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45화 (45/101)

45.

인도하는 자 (6)

일곱 개의 탑으로 이루어진 마탑은 높게 솟은 두 겹의 벽으로 보호받는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그 벽의 동쪽과 서쪽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흐아암…….”

동쪽의 문을 지키고 선 두 마법사가 지루함을 감추지 못한 채 어두컴컴한 숲길을 빤히 바라보았다.

“트레클리프 공작을 따라서 다들 나가 버려서 그런지, 오늘따라 마탑이 적막하네.”

“재미없게 이런 날에 보초나 서고 있어야 하다니.”

마탑은 보안을 위해 인근에 민가가 없는 첩첩산중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보초로 당첨이라도 되는 날이면 가뜩이나 한적한 와중 더 후미진 곳으로 가게 되는 터라 사람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왼쪽에 선 마법사가 한숨을 푹 내쉬며 웅얼거렸다.

“마을로 내려가서 술이나 한잔 걸치고 싶었는데…….”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동의라도 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다른 마법사의 시선에 등불이 비쳤다. 그가 앞을 주시하며 팔꿈치로 제 옆에 선 마법사의 허리춤을 쿡 찔렀다.

“야, 사람 온다.”

산길을 따라 걸어온 사람들은 등불을 든 채로 두 마법사의 앞에 멈춰 섰다.

둘은 흑색의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음에도 키가 크고 체격이 좋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마법사들은 그들이 황궁 따위에서 파견된 기사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누굴 좀 만나러 왔습니다.”

“아, 네네.”

마법사는 상투적인 어투로 질문을 던졌다.

“만나러 오신 분 성함과 직위가 어떻게 되시죠? 아, 방문자분의 성함과 직위도 함께 말씀해 주세요.”

로브를 입은 두 사람 중, 체구가 조금 더 작은 쪽의 남자가 대답했다.

“일곱 분 정도 뵈어야 하는데, 차례대로 이름을 불러 드리자면…….”

듣기 좋은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점점 흐려지자, 이야기를 듣던 마법사들이 의아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대답은 키가 큰 쪽의 남성에게서 돌아왔다.

“아르사나 엘그리드, 미레야 클레바, 시타 멜리엄, 크리샤 아이바드, 베야 비스뉴, 키엘 슈라한, 레이란트 이반.”

“……어?”

“일곱 형제를 인도하러 왔다.”

그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들은 마탑에 남은 일곱 용의 이름이었다.

두 마법사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눈앞의 두 남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 키가 큰 쪽의 남성이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나는 칼서스 데포트.”

그는 제 얼굴 위로 드리웠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지나치게 아름다워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는 얼굴을 드러내 보였다.

칼서스는 저를 바라보며 굳어 버린 두 마법사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충고했다.

“나는 데포트 산맥의 주인이었던 용이다. 내가 형제들을 인도하러 왔으니, 얌전히 문을 열어 줬으면 싶구나.”

* * *

황궁에 마련된 2기사단 단장의 사무실 안은 범람하는 서류들에 뒤덮여 잡아먹힌 꼴을 하고 있었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네.”

오르가 카일로스가 탑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눈앞에 쌓인 서류는 모두 ‘반파 당한 마탑을 복구하기 위해’ 황성으로 발송된 지원 요청서였다.

“나까지 서류 작업에 동원될 줄이야……. 역시 단장의 공석이 크긴 크다.”

“시끄러워, 떠들 시간 있으면 약혼자 노릇이나 똑바로 해. 나중에 멜리온 가문의 내실은 어떻게 돌보려고 이래?”

“언젠 내가 친오빠라더니?!”

오르가가 억울해하며 질문을 던졌지만, 린은 오르가 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서류를 바라보며 만년필을 쥔 손만 돌려 오르가를 가리켰다.

“좋은 말로 할 때 꼬투리 잡지 말고 보고서나 읽어. 기왕이면 나도 듣게 소리 내서 읽으면 더 좋고.”

“저, 저…….”

짜증이 난 것처럼 인상을 찌푸린 것도 잠시. 곧 오르가가 포기한 사람처럼 어깨를 늘어트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네, 바라시는 대로 보고서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가 제 앞에 쌓인 서류 중 하나를 집어 들어 훑어보며 말했다.

“칼서스 데포트가 마탑을 습격한 탓에 마탑의 절반이 기능을 잃었고 부상자는 스물한 명이 나왔는데, 개중 열일곱 명은 밤까지 남아서 연구를 하던 연금술사고, 다른 일곱 명은 보초를 서던 마법사래.”

“그 밖에 다른 특이 사항은?”

“용들의 마나 하트는 물론이고, 별도로 채취해 뒀던 비늘이나 발톱, 뿔 등의 부속물도 모두 소실됐다는 모양이야.”

“음. 칼서스 데포트가 마나 하트를 부순 모양이네.”

오르가의 말이 이어졌다.

“다행히 마나 하트에 노출된 사람은 없대. 사망자는 없을 것 같아.”

