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형은 옆에 없었다.
정신없이 몸을 치대고 사정하면 수마와 같은 졸음이 밀려와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도 정신을 잃듯 잠에 빠져들었는데 눈을 떠 보면 나는 내 방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었고, 형은 언제나 곁에 없었다. 우리가 나눈 흔적은 내 방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멍한 기분으로 앉아 있다 일어나 샤워하고 교복을 갈아입었다.
가방을 챙겨 방문을 나섰다. 굳게 닫힌 형의 방문을 보니 어젯밤 늦은 귀가를 하고 우리를 찾았던 아버지의 형용이 떠올랐다.
오늘이 모의고사라 이 시험의 중요성을 잔소리하려고 이 층으로 올라온 것이었으리라.
소리를 들었으면 어떡하지…….
만약 그랬으면 아버지는 어떻게 했을까.
아들의 방에서 들리는 수상한 신음에 방문을 벌컥 열고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소리쳤을까.
아니면 자위라도 하는 거라 여기고 오히려 조용히 돌아섰을까.
아침을 먹으러 내려가는 길이 고통스러웠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일말의 두려움이 심장을 오그라트렸다. 쿵쿵거리고 뛰는 소리가 귓전에 들릴 정도였다.
“일어났구나. 안 그래도 깨우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는 윤 차장에게 인사했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나를 힐긋 쳐다보고 신문으로 시선을 내려 버렸다.
먼저 내려와 앉아 있던 형을 쳐다보지 않고 내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는 형처럼 말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들이 과묵함이 때로는 짜증스러웠다.
나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무슨 잔소리나 훈계라도 해 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받지 않으면 오늘 시험을 망칠 것만 같았다.
“오늘 모의고사 보는 날이에요.”
묵묵히 먹기만 하던 아버지가 내 말에 고개를 돌렸다. 형도 나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마침 식사를 마쳤는지 물을 들이켜고 목기침을 했다.
“그래, 오늘이지? 이번엔 아버지도 신경 써서 확인할 거다.”
아버지는 무심한 말투로 시험을 잘 봐야 한다고 나를 압박했다. 그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의 잔소리가 가슴이 무너져 내릴 만큼 반가웠다.
나는 그에게 들리지 않게 앓는 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네.”
조용히 식사만 하는 아버지를 살피느라 진이 다 빠져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형만큼은 안 되어도 엇비슷하게는 해야지. 형제인데.”
“너무 그러지 마세요. 가만 보면 은근히 잔소리 심해.”
아버지는 어젯밤 우리가 한 짓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동기와 비교하는 아버지의 무신경한 말에도, 늘 그렇듯이 내 편을 들어 주는 윤 차장의 말에도 싫은 기색 없이 네 네, 하고 대답했다.
아침 식사 중인 형을 돌아보았다. 다른 곳을 보고 있던 그의 잘생긴 눈이 내 시선을 느끼고 돌아섰다.
“준영이 잘 따라오고 있는 거지?”
아버지가 형에게 물었다. 나를 빤히 보던 눈길이 아버지를 향했다.
“너무 몰아붙이지 않으려고요.”
공부를 몰아붙이지 않겠다는 뜻인지, 우리의 관계를 몰아붙이지 않겠다는 뜻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어젯밤 형은 허벅지를 모아 그의 사정을 도우려던 내 몸짓을 거절했다. 공범이 아니라 혼자서만 가해자가 되겠다는 의미였다. 나에게는 최소한의 죄악감만을 주려고 그 나름대로는 마음을 쓰는 것이었다.
“준영이 너는 그저 형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네.”
아버지는 형이 공부를 봐주는 게 성적 상승으로 직결되는 길이라고 굳건하게 믿고 있었다.
형은 나를 안심시키지도 않았고, 아버지에게 부담 주지 말라는 뜻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형은 언제나처럼 길게 말하지 않았고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집을 나섰다.
형의 차에 올랐다. 아버지와 윤 차장이 주위에 없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운전석에 앉은 그가 안전띠를 끌어다 매고 시동을 걸었다.
“아버지 어제 못 들은 것 같지?”
“무슨…….”
그게 무슨 말이냐고 형이 나를 돌아보았다가 전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제……. 어젯밤에 우리 같이 있던 거.”
그냥 사실은 읊은 것뿐인데 무척 간지럽게 들렸다. 나는 그와 밀회라는 가진 양 말하고 있었다.
“못 들으셨겠지.”
“……형은 안 무서워?”
“…….”
“나는 무서워.”
무서워서 미칠 것 같아. 그냥 무서운 게 아니라 두려워서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오늘 아침만 해도 아버지의 평범한 잔소리를 기다리며 간담이 다 녹아내렸다. 긴장한 손끝이 지금도 저릿저릿했고, 오늘 보는 모의고사 걱정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 일 안 생겨.”
“…….”
“설사 생긴다고 해도 넌 걱정할 거 없어.”
“만약에 아시면……, 아버지가 아시면 어떻게 할 건데?”
“전부 내가 저지른 짓이야. 너하고는 상관없어.”
“어떻게 상관이 없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무조건 상관없다고, 걱정할 거 없다고 장담하는 그가 답답해 소리쳤다.
장담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형이 정말 상관없다고 여겨도 내게는 상관없는 문제가 아니었다.
“상관없어. 미친 건 나지, 네가 아니야. 증거도 있고.”
그가 미쳤다는 증거는 형의 벗은 몸에 가득했다.
그의 벗은 몸을 본다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도 그가 미쳤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서 괜찮다고? 그래서 무섭지 않다고?”
“그래, 안 무서워. 내가 무서워하는 건…….”
“…….”
“너야.”
교차로 신호에 걸려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앞을 바라보던 그의 눈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준영이 네가 제일 무서워.”
“…….”
적색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형이 액셀을 밟자 차가 앞으로 움직였다.
나는 안전띠를 움켜쥐고 그에게 들리지 않게 긴 숨을 내쉬었다.
현실 따위 개나 주라는 것처럼 말하는 형이 답답한 게 아니라 가슴이 떨리는 것이었다. 좋지 않은 쪽으로. 그래서는 안 되는 방향으로 떨려 왔다.
차가 어느덧 학교 근처에 도착했다. 형이 차를 길가에 세웠다. 공회전하는 차 안에서는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오늘 모의고사잖아. 그것만 신경 써. 넌 걱정할 거 아무것도 없어.”
형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내리지 않고 계속 앉아만 있는 나를 형은 다그치지 않았다.
“나 모의고사 못 보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 하지 말래도.”
“아버지 이번에는 진짜 그냥 안 넘어가실 것 같아.”
“공부하던 대로 하면 돼.”
“형이 봐줬는데도 성적 안 오르면……, 아버지가 그냥 학원에 다니라고 하면, 형이 봐줘도 소용없으니까, 아버지가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하시면, 그땐.”
아버지가 형이 나에게 할애하는 시간을 낭비라고 느끼게 된다면 즉각적으로 형의 일에나 집중하라고 할 게 틀림없었다.
그에게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그땐.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겠지.”
그의 말처럼 공부한답시고 방문을 잠그고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과 명분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일 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일부러 모의고사 망치려고?”
“…….”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나는 그런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빤히 보는 눈동자를 서둘러 피해 버렸다.
“그만두고 싶구나.”
대답하지 않자 형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함께 하는 공부가 아니라 밤마다 우리가 하는 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만둬야 한다. 당장 그만둬야 한다.
머리로는 그걸 너무 잘 아는데 마음이 그렇지가 않았다.
그 부정함을 형에게 들킬 것 같았다.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만두고 싶어.”
“…….”
“그만둬야 해.”
“일 년은 나한테 주기로 했잖아.”
“지금 그게 문제야?”
“나한테는 그게 제일 중요해.”
“……형이 자해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나는 당장 그만둘 거야. 당장.”
그 말은 형이 자해를 한다면 이 짓을 계속하겠다는 뜻이었다.
그의 가랑이 사이를 만지고 싶고, 손으로 느끼고 싶은 것은 잘못된 감정이다.
그와 밤에 침대 속에서 몸을 겹치고 서로의 체온을 더듬거리며 절정에 닿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었다. 당장 그만둬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일을 그만두게 될까 봐 염려하고 있었다. 그가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몸을 내보이고 다른 이를 안으며 더러운 욕구를 해결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형의 사소함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데 그의 모든 것을 누가 알게 되는 일은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임주호와 하던 짓을 다른 이와 하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 아팠다.
그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일 년은 주기로 했잖아. 그것만 지켜. 그 후에는 너까지 지옥으로 끌어들이지 않을 테니까.”
“일 년 동안 내가 몸 대 주면……, 자해도 안 할 거고, 몸 굴리고 다니는 짓도 안 할 거라는 거지?”
무언가를 꾹 참는 그의 목울대가 침을 삼키듯 울컥거렸다.
“그래. 네가 몸 대 주면.”
“……나한테 그런 짓 하면서 싸는 거, 어제 기분 좋았어?”
앞을 보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런 짓, 싸는 짓, 기분 좋은 짓, 그 모든 표현은 그를 자극하는 단어였다.
어젯밤 형의 몸을 만지고 싶지만 차마 손댈 수 없어 은밀히 허벅지를 붙이고 치댄 주제에 나는 그를 탓하고 있었다. 죄악감과 죄책감을 그의 탓으로 떠넘겼다. 열아홉은 자기혐오의 감정을 다루지 못하는 나이였다.
형이 자기의 몸을 학대한 것처럼, 나 역시 다른 방식으로 나와 그를 학대하고 있었다. 자해하는 형보다 내 쪽이 훨씬 더 저질이었다.
나는 저급한 인간이었다. 그와 같이 공부하는 지금의 상황을 망치게 될까 봐 걱정하고 있는 주제에, 나는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아 전전긍긍하며 그에게 화를 냈다.
그의 눈을 피해 가방을 챙겼다. 차 문고리를 열어 내리려는데 완강하게 나를 주시하던 그가 말했다.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오늘 시험에 집중해.”
“형 동생 형 마음대로 하니까 기분 좋았어?”
가방 고리를 움켜잡은 손등의 뼈가 하얗게 불거졌다.
“그만 내려.”
“기분 좋았냐고 묻잖아.”
사람들과 차로 번다한 거리로는 일말의 시선도 던지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았어.”
“…….”
“네가 날 그대로 죽여도 상관없을 만큼.”
“…….”
“좋았어.”
떠오른 햇살을 받는 그의 머리칼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림을 그린 듯한 옆얼굴의 선을 따라 빛이 흘러내리듯 부서졌다. 석주가 말하는 어둡고 음침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상처 입은 한 마리 새 같았다.
나는 어땠지.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나도 좋았다는 걸 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몰라서 머리가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임주호가 아닌 나에게 형이 흥분해서, 그걸 감추지 않아서 좋았다고, 본 적 없던 형의 밑바닥을 가지게 되어서 좋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형 혹시 나하고 섹스도 하고 싶어?”
“…….”
망연히 나를 보는 형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머리칼을 빛나게 하는 햇살이 그의 눈동자로 투과되어 아름답게 빛이 났다.
형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나는 잘못되어 있었다. 나는 미쳐 가고 있었다.
“나하고 그 짓도 하고 싶어?”
나는 벌벌 떨면서 물었다. 그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차마 그 짓도 하고 싶다고는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내가, 내가 안 해 주면 다른 사람하고 그럴 거야? 섹스가 너무 하고 싶은데 내가 안 해 주면 다른 사람하고 할 거지?”
“그러겠지. 나는 짐승이니까.”
그가 말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형을 만지고 형의 살결을 느끼고 그의 흥분한 살로 치대는 것은 정말이지 싫었다. 치가 떨리게 싫은 일 중의 하나였다.
“나쁜 새끼. 형은 나쁜 새끼야.”
“네가 받아 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어. 나는 다른 방법은 몰라.”
“형을 더럽게 만들지 마. 망가트리지 마.”
“그런 일 생기지 않게 네가 지켜 주면 되잖아.”
“싫어, 형이 다른 사람 손 타는 거 싫단 말이야.”
내뱉고 보니 이상한 말이었다. 그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죽으라고 노려보던 시선을 황급히 돌렸다.
“시험 차분하게 잘 봐.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마음 쓰지 말고.”
“…….”
형의 말대로 내가 신경 써야 하는 일은 당면한 시험이었다. 공부에만 매달려도 부족한데 신경의 거의 전부를 형을 생각하는 데 할애하고 있었다.
“갈게.”
“끝나면 곧장 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형 마음대로 해. 어차피 다 마음대로 할 거잖아.”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요동하지 않는 차체를 응시하다 걸음을 옮겼다.
모의고사는 학원에서 뽑아 준 것보다 형이 준비한 기출 문제에서 더 많이 출제됐다. 꾸준히 개인 과외를 해 온 형의 실전 경험치는 내가 다니는 학원 강사들의 수준보다 훨씬 높았다.
가채점도 하지 않았는데 시험을 너무 잘 봤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임주호를 이겼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를 이기려고 애써 본 적도 없고 이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임주호를 이겨 눌렀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시켰다.
공부도 잘하는 데다 나의 형과 뒹굴기까지 하는 건 잘못된 처사였다. 임주호는 그런 호사를 누릴 자격이 없었다.
내가 생각보다 잘 본 만큼 임주호는 생각보다 못 본 듯했다. 가채점을 하는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고, 급기야 채점도 마치지 않고 시험지를 구겨 책상 서랍에 쑤셔 박아 버렸다.
“오호, 우리 영이 표정 봐라. 시험 잘 본 모양인데? 잘 봤어?”
가채점을 할 마음조차 없는 석주는 고요한 전운이 감도는 교실에서 유일한 한량처럼 책상에 팔을 괴고 물었다.
“이번에 좀 쉬웠던 것 같아. 넌?”
“이번이 쉬운 거였어? 아, 그랬구나.”
석주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아아, 하고 영혼을 상실한 수긍을 해 주었다.
“시험도 끝났는데 오래간만에 피방 고? 학원 가기 전까지만 하자.”
“나 이제 학원 안 다니는데. 얼마 전에 그만뒀어.”
“뭐? 왜?”
모의고사 따위야 어떻게 되든 말든 관심이 없는 석주가 학원을 그만뒀다는 내 말에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화들짝 놀라 물었다.
임주호의 어깨가 굳어지는 게 보였다. 그와 내 자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들으려고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전부 들리는 거리였다.
“학원 안 가는 대신 우리 형이 봐주기로 했어. 지금 형이 과외 해 줘.”
“와 씨, 대박. 그래서 이번 시험이 쉽다는 거였구나.”
나는 임주호에게 들리게 음성을 높였다. 대화를 이어 가려 괜히 석주를 나무랐다.
“그러는 넌 오늘 같은 날도 피시방이야? 진짜 대학 안 갈 거야?”
“누가 안 간대? 미달 되는 데 아무 데나 갈 거야. 나 대학 안 가면 바로 아빠 공장으로 출근해야 해.”
턱을 괸 불량한 자세를 고치지 않고 석주가 펜을 콧구멍 한쪽에 끼우고 킁, 하고 도로 뿜었다.
“그러니까 공부하라고.”
“솔직히 말해도 될까?”
“뭘?”
책상에 떨어진 펜을 더듬더듬 주워다 도로 콧구멍 한쪽에 또 꽂은 석주가 눈살을 팍 찌푸리고 솔직해졌다.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공부할 게 너무 많다고. 존나 많아. 개많아. 개많은데 다 못 할 것 같은데, 백 일도 안 남았는데 존나 개많아서 엄두가 안 난다고.”
그래서 더 아무 생각이 없다고, 석주는 공부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뭘 어떻게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포기해 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학원을 옮기든가, 과외를 받아.”
“너무 늦었다던데. 안 받아 준대. 분위기 흐린다고.”
학군 때문에 이사까지 오는 이 근처 학원이라면 석주를 거절하고도 남았다.
우리 학교에 석주처럼 아예 대학을 포기하고 만사에 늘어져 있는 3학년은 거의 없었다.
그때 교실 앞문이 열리더니 허경민이 나타났다. 교실을 들락거리는 다른 반 놈들을 짜증스럽게 여기던 애들 몇이 허경민을 발견하고 불손하게 치켜들었던 눈알을 얼른 내렸다.
우리 학교에서 수능을 포기한 3학년은 석주를 제외하면 저 허경민 정도나 있을 거다.
허경민은 임주호에게 걸어갔다. 그는 다짜고짜 임주호의 짝이 앉아 있는 책상을 발로 찼다. 임주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놈이 허경민에게 찍 소리도 내지 않고 신속하게 책과 필통 같은 것을 챙겨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자리를 비켜 주었다.
임주호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어 허경민을 바라보았다.
“뭐야, 또?”
“방해 안 할게. 이제 시험 끝났잖아. 바쁜 거 다 끝난 거 아니야?”
“니네 반으로 가라고, 좀!”
모의고사를 망친 게 분명한 임주호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허경민은 아랑곳없이 임주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옆에 앉아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임주호는 그를 떼어 내려고 어깨를 밀쳤지만 허경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 씨발 새끼들…….”
놈들의 하는 짓이 꼴사납다는 듯 석주가 콧구멍에 박힌 펜을 흥, 하고 뿜었다.
석주는 허경민과 임주호를 무섭도록 뚫어져라 보는 내 시선을 보고 덧붙였다.
“꼴사납지 않냐? 시험 끝나자마자 붙어먹는 꼴이라니.”
“……그러게. 역겨워서 봐 줄 수가 없어.”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임주호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그는 어깨동무하는 허경민의 팔을 퍽퍽 때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허경민이 임주호를 좋아하는 꼴이었다. 임주호가 하고 다니는 짓을 허경민이 과연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허경민을 어떻게 꼬셨는지 모르지만 형에게도 같은 짓을 했을 거다.
달라붙어 있는 저들의 모습처럼 형과 임주호가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다는 상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게 놔두지 않을 거다.
“석주 너, 나랑 같이 과외 할래?”
부러 큰소리를 내며 석주에게 물었다. 천재 과외 선생을 빼앗긴 임주호는 과외라는 단어에 날 선 반응을 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형에게 임주호를 만나지 말라고 했다. 그를 만나지 않는 대신 내가 몸을 대 주겠다고 했다.
공부도 가르쳐 주고 잠자리도 가르쳐 주던 사람이 연락을 끊었으니 임주호의 입장에서는 매우 아쉬울 터이리라. 지금 임주호에게 누구보다 필요한 사람은 나의 형 강준원이었다.
“너네 형하고 같이? 그 강준원?”
석주가 조금 놀란 듯 앉은 자세를 고치고 물었다.
중앙 계단 복도 벽에 걸린 대통령상을 두 번이나 받은 그 사진의 주인공 강준원을 말하는 것이냐고, 석주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져 있었다.
강준원이 나의 형이라는 걸 아는 반 아이들의 시선도 부러움과 탄식을 담고 나를 흘금거렸다.
학년의 차이로 그를 직접 겪어 보지 못한 후배만 남아 있는 지금은 그 위세가 이전 같지는 않지만 우리 학교에서 형의 위상은 전설의 레전드 그 아래쯤은 되었다.
한 학년 올라가면 선생님들에게 네가 강준원 동생이냐는 아는 척을 들어야 했고, 그의 동생인 내게도 비슷한 기대를 품었다가 실망하는 과정을 보는 게 1학기 초반의 연례행사였다.
그와 같은 재단의 학교에 다니면서 하도 겪은 일이라 이제 상처도 되지 않았고 오히려 선생님들이 내게 아는 척을 하지 않으면 이 사립 재단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선생님인가 보네, 하고 그의 경력을 짐작할 정도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임주호의 표정이 분하게 일그러졌다.
형에게 과외도 받고 그를 꼬셔 뒹굴기도 해야 하는데 이제 못 하게 되어서 분한 모양이었다.
임주호의 시선을 한껏 의식하며 나는 석주에게 관대한 제안을 했다.
“같이 해 보자. 내가 말하면 우리 형이 너 봐줄 거야.”
“진짜? 너희 형이 해 준다고 하면 나도 가능성 있는 거잖아. 그치?”
“그건 네가 열심히 해야 가능성이 있는 거고. 그래도 우리 형 워낙 탁월하잖아. 그쪽으로는 천재니까.”
그쪽으로는 탁월하고 천재인 강준원을 들먹였다.
“공부 못한다고 까이면 어떡하지?”
“걱정하지 마. 우리 형은 내가 말하면 거의 다 들어줘. 내가 누구 싫다고 하면 그 사람도 안 만나는데 뭘.”
“와, 씨. 나 이거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무조건 하는 게 나한테 이득이긴 한 거잖아? 그렇지?”
“우리 형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또 아냐. 인서울 하게 될지.”
“그렇게만 된다면, 나 아빠가 4년제 합격만 하면 대학 들어가자마자 차 사 준다고 그랬었거든. 그렇게만 된다면! 내 전 재산을 다 너희 형한테 가져다 바치겠어.”
석주는 흥분에 들떠 혼자 뭐라고 열심히 떠들어 댔다. 임주호의 뒤통수는 굳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한껏 우쭐해진 기분으로 석주의 말에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형이 나를 기다리는 곳으로 석주와 함께 걸어갔다.
먼눈으로 보이던 차가 가까워지고 운전석 문이 열리며 형의 모습이 나타났다.
“저기 너희 형 맞지?”
“아, 맞아. 먼저 와서 나 기다리고 있었나 봐.”
나는 진작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면서 새삼스럽게 말했다.
석주가 그에게 먼저 뛰어가 인사를 했다. 나는 걸음의 속도를 빠르게 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떨떠름하게 석주를 바라보던 눈이 나를 향했다.
