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56화 (56/101)

56.

사실적시에 의한 멘탈파괴 (2)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밀려들었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으…… 머리야…….”

앓는 소리를 들었는지 칼서스가 다가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는 방금 씻고 나온 것처럼, 반쯤 헐벗은 채로 머리 위에 타월을 얹고 있었다.

“일어났나?”

“……칼서스, 웬일로 권능을 안 쓰고 목욕을 다 했어요?”

“…….”

권능을 쓰면 편했을 텐데, 왜 직접 목욕을 했지?

나는 걱정스러워하며 몸을 일으켜 칼서스의 곁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가까이 다가간 칼서스에게서는 냉기가 느껴졌다.

“몸이 차갑잖아요. 이 날씨에 찬물로 씻은 거예요?”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얼어 죽고 싶어?!

“몸 차가운 것 좀 봐! 세상에, 정신 나갔어요?!”

나는 벌컥 화를 내며 차갑게 식은 칼서스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짝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칼서스는 맞은 곳이 아프지도 않은지, 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딱 한마디를 던졌다.

“앞으론 금주야.”

“……저 또 사고 쳤어요?”

“쳤지.”

……이 몸뚱이는 대체 뭐가 문제길래 술만 처먹으면 사고를 치냐.

내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자, 칼서스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나마 이번엔 내가 그 대상이라 다행인 줄 알아.”

“……저 칼서스한테 욕했어요?”

“더한 짓을 했지.”

“뭔데요?”

“말하기 싫어.”

대답은 무서우리만치 딱딱했고, 그의 표정은 싸늘했다. 낮이고 밤이고 다정한 미소와 나른한 목소리로 아양을 떨던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웬만큼 잘못하지 않고서야 칼서스가 이럴 리가 없는데…….

‘설마, 칼서스한테 토한 거 아냐?!’

일리 있어, 그쯤 하지 않은 이상, 목욕을 하고 나오더니, 나한테 싸늘하게 굴기까지 할 리가 없잖아!

순식간에 상황 판단이 된 나는 거의 울먹거리며 칼서스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칼서스…….”

“…….”

“미안해요…….”

“…….”

“잘못했어요…….”

내가 낑낑거리며 연거푸 사과를 내뱉자, 칼서스가 고개를 약간 숙이더니 손가락으로 뺨을 툭툭 두드렸다. 기분이 풀릴 때까지 아양을 떨어 보라는 의미였다.

나는 칼서스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그의 뺨 위로 쪽쪽 소리가 나게 입술을 눌러 댔다. 칼서스는 입술이 부르트도록 입맞춤을 받은 다음에야 나를 용서해 주었다.

* * *

황태자가 주최하는 정기 다과회 날이 돌아오자, 수도의 곳곳에 퍼져 있던 황태자파의 귀족들이 한곳에 모여 새로운 소식을 떠들어 대었다.

붉은 장미꽃을 머리에 장식한 영애가 말했다.

“동부의 사탕수수 농장주가 죽었대요.”

“에텔의 시민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면서요?”

파란 연미복을 입은 영식이 비웃듯이 중얼거렸다.

“얌전한 줄 알았는데 에텔 왕국의 백성들도 승냥이 떼나 다름없었네요.”

“감히 제국의 귀족에게 납품해야 하는 물건에 손을 대다니.”

가슴팍에 튤립을 꽂아 장식한 영식이 질문을 던졌다.

“에텔에서 온 볼모는 누구였죠?”

“2왕녀인 셰아드 에텔이었어요.”

대답과 동시에 한 사람의 손끝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끝에는 갈색 머리칼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작고 가녀린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갈색 머리칼을 양쪽으로 땋아 내린 뒤, 눈 색과 비슷한 녹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다만 눈에 띄게 아름다운 다른 볼모들과는 달리 딱히 특징이랄 것이 없는 수수한 외모가 오히려 특이한 여인이었다.

머리에 장미꽃을 장식한 영애가 말했다.

“저기 있네요.”

“저 볼품없는 계집을 볼모랍시고 내놓은 에텔도 정신이 나간 것 같아요.”

가슴팍에 튤립을 장식한 영식이 샴페인 한 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조금 골려 줘 볼까요.”

그 말을 들은 다른 귀족들은 샴페인을 뒤집어쓰고 당혹스러워할 그녀를 상상이라도 한 듯, 숨을 죽이고 키득거렸다.

그렇게 영식이 멀찍이 돌아 셰아드의 뒤로 다가선 순간이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정원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엘프의 피를 계승한 자가 명한다, 실리오르! 그 모습을 드러내!”

그와 동시에 셰아드의 머리를 적실 뻔했던 샴페인이 휘몰아치듯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아름다운 벨루가의 모습으로 변했다. 린은 허공을 자유로이 유영하는 정령에게 활짝 웃으며 명령을 내렸다.

“실리오르, 축제에 걸맞게 화려하게 날뛰어 줘!”

[계승자의 말을 받듭니다.]

명령이 떨어지자 사방에서 술과 와인, 음료로 된 물기둥이 솟아오르더니, 각양각색의 물고기로 변해 허공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 몽환적인 풍경에 귀족들은 시선을 빼앗긴 채로 연신 감탄사를 흘렸다.

“와아!”

“대단해요, 멜리온 영애!”

