문득 이유한이 입을 열었다. 장우진과 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우유 마셔. 지헌아. 우유 마시고 쑥쑥 자라.”

하지만 이유한은 그 말에 대해서 더 이상 말을 덧붙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안녕.”

왁자지껄한 교실 안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오늘도 역시나 제자리에 앉아 있는 강수하를 보며 나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제 책상 위에 책을 펼쳐 놓고 있던 강수하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피곤해 보이네.”

“어? 응. 잠을 좀 못 잤어.”

나는 따가운 눈을 벅벅 비볐다. 못 잤다. 자려고 했는데 잘 수가 없었다. 왠지 잠들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게 될까 봐 무서웠다. 혼자 방 안에 있으니 그런 생각이 자꾸 든 탓이었다.

차라리 잠을 자지 말자 생각하고 눈을 뜨고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새벽이 깊어지니 나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 다행히 눈을 떴을 땐 익숙한 풍경이었다. 아마도 내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잠을 못 자.”

“오늘은 일찍 가서 자야지.”

잠이 든다고 해서 현실로 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얻게 되니 어젯밤 내가 했던 짓이 얼마나 멍청해 보였는지. 나는 새삼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현이 아직 안 왔어?”

평상시의 나는 그래도 조금 이르게 등교를 하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사실 조금 아슬아슬했다. 늦게 잠든 터라 그만큼 늦잠을 자 버렸기 때문이었다. 흘끔 시간을 보니 벌써 등교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당연히 김현은 와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안 왔어.”

“지각하는 거 아냐?”

어제 점심시간의 지각 내기가 떠올랐다. 내기 첫날부터 지각하는 건가. 소원권은 그렇게 날아가는 건가. 오히려 무슨 소원을 빌지 궁금했던 내가 다 아쉬울 지경이었다.

나는 결국 휴대폰을 꺼내 들어 김현의 번호를 찾았다. 혹시 지금까지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하지만 내가 전화를 거는 것을 저지하듯 강수하가 내 휴대폰을 자신의 손으로 가로막았다.

“왜?”

“오겠지.”

아주 무심한 얼굴이었다. 아직 자고 있을 것 같은데. 영 찜찜한 마음이 들어 내가 핸드폰을 가져가고자 손을 비틀었지만 강수하는 핸드폰에서 손을 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전화 한번 해 보자. 지금까지 자고 있으면 어떡해.”

“…….”

하지만 강수하는 말이 없었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수하야, 너 혹시…… 내기 때문에 전화 못하게 하는 건 아니지?”

에이, 설마…….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강수하는 잠시 움찔할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진짜?”

“…….”

“와, 치사해.”

내가 흘리듯 한 말에 강수하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

“아니긴. 핸드폰 잡은 손에 힘주는 것 봐.”

내 말에 강수하는 손에 주고 있던 힘을 풀었다. 그제야 핸드폰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현이 오면 일러야지.”

“그러게, 소원권은 왜 줘 가지고…….”

잘 보기 힘든 불퉁한 대답이 강수하에게서 터져 나왔다. 덕분에 헛웃음을 친 내가 강수하를 마주 보며 웃었다.

“대체 현이 소원이 뭔데 그래? 알고 있어?”

“세이프! 나 세이프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막 소원에 대해 물었을 때 타이밍도 좋게 김현이 교실로 들어왔다. 지각 직전, 겨우 세이프였다. 내가 웃으며 김현을 맞았다.

“응. 세이프. 너무 아슬아슬하게 오는 거 아냐?”

“그래도 지각은 안 했잖아. 엄청 뛰었어.”

“그러다가 소원권 날아가겠는데.”

“아니야. 절대 안 그래.”

김현은 새삼스럽게 다짐이라도 하듯 고개를 까딱였다. 가방을 의자에 걸어 두고 숨을 고르는 게 엄청나게 뛰어온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소원을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뛰었어, 응?”

“아. 그건 비밀이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 내며 김현이 해맑게 웃었다.

“근데 지헌아. 너 어제 또 못 잤어?”

“응? 티 나?”

“응. 완전. 엄청 피곤해 보여.”

자연스럽게 김현의 손이 내 얼굴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피곤해 보인다는 건 칙칙해 보인다는 거겠지.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거의 한숨도 못 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잠이 좀 안 오더라고.”

“요즘 자꾸 못 자는 것 같은데.”

“음. 고2잖아. 스트레스받을 때기도 하고…….”

걱정스러운 김현의 목소리에 내가 어색하게 대꾸했다. 김현과 강수하가 동시에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헌이 너 공부 안 하잖아.”

“……너무 단호하게 얘기하는 거 아냐?”

먼저 입을 연 것은 강수하였다. 나는 바로 입을 비죽거렸다. 내가 공부를 안 하긴 하지만 막상 이렇게 대놓고 들으니 좀 창피해졌다.

“나름대로 공부하거든.”

“거짓말.”

“…….”

나는 그냥 변명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내가 공부를 좀 안 하긴 안 했지. 괜히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때 갑자기 소란스러웠던 교실이 조용해졌다. 앞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더 이상 변명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강수하가 웃으며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나는 여전히 불퉁한 얼굴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났지만 알다시피 모의고사가 얼마 안 남았다.”

아아, 하는 야유 소리가 반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이없이 웃으면서 얼굴을 쓸었다. 시험이 또 있다는 것보다는 컴퓨터에는 없었던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어이없었던 것이었다.

“내신에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실전이다 생각하고…….”

말을 이어 가는 선생님을 멍하니 보는 내 머릿속은 곧 터져 버릴 것처럼 복잡해졌다. 나는 애써 한숨으로 그 생각을 털어 냈다. 생각해 봤자 내 머리통으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도 없을 테니까.

옆에서 한숨 소리가 들리니 김현과 강수하의 시선이 내게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제야 멍한 정신을 챙기며 두 사람을 힐끗 봤다. 배시시 웃는 얼굴이 이상하게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

전달 사항을 모두 말한 선생님은 우리에게 잠시간의 쉬는 시간을 주고 곧 교실에서 빠져나갔다.

“시험 얘기 나오니까 또 한숨 쉬고.”

“하하. 시험 하나 넘어가니까 또 시험이네.”

“그렇긴 해. 진짜 시험 많다.”

김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내가 공부하기 싫은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러고 보니까 수진 씨가 누구를 공략하고 있냐고 말했지. 무심결에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누구를?

“왜?”

“……그냥.”

지금 와서 한 사람을 고른다고? 내가? 나는 허허, 하고 멍청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장 관리라고 생각해서 애들이 날 싫어할 거라고 했었지. 문득 떠오른 그날 튜토리얼에서 들었던 말에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나를 싫어하게 되는 건 싫다. 차라리 그렇게 될 바에는 솔로 엔딩이 나았다. 그냥 이렇게 즐겁게 지내다가 게임이 끝나는 게, 그러니까 차라리 그게 낫겠지.

아마도 나는 공략 캐릭터를 정하지도 못할 터였다. 그럼 차라리 이들 중 누군가가 나를 싫어하게 되는 것보다는 이렇게 즐겁게 친구로 지내는 게 낫지 않을까. 아주 안일하지만 차라리 이 상황에서는 가장 나은 선택지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내가 여기서 누군가와 더 깊은 관계가 된다면 게임이 끝났을 때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조차도 다시는 못 보게 될 친구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릿한데…….

우울감이 들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털었다.

***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을 감자마자 바로 잠이 들 것 같았다. 분명히 막 집에 도착했을 때는 그런 상태였다. 하지만 아주 잠깐 사이에 나는 잠이 확 깨 버리고 말았다.

“이게 뭐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오랜만에 열어 봤던 정보 창이 화근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공략을 한다는 생각을 잘하지 않다 보니 자연스레 정보 창도 띄워 본 지가 오래된 차였다. 하지만 오늘은 나름대로 차라리 솔로 엔딩을 보겠다는 결심을 한 참이라 얼마나 호감도가 올랐는지, 어장 관리에 가깝진 않은지 확인해 보고자 굳이 열어 본 것이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정보 창을 띄우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에러……?”

아마 몇몇은 네 개쯤 되어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뻘한 생각은 하트가 있어야 할 부분에 떠 있는 ‘ERROR’ 표시에 불타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하트가 없었다. 다섯 사람의 이름은 그대로 표기되어 있었지만, 그 옆에 있어야 할 하트는 없고 모두가 ‘ERROR’라고만 띄워져 있었다.

당황스러움에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혹시 현실에 갔다 오게 되면서 바뀌었나. 도대체 언제 이렇게 된 거지. 하도 본 지가 오래되어서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결국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르겠다.”

짜증 섞인 말투였다. 리셋이 되고 있는 건가. 한번에 되는 게 아닌가. 아니면 이게 뭐지. 그냥 버그가 있는 상태로 계속 게임을 하고 있는 거랑 똑같은 건가. 도대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론이 나질 않았다.

그래, 개발자도 당연히 리셋될 거라고 호언장담했는데 안 된 걸 보면 이게 어떤 상황인지는 아무도 모르겠지. 내가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그냥…… 평소처럼 하면 된다, 평소처럼.

문득 빨리 학교에 가고 싶어졌다. 나는 솟구치는 불안감을 억누르기 위해 두 눈을 꾹 감았다.

***

[1%]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김준의 시합도 얼마 남지 않았고 이유한은 일어서서 곧잘 걸어 다닌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그때쯤이었다.

여느 날과 같이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나 와글와글 정신없는 교실 안이었다. 반 애들이 하나둘씩 가방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먼저 제 가방을 어깨에 멘 현이 갑자기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지헌아. 오늘 집에 빨리 가 봐야 돼?”

“응? 아니. 왜?”

“괜찮으면 카페에서 공부나 하고 갈까?”

나를 불러 꺼낸 말이 도저히 김현의 입에서 나왔을 거라 생각되지 않는 말이었던지라, 나는 당황스러움에 헛웃음을 쳤다. 저도 제 입으로 공부라는 단어를 내뱉은 데에 민망했는지 웃음을 보였지만, 그 제안은 진심인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공부를 한다고. 둘이?”

하지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강수하가 별소리를 다 들었다는 얼굴로 먼저 물었다. 김현이 순간 욱한 듯 ‘나도 공부하거든!’ 하고 말했지만 강수하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을 뿐이었다.

“그래. 공부하지, 뭐.”

솔직히 공부가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김현과 같이 있을 수 있다면 나쁜 제안은 아닌지라 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집에 가 봤자 쓸데없이 별별 생각을 다 하다가 잠이 들 게 뻔했기에 딱히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내 긍정적인 대답에 김현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나도.”

하지만 곧 이어진 강수하의 말에 어두워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김현은 무어라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아, 너도?’ 하는 생각이 얼굴에 쓰여 있다시피 했다. 강수하가 어이없이 픽, 하고 웃었다.

“공부하러 간다면서.”

“아니, 그게 너랑…….”

불퉁한 김현의 목소리가 금세 사그라졌다. 마땅히 대답할 말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짜증으로 가득했다. 여기서 둘이서만 가자고 말을 할 수도 셋이 같이 가자고 할 수도 없는 나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래’ 소리를 내뱉은 김현이 시무룩하게 제 가방을 고쳐 멨다.

“장우진?”

그렇게 셋이 막 교실을 빠져나가려는데 스쳐 지나가듯 우리 교실을 지나치던 장우진이 보였다. 무심결에 장우진을 부른 내 목소리에 녀석이 바로 걸음을 멈췄다. 무심하게 교실 안을 훑어본 녀석이 왜 그러고 있냐는 듯한 표정을 했다.

“하아, 진짜.”

장우진을 마주한 김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덕분에 장우진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사람을 보자마자 한숨을 쉬어.”

“야, 우리 공부하러 갈 거야. 너도 갈 거야?”

뭔가 다 포기한 사람의 말투였다. 그 모습을 보며 웃자 여전히 불퉁한 얼굴의 김현이 나를 힐끗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말을 덧붙였다.

“무슨 일 있으면 같이 안 가도 돼.”

장우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김현이 공부를 하자는데 가야지.”

어쩌면 가지 않겠다는 말을 기대한 모양인지 김현의 눈썹이 팔자로 내려갔다. 나는 킥킥거리고 웃으며 김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어쩐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김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느새 얼굴이 밝아졌다.

“다음에는 둘이서만 하자.”

“응. 근데 그거 소원이야?”

“……지헌아, 너까지 그럴 거야?”

하는 말에 따라 휙휙 바뀌는 얼굴이 귀여워 보였다. 절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부정하는 탓에 알았다고 몇 번이나 대답을 해 주고 나서야 김현은 안심한 듯 보였다.

