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사실적시에 의한 멘탈파괴 (5)
‘진심인가?’
소름이 끼친 나는 반사적으로 황태자의 표정을 훑어보았다. 혹여나 태연한 척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죄책감도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차분하게 친부를 살해할 계획을 검토해 봤다는 뜻이었다.
‘……이 일련의 이야기를 거북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한 거겠지?’
제아무리 폭군이라도 해도 가족으로 자라 온 시간이 있을 텐데, 저 말을 저렇게 담담하게 뱉을 수 있다니.
그렇다는 건 계획에 방해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게 누가 되었건 망설임 없이 살해할 수 있다는 뜻일 터.
‘역시 악독한 놈이야…….’
나는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본 황태자가 한층 더 유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렇게 걱정스러워하는 표정 지으실 것 없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
“역시 해일 경은 다정하시네요.”
……걱정해 준 거 아닌데.
그냥 미친놈 같아서 긴장한 거라고 말하면 나도 죽겠지?
나는 눈치껏 입을 닫으며 황태자의 눈치를 봤다. 그러자 황태자가 미소 지은 채로 느긋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저의 아버지이기도 하나, 동시에 황제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황태자의 표정에 씁쓸함이 스쳤다. 황제라는 이름이 지니는 무게감을 새삼 자각한 사람 같았다.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폐하는 스스로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계십니다.”
“…….”
“그놈의 권력 놀음이 뭐라고, 그렇게 망가지셨는지 모르겠네요.”
황태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체념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같잖은 동정심으로 아버지를 살려 두는 쪽이 더 잔인한 처사가 될 겁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칼서스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이미 황제의 자리가 주는 권력에 취해 있으니……, 선황제가 되어 아들을 증오하고 저주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보단 죽여 주는 게 더 너그러운 처사겠지.”
“정확합니다.”
살아서 자신을 폐위시킨 아들과 얼굴을 맞대며 암투를 벌이는 것보단, 차라리 단칼에 목을 쳐 주는 게 감정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낫긴 하겠지만…….
‘……정말 황태자는 동요하지 않는 걸까?’
나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황태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황태자 또한 고요하게 가라앉은 파도처럼, 차분히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이대로라면 제국은 아버지의 대에서 멸망할 겁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잘못된 길을 걷게 된 아버지를 막고, 제가 황제가 되어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요.”
그 이야기를 듣자 정해일의 몸으로 살아갈 때 읽었던 논어의 한 문구가 떠올랐다.
‘부모가 잘못된 길을 가려 할 때, 잘못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 진정한 효라고 했던가.’
어쩌면 황태자는 황제를 위하여 그를 죽일 결심을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니, 불쾌하던 마음이 녹아 사라지고 내 마음속에서 일었던 동요도 가라앉았다.
“전하의 말씀은 잘 이해했습니다.”
나는 평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다만 출병까지는 조금의 여유가 있으니, 그동안 생각을 해 보고 싶습니다.”
“저도 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을 듣고자 한 건 아닙니다.”
황태자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본래대로라면 출병에 맞춰 서부의 인력을 움직여야겠지만…….”
루비색의 눈동자가 칼서스를 향했다. 잠시 입을 닫고 칼서스를 바라보던 황태자가 말을 이었다.
“용이 있다면 말이 다르지요.”
칼서스가 오만하게 아래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가일이 도착하는 시간만 알 수 있다면 언제든지 군대를 이동시킬 수 있다. 그러니 아직 여유로워.”
“그렇겠지요.”
황태자가 안심한 사람처럼 실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일주일 뒤에 다시 이 장소에서 뵙는 걸로 하면 좋을 듯합니다. 그때까지 여유롭게 생각을 정리해 주세요.”
“좋습니다.”
나는 황태자를 따라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묵례했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들은 카르나가 고개를 숙여 라야나 왕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누님, 이틀 뒤에 다시 뵙겠습니다.”
“몸 건강히 있어야 해.”
“당연하지요.”
카르나가 의젓하게 대답했지만, 라야나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은근슬쩍 린의 옆으로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린, 라야나 왕녀님을 잘 부탁해.”
“물론이죠.”
서로가 각자 다른 일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황태자가 칼서스의 앞에 가 섰다.
“칼서스 데포트.”
“뭐지?”
황태자는 칼서스를 경계하는 듯, 원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체념한 것처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힘 빠진 목소리로 부탁했다.
“……해일 경을 지켜 주세요.”
그 목소리를 들은 칼서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참이다.”
어쩐지…… 내가 알아채지 못한 기 싸움이 있었던 것 같은 눈치인데.
