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갱도 속의 왕세자 (5)
러드는 조용해진 방을 한 번 둘러보더니, 붉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두 사람이 후드를 뒤로 젖혀 얼굴을 드러내었다.
한 명은 밀 색의 머리칼과 주홍빛의 눈을 가진 근육질의 여성이었고, 다른 쪽은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을 가진 차분한 남성이었다.
“다시 인사드릴게요. 이쪽은 카르나 더비히 왕세자 저하이시고, 저는 러드 락사. 그리고 이쪽은 혁명군 부대의 전투 교육을 담당하는 가네시아 드로나, 그리고 이쪽이 내무를 관리하고 있는 시르야 사마타입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편하게 해일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러자 가네시아 드로나라고 불린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저도 가닛이라고 불러 주세요.”
“네, 좋아요.”
나는 가닛과 손을 맞잡고 가볍게 악수했다. 그러자 뒤이어 시르야 사마타라고 불린 남성이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시르야 사마타입니다. 시르야라고 부르세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시르야.”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시르야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인사가 끝나자, 러드가 다시 설명을 이어 갔다.
“혁명군은 한자리에 많은 인수가 모이는 일이 적습니다.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신세이니까요. 그 부분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 말인즉슨,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인원이 한 번에 모일 수 있는 최대 인원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한자리에 모두 모여 있다가 습격이라도 생기면 혁명군이 괴멸당하는 셈이니까, 소수의 사람만 모이는 게 좋긴 하겠네.’
그렇게 친다면 왕세자인 카르나 더비히에 이어 군사 훈련을 맡은 가네시아와, 내무를 맡은 시르야를 불러온 게 상당히 큰 의미가 된다.
‘이 자리에서 저 셋이 한꺼번에 잡힌다면 혁명군이 완전히 마비가 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러왔다는 의미가 되니까.’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러드에게 대답했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기만 한걸요.”
대답을 들은 왕세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잠깐.”
칼서스가 손을 들며 왕세자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칼서스에게로 꽂혔다. 칼서스는 시선이 모이기를 기다렸다는 듯,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해일에게 높임말을 써라.”
……무슨 말을 하려고 무게를 잡나 했더니, 나한테 존댓말을 쓰라는 말이었어?
‘왕세자보다 제국의 공자가 더 직위가 높다고 말하려는 거야?’
대체 왜?
아니, 애초에 아르테스 제국만 아니었어도 카르나는 ‘왕세자’가 아니라 ‘황자’ 신분이었어. 공작가 장남이 비빌 건덕지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실수 한번 제대로 했네.’
나는 한숨을 터트리며 고개를 푹 수그렸고, 왕세자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이를 갈았다.
“감히!”
“‘감히’라는 말은 이쪽에서 해야지.”
칼서스는 그럼에도 태연한 목소리로 카르나의 말을 받아쳤다. 그 행동에 왕세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칼서스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역시 제국 놈들의 오만함은 보통이 아니군. 왕세자인 내게 존대를 요구할 줄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나는 한 번 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르나의 말에 심히 공감이 되어서였다.
왕세자가 칼서스를 바라보며 위풍당당하게 소리쳤다.
“타당한 이유가 없는 한, 나는 제국의 공자에게 존대를 하지 않겠다! 진정으로 그걸 바란다면 나를 설득해 봐!”
칼서스는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고도 느끼는 바가 없는지, 무표정하게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잠시 고요하게 왕세자를 바라보던 칼서스가, 무척이나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해일은 너희들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존대를 사용했다. 러드에게도, 가네시아에게도, 시르야에게도, 그리고 너에게도 존대를 썼지.”
칼서스가 손에 쥔 글라스 잔을 가볍게 흔들더니, 안에 들어 있던 럼을 한 모금 마셨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나?”
푹 눌러쓴 후드 사이로, 칼서스의 노란 눈이 혁혁하게 빛났다.
“네가 왕세자이기에 반란군 사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건 이해한다.”
“…….”
“하지만 그 특별함에 취해, 배려받는다는 사실을 당연시하는 건 굉장히 오만한 태도지.”
그렇게 말한 칼서스는 남은 럼을 한입에 털어 넣어 삼켰다. 꽤나 독주일 텐데, 럼을 마시는 칼서스는 물을 마시는 것처럼 평온하기만 했다.
“제국의 귀족이 왕국의 백성들을 하등하게 생각하는 그 ‘태도’가 싫어서 혁명을 하겠다고 들고 일어난 게 아닌가? 그런 놈치곤 생각이 영 글러 먹었군그래.”
“…….”