우리는 교실을 벗어나 교문 밖으로 걸었다.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갈 생각이었다. 공부하기 좋은 카페가 있다고 그새 기분이 좋아진 김현이 우리를 안내했다. 공부하기 좋은 카페는 어떤 카페인지 생각하며 카페에 막 도착했을 때 장우진이 들어서다 말고 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전화가 오고 있었다.

“나 잠시만.”

“응. 아메리카노 시켜 놓을게.”

장우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통화 버튼을 누르며 돌아섰다. 얼핏 유한이 형이라고 써 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못내 신경 쓰였지만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치 미팅 룸처럼 사방이 유리로 막혀 있는 곳이었는데, 그 유리도 불투명해서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형태만 보일 뿐이었다. 공부하기 좋은 카페라더니 정말 그럴듯해서 나는 강수하와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벌써 주문한 음료가 나왔는지 진동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강수하가 그 길로 진동벨을 가지고 나갔다가 음료 네 잔을 들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강수하가 다시 들어올 때 어디선가 꺅꺅거리는 소리가 룸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연예인이라도 있나, 호기심이 일었지만 문이 닫히며 그 소리도 조용해지기에 그냥 호기심을 접어 버렸다.

“아, 공부 엄청 싫어.”

대충 책을 펼쳐 놓고 음료를 몇 모금 마시던 김현이 축 처진 얼굴로 그런 말을 했다. 공부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징징대는 소리였음에 강수하는 어이없어했지만 나에게는 격한 공감을 일으켰다.

게임에 들어오고 나서 느낀 거지만 나는 도대체 대학을 어떻게 간 건지 의문스러울 때가 많았다.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은 그래도 이름을 대면 알아주는 곳이었다. 분명히 고등학교 때 피 터지게 공부했던 게 남아 있을 텐데 어째서 나는 지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걸까. 고작 5년 만에 모두 잊은 건가.

나는 실제 고등학교 때에도 암기 과목을 공부하는 것처럼 학습했던 수학 참고서를 들고 흥미 없는 눈으로 이리저리 훑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역시 수학은 싫었다. 겨우겨우 다른 과목의 점수로 만회했기에 망정이지 아마 아니었다면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은커녕 인 서울도 어려울 판이었을 것이다.

쓸데없이 늘어지던 생각은 장우진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사라졌다.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애초에 내가 여기서 대학을 갈 일도 없으니까.

“밖에 무슨 일 났나.”

“왜?”

“아니, 밖에 사람들 웅성대고 있기에.”

전혀 흥미 없는 얼굴로 장우진이 말했다. 그 말에 밖을 한번 구경해 보려던 나는 흥미 없는 그 얼굴이 오히려 더 놀라울 정도였다.

“근데 누구야? 유한이 형?”

“어어.”

“무슨 일 있대?”

“아니, 그냥 전화했나 봐. 심심했나.”

별일 없으면 됐고.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했다. 겉보기엔 괜찮아 보였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스러울 때가 아직도 많았다.

갑자기 조용했던 밖이 한 번 더 소란스러워졌다. 아까부터 진짜 뭐지? 혹시 싸움이라도 난 건가. 별생각이 다 들었지만 나는 이내 흥미를 접었다. 금방 조용해지겠지, 뭐.

사실 내가 이렇게 쉽게 흥미를 접은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방금까지 공부하기 싫다고 했으면서 그새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한 세 사람 탓이었다. 이 상황에서 바깥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하다고 나가 보는 것도 방해를 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하는 녀석들이 신기했다. 들어오자마자 책을 펼친 장우진도 대단하고 어느새부턴가 말없이 책만 들여다보기 시작한 강수하도 신기했다. 특히나 김현은 방금까지 징징거리던 게 무색할 정도로 정 자세로 앉아 필기를 하고 있었다. 반듯반듯하게 쓰이는 글씨를 보며 나는 혹여나 내가 방해가 될까 소리 죽여 웃었다.

사실 모의고사는 내신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여긴 게 기우였다. 다들 중간고사든 모의고사든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평상시에도 이렇게 늘 공부하고 있겠지?

나는 다시 한번 떠오르는 내 피 터졌던 고등학교 생활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지헌아?”

동작이 좀 컸던 모양이었다. 김현이 어느새 필기를 멈추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공부하기 싫어서. 공부해. 나도 이제 하려고.”

민망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치는 나를 보며 세 사람이 웃었다.

“맨날 그렇게 공부하기 싫어서 어떡해.”

“음. 될 대로 되겠지?”

“……나는 너랑 같은 대학 가고 싶은데.”

강수하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너무 허황된 꿈 같은데.”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게임과는 별개로, 이게 현실이라고 해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너무 단호한 거 아니야?”

“하지만 수하는 전교 1등이라면서. 지금부터 코피 쏟으면서 공부해도 어, 절대…… 무리야.”

“참나.”

나는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수하 역시 어이없이 웃었지만 딱히 부정하진 않는 걸 보면 내 말의 뜻을 아주 잘 이해한 모양이었다. 사실 그건 그거대로 굴욕적이었다.

“그럼 나랑 같은 대학 가자. 응?”

이번에는 김현이었다. 아니, 강수하가 특출 나게 공부를 잘하긴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김현도 넘지 못할 벽이었다. 그걸 여태 내가 하는 걸 봐서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김현의 표정은 진심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응? 노력은 할 수 있잖아.”

강수하처럼 심드렁하게 대꾸하려던 내가 김현의 말에 문득 입을 다물었다. 아,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알았어.”

나는 결국 지키지 못할 말을 내뱉어 버렸다. 어떻게 해도 내가 너랑 같이 대학을 가진 못할 텐데. 나는 애써 어색한 얼굴을 갈무리했다.

“진짜지? 약속한 거다.”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나는 무심코 문밖에 시선을 두었다. 불투명한 유리 건너편 누군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 시선이 딴 곳으로 향하자 다른 세 사람의 시선도 나를 따라 움직였다.

바깥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그 웅성거림에 결국 문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장우진이 문을 열기 위해 일어섰다. 하지만 장우진이 문을 열기 전 바깥에서 문이 열렸다.

“……어? 형?”

“이유한?”

무심코 내뱉은 반말이었다. 문이 열린 곳에는 이유한이 있었다. 그 뒤에는 알바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몇 명 서 있었다. 그 와중에 이유한은 커피와 작은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갑자기 여기에 있는 것도 이상한테 뭔가를 들고 있는 것도 이상해서 나는 내가 이유한이라고 부른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했다. 뒤늦게야 그것을 깨닫고 슬쩍 장우진의 눈치를 봤지만, 장우진도 갑작스러운 이유한의 등장에 놀랐는지 다행히 신경 쓰고 있는 기색은 아니었다.

“어? 진짜 여기 있네. 안녕!”

이유한은 방긋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김현과 강수하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 듯했지만 일단 나와 장우진이 아는 기색을 보이니 자리에서 쭈뼛거리면서 일어섰다.

이 뜬금없는 출연은 뭐지? 나는 두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이유한은 사복 차림이었다. 귀신이 아닌 사람이 된 모습으로 일어선 것을 처음 봐서 나도 왠지 그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 병원에서 나 많이 좋아졌다고 이제 외출도 보내 주거든.”

“아아…….”

“그래서 오랜만에 집에 들렀다가 나오는 길에 우진이한테 전화했더니 여기 있다길래 와 봤어. 혹시 불편한가?”

“아, 아니야.”

나와 장우진이 동시에 부정하면서 강수하와 김현의 눈치를 살폈다. 우리야 상관없지만……. 그 어색한 우리의 눈빛에 둘은 우리와 아는 사이임을 눈치챈 듯 불편한 기색 없이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두 사람에게 이유한이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역시나 활발한 성격이라 그런지 조금의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들어가도 돼?”

“네. 들어오세요.”

허락을 얻은 이유한이 반갑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그 와중에 강수하는 우리가 어안이 벙벙한 채라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던 케이크를 받아다가 테이블에 올렸다.

“너희 어디 있는지 금방 알겠더라. 남자애들 한 넷 들어오지 않았냐고 물어봤더니 바로 알려 줬어.”

“아.”

나는 밖에 서 있는 알바생들의 얼굴이 붉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웅성거림의 원인은 이거였나?

“그리고 이건 서비스래. 근데 요즘은 서비스로 이렇게 막 케이크도 주나?”

이유한이 케이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조각도 아니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커피는 그렇다 치고 케이크는 어디에서 가지고 왔는지 궁금했는데……. 일단 건네주니 감사합니다, 하고 웃으며 받아왔을 이유한이 눈앞에 선했다.

그 와중에 어쩐지 밖에서 기웃거리는 사람이 조금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웅성거림의 원인이 우리였다면 여기에 이유한까지 추가됐으니 저 무리는 무엇인가 궁금할 법도 하겠다 싶었다.

“근데 이거 서비스 맞아요? 정말?”

“응? 응. 아니면 그냥 내가 살 테니까 먹어.”

이유한만큼이나 낯을 가리지 않는 김현이 가운데에 놓인 케이크를 포크로 찔러 먹으려다 행동을 멈추고 물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서비스로 주기에는 과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런 김현의 물음에 이유한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 쿨한 대답에 나도 웃었다. 이렇게 보니 좀 어른 같았다.

어쨌든 어색했던 인사를 마치고 나서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어색함은 차차 사라져 갔다. 하지만 나는 자꾸만 흘러나오는 한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색한 게 사라진 건 좋은데 이건 너무 자연스러운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면 더 쉬워. 봐 봐.”

대체 왜 이유한이 지금 애들한테 공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건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강수하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강수하가 뭔가 잘 안 풀렸는지 따로 체크해 뒀던 문제를 이유한이 귀신같이 캐치한 덕이었다.

“형은 3년이나 아팠다면서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요?”

나처럼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김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사실 나도 그게 굉장히 궁금했는데 김현이 물어봐 주니 고마울 지경이었다. 이유한이 살짝 두 눈을 굴리더니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 꿈을 좀 길게 꿨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 꿈속에서도 공부를 했어.”

다만 그 대답에 다들 숙연해졌지만. 그러니까 귀신인 상태로 수업 듣고 있었다는 거네. 들어와서 논 게 아니라 수업을…….

그만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꾸역꾸역 참았다. 왠지 숙연한 분위기를 깨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또 어떻게 생각해 보면 3년 내내 얼마나 심심했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대단하시네요.”

“대한민국 고등학생이 그렇지.”

“그럼, 학교 복학하시는 거예요?”

“음, 아니.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

이유한이 골똘히 생각하면서 말했다.

“검정고시 볼 것 같아.”

하긴 지금 고등학교 2학년으로 돌아오면 졸업하고 나서는 스물셋일 텐데. 그 대답에 모두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지헌아.”

“응? 아니, 네?”

무심코 내뱉은 ‘응’ 소리에 이유한이 웃었다. 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핸드폰 번호 알려 줘. 연락을 할 수가 없어서.”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한의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다 내 손을 따라왔다. 그게 또 너무나도 티 나게 움직여서 다들 내 손만 보고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유한이 슬쩍 주위를 둘러보더니 배시시 웃어 보였다.

“여기요.”

“응, 고마워.”

이유한이 제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그때 아주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목소리로 김현이 입을 열었다.

“근데 지헌이하고는 언제 친해지신 거예요?”

“어, 지헌이는…… 그때. 우진이가 병원에 한번 데려왔었어.”

“아아…….”

한참을 생각해서 뱉은 대답인 듯 보였다. 그에 장우진에게서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다만 김현과 강수하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지헌이 귀여워서 내가 좋아하거든.”

“네?”

하지만 그 수긍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한이 아주 해맑은 표정으로 당황스러운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유한의 말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근데 너희도 지헌이 좋아하는구나?”

“……네?”

“어? 아니야?”

이유한은 정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다들 입을 떡 벌릴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있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황한 내가 얼굴을 붉혔다. 장우진조차도 이유한을 놀란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로지 이유한만이 해맑았다.

“뭐, 아니면 말고.”

이유한은 여전히 밝은 얼굴로 말을 돌렸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일었다. 심장이 쿵쿵쿵 뛰고 있었다.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거야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외면하고 그저 친구로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게 고작 얼마 전인데…….

차라리 당연히 친구니까 좋아하죠, 하고 능청스럽게 넘어갈 사람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말이라면 아마 이 자리에 없는 김준이 가장 잘했을 터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 김준은 없었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침묵이 자리에 내려앉았다. 결국 입을 달싹인 것은 내 쪽이었다. 아마 때마침 내 핸드폰이 울리지 않았다면, 분명 나는 멍청하게 웃으며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을 것이다.

