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33화 (33/101)

33.

황태자와 보드카 (3)

남은 유해를 수습하고, 신전에서 사제들이 파견되어 간단한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연회가 시작되었다.

나는 다시 제복을 갖춰 입고 홀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섰다.

‘내가 그렇게 술이 약했다니…….’

하긴, 정해일로 살 때도 난치병 환자라는 이유로 입에도 못 대 본 술이다. 그런 놈이 건강한 몸 좀 얻었다고 한순간에 술을 잘 마시게 될 리가 없지.

‘브랜디 뺏어 마실 때는 세 잔까진 적당히 알딸딸하고 좋았던 것 같은데…….’

보드카는 아무런 맛이 나지 않으니 훌훌 마시게 되어서 한 번에 확 취한 건가?

‘어찌 됐건 중요한 건 내가 술이 약하다는 거지.’

다음부턴 조심해야겠다…….

이번엔 무사히 넘어갔다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내가 시들시들한 과일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샴페인을 홀짝거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단장! 저희 왔어요!”

“단장님, 간밤 평안하셨습니까?”

경쾌하고 밝은 인사가 들려왔다.

나는 은은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럭저럭 쉬었어. 너희는 잘 쉬었고?”

“아니요. 밤새 시달렸어요.”

“어딜 가나 린이 붙잡혀서 한 잔씩 얻어먹다 보니까 아침이더라고요.”

“고생했네.”

아이돌 같다고 말하긴 했지만, 정말 아이돌 취급을 받았을 줄이야.

‘저렇게 말해도 꽤 재미있었겠지. 이맘때 애들은 주목받는 걸 좋아하니까.’

나는 오르가를 보며 물었다.

“시신은 잘 수습했어?”

“네, 유해는 잘 수습해서 도마호르 자작님께 넘겨드렸어요.”

“물론 시종분의 유해도 섞이긴 했는데……. 그게, 도무지 구분할 수가 있어야 말이죠. 뼈까지 다 재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남은 재를 전부 도마호르 자작 영식으로 판단했다는 것 같아요.”

“음, 그렇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물론 남은 재는 모두 도마호르 자작 영식이 맞다.

더비히에서 온 청년은 칼서스가 공간을 왜곡시켜 구출해 냈으니까.

‘그러고 보니 어제 그 뒤로 칼서스한테서 공유받은 메시지가 없네…….’

그 청년도 무사한지 물어보고 싶고, 칼서스 상태가 어떤지도 물어보고 싶은데. 뭔가 일이 생겨서 전언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나는 내심 칼서스를 걱정스러워하며 샴페인을 홀짝였다.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린이 재잘거리며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단장, 누가 또 왔나 봐요.”

“사람들이 엄청 웅성거리는데, 누가 온 거지? 비아넬 백작 영애라도 왔나?”

“그, 저번에 뷔레스트 자작 영식의 뺨을 쳤다던 분이요?”

“어 맞아. 뷔레스트 자작 영식이 발코니에서 다른 영애랑 술을 마시다가 들켜서 맞았댔어.”

사교계란 참 많은 일이 벌어지는 장소구나.

꼭 새벽 3시의 홍대에서 벌어지는 일을 듣고 있는 것 같네……. 여기가 대한민국인지, 아르테스 제국인지 구분……,

평온하게 잡생각을 하며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익숙한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

“…….”

……아름다운 은발과, 샛노란 눈을 가진, 내가 아는 사람 중 제일 잘생긴 바로 그 사람.

그리고 방금까지 연락이 안 되어서 걱정했던 인물인…….

‘칼서스, 너 이 미친 새끼…….’

내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눈짓으로 화를 내자, 칼서스는 부러 눈웃음을 치며 아양을 떨었다.

곁에서 칼서스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오르가가 물었다.

“단장, 아시는 분이세요?”

“……알다마다.”

그리고 사실 너도 아는 새끼야…….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굴렸다.

‘안 들킬 자신이 있는 건지, 아니면 대책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저 새끼가 나보다 미친놈이니까 가늠이 안 되네.’

그사이 칼서스가 가까이 다가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오래간만에 인사드리네요. 트레클리프 공자.”

나는 억지웃음을 쥐어짜 내며 대답했다.

“오래간, 만입니다…… 다비, 카스타…… 영식.”

칼서스는 내 떨떠름한 대답을 듣고도 방긋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이 어찌나 눈부신지, 공작새처럼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휘황찬란한 연미복을 입은 영식들이 배경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칼서스는 뻔뻔하게도 웃으며 내게 초대장 한 장을 보여 주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트레클리프 가의 초대장으로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

“트레클리프 가주님이 안타깝게도 임무로 인해 연회에 참석을 하지 못하게 되셔서……. 그 대리인으로 가정 교사인 제가 참석하게 되었지요.”

그 말을 들은 린과 오르가가 신기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와, 이분이 단장의 가정 교사님이세요? 어쩐지, 눈에 띄는 분이더라.”

“트레클리프 가의 가정 교사라니. 어느 가문 출신이신지 궁금해지네요. 혹시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카스타 백작 가문의 서자입니다.”

대답을 들은 순간 오르가의 표정이 기묘하게 구겨졌다. 나와 린은 그런 오르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오르가가 멋쩍게 한마디를 던졌다.

