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36화 (36/101)

36.

드워프와 마나 하트 (1)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검을 내려다보던 해일의 몸이 돌연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바로 곁에 앉아 있던 칼서스가 쓰러지는 해일을 재빠르게 안아서 받아 냈다.

“단장님!”

“해일 경?!”

해일이 쓰러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경악하며 해일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칼서스가 한 팔로 해일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로 미간을 구겼다.

‘어째 기이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하다 싶더니.’

내가 받아야 했을 충격을 해일이 대신 받아 낸 건가…….

칼서스가 해일의 목덜미를 손으로 눌러 맥을 짚는 시늉을 한 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순히 기절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황태자가 걱정스러움이 물씬 묻어나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왜 이렇게 갑자기 쓰러지신 걸까요…….”

“그건 트레클리프 공자님이 깨어난 뒤에 묻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칼서스가 해일의 오금과 등을 받쳐 안아 들었다. 곧이어 그의 시선이 곧장 황제를 향했다.

“송구스럽지만, 폐하. 트레클리프 공자님을 데리고 이만 물러나도 되겠습니까?”

“허락한다.”

황제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것처럼, 건조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대들의 앞날에 영광 있기를.”

“……무탈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칼서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해일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태자는 그런 칼서스를 황태자궁에 마련된 객실로 안내했다.

칼서스는 객실 침대에 해일을 바르게 눕힌 뒤,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아, 제가 안내해 드리겠……,”

“시종장과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칼서스는 생기 없는 낯으로 해일만을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얼굴을 본 황태자는 침울한 목소리로 알겠노라 대답하고는, 침대 곁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묘하게 기가 죽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마친 칼서스는 곧장 방 밖으로 향했다. 그 덕분에 방은 적막에 휩싸였다.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린이 체통도 잊고, 바닥에 깔린 카펫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단장님은……, 용에게 잡혀가신 후유증으로 이렇게 몸이 약해지신 걸까요? 아니면 가일…… 그자 때문에……?”

그 말을 들은 황태자가 가라앉은 눈으로 해일을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제 허벅지를 ‘탁’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설마……!”

“전하?”

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황태자는 고개를 돌려 린을 내려다보더니, 충격에 휩싸인 목소리로 말했다.

“용에게 몸을 바친 후유증으로, 용과 관련된 것을 보기만 해도……, 충격을 받게 되었다거나……?”

“가, 가능성 있어요!”

린이 맞장구를 치며 호들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내 스스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 단장님이 쉬고 계시는데 소리를 지르다니…….”

그 한마디를 중얼거린 린이 두어 번 헛기침을 하더니,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황태자에게 설명을 이었다.

“사실, 카일로스 백작저에서 휴식을 취하시던 시기에도, 용에게 수차례 안 좋은 일을 당하셨었어요…….”

“무, 무슨 그런…….”

황태자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되물었다. 린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건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별일 아닌 척 넘어가셨지만, 그때의 충격이 남아 있는 모양이에요.”

“어, 어떻게 그렇게……. 지독하리만큼 사악한 자식 같으니!”

방금까지만 해도 새하얗던 황태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미간을 힘껏 찌푸렸다.

“그런 아픈 기억이 있으신 줄도 모르고, 폐하께서 용으로 제련한 검을……. 정말 죄송합니다…….”

“그, 그건 폐하와 전하께서 잘못하신 게 아닙니다!”

“맞아요. 그건 용의 잘못입니다!”

린과 오르가가 재빨리 부정해 주었지만, 그럼에도 황태자의 찌푸려진 미간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상처가 크셨을까요……. 어째서 이렇게 상냥한 분에게, 이런 잔인한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는 건지…….”

“…….”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착잡해졌는지,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태자가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해일 경이 깨어나면 이야기를 좀 나눠 봐야겠어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나머지 둘은 그런 황태자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불행히도 기절해 있던 해일은 안타깝게도 그들의 오해를 정정해 주지 못했다.

* * *

내가 깨어난 건 으슥한 한밤중이었다.

“흐으…….”

미미한 신음 소리가 잇새로 새어 나오자, 내 곁에 앉아 책을 읽던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다.

“정신이 들어?”

