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62화 (62/101)

62.

에텔에는 여덟 개의 태양이 뜬다 (2)

한참이나 가이딩을 하고도 모자랐는지, 칼서스는 칭얼거리며 키스까지 졸라 댔다. 그 결과, 나는 반쯤 넋이 나가 초점까지 흐릿해진 채로 회의에 끌려가야 했다.

회의실로 들어서자, 카르나가 반갑게 인사했다.

“형님! 오셨습니까?!”

“네에, 저 왔어요…….”

내가 힘없이 대답하자, 카르나가 순진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분명 악의 없이 나를 걱정해서 던진 질문일 텐데, 질문을 받은 나는 괜히 나쁜 짓 하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철렁하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묻지 마……. 대답하기 쪽팔리니까…….’

나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숨기며 대답했다.

“가이딩을 하고 와서 조금 피곤한 정도예요. 그것보다 다들 회의 때문에 모여 있다면서요?”

그 말을 들은 카르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러드에게 온 전언 때문에 다들 집합해 있습니다.”

“안전하게 모여야 해서, 칼서스 씨가 고생을 많이 해 주셨어요. 시르야는 항상 더비히에 있다지만, 저나 러드는 르데아와 바유에 있었거든요.”

러드가 가네시아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완전 정 반대편에 있는 나라인 데다, 바유는 제국군이 곳곳에 포진해 있어서 남의 눈을 피해 이동하기 힘들었죠.”

“게다가 카르나 전하는 왕궁에 계시기까지 했어요. 솔직히 칼서스 씨가 없었다면 바로 모이지도 못했을 거예요.”

다들 입을 모아 칼서스에게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들의 표정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더 늦지 않게 대응할 수 있게 된 점은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미 죽어 나간 사람의 소식을 알고 있기에 마음이 착잡한 것일 터다.

나는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칼서스에게 들었어요. 지금 가일이 에텔 출신의 징집군을 학살하고 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러드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건 반투명하면서 자그마한 벌새 형태의 정령이었다.

‘……주머니에서 꺼내도 되는 건가?’

그래도 나름 정령인데, 저렇게 물건처럼 꺼내도 되는 거야?

내가 심란해하는 사이, 정령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한차례 날개를 푸드덕거려 몸을 정돈했다.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훑던 작은 정령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나는 카타 소일과 계약한 정령인 아그라나라고 한다.]

“어…….”

무척 자그마해서 목소리도 아기자기할 줄 알았는데, 아그라나는 예상외로 중후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뭐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계속해 주세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척 손사래를 치곤, 다시 아그라나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아그라나가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북쪽 궁의 지하에 피 웅덩이가 만들어질 정도로 많은 인간이 죽었다.]

“피 웅덩이…….”

[족히 수백은 죽었겠지. 그 참혹함에 주인이 무척 심란해했다.]

거기까지 말한 아그라나가 한숨을 내쉬듯 ‘삐익’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치명적인 귀여움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피를 흘린 인간들은 모두 에텔 출신의 기사였다. 계약자는 그 사실을 알리고자 했지.]

칼서스에게 들은 내용과 다른 부분은 없었다.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그라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전해 줘서 고마워요. 이제 소임을 다했으니 주인의 곁으로 돌아가요.”

[그러지.]

아그라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포르르 공중으로 날아올라 공기에 뒤섞이듯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러드가 깊은 탄식을 터트렸다.

“대체 왜 그런 짓을…….”

“광신도니까.”

러드의 질문에 대답한 건 칼서스였다. 그는 건조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차분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에텔의 왕족은 존경받는 지도자다. 그 사실이 가일에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거슬렸겠지.”

가네시아가 칼서스의 말을 거들었다.

“그에게 있어 하늘이란 아르테스의 황제입니다. 그런데 에텔의 왕족이 태양으로 받들어지고 있으니, 이전부터 에텔인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거예요.”

“이 틈을 타서 에텔인을 상대로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뜻이군요.”

그 말을 들은 러드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동생과, 참혹하게 살해당한 에텔인을 겹쳐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출병을 서두르게 만드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가네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인위적으로 봉기가 일어나도록 하자는 건가요?”

“비슷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던졌다.

“가네시아, 지금 당장 운용할 수 있는 혁명군은 얼마나 되죠?”

“전체 인원의 절반 정도는 언제든 운용할 수 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가네시아가 칼서스 쪽을 흘긋 바라보더니, 멋쩍어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칼서스 씨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니, 칼서스 씨가 지치지 않았을 때라면 언제든지 운용할 수 있습니다.”

“칼서스의 체력은 제가 책임질 수 있습니다.”

