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54화 (54/101)

54.

가난한 자에게도 달콤함을 (4)

예상과는 다르게 에텔에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제국이 민가를 털어 밀을 싹 쓸어 감과 동시에, 에텔 왕가가 몇 년간 비축해 둔 곡식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에게 종자며 식량으로 쓸 밀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리어 그것이 거센 분노의 도화선이 되었다.

왕족들이 밀과 설탕, 꿀 따위를 포기하고 구황 작물을 먹고 있다는 이야기가 민간에 돌았기 때문이었다.

‘에텔의 왕족들은 스스로를 <만민을 굽어살피는 태양>이라 칭하고, 백성들을 위해 엄청난 선정을 펼친 자들이야. 하나같이 희생정신이 투철하지.’

동시에 그만큼 에텔의 왕족들은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빌어먹을 제국의 개새끼들!”

“너희 때문에 가뭄이 온 거야! 그래서 왕가의 귀한 분들이 수모를 겪고 있다고!”

“책임져! 책임지라고!”

“너희들만 아니었어도 이런 상황은 오지 않았을 거라고!”

에텔의 백성들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너 나 할 것 없이 각지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달려가 격한 분노를 토해 냈다. 그들은 장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제국군에게 돌팔매질을 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목숨으로 죄를 갚아라!”

“이 땅에서 사라져!”

‘생각보다 반응이 훨씬 격하네.’

광기에 가까운 분노를 내보이며 달려드는 모습을 보자, 사탕수수 농장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제국의 기사들이 도리어 기세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농장주, 홉이 벌벌 떨며 소리를 내질렀다.

“이, 이 정신 나간 평민 놈들이! 안 꺼져?! 죽고 싶어?!”

“죽고 싶은 건 네놈이겠지! 우리의 가족을 노예 삼고, 농사에 훼방을 놓은 건 네놈이잖아!”

“그, 그렇다 한들! 나를 건들고도 너희가 무사할 것 같아?! 나는 제국의 귀족들에게 설탕을 공급하는…….”

“헛소리!”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던 가네시아가 높이 뛰어오르더니, 거대한 장검을 휘둘러 제국군 기사의 투구를 후려쳤다. 그러자 기사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가네시아는 그 기사의 갑옷을 짓밟으며 농장주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 눈빛엔 서슬 퍼런 살기가 들끓었다.

“히익!”

가네시아의 흉흉한 기세에 밀린 제국군 기사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그 반응을 눈으로 슥 훑어보고는, 위풍당당하게 소리쳤다.

“고작 그걸 두려워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이 농장의 땅을 밟은 순간부터 죽음을 각오했다! 이 목숨을 불살라 네놈을 처리할 생각으로 이곳으로 달려왔단 말이다!”

장엄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농장주의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가셨다. 반대로 가네시아의 등 뒤를 지키고 있는 군중들의 얼굴에는 비장함과 각오가 깃들었다.

그녀가 칼을 높이 치켜들며 다시금 소리쳤다.

“분노한 군중의 목소리가 세상을 울릴 것이다! 친구를, 가족을, 연인을 잃은 군중의 목소리가! 온 제국을 뒤덮으리라!”

“와아아아!”

“제국을 밀어내자!!”

나는 후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가네시아는 역시 카리스마가 있다니까.’

고기와 곡식을 잔뜩 먹여 놓은 보람이 있네. 척 봤을 때도 장군감이라고 생각했는데, 잘 먹여 놓으니까 위엄이 장난이 아니야.

나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가네시아의 너른 어깨와 탄탄한 팔뚝을 구경하다가, 슬쩍 팔꿈치로 칼서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칼서스.”

“그래.”

“본전을 되찾을 겸, 제국에게 보내야 했던 설탕을 에텔의 사람들에게 돌려주기로 해요.”

나는 익살스럽게 이를 드러내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에텔의 사람들의 피로 키운 설탕인데, 제국 놈들이 사치하는 데 쓰게 둘 수는 없죠.”

“일리 있군.”

“그리고 그 김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도 풀어 주면 더 좋고요.”

칼서스가 내 이마를 손끝으로 가볍게 툭 건드리더니, 고개를 숙여 시선의 높이를 맞췄다.

“나를 부려 먹을 셈이야.”

“당연하죠.”

나는 능청스럽게 칼서스의 어깨에 고개를 툭 기대었다. 칼서스가 그간 내게 아양을 떨 때 해 온 행동을 그대로 복사한 셈이었다.

“돌아오면 실컷 칭찬해 줄게요. 그러니 부탁해요.”

내가 히히 웃으며 칼서스를 올려다보자, 칼서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약았어.”

“새삼스럽네요.”

그렇게 중얼거리자 칼서스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가벼운 보복이었다. 만족할 만큼 내 머리를 헝클어트린 칼서스가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칼서스는 인사를 받고는 후드를 깊이 눌러쓰더니, 권능을 이용해 순식간에 가네시아의 곁으로 이동했다. 가네시아의 곁으로 간 칼서스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몇 마디를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가네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칼서스가 손을 휘두르자, 섬전 같은 마나가 해일처럼 밀려들더니 휩쓸린 제국군 기사들을 밀어 냈다.

