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황태자와 보드카 (5)
두어 곡이 끝날 때까지 춤을 춘 린과 나는 터덜터덜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하아……. 한참 췄더니 좀 덥네.”
“제가 발을 밟아서 난 식은땀이 아니고요?”
“아찔할 만큼 아프긴 했어.”
“아하하!”
무대 아래로 내려오자, 때마침 시종이 다가와 시원한 음료를 건넸다. 나는 두 잔을 받아 든 뒤, 한 잔을 린에게 건넸다.
그러자 다비 모습을 한 칼서스가 다가와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랑 한 곡 추실까요?”
그 말을 들은 린이 깜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저, 저요?”
“아뇨, 해일 경을 말하는 거예요.”
칼서스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까 보니 스텝이 자꾸 꼬이시던데, 제가 다시 가르쳐 드릴까 싶어서요.”
“하지만 카스타 영식은…… 영식이잖아요. 그럼 영애 역할은 누가 하는 거예요?”
“제가 오늘 하루만 영애가 되는 걸로 하죠.”
“네? 아하하하!”
린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주먹으로 오르가를 퍽퍽 때렸다. 오르가는 그 주먹에 얻어맞으며 괴로운 듯 몸서리를 쳤다.
“카스타 영식,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재미있는 분이셨네요!”
린은 힘껏 두들겨 패던 오르가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오르가, 우리도 한 곡 더 추자!”
“어어?”
칼서스는 그걸 신호로 내게 왼손을 내밀었다. 자신을 리드하라는 의미였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오른손을 들어 칼서스의 손을 맞잡았다.
부드러우면서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직후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황태자 전하?”
린과 오르가가 급하게 자세를 잡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상투적인 인사는 안 해도 괜찮아요.”
황태자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손사래를 치더니,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폐하께서 세 분을 뵙고 감사 인사를 표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시러 왔어요.”
“직접 이렇게 마중을 나와 주시다니…….”
그 말을 들은 오르가는 감격한 듯 활짝 웃었지만, 나는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셋만 데려가 놓고 내 목을 석둑 잘라 버리는 건 아니겠지…….’
물론 우리 애들이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황제의 앞인데……. 가일이 없어도 다른 기사나 마법사가 있겠지……. 그러니까 내 목 하나쯤은 쓱싹할 수 있겠지…….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질문했다.
“그렇다면…… 린이랑 오르가, 그리고 저랑 황태자 전하, 이렇게 네 명만 폐하를 뵈러 가는 건가요?”
“네, 가일 경은 임무를 나가셔서 지금 수도에 안 계셔요. 그러니 저를 포함한 네 명만 폐하를 알현할 예정입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혹시, 트레클리프 가주의 대리로 참석한 카스타 영식도 함께 갈 수 없을까요? 카스타 영식이 오늘 처음 사교계에 오신 거라…….”
“아…….”
질문을 들은 황태자의 표정이 어색하게 변했다. 황태자는 멋쩍어하며 대답했다.
“영식을 혼자 두고 가기 멋쩍은 마음은 알겠지만, 그건 좀 곤란합니다. 해일 경…….”
고작 사람 하나 더 데려가겠다는 건데, 이렇게 곤란하다고 말하다니. 너 정말 내 목을 베어 버릴 셈이지! 서걱 하고 잘라 줄 셈이지!
나는 울적함에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으며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태자의 귓바퀴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크, 크흠. 해일 경, 그래도 안 되는 건…….”
“…….”
“그래도 안……, 안 되는…….”
“…….”
몇 번인가 말을 어물거리던 황태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 여쭙고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밝은 대답을 들은 황태자는 푸스스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터덜터덜 걸어 돌아갔다.
황태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린이 슬쩍 귓속말로 질문을 던졌다.
“단장님, 꼭 카스타 영식을 대동해야 할 필요가 있었나요?”
“아, 그게…… 저…….”
나는 린의 시선을 피해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한발 늦게 떠올려 낸 변명을 입에 담았다.
“내, 내가 분리 불안이 좀 있어.”
“분리…… 불안이요?”
“강아지나 아기들이 겪는 그거요?”
“어, 어어. 내가 기억을 잃었잖아.”
나는 뻔뻔하게 웃으며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실수할까 봐 긴장을 많이 해서 그래. 그래서 분리 불안이 좀 생겼어.”
“아아, 그래서 카스타 영식이 일부러 와 주신 거구나.”
린은 고맙게도 알아서 주장에 개연성을 부여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오르가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하긴, 그럴 만도 하지.’라고 중얼거렸다.
“단장님도 참……. 미리 말씀해 주시지. 매번 혼자 앓으시면 안 돼요.”
“아하하……. 다음부터는 미리 상담할게.”
“그렇게 말하시곤 또 혼자서 애쓰실 거잖아요. 진짜 그러시면 안 돼요.”
“응. 꼭 상담할게.”
린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자는 의미였다.