낯간지러운 감정과 부끄러움은 사람의 목숨 앞에서는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

나는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 부끄럽다는 이유로 가이딩을 피할 만큼 이기적인 인간은 못 되었다. 그러니 칼서스의 체력보다는 다른 쪽을 걱정하는 게 맞는 일이겠지.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 그쪽은 문제가 없어요. 문제가 있다면 출병 이전에…….”

가일이 에텔인에게 얼마나 더 가혹한 짓을 할지가 문제일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잠깐.”

“네?”

나는 옆에 있는 카르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르나, 지금 에텔 왕가의 반지를 꺼내 줄 수 있나요?”

카르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가 시키는 대로 반지를 꺼내 보여 주었다.

그걸 본 러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봉기에 에텔 왕가가 개입하면 안 됩니다. 분명 제국에서 꼬투리를 잡을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이유로 필요한 거예요.”

나는 카르나에게서 반지를 받아 든 뒤, 칼서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칼서스, 린을 불러 주세요.”

“그 녀석을 어디에 쓰려고?”

나는 칼서스의 질문에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일이 셰아드 왕녀를 죽이지 못하게 감시해야 합니다.”

그 대답에 방 안의 인물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 *

정처 없이 황궁을 돌아다니던 셰아드가 인적이 드문 곳에 멈춰 섰다. 그녀의 표정은 무척 음울했고, 얼굴은 핏기 없이 파리했다.

‘가일이 동부로 출병한다니…….’

셰아드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왕가가 안일해서 백성들이 피해를 보게 된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가뭄에 대비해서 저수지를 더 확보해 뒀어야 하는데…….’

에텔 왕가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해서 백성들이 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차라리 내가 대신 죽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만 자신은 이 황궁의 안에 감금당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신세다.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 리 없다. 그 참담한 생각에 셰아드의 양 뺨을 타고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숨죽여 훌쩍이던 순간이었다.

“……에텔의 왕녀인가?”

“힉!”

등 뒤에서 들려온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마치 듣고 있는 셰아드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듯했다.

놀란 셰아드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자, 피를 뒤집어쓴 몰골의 가일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셰아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왜 이런 곳에서 울고 있지?”

“아, 아…….”

가일이 주변을 눈으로 슥 훑어보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쪽은 애동들이 기거하는 궁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데.”

“…….”

“뭘 하고 있었지?”

추궁을 하는 듯한 목소리에, 셰아드가 급하게 변명거리를 중얼거렸다.

“아르테스 신전의 기도실로 가고 있었어요.”

“기도실?”

아, 하긴. 이쪽이 신전으로 향하는 지름길이긴 하지.

그렇게 중얼거린 가일이 만족스럽다는 듯 이를 드러내 웃었다.

“신앙이 깊은 자인가.”

가일은 한결 경계가 풀린 듯한 눈으로 셰아드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굳어 든 건 그 직후였다.

“……왕녀.”

“네, 가일 단장님.”

셰아드가 잔뜩 긴장한 채로 답하자, 가일이 오른손으로 셰아드의 손을 가리키며 물었다.

“항상 소지에 끼고 다니던 반지는 어디 갔지?”

그 질문을 듣자마자 셰아드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황궁에 머물고 있는 볼모가 여섯이나 되는데, 그들이 평소에 어떤 장신구를 차고 다니는지 일일이 외우고 있다니…….’

셰아드는 소름이 돋은 팔을 손으로 문지르며 대답했다.

“요, 요새 살이 빠져서……. 반지가 헐거워진 나머지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마지막에 방문한 곳이 기도실인 기억이 나 그래서 그걸 찾으러 기도실로 가던 참이었어요.”

“그래?”

가일이 고개를 숙여 셰아드와 시선을 맞추었다.

“폐하를 모시는 왕녀가 바닥을 기며 반지를 찾게 해서야 황실에 모욕일 뿐이지. 대신 내가 뒤져 보면 어떨까?”

그러고는 피로 진득해진 손을 들어 올려, 셰아드의 머리칼을 한 움큼 쥐었다. 가일의 얼굴 위로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이 궁 안에 그 반지가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

“…….”

“그러면 알아낼 수 있겠지. 그렇지 않나?”

가일이 거기까지 말한 순간, 그의 얼굴 쪽으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가일은 반사적으로 그람을 들어 올려 검날로 그 무언가를 막아 내었다.

그러자 찰박, 소리가 나며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물?”

가일이 얼떨떨해하며 검을 내렸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린 멜리온이 들어왔다.

“뭐 하는 겁니까?”

“린 멜리온…….”

“감히 폐하의 애동에게 손을 대다니.”

그녀가 작은 체구에 걸맞지 않는 흉흉한 살기를 풍기며 읊조렸다.

“황족의 권위에 도전하시려는 겁니까?”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가일에게서도 선득한 살기가 넘쳐흘렀다. 그가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트리며 중얼거렸다.

“……지금 뭐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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