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32화 (32/101)

32.

황태자의 보드카 (2)

“누가 누굴 지킨단 건지…….”

칼서스가 공간을 열어 단숨에 황태자의 방 안으로 이동했다. 불퉁한 표정을 지은 그가 침대 옆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이봐, 해일.”

“으음…….”

“해일.”

그 목소리에 비몽사몽간을 헤매는 해일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뜨였다.

“……칼서스?”

“그래. 나다. 정신 좀 차려 봐.”

해일은 가늘게 뜬 눈을 몇 번 끔뻑거리며 칼서스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어 웅얼거리며 말했다.

“다비 얼굴 말고, 원래 얼굴…….”

“…….”

해일의 하얀 얼굴 위로 배시시한 미소가 걸렸다.

“칼서스 얼굴이 더 좋아요…….”

살가운 목소리를 들은 칼서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낮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부터 열까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인간 같으니…….

한숨을 푹 내쉰 칼서스가 침대 위에 무릎을 얹으며 알 수 없는 말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금세 하얗던 머리칼이 검어지고, 둥글던 귀 끝이 뾰족하게 변했다.

칼서스가 해일의 곁으로 다가가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 네가 바라던 얼굴이다.”

“…….”

“그러니 이제 좀 정신을 차리……,”

칼서스가 잔소리를 퍼부으려던 찰나, 해일의 양팔이 뻗어져 나와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중심을 잃은 칼서스가 그대로 해일의 위로 겹쳐지며 쓰러졌다.

“너……!”

“화내지 마…….”

칼서스의 귀 바로 옆에서,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칼서스랑 절교 못 한단 말이에요……. 걱정되니까…….”

“…….”

“그러니까 화내지 마요……. 화가 나도 소리 지르지 말고,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천천히 말해 주면 되잖아. 나도 사람이라 말하면 다 알아들어…….”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해일의 손끝이 부드럽게 칼서스의 어깨를 도닥거렸다. 깃털이 스치는 듯한 움직임에는 따듯한 다정함이 담뿍 담겨 있어서, 날카롭게 얼어붙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칼서스가 제 아래에서 색색 숨을 내쉬는 해일에게 말을 붙였다.

“해일.”

“응……?”

“키스할까?”

질문을 들은 해일이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허락을 받은 칼서스가 조심스럽게 해일의 목덜미 아래쪽에 손을 받친 뒤 입술을 겹쳤다.

“으음…….”

비단처럼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이 해일의 뺨을 간지럽히며 흩어졌다. 고개가 비틀리며 입술이 벌어지자, 칼서스가 해일의 잇새로 혀를 밀어 넣으며 부드럽게 입 안을 휘저었다.

그와 동시에 칼서스의 이성의 경계가 부드럽게 뭉개지며 외면하고 있던 본능적인 쾌감이 느리게 온몸을 적셨다.

“읍, 하…….”

“흐읍…….”

이렇게 술에 거나하게 취했는데도 가이딩을 거부하지 않는 건가.

싫다거나, 귀찮다거나, 별로 키스하고 싶지 않다며 밀어낸 적이 없으니……. 도리어 그의 생각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나를 아끼기에 가이딩을 거부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지금껏 해일이 밟아온 행보로 추측해 보자면, 해일이 가이딩을 거부하지 않는 건……. 나에게 가이딩이 ‘필요하기 때문’에 거부하지 않는 것뿐, 별다른 이유는 없을 터다.

‘그 말인즉슨…… 나를 제외한 다른 놈들에게도 가이딩이 필요하다고 하면, 해일은 그에게도 기꺼이 몸을 허락할 거란 뜻이다.’

칼서스가 포악하게 해일의 혀를 빨아올리며 숨을 씨근덕거렸다.

‘그것이 싫다.’

나 이외에, 다른 존재에게 몸을 허락할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만으로도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읍, 으응……?”

흘러가던 가이딩이 거부되고, 얽혀 있던 혀가 더욱 진득하게 해일의 입 천장을 핥았다.

‘내가 유일했으면 해. 네게 있어서 ‘나’라는 존재가 특별했으면 한다.’

단순히 나라는 ‘존재’가 너를 필요로 하기에, 허락해 주는 게 아니기를 바라.

“아…….”

오로지 해일을 향한 마음으로 가득한, 그저 키스일 뿐인 행위가 이어지자, 칼서스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팔뚝이 흠칫거렸다. 맞붙은 배가 움찔거리며, 순식간에 달아오른 숨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칼서스가 입술을 떼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공평하게 아껴 주는 사람만 같다.’

나도, 너를 따르는 많은 이들도.

네 그 다정한 면모에 이끌렸던 것이겠으나…….

“……이제는 아니야.”

“어……?”

“나는 네가 아끼는 모든 것을 증오한다.”

칼서스의 입술이 새가 쪼는 것처럼, 아주 가볍게 해일의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나에게는 네가 유일한데, 너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상냥해서……. 나는 네 주위를 맴도는 모든 것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어.”

해일이 몽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해일이 칼서스의 목덜미에 둘렀던 팔을 풀더니, 양손으로 칼서스의 뺨을 부드럽게 쥐었다.

“내 용은 칼서스 하나밖에 없는데, 내가 누굴 더 들였다는 거예요?”

“…….”

“나 결혼도 안 했고, 입양도 안 했는데…….”

……린이랑 오르가 말하는 건가? 그런데 걔들은 부하라서 어쩔 수 없는걸.

