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사실적시에 의한 멘탈파괴 (4)
“그러, 그, 그러니까…….”
황태자가 루비색의 눈동자를 굴려 칼서스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가 힘겹게 입을 열어 불완전한 문장을 뱉어 내었다.
“해일 경이, 세계수를 계승한……?”
“그렇게 됐습니다.”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내 옆에 서 있던 칼서스가 린을 흘겨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설명하는 걸 잊고 있었다니, 너도 어지간한 놈이구나.”
“시끄러워 도마뱀 새끼야, 너한테는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
이 지지배, 또 싸가지 없게 칼서스한테 도마뱀이라고 그러지!
너랑 칼서스가 동갑인 줄 알아?! 까마득한 어르신한테 버릇없이 뭐 하는 거야?!
나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린에게 주의를 주었다.
“린, 칼서스한테 도마뱀이라고 하면 혼난댔지.”
혼이 난 린은 어린아이처럼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작은 소리로 웅얼웅얼 불평했다.
“툭하면 단장님을 희롱하는 놈인데, 도마뱀이라고 불린다고 꿈쩍이나 하겠어요?”
“희, 희롱?”
황태자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칼서스를 바라보았다.
칼서스는 부담스러운 시선에 눈살을 찌푸리며 까칠한 대답을 내놓았다.
“희롱이라고 칭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용이 세계수를 갈구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넌 그 정도가 심하잖아.”
칼서스는 대답 대신, 보란 듯이 내 허리춤을 감싸 안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행동으로 보건대 분명 ‘해일이 화내지 않으면 심한 게 아니잖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또 편들어 달라고 칭얼거릴 셈이지……?’
나는 어린애처럼 편 가르기를 하는 칼서스를 불만스럽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칼서스, 린이랑 싸우지 말라고 몇 번이나 설명했잖아요.”
“저 녀석이 먼저 나를 모욕했어. 나를 사랑한다면 억울한 내 심정도 이해해 줘야지.”
“어린애도 아니고 정말…….”
한숨 섞인 말을 중얼거리자, 그 말을 들은 황태자가 놀란 토끼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사, 사, 사랑……?”
……아까부터 생각한 거지만, 너무 심하게 당황스러워하고 있는 거 아닌가? 왜 저렇게 어리둥절해하지?
‘인간이랑 용이 친하게 지내고 있어서 놀란 건가?’
내가 황태자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곁에 붙어 있던 칼서스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해일, 입 맞춰 줘.”
“대화 중이잖아요. 좀 참아 봐요.”
“권능을 사용했잖아. 나를 아낀다면 가이딩을 해 줘야지. 안 그래?”
“……내가 못 살아, 진짜.”
나는 어쩔 수 없이 까치발을 들어 칼서스와 입술을 겹쳤다. 가볍게 혀가 얽히자 질척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 꼴을 본 린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어우, 도마뱀 새끼 저거 또 저러네.”
“…….”
가벼운 가이딩이 끝나자, 눈가를 타고 고여 있던 눈물이 도르륵 흘러내렸다. 어느 정도 진정되었는지 칼서스가 혀를 내밀어 눈물을 핥아 주었다.
린이 못마땅해하며 말했다.
“단장님, 그거 다 엄살이라니까요.”
“나도 알아.”
“엄살 부리는 걸 알면서도 받아 주시니까 자꾸 기어오르는 거 아녜요.”
“그래도 내 용이라, 예쁜 걸 어떡해?”
황태자는 혼백이 증발한 듯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예뻐……? 용이……?”
“……전하, 아까부터 왜 그러세요?”
“어…….”
내가 걱정스러워하며 질문하자, 황태자가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질문했다.
“그러니까, 연인……?”
“그것보단 좀 더 깊은 사이지.”
칼서스가 비웃듯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끌어 올리며 말했다.
“평생의 반려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겠군.”
비열한 표정도 참 예쁘구나, 싶은 마음과 함께 ‘이 새끼, 또 장난치네.’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밀려 올라왔다.
‘나잇값 좀 해라….’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팔꿈치로 칼서스의 허리춤을 찔러 눈치를 주었다.
“세계수로서 용을 가이딩 하고 돌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하는 거예요. 별로 사심은 없어요.”
“아…….”
장난치다가 혼이 난 칼서스는 삐친 듯한 표정을 지었고, 놀랐던 황태자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가볍게 손뼉을 쳐 주목을 끌어오며 말했다.
