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가난한 자에게도 달콤함을 (2)
“빌어먹을 제국 놈들!”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는 홉이 펍의 문을 발로 차 열어젖히더니, 한껏 씨근덕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왜 그래?”
미리 와서 술을 마시고 있던 보석 상인, 제이콥이 의아해하며 홉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홉이 제이콥의 옆으로 다가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씩씩거렸다.
“자작나무 수액인지 뭔지가 유행한다면서 계약을 어기고 설탕을 반만 사 갔어!”
홉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쿵 내리쳤다.
“그럼 고생하면서 설탕을 만들어 낸 나는 어떻게 되냐고! 사탕수수를 기르려고 농사에 쓸 강물이랑 에텔의 평민들까지 끌어왔단 말이야! 그것 때문에 밀 농사를 짓는 놈하고는 척까지 졌어!”
이야기를 설명하는 홉의 얼굴은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했다. 말을 곱씹을수록 점점 더 붉어지는 얼굴이 정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설탕을 만들어 놓았더니 반을 뚝 잘라서 가져가? 나는 이제 망했어!”
그 말을 들은 제이콥이 탄식하며 말했다.
“허어, 차를 팔던 놈들도 비슷한 말을 하더니.”
“차?”
“홍차를 팔던 놈들 말이야.”
제이콥이 술로 목을 축이고는 말했다.
“귀족들이 요새 잡초를 끓여 마시기 시작하는 바람에, 차가 도무지 팔리지 않는다고 하더군.”
“잡초를?”
홉이 당황스러워하며 되묻자, 제이콥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괴혈병을 막기 위해 마시던 라임 주스 있잖나. 거기에 자작나무 수액과 민트를 넣어 마시면 아주 상쾌하고 맛있다는 모양이야. 그래서 차를 팔던 놈들도 완전히 낙담 중이지.”
“미친놈들 같으니, 단체로 돌아 버리기라도 했나?”
제이콥이 헛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어 홉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제국의 귀족 놈들 때문에 자네 같은 장사꾼만 죽어 가네그려.”
“망할…….”
그 순간, 두 사람 사이로 낯선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저, 실례합니다.”
듣기 좋은 미성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지닌 낯선 이는 검은색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무척 수상해 보였다. 홉이 그를 경계하며 질문을 던졌다.
“누구요?”
“정체는 밝힐 수 없지만……,”
말끝을 흐린 남자가 로브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금과 보석을 한 줌 꺼내 들어 둘에게 내밀었다.
“남은 설탕과 당밀을 좀 사고 싶은데요…….”
“이, 이, 이게 다…….”
제이콥이 정체 모를 남자의 손아귀 위에 들린 보석을 낚아채듯 움켜쥐어 가더니, 눈을 크게 뜨고 보석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지, 진짜 금이야! 이것도, 진짜 루비일세! 그것도 엄청나게 상급인!”
“정말이란 말이야?!”
그 말을 들은 홉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 정말 계약을 해 주겠단 말이오?”
“물론이지요.”
그렇게 말한 남자는 아예 주머니에 들어 있던 작은 자루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자 그 자루 안에서 금과 보석이 쏟아져 나왔다.
“기왕이면 제국에 납품할 분량을 제외한 모든 분량을 사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한 남자가 잊었던 걸 떠올린 사람처럼 손뼉을 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럼과 찻잎도요.”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는 생각했다.
‘왜냐면 술과 카페인은 세계 대전 때 군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용도로 쓰였으니까.’
의외로 전쟁 시 가장 적대해야 할 것은 적군이 아니라 스트레스이다. 과도하게 스트레스가 쌓이면 군의 사기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럴 때를 대비해 홍차 같은 사치품을 배급하거나, 럼에 라임 주스를 섞고, 사치품인 설탕을 넣어 한 잔씩 마시게 하는 식으로 다시 군인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는 이야기가 있지.’
그가 쾌활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밀도 있는 대로 다 사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까요?”
그 상쾌한 목소리를 들은 홉과 제이콥이 혼비백산하며 날듯이 펄ᄍᅠᆨ 뛰어올랐다.
“그, 그, 금방 계약서를 가지고 오겠소!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나, 나도! 나도 금방 농장주들을 불러오겠소!”
후드를 뒤집어쓴 수상한 남자…… 아니, 해일은 정신을 못 차리고 허둥지둥 달려가는 두 사람의 뒤통수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 * *
“와, 와아…….”
“식량이 이만큼이나…….”
거대한 창고 안에는 식량을 꽉꽉 채운 자루가 천장에 닿을 만큼 들어차 있었다.
시르야가 앞으로 걸어가 오크통을 통통 두드려 본 뒤, 각기 다른 자루들을 한 번씩 만져 보았다.
“밀과 설탕에 소금, 그리고 당밀도 이렇게나 많이…….”
“엘프들이 살아 있을 때를 제외하고, 이런 광경은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가네시아가 감탄하며 눈앞의 식량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가네시아에게 상쾌한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일단 당장 반년 먹을 분량만 여기에 분류를 해 뒀어요.”