해일이 의아하게 중얼거리며 샛노란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이 난 것처럼 ‘아’ 하고 탄성을 내뱉더니, 칼서스의 몸을 끌어안고 데구르르 옆으로 굴렀다.

이제는 칼서스가 아래에 깔린 모습이 되었다.

해일은 제 아래에 짓눌린 칼서스의 가슴팍 위로 고개를 푹 늘어뜨렸다.

“……그것 때문에 섭섭해서 도망간다고 하면 또 화낼 거예요. 나는 칼서스를 책임지려고 노력하는데, 왜 자꾸 칼서스는 도망가는 건지 모르겠어…….”

해일의 양손이 살금살금 움직여 칼서스의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이렇게 하면 칼서스가 도망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맞닿은 가슴이 크게 들썩이더니, 해일의 잇새로 푸우 하고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내가 그렇게 믿기 힘든 사람인가……? 칼서스, 내가 그렇게 신용이 없어 보여요?”

“…….”

“이래 봬도 저도 사회인이라고요……. 책임의 무게도 알고 있어요……. 책임진다고 말해 놓고 도망가거나, 하지 않……아요…….”

말하는 도중 가물가물하게 감기기 시작한 눈이,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다시 감겼다. 곧 칼서스의 가슴팍 위에서 고른 색색 소리가 들려왔다.

칼서스는 얽힌 손가락을 힘주어 잡으며 중얼거렸다.

“책임의 무게라…….”

칼서스는 단어를 음미하듯,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를 씹듯이 중얼거렸다.

“그래, 책임은 제법 무거운 편이지.”

이야기를 마친 칼서스가 엉큼한 생각이라도 떠올린 것처럼,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내가 무슨 사고를 친 거지……. 취해서 황태자한테 입술이라도 부볐나……?’

칼서스 때문에 키스하는 게 너무 익숙해져서, 인사랍시고 주둥이를 갖다 댄 건 아니겠지……?

나는 새하얗게 질린 몰골로, 옷을 갖춰 입고 방에서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때마침 황태자와 시종장도 바로 옆방의 문을 열고 나왔다. 나와 황태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황태자가 산뜻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 해일 경. 좋은 아침입니다.”

“황, 황태자 전하……. 전하의 하루에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 간밤에 강녕하셨습니까?”

“네, 저는 잘 쉬었습니다. 해일 경은 푹 주무셨나요?”

“덕, 덕분에요…….”

내가 어정쩡한 태도로 인사를 건네자, 황태자의 곁에 서 있던 시종장이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 눈빛에 기가 죽은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으아악, 시종장이 나 엄청 노려보잖아. 나 진짜 사고 쳤나 봐!’

나는 쭈뼛거리며 황태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어제 제가 무슨 짓을 했기에…….”

“아, 방을 빌려드린 것 말입니까?”

황태자는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술을 드시다가 갑자기 곯아떨어지셔서, 그냥 제 방에서 재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니까요.”

“아…….”

그냥 곯아떨어졌다니, 다행이다…….

“그거, 다행이네요…….”

그런데, 그러면 내 입술은 왜 쓰라린 거죠……?

내가 자다가 어디 갖다 박기라도 한 걸까……?

쓸데없는 고민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자, 다시금 황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런데 해일 경.”

“네, 전하.”

“폐하께서 해일 경과 멜리온 경, 그리고 카일로스 경께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네?”

……내가 뭘 했다고 황제한테 감사를 받아?

나는 그냥 서 있었을 뿐인데? 뒤처리는 린이랑 오르가가 다 했는데?

나는 어리둥절하게 대답했다.

“저는,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에이, 하신 게 없긴요. 멜리온 경과 카일로스 경에게 알맞은 지시를 내려서 많은 사람들을 구해 주셨잖아요.”

그거 입만 조금 털었다는 소리잖아요…….

아무리 들어도 내가 잘한 일은 전혀 없는 것 같은데요!

‘양심 찔려…….’

양심의 가책을 느끼자, 점점 표정이 굳어 갔다.

황태자는 내 표정이 썩어들어 가든 말든, 상쾌한 낯으로 할 말을 마저 이어 갔다.

“아무래도 금품이나 영지를 하사받게 되실 것 같지 싶은데, 혹시 원하시는 게 있다면 따로 언질 주세요. 제가 폐하께 잘 말씀드릴 수 있으니까요.”

“……니다.”

“네?”

나는 개미가 기어가는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딱히 바라는 게 없습니다……. 영지도, 금품도, 귀한 진상품도 바라지 않아요. 이런 일로 주목받고 있다는 게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나는…… 그냥 너희가 나한테 신경을 쓰는 게 너무 싫어…….

그러니까 나한테서 신경 좀 꺼 줘…….

하지만 황태자는 내 대답을 다르게 해석한 건지, 금방이라도 빛이 뿜어져 나올 것 같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부유한 트레클리프 가에서 태어나셨음에도 이렇게나 소탈하시다니……. 정말 모든 귀족의 본보기가 되시는 분이시군요.”

“하하…… 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 얼굴에 띄운 그 반짝반짝 효과 좀 치워 주세요. 눈부셔요…….

‘너무 착한 것도, 되레 거북하게 느껴질 수가 있구나.’

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한숨과 함께 목 뒤로 씹어 삼켰다.

‘입 밖으로 뱉으면 황족 모독이라 사형이다. 입 밖으로 뱉으면 황족 모독이라 사형이다…….’

뱉으면 그날로 내 목숨이 끝장나기 때문이었다.

그럼 삼켜야지.

별수 있나.

0