“어, 준이 전화 온다.”

이 순간 김준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나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라, 모르겠다. 이유한이 던져 놓은 폭탄을 나는 수습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아주 미안하게도 자리를 뜨기로 했다.

“전화 좀 받고 올게.”

평소 같으면 그냥 여기서 받으라고 한마디는 했을 법한데 다들 정신이 없는지 딴생각에 빠져있는지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문을 열고 나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준아.”

-어, 지헌아. 뭐 해?

밝은 목소리였다. 바깥인 듯 와글와글한 소리도 같이 들려오고 있었다.

“나 지금 공부…….”

-아하하. 진짜?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좀 기분 나쁜데. 입을 비죽거렸지만 그냥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뭐 안 어울리긴 하지.

“훈련 중이야?”

-응. 지금 저녁 먹으러 가고 있어. 밥은 먹었어?

“아니. 대신 케이크 먹고 있어.”

-밥을 먹어야지.

슬금슬금 입꼬리가 올라갈 만큼 다정한 말투였다. 괜히 발가락을 오므렸다 펴며 나는 카페의 구석 벽에 기대어 섰다.

멀지 않은 곳에 내가 방금까지 앉아 있던 룸이 있었다. 불투명한 유리로 네 사람의 실루엣만 보였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건 아닐까? 아주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그 생각은 금세 접었다. 모난 구석이라고는 없는 녀석들이었다. 무슨 사달이 나진 않을 것이다.

“훈련은 안 힘들어?”

-훈련은 안 힘든데, 너 못 보고 있는 게 좀 힘드네. 내 낙이었는데.

“뭐래.”

능청스레 이어지는 말에 민망해진 내가 부러 틱틱거렸다. 하지만 그 반응이 오히려 재미있었는지 김준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시합 얼마 안 남았지?”

-응. 일주일 좀 넘게 남았네. 그래서 완전 빡세게 굴려지고 있어.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네가 걱정해 주니까 속도 없이 너무 좋은데. 어떡하지.

전화기 너머로 김준의 목소리가 간지럽게 타고 넘어왔다. 기분 좋은 티를 숨기지 않고 보여 주는 김준 때문에 오히려 내가 부끄러웠다. 괜히 신발 코를 바닥에 툭툭 부딪혀 봤지만 간질간질해진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지헌아.

문득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나 싶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김준이 나를 불렀다. ‘응?’ 하고 되물었는데도 전화기 너머에서는 말이 없었다. 끊어졌나 싶어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지만, 통화 시간은 여전히 올라가는 중이었다.

-나도 그거 해 주면 안 돼?

마침 김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응? 뭘?”

-그…… 시합 이기면 소원 들어준다든가. 그런 거 있잖아.

고민한 기색이 보인 것치고는 김준이 대수롭지 않은 얘기를 하는 척, 원하는 바를 말했다. 대체 무슨 소원을 말하고 싶기에 다들 이렇게 소원에 집착하는 걸까. 얼마나 대단한 소원이 나올지 궁금하다 못해 이제 기대가 될 정도였다.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김현 소원이 대체 뭐기에 이렇게 소원에 집착하는 거야?”

-아, 몰라아. 나도 그거 해 줘. 응?

“참나.”

내가 바로 긍정의 말을 내뱉지 않으니 애교까지 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듣기에 나쁘지 않은 목소리라 좀 더 말을 돌리며 버텨 볼까 했지만, 훈련하느라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에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무슨 소원 말할 건데?”

-진짜? 진짜지? 소원은 비밀이야! 나 진짜 열심히 해야지!

김준의 목소리가 기분이 좋아진 기색을 보이며 한껏 높아졌다. 이 기분이 훈련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도 나름 괜찮긴 한데, 너무 기분이 업 되는 것 같으니 진짜 소원이 뭘지 불안해지기도 했다.

“근데 소원이 진짜 뭔데?”

-에이. 비밀이라니까. 이기고 나서 말해 줄게!

“치. 알았어. 몸 조심히 운동해.”

-응. 너는 나 보고 싶어도 참고.

오늘 정말 작정이라도 한 건지 유난히 더 능청스러운 김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끄러움에 어색하게 웃었다가 영상 통화가 아님을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어? 방금 그래라고 했다. 나 보고 싶다고 한 거지, 지금?

아무래도 김준은 훈련이 많이 힘든 모양이었다. 별것 아닌 일에 점점 더 업 되고 있는 김준 때문에 나는 부정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딱히 대답을 듣지 않고도 전화기 너머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나 가 봐야겠다. 또 전화할게.

“응. 파이팅.”

김준과의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끊긴 전화를 바라보며 간질간질한 심장을 부여잡았다. 아, 심장이 왜 이러지. 설레는 기분에 손을 쥐었다 폈다 해 봐도 좀체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할 수 있을까? 친구. 방금 전까지 했던 생각도 금세 흔들렸다. 이렇게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는데 진짜 내가 할 수 있을까.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불현듯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설마 지금도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겨우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까와는 달리 풀어진 분위기로 각자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그새 네 사람의 시선이 모두 다 나를 향했다.

“김준이랑 통화한 거지?”

“응.”

“나한테는 안 하면서.”

김현이 귀엽게 입을 비죽거렸다. 너무나도 풀어진 분위기에 내가 나가기 전에 너무 예민했던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에 무슨 대화를 했기에 이렇게 분위기가 풀어졌지.

“근데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별 얘기 안 했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지만 장우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별 이야기 안 했다고?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어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달싹였지만, 막상 아까의 분위기를 만들었던 이유한이 강수하와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며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문제도 없었으면 됐지.

“나 이제 가 봐야겠다. 너무 병원 오래 비웠어.”

이유한이 문제가 풀리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마자 우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가 간다는 말에 다들 일어난 게 부담스러웠는지 이유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사래를 쳤다.

“뭐야. 너무 어른 대하듯이 하지 마.”

“데려다줄게.”

“아냐, 나 괜찮은데.”

“형 아직 환자야.”

당황한 듯 괜찮다고 거절하던 이유한이 장우진의 단호함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공부 열심히들 해.”

“네, 형. 들어가세요.”

강수하와 김현은 깍듯하게 인사했다. 나는 고개를 까딱하며 손을 흔들었고 이유한은 환히 웃으면서 인사를 받았다. 다섯이 있던 자리에 두 사람이 사라지니 어쩐지 휑한 느낌이 들었다. 일부러 잡은 룸이 좀 크게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근데 김준이랑 무슨 통화를 그렇게 오래 해?”

자리에 앉자마자 그게 궁금했는지 김현이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어……. 뭐 하는지 물어보고, 열심히 하라고 말해 주고.”

가만히 방금 전의 통화 내용을 간단하게 축약해 봤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어쩐지 되게 별 내용이 없었던 것 같았다. 엄청 간질간질한 대화였는데…….

“그게 다야?”

“음. 아, 이기고 오면 소원 들어주기로 했어.”

“……너 그렇게 소원 남발할 거야?”

무심하게 듣고 있던 강수하가 물었다. ‘남발한 건 아니고, 그걸 꼭 달라고 하니까……’ 민망해진 내가 두 눈을 굴리며 얼버무리니 헛웃음을 친다.

“그럴 거면 나도 줘. 그거.”

“너를 뭘 했다고 주냐.”

“전교 1등 하면 줘.”

“넌 원래 전교 1등이잖아.”

갑자기 강수하와 김현이 티격태격대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까 김현의 소원이 뭔지 정말 너무 궁금했다. 도대체 그게 뭐기에 내가 램프의 요정 지니라도 되는 것처럼 소원을 받고 싶어 안달인 건지.

“농구를 어떻게든 이겼어야 했는데.”

결국 강수하가 한숨을 내어 쉬었다. 나는 살짝 미간을 좁히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줄게. 소원. 대신에…….”

“대신에?”

순간 눈을 반짝인 강수하였다.

“소원이 뭔지 지금 말하면 줄게.”

도대체 무슨 소원인지 너무 궁금한 탓에 꺼낸 말이었다. 눈을 반짝이던 강수하가 금세 입을 꾹 다물었다.

“응? 도대체 뭔데 그래. 뭘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별거 아냐. 그냥 일단 가지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

강수하 대신 김현이 입을 열었다. 썩 믿음이 가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강수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쓸데가 있을 거거든.”

“……도대체 어디에?”

다시 되물어도 강수하와 김현 둘 다 말이 없었다.

“아, 진짜 궁금하다. 현아. 도대체 언제 쓸 건데?”

“음. 안 그래도 생각 중이야.”

장난스럽게 휘어지는 눈을 따라 결국 나도 웃어 버렸다. 뭐, 언젠가 쓰긴 쓰겠지. 그냥 간단하게 스킨십 정도가 아닐까 생각을 하긴 했었다. 아무래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쓰는 소원이랄 게 그것 말고 딱히 생각나는 게 없기도 했으니까. 아니면 고백인가. 은연중에 마음을 내비친 강수하라면 모르지만 김현은 고백을 하는 데도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생각했다.

아, 그럼 이렇게 소원을 쓰라고 닦달하면 안 되는 거겠구나. 문득 호감도를 더 이상 내가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솔로 엔딩은 무슨, 열과 성을 다해 모두를 공략하고 있는 것 같은데. 새삼스럽게 나는 내 자신에게 실망하고 말았다. 사람이 이렇게 생각 없이 지내면 안 되는 건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

[5%]

병원 냄새가 코끝을 찔러 왔다. 5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준비해서 나온 참이었다.

나는 옷차림을 정돈하고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네, 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문을 열자 오랜만에 뵙는 이유한의 어머니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난 이유는 이유한을 만나러 오기 위해서였다.

“어머, 지헌아. 오랜만이네.”

“안녕하셨어요.”

반가운 기색을 보이는 어머니를 보며 머쓱하게 웃고는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 지헌이 왔어?”

“네, 형. 안녕하세요.”

퍽 자연스레 ‘형’ 소리를 하며 고개를 꾸벅이니 이유한이 환하게 웃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그냥 형이라고 불러 줄까 싶은데, 막상 둘만 남으면 자동으로 반말을 하게 됐다. 마치 습관 같은 거였다.

“마침 잘 왔어. 안 그래도 잠깐 집에 다녀올 생각이었거든.”

“아, 집에 가시게요?”

“응. 갈아입을 옷이라든지 좀 필요할 것 같아서.”

“그냥 집에서 주무셔도 되는데 힘들게 왜 병원에서 주무세요. 그러니까.”

“내가 마음이 안 놓여서 그렇지, 뭐.”

툴툴대는 이유한의 말투에도 어머니는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면서 대답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병원에 있던 기간이 오래되어 이것저것 챙길 게 많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어머니는 콧노래까지 부르고 계셨다.

하긴, 죽을 줄로만 알았던 이유한이 살아 있다는 것이 나조차도 이렇게 기쁜데 어머니는 오죽했을까.

“그럼, 지헌아. 유한이 좀 잘 부탁할게.”

“부탁할 게 뭐 있어요. 잘 놀고 있을게요.”

“그래.”

어머니는 내 어깨를 톡톡 두어 번 두드리고는 병실을 나섰다. 언제 봐도 이유한과 똑 닮은 외모였다. 나는 괜히 이유한을 힐끗 보고는 침대 옆의 보조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나 보고 싶어서 왔어?”

방긋 웃는 것이 오늘 컨디션이 꽤나 좋아 보였다.

“보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그냥 잘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참나, 이유한의 입에서 장난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궁금하면 자주 좀 와. 얼굴 보기도 힘들고. 나는 나가고 싶어도 나가기 힘든데.”

하지만 불퉁한 목소리가 들린 것도 금방이었다.

“미안. 요즘에 좀 정신이 없었어.”

“그랬어?”

“응. 시험 못 보면 야자 한단 말이야.”

부러 툴툴거리며 한 말에 이유한이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그 시험은 언제 끝나는데. 응?”

“곧 끝나.”

“그럼 끝나면 나랑 데이트해야 해.”

무척이나 단호한 목소리였다. 아, 문득 생각난 게 있던 나는 잠시 입을 벌렸다. 뭐라 답하는 건 없고 당황한 모양새가 이상했던지 이유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나 너한테 물어보고 싶었던 거 있었는데.”

“뭔데?”

“혹시 그때, 우리 카페에서 만났을 때 있잖아.”

“응? 아, 너 공부한다고 했을 때?”