“아, 그, 형제가 많으신, 분이었군요…….”

“하하, 그런 편이죠.”

태연자약하게 대답한 칼서스가 고개를 숙여 귓속말을 해 주었다.

“카스타 백작은 제 자식이 몇인지도 모르는 놈이다. 워낙 방탕해서 말이지.”

“…….”

“너무나도 쉽게 서자로 이름을 올릴 수 있더군.”

……아, 그러세요?

그럼 어제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연락이 안 된 게, 그놈의 ‘신분’을 만들고 가일의 초대장을 받아 오느라 그런 거였던 거야?

나는 질색하며 속삭였다.

“참신한 미친놈 같으니…….”

“칭찬 고맙군.”

칭찬 아니야, 이 미친 새끼야…….

황당함에 차마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잠시 얼이 빠져 있던 나는 급하게 사회적인 웃음을 꾸며 낸 뒤 린에게 말을 붙였다.

“하하, 잠깐 선생님이랑 이야기 좀 하고 와도 괜찮을까?”

“무슨 이야기요?”

“으응, 아버지 임무에 관한 거라서 밖에서는 이야기를 못 할 것 같다네. 잠깐 테라스에 있다 올게.”

“아, 다녀오세요.”

린은 흔쾌히 손을 흔들며 ‘잘 다녀오세요’ 하고 다시금 인사를 했다. 나는 한 번 더 린에게 싱긋 웃어 준 뒤, 칼서스를 붙들고 테라스로 향했다.

나는 테라스에 먼저 칼서스를 밀어 넣고, 문을 닫은 다음, 커튼까지 꼼꼼하게 여민 뒤…….

표정을 바꾸며 칼서스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너 미쳤어?”

“당연하지.”

“자랑이다!”

나는 손바닥을 들어 칼서스의 어깨를 ‘짝’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왜? 아주 그냥 홀 한가운데서 내가 용이오, 하고 소리치지 그래?”

“네가 도와준다면 그럴 수 있는데.”

“나랑 장난해?!”

차라리 같이 죽자고 고사를 지내라!

이 새끼가 미쳐 가지고 어?! 귀족들이 모인 데까지 쳐들어오고 난리야!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노려보기 시작하자, 칼서스가 침착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해일.”

“왜!”

“기억 안 나나?”

“……뭐?”

“어제 있던 일 말이다.”

“…….”

칼서스는 거기까지 말하곤,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피식 웃어 보였다.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질문을 던졌다.

“저 어제 사고 쳤어요?”

“쳤지.”

갑자기 공손해진 질문에, 칼서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슥슥 쓰다듬었다. 곱슬곱슬한 금발의 머리칼이 칼서스의 하얀 손바닥 아래에서 엉망이 되어 갔다.

‘시발, 시발, 시발, 황태자는 나한테 아무런 사고도 안 쳤다고 그랬는데.’

아니야, 그런데 시종장이 날 쳐다보던 표정을 보면 뭔가가 있긴 했던 것 같은데.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설마 태자 전하한테 말실수라도 한 거예요?”

“비슷한 건 했지.”

칼서스는 상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펑펑 울었거든. 그놈이 보는 앞에서.”

“…….”

“울며불며 떼쓰고, 시끄럽다고 소리도 지르고……. 그놈이 조금만 더 심성이 나빴으면 넌 이미 사형대에 올라 있었을 거다.”

……엄마. 내가 황태자한테 닥치라고 그랬대.

엄마, 어쩌면 금방 내가 엄마를 보러 갈지도 모르겠어…….

나는 핏기가 빠져 허옇게 얼굴이 질린 채로, 힘없이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설마 시종장도……?”

“그래, 그놈도 네가 울며 떼를 쓰는 꼴을 같이 봤다. 황태자가 함구령을 내리지 않았으면…… 너는 사교계에 영영 출입하지 못하는 몸이 됐을지도 모르겠군.”

그 순간 내가 읽어 온 역사서에 적혀 있던 수많은 죽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 이제 개작두로 썰리는 거야? 아니면 능지처참 당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동탁처럼 인간 캔들이 되어서 등불로 쓰이는 건가?’

생각이 이어질수록 점점 피가 싸늘하게 식었고, 손발이 덜덜 떨리며 눈물이 새어 나왔다.

나는 아이처럼 훌쩍거리며 칼서스를 올려다보았다.

“……저 이제 어떡해요? 저 죽는 거예요?”

“어떡하긴.”

칼서스가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황태자가 언제 그 일을 들먹이며 너를 사형대에 올릴지 모르니…….”

“…….”

“내가 ‘책임’지고 너를 지켜 줘야지.”

상쾌하게 웃는 얼굴이 그렇게 빛나 보인 건 처음이었다.

나는 최애를 영접하는 오타쿠처럼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들이켰다.

“그래도 네가 내 세계수인데. 내가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그 말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한마디가 튀어 나갔다.

“형이 최고예요…….”

“큭큭, 큭큭큭…….”

그 말을 들은 칼서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내 어깨에 이마를 댄 채 끅끅 웃어 댔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젠 내가 을이로구나…….’

잘 가라, 갑이었던 인생이여.

짧았지만 달콤했다…….

안전은 보장받았으나, 기묘하게도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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