“바, 반년간 이걸 다 먹는다고요?!”
가네시아는 비명을 지르듯이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혁명군도 군인이잖아요? 몸을 쓰는 만큼 영양이 필요할 텐데, 안 먹고 어떻게 싸우겠다는 거예요?”
보통 사람이 하루에 2천 Kcal 정도를 먹는다고 치면, 군인이나 운동선수들은 약 3천에서 많게는 6천 Kcal까지 먹는 경우가 있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일 수 있는 건 신인류나 다름없지. 농사를 짓던 조상님들도 대접만 한 밥그릇을 쓰셨었잖아.’
몸을 움직이는 만큼, 몸은 더 큰 칼로리를 요구하게 된다. 필요한 칼로리만큼 먹어 주지 않으면, 애써 노력해서 기른 몸을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다.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려면 역시 잘 먹이는 게 제일 중요해.’
나는 싱긋 웃으며 가네시아에게 넌지시 말을 붙였다.
“몸을 만들려면 잘 먹어야죠. 계란이나 고기 같은 것도 종종 조달할 테니까, 사람들을 잘 먹이고 훈련시키는 데에 집중해 주세요.”
“고, 고기까지…….”
가네시아는 입을 헤벌리며 창고 안에 있는 식량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나는 웃으며 그녀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걱정 마시고 아낌없이 드세요. 이 몇 배 분량을 칼서스가 공간을 왜곡해서 만든 공간에 보관해 뒀으니, 한 삼사 년은 그대로 둬도 상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나 많이요?!”
“당연하죠, 군량이잖아요.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니 미리미리 잘 저장해 둬야 해요.”
전쟁이 시작되고 나면 우물에도 독을 풀고, 적군의 시체에 지뢰 따위를 설치해 놓는 일이 비일비재해진다. 그런 와중에 곡식 창고를 노리고 습격하거나, 창고에 불을 지르는 놈들이 없을 것 같은가?
‘소모전에 들어가면 상대편의 식량을 줄이려고 온갖 수를 다 쓰게 될 거야.’
그러니 곡식은 최대한 넉넉하게,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해 두는 게 옳다.
나는 가네시아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가닛이 지금부터 할 일은 하나예요. 이 곡식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각지에 퍼져 있는 혁명군을 먹이고 훈련시키는 것이죠.”
잘 먹인 만큼 훈련에 대한 의욕은 높아질 것이고, 또한 잘 먹고 토실토실해진 혁명군을 본 다른 사람들 역시 ‘먹기 위해서’라도 혁명군이 될 것이다.
‘허위 매물이나 다름없긴 하지만, 그러면 당장 혁명군의 세력이 불어나게 되겠지.’
훈련만 받고, 막상 혁명군으로 활동할 때는 몸을 내빼는 사람들이 생기더라도 괜찮아.
잘 먹고 훈련받은 만큼,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시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가 최소한도로 줄어들 거야.’
그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다.
난 내심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
“혹시나 이동이 어려운 지역이 있으면 언제든 제게 연락 주세요.”
나는 주머니에서 작은 황수정 귀걸이를 꺼내 가네시아에게 건네주었다.
“이 귀걸이는 두 번 두드리면 칼서스에게 위치 정보를 전송하도록 만들어졌어요. 그러니 필요할 때 칼서스를 호출해서 이동하도록 하세요.”
“이렇게까지…….”
가네시아는 감격한 표정으로 황수정 귀걸이를 받아 들더니,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푹 떨구었다. 위풍당당하고 호쾌해 보이던 가네시아의 눈가에 눈물이 아롱아롱 고였다.
“해일 경이 아니었으면 굶주릴 걱정 없이 전쟁을 준비할 수 없었을 거예요…….”
“에이, 뭘요. 저는 그냥 이런저런 물자를 조달했을 뿐이고, 돈은 다 칼서스가 냈잖아요.”
“그래도요……. 해일 경이 아니었으면 칼서스 씨가 협력해 주시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건 맞긴 한데…….”
그래도 너무 나한테 고마워하는 거 아니야? 나는 그냥 갑이 쥐어 준 법카를 휘둘렀을 뿐인데…….
‘너무 오래 굶주려서 사리 분간이 제대로 안 되나 보다.’
어서 많이 먹여서 정상적인 상태로 돌려놓아야지, 안 되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네시아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지금 이것보다 내년에 벌어질 일이 더 재미있을 거예요.”
“……훌쩍, 내년이요?”
가네시아가 눈물로 얼룩진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를 드러내 웃어 보이며 말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가닛은 혁명군을 철저하게 훈련시키는 데에만 매진해 주세요.”
가네시아는 단호한 내 목소리에 어리둥절해하면서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다가도 이내 ‘뭔가 생각이 있으신 거겠죠.’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그런 가네시아를 바라보며 한 번 방긋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