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인도하는 자 (1)
칼서스는 린과 오르가가 구역질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동화를 읊어 주듯 둘에게 20년 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설명을 들은 둘은 혼란스러워하기도 했고, 칼서스의 말에 논리적으로 반박을 하려고 들기도 했다. 아무래도 지금껏 적이자 원수라고 생각해 왔던 자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모양이었다.
때문에 두 사람이 칼서스의 말을 받아들인 건 아주 오랜 대화가 이어진 뒤였다.
린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저는 저 망할 도마뱀을 믿는 게 아니라, 단장님을 믿는 거예요. 단장님이 보증하니까 믿어 주는 거라고요.”
“그래. 날 믿어 줘서 고마워.”
“……씨이.”
내가 웃으며 손을 뻗어 린의 북슬북슬한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자, 오르가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와 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엉뚱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안 되겠는데.”
“응?”
“시집 못 보내겠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여기서 왜 린을 시집보낸단 말이 나와? 혹시 나랑 린을 엮어 주려고 했던 거야?
오르가는 당황한 내 표정을 보면서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린이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저보다는 단장님하고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저 망할 도마뱀이 생겼잖아요. 부부 사이에 외간 남자가 덜컥 끼어들다니, 그런 변태 같은 일은 찬성할 수 없어요.”
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오른손을 내밀어 오르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왜 내 결혼을 네 멋대로 결정해?”
“그야 나보다는 단장님이 더 좋은 신랑감이니까…….”
“내 의견은 어디다 팔아먹었어? 내 마음은 존중 안 해? 죽고 싶어?”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린의 말을 거들었다.
“맞아. 오르가, 약혼자의 의견도 좀 고려해 줘야지.”
“아, 약혼자라고 부르지 마세요! 징그럽게! 오르가랑 제가 어떻게 결혼을 해요!”
“왜? 오르가가 취향이 아니야?”
“취향이고 나발이고, 쟤는 친오빠나 다름없다고요! 어떻게 남매 사이에 결혼을 해요?!”
린은 ‘소름 끼쳐!’라고 비명을 지르고는 쥐고 있던 오르가의 멱살을 떠밀었다. 덕분에 오르가는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져 굴러야 했다.
그 꼴을 본 칼서스가 혀를 쯧쯧 차더니 중얼거렸다.
“난장판이군.”
칼서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진지한 얼굴로 ‘린과 오르가가 결혼하는 게, 소꿉친구랑 결혼하는 거랑 비슷한 건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넘어진 오르가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칼서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입은 맞춰 봐야 할 것 아닌가. 아니면 기억에 금제를 거는 수밖에 없어.”
……아?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입……?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그 말을 다른 의미로 알아들었다. 나는 칼서스를 올려다보며 질문했다.
“아, 가이딩 필요해?”
그 말을 들은 칼서스가 능글맞게 웃으며 손을 뻗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가 달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키스할까?”
“우욱, 미쳤나 봐.”
나는 린의 반응을 본 뒤에야 ‘입을 맞추자’는 말이 그 뜻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이야기를 맞춰 보자는 내용이구나. 이제 이해했어.”
하지만 한번 ‘가이딩이 필요하느냐’는 질문을 들은 칼서스는 집요하게 어리광을 피워 댔다.
“해일, 키스해 줘. 권능을 썼더니 머리가 아파.”
“아파? 알겠어, 그럼 잠깐 저쪽에 가서…….”
“단장님! 개수작에 넘어가시면 안 돼요! 누가 들어도 거짓말인 게 뻔히 보인다고요!”
나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오르가를 나무랐다.
“용이 세계수한테 어리광 좀 부릴 수도 있지. 너무 매몰차게 굴지 마.”
대답을 들은 오르가는 곧이라도 혼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양손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저 새끼가 나이가 몇인데 어리광을 부리게 하느냐고요! 어떻게 정상인이 한 명도 없을 수가 있어!”
“인간의 잣대로 다른 종족을 재단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넌 좀 닥쳐! 네가 입을 열 때마다 속이 터지는 것 같으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오르가는 짐승처럼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라리, 그냥 기억에 금제를 걸자. 나는 이 광경을 한 조각이라도 내 머릿속에 남겨 놓기 싫어…….”
아무래도 용과 세계수임을 말해 버린 탓에, 오르가의 정신 건강이 나빠진 듯했다.
나는 결국 칼서스를 통해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의 기억에 금제를 거는 방법을 택했다.
* * *
“흐음…….”
옥좌에 올라앉은 중년의 황제가 거만하게 턱을 괸 채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빛이 바랜 듯한 백금발의 머리칼 사이로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혁혁하게 빛났다.