형은 내가 부탁하면 다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형은 나와 단둘만 있는 시간을 방해받는 일을 제일 싫어했다. 윤 차장이 간식을 주겠다고 이 층으로 올라오는 것조차 싫어해서 시간이 되면 그가 직접 가지러 내려갔고, 형이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윤 차장은 이 층으로는 아예 발길을 하지 않았다.
“이거 뭐야?”
“석주야, 인사했어? 우리 형이야.”
“아까 인사드렸어. 안녕하세요. 준영이랑 같은 반이에요. 저 형 아는데, 형은 저 모르시겠지만.”
학교 중앙 계단에 전시된 사진을 봤다고, 유명 인사를 만나게 되어서 영광이라고 석주는 제 허벅지에 박박 문질러 닦은 손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형은 불쾌하게 석주와 그가 내민 손을 쳐다만 볼 뿐 마주 잡아 주지 않았다.
“석주하고 같이 공부하려고. 나하고 같이 형한테 과외받으면 좋을 것 같아서. 석주도 열심히 한다고 했어. 그렇지?”
“…….”
“당연하지. 나 진짜 열심히 할 거야. 형, 저 진짜 정말 열심히 할게요.”
석주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다.
동생 친구 공부 좀 봐 달라는 건데 형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동생 말은 모두 들어준다는 이의 서늘한 반응에 기대감에 들떠 있던 석주가 불끈 쥐어 보인 주먹을 스르르 내리고 그와 나의 눈치를 살폈다.
“석주하고 같이 하고 싶어. 혼자 하는 것보다 둘이 하는 게 서로 자극도 되고 도움도 될 것 같아서 그래.”
“진도가 다른데 어떻게 같이 해?”
“어차피 두 명밖에 없는데 무슨 상관이야.”
“수능이 뭐 한 일 년 남았어? 한가하게 남 신경 써 줄 때야, 지금이? 오늘 시험은? 잘 봤어?”
그가 몰아붙이듯이 한꺼번에 질문을 쏟아 낸다.
네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보라고, 석주가 앞에 있는데도 아랑곳없이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타박했다. 그가 공부를 봐주어 오늘 모의고사도 잘 봤지만 문제 하나로 합격이 판가름 나는 수능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아, 전 괜찮아요. 어차피 지금 공부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거예요. 준영아, 나 간다. 저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석주가 눈치 빠르게 물러선다.
“아니야. 가지 마. 해 줘. 석주, 형이 도와줘.”
그냥 가려는 석주의 팔을 와락 붙잡았다. 석주의 팔뚝을 두 손으로 붙잡자 형의 눈언저리가 경직되듯 파르르 떨렸다.
“형이 해 줘.”
“…….”
“나도 열심히 할게. 그러니까 석주 공부도 봐줘. 그렇게 힘든 일 아니잖아.”
석주는 그냥 가겠다며 내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지 말라고 석주의 팔에 아예 팔짱을 꼈다. 그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석주는 나에게 붙잡혀 엉거주춤 선 채로 형의 처분을 기다렸다.
“알겠으니까 그 팔을 좀 빼고 말해.”
도망가지 못하게 석주를 붙잡고 있는 내 팔 모양을 지적하며 그가 석주의 두툼한 팔뚝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경고하듯이 말했다.
“해 준다고 하면 뺄게.”
“해 줄게.”
“…….”
무슨 말장난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다.
나는 꽉 붙들고 있던 석주의 팔을 놓아주었다.
석주가 무슨 더러운 해충이라도 되는 것처럼 형은 나를 잡아끌어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트렸다.
“해 준다고.”
“감사합니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석주는 그저 넙죽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내 손목을 움켜쥔 형의 손이 뭘 감당하기 힘든 것인지 아무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미약하게 떨리는 울림이 느껴졌다.
“차에 타.”
형이 석주에게 뒷좌석을 가리켰다. 석주가 차에 오르자마자 형이 우악스럽게 나를 제 쪽으로 돌려세운다.
“너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좋은 머리 뒀다 뭐 해. 필요한 사람한테 쓰면 좋잖아. 쟤는 도움이 필요한 애야.”
“아까 그게 뭐 하는 짓이냐고.”
“……무슨 짓?”
“몰라서 물어?”
“모르니까 묻지.”
“팔을 이렇게 끼웠잖아.”
형이 무척이나 불쾌했다는 듯 나의 팔에 제 팔을 끼우며 이런 짓을 했다고 시연해 보였다. 그에게 팔을 꿰인 채 말했다.
“형이 싫은 티 팍팍 내니까 석주 도망갈까 봐 그런 거지.”
“다음부터 그런 짓 하지 마. 닿지 마. 살 닿게 하지 말라고.”
그게 얼마나 싫은 일인지를 굳이 설명해야 아느냐고 형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임주호하고 굴러먹은 인간은 나한테 잔소리할 자격 없어.”
“이럴래, 정말?”
“그렇지만 형이 싫다고 하면 안 할게.”
“싫어. 싫으니까 하지 마.”
“알았어.”
나는 더 논박하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나를 연행하는 경찰처럼 붙들고 있던 힘이 그제야 풀어졌다.
“시험은 어땠어?”
“몰라. 똑같아.”
나는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려웠어? 난도가 지난번보다 높진 않던데.”
그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눈을 하고 있었다. 이게 어려우면 대체 수능은 어떻게 보려고 하는 거지, 하는 의문과 염려가 심란해 보이는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지난번처럼 똑같이 어려웠어.”
“……하아.”
형의 고개가 바닥으로 꺼져 들었다. 그가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며 땅이 꺼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마른세수를 해 가며 하늘을 쳐다보고도 한숨을 쉬었다. 낙담하는 형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뚱하게 내민 입술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것들을 모두 쏟아 내듯 긴 숨을 내쉬고 나를 한심하게 응시했다.
“뭐.”
왜 쳐다보느냐고 뚝뚝하게 물었다.
“미안해.”
그가 나에게 사과했다.
“……갑자기?”
“나 때문이잖아. 공부해야 하는데, 내가 너 붙들고 안 놔줬잖아. 내 잘못이야. 전부 나 때문이야.”
자책하는 큰손이 그의 얼굴 거죽을 쓸어내렸다.
“가채점 아직 안 해서 잘 봤는지 못 봤는지 몰라. 형이랑 하려고 일부러 안 해 봤어.”
“일단 가자. 얼른 타.”
잘 봤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가 이렇게 낭비하고 있을 시간조차 없다고 서둘러 나를 재촉했다.
나는 늘 그의 옆자리에 앉았는데 형이 굳이 조수석 차 문을 열어 내가 앉을 곳을 지정해 주었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석주가 형에게 또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넸지만 형은 싱거운 대꾸도 하지 않고 운전만 했다.
감정이 완전히 빠진 기계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형은 석주의 공부도 세심하게 봐주었다. 그가 성적을 낼 수 있는 과목을 추리고 나머지는 아예 젖혀 버렸다. 당장은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고득점을 노릴 수 있는 선택 과목만 죽도록 하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 않다고 석주에게 희망인지 고문인지 모를 말을 했고, 석주는 종교에 의탁한 것처럼 그의 말을 신뢰했다.
밤 열 시가 될 때까지 같이 공부하던 석주가 더는 버티기 힘들었는지 누구도 그의 귀가를 단속하지 않는데 늦으면 엄마한테 혼난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 돌아갔다.
석주가 돌아가고 나서야 형과 함께 모의고사 가채점을 해 보았다. 지난번 모의고사보다 훨씬 좋은 결과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하면 형과 같은 대학에 가는 것도 요원한 일은 아니었다.
형과 같은 대학에 다닌다는 기대에 가슴이 뜨거워졌다가도 그와 내가 처한 지금의 상황을 돌이키면 마냥 즐겁지도 않았다.
말없이 채점을 마친 그가 나를 쓱 돌아보았다.
“나 놀리니까 재미있지? 과외 선생 피 말리게 하는 게 이런 거야.”
“진짜 어려웠어. 전보다는 아는 게 더 많이 보였을 뿐이지.”
그가 픽 웃으며 잘했다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은 나를 동생으로 보는 일도, 전혀 다른 쪽으로 대하는 일도 어렵지 않은 듯했다. 지금은 명백히 손아래 동생을 챙기고 돌보고 기특하게 여기는 손길이었다. 형에게 칭찬받자 기분이 으쓱해졌다.
“그런데 이건 왜 틀렸어?”
덤벙거리다 틀린 문제 몇 개를 그가 즉시 지적해 왔다. 나는 학원 선생님에게 변명하듯 그에게 변명했다. 모르는 문제도 있었지만 실수한 것들이 몇 개 있었다.
“지금처럼 변별성 떨어지는 때는 결국 한 문제로 갈려. 이런 실수는 하지 마.”
“…….”
“너 지금 남 걱정해 줄 처지가 아니야.”
“…….”
임주호를 향한 치졸한 감정으로 벌인 짓이었지만 그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날 내 방문을 두드리던 윤 차장을 어떻게든 붙잡고 늘어졌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그와 입을 맞추는 일 따위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횟수를 줄이고, 접촉하는 기회를 줄이면, 그렇게 줄이다 보면 하지 않게 되고 우리가 벌인 짓들도 없었던 일처럼 덮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처럼 서로를 생각하고 염려하는 형제로 지내야 한다. 지극히 평범하고 올바르게, 마땅히 서로 있어야 할 자리에서 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욕망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 형에게 죄책감을 떠넘기고 그에게 동조하는 내 비겁한 행동도 멈춰야 한다.
“먼저 물어봤어야 하는데, 석주 일은 미안해.”
“…….”
“석주 이번 모의고사 망쳐서 낮에 난리였거든……, 나 지금 학원 그만두고 형이 공부 봐준다고 했더니 자기도 도와주면 안 되냐고 하도 매달려서.”
“…….”
석주가 원하지 않은 일을 내가 먼저 권했다. 거짓말하는 내 얼굴을 그가 빤히 바라보았다. 얄팍한 속내를 다 아는 듯한 눈동자였다.
나를 보던 그의 시선이 내가 실수한 문제를 들여다보았다. 내 말을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지만 형의 눈이 문맥을 놓치고 배회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
“넌 옛날부터 그랬어.”
“뭐가?”
“거절하는 걸 어려워했어.”
“……그게 무슨 뜻이야?”
“아니야. 아무것도.”
“…….”
“알았어. 기왕 그렇게 됐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가 더는 논쟁하지 않겠다고 분위기를 환기했다.
“내가 어떻게 뜯어고쳐도 네 친구 서울에 있는 대학 보내려면 삼 개월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
“진지하게 시작은 했으니까……, 열심히 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걔한테는 이제 관심 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건 알고 푼 거야, 아니면 찍은 거야?”
그가 수학 문제 하나를 연습장에 옮겨 적었다. 반보 떨어져 있던 내 의자를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 등받이에 팔을 얹고 바짝 다가왔다. 그와 함께 문제를 내려다보았다.
“찍은 거지? 네가 풀 수 없는 문젠데?”
“시간 너무 오래 걸려서 그냥 찍었어.”
“잘 찍었는데 다음부턴 시간 걸리더라도 풀어. 이런 킬링 문항 몇 개로 결국 걸러지는 거야. 미정계수 조건 일일이 확인하면서 넘어가 봐.”
최고 난도의 문제를 푸느냐 못 푸느냐가 결국 합격을 결정한다. 그가 다니는 학교의 학생이라면 아마 이 정도의 문제는 나처럼 끙끙대지 않고 쉽게 풀겠지.
샤프를 고쳐 쥐고 그의 감독을 받으며 조건을 나열했다. 내가 제일 무섭다고 말하는 형은 공부할 때 봐주는 게 없었다.
의자 등받이에 걸쳐 있던 팔이 노트에 뭔가를 끄적거리는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어깨를 감싸 안고 끙끙대며 풀고 있는 수학 문제를 같은 방향에서 읽어 내린다.
“이제 위의 내용을 종합해서 개형 그리고.”
여백에 X축을 긋고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했다.
뺨과 뺨이 닿을 정도로 형과 가까이 붙어 집중하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몸이 굳어졌다. 샤프심이 뚝, 부러지며 바늘처럼 얼굴로 튀어 올라 하필이면 눈동자를 때렸다.
“읏!”
“준영이 친구는 갔니?”
무심코 문을 열고 들어온 윤 차장이 물었다.
“괜찮아?”
손등으로 눈꺼풀을 비비는 내 손을 잡아 내리고 순간 빨개진 눈가를 확인하듯 들여다보며 형이 물었다.
“으응, 괜찮아.”
그의 손이 눈을 덮었다. 나를 부드럽게 쓸어 주며 그가 윤 차장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니? 준영이 어디 다쳤어?”
“별거 아니니까 내려가 보세요.”
“왜 그래? 어디 다친 거야? 어디 봐.”
“아주머니.”
“…….”
“됐으니까 내려가세요.”
형의 말투가 삼엄할 정도로 차가웠다. 놀라 다가오던 윤 차장이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여기서 나가라고.”
“…….”
나와 그의 사이에 그 어떤 개입도 용납하지 않는 형의 모욕적인 언사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그녀가 황망히 방을 나가 버렸다.
“괜찮아? 눈 떠 봐. 뜰 수 있겠어?”
“나 괜찮아. 그냥 따가운 정도야.”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그의 앞에서 빨개진 눈동자를 깜박거려 보았다. 안구가 시려 눈가가 자꾸만 일그러졌다.
“안약 있을 거야. 잠깐만.”
형이 서둘러 책상 서랍을 여기저기 뒤졌다. 인공 누액을 찾아낸 그가 내 뒤통수를 젖혔다. 빨개진 흰자위 위에 용액을 몇 방울 떨어트렸다. 안구 위로 물기가 차갑게 젖어 들었다. 눈을 몇 번 깜박거리자 고여 있던 누액이 주르르 관자놀이로 흘러내렸다.
“진짜 괜찮아. 정말이야.”
“병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정말 별일 아니었다. 눈알에 샤프심이 박힌 것도 아니고 이물질이 그냥 스쳤을 뿐이었다.
손등으로 눈을 비벼 댔다. 도 넘은 걱정을 하며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말했다.
“……윤 차장한테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그도 순간적으로 제어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 순간이 무서운 것이다.
나를 피 말리게 하는 것은 형과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있다는 죄악감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그런 짓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형과 입술을 겹치고 있으면 방문에 온 신경이 쏠렸다. 극히 미세한 기척에도 절벽에서 등 떠밀려 떨어지는 것처럼 소스라치는 일이 잦았다.
나는 형처럼 태연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고, 형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 그럴 이유가 전연 없음에도 불구하고 붙어 앉아 있는 우리 둘의 모습을 변명했다.
형이 윤 차장의 이 층 출입을 엄중하게 단속하고 난 이후로는 그나마 놀라는 일이 줄었지만 그렇다고 불안까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모르게 완벽하게 감추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 윤 차장은 이미 눈치채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비서직으로 까다로운 상사를 눈치로만 보필하는 일을 십수 년 해 온 사람이었다.
우리의 사이를 알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서 형이 공부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이 층으로 올라오지 말라고 요청했는데도 또 함부로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알고 있는 거다. 알고서 저러는 거다.
인사성 바른 석주가 집으로 돌아가며 윤 차장에게 말도 없이 나갔을 리 없었다.
석주가 집으로 돌아간 사실을 알면서 윤 차장은 형의 방문을 노크도 없이 열었다. 피해망상처럼 불안의 가지가 어지럽게 뻗쳐 나갔다.
“빨리 가서 사과드려.”
“내가? 왜?”
하지 말라는 짓을 기어코 해서 눈을 다치게 한 사람이 누구냐고, 원인을 누가 제공했느냐고 그가 따졌다.
“가서 사과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 가서 사과드려. 잘못했다고, 놀라서 실수했다고.”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게 되면 아버지는 형을 죽일지도 모른다. 그의 벗은 몸을 보면,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주장하는 형을 정신 병원에 집어넣을지도 모른다.
윤 차장에게 사과하라고 나는 형의 팔을 붙들고 흔들었다. 그가 아직도 빨간 내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강준원……!”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버지였다.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무섭게 방으로 쫓아 들어온 아버지의 손이 다짜고짜 형의 뺨을 향해 날아들었다.
짜악,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아버지에게 얻어맞은 그대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가 천천히 얼굴을 바로 했다.
“진짜야?”
“…….”
“정말이냐고 묻잖아!”
형이 윤 차장에게 반말로 모욕한 일을 추궁하는 것일 텐데, 나와 그가 벌이는 짓들을 묻는 것만 같았다. 가슴뼈가 아프게 조여들었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대치 상태로 서 있는 둘을 바라보았다.
“뭐가요. 나가라고 한 거요? 꺼지라고 한 거요.”
“이 새끼가…….”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같은 얘길 자꾸 하게 만드니까, 계속 방해하니까.”
“…….”
“너무 화가 나서.”
“…….”
“화가 나서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방해하면 당신에게도 똑같이 할 거라고, 수위를 조절하지 못하는 안구가 위압적으로 번득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라 전혀 낯선 타인을 보듯 창망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씨근거리는 아버지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그는 형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인격을 당황스럽게 주시했다.
아버지를 보는 형의 눈동자는 내가 아는 강준원도 아버지가 아는 큰아들도 아니었다.
“가서 사과해라.”
“아주머니가 먼저 사과하면 사과하죠.”
“아주머니가 아니라……, 하아.”
그에게 훈계는 소용없었다. 형이 저지르고 있는 전혀 다른 종류의 패륜에 가장의 권위를 손상당한 아버지는 기가 막힌다는 숨을 내쉬었다.
형도 보통 인간이 아니지만 아버지도 만만치 않게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이 내뿜는 긴장감이 칼끝처럼 치솟았다. 불을 붙이면 터질 듯한 인화성 물질이 서로를 바라보는 부자 사이에 음산하게 서렸다.
“무슨 방해를 얼마나 크게 했다고 이 난리야. 노크 없이 방문 좀 연 게, 너 이럴 정도로 큰 잘못이야?”
아버지의 말이 옳다. 윤 차장은 그가 이렇게 날 선 반응을 하며 아버지를 똑바로 노려볼 정도로 큰 잘못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느끼듯이 아버지도 형을 잘못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어느새 그의 노성이 수그러져 있었다.
“네 새어머니 단속시킬 테니까 오늘은 네가 사과해. 그게 맞는 거야.”
“…….”
“진정되면 내려와라.”
울컥했던 아버지가 침착하게 호흡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아버지의 손이 형의 어깨 위에 묵직하게 내려앉아 진정하라고 강압적으로 눌렀다.
그러며 아버지는 나를 돌아본다. 형이 대체 왜 이러느냐고 눈으로 묻는다. 나는 모르겠다고 그의 눈을 피해 죄를 추궁받는 것처럼 발치로 시선을 내렸다.
아버지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가고 우리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얻어맞은 뺨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그가 겁에 질려 서 있는 나에게 돌아섰다.
“가서 사과드려.”
“널 다치게 했어.”
“……나 안 다쳤어.”
“다칠 뻔했어.”
그는 이런 화를 내는 게 온당하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정상이 아니었다. 일의 경중을 가늠하는 판단력을 아예 상실한 것처럼 말이 통하질 않았다.
“나 괜찮으니까 사과드리고 와. 제발, 제발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응?”
“…….”
“형, 제발.”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윤 차장이 우리를 예의 주시하며 탐색하는 것은 더 싫었다. 그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었다.
제발 사과하라고 그의 발을 붙잡고 늘어질 것처럼 애원하자 고집스럽게 움직이지 않던 형이 결국 돌아섰다.
형은 아버지의 침실로 내려갔다. 나는 그를 쫓아갔다.
그는 안방 문을 노크하고 한쪽 발에 체중을 기대고 사과할 마음도, 성의도 없는 자세로 비딱하게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안쪽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본인은 잘못한 일이 없다고 응수하던 형이 낮은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한마디를 겨우 내뱉고 그것보다 몇 배는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 외의 변명은 생각이 나지 않는지 형은 한참 고심하듯 묵묵히 서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피로한 얼굴의 아버지가 나왔다. 막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는지 그의 와이셔츠 소매와 목 단추 몇 개가 풀려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의 모습이 오늘따라 고단해 보였다.
“준영이 수능 얼마 안 남아서 너도 그리고 준영이도 예민해져 있는 거 알아.”
“…….”
“다음부터 이런 불필요한 일 벌이지 마라.”
“네.”
아버지는 이 모든 상황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과를 마친 그가 계단 층계참에 초조해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사과했어. 됐지?”
무슨 칭찬을 바라는 듯한 말투였다.
형은 잘한 게 하나도 없었다. 대답하지 않고 사나워진 눈으로 쳐다보자 세상에서 내가 제일 무섭다고 했으면서 콧방귀도 뀌지 않고 이만 올라가자고 내 어깨에 팔을 올려 감싸 안고 이 층으로 이끌었다.
“이제 다시는 우리 방해 못 하겠지.”
“…….”
그가 나와 눈을 맞추고 웃음을 지었다.
침대에 누웠는데도 윤 차장을 돌아보던 살벌한 형의 모습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잠이 오지 않았다.
미간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고 눈살은 일그러져 있었다. 내 어깨를 둘러 안고 뺨을 붙인 채 함께 수학 문제를 풀던 형은 그 모습을 들켜서 소스라치듯 놀라 얼결에 화를 낸 게 아니었다. 그는 나와 그의 소중한 시간을 윤 차장이 망쳐 버렸다고 여기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뒤척거리고 있는데 달칵, 방문이 열렸다. 기척 없이 문이 열렸지만 이번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문을 연 형이 문고리에서 손을 떼지 않고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는 내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준영아.”
“…….”
“……자?”
나는 둔중한 어둠에 덩어리로 묻혀 대답도 하지 않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잠들었다고 여기는 목소리가 혹시라도 나를 깨울까 조심스러웠다.
