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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육각관계 (5/36)

3장. 육각관계

“우진아.”

“한지헌?”

아마도 점심시간이 끝나기 20분 정도 남았을 무렵이었다. 피곤한 눈을 꾹꾹 누르며 옥상으로 올라온 나는 예상대로 닫힌 옥상 문 앞에서 복잡한 머릿속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장우진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어떻게 알고 올라왔어?”

내 물음엔 대답도 안 하고 제 묻고 싶은 것만 묻는 장우진에 나는 헛웃음을 쳤다. 그래,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냥 너 여기 있을 것 같았어.”

장우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거짓말. 그냥 옥상 왔다가 얻어걸린 거 아니고?”

“아닌데.”

나는 능청스레 대답했다. 하지만 장우진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외면했다. 장우진은 모르겠지만 녀석과 나는 똑같은 생각에 머리가 복잡할 터였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유한 말이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어제 병원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라진 이유한, 어머니의 비명 소리. 뒤이어 다급하게 뛰어 들어온 의사와 간호사 선생님들, 풀려 버린 다리에 내게 기대던 어머니,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까지

그 아찔했던 기억에 갑자기 머리가 핑핑 돌아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장우진이 물었다. 나는 가만히 장우진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마 너랑 똑같은 생각. 하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낼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장우진이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는 너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데?”

“나?”

“응. 나 무슨 일 있어요, 하고 얼굴에 쓰여 있는데.”

참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주 잠깐 침묵이 흘렀다. 장우진은 할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 달싹이는 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말했던 그 형 말야. 그, 양호실에서 말했었던…….”

한참 후에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장우진이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제 연락받았어. 깨어났다고.”

“아, 진짜?”

나는 어색하게 장우진의 말에 대답했다.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척하는 것도 영 께름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의식이 돌아왔고 반응도 있다고 그러더라고.”

“응.”

“근데 눈을 뜨질 않는대. ……오래 누워 있어서 바로 눈을 뜰 수 없는 게 맞는 건 아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서. 그래서 그냥 생각 좀 하다 보니까…….”

“…….”

“여기 있네, 내가.”

무심한 척 말을 끝낸 장우진이 머쓱하게 웃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장우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사실 나는 어제 꽤 오랜 시간 어머니와 이유한의 곁에 있었다.

몸 안으로 들어갔으니까 곧 깨어나겠지, 바로 눈을 뜨겠지 하고 처음에는 기대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이유한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래서 불안했다. 어머니는 나를 다독이며 반응을 보였으니 곧 깨어날 거라 젖은 얼굴로 웃어 보였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정작 내가 보고 만지고 이야기하던 이유한은 내 눈앞에서 사라졌으니까.

“불안해하지 마. 곧 깨어나시겠지.”

장우진에게 하는 말인지, 내게 하는 말인지 분간도 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런 내 말에 장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장우진이 나를 빤히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있었던 일을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던 내가 문득 그 빤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왜?”

“그냥.”

내가 너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조금 이상해 보였을까? 장우진의 입장에서는 나와 이유한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일 텐데. 그 빤한 시선에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급하게 머릿속 복잡한 생각을 털어 내며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너무 뚫어질 듯이 보는 거 아니야? 나 너무 좋아하지 마.”

부러 능청스럽게 상황을 모면하려 꺼낸 말이었다. 덕분에 장우진의 얼굴이 구겨졌다.

“뭐라는 거야.”

“당황하기는. 점심시간 곧 끝나겠다. 내려가자.”

“……어.”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서 또 내려가자니 고분고분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장우진을 보며 나는 녀석 모르게 웃음 지었다. 그나저나 이유한이 빨리 눈을 떠야 할 텐데. 그래야 장우진도 더 이상 걱정 안 할 텐데. 그리고 나도…….

“한지헌.”

막 계단을 내려가려 할 때 등 뒤에서 장우진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응.”

“오늘 병원에 가 볼까 해.”

“그래?”

“……같이 갈래?”