“응. 그날 나 전화 받으러 갔을 때 애들하고 무슨 얘기했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이유한의 미간이 잠시 좁혀졌다.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난 모양인지 손바닥을 짝, 맞부딪힌다. 사실 오늘 이유한에게 시간을 내서 찾아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날 카페 안에서야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들이 이상했을 정도로.

하지만 그날 이후 다들 미묘하게 변했다는 게 문제였다. 일단 가장 큰 문제……라고 하면.

“왜? 애들 뭐 달라?”

“으음, 조금?”

“어떻게 다른데?”

이유한이 내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황한 내가 순간 살짝 물러섰지만, 이유한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아니, 뭐……. 그냥.”

그냥 좀 뭐라고 할까. 나는 요 근래의 세 사람을 떠올렸다. 그래. 스킨십이 심해졌다. 전에도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든가 팔을 잡아끈다든지 손을 잡는다든지 뭐 그런 적이야 여러 번이었지만…….

“응? 그냥 뭐?”

이유한이 갑자기 내 뺨에 제 손을 올려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갑작스레 마주친 두 눈이 곧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응? 뭔데?”

“아, 어?”

“말해 줘. 뭔데? 궁금하단 말이야.”

여전히 내 얼굴을 붙들고 있는 이유한은 내가 움찔거리며 움직이는데도 손에 힘을 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런 식이라고.”

“응?”

“이렇게 너처럼 그래. 자꾸 만지고 안고.”

볼에 손을 올려 힘준 탓에 볼살이 밀려 입이 붕어 입이 됐다. 덕분에 불퉁한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겠구나, 안 봐도 훤하게 알 수 있었다. 이유한은 내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만지고, 안고?”

요즘 계속 그랬다. 아침에 학교에 나가면 요 근래 내기 탓에 일찌감치 나와 있는 김현의 품에 안기는 것이 첫 번째 일과, 그리고 그 옆에 있던 강수하에게 끌어당겨져 안기는 게 두 번째, 자기 반도 아니면서 자꾸만 우리 반에 오는 장우진에게 안기는 게 세 번째.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러는 건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 모든 행동이 우리가 카페에서 만났던 날로부터 시작됐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나는 내 볼을 잡고 있던 이유한의 손을 거둬 냈다.

“응, 그러니까 그날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응? 나한테 막 스킨십하라고 시켰어?”

“……그럴 리가 없잖아.”

이유한이 어이없이 웃었다. 그러면서도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을 비죽거렸다.

“근데 갑자기 왜 그러지.”

“아아.”

다시 한번 이유한의 손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단번에 팔 사이로 손이 끼어들었다. 어, 할 새도 없이 나는 의자에서 들어 올려졌다. 그러고는 보조 의자에서 이유한이 앉아 있던 침대로 순식간에 옮겨졌다.

“으악.”

놀라서 큰 소리가 나왔지만 이유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진짜 다 나았나 봐. 지금 날 그냥 들어 올린 거야?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굳었다.

“질투 나게. 막 안았다 이거지. 나 병원에 있는 동안.”

“……어?”

하지만 이유한은 그러던 와중에 나를 제 품에 안기까지 했다. 놀란 내가 팔을 들어 올렸지만 그는 그저 안은 팔에 힘을 줄 뿐이었다.

“나 별 얘기 안 했는데.”

이유한이 나를 안은 채 말할 때마다 울림이 느껴졌다. 분명히 귀신일 때는 소년같이 청량하고 그랬는데 왠지 거기에서 업그레이드된 느낌이었다. 고작 3년이 그렇게 사람을 변하게 할 정도의 기간인 건지, 내가 알던 것과 달리 원래 이유한이 이런 성격이었던 건지.

“근데 다들 왜 그러지.”

능청스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이유한의 품에서 벗어났다.

“진짜 아무 얘기 안 한 거 맞아?”

잠시 이유한이 두 눈을 굴렸다. 나를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는 눈이 무언가 말을 하긴 했음을 직감하게 했다.

“무슨 말 했는데.”

“어……. 아,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응?”

“나 너 좋아해.”

흡, 하고 순간 숨이 삼켜졌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반응에 이유한이 순간 머쓱하게 웃음 지었다. 하지만 말은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었다.

“친구로서 좋아하는 거 아닌 것도 알고 있을 거고.”

“…….”

“그날 걔네들한테 그 말밖에 안 했어.”

“…….”

“아, 그리고 너희도 지헌이 너 좋아하는 거 안다고도…….”

내 눈을 마주 보고 있던 이유한의 눈이 도르륵 굴러갔다. 아무래도 덧붙인 말이 켕겼던 모양이었다. 이유한이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사실 내가 귀신으로 돌아다닐 때 항상 네 옆에 있던 애들이잖아. 모를 수가 없을 만큼 티가 났으니까.”

머쓱하게 귓가를 문지르는 내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미안해. 화났어?”

대답이 없는 나를 가만히 보던 이유한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화날 게 뭐 있어. 잘했어.”

비록 솔로 엔딩은 물 건너간 것 같긴 하지만. 나는 왠지 머리가 좀 복잡해졌다. 전부터 생각하긴 했지만 솔로 엔딩은 안 될 것 같고 근데 또 누구 한 사람을 공략하기도 늦은 것 같고 호감도도 확인이 어려워서 곧 어장 관리 직전이고. 뭐 하나 답이 풀리는 게 없었다.

“근데 표정이……. 내가 경솔했어. 미안해.”

시무룩하게 눈썹이 팔자로 늘어졌다. 나는 결국 푸흐흐, 하고 웃었다. 모르겠다. 엔딩이고 뭐고 진짜 모르겠다. 그런 고민을 하다가는 이도 저도 아닌 채 시간만 흘러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지금은 내가 모두와 함께 있고, 혹시라도 게임이 끝났을 때는……. 그래, 뭐 그건 내 멍청한 게임 플레이로 인한 자업자득인 거지. 나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아니야. 미안할 거 없어. 잘했어.”

내 한숨 섞인 대답에 이유한의 얼굴은 잔뜩 시무룩해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해.”

이유한의 손이 내 머리카락에 닿았다. 천천히 넘겨지는 앞머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 이유한을 마주 보았다.

“응? 왜 이렇게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어. 무섭게.”

“뭐가 무서워. 바보냐.”

“나는 네가 그렇게 엄청 생각 많아 보일 때가 제일 무섭더라.”

그제야 웃음기 섞인 내 대답에 이유한이 웃는 얼굴을 했다.

“무서울 것도 많다.”

“아니, 진짜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그런가. 하긴, 요즘 생각할 일이 많긴 했다. 특히 현실에 나갔다 오고 나서부터는. 나는 의식적으로 이유한의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일부러 더 밝게 웃었다.

“별걸 다 신경 쓴다. 별생각 안 했어.”

“거짓말.”

흐트러진 제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이유한은 다시금 내게 안겨 왔다. 다른 세 사람도 그렇지만 이유한도 자연스럽게 안겨 오기 시작한 탓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등을 토닥거렸다.

설레고, 두근거리고. 그러나 그 감정을 한 사람에게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근데 지헌아.”

문득 이유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나를 안은 채였다.

“응.”

“알고 있었지.”

“뭘.”

“우리가 너 좋아하는 거.”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내가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이유한은 말을 이어 갔다.

“사실 나는 네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네가 어떤 액션을 취해 주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긴 한데.”

한숨 섞인 목소리.

“사실 나는 네가 ‘사실은 너희들을 다 좋아하고 있어’라고 해도 괜찮거든.”

“그게 어떻게 괜찮아.”

“그거야, 너니까?”

하지만 그 목소리는 금방 밝아졌다. 그게 밝을 만한 주제가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

“그게 뭐야.”

“……그야 나한테 너는 뭘 해도 괜찮으니까.”

“이유한.”

“나한테 너는 그래. 사실 괜찮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어.”

“이건 양보하는 차원의 문제가…….”

“단순히 내가 너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야. 나는 그냥 너한테 내 마음을 강요할 생각이 없는 것뿐이야.”

이유한이 다시 한번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웃었다.

“나한테는 네 마음이 제일 중요하니까.”

진심을 가득 담은 눈을 마주한 마음이 아릿했다.

“좋아해. 지헌아.”

“…….”

“내가 정말 많이 좋아해.”

몇 번이고 들려오는 그 진심 가득한 말에 마음이 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순식간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입가에 탄식이 맴돌았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내 마음을 깨닫자 그만큼 내게 실망하고 말았다.

나는 결국 모두를 다 좋아하고 있었다.

***

6월 초의 맑은 하늘 아래, 오늘은 예정되어 있었던 김준의 야구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모의고사가 끝나고 홀가분한 기분을 만끽하며, 강수하, 김현, 장우진과 나까지 총 네 사람은 야구장의 1루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와, 사람 꽤 많네.”

들고 있는 음료수를 마시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프로 야구 경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관중석이 꽤 채워져 있다는 게 놀라웠다.

“김준 인기도 엄청 많고.”

그리고 그 관중 속에서 김준을 응원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여학생들도 꽤나 보였다. 나도 하나 만들어서 들고 올걸 그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는 거라 영 자신이 없어 그냥 고개를 저었다. 삐뚤빼뚤한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석에 앉아 있는 나를 상상하니 왠지 우스워졌다.

“어?”

“얼굴 다 탄다. 그러다가.”

그런 뻘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내 머리 위로 모자가 씌워졌다. 그 손길의 주인공은 장우진이었다. 방금까지 제 머리에 있던 것을 벗어 내게 씌운 모양이었다. 장우진이 살짝 눌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몇 번 털어 내니 금세 결 좋은 머리카락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 괜찮은데.”

“쓰고 있어.”

그 무심한 얼굴에 나는 민망하게 웃었다. 근데 이 모자 장우진한테 진짜 잘 어울렸는데. 청 반바지에 후드 티를 입은 장우진은 분명히 편안한 복장이었다. 여기에 이 검정색 모자까지 완전 찰떡궁합이었는데.

뭔가 좀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장우진이 모자를 씌운 머리를 꾹 눌러 버렸기에 나는 그냥 포기했다. 어쩐지 장우진한테는 넉넉했던 것 같은데 난 왜 딱 맞는 거 같지. 왠지 모를 굴욕감이었다.

“어? 저기 김준이다.”

모자를 고쳐 쓰며 선수 대기석을 응시하고 있자니 어렴풋 멀리서 김준이 보였다. 선발 투수라던 김준은 저 한쪽에서 공을 던지며 몸을 풀고 있었다. 그에 반가워진 내가 ‘김준!’ 하고 소리쳤지만 워낙에 거리가 멀어 들리지 않는 듯했다. 대신에 내 목소리를 들은 것은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김준의 팬들이었다.

“김준! 멋있다!”

“꺄아악! 준아!”

내 목소리에 연쇄 효과로 여기저기에서 김준을 외치는 소리가 야구장에 울려 퍼졌다. 와, 진짜 김준 인기 많아. 놀라워하고 있는데 저를 부르는 그 소리에 김준이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여기저기서 자신을 보며 손을 흔드는 모습에 웃어 보이는 듯했으나 우리는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여기까지는 안 보이려나.”

“그런가 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스트레칭하는 김준을 바라봤다. 이겨야 할 텐데.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진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기왕 그렇게 열심히 했으니까 꼭 이겼으면 좋겠다.

“김준, 파이팅!”

김준이 있는 곳까지는 들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목청껏 파이팅을 외쳤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묻혀 내 목소리는 듣지 못한 듯했지만, 왠지 응원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잘하겠지.”

강수하가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불안해하는 게 얼굴에 드러난 것 같았다.

“맞아. 김준, 잘해. 유망주야, 유망주.”

여전히 풀리지 않는 얼굴에 김현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수 대기석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김준의 어깨를 감독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두드리고 있었다.

***

5회 초, 0-2의 상황이었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불안한 예감은 꼭 틀리질 않았다. 김준은 컨디션이 안 좋았던 건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정말 잘 안 풀리는 듯 보였다.

스트라이크보다 볼을 던지는 경우가 많았고, 한 번은 데드 볼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학교의 선수 대기석에서는 감독과 코치가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김준은 마운드에서 내려오게 될 것 같았다.

나는 불안함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머리카락을 흩트리는 김준이 짜증스럽게 관중석을 보고 있었다. 혹시나 여길 보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제 자리에서 방방 뛰며 손을 흔들었다. 김준의 눈이 살짝 가늘게 떠졌다.

“봤나? 보이나? 김준!! 파이팅!!”

