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황태자와 보드카 (4)
오늘은 별일 없이 개막 선서가 이루어졌다.
황제는 백발에 가깝게 보일 정도로 하얗게 센 백금발과 붉은 눈을 가진 미중년이었는데, 위엄 있게 꾸민 것과는 달리 창백하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를 이유로 연회를 개최하고 귀족들을 초대하였음을 짐이 선언하니, 기쁜 날을 즐거움으로 채워 주기를 바라오.”
황제는 사무적이면서도 묘하게 고압적인 어투로 선서를 마친 뒤, 바로 뒤를 돌아 홀을 빠져나갔다. 업무가 남은 듯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역시 왕이든 황제든…… 과로가 일상이구나…….’
혈색 하나 없는 인상 좀 봐…….
저게 걸어 다니는 시체지 사람이야?
속으로 혀를 쯧쯧 차고 있을 무렵, 잔뜩 흥분한 린이 달려들어 내 팔뚝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모습이 꼭 새 장난감을 선물 받은 푸들 같았다.
“단장님, 저 개막 선서 오늘 처음 들어 봤어요! 폐하 존안 뵌 것도 오늘이 처음이에요!”
“좋은 경험이 됐겠구나.”
“네! 이게 다 단장님 덕분이에요!”
천진난만한 목소리와 밝은 미소는 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좋아지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너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가서 오르가랑 한 곡 춰야지? 어제 나랑 약속했잖아. 춤추는 모습 보여 주겠다고.”
“아, 네! 기억하고 있어요!”
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곁눈질로 힐끗거리며 오르가를 바라보았다. 수줍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오르가가 웃음을 터트리며 한쪽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영애, 저와 한 곡 추실까요?”
“아하하!”
린 또한 오르가를 따라 웃음을 터트리더니, 그의 손을 잡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제복을 입은 두 사람은 가볍게 맞인사를 하더니, 손을 잡고 느리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만히 둘을 지켜보던 칼서스가 말했다.
“멜리온 영애 쪽이 스텝이 엉성한 걸 보니, 오늘 처음 왈츠를 춰 보는 모양이군.”
“처음? 데뷔탕트는 보통 열대여섯 살에 하잖아.”
의아하게 묻자, 칼서스가 손가락으로 오르가의 발등을 가리켰다.
“카일로스 영식이 벌써 세 번이나 발을 밟혔다. 왈츠의 기본은 알지만, 상대와 발을 맞춰 본 적은 없는 것 같아.”
“……어우.”
데뷔탕트 이래로 춤을 처음 춰 봤다니.
기사 일이 바빠서 그랬던 건가?
‘하긴, 해일도 그렇고 린도 그렇고 이른 나이부터 기사 일을 시작했으니까…….’
게다가 기사의 신분인지라, 다른 영애들과 달리 린은 제복을 갖춰 입고 연회에 참석했다.
혼혈에, 제복에, 귀족답지 않고 쾌활한 성격까지. 통상의 귀족들이 린을 어려워할 이유는 충분해 보였다.
‘처음일 만도 하네.’
나는 행복하다는 듯 웃으며, 엉망으로 춤을 추는 린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저도 다녀올게요.”
“뭐?”
“린이 오늘 처음 춤을 춰 보는 것 같다면서요. 그럼 초보끼리 어울려 줘야죠.”
나는 그 말을 남기고, 무대 위로 훌쩍 뛰어올라 린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 단장님!”
“단장님도 추시려고요?”
“응. 충분히 봤으니까 선수 교체하자. 이러다 오르가 네 발등에 구멍이 나겠어.”
“아하하! 제가 좀 많이 밟긴 했죠!”
린은 활기차게 웃으며 내 손을 잡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나는 린을 부드럽게 이끌어 스텝을 밟아 나가며 무대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걸음걸이가 딱딱한 게, 확실히 기사 생활을 오래 한 티가 나네.’
그 때문인지 수많은 영애들을 제치고 린에게 이목이 쏠렸다.
붉은 머리의 기사는 행복으로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만끽했다.
린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역시 단장님이 최고예요!”
나는 익살스럽게 대답했다.
“왜? 같은 왈츠 초보라서?”
“아하하! 단장님의 이런 점도 좋아요! 평생 단장님의 등을 따르고 싶어요!”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진심이 듬뿍 담겨 있어서…… 더 무서웠다.
‘이 자식이 또 은근슬쩍 단장직을 나한테 넘기려고…….’
나는 복귀 안 할 거야. 입대 안 할 거라고!
나한테 복귀하라고 백날 말해 봐라, 내가 복귀해 주나!
나는 사회적인 미소를 입가에 걸고 대꾸했다.
“왜 내 등을 쫓아올 생각만 해. 얼마든지 앞지를 수 있는데.”
그 뻔뻔한 목소리에, 주변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쪽으로 몰려들었다.
‘아,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눈을 굴리다가, 린의 허리춤을 붙잡고 공중으로 가볍게 던졌다. 엘프의 피가 섞인 덕분인지, 린은 무척 가볍게 붕 떠올랐다가 다시 내 품으로 떨어졌다.
나는 린을 받아 낸 뒤, 조금 순화된 표현으로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너는 더 잘할 수 있어. 나는 너를 믿어.”