어색한 얼굴. 나는 그 말에 갈등했다. 가고 싶긴 한데 어머니가 걸렸다. 어머니는 내 얼굴을 아는데 인사를 나누면 장우진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어제 당황해서 장우진 친구라고 핑계를 댔다. 나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안해. 다음에 같이 가자. 오늘은 집에……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지.”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장우진만큼이나 나 또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별수 없는 일이었다.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만큼.

***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침대 위로 슬라이딩했다. 잠을 자지 못했기에 눈을 감자마자 바로 잠이 들 것 같았다.

교복조차 갈아입지 못하고 침대 위에서 두 눈만 깜빡거렸다.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유한은 괜찮을까? 언제쯤 깨어날까? 깨어나긴 하는 거겠지? 이틀 사이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이었다.

분명히 깨어날 거라 믿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 불안한 마음이 피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주머니를 뒤적였다. 안에서 꺼낸 핸드폰에서 장우진의 이름을 찾았다. 장우진은 병원에 잘 도착했을까. 이유한을 봤을까. 궁금함에 애가 달았다.

“후…….”

결국 한숨을 내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확인만 하자. 확인만……. 뚜르르, 하는 무미건조한 연결음이 들려왔다. 세 번, 네 번 그 건조한 소리가 지나갈 때쯤.

-여보세요.

장우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우진아……. 어, 병원은 잘 갔어?”

-응. 왜. 걱정했어?

“걱정은 무슨…….”

조금은 밝은 기색을 띠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묘한 기대감이 휘몰아쳤다.

“그, 형은 괜찮으셔? 어때?”

-지헌아.

“응?”

-형 깨어났어.

깨어났다고? 나는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깨어났다고?”

-어. 깨어났어. 눈 뜨는 거 확인하고 나오는 길이야.

“와, 와.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응. 다행이지.

마음이 벅차올랐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 소리가 내 귓가에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맴돌았다.

“정말 잘됐다. 진짜로.”

-……고마워.

방방 뛰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뱉은 말에 뜬금없는 말이 들려왔다.

“네가 나한테 고마울 게 뭐 있어.”

-너 오고 나서는 좋은 일만 있으니까.

장우진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었다고, 어쩐지 부끄러워지는 말이라 나는 괜히 얼굴에 손부채질까지 해야 했다.

“답지 않게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러게. 내가 지금 기분이 좀 좋아서.

그 민망함에 부러 툴툴대며 뱉은 말에도 장우진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그 목소리에 나도 자꾸만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

-여기서 뭘 얼마나 더 잘해 줘.

“……양심도 없지.”

하하하, 웃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

“아, 졸려.”

피곤한 눈을 벅벅 문지르며 교문을 가로질러 걸었다. 또 잠을 못 잤다. 이유한이 깨어났다는 말을 들어서 기뻤던 것도 잠시, 장우진과 전화를 끊고 나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유한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니까 그런 생각. 아니, 왜 드라마든 영화든 그런 데서 보면 영혼이었다가 몸으로 들어가면 영혼이었을 때는 기억을 못 한다든가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나.

이게 실제 현실이라면 뭐, 현실이라면 애초에 있을 법한 이야기도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영화나 드라마에 비교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은 게임이었다.

만들어진, 누군가에 의해 설정된 세상. 그렇다면 이유한이 영혼이었을 때의 기억을 전부다 잃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이 게임을 만든 사람이 그런 ‘설정’이라는 걸 했다면.

“……기분 왜 이래.”

문득 미친 그 생각에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뿐인데 마음 한구석이 허해졌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허할 것도 많다.

잠을 한숨도 제대로 못 잔 덕에 일찌감치 나온 학교는 더없이 한산했다. 아마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운동장을 뛰고 있는 저 남자와 나만 학교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무심코 아까부터 봤던 남자를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렸다. 근데 묘하게 익숙한 것 같은데…….

“김준?”