김준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그 오묘해졌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오른 것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숨을 깊게 내어 쉬는 듯 보이던 김준의 얼굴은 다시 한번 한없이 진지해졌다.

아마도 이번에 던지는 공이 마지막일 것이다. 투 아웃의 투 스트라이크였다. 이 위기만 잘 넘기면 공수 교대였다. 하지만 만약 이 공이 저 타자에게 맞으면 김준은 마운드에서 내려와야 할지도 몰랐다.

김준이 있는 힘껏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군더더기 없이 포수의 글러브 안으로 공이 빨려 들어갔다. 헛스윙을 한 타자가 아쉬운 기색을 보였다. 5회 초의 마지막 주자가 아웃으로 끝났다. 공수 교대를 하며 김준이 선수 대기석으로 향하는 길에 우리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덕분에 이쪽에 있던 김준의 팬들이 꺄아악 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같이 손을 흔들었다.

“김준, 나 봤나 봐!”

“어떤 의미에선 대단하다. 진짜.”

“그러니까.”

흥분에 방방 뛰는 나와는 대조적으로 강수하와 장우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을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별 얘기 아니라는 듯 손을 젓는 두 사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5회 초의 수비 이후, 김준은 초반의 부진을 만회하듯 거의 날아다니다시피 했다. 실점은커녕 단 한 명의 타자도 출루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아까까지는 정말 몸풀기에 불과했던 것처럼 말이다.

경기가 꽤 흘러 9회 초의 투 아웃 상황이 됐다. 역시 출루한 타자는 아무도 없었고 점수는 3-2로 어느새 역전한 상태였다. 몇 회 동안 우리 팀의 타자들이 안타를 여럿이나 쳐 준 덕분이었다. 게다가 컨디션이 갑자기 좋아진 김준 덕분에 투수 교체도 없었다.

중간에 한번 감독이 올라와 김준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완투하는 것으로 합의를 본 모양이었다.

“아, 긴장돼.”

김현이 제 두 손을 모았다. 내게 신경 쓰고 있던 세 사람도 게임이 마지막에 접어들자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여기서 김준이 2점을 내어 주면 이 게임은 패배로 끝난다. 하지만 대신 점수를 내어 주지 않는다면 우리 학교의 승리로 끝나는 마지막 투구였다. 역전승이 눈앞이었다. 덕분에 유난히 더 긴장되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었다.

다시금 김준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김현이 두 손을 흔들었다. 멀리서 보이는 김준의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곧 준비를 마친 듯 김준의 손에서 공이 멀어졌다. 공은 타자를 향해 날아갔다.

“아!”

‘깡’하는 배트와 공이 맞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은 1루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우리뿐 아니라 김준도 공이 날아간 방향으로 급하게 몸을 틀었다. 다행히도 공에 가까웠던 외야수가 공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잡아라, 잡아라, 잡아라……!”

나도 모르게 빠르게 중얼거렸다. 외야수가 공을 향해 몸을 던졌다.

“아웃!”

글러브 안으로 공이 들어갔다. 심판의 판정 소리가 들리고 경기는 끝났다. 그러니까…… 이겼다.

“와아아!”

“이겼다!”

여기저기서 함성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아웃으로 결국 김준은 5회 초 이후의 단 한 점의 실점 없이 이겼다. 완투 승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섰고 김현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손을 마주 잡고 자리에서 뛰었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완전 대역전극. 심장 쫄깃해서 죽는 줄 알았어.”

김현이 심장을 부여잡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도! 진짜 처음에는 지는 줄 알았어.”

나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렸다. 김준이 같은 팀 선수들에게 격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지며 축하받고 있었다. 이 경기의 MVP는 누가 봐도 김준이었다.

김준이 동료들의 손을 받아 내다 1루 쪽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나 이겼다!”

그러고는 우리도 뻔히 봐서 아는 소리를 해맑게 웃으면서 했다. 그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이 이쪽으로 몰려왔다.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금방 나올게!”

손을 여기저기 흔들어 주던 김준이 다시 선수 대기석 쪽으로 사라졌다. 우리 대답은 듣지도 않고 사라진 김준에 내가 푸흐흐, 웃었다.

“아, 맞다.”

“……?”

“김준 소원 걸었지?”

그런 김준을 나처럼 흐뭇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김현이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손을 탁 치더니 금세 멍청한 얼굴이 됐다. 이겨서 좋은 기색은 그대로였지만 무언가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한지헌, 또 소원 걸었어?”

그리고 그 소식을 몰랐던 장우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남발할 거면 나도 줘.”

“내가 지니야? 수하랑 똑같은 소리 하고 있어.”

장우진과 강수하가 동시에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도 나도 줘. 그렇게 못 넘어가.”

“준이나 현이처럼 그럼 뭐라도 걸어 봐.”

“전교 1등 할게.”

“원래 1등이라면서.”

나도 달라는 장우진과 전교 1등을 하겠다는 강수하의 말에 반박하며 나는 킥킥거리고 웃었다.

“쟤네들도 원래 잘하는 애들이잖아.”

“아닌데. 나 달리기 1등 처음 해 봤는데.”

“거짓말하네.”

또다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또 여간 귀여운 게 아니라 좀 더 구경해 볼까,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이제 슬슬 경기장에서 나가야 했다.

“소원 받으면 뭐에 쓸 거야. 미리 말하면 생각해 볼게.”

“흠.”

장우진과 강수하는 역시나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이전에 예상한 것들을 다시 떠올려 봤을 때, 분명 지금 여기에서는 말을 꺼내지 못할 거라 생각하긴 했었다.

“나는 소원권 받으면.”

하지만 계속해서 말하지 않을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장우진이 입을 열었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우진을 바라봤다.

“김현이나 김준이랑 똑같은 거 해 달라고 할 거야.”

“……내가 뭘 해 달라고 할 줄 알고?”

“뭐든.”

나는 그 말에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김현도 이해할 수 없는 듯 보였지만 갑자기 쯧, 하고 혀를 차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버린다.

“그래서 줄 거야?”

“……음.”

“안 돼. 주지 마.”

김현이 두 눈을 부릅뜨고서 가로막았다. 나는 결국 푸흡 하고 웃어 버렸다.

***

야구 시합이 무사히 끝난 후, 우리는 김준을 기다렸다가 쌍둥이들의 집으로 향했다. 야구 경기도 다행히 이기면서 끝났고 모의고사도 끝난 덕분에 마음이 풀린 것도 있었고, 타이밍 좋게 쌍둥이들의 부모님이 집을 비우셨기 때문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내일은 토요일이라 학교 갈 일이 없기도 했고.

집 안에 들어와 거실 한가운데 앉아 있자니 진짜 고등학생 시절 친구 집에 이렇게 단체로 놀러 갔던 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는 몰래 술 한잔 까먹는 재미가 있었는데. 여기는 그럴 일은 없을 텐데. 뭘 하려나. 공부를 하는 건 아니겠지, 생각한 것도 잠시.

“모였으니까 한 모금씩만 해 볼까?”

해맑게 웃으며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 오는 김현 때문에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너희도,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웬 술이야.”

“어, 아빠 거. 괜찮아. 뭐라고 안 하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묻는 강수하에게 김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술이 누구 건지 물어본 건 아닌 것 같은데. 해맑게 거실 바닥에 술을 운반하기 시작한 김현을 보다 강수하는 어이없이 웃었다. 김준과 김현은 부엌과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제 마음에 드는 것들을 죄다 꺼내 놓고 있었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결국 쌍둥이 집 거실 바닥에 거하게 술판이 벌어졌다. 술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아버님께서 굉장히 주당이시구나 싶었다. 나름대로 과자 봉지 몇 개와 종이컵도 꺼내어 놓은 것을 보니 한두 번 마셔 본 솜씨가 아니었다.

“자주 이렇게 먹어?”

“어? 엉. 가족끼리 가끔?”

아……. 나는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주와 맥주병이 일렬로 세워졌다.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지만 막상 술자리가 펼쳐지니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삼켜졌다.

이 게임에 들어오게 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마셨던 술을 마시지 않은 지도 덕분에 두 달째였다. 의도치 않은 금주가 오래되었으니 마치 조건 반사처럼 술을 보자마자 목이 말라 왔다.

“……지헌아, 침 넘기는 소리 여기까지 들려.”

“어?”

“눈을 못 떼네.”

김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민망하게 웃었다. 그렇게 소리가 컸나? 아니야, 하고 뒤늦게야 고개를 도리질 치며 부정하긴 했지만 이미 부정하기에는 늦은 듯 다들 웃음을 띠고 있었다.

결국 내 억울함은 그 누구도 모른 채 거실에 거나하게 술판이 벌어졌다. 각자 종이컵도 받았다. 강수하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고 장우진은 무덤덤했다. 반면 김현과 김준은 매우 신나 보였다. 극심한 온도 차이였다.

“수하야,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

아무래도 내키지 않아 보이는 강수하에게 내가 슬쩍 말했지만 강수하는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먹는다는 건가? 그래, 뭐 같이 먹으면 좋지. 방금까지 민망했던 생각은 뒤로한 채 나는 점점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안 그래도 가끔 잠들기 전에 맥주 한 잔만 했으면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한잔 받아.”

김현이 기분 좋은 얼굴로 내게 술을 내밀었다. 종이컵을 내밀었다. 잔을 가득 채운 맥주에서 거품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를 시작으로 각자의 잔에 모두 술이 채워졌다.

어느새 내 머릿속은 빨리 한 모금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채워졌다. 기포가 올라오고 있는 맥주가 무척이나 시원할 것 같았다.

“짠 하자, 짠.”

결국 신이 난 나는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했다. 내가 건배를 권유하자 모두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지만 나는 일단 이 한 모금을 빨리 마시고 싶었다.

내가 내민 종이컵에 다들 자신의 컵을 부딪쳤다. 종이컵이라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대신에 컵 속의 맥주가 출렁거렸다. 종이컵이 닿았다가 떨어지자마자 나는 컵을 입에 가져다 댔다.

세, 네 모금 만에 바닥을 드러낸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아, 완전 시원해.”

냉장고에서 막 꺼낸 맥주라서인지 톡 쏘는 목 넘김이었다. 한번에 마셔 버린 맥주는 오히려 너무 적어 아쉽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다 한 잔 마시고 나니 돌아오는 정신에 슬쩍 주위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다들 술을 마시느라 보지 못한 듯싶었다. 나는 또 그새 슬금슬금 정신을 놓고 맥주병을 들었다. 소주도 있는데 섞어 볼까, 고민했지만 거기까지 하면 정말 이상하게 볼 것 같아서 얌전하게 맥주만 따랐다.

“한지헌. 솔직히 말해 봐. 집에 가서 한 잔씩 꼭 하고 자는 거 아냐?”

“맞아. 우리 아빠처럼.”

하지만 술을 따르는 것만도 자연스러운지 장우진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 말에 김현이 곧장 동조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면서도 꿋꿋하게 모두의 잔을 다시금 채웠다.

“네 건 내가 따라 줄게.”

그러고 나서 비어 있던 내 잔은 김준이 채웠다. 다시 빠르게 채워지는 컵에 맥주 거품이 올라왔다. 앗, 넘칠 것 같은데. 나는 급하게 따라 넘치려는 맥주 거품에 얼른 입을 가져다 댔다. 거실에 후루룩, 하는 맥주 마시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렸다.

“……어떡하지, 진짜.”

“아, 귀여워.”

그것을 보고만 있던 녀석들이 뭐가 그렇게도 웃긴지 갑자기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그제야 돌아오는 정신에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변명했다.

“아, 넘치면 아깝잖아…….”

“응, 그치. 지헌이가 잘 아네.”

김준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번 잔을 맞부딪쳤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의 술잔이 오고 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빈 병이 몇 개나 있는지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처음에 비어 있는 것은 맥주병밖에 없었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소주병까지도 굴러다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의 얼굴은 술 한 모금 안 마신 것처럼 멀쩡했다.

나는 얼굴이 뜨끈뜨끈한데, 너흰 왜 그렇게 멀쩡한 거야? 나만 마셨어?

“한지헌, 너 얼굴 완전 빨개.”

아니나 다를까 장우진이 내 뺨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어, 완전 따뜻한데’ 하는 소리도 함께였다. 술을 마시면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체질이었지만, 사실 많이 마시기도 해서 취기가 슬슬 올라 멀쩡한 바닥이 핑핑 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 너무 많이 마셨나. 이제 그만 마셔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종이컵에 찰랑이는 술이 아쉬웠다.