“해일이 네게 예의를 갖추는 만큼, 너도 예의를 갖추란 말까지 못 알아들을 줄은 몰랐거늘.”
그 말을 들은 왕세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의외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칼서스를 바라보았다.
‘제법인데?’
가망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천부인권과 엇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잖아?
‘……나중에 민주주의에 대해서 좀 가르쳐 볼까?’
전근대 정도의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치 깨어 있는 발언에 뒤통수가 다 얼얼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내심 감탄하며 속으로 박수를 쳤다.
“으…….”
왕세자는 외마디 신음을 내뱉더니, 힘이 빠진 것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이나 어물거리던 그가 한발 늦게 입을 열었다.
“……제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제국에 대한 반감으로 눈이 가려져, 트레클리프 공자님의 배려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이쪽도 의외로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잖아?
‘왕세자라기에 더 오만할 줄 알았는데,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기까지 하다니.’
제국의 귀족이라면 생각지도 못했을 태도였다.
그 생각 덕분인지 그에게 대꾸하는 목소리가 저절로 부드러워졌다.
“괜찮습니다. 저하께서 하신 말씀에도 오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제게 굳이 존대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존중하는 태도는 존대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죠. 편하신 대로 불러 주세요.”
왕세자는 그 말에 감명을 받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 그럼, 그렇다면…….”
“네, 저하.”
당황한 것처럼 뺨을 발갛게 붉히고 어물거리던 왕세자가 입을 열었다.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 될까요?!”
“……예?”
여기서 형님으로 모시겠다는 말이 왜 나와요?
혹시 여기도 도원결의 같은 거 하고 그래요? 의형제를 맺어서 한날한시에 죽자, 뭐 그런 맹세를 하고 그러나?
왕세자는 얼떨떨해하는 내게 허겁지겁 설명을 덧붙였다.
“제, 제가 위로 형제가 있긴 하지만……. 그 자식은 완전히 제국의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나라의 백성들을 보살필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저 제국에게 머리를 조아리기나 할 뿐인 놈이에요.”
“…….”
“그놈 대신 트레클리프 공자님을 형님으로 삼고 싶습니다!”
아, 호적에서 파 버리고 싶은 놈 대신에 내 형님을 해 달라……. 그런 의미였구나.
‘대체 왜?’
내 어디를 보고?
방금 너를 설득한 건 칼서스 아니었어? 나 말고 칼서스를 의형제 삼아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왕세자의 말을 부정하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변명을 내뱉었다.
“저, 제가 나이가 좀 어립니다. 스물밖에 안 됐어요.”
“저는 이제 막 생일이 지나 열아홉이 되었습니다! 저보다 형님이 맞으시네요!”
미친, 완전 핏덩이잖아!
‘이런 핏덩이가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니…….’
그 생각이 들자마자 저절로 카르나의 뒤로 유관순 열사님이 오버랩 되어 보였다.
‘……너무 기특하고 장해서 거절을 못 하겠어.’
한국인으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이 기특함을 무시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을 대로 부르세요.”
“아자!”
대답을 들은 왕세자는 아이처럼 좋아하더니, 이내 활짝 미소 지으며 나에게 살갑게 말을 붙였다.
“형님께서도 편하게 저를 카르나라고 불러 주세요!”
“세자 저하…….”
“카르나입니다! 그게 싫으시다면, 애칭인 르데야라고 부르셔도 괜찮아요!”
나는 왕세자랑 말 놓을 깡 없어! 제발 그러지 마!
나는 아래턱을 덜덜 떨며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칼서스의 손을 툭툭 건드렸다.
‘도와줘, 제발 도와주세요. 갑님!’
하지만 칼서스는 도와 달라는 신호를 알아듣지 못한 척, 내 손을 꾹 쥐고 한차례 키득거리는 소리를 흘릴 뿐이었다.
‘빌어먹을 도마뱀 새끼…….’
내 용만 아니었어도 두들겨 팼을 텐데, 내 용이라 참아 주는 줄 알아.
나는 칼서스를 한 번 매섭게 쏘아본 뒤, 다시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금가루를 뿌린 듯한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나는 한숨을 한 번 터트린 뒤, 죽음을 각오한 사람처럼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카르나라고 부를게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형님!”
왕세자, 아니 카르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 살가움에 거북함을 느낀 탓에, 급하게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럼 예정한 대로 혁명 자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좋아요!”
카르나는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이며 호쾌하게 대답했다.
‘부담스러워…….’
하지만 그걸 주둥이 밖으로 뱉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나는 눈물과 함께 부담스럽다는 말을 힘겹게 삼켜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