<슈덴베르트력 377년 7월 1일>
용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 드워프를 찾아간 해일 트레클리프 서가 또다시 용의 볼모가 되었다.
그에 현장에 있던 드워프와 2기사단 부단장인 린 멜리온, 그리고 오르가 카일로스에게 진술용 엘릭서를 먹이고 심문을 시작하였다.
셋은 모두 갑작스럽게 나타난 용이 브레스를 쏘아 건물을 불태우더니, 해일 트레클리프 서를 약탈했다고 진술했다.
이후 건물의 잔해를 조사해 보았으나 마나 하트를 찾지 못했다.
또한 린 멜리온과 오르가 카일로스가 하사받은 검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고 하는 걸로 보아. 용의 사체는 마나 하트의 존재 여부에 영향을 받는 것 같다.
황제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또다시 짐의 기사를 약탈당했군.”
황제의 앙상한 손가락이 서류 위를 툭툭, 가볍게 두드렸다. 그 동작만으로 옥좌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던 보좌관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트레클리프 공자가 말했듯, 마지막 용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놈일지도 모르겠어.”
보좌관인 에일 시아노르가 황제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가일 단장을 불러오심이 어떠시겠습니까?”
“됐다. 그 녀석은 동부 마탑에서 용의 시체를 조각내는 일을 맡는 게 나아.”
황제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옥좌에 등을 기대앉았다. 모든 걸 체념한 것 같기도 했고, 모든 것에서 흥미를 잃은 사람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이었다.
“그놈이 아니면 용을 벨 수 있는 놈이 없으니 말이야……. 그러고 보니, 드워프 중에 생존자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후 병사했습니다.”
“이런, 그놈도 죽어 버렸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안타까움은 없었다. 무감정하면서도 서늘한 시선이 에일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실력 있는 대장장이를 연달아서 잃는 건 아까운 일이거늘…….”
“…….”
“게다가 짐의 전리품까지 약탈당했으니, 용에게 죄를 물어야 하는데.”
에일을 내려다보는 얼굴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어찌 물어야 할 것 같은가?”
에일은 본능적으로 저 물음이 ‘재롱을 떨어 보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너무 많이 생겼다. 나라도 폐하의 요구대로 움직여야 해.’
에일이 재빨리 미소를 꾸며 내며, 황제가 바라는 대답을 찾아 뱉었다.
“마지막 용의 가죽으로 옥좌를 장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법 그럴듯한 대답이군.”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황제의 잇새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었다. 다행히 에일이 황제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 낸 것이다.
‘다행이다…….’
에일은 안심하며 목 안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만족스럽게 웃던 황제는 옥좌에 삐딱하게 기대어 앉은 채로, 다시금 오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짐은 더 이상 용이 활개를 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구나.”
“네, 폐하.”
“그러니 각 왕국에서 사람을 차출해 오거라. 검술이 뛰어난 자와, 마법에 능통한 자 모두가 필요하다.”
황제는 잠깐 말을 멈추곤,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처럼 눈을 굴렸다. 잠시 뒤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일이 복귀하기를 기다렸다가 병력을 모으면 늦는다. 그가 복귀하기 전까지 병력을 모아 두어야 해.”
가일이 용을 해체하는 임무를 완수하여 돌아오기 전까지, 정예병을 모아 육성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정예병을 모으는 건 위험 부담이 크다. 전술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는 민간인을 징집하는 것보다 이득으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수도 안에 타국의 병사를 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타국의 병사가 왕이 아닌 황제에게 복종할지, 혹은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가려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판단한 에일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송구하오나, 서부의 더비히는 반란 세력이 있어 병력을 차출할 경우 위험 인자가 섞여 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찮은 놈들이 발버둥 쳐 봐야 거기서 거기일 뿐, 짐의 명예와 위업에 흠집 한 줄 내지 못할 것이다.”
황제는 에일의 경고를 듣고 코웃음을 쳤다. 왕국의 병력 따위가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눌 수나 있느냐고 묻는 것만 같은 태도였다.
“원안대로 모집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개중 일부는 마탑으로 보내 가일을 보좌하게 하도록.”
다시금 오만한 명령이 에일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황제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명 받듭니다.”
대답을 마친 에일은 인사를 한 뒤 황제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수많은 기사의 도열을 따라 걷는 그의 머릿속에 걱정이 피어났다.
‘정말 위험 인자가 섞여 들지 않을 수 있을까?’
폐하의 명에 따라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더비히에서도 병사를 차출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반란 세력이 유입될 가능성이 큰 것은 자명하다.
“……최대한 심사 절차를 복잡하게 하는 수밖에 없겠군.”
에일의 목을 타고 눌러 왔던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