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사실적시에 의한 멘탈파괴 (3)
사고를 친 벌로 칼서스의 머리를 빗질해 주고 있던 와중, 가네시아의 호출이 왔다.
“가네시아에게 연락이 왔다.”
“아티팩트로?”
“그래.”
칼서스는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훈련이 있는 날이 아니니…….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군.”
그렇게 말한 칼서스는 등 뒤로 손을 뻗어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손아귀 안에 들려 있던 빗을 가져가 침대 위에 대충 던져 버리더니 말했다.
“늦지 않게 가도록 할까.”
“그게 좋겠어요.”
대답을 하자마자 눈앞이 일렁거리나 싶더니,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갱도구나.’
이제는 익숙한 어두침침함이다. 나는 희미한 등불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에요?”
“해, 해일 경. 이걸 좀 봐 주세요.”
그러자 등불을 들고 있던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다. 카르나와 가네시아였다.
“편지가 왔어요.”
카르나는 그렇게 말하며 제 팔뚝 위에 앉은 반투명한 매를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러자 매가 입에 물고 있던 편지를 내 손 위로 툭 떨어트렸다.
“테라시아?”
[오랜만이군, 세계수.]
놀랍게도 반투명한 매는 정령 테라시아로, 이따금 린이 전서구 대신 사용하던 녀석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린이 보내서 온 거야?”
[그렇다. 그러니 편지를 확인해 봐.]
테라시아는 재촉이라도 하듯 뾰족한 주둥이로 내 손등을 쿡 찔렀다.
나는 재촉에 못 이겨 편지를 봉인한 밀랍을 떼어 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종이로 된 봉투 안엔 작은 반지 하나와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반지를 꺼내 들어 카르나에게 넘겨준 뒤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트리코나의 반란군 총책임자에게>
안녕하십니까. 저는 더비히의 왕녀, 라야나 더비히라고 합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건, 가일의 출병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에텔 지방에서 일어난 노예 해방 사건으로 인해, 가일이 에텔로 출병하게 되었습니다.
더비히에서 피바람이 불었듯, 가일이 에텔로 출병하게 된다면 필시 에텔에서도 많은 피가 흐르게 될 것입니다.
통탄스럽게도 제게는 이 상황을 타개할 힘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트리코나에 계실 반란군의 책임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그 증표로 황태자의 인장과, 에텔 왕가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반지를 보내 드립니다.
그 말을 증명하듯 편지의 말미에는 황가를 상징하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나는 당혹스러워하며 편지를 카르나에게 넘겼다. 뒤이어 편지를 읽은 카르나가 표정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이게 다…….”
우리가 편지를 읽기를 조용히 기다리던 테라시아가 말했다.
[황태자는 황제와 다른 길을 걷기로 했다. 왕국들의 해방을 바라고 있지.]
“이데아 아르테스가?”
왜지? 제국으로써는 왕국을 착취하는 걸 이득으로 생각하고 있을 텐데?
‘가만히 황위를 물려받는다면 왕국들을 이용해 물자와 노예를 충당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져올 수 있어.’
그런데도 왕국의 해방을 바란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보통의 황태자라면 제국의 부흥을 자랑스러워할 텐데…….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테라시아의 말에 대답했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일단 직접 만나서 대화해 보는 게 맞을 것 같아.”
테라시아는 내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닫은 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가네시아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닛, 아티팩트를 잠시 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안전하게 접선하기 위해서는 아티팩트가 필요할 것 같아요.”
“물론이죠.”
가네시아는 흔쾌하게 대답하며 귀걸이를 빼내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귀걸이를 받아 들며 말했다.
“여분의 양피지나 종이가 있을까요?”
“있지.”
칼서스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한 번 튕겨 양피지와 펜을 불러내었다. 둥지 안의 방에 보관되어 있던 물건이었다.
나는 양피지와 펜을 카르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라야나 왕녀님이 적어 주신 편지이니, 카르나가 답장을 적어 주세요.”
“……제 신분을 밝혀도 될까요?”
질문을 던지는 카르나의 눈길엔 혈육에게 안부 인사를 묻고 싶어 하는 듯한 간절함이 가득했다. 나는 그 눈빛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전까진 안 될 것 같습니다. 반란군의 총책임자라고만 적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카르나는 납득했는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의 내용은 어떻게 적으면 될까요?”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으니, 라야나 더비히와 황태자, 그리고 린 멜리온 셋을 따로 만나 보고 싶다고 적어 주세요.”