나는 대답 대신 방긋 웃어 보이며 린의 새끼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었다. 그러자 뾰로통했던 린의 표정이 사르르 녹았다.
‘……불쌍한 척이 먹혀서 다행이다.’
황태자도 그렇고, 린도 그렇고……, 다들 정이 많은 타입이라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내가 징징거린다고 들어줬을 리가 없잖아.
‘아, 오늘 일로 나를 꼴불견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꼴불견이라고 생각하면 뭐 어떠랴. 그것도 내 운명인 것을.
‘칼서스랑 붙어 있으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얕게 한숨을 내쉬며 ‘술이 웬수지.’라는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 * *
황태자가 돌아온 건 15분 정도가 지난 뒤였다. 돌아온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내게 설명을 해 주었다.
“허락을 받아 왔습니다. 크게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고, 단순히 답례를 하기 위해 부른 것이니 카스타 영식이 동행해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다행이다……, 일부러 여쭤봐 주셔서 감사해요.”
“별일 아닌걸요.”
황태자는 한층 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번에야말로 가실까요?”
“네, 전하.”
거리낄 게 없어진 나는 마주 방긋 웃어 보이며 황태자의 뒤를 따랐다.
알현실은 긴 복도 끄트머리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총 세 겹의 문을 지나쳐야 했다.
나는 주변에 도열한 1기사단의 기사들을 곁눈질로 살피며 알현실 깊은 곳까지 걸어 들어갔다. 거기엔 휘장이 한 겹 내려져 있었다.
“왔는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무릎을 꿇으며 인사하자, 기사들이 한 발짝씩 나와 휘장을 걷어 주었다.
“고개를 들라.”
목소리를 들은 뒤 고개를 들자, 옥좌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건조하면서도 오만한 시선으로 우리를 훑어보았다.
“그대들이 귀족들을 지켜 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귀족들의 주인인 황제라면 응당 감사 인사를 해야겠지.”
정말 본인이 신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네. 저놈도 대한민국에 똑 떨어졌다면 1호선 광인 신세를 면치 못했겠지…….
나는 황제가 무어라고 말하든 말든, 멍하니 다른 생각을 했다.
“하여, 짐이 그대들에게 하사품을 내리려 한다.”
황제가 딴생각에 빠져 있던 나를 콕 집어 말했다.
“해일, 가일을 아버지로 둔 자네에게는 제법 상징적인 선물이 될지도 모르겠어.”
“네……?”
내가 어리둥절해하며 위를 올려다보자, 황제의 뒤에 정렬해 있던 세 명의 기사가 목함을 들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세 명의 기사는 각각 린, 오르가, 나의 앞에 멈춰 서서 목함을 내려놓았는데……. 아직 열어보지도 않은 그 목함 안에 무척이나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한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이…….’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손을 뻗어 목함의 뚜껑을 붙들었다.
그리고 손을 위로 들어 올려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미친 새끼.’
……숨 막히는 공포와 역겨움이 밀려들었다.
목함 안에 들어 있던 건, 용의 사체로 만들어진 검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용의 뼈와 비늘을 깎아 내어 만든 검이라는 걸 알아채었다.
황제는 만족스럽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북부의 알테아르를 다스리는 용이었다지.”
“…….”
“한때 살아 있던 존재로 검을 만드는 짓은 하지 않겠다며 드워프들이 난리를 피워 완성이 늦어졌지만…….”
오만한 남자가 턱짓으로 목함을 가리키더니,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 웃었다.
“보고 있듯, 짐의 위업을 상징하는 명검이 만들어졌다. 그러니 그대들에게 이것을 하사하려 한다.”
그 말을 들은 직후, 나는 뼛속부터 차오르는 모멸감과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칼서스의 감정이었다.
“…….”
진창 속에서 뒤엉켜 끓고 있는 듯한 분노는 발끝을 타고 올라와 순식간에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황제는 내가 감동하여 넋을 잃은 거라고 생각했는지, 퍽 너그러운 말투로 나를 얼렀다.
“뽑을 때마다 용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는 점이 징그럽기는 하지만, 쓰기엔 나쁘지 않을 게다. 마음에 드느냐?”
이 검이 마음에 드냐고?
진심으로 묻는 건가?
‘다른 이의 가족을 죽여서 만든 검을 하사품이랍시고 내밀면서, 감히 마음에 드느냐고 묻는 거야?’
어떻게 인두겁을 쓰고 그딴 소리를 할 수가 있어.
대체 어떻게…….
‘저 자식을 죽여 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저놈의 목을 꺾어서 새빨간 피가 터져 나오는 꼴을 보고 싶다. 억울하게 죽어 나간 용들의 시신마저 모욕하고 약탈한 저치의 숨이 끊어지는 꼴을 보고 싶다.
“하…… 하하…… 하아…….”
끊길 듯한 웃음소리와 호흡 소리가 내 잇새로 새어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핑 돌며 그대로 눈앞이 거멓게 암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