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에텔에는 여덟 개의 태양이 뜬다 (1)
세 명의 병사가 핏자국으로 얼룩진 계단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모두 더비히 출신의 혁명군으로, 징집 명령에 순응하는 척 황궁에 숨어든 자들이었다.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대체 몇이나 죽은 거지?”
질문을 들은 병사가 탄식을 터트렸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목숨이 사라졌다는 건 알겠어.”
병사가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어 핏자국이 남은 계단을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이렇게 많은 피가 흘렀는데, 가일 그놈 몸에는 상처 하나 없다니…….”
“지긋지긋한 괴물 새끼 같으니.”
다른 병사가 안타깝다는 듯 시커멓게 물든 계단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시커멓게 스며든 피로 물든 바닥 때문인지, 계단 아래가 꼭 무저갱처럼 보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출병하기도 전에 에텔의 병사들이 모두 죽어 버리겠어.”
“어떻게 할 방도가 없을까?”
자리에 꿇어앉아 있던 병사가 무릎을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카타.”
“응?”
“너 엘프 혼혈이었지?”
“응.”
카타라고 불린 병사가 덤덤하게 질문을 던졌다.
“정령술을 쓸 수 있겠어?”
“……황성 안에서는 마나를 운용할 수 없는 거 아니야?”
“아니야. 정령술은 쓸 수 있어. 너도 러드 이야기 들었잖아. 당시 2기사단 부단장이었던 린 멜리온이 정령술을 이용해 다른 귀족들을 지켜 내었다는 이야기 말이야.”
침착하게 설명한 병사가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러드에게 연락을 보내자.”
“뭘 어떡하려고 그래?”
“뭘 어떻게 하자는 게 아니야. 그냥 이 상황을 알리자는 거지.”
짙은 무력감이 피곤처럼 배어든 표정이 다시금 계단 아래쪽을 향했다.
“우리가 아무것도 못 한다고 해서, 가네시아와 러드까지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아니잖아.”
“…….”
침통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까 이야기를 전하자.”
말을 마친 그는 다시 카타라고 불린 병사를 차분히 바라보았다. 카타는 몇 번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불안해하다가, 각오를 다진 듯한 표정을 짓고는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엘프의 피를 계승한 자가 명한다.”
그의 오른손에서 엷은 푸른색의 마나가 피어오르더니, 한데 뭉쳐 반투명한 덩어리가 되었다.
“아그라나, 모습을 드러내.”
[명 받듭니다.]
반투명한 덩어리는 이윽고 벌새의 형태로 변해 카타의 손등 위에 가볍게 안착했다.
“아그라나, 내 말을 러드에게 전해 줄 수 있겠어?”
[말을 전하는 정도라면 어렵지 않지요.]
아그라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가벼운 어투로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카타가 정령을 대견해하며 손끝으로 벌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러드에게 ‘에텔에서 일어난 사건을 빌미로, 가일이 징집된 에텔군을 학살하고 있다’고 전해 줘.”
[전달하겠습니다.]
애교를 부리듯 카타의 손끝에 한차례 부리를 비비적거린 아그라나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몸조심하십시오.]
“……그럴게. 너도 몸조심해.”
대답을 들은 아그라나는 망설임 없이 창문을 넘어 높이 날아올랐다. 화살을 쏜 것처럼 쐐액 소리를 내며 날아간 새는 금세 세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걸로…….”
카타의 곁에 서 있던 병사가 한숨 섞인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더는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 이미 사라진 벌새의 잔상을 눈으로 좇듯 창문 너머의 하늘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 * *
나는 칼서스가 외출을 한 사이, 그의 서재에 앉아 멍하니 창밖의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쳤나 봐…….”
넋을 놓은 사람처럼 창틀에 걸터앉은 채 바깥만 바라보다가도 문득 앓는 소리가 절로 입술 밖으로 새어 나갔다.
‘칼서스가 나랑 키스하면서, 성적인 만족감을 느낀 거야?’
내가 세계수의 계승자니까, 닿아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에 스킨십을 요구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
‘농담이지? 내가 잘못 느낀 거지?’
하지만 그 달콤한 향기가 단순히 내 착각이었다고 친다면, 내가 칼서스와의 키스에서 지나친 황홀감을 느낀 게 된다.
‘그건 더 이상하잖아!’
나는 한참 동안 창틀에 머리를 꿍꿍 찧으며 한숨을 연거푸 내쉬다가, 결국 내가 겪은 일이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나는 눈치 없이 칼서스가 구애하는 걸 다 받아 준 거잖아…….’
……어쩐지 주변 사람들이 나를 빼놓고 저들끼리만 알아듣는 대화를 하더라니.