나는 걷던 걸음을 급하게 멈췄다. 큰 키에 멀리서 봐도 다부져 보이는 체격, 그 무엇보다 교복도 체육복도 아닌 야구부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남자.

복잡한 머릿속에 스치듯 보느라 알아보지 못했었던 모양이었다. 다시금 살펴본 남자는 확실히 김준이었다. 그제야 드는 반가운 마음에 나는 운동장으로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반갑게 손이라도 흔들고 싶었지만,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는 김준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스탠드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보고 있는 것도 모르는 듯 김준은 지치지도 않고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몇 바퀴나 도는지 세어 볼까, 김준은 멀리서 봐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뛰고 있었다.

“한지헌?”

아마 여덟 바퀴 정도 세었을 때쯤, 갑자기 김준이 자리에서 멈추더니 휙 뒤돌았다. 그래도 꽤 떨어져 있는 거리였는데 놀란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당황한 게 여실히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나는 킥킥거리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뭐야, 진짜 지헌이네.”

“응. 놀랐어?”

“놀랐지. 부르지, 왜 그러고 보고만 있었어.”

“방해하기 싫어서.”

어느새 나를 향해 달려온 김준이 밝게 웃었다. 신기한 건 꽤 멀리서 뛰어왔는데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거였다. 나 같았으면 제대로 말도 못 할 텐데.

“아침부터 왜 이렇게 열심히 운동장을 돌고 있어.”

“아, 시합 얼마 안 남았거든. 그래서 체력 관리 차원에서. 요즘 운동을 잘 못 해 가지고…….”

“시합 얼마 안 남았어?”

김준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3주?”

“진짜 얼마 안 남았네.”

“응. 그래서 혼자 운동장도 뛰고 단체 훈련도 참여하고 있어. 엄청 힘들어, 요즘.”

힘들다고 말하는 것치고는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덕분에 나는 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일교차가 심해서 아침은 좀 쌀쌀한데도 김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갑자기 한창 하고 있던 운동을 방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저 뛰어. 방해 안 할게.”

부러 씩 웃으며 김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잠시 동그랗게 눈을 뜨던 김준이 웃으면서 제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보고만 있어도 되게 신경 쓰일 것 같은데.”

“어, 그래? 그럼 나 들어갈까?”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장난을 치려고 했던 건지 그 말에 내가 교실 쪽으로 손가락질하자 김준은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다급하기까지 한 손짓이라 나는 어이없이 웃었다.

“오늘 운동 그만하려고 했어. 안 그래도.”

“한참 뛰고 있던 것 같은데.”

“아니야. 그만하려고 했어. 진짜.”

거짓말. 아마 나를 못 봤다면 적어도 열 바퀴는 더 돌았을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김준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얼른 가서 뛰어. 구경하고 있을게.”

“아, 안 넘어가네.”

“얼른 가.”

“매정하다.”

불퉁해진 얼굴에 입이 비죽거렸다. 그게 귀여워 보이면 내가 미친 건지, 네가 쓸데없이 잘생겼는지. 어렵게 생각을 비우며 나는 손을 흔들었다.

“얼른 가.”

“나 그럼 딱 두 바퀴만 돌고 올 테니까…….”

“응.”

“갔다 오면 나랑 놀아. 알았지?”

더 돌아야 할 것 같은데, 뻘한 생각이 들었지만 더 돌라고 하면 정말로 삐져 버릴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한껏 밝아진 얼굴로 김준이 뒷걸음질 쳤다. 그러더니 뒤돌아 운동장을 돌기 시작했다.

나는 웃음기 섞인 얼굴로 그런 김준을 바라봤다. 멀리서 봐도 빛이 나네, 우스운 생각도 들었다.

두 바퀴는 생각보다 금방이었다. 운동장이 좁은 건 아닌 것 같으니 아마 김준이 빠른 거겠지. 생각보다 너무 빨리 돌아온 김준에 내가 입을 벌렸다.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왜 이렇게 빨라?”

“하하. 빨리 뛰고 빨리 놀려고.”