조용히 있자 나를 살피던 형용이 그냥 돌아가려고 했다. 이 모든 상황이 갑자기 안타까웠다. 가슴이 미어지듯 아파서 막 돌아서는 그를 조용히 붙잡았다.
“……아직.”
작은 음성으로 대꾸하자 그가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다.
윤 차장의 이 층 출입이 뜸해지면서 형의 주의력도 더불어 흐려졌다. 그는 문을 잘 잠그지 않았다.
“문…….”
“응?”
“문 잠가.”
그와 밀회를 하는 것처럼 문을 잠그고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나는 그가 하는 짓에 동조하고 있었다. 나도 그에게 가해자이고 그가 하는 짓의 공범이었다.
그가 뒤늦게 문고리 아래 금속 버튼을 눌렀다.
형은 내게 다가와 침대에 앉았다. 매트리스가 무게를 받아 가볍게 꺼졌다가 도로 올라왔다.
“피곤하다면서 왜 아직 안 자고 있었어?”
“그냥 잠이 안 와서.”
“형이 재워 줄까?”
“……어떻게?”
그가 물러나 누우라고 손짓했다. 나는 형의 자리를 마련하려 침대 안쪽으로 비척거리며 물러섰다. 공간을 비워 주자 형이 내 옆에 장신을 구기며 누웠다.
그는 내게 팔베개를 해 주었다. 샤워한 형의 몸에서 익숙한 바디 샴푸 냄새가 났다. 어둠이 눈에 익어 형의 눈동자 색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극히 경미해서 부상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상처를 그가 어루만진다.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눈두덩을 어루만지는 손바닥 아래에서 속눈썹이 작은 새의 날갯짓처럼 파닥거렸다.
눈가를 어르던 손이 뺨과 입술을 만지고 보들보들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나를 만지는 손이 싫지 않았다. 형의 손이 나를 만질 때 나는 좋은 척도 싫은 척도 할 수 없었다.
싫어하면 그를 가해자로 만드는 것이었고, 그렇다고 좋아하면 떨쳐 내지 못하는 죄악감이 한기처럼 몸을 감싸 왔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그와 치대는 일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죄를 짓는다는 감각이 마비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입맞춤마저 고통스러웠는데 지금은 깊숙이 입술을 겹치는 행위가 익숙했고, 형의 입술과 입안의 달콤한 맛이 그와 키스하지 않을 때조차 혀끝에 달게 남아 오래도록 맴돌았다.
그의 손길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점점 더 돌이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어 간다는 의미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아는데, 형의 모든 것이 수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지옥도 있을까.
나는 옆에 함께 누운 얼굴을 바라보며 지옥에 대해서 생각했다.
계절이 가을로 바뀌며 밤이 되면 온도가 써늘해졌다. 나는 침구를 걷어 몸을 구기고 있는 그에게 이쪽으로 들어오라고 표시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만들어 놓은 온기가 형의 몸을 덮었다.
우리는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물끄러미 나를 보던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와 닿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살짝 문 입술을 깊고 아늑하게 빨다 문득 멀어진다. 젖은 표피가 그의 입술 살에 딸려 가다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키스해 본 적 있어?”
형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형과 수십 번이 넘게 키스했으면서 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여자 친구 사귄 적은? 너 좋아하는 애들 꽤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학원 다니는 것만도 피곤해 죽겠어.”
“학원에 예쁜 애 없어?”
“예쁜 애 없어.”
“잘생긴 애들은?”
“잘생긴 애 없어.”
그의 말에 순순히 대답하면서 눈을 뜨고 형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그를 눈빛으로 힐난했다.
“끌렸던 사람도 없어?”
“…….”
나는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성적으로 끌리던 사람이 있는지 생각했다.
한참 전의 얘기이긴 하지만 하계 올림픽 다이빙 결선에 출전한 수영 선수를 보고 가슴이 뛴 적은 있었다.
탄탄한 허벅지와 바짝 올라붙은 엉덩이, 긴 두 다리를 바짝 붙이고 근육을 조인 후 거꾸로 떨어져 입수하는 유연한 몸의 움직임과 수면에서 튀어 오르던 얼굴은……, 형을 닮아 있었다.
수영모를 벗고 갈색 머리칼을 털어 대던 독일 선수의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는 형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없어?”
“……어, 없었어.”
“어떻게 없을 수 있어?”
“나는 형처럼 문란하지 않아. 아무한테나 그런 감정 안 생겨.”
“문란하기는 하지만 나도 아무한테나 그런 감정 생기진 않아.”
“머리 따로, 하체 따로라는 거야?”
“……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그가 다가와 입술을 아프게 물었다. 읏, 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형의 가슴팍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살짝 떨어졌던 그가 많이 아팠냐고, 미안하다고 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입술을 겹쳐 왔다. 나는 눈을 감고 다가오는 혀를 입안으로 받아들였다.
깊게 포개진 입술 새로 엉클어진 호흡이 흩어졌다. 조그맣게 벌어졌던 입이 크게 열리자 형의 두툼한 혀가 안쪽으로 깊이 들어와 점막을 핥아 올렸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등을 만졌다. 그의 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맨 등을 쓰다듬었다.
그는 십 년이 넘게 이 죄악감을 떨치려고 몸을 베어 왔다.
우리가 형제로 만나지 않았으면 아름답고 매끄러운 육신에 이런 상처가 생기지도 않았으리라.
그와 피가 섞이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가 내 형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릴 때 보았던 형의 수음, 늘 내 머릿속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진한 잔상이 궁금했다.
그의 등허리만 더듬는 것이 아니라 손을 앞으로 가져가 발기하기 시작한 살덩어리와 거친 음모를 손바닥에 가득 채우고 싶었다. 형을 느껴 보고 싶었다.
“흐으… 으응, 음.”
다디단 맛이 나는 입술이 떨어졌다. 아쉬움에 혀끝으로 형의 느낌이 묻은 내 입술을 핥았다.
위험 수위에 육박해 넘쳐흐르는 형의 눈동자가 환희에 젖어 버린 나를 투명하게 담아냈다.
꿈틀거리며 내게 더 다가오려는 등줄기를 매만졌다. 더러 키스를 하다 그의 목을 끌어안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형의 육신을 더듬어 만져 보기는 처음이었다. 긴장한 등판이 손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렸다.
“네 친구 키도 크고 덩치도 좋던데. 생긴 것도 그만하면 괜찮고.”
“무슨……, 석주 말하는 거야?”
형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 중학교 때까지 유도했었대.”
“그 정도면 잘생긴 거지?”
“석주가? 못생기진 않았는데, 잘생긴 건, 그건 잘 모르겠는데.”
잘생겼다고 하는 건 형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지, 석주는 아니었다. 대체 석주의 어디를 보고 잘생겼다고 하는 것인지 그의 미적 감각에 불신이 들었다.
“인기 많겠네.”
“착하고 수더분해서 인기 많아. 애들한테도 선생님들한테도.”
“둘이 친해?”
“2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고 제일 친하긴 해. 클럽에서 형 봤을 때, 그날 석주 따라간 거였어.”
“열심히 공부시켜서 같은 대학에 가고 싶을 만큼 친해?”
석주의 성적을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잔인한 처사였다.
“……그건 좀 힘들 것 같지 않아?”
“가능하면 그러고 싶고?”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
“그게 아니면.”
“…….”
“혹시 나하고 둘만 있는 게 싫었어?”
“…….”
그럴 의도로 석주를 우리 사이에 끌어들였으면서 나는 형의 입술을 달다고 여기고 있었다.
집요하게 바라보는 눈을 피했다. 고개를 슬며시 비틀기가 무섭게 그가 뺨을 붙잡아 도로 세워 자신을 보게 했다.
“그 시간은 너하고 나만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잖아.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데,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원해 온 시간인데.”
단둘만 있는 이 시간에는 마치 저만 보라는 듯이, 저만 눈에 담으라는 듯이 뺨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때만큼은 그 어떤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아.”
그 유일한 시간을 방해하면 그게 누구든 망설이지 않고 박살 내 버리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그의 맹목을 망연하게 응시했다. 형을 독점하는 것은 내가 오래도록 바라고 빌어 온 일이었다.
그의 유일한 동생이고, 유일한 피붙이라는 특권.
그가 욕망하는 유일한 존재.
정말 미치겠는 것은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내게 매달리는 형이 싫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가 이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같이 있고 싶다고, 나를 원하고 있다고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등줄기가 욱신거릴 정도로 감정의 동요가 일었다.
그러나 우리는 만나다 헤어지면 다시 볼 일이 없는 타인이 아니라 형제였다. 형이 마음대로 시간을 정하고 마음대로 끝내는 게 불가능한 관계였다.
“친해? 친하면 얼마나 친한데.”
친하다는 불확실한 관념이 불편했는지 형은 출판사의 실수로 오기된 답을 가지고 인상을 쓰던 때처럼 눈살을 구겼다.
“그냥 우리 반에서 제일 친해.”
“반에서 제일 친한 건 얼마나 친한 건데.”
“……걔는 그냥 친구야.”
나를 내려다보던 그의 눈이 바짝 다가왔다. 뺨에 입술이 닿고 턱 선을 핥았다. 그가 목줄기에 입을 대고 말해서 어깨가 간질거렸다.
“걔가 너하고 친해지려고 손목 그은 적이라도 있대?”
“……아니.”
상체를 비틀었다. 잠옷 단추를 톡톡 풀어 내린 손이 옷섶을 벌렸다.
“하아, 너하고 친해지려고……,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 내기라도 했나 보지?”
“아니, 아니……, 아니야.”
그런 비상식적인 짓은 누구도 하지 않는다.
나의 친형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하지 않는다.
그가 강한 압력으로 목을 빨아 댄다. 고개를 한껏 돌리고 베개에 열이 오르는 뺨을 문질렀다. 목에 자국이 남을 것 같았다. 손목을 긋고 허벅지 살점을 떼어 낸 자국이 목선에 남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 노력도 안 하고 너하고 친해졌다고? 그렇게 대충, 하아, 아무한테나 제일 친한 자리를 주는 거면……, 하아, 형 섭섭해질 것 같은데.”
“……흐으, 읏.”
“그거 부당한 거 아닌가?”
공정하지 못한 처사라고 주장하는 입술이 목 옆선에 빨간 생채기를 만들고 떨어졌다. 살이 마찰하는 축축한 소리가 났다.
“뭐가, 하아, 뭐가 부당하다는 거야.”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아무 희생도 없이 너하고 제일 친해질 수 있다는 거.”
목줄기를 핥던 혀가 잔상을 남기며 중얼거렸다. 그의 숨결과 축축한 살이 가슴으로 내려갔다.
팔로 눈을 가렸다. 열이 올라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척추를 꼿꼿하게 세우던 긴장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뜨거운 물 속에 빠진 것처럼 사지가 나를 만지는 남자의 아래에서 흐느적거리며 부유했다.
“누군 몸을 칼질했는데.”
“하아, 아으……, 난 형 동생이잖아.”
“…….”
가슴을 핥으려고 다가오던 움직임이 돌연 굳어 버렸다. 달아오른 눈가가 빨갛게 익어 어둠 속에서 얼굴 형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나는 넋이 반쯤 풀어져 덧붙였다.
“형 마음대로 해도 되는……, 나는, 형 마음대로 해도 되는 동생이잖아. 제일 친한 것보다, 그것보다 이게 더…….”
나를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고, 무의식이 신음했다.
그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었다. 형이 내뱉는 숨의 궤적이 가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따듯한 입김이 낯선 부위에 닿아 부서졌다.
형이 입술을 벌리고 가슴 주위의 살을 머금었다. 목을 빨던 압력이 아니었다. 훨씬 강해진 힘이 마음껏 흔적을 남기는 압박감으로 여린 살갗을 빨아 댔다.
나는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하아, 네 일 년은 내 거야. 나한테 주기로 했잖아. 응? 준영아.”
“읏……, 으응, 으음.”
“그동안은 후웁, 그때만큼은 응? 내 거잖아. 내 마음대로 해도 되잖아.”
그가 젖꼭지를 도톰한 입술 살 사이에 물었다. 이내 입을 크게 벌려 동그란 주위의 유륜과 유두를 한꺼번에 품었다. 예리하고 야릇한 감각이 등골을 저릿하게 타고 올라온다.
형의 어깨가 나를 향해 온전히 다가드는 각도로 틀어졌다. 위로 올라타 본격적으로 가슴을 빨아 대고 묵중한 체중으로 짓누른다.
“형, 아, 잠깐만… 잠깐, 읏, 아…, 으응, 읏.”
그의 어깨를 틀어쥐고 밀어 댔지만 막무가내였다. 살과 밀착되어 버린 입술이 조금이라도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가 흡반처럼 달라붙는다. 살을 흡입하듯 삼켜 댄다.
“그만…, 그만, 제발, 그만… 으, 하읏… 형…….”
전신이 뜨거워지고 하체를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두 발이 침구 위를 안타깝게 비벼 댔다. 온몸을 비틀며 점점 나를 장악해 가는 형의 어깨를 밀고 치웠다.
침을 묻히고 정신없이 살을 빨던 그가 잠시 멀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도로 달라붙는다. 허리가 들썩거렸다. 달아오른 호흡이 살 위로 내려앉았다.
감각이 예민한 부분을 되알지게 빨아 대는 힘에 가슴이 솟구쳤다.
“하으, 읏, 하아, 형, 아파, 아파…, 안 돼. 나 이상해. 이상해질 것 같아.”
흐느끼듯 신음하는 애원에 일말의 대꾸도 없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뺨이 뜨거워져 불이 붙은 것도 같았다. 베개에 얼굴을 비비고 문지르며 온몸을 뒤틀었다.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저급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형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휘어지는 내 허리를 붙잡아 안고 더욱 깊이 살을 머금는다. 맛있는 것을 빨아 먹듯이 연신 빨아 대고 희미하게 새는 단맛의 정수를 핥듯이 집요하다.
그의 목구멍이 울컥거리며 나를 삼켜 대는 소리가 고양되는 신음과 겹쳐졌다. 불덩이가 닿은 것처럼 귀가 뜨거웠다. 신음을 막던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하아, 아응, 형, 아, 아아… 아래, 아래… 읏.”
그가 주는 쾌락에 젖어 허리를 들썩였다. 여길 만져 달라고 엉덩이를 비틀었다. 가슴살을 머금은 채로 형이 손을 내려 잔뜩 발기해 선액을 흘리는 성기를 감아쥐었다.
“하읏……!”
내 가슴에 달라붙어 있는 그의 뒤통수를 다급하게 끌어안았다. 형의 입술에 내가 매달린 꼴이었다.
“아, 응, 으응, 형, 형……! 하아, 읏, 이런 거 이상해, 이상해… 하윽!”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 기분이 좋아서는 안 되는데, 참을 수 없는 절정이 몰아닥쳤다. 질척이는 아래를 큰 손바닥이 쓸어 만지고 열 오른 콧김을 씨근대며 가슴을 핥아 물었다.
나를 만지는 남자의 손이 격앙된 내 신음만큼 빨라졌다. 아, 아, 어쩔 줄을 모르고 허리를 비틀어 대다 그에게 붙잡혀 전신을 떨며 사정했다. 참기 힘든 감각이 온몸을 지글지글 태우다가 뿜어져 나왔다.
“아으응!”
육신이 경련하듯 떨려 왔다. 벌어진 입술에서 침이 질질 샜다. 허리 아래가 붕 떠 바들바들 흔들렸다. 멍하게 풀어진 눈이 어두컴컴한 허공을 응시하며 아득하게 젖어 들었다.
“하아, 하아, 하악…….”
가쁘게 숨이 터져 나왔다. 솟구쳤던 허리가 가라앉고 사지가 축 늘어졌다. 예민하게 부푼 젖꼭지를 혀끝으로 조심스럽게 문지르듯 핥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응시했다.
울어 젖은 눈으로 그를 마주 보며 끈끈해진 형의 뺨을 감싸 쥐었다. 흐릿해진 시야가 가물가물 흔들렸다.
형의 뺨을 더듬어 쥐고 있던 손을 내려 그의 목덜미를 쓸고 단단한 가슴팍을 건드렸다. 형의 옆구리를 안아 내 쪽으로 바짝 끌어 올려 시선을 맞추었다.
손을 뜨거운 열이 느껴지는 형의 바지 속으로 넣으려고 가져갔다.
남자의 사타구니를 따라 미끄러지듯 들어가는 손목을 그가 더럭 움켜쥔다. 바지 안으로 들어간 손끝에 희미하지만 일렁이듯 솟구치는 열감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터질 것처럼 부푼 성기였다.
“그러지 마.”
“…….”
“그러지 마. 그러는 거, 짐승이나 하는 짓이야.”
그가 내 손목을 잡아 침대 위로 내리누르며 그대로 입술을 겹쳐 왔다. 열 오른 입술 살을 빨고 축축하게 젖은 혀가 안쪽으로 넘어온다.
나는 고개를 비틀어 형의 입술과 더욱 깊게 맞물리도록 했다. 내 안으로 들어온 혀를 분주히 빨았다.
그곳에서만 수분을 채울 수 있는 것처럼 간절하게.
질척거리는 소리가 오래도록 방 안을 맴돌았다.
형의 입술과 혀는 내가 그를 범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었다. 나는 형이 내게 한 것처럼 단내가 나는 입술을 집요하게 물고 핥았다.
✦ ✧ ✦
윤 차장을 마주하는 게 가시방석일 것이 분명했다.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몰라 불편한 마음으로 일 층으로 내려갔다. 그래도 형보다는 덜 불편할 거라 여겼는데 둘의 갈등을 부추긴 사람이 나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걸음이 축축 느려졌다.
싫은 것을 억지로 참고 형보다 먼저 내려가 윤 차장에게 사과하려고 했건만 아침을 준비하는 아버지의 뒷모습만 보일 뿐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
“윤 차, 아, 아니 새어머니는요?”
새어머니를 무심코 윤 차장이라고 부르자 아버지가 나를 힐긋 돌아보며 인상을 팍 썼다. 나는 아차 하고 냉큼 꼬리를 내렸다.
“생각 정리가 좀 필요해 보여서 며칠 쉬다 오라고 했다.”
“어디 가셨는데요?”
“제주도.”
설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곳에 윤 차장을 혼자 보낼 성격이 아니었지만 이번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식탁에 앉았다. 앞치마를 하고 간편식을 데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하도 오래간만이라 어색하고 낯설었다.
“…….”
“…….”
뭔가 익히고 끓이는 소리만이 들려 안 그래도 조용한 주방에 침묵이 도드라졌다.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었다. 오늘따라 더 딱딱해 보이는 아버지의 안색을 치열하게 살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인지 아버지가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긴장한 손을 마주 잡고 손톱으로 살을 꾹꾹 눌렀다.
어쩌면 윤 차장은 눈치챘는지도 모른다. 나와 형이 벌이는 짓들을 알아 버린 거다. 아버지에게 발설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젯밤 부주의하게 형의 방문을 열었던 윤 차장의 행동은 무심결의 실수로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셨어요.”
“…….”
막 씻은 형의 얼굴이 풋사과처럼 청량했다. 머리칼은 물기로 촉촉하게 젖어 흐트러졌다.
그가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나에게도 눈인사를 건넸다. 형이 무슨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제가 할게요.”
형은 간밤의 일로 마음이 풀어지지 않은 아버지에게 다가가 자연스럽게 그를 도와 아침을 차렸다. 윤 차장의 부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아버지는 형이 나서자 그에게 마저 준비하라고 자리를 비켜 주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나에게 따라 나오라는 턱짓을 했다. 나는 형을 바라보았다.
형은 아버지가 벗어 둔 앞치마를 허리에 둘러매고 냉장고를 여느라 내 간절한 눈빛을 미처 보지 못하고 혼자서 분주했다.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를 따라 거실로 향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아버지는 집 안에서는 거의 태우지 않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앉아 봐.”
“…….”
나는 순종하는 양처럼 소파에 앉았다. 입안이 하얗게 마르고 손끝이 떨렸다.
윤 차장이 나와 형의 사이가 뭔가 이상하다고 말한 거다. 어쩌면 형과 내가 키스하는 걸 보았을 수도 있다.
침구 속에 알몸으로 숨어서 턱턱, 소리를 내며 하체를 부딪치고 절정을 추격하는 우리의 끔찍한 모습을 본 거다.
들켜 버렸다. 아버지가 알아 버렸다. 등허리로 식은땀이 오한처럼 쓸려내려 갔다.
아버지는 담배를 입에 물고 한 모금 빨아들이곤 주방을 건너다보았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형의 형상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준원이 왜 저러는 거냐.”
“…….”
“네 형, 내가 하는 말에 콧방귀도 안 끼지만 그래도 여태 나한테 눈 부라리면서 대든 적은 없었다. 윤 차장하고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아아, 다행이다. 아버지는 전혀 다른 문제를 심각하게 물어 왔다.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환희처럼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도 윤 차장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모르면 우리는 계속 은폐할 수 있었다. 영원히 은폐해 아무도 모르는 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응?”
대답하지 않는 나를 재촉하며 아버지는 주방을 자꾸만 흘깃거렸다.
아버지는 윤 차장이 어젯밤의 일 말고도 다른 무언가를 실수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온당한 추측이었다. 어제의 일은 형의 처사가 아무리 봐줘도 지나쳤다. 다른 무슨 일이 있어서 형이 예민해진 거라고, 아버지는 윤 차장과 우리 사이에 무슨 갈등이 있으리라 여기는 눈치였다.
“해결하려고 물어보는 거야. 공연히 일 들춰서 둘 사이 망치겠다는 게 아니라.”