익숙하면서도 조금은 낯선 목소리는 다비로 변한 칼서스의 목소리였다. 나는 가물가물한 눈으로 칼서스를 올려다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검은…….”

“내가 가지고 있다.”

칼서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은빛의 검을 들어 보였다. 달빛을 통해 본 새하얀 검은 꼭 창백하게 질린 사람의 피부처럼 느껴졌다.

“…….”

신비로우면서 아름답게 만들어진 검이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기괴하게 느껴졌다. 칼서스 형제의 뼈와 살로 만들어진 검이라니. 생각만 해도 뒷덜미가 오싹했다.

나는 한참이나 말을 잃고 가만히 칼서스를 바라보다가, 부러 태연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알테아르의 형제분은 어떤 분이셨어요?”

칼서스는 잠시 멍하게 검을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쉬듯 말했다.

“……다비 알테아르, 그 녀석은 형제들 중 가장 인간과 가깝게 지내던 녀석이었다.”

“…….”

“이 얼굴의 본래 주인이기도 하지.”

칼서스는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모래성을 매만지듯,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다비는 알테아르 지역의 설산을 돌아다니며, 같은 조난자인 척 인간에게 다가가 돕고는 했다.”

비릿하고 눅눅한 향기와, 온 마음을 불사르는 듯한 매캐한 냄새가 주변을 맴돌았다.

“말로는 알테아르의 설산에 시체가 쌓이는 게 끔찍하게 싫어서 그랬다곤 했지만, 다른 형제들은 그 녀석의 말을 믿지 않았었지. 인간을 돕거나, 그들 사이에 섞여 있을 때면 퍽 즐거워 보였으니까.”

부드럽게 검을 쓰다듬던 손길이 멈췄다.

“세계수로 돌아오던 날이면, 한껏 들뜬 채로 다른 형제들에게 자신이 구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었는데…….”

칼서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멀거니 제 손아귀에 들려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먼 곳을 응시하는 듯 초점이 흐려진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쓰라리게 했다. 가이딩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인데 양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다른 형제분들마저…….”

“…….”

“……이렇게 되기 전에.”

나는 볼품없이 훌쩍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잠시 침묵하던 칼서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용의 마나 하트는 세계수를 갈구한다.”

“…….”

“형제들의 마나 하트가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온다면, 그들도 안심하고 이 땅에 잠들 수 있겠지.”

칼서스의 말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 나갔다.

“그럼 그렇게 해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대답을 들은 칼서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전에 말했듯, 형제들의 사체는 마탑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마법사들은 무척이나 폐쇄적인 집단이지. 외부인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

“다비 알테아르는 드워프의 손에 제련되었다고 했잖아요.”

나는 손바닥으로 뺨을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카일로스 백작가와 멜리온 후작가는 오래전부터 광산 사업을 해 왔어요.”

“…….”

“드워프를 찾아가서 조언을 구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도 몰라요.”

칼서스가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행동으로 인해 다른 귀족들에게 의심을 살 수도 있다.”

“그래서요?”

“반역자로 몰려 죽을 수도 있다.”

“저도 알아요.”

볼품없는 꼴이겠지만, 나는 부러 고개를 들고, 칼서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그에게 내 생각을 전달했다.

“그걸 감수하고 당신하고 있는 거잖아요. 같은 말을 몇 번 말하게 할 셈이에요?”

대답을 들은 칼서스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한 손으로 뒷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칼서스가 힘겹게 한마디를 꺼내 들었다.

“……해일, 네가 그 말을 한 건 오늘이 처음이다.”

“…….”

“내 죽음을 바라지 않고 나를 걱정한다곤 했지만, 네 죽음까지 감수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어.”

시발, 기껏 분위기 잡았는데 이런 때에 실수를 하다니…….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론 안 냈나 보네요. 미안해요. 내가 실수했어요.”

내가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자, 칼서스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뭐라도 해 보……. 잠깐, 뭐예요? 왜 다가오는, 아니, 잠…….”

그러고는 침대 위에 검을 내려놓더니,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으읍…….”

그러고는 내 입술을 집어삼키고, 혀로 입 안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불쾌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그저 평범한 키스였다. 나는 그 의미 모를 행동에 한참이나 시달린 뒤에야,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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