밝은 얼굴을 한 김준이 단번에 스탠드를 껑충 뛰어올라 내 옆자리에 앉았다. 땀 냄새가 날 법도 한데 이상하게 앉자마자 향기가 났다. 콩깍지인가…….

“근데 학교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잠이 안 와서.”

“흐음. 어제도 엄청 피곤해 보이던데, 오늘도 그러네. 무슨 일 있어?”

금세 얼굴에 걱정이 감돌았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김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아무 일도 없어.”

분명히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고민한 것뿐이지. 따지고 보면 좋은 일이었다. 어쨌든 이유한은 이제 영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된 거니까.

“아무 일도 없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아무 일도 없어. 그 덕분에 너 운동하는 것도 보고 좋은 구경했지, 뭐.”

“뭐야, 내가 원숭이야?”

불퉁한 척 내뱉은 말치곤 웃음기 서린 목소리였다.

“나 시합할 때 응원하러 올 거지?”

“당연하지.”

“엄청 열심히 해야겠다.”

새삼 다짐하듯 하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선선한 바람이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 우리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큰일 났다.”

“응?”

뜬금없는 소리에 내가 김준을 바라봤다. 김준은 별다른 말없이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런 김준의 이마에 땀 때문인지 머리카락이 붙어 착 가라앉아 있었다. 거슬릴 것 같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손을 그 얼굴로 가져갔다. 쓸어 넘겨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채 얼굴에 닿기도 전에 김준이 내 손을 움켜쥐었다.

“어?”

“하지 마.”

김준의 단호한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향해 가던 손이 갈 곳을 잃고 김준의 손에 잡혀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김준은 놓아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또 침묵이 흘렀다. 김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심장 터질 것 같으니까.”

마주한 두 눈이 일렁거렸다. 저절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뭐 하냐?”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그것은 순간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렸기 때문이었다. 움찔 몸을 떤 내가 급하게 움직였다. 김준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수하야.”

목소리의 주인은 강수하였다. 벌렁벌렁 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나는 어느 정도 괜찮아지자 바로 반갑게 웃으며 강수하를 반겼다. 김준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일찍 왔네.”

“어. 뭐 해?”

“아, 학교 일찍 왔는데 준이가 운동하고 있더라고. 그래서 구경하고 있었어.”

자꾸만 빨라지는 말에 김준이 킥킥거리고 웃었다. 누가 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잘 느끼지 못했는지 강수하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들어가라. 나도 곧 단체 훈련 있어서 가 봐야 하니까.”

“어. 그래.”

“응. 운동 열심히 해.”

“응, 점심시간에 봐.”

김준이 손을 흔들었고 나와 강수하는 고개를 끄덕이곤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이른 시간이었지만 교문을 통과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건물 안으로 들어와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유독 지금은 더 없는 것 같아 꺼낸 말이었다. 앞만 보고 걷던 강수하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아, 그냥…….”

그제야 저도 제가 너무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냥?”

“어, 그냥. 기분이 좀.”

“응?”

“아냐, 아무것도. 가자.”

제 눈을 굴리며 어정쩡하게 말을 하던 강수하가 이내 말하는 것을 포기한 듯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무슨 말하려고 했는데? 응?”

“…….”

“아, 뭔데. 궁금하게 해 놓고 말 안 하는 게 어디 있어. 응?”

누가 봐도 말을 하려다가 다문 게 훤히 보이는 강수하에게 나는 대답을 보챘다. 허, 하는 짧은 헛웃음이 들렸다. 결국 거의 교실 근처까지 다다른 마지막 계단 위에서 강수하는 걸음을 멈췄다.

“말해도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하려고 했는지 궁금하다니까 오히려 내게 물어보는 강수하가 더 이상하게 보였다.

“김준이랑 둘이서 그러고 있는 거 보니까 짜증은 나는데.”

“……어?”