린은 그사이, 구석에 서 있던 라야나를 향해 눈을 찡끗해 보였다. 신호를 받은 그녀가 조용히 셰아드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셰아드 왕녀 저하.”

“……라야나 왕녀 저하?”

“이쪽이에요. 따라오세요.”

린이 시간을 번 사이에 이동하자는 말이었다. 두 왕녀는 시선을 교환한 뒤, 조심스럽게 풀숲 사이로 모습을 숨겼다.

그 둘의 뒤를 따라 황태자도 풀숲 사이로 향했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동한 황태자가 셰아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괜찮으십니까?”

“괜, 괜찮습니다.”

“제가 귀족들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어찌…….”

셰아드가 당혹스러워하며 황태자를 바라보자, 라야나가 손을 들어 셰아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귓가에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전하는 왕국에게 우호적이신 분입니다.”

그 말을 들은 셰아드는 머리 위로 번개가 내리친 듯한 충격을 받고 굳어 들었다.

“어, 어…….”

황태자는 심각하게 당황한 셰아드를 보며 미소 짓더니,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어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오래 피해 있을 수는 없습니다. 황태자인 이상 저는 남들 앞에 계속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당혹스러우셔도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세요.”

셰아드 왕녀는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네…….”

황태자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고는, 침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셰아드 왕녀, 에텔 왕가의 사람임을 인증할 수 있는 증표를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네, 네?”

“더비히의 트리코나 지방에 있는 반란군에게 편지를 보낼 예정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황태자의 입술 사이에서 줄줄이 새어 나왔다.

“왕국을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반란군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희는 멜리온 영애의 정령을 통해 반란군 세력에게 전언을 보내, 동부로 출병할 가일과 맞서 싸워 달라고 하고자 합니다. 그 과정에서 반란군이 동부로 수월하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왕가의 도움이 필요해요.”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정보에 셰아드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아니면 제 망상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가일이 한번 출병하면 그 일대가 피바다로 변한다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

“저는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생기지 않길 바랍니다.”

빠르게 이야기를 전달한 황태자가 셰아드의 손목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에텔 왕국의 희생을 줄이기 위함입니다. 힘을 빌려주세요.”

간곡한 목소리를 들은 셰아드 왕녀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이데아 아르테스는 아르테스 제국의 적자이다. 원수의 아들이야. 믿을 수 없어.’

셰아드가 차오르는 불신에 결국 고개를 저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 파르르 떨리는 황태자의 아랫입술이 보였다.

“…….”

그제야 그녀의 눈을 가린 의심의 틈새 사이로 황태자의 진실한 태도가 보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어.’

그리고 그의 목덜미와 이마는 어느새 식은땀으로 가득했고, 눈동자는 눈치를 보는 것처럼 주변을 수차례 흘긋거렸다.

명백하게 긴장한 듯한 모습이었다.

셰아드는 말없이 그 얼굴을 살피다가, 오른쪽 소지에 차고 있던 반지를 빼 황태자에게 내밀었다. 순금으로 만든 반지는 윗면이 도장처럼 평평했고, 태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반지를 황태자에게 건넨 그녀가 설명했다.

“소지에 차고 다니는 이 반지는 에텔 왕가의 핏줄들에게 지급되는 반지입니다. 어릴 때부터 쭉 왕가의 문양이 새겨진 반지를 차고 다니게끔 하죠. 왕족끼리 ‘안식’이라고 부르는 반지입니다.”

허나 왕족을 특별하게 생각하여 지급된 반지는 아니다. 오히려 목줄에 더 가까운 용도라고 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

‘자폭 기능이 들어 있는 반지니까.’

자신이 볼모 잡혀 나라가 위험해졌을 때, 그 몸을 불살라 나라를 구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장치였다.

‘첫 번째 목적은 살인 멸구이고, 두 번째 목적은 백성을 구하는 것이고, 세 번째 목적은…….’

죽어서도 치욕스러울 일이 없도록, 시체조차 남기지 않는 영원한 ‘안식’을 얻기 위함이다.

에텔의 왕족들은 제 오른손에 자리 잡은 ‘안식’을 보며 자신들의 의무를, 자신들이 짊어진 생명의 무게를 실감하곤 했다.

셰아드가 황태자의 손바닥 위에 놓인 반지를 보며 울음을 삼켰다.

“특수한 기능도 내장되어 있어서, 쉽사리 가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걸 내보이면 에텔 왕가의 사람들이 알아볼 거예요.”

그런 ‘안식’을 황태자에게 넘긴다는 건, 자신의 존엄을 내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 반지에 숨겨진 의미를 알지 못하는 황태자는 마냥 기뻐하며 셰아드 왕녀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반지는 소중히 사용한 뒤 돌려드리겠습니다.”

셰아드 왕녀는 허전한 소지를 왼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전하.”

“네, 셰아드 왕녀.”

“꼭…….”

그녀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울음 섞인 목소리를 토해 내었다.

“꼭 저희 고국의 백성들을 지켜 주세요.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편안한 죽음을 포기한 대가로, 에텔의 백성을 지켜 주세요.

셰아드 왕녀는 차마 마지막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을 내뱉어 버린다면, 황태자가 반지를 거부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태양처럼 침묵하는 것으로,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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