“길이 열렸다!”

“저 자식을 붙잡아!!”

칼서스가 길을 터 주자, 이번에는 군중이 파도처럼 앞으로 밀려들었다.

그 모습을 본 농장주는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쓸데없는 반항이었다.

“도망가게 둘 것 같나?”

순식간에 가네시아에게 따라잡힌 농장주는, 그녀에게 뒷덜미를 붙잡혔다.

“사, 살려! 살려 주세요!”

“그대는? 그대는 에텔의 백성들을 구원한 적이 있는가?”

“그, 그건, 그게…….”

“자비라곤 한 톨도 베풀지 않았던 놈이 자비를 바라다니. 주제를 알아야지.”

가네시아는 미련 없이 그 후덕한 몸뚱이를 군중 사이로 던져 넣었다. 군중 사이로 나동그라진 농장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죗값을 청산한 것이다.

가네시아는 그 모습을 묵묵히 내려다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군중은 들으시오!”

위엄 있는 목소리에 다시금 사람들이 가네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호쾌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농장주에게 붙잡힌 가족을 구하러 가겠는가!”

“당연하지!”

“내 동생을 찾아오겠어!”

가네시아가 하늘 높이 칼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전진하라! 빌어먹을 제국의 개새끼가 누렸던 모든 걸 되찾아 오자!”

“와아아아!”

선두에 선 가네시아는 칼서스가 지시해 준 대로 군중을 이끌고 농장의 가장 안쪽으로 향했다. 그것으로 에텔의 사람들은 가족을 되찾은 기쁨과, 자신들이 누려야 했던 달콤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 * *

“이게 다 형님 덕분입니다!”

“맞아요. 다 해일 경 덕분이에요!”

칼서스의 권능으로 더비히로 돌아오자마자 카르나와 가네시아는 럼을 물처럼 들이켜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 둘 대신, 상대적으로 차분한 시르야가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당밀과 밀도 농장주가 비축해 둔 것처럼 꾸며서 비치해 두었습니다. 그 정도 양이면 당분간 농민들이 충분히 먹고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냈던 돈은 회수해 오셨나요?”

“물론 회수했습니다.”

나는 상쾌한 얼굴로 대답했다.

“절반은 군자금으로 비축해 주시고, 다른 절반은 에텔의 시민들에게 곡식을 조달하는 데 사용해 주세요.”

“여억시!”

그 말을 들은 카르나가 펄쩍 뛰며 달려왔다.

“형님은 정말 최고예요!”

“……카르나, 벌써 취했어요?”

“취하다니요! 이 아우, 아직 멀쩡합니다!”

카르나는 순식간에 내 허리춤을 끌어안더니, 코앞으로 술 한 잔을 내밀었다.

“자자, 형님도 한 잔 받으세요!”

“아, 저는…….”

“그만.”

칼서스가 카르나를 밀어 내더니, 까칠하게 쏘아붙였다.

“해일은 술이 약하다.”

“그래도 오늘같이 좋은 날엔 한잔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비록 럼이긴 하지만, 오늘 구해 온 설탕과 산사나무 열매를 개어 넣어서 맛있을 거예요.”

“잔 겉면에 소금도 발랐어요. 조금씩 같이 드시면 더 맛있을 거예요.”

그런 말까지 들으니 도무지 권유하는 술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칼서스를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칼서스…….”

“…….”

“딱 한 잔만 마실게요.”

“안 돼.”

나는 살짝 까치발을 들어 칼서스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카르나가 만들어 준 술이라 거절하기가 미안해요. 딱 한 잔이면 괜찮잖아요.”

“…….”

“딱 한 잔 정도면 취하지 않을 거예요.”

간청하는 목소리를 들은 칼서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들고 있는 그 한 잔뿐이다.”

“고마워요.”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카르나가 내 손아귀에 잔을 들려 주더니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형님, 저랑 건배하시죠!”

“이쪽도요!”

나는 웃으며 잔을 받아 들고는 생각했다.

‘그래. 딱 칵테일 한 잔만 마시는 건데, 설마 진짜로 취하겠어?’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술에 설탕과 소금 따위를 넣으면…… 알코올이 몸에 흡수되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술이랑 이온 음료를 섞어 마시면 완전 훅 가니까, 술을 마실 땐 이온 음료를 마시지 말라는 말도 있지.’

반대로 진통제의 약효가 빨리 돌게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약을 이온 음료와 같이 먹는 경우도 있다. 나도 응급실을 가기 애매한 면역 반응이 올라올 때엔 종종 그런 방식으로 몸을 진정시키곤 했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가 말한 내용을 정리해서 말하자면…….

‘설마 했던 한 잔으로 만취해 버렸다.’

고작 그 한 잔을 처먹고 필름이 끊겨 버렸다는 것이다.

시발, 내가 다시는 술을 입에 대나 봐라.

다음에 또 처먹으면 그때부턴 사람이 아니라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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