“근데 딱히 짜증 낼 자격은 없는 것 같아서 좀 삭이고 있었어.”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강수하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부드럽게 내게 말했다. 하지만 그 뱉어 낸 말이 내게는 아주 갑작스러웠다는 게 문제였지만.

……질투?

두 눈만 도르르 굴리고 있던 내 머릿속에서 내린 결론은 단 하나였다. 그 외에는 생각할 수 있을 만한 것도 없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가만히 나를 보던 강수하가 오히려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건 아니고, 네가 물어봤잖아. 무슨 생각하는지. 말해도 된다면서.”

“아…….”

“들어가자.”

어깨를 으쓱하는 강수하는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 보였다. 얼떨떨하게 강수하를 따라서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꾸만 강수하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른 시간이다 보니 한산한 교실 안을 걸어 들어왔을 때 이 시간에 교실에 있을 리 없던 김현이 책상 위에 퍼질러 누워 있는 게 보였다.

“현아, 벌써 왔어?”

인기척을 들은 김현이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켜 손을 흔들었다. 비몽사몽한 눈이 퉁퉁 부어 거의 떠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와서 여기서 자고 있어.”

“김준이 하암, 아침에 훈련한다고…… 그래서 같이 나왔어.”

“좀 더 자고 나오지, 뭐 하러.”

“걔 나가면 나 못 일어나. 완전 지각해.”

눈을 부비적거리며 김현이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내 쪽을 향한 얼굴에 그새 다시 졸음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좀 자.”

“응.”

김현이 바로 눈을 감았다. 무척이나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금세 새근새근한 고른 숨소리를 내뱉는 김현을 멍청하게 보고 있자니 나도 잠시 잊었던 졸음이 밀려들었다.

“너야말로 좀 자. 또 못 잔 얼굴인데.”

“그럴까?”

“응. 안 좋은 일 있어? 계속 못 자는 것 같네.”

“아냐. 잠이 좀 안 왔어. 조금만 잘게.”

“그래. 깨워 줄게.”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김현처럼 책상에 엎드렸다. 하지만 자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김현이 이쪽을 보고 있고 왼쪽으로 돌리면 강수하가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어떻게 자야 하지, 생각하다 팔을 대고 얼굴을 정면으로 묻었다.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는 강수하의 손길이 느껴졌다. 나를 좋아하고 있다. 얼마 전 봤던 호감도 세 개. 마음을 눈치챈다는 도움말. 그 말의 의미를 이제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색한 마음과 몽글몽글한 마음이 동시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

별다른 사건 없는 일주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유한이 눈을 뜬 날로부터 벌써 일주일이 지나간 참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사실 단 한 번도 이유한을 찾아가지 못했다. 병원 먼발치에서 들어갈까 말까 고민했던 적도 있지만 결국 발걸음을 돌려 버린 게 몇 차례였다.

그러니까 왜 그랬냐, 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이유한의 입에서 ‘누구세요?’라는 말이 나올까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 있는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직접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지나친 망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혹시 하는 마음이 발목을 붙잡았다.

“밥 먹으러 가자.”

4교시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선생님은 바로 교실을 빠져나갔고, 기다렸다는 듯이 김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이렇게 늦었어?”

급하게 걸음을 옮겨 도착한 식당 앞에서 우리는 한참을 기다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늦게 도착한 김준 때문이었다. 김준이 식당 앞에 나타나자마자 김현이 배가 고프다며 징징거렸다. 미안한 기색을 띤 김준이 민망하게 웃었다.

“씻었어?”

“아, 응. 운동했거든.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김준이 제 머리카락을 털어 냈다. 정말 방금 전 씻고 나왔는지 바디 클렌저의 향이 강하게 났다.

우리는 바로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배가 고팠던 탓인지 유난히 김현의 발걸음이 빨랐다. 그와 상반되게 나는 느릿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나 그랬듯 어김없이 식당 안에 있던 학생들이 힐긋거리며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하고 그 시선을 신경 쓰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매번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이쪽을 보는데 어떻게 아무도 신경을 안 쓸 수 있을까. 참 무신경하다 싶었다.