아버지는 내가 일부러 대답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다독이는 어조로 괜찮으니 어서 말을 해 보라고 채근했다.
“너 때문이야, 아니면 네 형 때문이야? 자기 일에도 무심한 녀석이 저한테 뭐라고 했다고 그렇게 화를 내지는 않았을 거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준영이 너 때문인 것 같은데. 내 말이 맞아?”
형은 어릴 때부터 내 문제에 관해서는 굉장히 예민했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버지는 나를 가지고 형을 협박한 적도 있었다. 당신이 허락지 않는 기타 연주나 밴드 활동을 계속한다면 나를 미국 외가로 보낸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가당찮은 협박인가 했지만, 이젠 알 수 있었다. 형의 눈앞에서 내가 없어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그에게 없었다.
아버지는 온갖 근심 걱정이 어린 낯으로 담배를 깊게 빨고 내뱉었다. 담배 맛이 무척 쓴지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하얀 연기가 내 쪽으로 오지 못하고 공중에서 흩어졌다. 코끝을 쓰리게 하는 담배 연기가 열어 둔 창문을 타고 바깥으로 사라졌다.
“혹시 윤 차장이 너한테 무슨 실수 한 거냐? 내 여자 편드는 게 아니라 윤 차장 심성 나쁜 사람은 아니다. 너희한테 잘하려고 애 많이 쓰고 있어.”
“새어머니는 잘못한 거 없어요.”
“그럼?”
“저 때문이에요. 진도도 못 따라가면서 어제 친구까지 데려와서 형을 귀찮게 만들었어요. 형이 그것 때문에 화가 많이 났었어요. 기분이 안 좋았던 것 같아요.”
“…….”
“그냥 타이밍이……, 타이밍이 안 좋았을 뿐이에요.”
“정말 그게 다야?”
“네. 다른 일은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나는 다른 일은 없었다고, 결단코 없었다고 도리질을 쳤다.
아버지는 의심하는 눈초리로 나를 직시했다. 친부와 눈을 마주 보는 이 상황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혀가 마르고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심박수가 빨라지고 등 뒤로 식은땀이 맺혔다.
그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꾹꾹 눌러 장초를 부러뜨리는 손길을 아버지와 함께 응시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준원이가 예전처럼 너 챙기려고 하는 건, 그건 아주 잘하는 거야. 형한테 반항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잘해야 한다. 가능하면 형 심기 거스르지 말고.”
“……저 반항 안 해요.”
“…….”
“저는 형이 시키는 대로 해요. 형이 원하는 대로.”
뭐든 형이 원하는 대로 한다고, 그에게 반항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을뿐더러 그럴 마음조차 없다고 나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게만 하면 돼. 아침 먹자.”
아버지가 보는 형이라는 존재는 내게 든든한 울타리이자 버팀목이었고, 그 생각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제야 안도하는 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어쩐 일로 석주가 나보다 먼저 등교해 책상에 고개를 처박은 채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일찍 왔네?”
“어어, 왔냐. 아, 씨발. 준영아, 미안한데 너희 형 욕 좀 해도 되냐?”
“또 왜.”
함께 과외를 받은 지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석주는 벌써 인내심이 바닥난 표정이었다. 어젯밤에도 석주의 얼굴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다. 그는 어제도 상한 음식을 먹은 것처럼 속이 메슥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이 석주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처음 하루 이틀은 그래도 의지를 다지며 해 보겠다고,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해 보겠다고, 어떻게든 쫓아왔는데 벌써 지친 모양이었다.
석주는 형이 내준 과제를 집으로 돌아가 새벽 세 시가 넘도록 했는데도 반도 못 했다고 눈 밑이 퀭하게 들어가 말했다.
“너무 많으면 못 하겠다고 해. 억지로 다 하려고 하지 말고.”
과외를 그만두게 하려고 형은 일부러 석주에게 무리한 숙제를 내주었다. 좋은 말로 숙제지, 괴롭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대놓고 면박을 주지는 않아도 쉬운 문제도 이해하지 못하는 석주를 침묵으로 경멸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냥 석주가 그 자리에 앉아만 있어도 상관없었다. 석주가 함께 있으면 나를 향한 형의 집착과 정염을 다른 것으로 희석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의 관계가 이전처럼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석주가 사라지면 형과 나는 책을 펴 놓고 입을 맞추었고, 흥분을 하면 바로 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가 나를 만지는 동안 문제를 푼 적도 있었다. 우리는 더러운 짓이란 짓은 다 하고 있었다.
어제는……, 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참혹하게 눈을 질끈 감았다.
형의 무릎에 앉아 있었는데, 앉으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다. 일어나는 나를 그가 갑자기 붙잡았고 휘청하다 그의 허벅지 위에 털썩 앉아 버렸다.
그 상태로 형의 중심부가 엉덩이 사이에 닿았다. 벌써 한 차례 짙은 입맞춤을 한 터라 흥분한 그는 발기해 있었다.
중심을 아릿하게 찌르는 감각에 나는 전신을 굳혀 버렸다. 그와 나는 동시에 그 감각을 느꼈다. 그가 내 허리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그의 성기를 깔고 앉아 간지러운 아래를 미약하게 지분거렸다.
우리는 그 자세로 꿈틀거리다 절정에 닿았다. 둔부를 조이느라 허리 아래를 꿈틀대는 내 뒷모습을 그가 전부 보고 있었다. 그가 억지로 움직이지 않았는데 나 스스로 아래를 그에게 비비적거렸다.
사정하고 하체를 바르르 떨면서도 그의 무릎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엉덩이를 뭉갠 채 앉아 있었고, 천천히 숨을 고르는 형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그의 방을 나와 버렸다.
팬티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내가 먼저 그런 짓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형이 내 방으로 쫓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참지 못한 그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옷을 벗기고 함께 침대 속으로 숨어들 거라고.
그는 어젯밤 내 방으로 오지 않았고 나는 형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어? 내 말 듣고 있어? 내 말 듣고 있냐니까?”
“……뭐?”
나는 누가 봐도 그와 그런 짓을 하는 걸 즐기고 있었다.
나는 그를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을 대하듯 했고, 형은 여전히 혼자서 금기를 깨고 있었다.
어젯밤 내 등에 얼굴을 묻고 낮게 헐떡이던 형의 숨소리를 떠올리던 나는 뭐라고 시끄럽게 묻는 석주에게 시선을 주었다.
“존나 많아. 아, 미친 거 아니야? 시발, 이걸 내가 어떻게 다 해? 너 어제 설마 형이 준 거 다 풀었어?”
“……아, 난 다 했는데.”
“시발, 너한테만 쉬운 거 준 거 아니야? 줘 봐.”
석주는 기어코 내 가방을 뒤져 지금 형과 풀고 있는 문제집을 가져갔다. 파라락거리며 페이지를 넘기던 석주가 다 보지도 않고 내 책상으로 도로 집어 던졌다.
“아, 진짜. 미치고 환장할 것 같아. 머리 아프다고.”
나는 바닥에 떨어진 문제집을 주워 올리고 그를 향해 인상을 썼다.
석주는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금방이라도 짐승의 포효를 내지를 것만 같았다.
“며칠이나 됐다고 이래. 좀 참아.”
“됐어. 나도 굳이 나 안 반기는 사람한테 앵기는 스타일 아니야. 꺼지라고 해.”
석주가 그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형은 석주를 상당히 싫어했다.
“네가 하도 심각하니까, 형 마음이 급한 것 같아.”
서둘러 변명했지만 석주는 저도 눈치로 다 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내가 응급 처치해야 하는 수준인 건 알아. 그래도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나 어제도 그제도 두 시간 이상 못 잤어.”
석주는 더는 못 하겠다고 책상에 엎드렸다.
“그러지 말고 쉬운 것부터 하고 안 되는 건 그냥 놔둬. 모르는 건 우리 형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여기서 포기하면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고 석주의 어깨를 흔들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녀석의 뒤통수가 벌써 잠에 빠져든 것인지,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하여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빠른 포기라 답답한 한숨만 나왔다. 어떻게든 형과 단둘만 있는 시간을 줄여 보겠다고 시작한 일인데 아무리 설득해도 석주는 이미 마음이 돌아선 후였다.
당장의 피곤과 고단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인내하지 못하는 석주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포기하지 말라고 다그치는 나를 피해 도망쳤다.
나는 교문을 벗어나 형이 차를 세워 놓고 기다리는 곳으로 혼자 걸어갔다.
차에 등을 기대고 서서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는 나를 멀리서부터 지켜보고 있던 형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석주에 관해서는 묻지도 않고 먼저 차에 올랐다.
“석주 도망갔어.”
나는 차에 올라타 안전띠를 끌어 맸다.
“전혀 놀랍지 않은데.”
“형이 너무 괴롭혀서 그래.”
“괴롭히고 싶더라고, 너하고 반에서 제일 친하다고 하니까.”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키며 그가 나를 향해 한 차례 진득한 눈빛을 주었다.
“나하고 친한 애들 다 떨어져 나가게 할 참이야?”
“공부가 적성 아닌 사람들도 있어. 그런 사람들까지 굳이 입시에 매달릴 필요가 있을까. 세상에 먹고사는 방법이 얼마나 다양한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 되게 모욕적으로 들려.”
“너나 내 앞에서 누구 편들지 말지. 나는 그게 모욕적이야. 그리고 싫다고 나자빠진 놈을 다시 받아 줄 마음 없으니까 이게 끝이라고 꼭 전하고.”
“무슨 말을 못 하겠어.”
순간 나를 돌아보는 눈이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살벌했다.
“반에서 제일 친한 남자애 얘기하지 마.”
무슨 질투를 저렇게 매섭게 하는지, 석주의 공부를 다시 봐 달라고 부탁하면 나뿐만이 아니라 석주까지 칼질해 버릴 기세였다.
“알았어. 안 할게. 안 하면 될 거 아니야.”
볼을 부풀리고 뚱해지는 나를 형이 슬쩍 확인하고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불행히도 아버지와 우리 형제는 윤 차장이 없어도 사는 데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형은 자신의 앞가림을 너무 잘하는 게 오히려 문제가 되는 인간이었고, 나를 챙기는 김에 아버지도 살뜰하게 챙겼다.
내심으로는 윤 차장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녀의 귀가를 앞당기게 될지 모르니 그녀가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고, 이후로도 새어머니의 존재는 우리 형제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걸 보여 주려는 노력처럼도 보였다.
형은 출근하는 아버지의 와이셔츠를 미리 다려 걸어 놓고, 세탁한 내 교복 셔츠도 다림질해 저녁이면 옷장에 얌전하게 걸어 두었다.
식사도 부실하게 해결하지 않았다. 미안한 얘기지만 평생 회사 일만 한 윤 차장보다 형의 요리 솜씨가 더 괜찮은 것 같았다.
내 공부도 봐주고 자신의 학업도 해야 하는 그가 매끼를 정찬으로 차려 주는 것은 아니었다. 아침에는 샐러드와 토스트, 오믈렛 같은 정도로 간단히 먹었고, 저녁에는 하나만 놓고 먹어도 뚝딱 해결이 가능한 요리를 해 주었다.
“클럽에서 매주 공연하는 건 이제 정말 안 해?”
저녁을 먹고 아버지는 윤 차장과 통화를 하겠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윤 차장이 집을 비운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나 있었다.
나는 뒷정리를 하는 형의 등을 바라보고 물었다.
“일 년 동안 쉰다고 했어.”
“밴드 활동인데 쉬어도 괜찮은 거야? 다른 기타리스트 구하면 어떻게 해.”
“벌써 구했을 거야. 밴드가 그거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상관없어.”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그릇을 씻어 개수대에 엎어 놓았다. 정갈하게 씻겨 포개지는 사기그릇을 무연히 응시했다.
형의 까다로움을 충족하는 보컬리스트는 그렇게 많지 않을 터였다. 식탁 유리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도 해 볼까?”
“응?”
물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는지 그가 고개를 돌려 식탁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나도……, 밴드 해 보면 어떨까 싶어서. 그러니까 대학 가면 어차피 동아리 활동도 해야 하니까.”
“보컬 해 보고 싶어?”
“나중에 대학 가면, 지금은 아니고.”
공연히 쑥스러워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마저 설거지를 마쳤다. 그릇을 씻어 헹구는 소리만 들려왔다. 행주까지 빨아 싱크대 주변을 닦아 낸 그가 마침내 수전을 잠갔다. 물소리가 끊기자 주변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그건 일 년 후의 얘긴데…….”
형의 혼잣말이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그가 정한 일 년 후를 무심결에 파기해 버린 나는 당황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일 년 후가 될지, 이 년 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한 번에 붙으면 일 년이지만 재수하게 되면 몇 년이 걸릴지도 몰라.”
나는 은근슬쩍 그가 내 공부를 봐줘야 하는 시간이 일 년이 넘을 수도 있다는 암시를 했다.
나를 향해 돌아선 그가 젖은 손을 마른 수건에 닦아 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형은 내 암시를 알아듣지 못했는지 웃으며 말했다.
“잘할 거야, 넌. 목소리가 좋아서.”
“그럼 나도 형이 하는 밴드에 들어갈 수 있어? 클럽에서 공연도 하고, 연습도 같이 하고, 그럴 수 있어?”
나는 또 일 년 후의 일을 기약했다. 어쩌면 같은 학교에 들어가서 같은 인디밴드에 들어가 같이 연습하고 노래하고 그러겠다고.
“……당연하지.”
“재밌겠다.”
그때를 기대하며 웃는 나를 그는 상념에 깊게 잠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서로 각자의 미래를 상상하고 있을 때였다. 형이 돌연 분위기를 환기했다.
“시답잖은 소리 그만하고 공부해야지. 커피 마실래? 잠 안 올 것 같으면 마시지 말고.”
“연하게 한 잔만 마실게.”
“내가 가지고 올라갈 테니까 먼저 올라가서 공부하고 있어.”
“알았어.”
착각인가.
형이 내 눈을 먼저 피했다.
그는 커피 머신으로 걸어가 캡슐을 골랐다. 나는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식탁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책상에 앉아 스탠드를 켰다. 형이 본격적으로 내 공부를 봐주면서 가구 배치를 바꾸었다.
그는 창문과 문의 어느 방향으로 앉아야 집중력이 좋아지는지 계산했고, 어떤 색의 전구로 어느 만큼의 조도를 맞추어야 눈의 피로가 쌓이지 않는지도 하나하나 따졌다. 내게 최적의 학습 상태를 만들어 주려고 했다. 선생님처럼 아버지처럼 손위 형제처럼.
커피와 뇌를 깨우는 견과류 간식을 가지고 올라올 형을 기다리며 공부를 시작했다.
집중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한 시간쯤 지나 있었다.
곧 오겠다던 형은 아직이었다. 그에게 물어보려고 모르는 것은 따로 메모해 놓고 기다리다 형이 하도 오질 않아 의아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의 방으로 향했다. 가볍게 두 번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형은 자신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딱히 뭘 하는 건 아니었고 커피 두 잔과 간식이 담긴 쟁반을 책상 위에 고사 지내듯 내려놓고 그냥 앉아 있었다.
“뭐 해? 공부 안 봐줘?”
“아…….”
“왜 그래?”
“미안, 잠깐 통화하느라고.”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그의 핸드폰은 책상 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넋 나간 사람처럼 왜 그래? 학교 일이야? 아니면 아버지가 또 뭐라셔?”
“아니야, 그런 거. 뭐 좀 신경 쓸 일이 생겨서.”
“뭔데?”
그와 함께 내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으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커피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무슨 일인데?”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어물쩍 넘기려 드는 형에게 무슨 일이냐고 집요하게 물었다.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이 형이 내 머리칼을 헝클였다.
“우리 준영이 나중에 결혼하면 와이프 엄청 귀찮게 하겠다. 별일 아니야.”
“설마 윤 차장 일이야?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지? 지난번에 내가 아무 일도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어디까지 풀고 있었어? 이건 뭐야. 모르는 거 써 놓은 거야?”
“…….”
그가 별일 아니라고 말을 돌리며 노트를 제 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빤히 쳐다보는 내 고개를 억지로 책상 쪽으로 찍어 누르고는 딴생각하지 말고 여기 집중하라고 뒤통수를 토닥였다.
열두 시가 넘을 때까지 기출 문제를 풀고 오답 노트를 만들어 그가 숫자만 바꾸어 변형한 문제까지 풀고 나서야 오늘의 분량이 끝났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형이 어질러진 책상 위의 컵과 휴지 같은 것을 치웠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는 손길이었다.
지겨운 기지개를 쭉 켜며 앓는 소리를 했다.
“으으, 공부도 진짜 체력이 좋아야 하는 것 같아.”
“피곤해?”
“조금.”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가 아니라고 곧 정정했다.
“괜찮아. 별로 안 피곤해.”
“수고했어. 씻고 자.”
“……벌써 자게?”
“열두 시 넘었는데.”
“열두 시밖에 안 됐는데.”
이미 확인한 시간을 우리는 동시에 다시 돌아보았다. 시계는 열두 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더 할 수 있겠어?”
공부를 더 하겠느냐고 형이 물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잠깐 생긴 여유를 공부하면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형은 오늘 어디가 이상했다. 뭐가 어떻게 이상하고 다른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늘 일정 온도로 치달아 있던 형의 온도가 오늘은 미지근했다.
그가 공부를 더 하자고 할까 봐 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냈다.
“조금 이따가 자면 안 돼? 나 어제 유튜브로 노래 듣다가 되게 좋은 곡 찾았거든. 형도 들어 봐.”
그와 나는 음악 취향이 비슷했다. 취향 같은 게 없었던 나에게 취향을 만들어 준 사람은 형이었다.
나는 핸드폰과 이어폰을 꺼내 침대에 앉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형에게도 옆으로 오라고 매트리스를 툭툭 두드렸다.
문을 힐끗 돌아보았던 형이 마지못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침대에 올라와 등을 기대고 앉는다.
나는 그에게 이어폰 한쪽을 내밀었다. 형에게 빨리 들려주고 싶었다. 동영상을 찾아 재생하며 가까이서 보라고 그의 옆에 바짝 붙었다.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핸드폰을 올려 두었다.
그가 물끄러미 액정을 응시한다. 외국 밴드 음악을 형과 같이 들었다.
“기타 연주 되게 잘하지.”
“……그렇네.”
“형도 이렇게 칠 수 있어?”
“연습하면.”
“그럼 나중에 이 곡으로 연습하자. 나도 가사 연습할게.”
고개가 기울어져 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 무릎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은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졸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눈꺼풀이 둔중하게 가라앉았다. 형의 팔에 내 팔을 끼워 붙잡고 어깨에 뺨을 비벼 댔다. 은은하게 퍼지는 형의 냄새가 좋았다.
팔짱을 끼우고 그의 손바닥에 내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형이 손가락을 오므려 내 손을 맞잡았다. 우리는 헤어지는 게 아쉬운 연인처럼 달라붙어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노래를 들었다.
“나랑 같이 자면 안 돼? 노래 듣다가……, 졸리면 그냥 여기서 자.”
“…….”
“자꾸 형 방으로 가는 거 싫어. 깼을 때 기분이 좀 안 좋아.”
“……내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안 돼?”
“나 그냥 가만히 잠만 잘 자신 없는데.”
그가 고개를 기울여 시선을 마주쳐 왔다. 나는 형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나 괜찮아.”
“……뭐가?”
“나……, 나 괜찮아.”
“그게 무슨 말이야?”
“형이 하고 싶은 거 해도……, 괜찮다고.”
“내가 뭘 하고 싶어 하는데?”
그를 허락하는데도 형의 표정이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참담해졌다.
“뭘 하고 싶어 하든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가지 말고 여기서 자. 같이 자자.”
나는 도망치지 말라고 팔짱을 끼고 형의 어깨와 팔에 아예 체중을 기대 버렸다. 밀어낼 때는 극렬하게 달라붙고 집요하게 매달리던 그의 움직임이 오히려 내가 잡아당기자 뻣뻣하게 굳어진다.
나는 너른 어깨에 기댄 얼굴을 비틀어 형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내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 잠들었다고 가면 안 돼?”
“…….”
그를 바라보던 눈을 핸드폰 액정으로 돌렸다. 나른하게 감기는 노래를 들으며 마주 잡은 그의 손바닥에 톡톡 손가락으로 리듬을 타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어 버렸다.
✦ ✧ ✦
아침에 일어났을 때 형은 내 말을 무시하는 것처럼 옆에 없었다. 섭섭하다거나 서운한 게 아니라 스산하도록……, 외로웠다.
“오늘부터는 오고 가는 시간에도 외워.”
“……알았어.”
차에 타자마자 형이 내민 요약 노트를 받아 들었다.
내게 전달할 것만 전하고 형은 운전에 집중했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노트를 펼쳤다.
어젯밤에 왜 나와 같이 자지 않고 방으로 돌아간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혼자 눈 뜨는 아침을 나만 외롭게 느끼는 거라면 그건 비참한 일이었다.
외로운 내 마음과는 다르게 일과는 어제와 똑같았다. 학교에 갔다가 수업이 끝나면 형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바로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아침에 학교에 갈 때도 요약 노트를 들고 외웠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외우며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게끔 형이 옆에서 나를 다그쳤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착실하게 형이 시키는 대로, 그가 짠 일정대로 잘 따르는 나였지만, 오늘처럼 금요일 저녁이 되면 얘기가 달라졌다.
형에게 왜 이렇게 집중하지 못하느냐고 지적받을 정도로 태도가 불량해졌다. 특히 아홉 시를 넘기면 오장육부가 비비 꼬이는 것처럼 가만히 있질 못하고 산만해졌다.
“그만할래?”
“응. 그 말만 기다렸어.”