정말 내가 눈치가 없어서 못 알아챈 거였구나.
‘갑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제가 눈치 없게 굴었네요.’
뒤늦게 돌이켜 보니 주변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가 모두 납득이 갔다. 칼서스와 대놓고 사랑한다느니 어쩐다느니 서로 깨를 볶으면서도……,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니, 이상하게 여겨지는 게 당연했겠지.
‘앞으로 칼서스 얼굴을 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한 번 더 창틀을 이마로 가볍게 들이받았다.
그와 동시에 서재의 문이 노크 소리도 없이 벌컥 열리더니, 칼서스가 서재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해일.”
“와아악!”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당혹스러워하며 뒤를 돌아보자 서재의 문 앞에 선 칼서스가 눈에 들어왔다.
“카, 칼서스?”
“왜 그렇게 놀라지?”
“그, 다, 다른 생각을 좀, 하다가…….”
내가 필사적으로 변명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은 순간, 비릿하고 눅눅한 향기가 훅 끼쳐 들었다. 분명 칼서스가 우울하고 잔뜩 지쳐 있을 때 나던 향기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질문을 던졌다.
“……잠깐, 대체 뭘 하고 온 거예요??”
아까 가네시아에게 연락이 왔으니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하고 나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기에 이렇게 잔뜩 우울해져 있는 거야?’
최근엔 이런 눅눅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풍긴 적이 없었는데, 무슨 사고를 겪기라도 한 걸까?
“무슨 일 있었어요?”
“큰일이 있던 건 아니야.”
누가 큰일도 아닌데 이렇게 우울해한다고 그래! 분명 무슨 일 있었던 거잖아!
나는 제법 따끔할 시선으로 집요하게 칼서스를 노려보며 눈빛으로 그를 추궁했다. 그러자 칼서스가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더니, 그답지 않게 지친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러드에게 전언이 왔었다.”
“러드에게요?”
칼서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양손으로 가볍게 마른세수를 한 번 했다.
“에텔에서 일어난 사건을 빌미로, 가일이 징집된 에텔군을 학살하고 있다는 내용의 전언이었지.”
“…….”
칼서스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더니,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것 때문에 파견을 갔던 녀석들을 급하게 한자리에 모아 두느라, 권능을 많이 썼어.”
“그런…….”
“덕분에 꽤 지쳤지.”
칼서스가 방을 똑바로 가로질러 창틀에 앉은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회의 때문에 우리도 곧 출발해야 한다.”
그러더니 창틀에 기대어 앉아 있던 내 허리에 팔을 휘감고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키스해 줘.”
키스해 달라는 말을 듣자마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들었다. 동시에 순식간에 뺨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부, 부끄러워 죽겠는데 이거…….’
칼서스는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우물쭈물하자,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나 너무 힘들어, 빨리 키스해 줘…….”
평소와 다름없는 아양 섞인 몸짓이 기묘할 만치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목을 잔뜩 움츠리며 작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펴, 평범하게 가이딩을 해 달라고 말해도 되잖아요.”
칼서스는 그 말을 듣곤 불만스럽게 미간을 구기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순한 가이딩으로 취급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
“네가 날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서, 굳이 키스해 달라고 말하는 거야.”
“어, 어어…….”
단호하고도 당당하게 ‘예쁨받고 싶어서 아양을 떠는 게 맞다.’고 선언해 버리다니.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칼서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칼서스가 찌푸렸던 인상을 펴더니, 어여쁘게 눈웃음을 치며 살갑게 속닥였다.
“내가 네게 아양을 떤 게 하루 이틀 있던 일도 아니잖나. 네게 사랑받고 싶어. 그러니 어서…….”
사람을 유혹하는 악마처럼, 달콤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응? 내가 예쁘지 않아?”
칼서스는 한층 더 뻔뻔하게 속삭이더니, 고개를 내밀어 내 콧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미, 미치겠네……!’
가까워진 거리감과, 유혹적인 행동에 심장이 쿵쿵거리며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몰라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칼서스가 내 시선을 따라와 부러 눈을 맞췄다.
“해일.”
“…….”
“나한테 집중해야지.”
그 말을 들으니 불쑥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칼서스를 두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나는 결국 눈을 꾹 감고 고개를 앞으로 들이밀어 그에게 키스했다.
‘이 용, 심장에 해로워…….’
칼서스는 내가 잔뜩 얼어 있든 말든, 평소처럼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깊게 맞추더니, 혀끝으로 잇새를 열어젖히고는 부드럽게 키스를 이어 나갔다.
할딱이며 들이켠 숨결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삽시간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아찔함이 몸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