“우리 때랑 같네.”

태연하게 중얼거리던 린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잠깐만, 우리가 어떻게 무사히 돌아왔지?”

“드워프 마을에서 칼서스 데포트한테 습격당했고, 이번에도 단장님이 몸을 바쳐서 우리가 멀쩡히 돌아왔잖아.”

“아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린이 이제야 칼서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칼서스 데포트가 건물을 통째로 태워 버리고, 그 뒤에 단장님을 데리고 갔잖아.”

“그게 왜?”

“……생각해 봐, 드래곤의 사체는 지하에 있었어.”

“나도 알아.”

“그리고 칼서스 데포트는 허공에서 나타나서 브레스를 뿜었고, 건물이 위쪽부터 잿더미가 되었잖아.”

린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나 하트에 노출됐던 거야.”

“……어?”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멀쩡하지?”

한순간이라도 마나 하트에 노출되었다면 영향을 받았어야 했던 것 아니던가?

둘이 동시에 같은 의문을 떠올린 순간, 머릿속에서 ‘절그럭’ 하고 자물쇠가 풀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직후 금제로 막아 두었던 기억이 범람하듯 두 사람의 머릿속을 덮쳤다.

잠시간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린과 오르가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우욱.”

“미친, 욱.”

“아, 평생 금제에 걸려 살았어야 했는데.”

“오르가, 양동이 좀 가져와.”

“네가 가져와…….”

두 사람이 쿵 소리가 나게 책상에 이마를 박으며 웅얼거렸다.

“빌어먹을 놈의 도마뱀 새끼…….”

“다음에 볼 땐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욕 한마디는 꼭 해 주자. 둘은 그렇게 다짐하며 한 차례 더 사이좋게 헛구역질을 했다.

* * *

“하아, 후…….”

권능을 남발한 칼서스가 완전히 방전된 듯한 몰골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얼마나 지쳤는지, 생전 보이지 않던 식은땀까지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나는 그런 칼서스의 옆에 같이 드러누우며 물었다.

“아직도 죽을 것 같아요?”

“으음……, 조금.”

“키스를 그렇게 했는데 아직도요?”

이 자식, 엄살 부리는 거 아냐?

내가 칼서스를 흘겨보며 눈짓으로 묻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엄살을 부린 거라 해도 받아 줘야지. 내가 너의 유일한 용이잖나.”

“여덟이나 더 있거든요.”

“모두 인도했으니 이제 나 하나뿐이지.”

“아니거든요.”

나는 칼서스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여덟을 모두 인도하고 나서 느낀 건데, 용의 죽음은 완전한 끝을 상징하지 않아요.”

거기까지 말한 나는 허공에 대고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순환’을 의미하는 동작이었다.

“그저 하나의 과정일 뿐이에요.”

“……과정?”

칼서스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느리게 껌뻑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쉽게 말하자면, 세계수가 살아 있는 이상 용들은 죽지 않는 것 같아요.”

“뭐?”

칼서스가 드물게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칼서스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형제들의 목소리가 들려요. 특히 다비랑 레이란트가 아주 시끄럽게 굴고 있어요.”

“…….”

“저는 용들을 죽음으로 인도한 게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길로 인도했던 거예요.”

칼서스를 암울하게 만들었던 형제들의 죽음은, 사실 죽음이 아니라 오래 이어지는 잠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용들은 다시 돌아와요. 확실하게 느껴져요.”

형제들이 돌아올 것을 알게 되었으니, 분명 칼서스의 우울함도 한결 가라앉겠지.

해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칼서스를 바라보았다. 하나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던 칼서스는 충격에 휩싸인 낯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 그래요?”

“형제들이 돌아온다고?”

나는 억울해하며 대답했다.

“저 거짓말 한 거 아니에요…….”

“그건 알고 있어. 그게 사실이냐고 되물은 것뿐이야.”

“네……. 다들 돌아올 거예요.”

부러 더 시무룩하게 대답했으나, 칼서스의 표정은 여전히 혼돈에 휩싸인 채였다.

칼서스가 물었다.

“언제?”

“한, 삼사 년 뒤쯤?”

“…….”

잠시 눈을 굴리며 생각하던 칼서스가 한숨을 터트렸다.

“미치겠군.”

“왜 그래요? 형제들이 돌아오는 게 기쁘지 않아요?”

“그건 기쁘다. 확실히 기쁜데…….”

칼서스가 앓는 듯, 속이 끓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 자식들도 너랑 키스해야 한다는 거잖나.”

“그게 왜요?”

“……그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아?”

“왜요? 새삼스럽게? 당신하고도 살 부비고 잘만 살고 있잖아요.”

“…….”

한 번 더 칼서스의 입술 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정말 너 때문에 미칠 것 같아.”

“아니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나는 황당함에 칼서스를 바라보며 재차 캐물었지만, 그는 말문을 닫은 채 연달아서 한숨을 터트릴 뿐 이렇다 할 답은 내어놓지 않았다.

결국 또 나만 갑갑해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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