결국 나는 한 잔을 더 모두와 맞부딪쳤다. 마지막 잔이다 생각하니 한 방울이 아쉬웠다. 나는 소주와 맥주가 섞인 잔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물론 먹자마자 든 생각은 후회였다. 아, 아까 거기까지만 마셨어야 했다.

“괜찮아?”

장우진은 빨간 내 얼굴이 신기했는지 아니면 걱정스러웠는지 내 볼을 붙들어 제게 돌렸다. 순간 도는 세상에 두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내 얼굴을 쥔 장우진을 가까이서 마주했다. 장우진의 얼굴은 신기하리만치 아무런 색 변화가 없었다.

“엄청 잘생겼네.”

“……어?”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내가 속으로 생각했나, 입 밖으로 내뱉었나. 내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장우진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스르르 풀리는 손에 아, 내가 입 밖으로 내뱉었구나 생각했다.

마지막 잔은 진짜 마시지 말았어야 했다. 정신을 차려 보고자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하지만 나아지지는 않고 머리만 어지러웠다.

나한테 있는 몇 가지 술주정 중 하나는 생각을 필터링 없이 입 밖으로 내뱉는다는 것이었다. 술에 더 많이 취할수록 거의 머리로 생각이란 것을 하지 않는 수준이라 했다. 그러니까 같이 술을 마셨던 친구의 말에 따르면 만취 상태일 때는 입으로 생각하는 정도라고.

그래도 지금은 다행인 수준이었다. 적어도 내가 입 밖으로 냈다는 것을 깨달을 수라도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장우진을 보며 민망한 듯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휙 돌렸다. 장우진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순간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장우진에게서 풉,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귓가에 열이 올랐다. 부끄러움과 술기운의 콜라보였다.

“나는? 지헌아, 나는?”

김현이 내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것에 당황한 나는 급하게 고개를 뒤로 뺐다. 아, 머리가 무거운데…….

“야, 한지헌.”

순간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가는 나를 강수하가 다급하게 받쳐 들었다. 머리가 무겁다 싶더니 뒤로 넘어갈 뻔했나 보다. 조금 놀란 듯 커진 목소리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내가 넘어갈지 몰랐다.

강수하가 다시 앉은 자세로 복귀시켜 놓은 덕분에 바닥에 머리를 찧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에 내가 취했다고 생각하는 네 사람의 시선은 피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나는 뻘쭘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아닌데, 정신은 멀쩡한데……. 하지만 내가 멀쩡하다고 해도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귀여워.”

김준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또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좀 부끄러운데. 나는 의식적으로 입을 꾹 다물며 생각했다. 내 생각이 입 밖에 나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나마 지금이야 내가 말을 안 하려고 하면 안 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술을 마셨을 때는 장담할 수 없었기에 나는 종이컵을 슬쩍 앞으로 밀었다. 더 이상 먹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김준이 내가 더 이상 못 먹을 것을 알았는지 알아서 제 앞의 맥주를 들이켰다. 다른 애들도 굳이 잔을 부딪치지 않고 각자 한 잔씩 들이키고 있었다.

아, 한 잔만. 딱 한 잔만 더 하고 싶다. 방금까지 그만 마셔야지, 생각해 놓고는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만 마셔.”

하지만 마음 속 갈등은 의미 없는 것이었다. 장우진이 미련 없이 내 술잔을 가져가 제 입 속으로 털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순간 사라진 술에 아쉬움과 미련 가득한 눈으로 종이컵을 바라보며 입을 비죽거렸다.

“치. 알았다. 알았어.”

하지만 그런 눈초리에도 굽히지 않을 단호함에 결국 내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더 마셔 봐야 실수밖에 더 하겠나.

나는 술잔을 내려놓았고 남은 네 사람만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여전히 멀쩡한 모습에 주량이 얼마나 되려나, 궁금해져 나는 아예 자리를 잡고 소주와 맥주를 섞기 시작했다.

“그냥 소주만 따라 준 거 아니지? 너무 투명한데?”

“아냐. 이거 완전 황금 비율이야.”

당황한 김현이 내가 건네준 잔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하지만 나는 아주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헛웃음 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하지만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다들 제 입에 그 술을 털어 넣고 있었다.

“소주 맛밖에 안 나는데.”

물론 마시자마자 한 소리 하긴 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전히 내 손에서 새로운 잔은 제조되고 있었다.

싫은 소리를 하면서도 내가 내밀면 내미는 대로 마시는 네 사람이 귀여우면서도 바보 같아 보였다. 나도 취기가 좀 올라온 터라 이렇게 마시면 힘들 걸 알면서도 계속 소주와 맥주를 섞어서 내밀고 있었다. 그렇게 또 몇 잔.

“아, 맛없어. 못 먹겠어.”

결국 김현이 혀에 감도는 소주 맛을 털어 내고 싶었는지 푸푸거렸다. 아, 좀 취한 것 같은데.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게 또 무척이나 귀여워 보인 덕분이었다.

“맛없어?”

“……으응.”

김현의 눈에 명백한 갈등이 비춰졌다. 내가 타 준 거니까 괜찮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에 대한 갈등. 하지만 결국 김현은 후자를 택한 듯했다.

“알겠어. 그럼 다음 건 맥주를 더 많이 해 줄게.”

“……어, 응.”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도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취한 상태였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취했어? 힘들어?”

나는 다시 한번 새로운 잔을 만들어 냈다. 그러면서도 퍽 걱정되는 척 꺼낸 말에 강수하가 헛웃음을 쳤다.

“그거 섞으면서 물어볼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까. 작정한 거 아니었어?”

김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묘하게 느려진 말과 행동. 나는 아무도 모르게 웃음을 삼켰다. 술을 먹인다는 게 좋지 않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평상시에 보지 못한 말투를 보는 재미는 쏠쏠했다.

그래도 이 중에 가장 멀쩡한 건 내 쪽인 것 같았다. 두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진 장우진이 다시 자기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더니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귓가가 살짝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제외하고는 평상시와 전혀 다를 게 없는 얼굴이었다.

“너 얼굴 다시 하얘졌다.”

그러면서 내 얼굴에 다시 한번 손을 가져다 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빨개지는 만큼 제 피부색으로 돌아오는 것도 빠른 편이었다.

“다 됐다.”

그래도 양심상 이번에는 좀 더 맥주를 많이 넣어 만든 술잔을 각자의 앞에 친절하게 가져다주었다. 와아, 술이다, 하는 영혼 없는 김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취할 것 같고 못 마시겠으면 그만 먹어도 되는데, 가져다주면 주는 대로 마시는 걸 보면 어리긴 어리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술을 조절한다는 개념이 없는 혈기 왕성할 때니까. 그래도 털끝만큼 남아 있는 양심상 이 잔을 마지막으로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헌아.”

방금 가져다준 술을 또 단숨에 마셔 버린 김준이 아주 느린 속도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아, 동영상 찍어 놓고 싶다. 흔히 들을 수 없는 말투였으니까. 슬슬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꽉 주고 김준을 마주 보았다. 곧 김준이 두 눈을 휘어 가며 웃는다.

“응?”

“나 오늘 소원권 줬잖아.”

“응.”

“나 그거 지금 써도 돼?”

소원을 받고 거의 한 달을 묵혀 두는 김현처럼 나중에서야 말할 것이란 예상을 뛰어넘고 김준이 말했다. 나는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 할 건데?”

“아아, 별건 아니고…….”

우물우물거리는 목소리였다. 지금 이렇게 취한 상태로 쓰면 후회할 것 같은데. 일단 들어 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으음, 사리사욕을 좀 채워 볼까 해서.”

김준이 배시시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을 나는 빤히 보고 있었다. 사리사욕.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스킨십이었다. 사실 그밖에 생각나는 게 없지 않나? 사리사욕을 채우는 소원이라고 하면 말이다.

“사리사욕?”

“응.”

왠지 갑자기 입술이 말라 왔다. 심장도 갑자기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안 돼.”

내가 혼란스러운 멘탈을 부여잡고 있을 때, 김준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이 동시에 외쳤다. 짜증스레 구겨진 미간을 보니 아마 나랑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소원인지 제대로 듣지도 않고 안 된다고 고개를 저을 리가 없었다.

“억울하면 소원 받지 그랬어.”

김준은 능청스레 웃으면서 말했다. 여전히 평소보다 느린 말투였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그래서 취해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맨 정신으로 하는 말인지 선뜻 구분이 되질 않았다.

김준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소원이 뭔지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흘러가는 상황으로 봤을 때는 내가 예상한 바가 맞는 듯 보였다.

“아, 진짜.”

장우진이 자리를 옮기는 김준을 눈으로 쫒다가 결국 미간을 찌푸리며 제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달싹이긴 했지만 정작 내뱉지는 않았다. 대신에 말을 꺼낸 것은 내 쪽이었다.

“준아. 너 지금 취한 것 같은데.”

“으응. 안 취했어.”

“그렇게 쓰면 후회하지 않겠어?”

내가 김준을 똑바로 마주쳤다. 취해서 그 순간의 감정에 휩쓸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김준은 전에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응, 안 쓰면 후회할거야.”

“…….”

“그리고 이거는 사리사욕 겸…… 음, 선전 포고야.”

김준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에서는 진지함까지 묻어나고 있었다. 소원으로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다들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갑자기 쓸 거라 생각하진 못한 탓에 나는 두 눈을 굴렸다. 그런 내 머릿속을 알지 못하는 김준이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나는 지헌아, 이제부터 쭉 이렇게 할 거야.”

김준이 배시시 웃었다. 움찔거리기만 할 뿐 다른 대답을 하지 못한 나 대신 김현이 입을 열었다.

“김준, 네가 뭘 하든 나도 똑같이 쓸 거야.”

선전 포고에 대한 김현의 대답이었다. 입을 불퉁하니 내민 채로 꺼낸 말에 김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아,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나도 있거든, 소원.”

김준의 소원에 김현까지 얹어졌다. 야구장에서 김현이 쓰는 소원을 똑같이 쓰겠다던 장우진의 말과 동일한 상황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음대로 해.”

김준은 얼굴을 찌푸리긴 했지만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오히려 그러라는 대답을 들은 김현이 더 놀란 얼굴이었다.

“지헌아.”

하지만 그 얼굴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얼굴로 김준이 나를 마주쳐 왔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김준의 손이 내 턱을 잡았다. 천천히 다가오는 얼굴이 입술이 닿기 직전에 멈춰 섰다. 김준의 숨이 간지럽게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심장이 곧 터지기라도 할 것처럼 뛰고 있었다. 아까 전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술기운이 다시금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너는 우리가 다 너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얼마 전, 이유한과 만남으로써 다들 은연중에 알고는 있었겠지만, 막상 그 자리에는 없었던 김준이 대놓고 말을 꺼내니 다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정작 그 얘기를 꺼낸 장본인은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계속 모르는 척하고 있잖아. 맞지?”

“…….”

“그래서 왜 모르는 척을 하는지 생각을 해 봤는데…….”

김준이 말을 할 때마다 가까웠던 입술이 내 입술과 스치듯이 닿았다. 얼굴에 피가 몰렸다. 취기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 머리가 핑핑 돌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김준이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론이 안 나.”

“…….”

“그래서 좀 흔들어 보려고.”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니까 지금 그게…….

“그래서 지헌아. 나 지금 소원 쓴다. 들어줄 거지?”

멍청하게 붉어진 얼굴로 쳐다보고만 있는 내 대답을 김준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입을 움직일 때마다 간지럽게 닿아 오던 김준의 입술과 내 입술이 맞물렸다.

바짝 붙어 오는 입술에 밀려 나는 살짝 뒤로 물러섰지만, 내 뒷머리를 제 손으로 받친 김준이 나를 더욱 끌어당겼다. 얼굴을 뒤로 빼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나는 가만히 김준의 키스를 받았다.

벌어진 내 입술을 김준의 혀가 가르고 들어왔다. 단호하게 들어온 것치고는 부드러운 혀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를 옭아매며 움직였다.

채 감지 못한 눈에 다른 세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다급하게 두 눈을 꾹 감았다. 이 키스가 끝나고 나면 어장 관리를 했다고 다들 나를 싫어하겠지. 이제는 확인하지 못하는 호감도가 다섯 개를 넘어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

하지만 순간 들었던 그 생각도 김준이 내 혀의 측면을 쓸어 낸 순간 하얗게 지워졌다. 내 잇새에서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김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볼 안쪽을 한 번 더 핥아 내는 김준의 혀는 굳어 있는 내 입 안을 자유로이 휘젓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자유로이 유영하던 혀가 마지막으로 나를 옭아맸다. 곧 김준이 장난스럽게 내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멀어졌다. 나는 그제야 감았던 눈을 떴다. 김준은 웃고 있었다. 놀람, 설렘, 그리고 두려움.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들며 심장이 뛰어 댔다.