나는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쳤다. 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책과 노트를 덮어 버렸다. 펜을 든 채 의사만 물어봤던 형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제야 물러나 앉으며 피곤한 목덜미를 주물렀다.
제 몫의 공부를 하기도 바쁜데 윤 차장이 없어 집안 살림까지 떠맡은 형의 고단함이 나보다 훨씬 과중할 터였다.
“내일 토요일이니까 늦게 일어날래.”
“그래, 그럼. 안 깨울게.”
그가 정말 과외 선생님처럼 책상을 정리하고는 일어선다. 나는 의아한 눈을 들었다.
“왜?”
나가려던 형이 내 눈길을 읽고 물었다.
“……아니, 그냥.”
“피곤할 텐데 세수만 하고 얼른 자.”
“…….”
잘 자라고 눈으로 인사하고 방을 나가 버린다.
형은 오늘 평소처럼 내 어깨에 팔을 올리지도 않았고, 난해한 문제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는 내 뺨에 제 뺨을 붙이고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비비지도 않았다.
그의 손길을 경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던 내가 도리어 다가오지 않는 형의 어깨에 졸린 눈가를 비비기도 했고, 은근슬쩍 문제 풀이해 주는 팔에 손을 얹기도 했다.
아까 형이 내 손을 피했던가.
그랬던 것도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팔을 빼고 자세를 바꾼 것도 같았다.
내일은 주말이었다. 한두 시간은 게으름을 피워도 괜찮았고 더군다나 지금은 윤 차장도 여행으로 집을 비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형이 분탕을 친 이후로 이 층으로는 어지간해서는 올라오지 않았다. 아니, 그 일이 있고 난 후로는 단 한 번도 우리의 생활 공간에 침범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이 층은 불가침 영역이었고, 그 말은 오늘 밤 우리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지금처럼 영원히 우리가 하는 짓을 알 수 없었다. 설사 뭐가 이상하다고 느끼더라도 그 이상으로는 떠올리지 못하리라. 그가 우리의 육친이기 때문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게 형과 내가 밤마다 하는 짓이었다.
나는 형의 방으로 가 보았다. 이번에는 노크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마침 샤워를 하려고 했는지 그의 손에는 속옷과 갈아입을 옷이 들려 있었다.
“피곤하다더니?”
“……형, 혹시 또 자해한 거 아니지?”
“…….”
“옷 벗어 봐.”
어디가 좀 이상하다 싶었다. 형이 내 앞에서 떳떳하지 않을 때는 스스로 몸을 난도질할 때뿐이었다.
“옷 벗어 봐. 빨리.”
대답하지 못하는 그의 태도에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말투가 다급하고 딱딱하게 튀어나왔다.
그가 자해하지 못하게 하려고 나는 그에게 허락해서는 안 되는 짓까지 허용하고 있었다.
“빨리 옷 벗어 보라니까.”
다그치는 내 말에 대답하지도 않고 요구를 이행하지도 않는 형의 표정 위로 명백한 난색이 떠올랐다.
“또 그랬어? 또 자해했지?”
“안 했어.”
“그런데 왜 그래? 요새 왜 그러는 건데?
“내가? 어디가?”
“아무튼 이상해. 전부 다.”
“또 옛날 버릇 나온다. 칭얼거리고 투정 부리는 거.”
“그런 거 아니야. 형 좀 이상하단 말이야.”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형은 내게 한 번도 손대지 않았다. 마치 형의 손길을 바라고 원하는 것처럼 들릴까 싶어 차마 내 입으로 오늘 내게 손대지 않았다고, 착실하게 공부만 한 게 이상한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거절하는 나를 어떻게든 불온함으로 끌어들이던 그였다. 같이 죄를 짓자고, 감미로운 악으로 뒤덮이자고, 옳지 않은 길로 데려가던 형의 태도가 며칠 전부터 달라지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정말 그랬다.
“확인할래. 지금 확인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
“벗어서 보여 줘.”
그가 곤란하게 시선을 피해서 더 의심스러웠다.
고집스럽게 형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서 있던 그가 한참 만에 알겠다고 한숨을 쉬고 청진기 진료를 받는 것처럼 상의를 목까지 끌어 올렸다.
무언가 달라진 그의 태도를 자해 때문이라고 여기는 내 손길이 대충 끌어 올린 상의를 머리 위로 마저 벗겨 버렸다.
조명등 아래 드러나는 상반신을 샅샅이 확인했다. 형은 체념한 듯 고개를 돌린 채 어정쩡하게 서서 몸을 내주었다.
그의 가슴에 남은 상흔을 손으로 더듬었다. 이제 통각이 사라졌을 상처 위로 손가락이 닿자 살갗이 흠칫했다. 형의 반라 어디에도 방금 만들어져 생기가 뚜렷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흉한 자국 없이 매끄러웠으면 더 근사했을 형의 어깨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쓸어 만졌다.
“별걸 다 검사하네.”
그는 면괴하게 중얼거리며 내가 벗겨 버린 옷을 가져다 도로 입으려고 형태를 뒤집었다.
“같이 씻을까?”
“…….”
내 물음에 형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몸을 낱낱이 다 확인해야만 했다. 다른 곳에도 상처가 있는지 살펴야 하는데 억지로 형의 바지를 벗기고 속옷도 벗길 수는 없었다.
아픈 곳이 있다면 보듬어 주고 싶었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게 내 몸을 내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싫어도 그와 같이 씻어야 했다. 나는 형을 애욕 하는 게 아니라 형을 지키고 싶을 뿐이었다.
“같이 씻고 싶어.”
어릴 때는 형과 늘 같이 씻었다. 그에게 일 년을 주기로 약속한 이후로도 몇 번 같이 씻었는데 새삼스럽게 난감한 제안을 받은 것처럼 그의 입술이 싸늘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싫어?”
그런 게 아니라고 형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
“…….”
“싫지 않아. 싫은 거 아니야.”
혼란스러운 쪽은 나인데 형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이제 와서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것이 나의 심장을 덜컹이게 만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옷을 벗었다. 형이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냥 여기서 벗어. 어차피 아버지 안 올라오셔. 우리밖에 없어.”
그의 앞에서 하체를 노출하는 일은 아무리 횟수가 더해져도 여전히 수치스러웠다. 밋밋해서 터럭 하나 없는 국부를 형제에게는 특히 더 들키고 싶지 않았다. 보여 주지 않으려고 애매하게 비틀고 서서 형을 슬쩍 돌아보았다.
혼자서는 넓게 느껴지는 샤워 부스 안이 장신인 그와 함께 서자 비좁았다.
형이 수전을 틀었다. 적당한 온도의 온수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조금 뜨겁다.”
샤워 타월에 액상 비누를 짜 거품을 만들던 그가 내 말에 수전의 방향을 냉수 쪽으로 미세하게 돌려 주었다.
“지금은?”
“딱 좋아.”
나는 고개를 내려 그의 몸 어디에 새로운 상처가 생기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간접 등만 켜져 있어 세세하게는 보이지 않아도 내가 아는 것 말고는 다행히 새로운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다 확인됐지?”
“……응.”
내 의도를 전부 알고 있던 모양이다. 나는 형의 말에 겸연쩍게 대답했다.
그와 나는 희미한 어둠 속에 갇혔다.
그가 샤워 타월로 내 팔과 등을 쓸어내렸다.
그가 나를 씻겨 주면 보호받는 안도감이 들어 기분이 나른해졌다. 칼끝처럼 치솟았던 긴장이 풀어졌다.
아버지는 결단코 우리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윤 차장은 지금 부재중이었다. 우리를 방해할 사람은, 우리의 행위를 더럽다고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단둘만 있을 때 우리는 죄를 짓는 게 아니었다.
“아직도 확인 안 됐어?”
내 눈이 자꾸 제 몸을 훑어 대자 형이 그만하라고 턱을 붙잡아 세웠다. 뜨거운 물이 살갗을 타고 흘러내렸다.
“형이 자꾸 내 눈 피하니까 이상해서 그래.”
“내가 언제.”
“계속 피했어. 지금도.”
“내가 널 왜 피해.”
“그런 거 아니면 내 얼굴 봐.”
“…….”
형이 눈을 마주쳐 왔다. 전장을 구른 것처럼 엉망이 된 육신에 눈빛 하나만은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힘들면……,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나한테 해.”
“……뭘?”
그의 눈이 아연했다. 대체 너한테 무슨 짓을 하라는 거냐고, 망연하게 묻는다. 나는 형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하는 짓 이상의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나 괜찮아.”
뭐가 되었든 그의 결핍에 내 존재가 도움이 된다면 나는 그래야만 한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혈육이, 피붙이가 원한다면, 그를 죽이지 않으려면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라고 나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지만 나는 싫은 걸 형 때문에 억지로 참는 게 아니었다. 나는 형이 내 침대로 들어오길 은근히 바라기까지 했다.
그와 함께 침구를 뒤집어쓰고 어둠 속에 숨으면 그가 하는 행위를 체념으로 감내하는 게 아니라 형을 은밀히 만지기도 했고 슬쩍 무릎을 들어 그의 허벅다리 사이에 끼워 넣고 달아오른 형의 중심을 느끼기도 했다. 적극적으로 그를 만지지 못해 갑갑한 숨을 내쉬기도 했다.
“나 정말 괜찮으니까……, 형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해도…….”
수위를 넘는 것은 형이 아니라 나였다. 시선을 내리고 물에 젖은 그의 가슴께를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게 어떤 건데?”
“…….”
“내가 널 망치고 있는 거야. 넌 괜찮은 게 아니야.”
“나는…….”
“내가 원하는 게 어떤 건 줄이나 알아?”
그는 화가 나 있었다. 그의 어조가 폭력적이었다.
“알아, 나 알아. 그러니까 괜찮다고 하는 거야. 나 정말 괜찮아.”
“……준영아, 나는, 형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강압적으로 다그치려던 그가 참지 못하고 침음을 내며 갑작스럽게 입술을 겹쳐 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흐읍……!”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물이 흘러들었다. 혀와 혀가 화급하게 얽혔다.
처음에는 그가 주는 것을 그저 핥아 먹는 것만도 벅찼다. 그와 입술을 겹치는 일이 잦아지면서 이제는 형의 입술과 혀에서 어떤 맛이 나는지 음미할 수 있는 지경이었다.
형의 입술은 언젠가 딱 한 번 먹어 본 샴페인과 비슷한 맛이 났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하고 그윽한 과일주의 맛, 청량하게 혀에 감기는 탄산은 의외로 도수가 높아 아버지가 따라 주는 것을 두 잔 마셨을 뿐인데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형과 하는 키스가 그랬다. 머리가 어지럽고 명백하게 죄를 짓고 있으면서 우리가 하는 짓이 죄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나를 빨아 삼키는 입술과 혀가 달가웠다.
그가 고개를 비틀어 입술의 교접을 짙게 만들었다. 몸이 뒤로 떠밀려 유리 부스에 등이 부딪쳤다. 형의 악력이 벗은 몸을 옥죄어 왔다. 나를 짓누르는 무게감이 좋았다. 그에게 매달리듯 두 팔로 형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얽혀 있던 혀가 풀어지고 입술이 축축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단단한 목에 팔을 휘감은 채 형과 눈을 마주쳤다.
“하아, 하아…, 이거 나쁜 건데.”
“……응?”
“기분 좋아. 형하고 키스하는 거.”
“…….”
“나 어떡하지…, 나 자꾸 이상해져.”
“…….”
“원래 그런 거지? 형이라서 그런 거 아니지?”
“…….”
그가 대답하지 않고 멍하게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형은 여러 명하고 해 봤으니까 잘 알잖아. 다른 사람하고도 이래? 원래…, 원래 이렇게 기분 좋은 거야?”
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떠올랐다.
기쁜 것도 같고 슬픈 것도 같고 아픈 것도 같은…….
너무 많은 정서가 깃들어 있어 나처럼 미성숙한 존재가 깨우치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해 보였다.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우리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일 년이 지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그 후를 장담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가 내 앞에서 없어지는 건, 사라지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나의 형으로 남을 것인지, 전혀 낯모르는 타인처럼 서로 모르는 체하고 살아갈 것인지 선택하게 하고 싶었다.
일 년 후가 그와 나의 절연이라면 차라리 형과 이런 짓을 계속하면서 사는 편이 나았다. 나는 형을 놓을 수도 없고 어딘가로 보낼 수도 없었다.
이래도 괜찮은 거냐고 물어보면서 그의 어깨를 움켜쥔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형을 붙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 손톱 색이 하얗게 질리도록 그의 살이 눌릴 정도로 힘을 주어 붙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 맞아. 우리 이러면 안 돼.”
머리를 숙여 가까이 다가온 저음이 속삭였다. 나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되는데 왜 이러는 거냐고 나는 그를 원망했다.
형이 귓가에 부드러운 육성으로 속삭였다.
“내가 널 망치고 있는 거야.”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이렇게 감미롭게 사람을 망치는 일이 가능한지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의 젖은 입술이 귓불을 아프게 깨물었다.
“읏……!”
어깻살이 움츠러들었다. 형의 입술이 물기에 젖은 피부를 조금씩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편하게 나를 먹어 치울 수 있도록 얼굴을 돌려 목과 가슴을 내어 주었다.
“나는 벌 받을 거야…….”
나는 그에게 동조했고, 때로는 그를 부추기기도 했다.
죄를 짓는다는 죄책감조차 흐려졌다. 형과 이러는 것은 기분 좋은 행위였다.
그에게 입술을 갖다 대며 형과 조금이라도 더 밀착하려고 내 무릎을 가르고 들어온 그의 오금 뒤로 발을 걸치듯 매달렸다.
느릿하지만 분명하게 발기한 성기를 그의 살덩어리에 내밀한 움직임으로 뭉그적댔다. 허리 아래가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으으응……, 으읏.”
물기 젖은 입술 살을 나긋하게 물고 이로 깨물기도 하고 혀로 간질였다. 마주 응해 주는 그의 혀가 파르르 떨렸다. 입술을 살짝 떼고 형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아, 잘못된 거 아니야. 말해 줘. 잘못된 거 아니라고.”
그가 내 팔뚝을 와락 움켜잡았다. 마치 강제로 입을 맞추듯 나를 붙들어 잡고 억지로 고개를 추켜세우게 했다.
그는 형의 하체를 만지려고 하는 나의 손을 잡아 누르며 짐승이나 하는 짓이라고 제지하던 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못된 거야. 죄는 나만 짓는 거야.”
“……형.”
“내가 너를 이렇게 망친 거야. 알겠어?”
망설이듯 바라보는 나를 움켜잡고 그가 윽박질렀다. 손대지 못하게 하는 형의 달아오른 성기가 아래로 바짝 밀어붙이듯 다가왔다. 탄력적인 등 근육이 나를 향해 구부러지며 수축했다.
“너는 죄짓는 게 아니야. 이건 내 몫이야.”
형의 손이 나의 등골을 따라 내려왔다. 아래가 움찔거렸다. 나는 그를 조르듯이 형의 허벅다리 사이를 가랑이로 꽉 물고 있었다.
나를 소중하게 만지던 형의 움직임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어쩌질 못하고 어떻게든 그에게 치대려고 하는 나의 몸뚱이 때문에 비참한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니야. 나도 같이 잘못하는 거란 말이야. 왜 자꾸 형만 아프게 해?”
“그러지 마. 그건 짐승들이나 하는 짓이야.”
그가 일부러 아프게 살을 부딪쳐 온다.
여린 허벅지 안쪽 살에 따갑게 쓸리는 젖은 체모의 느낌, 발기되어 딱딱한 살과 그 아래 자리한 두툼한 고환에 사타구니를 문질러 오면 선득한 부피감과 뜨거운 체온이 감지되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감촉이 섬세하게 발달한 손과 입술로 그의 치부를 만지고 싶었다. 손아귀에 가득 채우듯 움켜쥐고 터트릴 것처럼 꽉 힘을 줘 보고 싶었다.
친형을 만지고 싶어 하는 음란한 손가락을 입술에 물고 세게 깨물었다.
나를 끌어안은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그가 다시 거센 무력으로 아래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붙들린 사지가 함께 들썩였다.
“아읏……, 으, 으응, 응, 형, 형……!”
무슨 약을 삼킨 것처럼 새된 신음이 거칠 것 없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숨을 들이마시는 그의 가슴과 복벽근이 한꺼번에 힘차게 물결치듯 일렁거린다.
목덜미에 짧게 친 머리칼이 만져졌다. 나는 형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그의 입술에 매달려 갈구하듯 벌어진 입안으로 뜨거운 혀를 끌어왔다. 얼크러진 혓바닥을 세게 빨았다. 그가 내뱉는 호흡과 타액이 목구멍으로 꼴깍거리며 넘어갔다.
정신없이 그와 입을 맞추었다. 중심을 잡지 못한 두 개의 몸이 함께 휘청거렸다. 발바닥이 물기로 찰박여 발을 디딜 때마다 소리가 공명하듯 울렸다.
입술을 떨어트린 그가 나의 체중을 완연히 들어 올리고 유리 벽으로 난폭하게 밀어붙였다. 젖은 등이 수증기가 뿌옇게 서리는 유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하아, 하아, 형, 나 미칠 것 같아.”
“그냥 가만히 있어.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떡해, 우리 어떡해.”
“죄는 나만 짓는 거야. 나만 아프면 돼.”
“하아,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그런 말……, 으읏!”
죄는 같이 짓고 있는데 혼자 잘못한 것처럼 그런 아픈 말 하지 말라고 도리질을 쳤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그가 하체를 부딪치는 바람에 숨이 턱 막혀 왔다. 살이 물기로 젖어 철썩대며 맞붙고 떨어졌다.
“흐읏, 친동생한테 발정하는……, 미친 새끼한테 너는, 준영이 너는……, 하아, 어쩔 수 없이.”
“하아, 아읏, 읏……!”
난잡하게 철벅거리며 부딪치는 하체의 울림에 전신이 요동친다. 그의 목을 죽을 것처럼 끌어안았다. 체열이 너무 뜨거워서 이대로 발화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아, 어쩔 수 없이, 크읏, 당하는 거야.”
“형……, 형!”
한계까지 치솟은 가랑이가 친동생에게 발정하는 미친놈의 벌겋게 달아오른 성기와 마찰하고 부딪쳤다.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 허벅지 안쪽 근육이 후들후들 떨려 왔다.
광폭하게 숨을 쏟아 내던 형의 움직임이 움찔 굳어 버렸다. 아랫배를 바짝 붙여 밀착시키고 숨골이 조일 만큼 음란하게 사타구니를 문질러 댄다.
“아, 아으, 으응……!”
나는 형의 하복부에 달라붙어 사정했다. 눈앞이 섬광처럼 하얗게 번지고 불꽃을 삼킨 듯 뜨거운 전율이 전신을 핥아 내린다.
“하아, 하아, 하악…….”
그의 가슴이 들썩거렸다. 나는 거목 같은 뒷덜미에 두 팔을 휘감고 경련하듯 떨었다.
“흐윽…….”
난데없이 눈물이,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그가 숨을 고르며 내게 사과했다.
“미안. 형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 ✧ ✦
토요일 아침은 나를 깨우는 소리가 없었다. 핸드폰 알람도 아침을 먹으라고 부르는 윤 차장의 목소리도 없어 모든 것이 고요했다.
반쯤 열어 둔 창문으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의식이 천천히 깨어났다.
눈을 깜박이며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형은 어젯밤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지 못하는 나를 침실로 데려와 깨끗하게 물기를 닦아 내고 옷을 갈아입혔다. 그리고 침대에 눕히고 재웠다.
내 이마와 뺨에 소중한 이를 대하듯 조심스럽게 닿는 입술의 감촉과 체온이 막 수마에 빨려 들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같이 자도 괜찮다고 했고, 그가 없이 눈을 뜨면 기분이 이상하고 허전하다고까지 했는데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잠이 들면 사라졌다.
문득 아침 해가 밝게 느껴졌다. 눈이 부셔서 나는 침구를 머리 위로 끌어 올렸다. 시야가 컴컴해지는 게 훨씬 편안했다.
나는 웅크린 채로 생각했다.
형에게도 아침의 빛이 무척 밝았을 거라고.
이 빛이 몸에 닿는 게 그에게는 채찍질을 당하는 것처럼 아팠을 거라고.
그는 밝은 해 아래에서까지 죄를 지을 정도로 인간 말종이 아니었다.
나는 이불 속에 해를 피해 숨으며 조금 울었다.
형이 불쌍해서. 형의 아픔을 공감하는 내가 미워서.
그런 상념에 빠져 훌쩍거리다 깜빡 또 잠이 들었다가 열한 시가 넘어서야 일어났다.
깨우지 않겠다고 하더니 형도 아버지도 나를 찾지 않았고 집 안 전체가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막 일어난 몰골을 수습하지 않고 형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가볍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
침대 위는 마치 잠을 자지 않은 것처럼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형, 안에 있어?”
그의 방 안쪽 욕실 문도 열어 보았다. 아침에 씻고 나갔는지 욕실 타일이 물기로 젖어 있었다.
어디 나갔나.
일 층으로 내려갔다. 나무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삐걱대는 소리만 크게 울렸다. 가뜩이나 식구가 적어 유독 넓게 느껴지던 집 안이 광막할 정도로 썰렁했다.
전실에 놓여 있던 골프백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도 출타한 모양이었다. 이 넓은 집에 나 혼자라는 뜻이었다.
핸드폰을 들고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 음이 지루하게 이어지다 한참 후에야 전화를 받는다.
“형?”
―이제 일어났어?
“어디야? 나갔어?”
―약속이 생겨서 잠깐 나왔어.
“무슨 약속? 언제 들어와?”
―아침 차려 놓고 나왔는데 먹었어?