“그보다, 이제 슬슬 진지한 이야기로 돌아가죠.”
“아…….”
정신이 돌아온 황태자가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바로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일의 파병에 앞서, 반란군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혁명군입니다.”
“……네, 혁명군이죠.”
싸늘하게 황태자의 실수를 바로잡아 준 나는, 만족하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가일과 함께 파병되는 병사들의 규모가 어떻게 됩니까?”
“제국 기사단의 인원은 적으나, 이전에 타국에서 징집해 두었던 병사들은 모두 차출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제법 대규모군요.”
황태자가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힘없이 대답했다.
“에텔의 왕국군이 대규모의 병력에 대항해 국경을 지켜 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혁명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신 거군요.”
확실히 ‘에텔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현명한 방법이었다. 근 1년간 혁명군은 세력을 착실히 불렸으니, 에텔로 진군하는 세력을 막을 수 있는 좋은 방패가 되어 줄 터.
하지만…….
“전하.”
“네, 해일 경.”
……그 말을 꺼낸 게 어째서 ‘황위를 물려받을’ 황태자일까?
‘셰아드 왕녀도, 라야나 왕녀도, 하물며 카르나도 아닌 황태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나는 경계심을 가감 없이 표출하며 질문을 던졌다.
“왜 에텔을 돕고자 하십니까?”
“…….”
“전하께서는 제국의 차기 황제이십니다. 조용히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만을 기다리면 이 땅의 모든 것을 손안에 쥘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 질문에 황태자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내 말이 맞다고 인정하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그런 황태자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 갔다.
“이대로 혁명군에게 손을 빌린다면, 모든 왕국을 해방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이 끝나고, 약간의 공백이 이어졌다.
황태자는 대답을 망설이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둥 부산스럽게 굴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머뭇거리던 황태자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애당초…….”
그가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만 같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제국들을 왕국으로 격하시켜서는 안 되었습니다.”
“음?”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내 눈이 크게 홉떠졌다. 황태자는 그런 나를 곁눈질하며 우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일 년 전, 제국의 귀족들은 자신들을 위해 설탕을 생산한다며 밀밭을 밀어 버리고 사탕수수를 재배하게 지시했지요.”
“네, 그렇죠.”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가지 대답을 바라고 내뱉어진 듯한 질문이었다.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듯, 침착한 목소리로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밀을 추수하지 못해 식량난에 허덕이고, 사탕수수 농장에 끌려간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에텔의 군중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과욕은 곧 화를 불러일으킵니다.”
무소유를 주장하는 불자처럼, 황태자는 미련 한 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백성은 공포감으로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
“공포감을 이용해 백성의 불만을 억누르고,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를 폭력으로 진압하면 더 큰 반발이 일어날 뿐입니다.”
황태자는 작은 소리로 ‘인간은 짐승이 아니기에, 짐승처럼 길들이려 들면 안 됩니다.’라고 덧붙이더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백금을 늘려 만든 듯한 속눈썹이 루비 같은 눈동자를 덮으며 드리웠다.
“저의 친모 되시는 선황후께선, 돌아가시기 전에 백성이 있기에 나라가 있다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좋은 분이셨군요.”
“……좋은 분이셨지요.”
좋은 분이셨기에 황궁의 암투를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요.
황태자는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한마디를 중얼거리고는,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백성의 삶이 안정되어야 비로소 태평성대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귀족들의 행복을 우선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바라는 건 나라의 안정이 아니라, 자신의 배를 불리는 것뿐이에요.”
냉담하게 현재의 귀족을 비판한 그가 고개를 돌려 라야나 왕녀와 셰아드 왕녀를 바라보았다.
두 왕녀가 전쟁에서 승리한 제국의 전리품으로써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려는 듯, 그의 시선은 침착하면서도 한없이 음울했다.
“저는 공작새처럼 화려한 제 모습을 뽐내는 놈들을 귀족이랍시고 남겨 놓고 싶지 않습니다.”
카르나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황제 또한 그 공작새들 중 하나에 속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황태자는 제 아버지를 ‘공작새’라고 칭하는 카르나를 보면서도 전혀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한술 더 떠 카르나를 보며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이번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황제인 아버지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황태자는 무서우리만치 다정한 표정으로 카르나의 앞에서 황제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 그가 달콤한 미소를 입가에 걸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기에 저는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가 되어 모든 왕국을 해방시킬 생각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