“난 분명히 말했고, 너도 그러라고 했다.”

떨어진 입술에 정신을 차릴 새도 없었다. 여운을 느낄 새도 당연히 없었다. 김준이 멀어짐과 동시에 김현이 내 눈을 마주하며 통보하듯 말했다.

“나도 소원 쓸래.”

김현이 망설임 없이 내 턱을 잡고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김현은 내가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그대로 내 입술을 삼켰다.

나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은 물론이었고 당연히 어장 이야기가 나오며 내게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던 것도 보기 좋게 비켜 갔다.

김준과는 달랐다. 김현은 치열부터 조심스럽게 쓸어 왔다. 턱을 잡아 돌려 박력 있게 입을 맞댄 것치고는 조심스러운 키스였다. 치열을 훑은 혀는 금세 혀에 맞부딪쳤고 이내는 입천장을 쓸었다.

입 안 구석구석을 움직이던 김현이 내 얼굴을 잡지 않은 손으로 어깨를 잡아 왔다. 긴장한 탓인지 어깨를 잡았을 뿐인데도 몸이 흠칫 떨렸다. 슬슬 숨을 쉬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때쯤 김현이 천천히 내게서 멀어졌다. 멀어지는 김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였다. 정작 키스를 당한 것은 난데 멍한 얼굴이 된 김현이 당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아.”

폭풍 같은 키스가 지나고 나니 머리가 핑핑 돌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손까지 덜덜 떨렸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나는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로 넘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김현까지도 내게 입을 맞추고 나서 거실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호기롭게 소원이랍시고 키스할 때는 언제고 김준과 김현은 슬슬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반면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장우진과 강수하도 있었다.

“…….”

한참의 침묵이 지나갔다. 그동안 게임 시스템은 어장 관리에 대한 어떠한 말도 띄우지 않았다. 네 사람도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왜? 머릿속 의문이 지나갔다. 호감도와 관련 없이 이렇게 키스까지 했으면 어장 관리에 대해서 떴어야 하는 거 아냐? 왜 아무것도 뜨지 않는 건데?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헌아…….”

눈치를 살피고 있던 김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김준을 마주했다. 그리고 옆의 김현도, 강수하도, 장우진의 얼굴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네 명 모두 그 어떤 화난 기색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화도 안 나?”

결국 나는 어느 정도 술기운이 들어간 조금은 격앙된 말투로 내뱉었다.

***

언제 잠이 들었을까. 눈을 뜨자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보였다. 여기가 어디지. 멍한 정신에 든 생각도 잠시, 어제 쌍둥이네 집에서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깨우친 나는 부스스한 몰골로 몸을 일으켰다.

“아, 머리야.”

소파에 앉자마자 찌르르 울리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나아질 리가 없었다. 술을 대체 어제 얼마나 마신 거야. 술 마신 다음 날 늘 오는 후회와 짜증, 그리고 다짐이었다. 내가 다시 술을 이렇게 퍼마시나 봐라.

이전에도 수십 번씩 했던 다짐을 다시 한번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 하는 짧은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쌍둥이네 거실 바닥, 여기저기 네 사람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란히 일렬로 자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이 중 그나마 나는 양반이었다. 소파 위에서 무려 담요씩이나 덮고 자고 있었으니까. 물론 누군가 올려 준 거겠지만.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녀석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부엌으로 갔다. 목이 말랐다. 정수기로 냉수를 받아 한번에 마셔 버리고 나니 갑자기 들어온 차가운 물에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얼마나 마셨더라.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명 키스를 하고 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멀쩡한 정신이었다.

‘준이 말이 맞아. 나……. 너희들이 나 좋아하는 거 알아.’

나는 어제 내가 입을 열었던 그 순간을 다시 기억해 냈다. 용기 내서 하지만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여러 가지가 혼란스러웠지만 아예 대놓고 입을 맞춰 버린 상황이었다. 고백을 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더군다나 한 명이 아닌 모두가 그런 마음이라고 내게 말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피할 수는 없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근데 왜 모르는 척을 했냐고 물어보면…….’

‘…….’

‘진짜 너무 말도 안 되지만…….’

나는 숨을 골랐다. 화를 내겠지. 가지고 노는 거냐고 욕하겠지. 그렇다면 어차피 벌어진 일,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너희가 다 좋아. 나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 봤는데, 미안해. 누구 한 사람이 아니더라.’

이게 게임이 아니라 실제였다면. 물론 이렇게 잘난 애들이 나를 모두가 좋아하는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그랬다면 당연히 모두가 나를 떠나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다. 모두가 다 좋다고? 말도 안 돼. 나조차도 내가 저들 중 한 사람의 입장이었다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에 겹쳐 술기운까지 올라온 나는 용감했다. 모두가 내게 실망하고 떠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싫지만 더 이상 이 관계를 지속할 수는 없었다. 내 정확한 마음을 알길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언제까지고 지속할 수 없는 애매한 관계였다.

아, 그리고 어떤 일이 있었더라. 다들 말을 안 했던 것 같다. 뒤늦게 마신 술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무슨 말을 했었는지 가물가물했다.

‘미안해.’

그래, 그러고 나서 결국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과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마음을 가진 데에 대한 사과.

‘이 말을 할 수는 없어서 그래서 모르는 척했어. 그 관계라도 깨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정말 미안해.’

그리고 내가 이기적으로 굴었던 데에 대한 변명.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저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너 진짜 대단하다.’

한참 후에야 장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예상했었다. 싫은 게 당연하다. 근데 많이 실망했을까. 이제 다신 이렇게 지낼 수 없겠지.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다 좋다는 대단한 소리를 하고 있는데 그래도 밉지가 않은 거 보면 여러모로 진짜 대단하네.’

조금은 짜증스러운 목소리였다.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에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장우진을 마주했다. 장우진은 헛웃음을 치고 있었다.

‘그러게.’

강수하가 덧붙였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화가 나지도 질리지도 않는 나도 대단하고.’

뻔히 녀석들이 하고 있는 말을 귀로 듣고 있으면서도, 이 상황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때 김현이 웃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나 좋아한다는 거잖아.’

‘너만 좋아한다는 건 아니잖아.’

‘아니, 뭐 어쨌든 친구 이상이라는 거잖아.’

‘……멍청이냐?’

김준과 김현이 티격거렸다. 내가 생각했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솔직히 혹시나 하는 기대도 분명히 있었지만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거잖아.

‘네가 문제인지, 우리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둘 다 문제야. 제정신은 아닌 거지.’

어이없다는 듯 웃는 김준을 보면서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왜 다들 웃고 있는 거지. 왜 나한테 화를 내지 않지?

‘몰라, 지헌이가 예뻐서 그래.’

장난스럽게 한탄하는 김준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나는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소주를 다시 입에 털어 넣었다. 옆에 있던 장우진이 말릴 틈도 없었다. 연달아 두 잔을 종이컵에 담아 마시니 눈앞이 핑 돌았다. 두 눈이 시큰해졌다.

‘이거는 진짜 말도 안 되는 거잖아. 응? 왜 나한테 화 안 내. 이게 허용이 돼?’

게임이고 오류고 머릿속에서 휘발되듯 사라졌다. 외려 아무렇지도 않게 어쩔 수 없다는 기색을 취하는 네 사람을 보니 내게 밀려들어 오는 것은 죄책감이었다. 차라리 화를 냈다면 좋을 텐데, 그 누구도 내게 화를 내고 있지 않았기에 더 답답해져 왔다.

‘어떻게 너한테 화를 내.’

장우진이 내 말에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러면서 내 앞에 놓여 있던 술잔을 치워 버렸다. 아마 더 마시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좀 서운하긴 하지. 솔직히 내가 제일 나은데 이것들하고 동급이라니.’

김현이 웃으면서 말하다 김준에게 머리를 한 대 쥐어박혔다. 장난스러운 반응인데도 나는 입꼬리조차 올리지 못했다. 시큰한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왜 울어. 울지 마.’

하지만 붉어진 눈가는 금방 녀석들의 눈에 띄었다. 강수하가 내 눈가에 손을 댔다. 눈을 훑고 지나가는 손길이 미치도록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

여전히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나는 김준의 얼굴을 빤히 봤다.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에 계속해서 죄책감이 밀려 들어오고 왔다. 결국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이거 아닌 것 같아.’

‘지헌아.’

‘내가 그 얘기를 한 건 너희들이 다 나를 좋아한다고 나한테 말해 버려서……야. 그런 일이 없었다면 절대 말 안 했을 거야.’

‘…….’

‘그러니까 내 말은 나는 모두 같이 사귀고 싶어서 한 말은 아니라는 거야.’

누가 들으면 굴러 들어온 복을 차는 소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현실도 아닌 게임에서, 어장 관리라는 둥의 이벤트조차 나타나지 않는 그 상황에서 양심이라니.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관계를 이어 갈 자신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이 관계를 시작함으로써 누군가가 받게 될 상처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괜찮다는데도?’

‘…….’

‘내가 이렇게라도 만나는 게 상처받지 않는 거라고 말해도?’

하지만 그런 내 다짐은 물기 어린 김현의 목소리에 금세 또 흔들렸다.

‘나 네가 너무 좋아. 나 친구 하기 싫어. 응? 지헌아.’

‘현아…….’

‘이런 일 있고 나서 너 평소처럼 못 할 거잖아.’

‘…….’

‘나한테 다시 전처럼 친하게 안 굴어 줄 거잖아.’

거의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무심코 그 얼굴에 손을 들었던 나는 움찔 떨며 손을 거두었다. 아니, 거두어 내려 했다. 그러나 김현이 내 손을 잡는 게 먼저였다.

‘좋아해, 지헌아. 너도 좋다고 했잖아.’

‘…….’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안 돼? 응?’

내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댄 김현의 얼굴은 순식간에 눈물로 젖었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침만 삼켰다.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지헌아…….’

울먹임에 떨리는 목소리로 김현이 나를 불렀다. 동시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는 진짜로 물러나려고 했어. 정말로.

‘그 말 후회하지 마.’

‘……진짜지?’

‘몰라. 후회해도 내 탓 아냐. 나는 분명히……!’

하지만 내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김현이 내 품에 푹 안겨 왔다. 덕분에 뒤로 넘어갈 뻔한 것을 다행히도 장우진이 받친 덕분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현은 내 목에 제 팔을 휘어 감고 훌쩍거렸다.

‘합의된 거야?’

김준이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술을 한 잔 삼켰다. 김현을 토닥이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다시금 한잔하고 싶어졌다.

‘아, 지헌아. 나 네가 싫다고 할까 봐 진짜 엄청 맘 졸였다고.’

‘……바보야.’

그러면서 머쓱하게 웃는 김준이었다. 김현도 곧 내게서 떨어졌다. 훌쩍이던 얼굴은 어느새 말끔해졌다.

‘그럼 나 이제 뽀뽀도 막 해도 되는 거 맞지?’

심지어 그새 해맑아진 수준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쳤다. 회복력이 너무 좋은데? 순간 김현이 내 얼굴을 잡았다. 말만 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진심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허리를 끌어 제 품으로 넣어 버린 장우진 덕분에 김현의 입술은 내게 다시 닿아 오지 않았다.

‘아, 왜!’

‘내가 보기 싫으니까.’

툴툴대는 목소리였다. 나는 쭈뼛거리며 장우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와 마주친 장우진의 두 눈이 빤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어?’

‘김현만 만나자고 한 거 아닐 거잖아. 다 같이 만나는 거 허락한 거 아냐?’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지 아닌지 고민스러워졌다.

‘아니야? 김준, 김현만 만난다는 거야?’

장우진은 다시금 물어 왔다. 나는 두 눈을 굴리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이번에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장우진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하지 마.’

하지만 그 표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강수하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던 탓이었다. 대번에 찌푸려진 얼굴을 하고 장우진이 강수하를 마주했다. 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짜증스러운 얼굴의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는 장면을 본 순간 밀려온 것은 후회였다. 역시 이 관계는 내 욕심으로 가능한 관계가 아니다. 잘 지내던 모두를 흩트려 놓기 십상인 거였다. 나는 빠르게 장우진의 품에서 벗어났다.

‘역시 안 될 것 같아.’

‘아, 지헌아.’

‘미안해. 내가 경솔했…….’