“무슨 생각해?”

“아, 별생각 안 했어.”

김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초롱초롱한 시선들은 한 번을 못 느끼면서 내가 딴생각하고 있는 건 금방도 알아채는구나, 새삼 마음이 간지러웠다.

“응? 어떤 생각했는데? 응?”

앞장서 걷고 있던 김현이 또 그 소리를 들었는지 단박에 나를 향해 걸어왔다. 애교 섞인 목소리가 귀여워 내가 푸흐흐, 웃으니 옆에 와서 팔을 붙잡고 흔들어 댔다.

“그냥 너네 인기 많다 생각하고 있었어.”

대답해 주지 않으면 계속 옆에 붙어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에둘러 대답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었는지 김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인기? 나?”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게 비단 김현뿐 아니라 다른 세 사람마저도 고개를 까딱이며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지어 버려 나는 말할 의욕을 잃어 버렸다.

“됐다.”

“왜? 누가 나 좋아해?”

……아마 이 식당 안에 누군가 한 명 이상은 좋아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내가 설명해 봐야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테니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나만 보느라고 주위는 안 보는 구나.”

대신에 조금은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그저 이 이야기를 넘어가기 위해 한 말이었다. 설마 그 말에 김현이 얼굴을 붉힐 줄은 난 정말 꿈에도 몰랐다.

“어? 어? 아, 아, 아닌데?”

너무나 당황한 것이 티가 나게 말을 더듬어 가며 내게 한 발자국 떨어지는 김현 때문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내 쪽이었다.

“어…….”

“지, 진짜 아냐!”

손까지 흔들며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는 김현을 보고 있는데 어째선지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아니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왜 맞다고 대답하는 것 같지.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 장난이야. 얼른 식판 들어.”

“응? 응. 아, 진짜. 그, 어휴.”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일단 밥을 받아야 할 차례가 됐기에 김현은 식판을 들고 앞으로 섰다. 뒤돌아선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모두가 각자 식판에 밥을 받아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도 김현은 시무룩해져 있었다. 괜한 말을 한 탓에 분위기를 좀 이상하게 만든 것 같아 내가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다행히도 조용히 있던 김준이 입을 열었다.

“나 내일부터는 같이 점심 못 먹어.”

“왜?”

“합숙 훈련 들어갈 거야. 시합이 2주 남아서.”

아주 다행인 일이었다. 그 말에 대화의 중심이 김준의 시합과 훈련으로 넘어갔으니까 말이다. 나는 속으로 김준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나 속삭였다.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힘들겠다.”

“괜찮아. 이기려면 열심히 해야지.”

“근데 합숙 들어가면 김현 맨날 지각하겠네.”

문득 강수하가 말했다. 그러자 김현이 바로 발끈해서는 큰소리를 쳤다.

“지각 안 하거든!”

하지만 나도 솔직히 강수하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첫날, 김준을 따라 일찍 나온 것이 힘들었는지 앞으로는 김준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혼자 나와야겠다고 했던 김현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 김현은 지각을 했다. 데리고 나오는 사람이 없으니 늦잠을 잤다면서.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어김없이 지각을 한 김현은 그날 이후부터는 김준이 나오는 시간에 억지로 끌려 나와야만 했다. 그 며칠간의 행적으로 봤을 때 김준이 아예 합숙 훈련을 가 버린다면, 김현의 지각은 아주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현아. 차라리 학교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아.”

“지헌아 너까지 그러지 마……. 나 지각 안 한다니까, 진짜.”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잖아.”

“아, 그건…….”

김현이 금세 울상이 됐다.

“내기를 걸어. 나는 지각한다에 걸 테니까.”

장우진이 심드렁하게 젓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내기? 근데 또 그게 나쁘진 않은 제안 같아서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기하자. 뭐 걸 만한 거 있어?”

“내기?”