핸드폰 너머 그의 주변이 시끄러웠다. 뭐라고 떠들어 대는 분주한 소음 때문에 형의 음성도 살짝 커져 있었다.
“아니, 아직. 나 지금 일어났어.”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나직하게 들려오는 육성에 귀를 기울였다.
―아침 먹고 좀 쉬다가 공부해. 수험생 깨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나왔어.
“나 참. 수험생 잠도 못 자게 하는 게 누군데.”
그와 뜨겁게 치대던 어젯밤의 일을 농담처럼 들추었다. 흐트러지는 머리칼을 매만지며 형의 응답을 기다렸다.
―…….
“여보세요? 형?”
―그래.
“언제 와?”
―좀 늦을 것 같은데.
“좀 늦는 게 언젠데?”
그때 그의 옆으로 지나가는 차의 모양이 그려질 정도로 큰 자동차 엔진 음이 들려왔다.
―나중에 통화하자.
주변에 누가 있는 모양이었다. 서둘러 통화를 마치려고 하는 그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골프 치러 가셨나 봐.”
―알아. 아침에 나가셨어.
“……지금 집에 아무도 없어.”
―…….
“나밖에 없어.”
―…….
우리밖에 없었다. 소리 내지 않으려고 신음을 억누를 필요가 없었고, 누가 들어올까 봐 조마조마해 가며 애간장을 녹일 필요도 없었다.
형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그의 가슴을 관통하는 호흡의 통로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강준원 선배! 형을 부르는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따 전화할게.
그가 황급하게 통화를 종료했다.
끊어진 핸드폰 액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뭐야.”
형이 내 곁에만 온종일 있던 사람도 아니고, 학교생활도 밴드 활동도 바쁘게 하는 사회적인 인간이라는 걸 잘 아는데 입술이 부루퉁해졌다. 나에게도 그렇지만 형에게도 오늘은 모처럼 한가로운 주말이었다.
“언제는 다른 걸 하면 큰일 나는 것처럼 난리 치더니.”
다 그만두고 일 년은 내게 집중할 거라고 말한 형이었다.
하필이면 집에 아무도 없는 오늘, 약속이 있다고 곁을 비운 형 때문에 기분이 시무룩해졌다.
그를 반갑게 부르던 여자의 목소리가 신경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너무 반가워서 크게 그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척하고 싶은 조바심이 밝은 음성에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형은 동생인 나의 착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매력적이고 잘난 사람이었다. 임주호는 목숨을 걸고 허경민과 양다리를 걸쳐 가면서까지 그를 만나려고 했다. 내가 차단하지 않았으면 형은 임주호를 나 대신 만지고 안으면서 어떻게든 나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을 거다.
형과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나까지 그의 전신을 욕망하게 되었는데, 타인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였다.
더군다나 나는 처음에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필사적으로 그를 거부했었다. 그가 나 때문에 몸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면 끝까지 밀어냈을지도 모른다.
내 마음인데 무슨 마음인지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불현듯 형이 보고 싶었다. 그저 그렇게 보고 싶은 게 아니라 가슴이 미어지도록 보고 싶었다. 심장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근육과 뼈, 살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소파에 힘없이 엎어져 물리적인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그가 보고 싶다는 사실을 서늘하게 깨달았다.
한참을 가만히 누워만 있다 기계적으로 일어났다.
형의 지시대로 그가 차려 놓은 아침을 먹었다. 이미 식어 버린 음식을 천천히 해치우고 식탁을 치웠다.
커피는 작년부터 마시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흑연을 탄 것처럼 쓰기만 한 물을 굳이 돈 주고 사 먹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친구들과 카페에 가도 초코나 딸기가 들어간 것만 먹었는데 공부의 양이 늘어나면서 졸음을 이기려고 카페인 음료를 처음 접했다.
그때도 커피는 입에 대지 않았는데 작년 어느 날부턴가 커피가 더 이상 쓰지 않았다. 쓰기는커녕 도리어 구수했다.
석주도 보리차 맛이 난다고 아메리카노를 자주 마셨는데 그런 맛은 아니었다. 여전히 쓰고 쌉싸래했다. 다만 전에는 무조건 못 먹을 맛이라고 치부하던 그 맛이 작년부터는 오묘한 향이 맡아지며 이상하게도 부드럽게 느껴졌다.
몸서리쳐지게 씁쓸하던 커피가 향긋해진 것처럼 이렇게 어른이 되어 가는 모양이라고, 무심코 커피를 주문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는 형이 즐겨 마시는 캡슐로 커피를 내리고 방으로 올라갔다.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그가 할당해 준 분량을 채웠다. 형의 도움 없이는 풀기 어려운 문제를 붙잡고 한참 골몰해 겨우 답을 찾아냈다.
문제 풀이를 사진으로 찍어 형에게 보냈다.
[나 이거 혼자 풀었다]
잘했다는 칭찬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형에게서는 문자에 답은커녕 이따 전화한다던 연락조차 없었다.
언제 오느냐고, 어디냐고, 형이 시키는 대로 혼자서 공부 잘하고 있다고, 공부하는 사진까지 찍어서 보냈다. 또 한참 후에 형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내가 보낸 것들을 아래에서부터 훑어 올렸다.
강준원 스토커가 따로 없었다.
“어딘지는 왜 이렇게 궁금해하냐. 서울 어디에 있겠지.”
신경 쓰지 말자고 핸드폰을 책상 저 멀리 내려놓고 책으로 고개를 숙였다.
“……음, 여기다가 상수를 곱해서…….”
수식을 써 내려가는 노트 위로 난데없는 눈물이 툭, 떨어졌다. 글자 위로 동그란 눈물방울이 번졌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
가슴이 아려 왔다. 형의 부재를 못 견뎌 하던 아까처럼 가슴이 살까지 다 아팠다.
나는 멍청하게 눈물을 게워 내며 왜 이렇게 아픈지 몰라 가슴을 문질렀다.
“우욱……, 욱…….”
참으려고 하자 눈물이 더욱 치솟았다.
“하아……, 으…….”
가슴이 너무 아파 옷자락을 움켜잡고 책상 위로 엎어졌다.
빨리 형이 돌아와 아픈 나를 어루만지며 괜찮을 거라고 위로해 줬으면 했다.
형이 아니면 그 누구도 나를 설득할 수 없었다.
이 잠깐의 부재도 견디지 못하는데 일 년이 지나 그가 내 앞에서 없어지면 어떻게 될지 무서웠다.
콧등을 지나친 눈물이 노트 위로 툭툭 떨어져 내린다.
형의 독립은 이미 확정된 일이었다. 내 수능이 끝나고 일 년이 지나면 그는 집을 나갈 것이다.
사실 지금 당장 나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형이 집을 나가야 하는 명분은 차고 넘쳤다. 아무리 아버지가 가부장적이라고 해도 성인인데다 자기 앞가림을 무척 잘하는 큰아들의 독립을 막을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형은 윤 차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원래도 썩 좋지 않던 그 사이가 얼마 전의 일로 악화되었고,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누구보다 형을 내보내고 싶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일 터이다.
지금은 수험생인 나 때문에 드러내 놓고 말 못 하지만 내가 대학에 합격하면 아마 바로 나가라고 할지도 모른다.
나를 대학에 보내면 형이 이 집에서 부채감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일 년 후에 우리의 관계가 끝나리라는 것도 예견된 일이었다.
책상에 엎어져 아픈 가슴을 쥐어뜯듯이 움켜쥐고 한참 숨을 골랐다.
핸드폰을 가져와 몇 시간이 지나도록 답신이 없는 공허한 메시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통증이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제집을 그대로 펼쳐 두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이제 곧 10월이 되는데도 늦더위가 계속되어 사람들의 차림은 대부분 반소매였다. 나는 긴소매 셔츠를 팔뚝까지 밀어붙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등이 땀으로 촉촉하게 젖었다.
지하철을 타고 홍대로 갔다. 형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작업실은 굳게 문이 잠겨 있었고, 아무리 두들겨도 반응이 없었다.
아무도 없다는 게 명백한데 오기가 생겨 쉬지 않고 문을 때리자 계단 위쪽의 문이 벌컥 열렸다. 미간을 흉흉하게 일그러트린 남자가 소리쳤다.
“지금 거기 아무도 없어요! 좀 조용히 하라고!”
“아……, 죄송합니다.”
“거참, 시끄럽게!”
그가 쾅 하고 문을 닫고 도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형의 밴드가 정기적으로 공연하는 클럽으로 향했다.
토요일 오후의 클럽은 아직 오픈 전이라 조용하기만 했다. 한가로운 적막이 유독 휑하게 느껴지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사람의 인기척이 부스럭대며 들려왔다.
“아직 문 안 열었는데요?”
낯이 익은 여자 바텐더가 내부를 청소하며 영업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그녀에게 꾸벅 인사했다.
“어? 내가 혹시 너 알던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 저 지난번에 왔었는데요.”
“쉽게 잊혀질 얼굴은 아닌데 왜 기억이 안 나지. 내가 왜 널 기억하지 않았던 거지? 필요 없으니까 기억 안 한 걸 텐데.”
여자는 걸레를 손에 들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양 혼잣말하며 갸우뚱거렸다.
“네? 저 준원이 형 동생인데요.”
한참 고심하던 직원이 아아, 하고 걸레를 테이블 위로 던지며 아는 척을 했다.
“아, 맞다. 맞다. 강준원 동생이었지. 고딩 맞지? 그래서 내가 머릿속에서 소거해 버렸다. 응, 맞아. 고딩을 기억해서 어디다 써먹겠어.”
“저 혹시 저희 형 오늘 여기 안 왔어요?”
“안 왔는데. 요새 안 와. 준원이 얼굴 못 본 지 꽤 됐어.”
직원이 다시 걸레를 잡고 테이블과 의자를 분주하게 닦았다.
“형 찾으러 여기까지 온 거야? 설마 준원이 핸드폰 번호 모르는 건 아니지?”
“아니요, 형이 연락이 안 되어서요.”
“너희 형이 핸드폰 손에 꼭 쥐고 있는 스타일은 아니잖아.”
“……저희 형 잘 아세요?”
“이 동네에서 강준원 모르면 간첩이지.”
그녀의 말에 그런 형을 가진 동생의 자부심이 가슴으로 뿌듯하게 차올랐다.
“저희 형 유명해요? 저희 형……, 인기도 많아요?”
“많지, 그럼. 걔네 보려고 일부러 지방에서 올라오는 팬들도 있는데? 준원이 음악 그만둔 건 아니지?”
“지금 좀 바빠서, 형한테 일이 생겨서요. 그거 끝나면 다시 할 거예요.”
“기획사랑 음반 계약했다고 애들 난리 치고 좋아했었는데 준원이 때문에 딜레이 된 것 같더라. 하여간 인디씬에서 뭐 좀 나오려고 하면 꼭 문제가 생겨.”
“…….”
바쁘게 청소하며 뭐라고 구시렁대던 그녀가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하긴 걔가 뭐 인디밴드에 목매달고 그럴 스펙은 아니니까. 강준원 S대 다니잖아. 아 참, 네가 더 잘 알겠다.”
내가 그의 동생이라는 걸 잠깐 깜박했었는지 그녀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저희 형 여자 친구 아세요?”
돌아가며 남은 테이블도 닦던 직원이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여기 몇 번 온 적은 있는데, 얘기해 본 적은 없어. 급한 일이야? 전화 다시 걸어 봐. 전원 꺼져 있는 거 아니면 언젠가는 받겠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핸드폰을 꽉 쥐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아프게 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예사롭지 않은 통증이 자꾸만 일었다.
“전화를 안 받아서…….”
“아무튼 여긴 안 왔어. 아니면 밴드 연락처 가르쳐 줄까? 보컬 연락처는 아는데.”
무슨 중요한 일이 있어서 형을 찾는 모양이라 여기는 직원이 친절하게 밴드 멤버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었다.
아마 전에 왔을 때 내게 술을 권했던 그 사람일 거다.
귓바퀴와 귓불 여백마다 피어싱이 박혀 있고 머리칼은 갈색과 녹색이 투톤으로 섞여 화려했는데 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어색하지 않고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클럽을 나와 직원에게 받은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 주의인지 세 번째 걸자 그제야 전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도대체 누구길래 안 받는데 전화를 세 번이나 걸었냐고 묻는 음성이었다.
“아, 저, 안녕하세요. 저 강준원 동생인데요.”
―네?
“강준원이요. 준원이 형 동생이요.”
―준원이? 준원이 동생? 내 핸드폰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그가 황당하게 되물었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겼는데 형이 전화를 안 받아서, 여기 클림트에서 형 전화번호 물어봤어요.”
―그랬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강준원 전화 안 받냐?
개인 정보에 그렇게 예민한 성격은 아닌 듯했다. 그가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물었다.
“네, 형이 전화를 안 받아서요. 집에 일이 생겼는데, 아버지가 형을 당장 찾아오라고 하셔서요.”
나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다.
―그 새끼 밴드 그만둔다고 하고 연락한 적 없는데. 연습실에는 가 봤어?
“그 놀이터 앞에 있는 작업실 말이죠? 거기 가 봤는데 사람 없었어요.”
―그럼 나도 잘 모르는데……, 어쩌지.
나는 망설이다 물었다.
“혹시 저희 형 여자 친구 전화번호 아세요?”
―강준원 여자 친구 있어?
“어, 없어요?”
―나 잘 모르는데.
“여기 바텐더 누나는 형 여자 친구 본 적 있다고 하던데요.”
혼란스러울 정도로 옥죄이던 가슴뼈의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과호흡이 오고 있었다. 형이 나를 가지고 놀 리가 없는데,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걸 친동생인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걔 여친 아니고 학교 후배일걸.
“여자 친구 아니고 학교 후배예요?”
―준원이 여자 친구 없어.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 것 같던데.
“형이요? 좋아하는 사람……, 있대요?”
―예전에 술 먹고 은근슬쩍 떠봤는데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건 맞아. 유부녀인지 불륜인지 자꾸 안 된다고만 하더라고. 안 되는 사이라고.
“아…….”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너희 아버지 최근에 재혼하시지 않았어? 새어머니가 있다고 들었거든. 혹시 그 새어머니랑?
“저기요, 죄송한데 미치셨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셨으면 좋겠어요. 아주머니랑 형이랑 나이 차가 스무 살 가까이 나는데요.”
위태롭게 치솟던 위기감이 형을 향한 미안함으로 바뀌었다가 남자의 말에 황당하고 어이없는 수준을 넘어 화가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지고 드는 말투에 그가 민망한 헛기침을 했다.
―미안. 아무튼 술 처먹고 한다는 소리가 안 되는 사이라고만 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한 거지. 준원이한테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지?
“그건 아니고 형이 오늘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돼서 아버지가 찾고 계세요.
―그 자식, 내 전화 안 받은 지 두 달도 넘었어. 나도 잘 모르겠다. 준원이 아버지하고 사이 안 좋냐? 갑자기 밴드 그만둔다고 해서 무슨 일 있는 거면 성급하게 그러지 말고 생각 좀 해 보라고 했거든.
그가 답답하다는 듯 내게 하소연했다. 갑자기 밴드를 그만둔 형의 존재가 몹시 아쉬운 모양이었다.
―사실 우리 지금 엄청 곤란한 상황이야. 그 새끼야 아쉬울 거 없겠지만 나도 그렇고 우리 애들은 이번 계약에 목숨 걸었어. 우리 그때 만난 거 기억하지? 형 얼굴 기억하지?
“네.”
급하게 형을 찾는 나에게 그가 도리어 형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대형 기획사하고 계약하는 게 흔한 기회도 아니고, 준원이가 빠지면 저쪽도 안 하겠다고 하는 중이라. 준원이 집에 우환이 생겨서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연기시켜 놓기는 했는데, 그것도 올겨울 지나면 끝이야. 너희 형 기타 연습은 하냐? 연습실도 안 오는 것 같던데.
“잘 모르겠어요.”
―너희 아버지가 준원이 밴드 하는 거 반대한다는 얘기는 들었어. 아버지 때문이지?
“아버지는 형 음악 하는 거 모르세요.”
―그럼 갑자기 왜 그만하겠다는 건데? 이게 무슨 금수저의 일탈 같은 거야? 우리는 뭐 어떻게 망하거나 뒤지거나 지하고는 상관없다는 거잖아, 지금. 강준원 동생아, 우리 진짜 진지하다. 다들 여기 목숨 걸었어.
그는 제발 저희의 안타깝고 심각한 처지를 알아 달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호소했다.
“제가 왜 그만둔다고 하는 건지 물어볼게요.”
―오, 그럴래? 준원이 이렇게 인디 그만두는 거 내가 다 아까워서 그래.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살살 달래 봐. 그리고 나한테 연락해 줄래?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강준영이요.”
―그래, 준영아. 하아, 부탁할게. 꼭 부탁한다. 연락 줘. 형 기다린다.
나는 그러겠다고 그와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람들로 분주해져 가는 토요일 홍대 거리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형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을 터덜터덜 걸었다.
‘안 되는 사이.’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때 임주호와 그가 한 짓을 목격하고 형을 자극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영원히 안 되는 사이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안 되는 사이.
형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안 되는 사이라고.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준영아?”
고개를 들었다. 막 차에서 내린 형이 운전석 문을 닫고 있었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이 서 있었다.
온종일 그리워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다급함으로 찾아다니던 사람이 불쑥 눈앞에 나타나자 의식하지 못하던 탈력감이 전신을 덮쳐 왔다.
반가움과 미움, 괜한 원망, 그럼에도 보고 싶었던 이를 향한 감정이 한꺼번에 치솟아 오른다.
“왜, 왜 전화 안 받아……?!”
나는 그에게 소리를 질러 버렸다.
형은 잊고 있었다는 듯 바지 주머니를 손으로 더듬거리다가 이내 차 문을 열고 옆좌석에 떨어져 있던 핸드폰을 주워 올렸다. 액정을 켜고 무수한 부재중 전화 숫자를 확인하고 나를 돌아본다.
“아…….”
“계속 전화했단 말이야. 이따 전화한다고 그랬잖아. 이따, 이따가 한다고……. 형한테 이따는 도대체 언제야? 이따 전화한다는 사람이, 영원히 안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저녁 이내가 어스름하게 내려앉고 어느새 날이 저물어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그에게 소리치기가 무섭게 가로등이 켜졌다. 아직은 희미하게 느껴지는 불빛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만들었다. 형의 당황한 표정 위로도 할로겐 등의 주홍빛이 드리워졌다.
“미안. 미처 생각 못 했어. 그런데 너 지금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온종일 내가 한 걱정과 불안에 비하면 지나치게 가벼운 사과였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고 무릎을 꿇고 빌어도 용서해 주고 싶지 않은데 그가 간단히 사과하고 묻는다.
“형은?”
“뭐?”
“형은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너는 어디 갔다 오는 건데?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먼저 물어본 선착순이 무슨 큰 권리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홍대.”
“거긴 왜?”
“형 찾으러.”
“…….”
“형은 어디 갔다 왔어?”
“들어가자.”
“어디 갔다 왔냐고. 나도 말했잖아. 형도 대답해.”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
그가 대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 문이 잠기며 헤드라이트 불빛이 위협적으로 번득거렸다.
형이 도어락을 풀고 나를 돌아본다. 나는 고집스럽게 서 있었다.
“준영아.”
“어디 갔다 왔어?”
형의 이름을 반갑게 부르던 여자의 음성, 번잡한 거리의 차 엔진 음, 바쁜 일이 끝나면 전화하겠다고 해 놓고 그는 나를 종일토록 기다리게 만들었다. 종일토록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불안이 공포가 되어 차라리 공황에 가까운 상태였다.
안 되는 사이라는 말을 형의 친구에게 듣지 못했으면 나는 어디가 변해 버린 형의 태도에 어쩔 줄을 모르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비롯된 모질고도 가혹한 붕괴의 칼날이 내 목덜미를 스치고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는 걸 형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어디 갔다 왔어. 전화 한 통은 해 줄 수 있었잖아. 그렇게 바빴어? 걱정하는 나는 안중에 없을 정도로 그렇게 바빴어?”
“핸드폰 차에 두고 몰랐어.”
“뭐 하느라고?”
“…….”
그의 가슴이 점점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한숨을 쉬며 가볍게 꺼져 내렸다.
“……내가 이제 귀찮아?”
예전처럼 나를 버려두었던 그때처럼 내가 귀찮아진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면 아직 일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때 한 약속처럼 내 앞에서 없어지려고 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런 거 아니야.”
“무슨 스토커처럼 자꾸 물어봐서 미안해. 그런데, 그래도 말해 줘. 어디 갔다 왔어?”
따지는 목소리가 울먹거렸다. 입술을 말아 문 형의 곤란한 눈이 나를 향했다.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듯 침묵을 고수하던 그가 거의 울 것 같은 나를 보고 마음이 약해졌는지 결국 입을 열었다.
“……엄마한테 갔다 왔어.”
“뭐?”
의아한 눈을 들었다.
“하늘공원에.”
“…….”
“……엄마 있는 데 갔다 왔어.”
그가 그냥 그랬다고, 별일 하지 않았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왜? 추석 때 어차피 갈 건데.”
“그냥,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서. 넌 그럴 때 없어?”
친엄마는 형이 아홉 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다섯 살이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형은 엄마의 감촉도 느낌도 냄새도 기억하고 있을 거다. 그래서 가끔은 엄마가 보고 싶어지고 그리워지기도 하는 듯했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학교 잠깐 들러서 학사에 서류 제출하고 하늘공원 갔다가 지금 오는 거야.”
어머니가 모셔져 있는 하늘공원은 차로 왕복 두세 시간은 걸리는 먼 거리였다. 설날이나 추석 때 연례행사처럼 어머니를 보러 다녀오면 하루가 꼬박 걸렸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 어느 날은 하루쯤은 건너뛰어도 괜찮지 않냐고 아버지에게 투덜거리기도 했었다.
