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44화 (44/101)

44.

인도하는 자 (5)

평소라면 조용했을 황궁의 내원을 많은 수의 귀족들이 북적거리며 노닐고 있었다.

아인힐트 공작 가문과 필로네리아 공작 가문, 그리고 황태자인 이데아 아르테스의 주최로 열리는 정기 다과회 때문이었다.

황태자는 정원의 한가운데에 서서 샴페인을 홀짝이며 주변의 귀족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은 모두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쑥덕거리고 있었다.

말총머리를 한 영식이 말했다.

“그 소식 들었어요?”

“무슨 소식이요?”

“혹시 트레클리프 공자님이 또다시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그 소식 말고…….”

영식이 다른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 새우등을 하더니, 작은 소리로 속닥거렸다.

“……트레클리프 공작 각하가 마지막 용에게 저주받았다는 소식이요.”

그 이야기를 들은 황태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인힐트와 필로네리아에 줄을 대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라 그런지, 가일에 대한 나쁜 소식을 여기저기 옮기고 다니는 모양이야.’

황태자가 입을 다물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말총머리를 한 영식은 황태자가 제 이야기에 집중하는 줄도 모르고, 과장된 몸짓을 섞어 가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듣자 하니, 마지막 용은 다른 용들과는 달리 세계수가 없어도 권능을 쓸 수 있다는 모양이더라고요. 드워프들도 용에게 습격을 받았대요.”

“세상에…….”

병아리색 드레스를 입은 영애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드워프들이 사는 곳은 수도의 외곽이잖아요. 거기까지 들어왔다는 건 수도까지 들어올 수 있다는 건데……. 용이 수도에서 난동을 부리면 어떡하죠?”

두려움이 뒤섞인 질문을 들은 영식이 눈웃음을 쳤다. 퍽 교활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거기까지 예견하신 폐하께서 왕국에서 사람을 차출하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가장 뛰어난 병사들이 곧 황궁으로 집합할 거예요.”

그러자 다른 영식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말을 거들었다.

“맞아요. 마법사와 기사들이 일제히 수도로 이동하고 있다고 했어요. 그 정도면 트레클리프 공작이 없어도 용을 상대하기 충분하지 않을까요?”

“와, 폐하의 혜안에는 매번 감탄하게 되네요…….”

병아리색 드레스를 입은 영애는 그 말을 들었음에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지, 얼굴을 찌푸린 채로 웅얼거렸다.

“마지막 용도 다른 용들처럼 굴복시킬 수 있겠죠?”

“그럴 거예요. 폐하를 믿어 보는 수밖엔 없죠.”

말총머리를 한 영식이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고는 무척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 오늘 이야기는 외부로 발설하시면 안 돼요. 특히 평민이나 왕국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더욱이 금물이에요. 호시탐탐 제국의 광명을 노리는 이들이 너무 많아요.”

황태자가 다 마신 샴페인 잔을 내밀자, 시종이 다가와 은 쟁반을 내밀었다. 그는 새 샴페인을 한 잔 집어 들며 생각했다.

‘가일의 기량이 떨어진 것과 더불어, 저주를 받았다는 소식이 외부로 발설되면 쿠데타 세력이 양지로 드러날지도 모르니, 입조심을 시키는 거군.’

쿠데타 세력이 양지로 드러나게 되면, 그들의 활동을 인지하는 사람들 또한 많아진다.

‘그리고 쿠데타 활동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는 세력이 커질지도 모른다는 걸 의미하지.’

쿠데타 세력이 제국의 병력보다 아무리 약하다고 한들,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릴 게 뻔하다. 그러니 귀족들이 나서서 견제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렇다고 쳐도 꽤 거슬리는군. 해일 경이 잡혀간 것을 우선적으로 걱정하는 귀족이 단 한 명도 없다니.’

아무리 트레클리프 가를 견제하고 싶어도 그렇지, 사람이 용에게 납치를 당했다는데 어떻게 그걸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는 걸까.

황태자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종알거리던 말총머리의 영식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특히 더비히에서 온 사람들 중에서는 제국의 귀족에게 반감을 갖는 괘씸한 자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그러자 다른 영애 한 명이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번의 그 소동도 더비히의 평민이 저지른 거였잖아요?”

“폐하께서 언제 더비히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셔야 하는데. 더비히는 곡물도 나지 않고 차나무를 키우기에도 마땅찮아서 제국에 진상하는 물건들도 영 별로라 안 그래도 눈에 거슬렸다고요.”