황태자와 린이 손을 잡았다면, 내가 혁명군 측에 가담해 있다는 사실은 진즉 공유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린의 이름을 호명하는 걸로, 답신을 적은 사람들 중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겠지.’
나는 가지런히 답장을 적어 나가는 카르나에게 한마디를 더 건넸다.
“아, 다른 이의 방해가 없는 장소에서 귀걸이를 두 번 두드리면 된다고도 적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답신으로 적을 내용은 길지 않았기에, 편지는 금세 완성되었다.
우리는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귀걸이와 함께 양피지를 말아 봉인한 뒤에, 그걸 테라시아에게 건네주었다.
“테라시아, 잘 부탁해.”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참이다.]
그렇게 말한 테라시아는 우리가 내민 양피지를 덥석 받아 물더니, 거대한 날개를 훌쩍 펼쳐 날갯짓을 시작했다.
“윽!”
날카로운 바람이 뺨을 할퀴는가 싶은 순간, 눈앞에서 테라시아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꿈결처럼 사라져 버린 테라시아를 대신하듯, 갱도 안에 매서운 바람 소리가 ‘훙훙’ 울렸다.
“…….”
나는 매서운 소리를 들으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부디 편지에 적은 내용이 사실이기를.’
그렇지 않다면, 친히 왕가의 증표를 내어 준 에텔의 왕녀와 라야나 왕녀, 그리고 편지에 이름을 실은 린이 위험해질 테니까.
‘그렇게 되면 황태자를 죽일 수밖에 없어.’
나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갱도를 바라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아티팩트의 호출은 우리가 갱도를 빠져나와 펍에 다다랐을 즈음에 도착했다.
“편지를 받아 본 모양이군.”
칼서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동을 시작해도 되느냐는 질문이었다.
“부탁해요.”
“지금 바로 부탁드립니다.”
카르나는 초조해하며 칼서스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칼서스는 그런 카르나를 귀찮다는 듯 한 번 내려다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
“갑갑하다. 떨어져.”
“이동하려면 가까이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야.”
……아니었어?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매번 이동할 때마다 저랑 손을 잡았잖아요. 접촉이 중요해서 잡은 게 아니었어요?”
“그건 잡고 싶어서 잡은 거다.”
“…….”
뭐 이런 뻔뻔한 용이 다 있어…….
내가 어이없어하며 칼서스를 올려다보자, 칼서스는 내 눈길을 무시하며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렸다.
“도마뱀이라고 불리더니…….”
카르나는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칼서스를 올려다보며 투덜거렸고, 칼서스는 그 말마저 무시하며 권능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바뀌고, 어두컴컴한 방과 촛불이 켜진 제단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단?’
제단의 아래쪽엔 흰 비단이 깔려 있었고, 촛불 너머에는 조각된 신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르테스 신전의 기도실이구나.’
나는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궁 내부에 있으면서, 가장 보안이 잘 유지되는 곳이기도 하지.’
아르테스 제국의 사람들은 신에게 하는 고해 성사를 신이 아닌 누군가가 듣는다는 걸 불경죄로 여긴다. 그렇기에 사람이 고해 성사를 위해 기도실에 들어갔다면 몇 시간이 지나건 그 기도실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꽤 영리한 선택이야.’
내가 켜진 촛불을 보며 내심 감탄하고 있던 때였다. 카르나가 내 뒤쪽 어딘가를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누님……!”
“카르나?!”
뒤를 돌아보니 카르나와 쏙 빼닮은 중성적인 미인이 서 있었다. 카르나는 다급하게 다가가 제 가족을 끌어안으며 속닥였다.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설마, 너……!”
“예, 제가 혁명군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라야나 왕녀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이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 해, 해일, 경?”
고개를 돌려 보니 황태자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당황하지?’
꼭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굴잖아?
내가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네, 전하. 해일 트레클리프 서입니다.”
“해, 해일 경…….”
황태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한 번 더 부르더니, 이번에는 내 곁에 선 칼서스를 보며 웅얼거렸다.
“그리고, 이 엘프는……?”
칼서스가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칼서스 데포트, 데포트 산맥의 주인이었던 용이다.”
대답을 들은 황태자의 눈에서 혼이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본 린이 스스로의 머리채를 잡더니, 아연실색하며 중얼거렸다.
“아, 세상에 어쩜 좋아…….”
“린, 너…… 설마…….”
내가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으로 린을 바라보자, 린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하께 단장님에 대해서 설명드리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
“…….”
내 그럴 줄 알았다. 이 허당아! 어쩐지 요새 네가 일을 너무 잘하더라!
“하아, 내가 못 살아.”
나는 긴 한숨을 터트리며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