그러니까 나를 단장직에 복귀시키려는 생각은 고이 접는 게 좋을 거야.
“너는 나보다 더 높이, 더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어. 내가 너를 믿듯, 너도 네 재능을 믿어 줬으면 좋겠어.”
“단장님…….”
환하게 웃고 있던 린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었다.
‘힝! 하는 표정 지어도 소용없어. 난 안 가. 복귀 안 할 거야. 백수로 살 거라고.’
나는 그 표정을 보며 더욱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2기사단을 잘 부탁해. 언제까지고 너의 선택을 믿고 지지해 줄게.”
“단장니이임…….”
그 말을 마지막으로, 린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린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눈물을 참다가, 이내 으아앙 소리를 내며 눈물을 터트렸다.
이제야 자신이 정말 ‘2기사단 단장’이 되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 * *
“……정말 신기한 분이라니까.”
무대 바깥으로 물러난 오르가는 뿌듯한 눈으로 린과 해일을 바라보았다.
린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고, 해일은 그런 린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본 영애들이 무대 가장자리에 서서 속닥거렸다.
“트레클리프 공자가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
“맞아. 원랜 좀 까칠하셨던 것 같은데, 기억을 잃으시더니…….”
갈색 머리의 영애가 까치발을 들어 무대 위의 해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청 다정해지신 것 같아.”
“그렇지?”
갈색 머리 영애의 곁에 서 있던 다른 영애가 소곤거렸다.
“멜리온 영애 말이야, 엘프 혼혈이라고 엄청 멸시당하고 그랬잖아.”
“맞아. 다른 영식들이 멜리온 영애한테 일부러 샴페인을 붓고 그러기도 했지.”
“그래서 데뷔탕트 이후로 쭉 발코니에만 계셨었는데…….”
이야기를 하던 영애들의 시선이 일제히 린을 향했다.
“그런데 이렇게…… 웃고 계신 거 보니까, 솔직히 좀 보기 좋지 않아?”
“맞아! 나 솔직히 멜리온 영애 귀엽게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붉은색의 곱슬머리가 너무 귀엽지 않아?”
그러자 눈처럼 새하얀 머리칼을 가진 영애가 양손을 맞잡으며 속닥였다.
“양 갈래로 땋아 놓으면 너무 예쁠 것 같지 않아? 포니테일보다 훨씬 귀여울 거야.”
“헉, 이따가 같이 말 걸어 볼까?”
“너무 좋아!”
모략이라곤 모르는 소녀들의 맑은 웃음소리를 듣던 오르가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한 번의 사건으로 이렇게나 인식이 바뀌다니.’
평판이라는 게, 이렇게 한순간에 좋아질 수도 있던가? 반대의 경우는 많이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색한 마음이 들었다.
오르가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해일을 바라보았다.
‘정말 혹시나 하는 생각이지만…….’
단장님이 그때 직접 나서지 않으셨던 건, 전부 린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혼혈이기에 멸시당하던 린이 겉돌지 않도록, 춤을 춰 달라는 우스운 요구를 하셨던 분이다.
‘그러니 가능성이 있어.’
오르가의 시선이 다시 환하게 웃는 린의 얼굴을 향했다.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정작 소꿉친구인 나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는데.’
그저 곁을 지켜 주었을 뿐……. 린을 위해 다른 귀족들을 적대하지도 못했고, 단장님처럼 린을 향한 시선을 바꿔 놓지도 못했다.
오르가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린 옆에는 단장님 같은 분이 어울리겠지.”
“…….”
“좋은 한 쌍이 될 것 같아요. 그럴 것 같지 않아요, 카스타 영식?”
오르가가 씁쓸하게 웃으며 슬쩍 칼서스에게 말을 붙였다.
“린은 단장님이랑 있을 때 가장 행복해 보여요. 그러니까 약혼을 한다면 저같이 애매한 남자보단 단장님이 훨씬 좋은 신랑이 되어 줄 수 있겠죠?”
“…….”
“고작 한 살 차이긴 하지만, 오빠 된 도리로 린이 좋은 사람에게 시집갈 수 있게 응원해 주고 싶거든요. 카스타 영식의 생각은 어때요?”
“…….”
오르가는 진심으로 그 둘이 잘되기를 비는 것처럼, 얕은 한숨을 내쉬며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나요?”
“적어도 제 눈엔 그렇게 보여요. 린도 심성이 곱고, 단장님도 속이 깊은 분이잖아요.”
칼서스는 오르가의 말을 듣고 순식간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의 날 선 시선이 무대 위에서 즐겁게 춤을 추는 해일에게 꽂혔다.
‘……짜증 나는군.’
안 그래도 견제할 놈들이 많아서 속이 끓었는데, 이제는 이 정신 나간 영식 놈까지 해일에게 사람을 붙여 주려고 하다니.
‘역시 해일의 성격이 너무 좋은 게 원인이겠지.’
사람이 올곧고 다정하니, 다른 사람들이 그 다정함에 기대고 싶어져 꼬여 드는 것일 터.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라고 종용할 수도 없으니…….’
정말, 어찌할 수가 없군.
칼서스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세상의 모든 것이 질투가 나서 머리가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