하지만 내 말은 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장우진이 돌연 내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댄 탓이었다. 당황스러움에 뻣뻣하게 굳은 내 목을 살짝 감싼 장우진은 짧게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아 버리고는 금세 떨어졌다. 놀란 내 얼굴이 분명 무척이나 얼빵하게 변했을 테였다.

‘뭐, 아…….’

‘번복 못 해. 안 싸울게. 화 안 나. 눈치 보게 안 할게. 어? 강수하. 무슨 말이라도 해 봐.’

‘……미안해. 안 그럴게.’

어쩐지 축 처진 강수하였다.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입만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지헌아.’

‘응?’

‘한 잔 더 할까?’

당황한 얼굴의 내게 김준이 다가와 술잔을 내밀었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더 정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아, 준아. 잠깐.’

‘응. 싫어. 한잔해. 생각 깊게 하지 마. 원래 뭐든 깊게 생각하면 안 좋아.’

‘…….’

김준은 내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내 손에 기어이 술잔을 쥐여 주고 잔끼리 맞부딪쳤다. 능청스럽게 웃는 탓에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고 그 잔을 마셨다. 알싸한 알코올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자동으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 잔 더?’

씩 웃는 김준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게 마지막 기억인 것 같다. 그 이후로 얼마나 술을 퍼부어 마셨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눈을 뜬 지금.

나는 냉수를 마시며 밀려오는 기억에 혹시나 실수를 한 건 없는지 되짚어 보고 있었다. 다행히 실수는 안 한 것 같은데. 그래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다 같이 진짜 사귀는 건가? 쿵쿵쿵 아침부터 또 심장이 뛰어 오기 시작했다.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 심장 박동이었다.

“일찍 일어났네.”

다시 한번 컵에 냉수를 받던 그때, 등 뒤에서 강수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일어났는지 아침임에도 부스스했던 나와는 전혀 다르게 말끔한 얼굴이었다.

“아, 일어났어?”

“응. 속 괜찮아?”

“어, 너는?”

“나도 괜찮아.”

강수하도 어제 꽤 많이 마셨던 것 같은데. 무척이나 멀쩡하게 일어난 걸 보니 주량이 엄청난가 보다 싶었다.

강수하는 딱히 물을 마시지도 뭔가를 찾는 기색도 없이 식탁에 기대어 섰다. 덕분에 나도 컵을 손에 쥔 채로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방금까지 어제의 기억을 곱씹어 보고 있었으니 어색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득 강수하가 내게 다가왔다.

“왜?”

하지만 강수하는 무심한 얼굴이었다. 외려 민망해하고 있는 내가 이상해 보였다.

“아, 아니야.”

“아니긴.”

그러면서 다 안다는 듯 피식, 하고 웃었다.

“민망해할 것도 미안해할 것도 없어.”

“…….”

“우리가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니까, 괜찮아.”

“…….”

“응?”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말 이게 괜찮은 게 맞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제처럼 부정을 하지 않는 것은 결국은 내 욕심이겠지. 정말 괜찮지 않을까, 하는 큰 욕심.

“아, 속 쓰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발을 끄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쳐다보니 머리에 까치집이 제대로 생긴 김준이 서 있었다. 제 머리를 꾹꾹 누르면서 이쪽으로 걸어온 김준이 내 머리카락을 한번 쓰다듬고는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는 찬물을 따라서 벌컥벌컥 마셨다.

“살 것 같다.”

그러고는 얼굴을 도리질 쳤다. 김준이 퉁퉁 부은 눈을 하고 강수하와 나를 한 번씩 의아하게 번갈아 봤다.

“뭐 해?”

“이야기.”

“으흠.”

김준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컵을 내려놓더니 내게 다가와 나를 그대로 품에 안았다. 갑작스레 안긴 내가 살짝 버둥거리니 김준이 품에서 나를 놓으며 내 머리카락을 다시 한번 쓸었다.

“아침 인사.”

그리고 미련 없이 부엌에서 나가 소파에 드러누웠다. 뭐지? 스쳐 지나간 상황에 벙벙한 것은 나였다. 강수하가 헛웃음을 쳤다.

“잠이 덜 깼네.”

그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덕분에 심각했던 분위기의 흐름이 뚝 끊겼다. 강수하가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어……?”

순간이었다. 강수하는 내게 다가와 내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가 떨어졌다. 아주 잠깐 닿았다 떨어진 그 입술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강수하는 웃는 얼굴이었다.

“나도 아침 인사.”

능청스러운 말이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가끔은 가볍게 생각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워.”

“아, 어…….”

“어차피 네가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도 나한테서 나오는 답은 똑같을 테니까.”

곧은 강수하의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도 될 만큼 나는 네가 좋으니까.”

또다시 배시시 웃는 얼굴을 나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응?”

“……응.”

결국 내 입에서는 긍정의 말이 흘러나왔다. 모르겠다, 이제 정말 모르겠다.

***

“이유한.”

“어. 지헌아! 왔어?”

일요일. 이유한의 병실이었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이유한이 나를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어머님은?”

“아, 잠깐 집에 가셨어. 난 괜찮은데 계속 있는 것도 미안해서 내가 보냈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제로 이유한은 3년 동안이나 누워 있었던 사람으로는 생각되지도 않을 만큼 멀쩡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왜 병원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퇴원은 안 한대?”

“아마 곧 할 것 같아. 이번 주에는.”

“다행이네.”

이유한은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난 듯 보였다. 회복 속도가 빠른 편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연락 없기에 뭐 하나 했는데……. 나한테 오고 있었구나.”

“아. 핸드폰 못 봤어.”

나는 그제야 주머니 깊숙한 곳에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뭐 하고 있냐는 이유한의 톡이 보이기에 민망하게 웃었다.

“괜찮아. 오느라 그런 건데 뭐.”

“응. 밥은 먹었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냉장고에 있는 음료를 꺼내 먹기 위함이었다. 내 자연스러운 행동에 이유한이 푸흐흐 웃었다.

“응. 항상 12시에 나오니까.”

“병원 밥 맛 없지.”

“응. 사실 얼마 전에는 햄버거가 먹고 싶었는데 절대 안 된대. 아직 환자라면서. 다른 환자들은 다 잘만 먹더구만.”

뾰로퉁한 얼굴로 이유한이 툴툴거렸다. 나는 웃으며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너도 먹을래?’ 하는 물음에 이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주스를 들고 다시 이유한의 옆자리에 털썩 소리를 내며 앉았다.

“나중에 사 올게.”

“괜찮아. 퇴원하고 같이 가서 먹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스를 열어 한 모금 들이켰다. 괜히 입이 바짝 말랐다.

“지헌아.”

“응?”

“너 나한테 할 말 있구나.”

그 미묘한 분위기를 이유한은 바로 알아챘다. 눈치는 엄청 빨라 가지고. 나는 마른입을 축였다. 어제의 일을 이유한에게 말해야 했다. 내가 좋다고 말했던, 내가 하는 모든 것이 괜찮다던 이유한에게. 나는 숨을 깊게 내어 쉬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이유한의 눈을 마주했다.

“응. 할 말 있어.”

“뭔데?”

“나 사귀기로 했어.”

무심결에 손톱을 부딪쳤는지 딱딱 소리가 났다. 이유한이 그 손가락 사이에 제 손을 밀어 넣었다. 그게 퍽 자연스러워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뻥긋거렸다.

“누구랑?”

이유한이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어, 그게…….”

“걔네들하고 다 같이 사귀기로 한 거야?”

장난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전혀 가능성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투는 아니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예상은 했었지만…….”

“미안해. 진짜 미안해. 이게 내가 이렇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다급한 투로 변명하는 내 머리를 이유한이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덕분에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나를 대신해 이유한이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했어.”

“…….”

“근데 걔들도 대단하네.”

“미안해.”

“아냐. 나는 나 같은 애들이나 가능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걔네들도 그걸 수긍했다는 게 그냥 좀 신기해서.”

나 같은 애들이 어떤 것을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어 의아했지만 차마 되묻지는 못했다. 그런 나를 보며 이유한이 한숨 같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러더니 말간 얼굴로 내게 물었다. 말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 내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니 다시 한번 이유한이 재차 묻는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왜 누구 하나 내게 화를 내지 않는지, 왜 다들 내 결정을 기다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글쎄. 나는 너랑 되게 잘 만날 자신 있는데.”

장난스러운 얼굴이었다. 어제 집으로 돌아와 고민했었다. 어장 관리라는 것도 없어졌고 호감도 시스템도 없어졌다. 게임의 오류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었다. 근데 그렇다면 왜 모두가 내게 보이는 마음은 변화가 없는 걸까.

내가 이 게임에 들어온 플레이어라서 빠져들었던 마음이지 않았나?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을 고민해 봐도 내가 내릴 수 있는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모두가 좋다. 그러니까 그 이기적인 마음.

“진짜 괜찮겠어? 이건…….”

“나야 너만 괜찮다면 엄청 좋아.”

이유한은 웃었다. 평상시처럼 해맑게.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화를 내기는커녕 밝은 얼굴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 왜 연애하자고 막 말하려는데 한숨 쉬어.”

“미안. 머리가 복잡해서.”

징징대던 이유한이 내 얼굴을 잡아 왔다. 마주친 두 눈이 금세 예쁘게 휘었다.

“딴생각하지 말고.”

“……응.”

“좋아해, 지헌아.”

“…….”

“나랑도 연애해 줘.”

배시시 웃는 얼굴은 진심이 가득했다. 전혀 흔들림 없는 눈이었다.

“응?”

다시금 재촉하는 말투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단박에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사귀게 된 기념으로 산책 가자.”

“어?”

이유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덕분에 나도 어영부영 그를 따라 일어섰다. 나는 내 손을 잡고 병실 밖으로 나서는 이유한을 가만히 따라나섰다.

“아, 나 이 손 지금 계속 잡고 있어도 되는 거 맞지?”

확인 사살을 하듯 이유한이 한 번 더 물었다. 그 말을 묻고 싶은 것은 되레 내 쪽이었지만 이유한이 먼저 물은 탓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끄덕이자마자 이유한이 내 손을 깍지 껴서 잡아끌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이 앞에 가면 큰 나무가 하나 있는데 그 밑에 벤치가 엄청 시원해.”

“아, 진짜?”

“응. 거기 가자.”

조금은 들뜬 듯한 얼굴로 이유한이 걸음을 빨리했다. 나는 별말 없이 이유한을 따랐다. 잡고 있는 손이 어색했다. 현실이었다면 남자들끼리 이렇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했을 법도 한데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왠지 오묘한 기분이 들며 수진 씨가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굳이 지금 생각할 필요 없는 이야기였다.

“어, 나무 진짜 크다.”

빠른 걸음으로 병원 밖으로 나를 끌어온 이유한이 벤치에 앉았다. 나도 그 옆에 앉았다. 커다란 나무 하나가 그늘을 만들어 시원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지헌이 손 엄청 따뜻해.”

“덥지 않아?”

“아니? 손은 추운데.”

이유한이 능청스레 대답하며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나는 별말 없이 그 손을 맞잡았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그나저나 뭐라고 설명을 하지.”

“응?”

“걔네들이야 학교 다니면서 친해졌지만, 나는 걔네들이 보기에 몇 번 보지도 못한 사람일 텐데.”

사실 설명할 말이 없었다. 이유한이 귀신일 때부터 봤다고 말할 수도 없고. 첫눈에 반했다고 해야 되나? 으, 내가 생각해도 진짜 싫다.

“아니다. 생각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네가? 어떻게?”

“잘. 내가 잘 이야기해 볼게.”

어째선지 갑자기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이유한이 고개를 까딱였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얼굴로 바라보니 녀석이 낮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린다.

“내가 다 생각이 있어요.”

도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 건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내 생각만 해. 응?”

이유한은 그 틈을 타 금세 얼굴을 들이밀었다.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이 얼굴에 무척 약했다. 결국 나는 이유한의 말에 수긍해 버리고 말았다.

이유한은 복잡한 내 머리통을 한번 쓰다듬더니 웃으며 주위를 살폈다. 그게 언뜻 보기에는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아 나도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데……?”

“응. 아무도 없네.”

이유한이 해맑게 웃으며 내 양 볼에 손을 올렸다. 어, 할 새도 없이 이유한이 얼굴을 가까이했다. 쪽, 쪽 끊어 가며 이유한이 입술에 뽀뽀했다. 잠깐씩 닿았다 떨어졌다를 몇 차례나 반복하고 있었다. 곧 녀석이 웃으면서 다시 멀어졌다.

“어…….”

“지금 되게 바보 같아. 네 표정.”

이유한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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