지각을 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김현이 막상 뭘 걸려고 하니 자신이 없는지 입을 비죽거렸다. 나는 어이없이 웃었다.

“아, 그거 걸어. 그거.”

“뭐?”

“지헌이가 준 소원권.”

김준의 말에 순간 모두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갑자기 침묵이 찾아들었다.

“아, 그걸 왜 걸어. 싫어.”

“지각 안 하면 되잖아.”

“그래, 원래 내기는 좀 뺏기기 싫은 걸 걸어야 해.”

하지만 침묵은 잠시였다. 갑자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김준이 김현을 도발했다. 강수하와 장우진도 갑자기 흥미가 생긴 듯 둘을 예의 주시했다. 두 눈까지 반짝반짝거렸다. 그 사이에서 오로지 김현만 불퉁한 얼굴이었다. 김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걸 거야?”

“……걸기 싫은데.”

“그럼 다른 거 걸어도 돼.”

“…….”

굳이 걸기 싫은 걸 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김현이 결국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지각 절대 안 해.”

“그래. 부디.”

세 사람이 어이없이 웃었다. 김현은 사뭇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네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굳이 왜……? 나로서는 썩 이해할 수 없는 내기였다.

***

학교가 끝나고 여느 때와 똑같이 강수하와 김현을 먼저 집으로 보내고 교실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기다려 주겠다고 말했던 두 사람이지만, 오늘은 기사님이 좀 늦게 도착할 것 같았기에 먼저 보낸 참이었다.

“한지헌?”

멍하니 책상에 엎드려 속도 조절을 해 버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뜬금없이 장우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운 인기척에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어? 우진아, 아직 안 갔어?”

“어. 그러는 너는?”

“아, 난…… 아버지 기다리고 있었어.”

“데리러 오신다고 했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집에 가?”

“아……. 아니, 병원에.”

“어디 아파?”

병원 소리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에 장우진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 사랑 병원에. 형한테 가 볼까 해서.”

“아…….”

“회복 속도가 좋아서 이제 앉아서 이야기도 하거든. 오늘 어머니께서 잠깐 자리 비워야 한다고 하셔서.”

일주일이나 듣지 못한 새에 많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일어났구나, 다행이다.

“……한지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장우진이 나를 다시 한번 불렀다. 제 머리를 긁적이는 게 할 말이 있는 모양새라 나는 장우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왜?”

“같이 갈래?”

한참을 뜸 들이던 장우진이 내뱉은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도 자리를 비우셨다고 하고, 나도 한 번쯤은 이유한을 보러 가야 했다. 알고 있었다. 그저 용기가 안 났을 뿐이었다.

애써서 외면하고 있었다. 그냥 혼자 하는 걱정에 차마 찾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그런 생각. 나는 아주 잠깐 동안 고민했다. 이유한을 본다는 생각을 하니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그러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찾아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한 번은 봐야 한다면 장우진하고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누구냐고 물어보면 우진이 친구라고 하면 되니까.

우리는 곧장 학교에서 빠져나왔다. 나오기 직전 기사님께 전화를 걸어 오늘은 데리러 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하고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차를 타면 편하긴 하지만 어쩐지 이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했던 이유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음,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밝힌다면 모를까. 지금은 좀 껄끄러웠다.

“버스 처음 타?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장우진과 함께 학교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에 섰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이 전혀 없어서 버스를 타려고 하니 왠지 기분이 좀 이상했다. 그러니까 게임 속의 버스 정류장 노선표까지도 궁금하다고 할까. 현실하고 버스 노선은 비슷할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기 오고 나서는 처음 타지.”

무심결에 장우진의 말에 대답을 한 나는 순간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내가 뱉은 말을 되돌려 생각했다. 이상한 부분이 있는지 걱정된 탓이었다.

“아, 그렇겠네.”

다행히도 장우진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우진이 보기에 나는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장우진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의 의미가 달랐지만 그렇게 받아들여 다행이었다.

“15분 정도만 타고 가면 돼.”