이번에는 와인 색의 연미복을 갖춰 입은 또 다른 영식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아, 더비히에서 온 왕족이 폐하의 애동으로 있지 않던가요?”

“그러고 보니, 오늘 이 자리에도 와 있을 텐데?”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황태자의 얼굴이 점점 찌푸려졌다. 모르는 체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저급한 대화가 오가는 탓이었다.

‘……도마호르 자작 영식의 행실을 탓해도 모자랄 판에, 더비히에서 온 볼모에게 화풀이를 하려는 셈인가?’

와인 색의 연미복을 입은 영식과, 말총머리를 한 영식이 동시에 서로를 보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라야나 더비히. 분명 더비히의 세 번째 왕녀였죠?”

“맞네요. 저기 있어요.”

“저 꼴도 보기 싫은 치렁치렁한 금발을 와인으로 염색해 준다면 좀 볼만해지지 않을까요?”

멋대로 인과 관계를 왜곡하고, 잘잘못을 약자에게 떠넘긴다. 마치 자신들의 더러움을 숨기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잉크를 끼얹는 것 같지 않은가.

‘대체 어쩌다가 아르테스 제국의 귀족들이, 이렇게까지 망가지게 된 거지?’

황태자가 경악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말총머리를 한 영식이 와인을 집어 들고 라야나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황태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라야나 더비히!”

그의 부름에 한 사람이 어깨를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중성적인 외모를 가진 라야나는 긴 금발의 생머리와 황금을 녹여 굳힌 듯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황태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쭐 게 있으니 잠시 테라스로 갈까요?”

“네, 전하.”

라야나는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얌전히 황태자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사자 떼 사이에 버려진 새끼 사슴이나 다름없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잘못한 게 자신이 아님에도 양심이 찔릴 지경이었다.

황태자는 부러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얼렀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질문 몇 개만 할 예정이니까요.”

“네…….”

라야나는 여전히 불편한 표정을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테라스 쪽으로 안내했다.

* * *

침대 위에 반쯤 드러누운 나는 칼서스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가일의 상태가 어떤 쪽으로 해석이 되든, 그 사실은 제국의 약점이 될 거예요.”

결이 고운 머리칼은 비단처럼 부드러워서,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칼서스 또한 내가 머리칼을 만져 주는 게 싫지 않은지, 나른한 표정으로 내 곁에 누워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칼을 배배 꼬며 중얼거렸다.

“그럼 당연히 소식이 다른 왕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신경이 몰리겠죠.”

나가는 전쟁마다 승리하여 돌아오고, 패전국이 반발을 일으킬 때마다 그 나라에 피바람을 몰고 왔으니……. 가일의 ‘업적’ 자체가 부적처럼 제국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으리라.

“그러니 황제는 가일에게 수도로 돌아오라는 소환령을 내렸을 거예요.”

가일의 상태가 타국에 알려지기 전에 다시 가일을 본래의 상태로 돌려놓기 위해서. 혹은 가일의 상태를 돌려놓지 못하더라도,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소환했을 터.

“그렇다고 한다면 가일이 이 틈을 타 습격당하지 않도록 지키기까지 해야 하는데……, 황궁에서 호위를 보내면 누가 봐도 ‘가일에게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이잖아요?”

질문을 던지자 칼서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전쟁 영웅이 호위를 받으며 복귀하다니, 그건 확실히 우스운 일이지.”

칼서스가 손을 뻗어 제 머리칼을 배배 꼬던 손가락을 떼어 내었다. 그러더니 내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어 깍지를 끼웠다. 더는 장난치지 말라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칼서스가 느긋하게 속닥였다.

“그리고 습격의 위험이 있어서, 황궁 내부는 이동 마법을 펼칠 수 없게 되어 있으니……. 지금으로선 황궁 근처로 이동한 다음, 마차 따위를 타고 황궁 내부로 들어오는 게 최선이겠지.”

“그 과정 내내 가일을 지키면서, 동시에 가일의 부상까지 숨길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잖아요?”

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칼서스와 마주 깍지를 끼웠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좋지만, 그와 손가락을 얽고 있는 것도 안정감이 들어 좋았다.

칼서스는 내가 마주 깍지를 끼자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칼서스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용의 해체가 끝난 것처럼 꾸며서 마탑의 인원을 동원해 가일을 수도로 데려오는 거예요.”

그건 즉 마탑을 지킬 인력이 일부 빠져나간다는 뜻이다. 거기다가 마나 하트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간인 가일이 없으니, 용들이 잠든 방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 또한 사라지리라.

나는 눈을 휘어 웃으며 말했다.

“그때 다른 형제들을 인도하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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