저렇게 둬도 되나?
“돌아가지.”
“아, 넵.”
고민하는 사이 칼서스의 입에서 돌아가자는 말이 나왔다.
나는 일단 황태자에 대한 생각을 뒤로 미뤄 두고, 그의 뒤를 따라 둥지로 향했다.
* * *
둥지로 돌아오고 나니 긴장이 탁 풀렸다. 나는 침대의 가장자리에 쓰러지듯 앉으며 긴 탄식을 흘렸다.
“하아…….”
상황은 나름 잘 풀려 가고 있다. 황태자의 조력도 있고, 칼서스도 있고, 잘 훈련받은 정예병도 있으며 비축해 둔 식량도 충분하다.
‘더 걱정할 건 없어.’
당장 전쟁이 벌어져도 괜찮을 만큼의 승산이 보장된 상황이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는 건 막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가, 영 마음이 불편하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가슴이 갑갑하고 속이 불편한 감각이 느껴졌다.
‘내가 과연 전쟁을 버틸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죽어 가는 사람들과 아군을 보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스며 나와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어깨와 손이 잘게 떨렸다. 그러자 곁으로 다가와 앉은 칼서스가 떨리는 손을 부드럽게 잡아 주며 나를 달랬다.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칼서스…….”
깊은 호박색의 눈동자가 너그러움을 가득 담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 곁에서 떨어지지만 않으면, 다칠 일도 없으리라 자부하지.”
그렇게 말한 칼서스가 다정스레 눈웃음을 지었다. 그 예쁜 미소를 보자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몸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가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만 아니었으면 인간의 싸움에 낄 이유도 없을 텐데.’
그럼에도 내 필요에 맞춰 움직여 주는 데다가, 긴장한 나를 얼러 주기까지 하는 건……. 순전히 내가 그걸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내가 슬퍼할 걸 알아서, 희생해 주고 있는 거야.’
그야말로 나만을 위해 움직여 주고 있는 셈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 미약한 간지러움이 일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다정한 칼서스가 좋아요.”
“말로만 좋다고 할 건가?”
칼서스가 맞잡은 손을 들어 올리더니, 내 손등 위로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떼었다. 입술이 떨어지는 쪽 소리가 귓가를 홧홧하게 데웠다.
“더 예뻐해 줘. 아양이라면 질리도록 떨어 줄 테니.”
“못 하는 말이 없어…….”
“빈말이 아니다.”
칼서스가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추더니, 진지하면서도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시선을 잡아 두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
그 말을 듣자 다시금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맹목적인 애정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왜 이렇게 가슴이 간지럽지?’
부모님이 일찍이 돌아가신 탓에, 타인이 베풀어 주는 애정에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칼서스의 무조건적인 애정에 자꾸만 마음이 술렁이는 건 그런 이유인 걸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즈음, 이마에 칼서스의 입술이 와 닿았다.
“내 아양이 먹혔나 보군. 상쾌한 향기가 가득해.”
……내가 기뻐하고 있었구나.
나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으며 푸스스 흩어질 것 같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내 용이 예쁜 짓만 하는데, 어떻게 안 좋아해요.”
“그럼 칭찬해 줘.”
칼서스는 그렇게 말하며 오늘 아침에 했던 것처럼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려 보였다.
그걸 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네시아를 도와주면 칭찬해 주겠다고 약속했었지.’
내가 친 사고며, 벌어지는 사건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네.
‘양심이 찔린다…….’
칼서스는 나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는데, 정작 나는 약속도 잊고 있다니. 죄책감으로 어깨가 축 늘어졌다.
칼서스가 그런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시겠다.”
“……다른 사람 생각한 거 아니거든요.”
나는 투덜거리듯 말하며 양팔을 칼서스의 어깨에 느슨하게 걸쳤다. 그러자 칼서스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밀린 칭찬을 해 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하.”
대답을 들은 칼서스가 헛웃음을 짓더니,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눈을 감고 가만히 얼굴을 내어 주었다. 나는 그 조각 같은 얼굴 위로 천천히 쪼는 듯한 입맞춤을 남겼다.
“하아…….”
그렇게 이마부터 천천히 타고 내려온 입술이 마지막으로 코끝에 입맞춤을 남기자, 칼서스가 눈을 뜨고 나와 시선을 얽었다.
그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입술에도 해 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비틀어 그와 입술을 겹쳤다. 그러자 칼서스가 입술을 마주 대더니, 입술을 열어 혀를 얽어 왔다.
익숙하면서도 낯 뜨거운, 살덩이가 뒤엉키는 물기 어린 소리가 귀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