“그런 거면 나랑 같이 가면 좋았잖아.”
“네가 그렇게 한가해? 너 이렇게 시간 허비하는 줄 알았으면 데려갔지. 공부하라고 일부러 안 건드렸는데.”
그가 허탈하다는 투로 말했다.
나는 형에게 쫓아갔다.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형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형이 그리워하는 엄마의 냄새, 감촉, 추억이 내게는 형에게서 맡아졌다. 어릴 때부터 만들어 온 모든 기억과 추억이 형에게 있었다.
엄마의 냄새, 엄마의 감촉, 절대자의 체온.
“나 오늘 하루 종일 미치는 줄 알았어.”
“그게 무슨……. 왜?”
“형이 없어서, 그냥 형이 없으니까 갑자기 가슴이 너무 아팠어.”
“…….”
“너무 아파서, 기다릴 수가 없어서 찾으러 나갔는데 형이 어디에도 없잖아. 그래서 미치는 줄 알았어.”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내가 어딜 간다고.”
담벼락이 만들어 주는 어둠 속에 서서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형의 손이 심란해하는 내 등줄기를 쓸어 주었다.
“들어가자.”
“조금만……, 잠깐만 더.”
“여기서 이러지 말고, 준영아.”
“조금만 더.”
“…….”
“싫어. 안 놓을 거야. 놓기 싫어. 놓으면 없어질 것 같아. 형이 사라질 것 같아서 무섭단 말이야.”
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형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허리는 두 팔로 세게 감아 안았다. 조금이라도 내 몸에 형의 몸 냄새와 체온을 묻히려고 비비적거렸다.
그때였다. 부드러운 차 엔진 음이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멈추었다. 곧 시동이 꺼지고 누군가 차에서 내린다.
나는 움찔하는 형의 허리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나를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주위를 의식하는 그의 척추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해?”
“……오셨어요.”
“거기 준영이야? 인마, 너 지금 형한테 뭐 하는 거야?”
차에서 내린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가 터벅터벅 걸어와 어둠 속에 서 있는 우리 둘을 발견하고 눈살을 찡그렸다.
“형이 없어질 것 같아서, 사라질 것 같아서요.”
형의 발치에서만 징징거리고 그에게 매달리고 칭얼대던 어린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는 듯 아버지는 황당하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뭐? 허, 나 참. 형이 그렇게 소중하고 좋으면 평소에 잘했어야지. 말 잘 듣고.”
“들어가자, 준영아.”
“어디 안 갈 거지?”
“안 가. 왜 자꾸 그런 소릴 해?”
“아버지, 형 엄마한테 갔다 왔대요. 하늘공원에요.”
나는 굳어버린 허리를 끌어안은 채 아버지에게 일러바쳤다.
나온 김에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들어가려고 손에 쥔 담뱃갑을 뒤적거리던 아버지의 눈이 나에게 붙잡혀 곤란하게 서 있는 형을 향했다.
“……그랬어? 갑자기 왜?”
“보고 싶었대요. 엄마가 갑자기 보고 싶었대요. 형 이상하단 말이에요.”
“…….”
아버지는 가만히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가 피워 올리는 하얀 연기가 공기 중에 퍼져 알싸한 냄새를 풍겼다.
“준영이 넌 들어가. 아버지 형하고 할 말 있으니까.”
“싫어요.”
“뭐?”
“……빨리 들어오세요.”
그악스럽게 끌어안고 있는 두 팔을 풀었다. 형과 아버지를 대문 앞에 세워 두고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강준원.”
형의 이름을 낮게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대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원에 서 있자 아버지가 문 뒤에 숨어 있는 나에게 말했다.
“준영이 들어가라.”
“……네.”
정원을 지나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거실에 불을 켰다.
소파에 앉아 창문 너머 정원과 아직 열리지 않는 대문으로 고개를 뺐다.
아버지와 무슨 대화를 하는지 그들은 한동안 대문 밖에 서서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버지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왔고, 형이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는 형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 등을 격려하듯 두드렸다.
정원을 가로질러 온 부자가 집으로 들어왔다.
“저녁 드셨어요?”
“밖에서 먹는 게 무슨 맛이 있어야지. 대충 아무렇게나 먹자.”
형의 물음에 아버지가 대답하며 침실로 들어갔다.
저녁을 차리는 게 의무인 양 주방으로 곧장 향하는 형의 뒤를 따라갔다.
“아버지가 뭐라셔?”
“늘 똑같은 소리지, 뭐. 너한테는 나밖에 없다는 말, 내가 흐트러지면 너도 망가진다는 말, 정신 똑바로 차리고 형 노릇 하라는 소리.”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매일 들었던 잔소리를 오늘 또 들은 것뿐이라고 그가 여상스럽게 말했다.
“가서 샤워하고 와. 형은 저녁 차릴게.”
도심의 먼지를 머리에 이고 있는 내 꼴을 그가 지적했다. 아까 형을 끌어안았을 때 땀 냄새가 난 모양이었다.
“저녁 먹고 씻을래. 형 저녁 하는 거 도와줄게.”
“나 어디 안 가. 씻고 내려와. 맛있는 거 해 줄 테니까.”
다정한 말로 나를 안심시키고 있었지만 여전히 긴장은 풀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를 만나고 왔다는 형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웠고, 금방이라도 터져 사라질 것 같은 비눗방울처럼 경계가 불분명했다.
“알았어. 나 씻고 금방 내려올 거야.”
어디 가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처럼 말하고 서둘러 이 층으로 올라갔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칼을 말리지도 않고 형에게로 돌아갔다.
당장 형의 허리를 끌어안으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윤 차장 모레 온다는데, 괜찮지?”
“아……, 벌써요?”
“나흘도 더 지났어. 벌써는 무슨.”
아버지는 윤 차장의 귀가를 그다지 반기지 않는 내 태도가 섭섭한 듯했다.
“조금만 기다려. 준영이 시험 끝나면, 그 후에는 독립 안 한다고 해도 내가 쫓아낼 거니까.”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 양 아버지는 퉁명스럽게 덧붙이며 나와 형의 얼굴을 살폈다.
그들이 대문 밖에서 나눈 대화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형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우리 형제의 붕괴라는 사실을 모르고, 아버지는 준영이 대학 합격할 때까지만 고생해 달라고, 그 후에는 무엇을 하든 네 마음대로 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 주었으리라.
“저 학교 들어가면 형하고 같이 나가서 살아도 돼요?”
“대학도 대학 나름이지. 어디 허접한 데 들어가서 독립하겠다고 하는 거면 말도 안 되는 거고, 형하고 같은 데만 들어가. 아니, 비슷하게라도 가.”
“그럼 형하고 나가서 살아도 돼요?”
“당연하지.”
아버지는 허황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공식적인 선언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형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버지의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묵묵히 식사를 차렸다.
“준영아, 냉장고에서 반찬 좀 꺼내.”
“응.”
형의 말에 냉큼 일어났다.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꺼냈다. 숟가락과 젓가락도 식탁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아버지의 공언에 아무 생각도 의견도 보태지 않는 형과 마주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온종일 앓던 시름이 사라지고 나는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는 인사를 하고 수저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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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 늦게 정신 차리는 애들이 있긴 하지. 잘했어. 이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 없겠어. 강준원 동생 짬바가 어디 안 가는구만.”
가채점으로 대충 짐작은 했지만 올 1등급은 처음이었다. 석차도 전교 1등이었다.
올 1등급은 재수생까지 매달리는 마지막 모의고사에서 받기 힘든 숫자였다. 형이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받았던 숫자이기도 했다.
아침에 조회 중에 담임 선생님이 공연히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고 지나갔을 때부터 결과가 좋은 모양이라고 내심으로는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성적은 예상하지 못했다. 공부 좀 효율적으로 했을 뿐인데, 갑자기 이렇게 성적이 오르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수업 후에 나눠서 모의고사 상담이 이루어졌다. 나는 수업이 다 끝난 오후에 상담을 들어갔다. 점심시간에 담임을 만난 임주호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 은근히 기대하던 중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칭찬했다. 담임 선생님은 형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천재성을 겪어 본 터라 나만 보면 형만 한 아우가 없다는 옛말이 사실이라고, 형과 비교당하는 데에 이골이 난 나에게조차 상처를 주던 사람이었다.
“사실은 지금 형이 공부 봐주고 있어요.”
“그랬어?”
“네, 시험 때까지 형이 도와주기로 했거든요. 저 지금 학원 안 다녀요.”
우리 형이라는 존재만큼 나를 뿌듯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었다. 담임 선생님은 얼마나 소중하고 좋은 기회냐고, 열심히 하라고 나를 독려했다.
형과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는 것은 더 이상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형과 같은 학교에 합격만 하면 일 년 후에 우리의 관계는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롭게 시작될 수 있었다.
형과 몸을 겹치고 난 후에 아버지와 윤 차장을 보면 마음이 언짢아지고는 했는데 이제 그들과도 분리되어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형과 나만 온전히 존재한다는 전제만큼 나를 설레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상담실을 나와 교실로 향했다. 학생 대부분이 돌아간 교사는 적막에 잠겨 있었다.
생전 처음 받아 보는 숫자를 형에게 당장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참을 수가 없었다. 형이 내게 무슨 말을 해 줄지, 어떤 대견한 표정을 지을지, 어떤 칭찬을 해 줄지 궁금했다.
서둘러 그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요새 들어 생각이 많아 보이는 형도 이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 거다. 우리는 그의 의도대로 옳은 길로 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가을의 빛깔이 어느새 진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유난히 은행나무가 많은 교정에는 환한 노란빛이 술렁거렸다. 아이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황급히 계단을 밟아 올라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다툼에 난간을 붙잡고 계단 한가운데 멈춰 섰다.
임주호와 허경민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못 할 것도 없지. 네가 뭔데? 니가 도대체 뭔데?”
“어디까지 갔는데. 끝까지……, 끝까지 다 했어?”
“그게 왜 궁금해? 당연히 끝까지 했겠지. 누구는 죽어도 안 주는데 걔는 쉽게 주더라고.”
“……뭐라고 하든 그 말 다시 무를 수 없는 거 알고 지껄여라.”
분노와 당황이 너무 많이 차올라 임주호의 음성이 날카로운 게 아니라 섬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용은 살벌한 경고였는데 임주호의 목소리는 처연하게 갈라졌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멍청하게 우뚝 멈춰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들어야만 했다.
“남자 새끼가 말을 내뱉었으면 썩은 무라도 썰어야 되는 거야. 내가 왜 거짓말을 해? 그게 그렇게 알고 싶냐? 걔랑 끝까지 무지무지 재미있게 놀았어. 너처럼 성적에 목숨 거는 싸패하고는 다르던데. 놀 줄 알더라고.”
“계속 그렇게 지껄여라. 니가 뭐라고 지껄이는지는 알고 지껄이라고 했다.”
꾹꾹 눌린 음성이 한 자, 한 자 음산하게 내뱉었다.
“너무 잘 아는데. 나 지금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찍찍 갈기고 있는 거 너무 잘 아는데? 더 떠들어 볼까?”
가소롭다 못해 웃겨 죽겠다고 허경민이 진짜 하도 깝죽거려서 당사자가 아닌 나조차 주먹이 저절로 올라갔다.
“야, 걔가 나 좋대. 시험 때문에 누구는 나 거들떠도 안 보는데, 걔는 내가 너무 좋대. 씨발, 그럼 내가 어떻게 하겠냐? 맨날 참아? 어떻게 맨날 참아? 나도 인간이야.”
“이 개새끼!”
드디어 쌍욕이 터져 나왔다.
허경민은 사람을 약 올리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임주호가 동시에 주먹도 휘두른 것 같았는데 허경민이 잽싸게 피한 모양이었다. 휘청하는 임주호의 움직임이 소리만으로도 눈앞에 선했다.
모두 돌아간 1학년 교실 구석 계단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저렇게 대놓고 다투다니, 남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너무 신경 쓰지 않는 무신경한 인간들의 행태에 지나가던 내 기분이 다소 상할 정도였다.
“네가 뭘 잘했다고 때려?”
“개자식! 미친 새끼! 넌 개새끼야!”
복도 벽에 바싹 붙어 몸을 숨기고 그들의 형용을 확인했다.
임주호는 허경민의 멱살을 와락 움켜잡고 짤짤 흔들고 있었다. 허경민의 상체가 그를 놀리듯이 종이 인형처럼 펄럭거렸다.
그럴 때마다 임주호의 안경이 코끝으로 밀려났는데, 임주호는 안경이 밀려나 코끝에 걸리면 움직임을 멈추고 한 손으로는 허경민의 멱살을 붙잡고 나머지 손으로 안경을 바짝 추켜올리면서도 그의 목을 짤짤 흔드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모습 때문인지 욕설과 몸싸움까지 동반한 그들의 싸움이 무슨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좋았냐? 그렇게 더럽게 노니까 좋았어? 이 나쁜 새끼야, 그걸 못 참고, 언제는 내가 제일 좋다더니, 이 개새끼야! 니가 사람이냐? 짐승이지!”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고 임주호는 다시 짤짤 허경민의 목을 흔들었다. 완력이나 덩치로 임주호에게 당하고 있을 허경민이 아니었지만, 그는 임주호가 흔드는 대로 열심히 몸을 흔들어 주었다.
임주호가 안경을 추켜 올리느라 짤짤 흔드는 행동을 멈추어도 저 혼자 일어나는 오뚜기처럼 앞뒤로 휘청거렸다. 놀리는 게 분명한 태도에 임주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야!”
“그래, 좋아 죽을 것 같았다! 하나 있는 남친이랍시고 하루 종일 책상머리에만 앉아서 책하고만 눈 마주치고 책이랑 섹스를 해 대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등신이야? 하고 싶어 죽겠는데 왜 안 해! 왜 싫다 뻗대! 왜 사람 무시해! 니가 먼저 시작한 거야. 모르겠어?”
“나 이번에 성적 떨어지면 집에서 못 나올 수도 있어! 엄마가 외출 금지시키고 핸드폰 빼앗는다고 했단 말이야! 그렇게 되면 우리 만날 수도 없고 연락조차 힘들어!”
“씹할! 그놈의 성적! 성적! 대학! 대학 좀 안 간다고 지구가 멸망해?!”
“나는, 나는 멸망해! 그것도 이해 못 해? 너는 씨발, 안 하면 고추 떨어지고 썩어? 그걸 못 참아? 개등신아?”
“그래, 난 못 참아! 내가 참을 이유도 없고!”
팍, 임주호는 틀어쥐고 있던 허경민의 멱살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벌게진 얼굴로 씨근대며 그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노려보는 등쌀에 허경민은 소리를 치려다 그만두고는 고개를 돌리고 참는 숨을 격하게 내뱉었다.
한껏 높였던 목청이 다소 누그러진 임주호가 말했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나는 너 아니면 싫어. 나는 절대 다른 사람하고 그런 짓 못 해.”
“…….”
“넌 어떻게 그게 가능해?”
“술 마셨어. 너 미치게 보고 싶은데 넌 또 내 전화 안 받았잖아. 너네 아파트 놀이터에서 밤새도록 기다렸어. 네 방에 불 켜져 있더라. 너 나 놀이터에 있는 것도 알고 있었지? 그런데 너 공부한다고 끝까지 안 나왔어. 네 방에 불 꺼지고 두 시간도 넘게 계속 기다렸는데도 안 나타났어.”
“…….”
“이러니 내가 빡이 안 돌아? 안 돌게 생겼냐고. 니가 나 놀아나게 만든 거야.”
“너 이 씨발 새끼……, 너 연습했지? 씨발, 내 앞에서 말 더듬어 대고 버벅거리던 거 그거 다 쇼였지?”
“잘못한 게 없으니까 오늘은 말도 술술 잘 나오네. 됐냐?”
허, 임주호는 제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때렸다.
그들을 바라보다 발치로 시선을 내렸다.
사랑싸움 같았다. 멀쩡하게 생긴 남학생 둘이라는 것이 이상하고 어색할 뿐, 그들의 모습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해서 섭섭하고 미운 사랑싸움으로 보였다.
바람피운 애인을 추궁하고 드는 임주호와 뻔뻔스레 변명하는 허경민의 모습이 꼭 그랬다.
“씨발, 너 진짜…….”
“씨발, 뭐 진짜, 뭐.”
짐승 같은 욕망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사랑싸움 같은 것도 하는구나.
처음에는 허경민이 그냥 양아치로만 보였고 임주호는 나의 형과 그런 짓을 벌인 더러운 벌레로 보였다.
임주호가 아니었으면 나는 형과 그런 관계가 되지 않았을 거다. 결국은 나의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내 마음속으로 임주호를 원망하고 형이 안았을 그 몸을 질투하고, 그들의 관계가 어느 날 발각되어 파탄 나기를 은근히 바라기도 했다.
사랑…….
그러나 그런 게 아니다. 양아치도 아니고 벌레도 아니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한 인격일 뿐이다.
그들은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다.
이런 것은 싫다. 내가 싫어하고 혐오하는 사람의 인간적인 면이나 약한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싫었다. 임주호를 이해하고 알아 가는 건 더 싫었다. 더 이상 혐오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같아서, 싫어하고 당연하게 욕했던 나 자신이 조잡하고 초라해져서, 싫었다.
그들이 나와 똑같이 번민하고 걱정하고 고민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아서 계단을 도로 내려가 교실로 돌아가려고 막 걸음을 옮기는데 핸드폰에서 문자 수신음이 울렸다.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그대로 몸이 굳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임주호와 허경민이 동시에 나를 숫제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어정쩡하게 벽에 숨어 있던 걸음을 복도 위로 옮겼다.
“…….”
“너 뭐야?”
허경민이 사악하게 인상을 쓰고 나를 향해 다가오려고 하는 몸짓을 임주호의 손이 막아 세웠다.
“너 남의 말 엿듣는 취미 있냐?”
“엿들은 게 아니라 들려서 들은 것뿐이야. 온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 지르고 싸운 게 누군데? 밖에서도 다 들렸겠다.”
“저 새끼 봐라? 뭘 잘한 게 있다고 큰소리야? 너 이리 와 봐.”
그냥 대충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피하려 했는데 몰래 엿듣는 사람 취급에 도리어 내가 적반하장으로 따지자 허경민의 안면 근육이 불길하게 씰룩거렸다.
“재밌냐? 병균하고 세균하고 싸우니까 웃기냐?”
임주호도 인상을 쓰고 숨어서 엿들은 내가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나는 임주호의 날카로운 공격에 흠칫했다. 임주호를 더러운 무엇으로 취급하며 경멸 섞인 단어로 모욕한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나는 임주호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나로서는 허경민에게 피해자처럼 구는 임주호의 모습이 황당하고 어이없었다.
허경민은 등신같이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만 순진한 척하는 임주호는 공부하느라 바빠서 할 수 없다는 그 짓을 공부까지 해 가면서 열심히 해 댔다. 그 상대가 나의 형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더러움과 혐오감이 치솟아 올랐다.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형과 임주호가 뒹굴어 댄 장면을 단 하나 떠올렸는데도 오심이 솟구칠 정도였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
허경민의 고추를 난잡하다고 취급하는 임주호가 허경민보다 훨씬 더 난잡하고 더러웠다. 나의 형과 그렇고 그런 짓을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려다 그만두었다. 형을 더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나가는데 하도 큰 소리로 싸워서 인기척 못 냈어.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계속 듣지, 왜. 김칫국물 또 나한테 쏟아 보지, 왜.”
어디 더 해 보라는 듯 떠들어 대는 임주호에게 강한 반발심이 치솟았다.
“야, 임주호.”
“뭐, 이 씨발아. 어쩌다 시험 좀 잘 봤다고 나대냐? 그런다고 니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네 형이 봐줬으니까 어쩌다 잘 본 주제에 아가리 닥치고 갈 길 가라.”
임주호는 비속어로 맞받았다.
“니가 인간이면 지금 여기서 우리 형 얘길 꺼내면 안 되지.”
나는 어이가 없어 따졌다.
“뭔 개소리야. 내가 너보다 성적 잘 나오니까 과외 선생님 빼앗아 간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치졸한 새끼 같으니라고. 병균이니 세균이니 해 가면서 내 멘탈 흔들어 놓고, 과외 선생님 빼앗아 가고. 그래, 그렇게 남 훼방 놓고 존나 열심히 해서 일 등 먹으니까 좋냐?”
“우리 형 들먹이지 마. 죽여 버리기 전에.”
내가 형과의 일을 모를 거라 여기고 입을 털어 대는 임주호에게 진심 어린 분노가 일었다.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내 형을 모욕하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어쩌다가 일 등 한번 한 주제에 누굴 가르치려고 들어? 찌그러져 있어라. 좋은 말로 할 때.”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허경민을 사주해 나를 때려눕힐 수도 있다는 것처럼 임주호는 제 옆에 든든하게 서 있는 허경민을 동조하듯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빛에 발끈했다.
“너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뭐?”
“우리 형하고 일, 내가 모르는 줄 알아? 이 개새끼야? 몰라서 가만히 있는 건 줄 아냐고.”
“무슨 개소리야?”
“너도 잘한 거 하나도 없으면서 허경민한테 뭐라고 하지 마. 양심이 있는 인간이면.”
우리 둘의 말싸움을 쳐다보기만 하던 허경민의 눈에서 갑자기 불꽃이 튀었다.
“……쟤 지금 무슨 소리 지껄이는 거야? 야, 너 그거 무슨 뜻이야.”
허경민이 말리는 임주호의 손을 밀치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무서울 게 하나도 없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 싫어. 그런데 임주호가 너한테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건 알아. 쟤도 너한테 떳떳한 거 없어.”