“응. 저거 타면 되는 거야?”

이 게임에 들어와서 처음 타 보는 버스지만, 내가 한국에 들어와서 처음 타는 거라 오해한 장우진은 조금 친절해졌다.

버스 노선을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고 여기까지 가서 내릴 거라고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 주기까지 했다. 그게 장우진답지 않아서 웃음이 나오려는 걸 나는 정말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 내야 했다.

웃으면 바로 저 일말의 친절도 사라질 걸 그간의 경험으로 깨달은 탓이었다. 마침 저 멀리서 장우진이 설명해 준 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응. 타자.”

나는 그제야 주섬주섬 지갑을 뒤적거렸다. 어, 근데 나 버스 카드 같은 거 없는데. 현금, 현금이……. 아, 현금도……. 다가오는 버스를 아무 생각 없이 올라타다 당황한 나는 장우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올라타다 말고 멈춘 나를 기사님이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왜?”

“……나 버스비 없어.”

“참나.”

장우진이 어이없이 웃었다. 그에 창피해져 얼굴이 잔뜩 붉어졌지만 내 등을 미는 장우진 때문에 일단 버스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두 명이요.”

삑, 소리를 내고 장우진이 버스 카드를 가져다 댔다. 나는 그때까지도 왠지 뻘쭘한 마음에 버스 가운데 멍청하게 서 있었다.

“앉지, 뭘 그러고 서 있어.”

“어, 응.”

당연히 버스비가 있을 리가 없는데 진짜 나 멍청인가.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일단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뒤에서 두 번째,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한산한 버스 안에는 우리 둘, 그리고 기사님뿐이었다.

“그냥 들어가면 되지. 뭘 그렇게 바보같이 서 있어.”

“……당황하면 원래 다 그런 거거든.”

“그러세요.”

장우진이 킥킥거리고 웃었다. 열이 오른 얼굴이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아 손부채질까지 했지만, 열기는 여전했다. 나는 부러 불퉁하게 입을 열었다.

“버스비는 내가 내일 줄게.”

“됐어. 나중에 매점에서 뭐 하나 사 주면 되지.”

“……너무 적은 돈으로 많은 걸 받는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버스 안에 장우진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한참을 웃던 장우진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그러니까. 난 뭐가 이렇게 재밌지.”

하지만 그 웃는 얼굴은 내 한마디에 싹 사라져 버렸다. 그 표정 변화가 무척이나 빨라서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딱히 버스에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었기에 생각보다 빠르게 병원 근처에 도착했다. 버스가 정차하고 밖으로 나오니 따가운 햇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눈부셔.”

“곧 여름이라 그런가.”

장우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버스 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병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우리는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자연스레 6층을 누른 장우진이 벽에 기대어 섰다. 그냥 살짝 기대어 섰을 뿐인데도 같이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이 장우진을 힐끔거리는 게 보였다. 그 시선을 따라 나도 똑같이 장우진을 마주봤다. 참 잘났네. 새카만 머리카락이 유난스럽게 더 얼굴을 하얗게 보이도록 했다.

“왜.”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장우진이 나를 마주 봤다. 푸흐, 웃음이 흘러나왔다.

“쳐다보는 건 아주 귀신같이 알지.”

“누가 쳐다보면 다 금방 알지 않냐.”

지금 엘리베이터 같이 타고 있는 사람들 시선은 몰랐으면서.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은 목소리는 그냥 눌러 삼켰다. 아까 전 점심시간의 김현이 떠올랐다. 어쩐지 김현의 반응과 똑같은 반응이 나올 거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예상은 아니었다.

띵, 소리가 들리고 엘리베이터가 6층에 멈춰 섰다. 장우진이 먼저 내리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전에 이유한과 함께 온 이후로 처음 오는 것이었다. 심장이 다시 한번 쿵쿵 뛰기 시작했다. 나는 장우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느새 602호의 병실 앞에 다다라 있었다. 장우진이 말릴 새도 없이 병실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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