허경민의 눈에 살기가 서렸다. 나를 향해 다가오던 허경민이 임주호를 돌아보았다.
황당하다는 낯으로 임주호는 나와 허경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당황스러워하는 임주호의 반응에 허경민의 낯빛이 삽시간에 새파랗게 바뀌었다.
“저 새끼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뭐라고 씨불이는 거냐고.”
“무, 무슨 소리야? 야! 너 지금 누굴 모함하는 거야. 허경민, 너 눈깔 안 깔아?!”
“씨발, 임주호. 쟤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냐고 물어보잖아. 니가 나한테 왜 안 떳떳한데? 너 설마 다른 새끼한테 다리 벌렸냐?”
“나 그런 적 없어. 야!”
당장 살인을 저지를 것처럼 다가오는 허경민에게 말하고 임주호가 나를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너 왜 나한테 안 떳떳한데, 떳떳하지 못할 게 뭔데?”
“나 떳떳해. 잘못한 거 없어. 강준영! 너 미쳤어?”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임주호를 비웃었다.
임주호는 누명을 뒤집어쓴 이가 억울해서 화병으로 당장 돌아가실 것 같은 숨을 씨근덕거렸다.
“그러니까 우리 형 얘기 꺼내지 말라고. 한 번만 더 언급하면 죽여 버릴 거야.”
“니네 형이랑 내가 뭘 어쨌는데? 뭐 어쨌다고 이래?!”
임주호는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잔뜩 찡그린 눈살을 하고 날카롭게 되받아쳤다.
좋아하는 사람을 놔두고 형하고 붙어먹은 주제에 저만 결백한 것처럼 낯빛을 새하얗게 바꾸고 따지는 꼴이 어찌나 같잖은지 가소로운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네가 우리 형 홍대 연습실에서 나오는 거 봤어.”
“무슨 말이야, 그게?”
“임주호 네가 홍대에 있는 우리 형 연습실에서 같이 나오는 거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
나를 죽일 듯이 뚫어져라 바라보던 허경민의 눈이 임주호를 향해 살벌하게 돌아갔다.
씨발, 저 새끼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그가 눈으로 묻고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오 분 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썩은 동태 눈깔로 쳐다보았다.
“그날 너하고 형이 나가고 내가 거기 들어가 봤거든. 똑똑히 봤어. 침대는 엉망진창이고 콘돔까지 바닥에 버려져 있었어. 누가 봐도 그 짓 하고 난 후였는데, 계속 거짓말할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임주호를 때리지 못하는 허경민의 주먹이 복도 벽을 퍽퍽 내리쳤다.
미친 것 같은 주먹질에 벽에 붉은 핏자국이 점점이 찍혔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임주호가 백랍처럼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너 지금 너네 형하고 내가 잤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 또라이야!”
“아니라고?”
“아니라고! 이 등신 새끼야!”
임주호는 나를 향해서가 아니라 정신이 나간 듯 주먹질을 해 대는 허경민에게 목구멍이 찢어져라 소리를 꽥 질렀다. 유리창에 대가리를 그대로 돌진하던 허경민이 멈칫했다.
임주호는 숨이 찰 정도로 빠르게 해명했다.
“그래, 네가 빼앗아 가기 전까지 너네 형이 내 과외 한 건 맞아! 근데 그게 뭐? 너희 형이 바쁘다고 해서 그럼 내가 홍대로 가겠다고, 너희 형 연습실에서도 공부하고 그 근처 스터디 카페에서도 가끔 과외받았어. 니네 형 친구가 하도 여자 친구를 연습실로 데리고 와서 그날은 카페 가서 공부했다고! 이 개새끼야!”
얼굴이 새빨개져 임주호가 고함을 쳤다.
“…….”
“너, 강준영, 너 그래서 나한테 그따위로 말한 거였어? 세균이니 병균이니……, 그런 말, 오해해서 한 거였다고?”
“거짓말하지 마. 내가 형한테 말했는데 우리 형은 변명하지 않았어.”
“와, 씨발. 말로 사람도 죽이겠네. 너 지금 사람 잡냐? 그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무슨 대꾸를 해 줘? 니네 형이 아무 변명 안 하면 나는 그런 사람인 거야?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는데? 씨발, 과외비도 존나 비싸게 받아 처먹은 주제에 끝까지 해 주지도 않았으면서. 니네 형 차 바퀴 네 짝하고 문짝은 우리 엄마가 사 준 거나 마찬가지야. 지금 전화해. 당장 전화해, 너희 형한테!”
임주호는 씨근벌떡하며 당장 형에게 전화해서 진실을 밝히라고 나를 다그쳤다.
아니라고 워낙 강경하게 나오는 바람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형은 임주호와 그런 짓을 했느냐고 따지는 내 말에 한 번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수긍하지 않았었다.
“…….”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인정하지 않았고 어느 날은 임주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도 어려워했다.
형은 내가 알아서 수렁으로 굴러 들어가니 일부러 오해를 방치하고 묵과하고 있었던 거다. 임주호에게 형을 주느니, 차라리 내가 갖는 게 낫다고, 그게 옳은 거라고 나는 그와 한 짓을 모두 정당화했었다.
뭔가를 깨달은 내 아연한 눈빛에 임주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해일까, 불현듯 가슴 한 곳이 가벼워졌다.
오해였던 걸까.
형은 나 말고 다른 이를 가슴에 담아 둔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거다.
더럽게 몸을 뒹굴고 나만 봐야 하는 밑바닥을 누군가와 공유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뜻이었다.
형은 처음부터 나밖에 없었다.
“너 나 안 믿지?”
여전히 주먹을 꾹 쥐고 있는 허경민에게 임주호는 허탈한 음성으로 물었다.
“증인이 있는데 어떻게 믿어? 무슨 수로 내가 널 믿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허경민은 반신반의하며 나를 향해 거짓말이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의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임주호는 발치로 고개를 숙이고 내가 들어도 처연하게 물었다.
“……내가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
벽을 때리던 허경민의 두 팔이 허무하게 내려갔다.
“너는 나를 계속 그렇게 생각했지? 너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하는 사람이라고.”
“……아냐.”
“아니긴 뭐가 아니야, 뭐가?!”
“아니라고. 아냐. 믿어. 너 그럴 위인 못 되는 거 알아.”
“아니, 너 나 안 믿었어. 그리고……, 나 이제 너 못 믿겠어. 아무 데나 고추 휘두르고 다니는 사람, 싫어.”
“그거 거짓말이야.”
“……이미 늦었어.”
“진짜야, 거짓말이야. 주호야, 진짜야. 주호야. 주호야! 임주호!”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임주호는 나에게 걸어왔다.
“강준영, 넌 처음부터 재수 없었어.”
나를 지나치며 임주호는 침을 뱉듯이 말했다. 착 가라앉아 무서운 표정으로 사라지는 임주호의 뒷모습을 나와 허경민이 멍청하게 쫓아갔다.
“나 주호 유치원 때부터 좋아했어. 저 새끼 몸에 난 점이 몇 갠지, 자면서 어떤 꿈을 꾸는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 안 해도 다 알아. 주호는 거짓말 못 해.”
“…….”
“네가 주호한테 병균이라고 한 자식이냐? 주호가 그 말 듣고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아?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여도 되는 거야?”
“…….”
“가서 사과해. 무릎 꿇고 싹싹 빌어.”
허경민이 나에게 살벌하게 경고했다. 나는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민망해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미안해, 나는, 나는 진짜 그런 줄 모르고……. 오해했어. 미안해.”
퍽, 소리와 함께 얼굴이 돌아가고 어느새 몸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픈 게 아니라 정신이 얼얼했다.
주먹으로 얻어맞은 뺨을 쥐고 나는 멍청하게 허경민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하다는 말 죽고 나서 하면 아무 소용없어. 개나 소나 다 미안하다고 하면 끝인 줄 알지. 그런 걸로 남한테 상처 준 죄책감이 덜어지기는 하냐? 꺼져, 이 미친 새끼야.”
허경민이 주저앉아 있는 내 다리를 발로 한 대 더 차고 임주호를 쫓아갔다.
그래도 봐준 것 같았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을 돌아보았다.
한참 멀어진 임주호를 단숨에 따라잡은 허경민의 손이 그의 어깨를 감싸 안으려고 했다. 임주호가 붙잡는 손을 극렬하게 뿌리쳤다.
다시 그 어깨를 감싸 안고, 또 뿌리치고, 감싸 안고, 또 뿌리치고.
그리고 그들은 아무도 없는 교사 복도에서 미워 죽겠다는 주먹질을 하며 입을 맞추었다.
왈칵 울음이 터진 임주호를 허경민은 더할 수 없는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며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들의 모습이 부서지는 햇살 속에 아련하게 파묻혔다.
오늘은 일이 있다고 혼자 집으로 가라는 형의 메시지가 하필 그때 울린 핸드폰 알림 소리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윤 차장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맞이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윤 차장의 경직된 미소를 보자 그녀가 상당히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왜 혼자 왔어?”
“아, 형 어디 들른다고 해서요. 먼저 왔어요.”
“그래, 얼른 씻어. 배고프지? 아줌마가 간식 올려다 줄 테니까 저녁 먹기 전까지 공부하고 있어. 아, 아니다. 간식 가져갈래? 준비해 놨는데.”
간식이 왜 우리 집에서 금기어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와 형에게 마음을 쓰는 그녀가 안타까웠다.
“……저, 그날 일은 죄송해요. 형이 가끔 예민해질 때가 있어요. 새어머니한테만 그러는 거 아니라 저한테도 그러고, 아버지한테도 아주 드물게 그래요. 눈 부라리면서 대들고. 새어머니라서 그런 게 아니라요.”
“……으응, 알아. 대표님, 아니 아버지한테 들었어.”
굳이 들추지 않았던 문제를 아무도 없을 때 언급하는 내가 불편했는지 윤 차장은 시선을 피했다.
“저기 저희는요, 저는 사실은 새어머니, 새어머니라고 안 불러요. 저희들끼리는요.”
“응? 그럼 뭐라고 부르는데? 아줌마도 괜찮아. 나도 아줌마가 편해.”
“아니요, 저희는 새어머니 윤 차장님……, 이라고 불러요.”
“……응?”
전혀 생뚱맞은 호칭에 윤 차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버지도 가끔 새어머니를 윤 차장이라고 부르고, 저도 사실은……, 새어머니 윤 차장님이라고 불러요.”
“뭐? 윤 차장?”
윤 차장은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마 윤 차장도 이 집에서 새어머니나 아주머니가 되는 것보다는 윤 차장인 편이 훨씬 편할 터였다.
윤 차장의 얼굴이 한결 가벼웠다.
“그거 마음에 든다. 그런데 나 대표님 모실 때까지는 차장이었고 퇴직할 때는 부장이었어. 기왕이면 부장님이라고 불러 주지?”
“저희는 윤 차장님이 편해요.”
“나도. 사실은 나도 그래. 다 큰 너희들한테 갑자기 엄마가 돼 준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 그건 누가 와도 불가능할걸.”
“돌아가신 엄마가 와도 어색할 거예요.”
그렇게 말해 주는 게 고맙다는 듯 윤 차장이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뺨이 왜 그래?”
“네?”
윤 차장의 손이 내 뺨 한쪽을 조심스럽게 그러쥐었다.
“여기가 좀 부은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배 안 고파요. 씻고 공부하고 있을게요. 저녁에는 찜닭 먹고 싶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렸다.
“아, 그거 할 줄 모르는데 걱정하지 마. 배달시키면 돼. 대신 아버지한테는 비밀이다.”
“네, 절대 말 안 할게요.”
윤 차장과 서로 마음이 통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이 층으로 한달음에 올라갔다.
형은 우리가 저녁을 거의 다 먹고 난 후에야 귀가했다.
윤 차장과의 일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졌는지 그녀를 보는 형의 표정이 무심했다. 그는 배달 음식을 자신이 직접 만든 찜닭처럼 아버지에게 자랑하고 있던 윤 차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둘 사이를 첨예하게 살펴보는 아버지에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녀왔다고 인사를 하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나도 숟가락을 내려놓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맛있게 먹었습니다. 저 올라가 볼게요.”
간식을 안 먹이면 무슨 큰일이라고 나는 것처럼 윤 차장이 나를 쫓아 일어났다.
“간식 가져가.”
“일어나지 마세요. 저녁 많이 먹어서 간식 안 먹을 것 같아요.”
“그래도 가져가. 나 올라가기 싫어. 이제 딱 너한테 신경 끄고 자유 시간 보낼 거야.”
아버지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뭐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말하느냐고 윤 차장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준영이가 그러라고 했어요.”
그녀가 샐쭉하게 아버지에게 말하고 준비한 간식을 쟁반에 우유와 함께 담아 주었다.
간식은 배가 고파지는 자정을 넘어서까지 공부하라는 무언의 압박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쟁반을 챙겨 들고 형의 방으로 쫓아갔다.
방문을 벌컥 열자 셔츠 단추를 풀고 있던 형이 나를 보고 손을 멈추었다. 그는 빛이 밝은 곳에서는 나에게조차 벗은 몸을 보여 주는 걸 꺼렸다.
“나 모의고사 성적표 받았는데.”
“그래? 표정이 잘 본 모양이네.”
어서 내놓으라고 그가 손을 내밀었다. 과외 선생님다운 포즈였다. 아버지에게도 아직 보여 주지 않은 성적표를 형에게 건넸다.
형이 성적을 하나하나 다 확인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올 1등급에 오른쪽 끝에 전교 석차 칸과 그 옆에 반 석차 칸에 1이라고 적혀 있었다.
“고생했다.”
기대한 것보다는 미지근한 반응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왜 오해라고 하지 않았어?”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중요한 순간이니까 지금은 나를 보라고, 형의 옷자락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임주호, 그거 다 오해였잖아. 형 그런 짓 한 적 없잖아.”
“……너 뺨이 왜 이래?”
잠시 나를 주시한 형의 눈살이 허경민에게 얻어맞은 뺨을 보며 희미하게 구겨졌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까 벽에 부딪혔어.”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내 물음에 대답이나 하라고 형을 다그쳤다.
“형 임주호랑 그런 짓 한 적 없잖아.”
“나 사실이라고 얘기한 적 없어.”
“멋대로 오해하게 놔뒀잖아. 형을 더러운 사람 취급하는데도, 그냥 그런 것처럼 가만히 있었잖아.”
“…….”
“왜 오해하게 놔뒀어? 왜 사람을 바보 멍청이로 만들어? 내가 임주호한테 얼마나 나쁘게 굴었는데, 나 진짜 걔한테 심하게 행동했단 말이야.”
“왜 그랬어?”
“그거야 당연히……, 싫으니까, 너무 싫으니까. 형하고 그런 짓을 했는데 어떻게 내가…….”
“그럼 난 여자 친구도 만들지 말고, 장가도 가지 말아야겠다. 준영이가 싫어하니까.”
“그게 아니라,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나는 임주호를 질투했다. 그들을 오해하고 있을 때 임주호의 뒤통수만 봐도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질시가 끓어올라 두 다리로 땅을 지탱하고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형은 그 일은 별로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는 듯 셔츠 단추를 마저 풀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만 나가라는 눈짓이었다.
나는 그의 가슴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예전에 얘기했었는데, 혹시 기억해? 임주호하고 사귀는 일진이 있는데……, 걔 졸업하면 조폭 한다고 되게 유명한 애거든.”
“더럽다고 했었지. 남자들끼리 더럽다고.”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걔네 유치원 때부터 서로 좋아했대.”
“더럽다고 나한테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했었어. 그건 기억나?”
“그건……, 그런 거 잘 몰라서 실수한 거였어. 걔네들 오늘 학교에서 싸우는 거 봤는데, 꼭……, 사랑싸움처럼 보였어.”
“…….”
그는 별반 관심이 없는 것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셔츠 단추를 더 풀어 내리지 못하고 손을 멈추고 있을 따름이었다.
“걔네들 꼭……, 연인처럼 보였어.”
“더러워 보이지 않았어?”
“아니야! 나는……, 그땐 몰랐어.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 남자끼리 그러는 건 더럽다고만 생각했어.”
“지금은 가능하다고 생각해?”
“지금은 가능하다고……,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처음에는 그 애들이 더럽고 기분 나빴어. 내 기분 이상하게 만들어서 싫었는데, 근데 예뻐. 죽일 것처럼 싸우다가 곧바로 화해해서는 뽀뽀하고…….”
“…….”
“누가 누굴 좋아하면 예쁘게 보인다는 거 오늘 처음 알았어.”
“…….”
“그런 게 사랑이라는 거. 오늘 알았어.”
“이만 알았으니까 옷 갈아입게 나가 줘.”
당황스러운 몸짓으로 그는 나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우리도 남들한테 그렇게 보일까?”
등을 돌리고 선 그를 향해 물었다.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단추를 풀어 내리는 손이 굳어진 채 옷자락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이 보면 연인처럼 보이겠지?”
“아니.”
침묵으로 서 있던 형이 지체하지 않고 부정한다. 이미 결정을 내려 버린 차갑고 완고한 어투였다. 형의 대답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타격이 왔다.
돌아보지 않는 그에게 따지는 목소리가 속절없이 떨려 왔다.
“나는……, 나는 우리도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주호랑 경민이도 유치원 때부터, 아주 어릴 때부터 서로 좋아했대. 형제처럼 자랐는데……, 좋아했대.”
“…….”
“그럼 우린……, 뭐야?”
“……우린.”
그가 나에게 돌아섰다. 풀어 내리던 단추를 도로 채워 올리고 그가 말을 멈추었다. 단어를 잇지 못하고 나를 바라본다.
당연히 형이 동의하리라 여겼다.
사랑이라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다른 이들의 눈에도 우리가 그렇게 예쁘게 보일 거라고, 연인처럼 보일 거라고, 형의 마음이 그런 거라고 말할 줄 알았다.
충격으로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이내 물기가 차오른다.
“우린……, 아니, 우리가 아니야. 내가 죄짓고 있는 거야.”
굵은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가슴으로 후드득 떨어진다.
나는 형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게 되고, 우리 사이가 부도덕하다고 정의하는 이의 결연한 얼굴을 보게 되면 이대로 무릎이 휘청 꺾여 쓰러질 것만 같았다.
형의 말이 사실인데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아팠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고, 죄를 짓는 부정한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사무치도록 뼈를 에어 왔다.
“나는 그냥……, 나는, 형한테 사과하고 싶었어. 더럽다고 했던 거, 형을 오해했던 거…….”
“사과할 필요 없어. 넌 잘못한 거 없어. 나 더러워. 친동생한테 그런 짓 하는 새끼를 깨끗하다고 할 순 없지.”
“…….”
“넌 잘못한 거 없으니까 사과하지 마.”
“……형 진짜 나쁘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다 알면서, 다 알면서!”
나는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 흐려진 시야를 들었다. 형의 얼굴이 어룽어룽했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세상의 온갖 근심 걱정을 다 떠안은 얼굴로 나를, 동생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형제를 염려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형이 내게 그런 짓을 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밀어닥쳤다. 그를 죽이고 싶었다.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지.”
“…….”
“이제 와서 죄책감에 이럴 거면 하지 말았어야지.”
“…….”
“왜……, 왜, 다 알게 해 놓고,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면 어떡해. 나는 어떡해!”
“너는 영원히 감당 못 해.”
“그걸 알면서 시작했어?”
“나만 죄짓는 걸로 끝내면 돼. 너는 계속 날 오해해. 그리고 계속 미워하면 돼.”
나를 담고 있는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나 형 밉지 않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내가 안 밉다고? 어떤 미친놈이 자기 동생을 망가뜨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그가 혼란스럽게 소리쳤다. 나에게 소리친 것이 아니라 제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불온한 것들을 향한 고함이었다.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듯이 몇 차례나 움켜쥐고 히스테릭하게 쓸어 넘겼다.
“더러운 놈한테 잘못 걸렸다고 생각해. 그게 네가 할 일이야. 네 형이 미쳐서 정신 나간 짓을 했다고, 나를 증오하고 원망하면 돼. 전부 내 탓으로 돌리면 너는 끝낼 수 있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어.”
“싫어.”
“너까지 이 지옥에서 살 필요 없어.”
최후의 최후까지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형의 움직임이 다급하게 나를 밀어냈다.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 애들 질투 나도록 예뻐 보였어. 더러운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었어. 연인처럼 보였단 말이야. 우리는 뭐가 다른데?”
“우린 그런 거 아니야.”
“…….”
“우린 그런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그의 눈이 무섭도록 차가워져 나를 쏘아보았다. 형의 눈빛이 나를 스칠 때마다 얼음으로 만든 칼이 내 가슴을 베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나 형 사랑하는 것 같단 말이야. 사랑 맞아. 이거 사랑이란 말이야.”
“헛소리하지 마. 너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야.”
목구멍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목이 잠겨 말이 나오질 않았다. 입을 열자 울먹거리는 신음이 샜다.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나를 향해 그는 차갑게 직조된 태도를 이어 갔다.
“나 그날 학교에 휴학계 내러 갔었어.”
엄마를 만나러 갔던 그날을 말하고 있었다. 형을 반갑게 부르는 후배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오던 그날. 형은 그때부터 나를 정리하려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망연하게 그를 바라보는데 무릎이 휘청거리는 착각이 일었다. 눈앞의 모든 사물이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아버지한테도 곧 말씀드릴 거야. 너 수능 끝나면 바로 유학 갈 거야.”
“…….”
“내가 한 짓은 이제 다 잊어버려.”
형이 나를 피해 방을 나가 버렸다. 나를 혼자 두고 도망가 버렸다.
혼란스러울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그는 집을 나가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